기계유씨(杞溪兪氏)국가 공무직 구대와 현대 현황 기계유씨(杞溪兪氏)의시조(始祖)는 유삼재(兪三宰)다 신라(新羅)때 좌아찬(坐阿飡)이란 벼슬을 하였는데 자세(仔細)한 것은 전하여지지 않고 있다. 그 후손(後孫)에 유의신(兪義臣)이란 분이 신라(新羅)가 망하매 고려(高麗)에 복종(僕從)하지 아니하니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미워하여 기계호장(杞溪戶長)으로 좌천(左遷)하였다. 그후 유의신(兪義臣)공의 후손(後孫)들이 기계인(杞溪人)이 되었는데 신라시대(新羅時代) 기계유씨(杞溪兪氏) 세거지(世居地)인 경북 포항시 기계고현(慶北 浦項市 杞溪古賢)에 시조(始祖) 유허비(遺虛憊)가 있다. 기계유씨(杞溪兪氏)는 벼슬에 뜻을 두지 않는 까닭에 고려전기(高麗前期)에는 여러 대 은둔생활(隱遁生活)을 했다. 고려후기(高麗後期)에 이르러 그 후손(後孫)의 일족(一族)이 경기도 남쪽지방(京畿道 南쪽地方)에 이주(移住)하면서 다시 벼슬에 뜻을 두어 유득선(兪得瑄 좌복야(左僕射), 유선(兪善) 봉익대부판도판서(奉翊大夫版圖判書), 유승계(兪承桂 봉익대부판도판서(奉翊大夫版圖判書) 3대(三代)가 크게 현달(顯達)하여 기계유씨(杞溪兪氏)는 다시 두각(頭角)을 나타내기 시작(始作)했다. 유승계(兪承桂)가 아들 유천경(兪千慶) 전서(全書), 유성리(兪成利) 군기시사(軍器寺事), 유성보(兪成保) 부정(副正), 유성복(兪成福)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 등 4형제(四兄弟)를 두어 번창(繁昌)했으나 마침내 고려(高麗)가 망(望)했다. 조선초(朝鮮初)에 들어와서 제일(第一) 먼저 두각(頭角)을 나타낸 분은 유성리(兪成利) 군기시사(軍器寺事)의 손자(孫子) 유효통(兪孝通)이다. 그는 정인지(鄭麟趾)와 같이 중과(重科)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고 세종시대(世宗時代) 집현전(集賢殿)의 제학(提學)이 되었으며 노중례(盧重禮)와 함께 『향약채집월령(鄕藥採集月令)』등을 약술(略述)했다. 이 책은 우리나라 약용식물(藥用植物)을 맨 처음 정리(正理)한 의서()醫書)로 유명(有名)하다.그러나 그의 장자(長子) 유목로(兪牧老)의 부인(婦人)이 영의정(領議政) 황보인(皇甫仁)의 딸인 관계(關契)로 황보인(皇甫仁)이 수양대군당(首陽大君黨)에 의해 참변(慘變)을 당한 뒤 유효통(兪孝通)일가(一家)도 박해(迫害)를 받았다. 이때 사육신(死六臣)이 한사람인 유응부(兪應孚 忠穆公. 증병조판서(贈兵曹判書)는 우리나라 역사상(歷史上) 충절(忠節)을 상징(象徵)하는 대표적(代表的) 인물(人物)이라 그는 일찍이 무과급제(武科及第), 평안도절제사(平安都節制使)를 거쳐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員師)가 되었는데 세조(世祖)를 제거(除去)하고 억울(抑鬱)하게 쫓겨난 단종(端宗)을 복위(復位)시키려던 운동(運動)을 벌이다 발각(發覺)되어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등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세조초(世祖初)에 문과급제(文科及第)하여 부제학(副提學)에 이른 학촌(學村) 유진(兪鎭)은 역학(易學)에 정통(正統)하였다. 또 유호인(兪好仁) 은 성종조(成宗朝)에 문과급제(文科及第)하고 호당(戶當)에 뽑히여 관이(貫耳) 교리(敎理), 장령(掌令)에 이르렀다. 그는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인(文人)으로 학문(學文)이 높았고, 시문(詩文)에 능(能)했으며 명필(名筆)로도 이름을 떨쳤다. 더욱이 효성(孝誠)이 극진(極盡)하였다. 유성복(兪成福)의 손자(孫子) 유효통(兪孝通)의 재종제(再從弟)인 유해(兪解)는 성삼문(成三問)의 아버지 성승(成勝)의 동서간(同壻間)이다. 그는 일찍이 세종(世宗)때 진사(進士)에 급제(及第)하였으나 24세에 조졸(早卒)했다. 그러나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서면서 기계유씨(杞溪兪氏)를명문청족(名門淸族)으로 발전(發展)시킨 것은 사실상(事實相) 유해(兪解)의 자손(子孫)들이었다. 그의 아들 유기창(兪起昌)은 성삼문(成三問)과 이종(姨從)인 관계(關契)로 화가 인척(人尺)에 미처, 젊어서는 이리저리 도피생활(桃皮生活)을 하다가 성종(成宗)때 무과급제(武科及第)후 여려 지방관(地方官)을 거쳐 첨지중추(僉知中樞)에 이르렀다. 그러나 연산말(燕山末) 왕의 난폭(亂暴)한 정치(政治)를 극간(極諫)하다가 죽은 영의정(領議政) 성준(成俊)의 친당(親堂)으로 몰려 거제도(巨濟島)에 유배(流配)되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 후(後) 조정(朝政)에서 병조참의(兵曹參議)를 제수(除授)하였으나 취임(就任)하지 아니하고 향리(鄕里) 비인(非人)으로 돌아가 생을 마치니 세상(世上)에서 연산(燕山) 때의 4절신(四節臣)이라 일컬었다. 후(後)에 충청도유림(忠淸道儒林)이 중심(中心)이 되어 비인(非人)에 청절사(淸節祠)를창건(創建)하고 유기창(兪起昌)과 그이 아들 정당(政堂) 유여림(兪汝霖)을 같이 배향(配享)하여 그 청덕(淸德)을 추모(追慕)했다. 정당(政堂) 유여림(兪汝霖)은 그의 아우 유여주(兪汝舟)와 더불어 중종(中宗)때 이름난 명신(名臣)이요 명사(名師)였다 정당(政堂) 유여림(汝霖)은 연산(燕山)때 문과급제(文科及第), 중종반정(中宗反正) 후 벼슬길에 나서 사간(司諫)이 되었을 때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났다. 그는 심연원(沈連源) 등과 함께 조정암(趙靜庵)(광조(光祖)과 더불어 같이 처벌(處罰)해 줄 것을 계하다 파직(罷職)되었다 그 후 형조판서(刑曹判書)가 되었을 때 김안로(金安老)의 죄를 논핵(論劾)하다 도리어 파직(罷職)되어 향리(鄕里)로 추방(秋芳)되었다. 7년 후에 그는 다시(多時) 기용(氣勇)되어 예조판서(禮曹判書)가 되었으나 얼마 아니 되어 별세(別世)했다. 정당(政堂) 유여림(兪汝霖)은 천성(淺成)이 담박(淡泊)하고 부귀영화(富貴榮華)를 꺼려 7년간(七年間)의 은둔생활(隱遁生活)을 할 때도 평범(平凡)한 촌노(村老)와 같았다 한다. 정당(政堂) 유여림(兪汝霖)의 아우 유여주(兪汝舟)는 중종(中宗)때 조정암(趙靜庵) 광조(光祖)이 주장(主張)하여 설치(設置)한 현량과(賢良科)에 선발(選拔)되었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 후 향리(鄕里)인 비인(非人)으로 낙향(落鄕)하여 다시(多時)는 나오지 아니하였다. 유여주(兪汝舟)는 아호(雅號)를 선취처사(仙趣處士) 또는 임벽당(林碧堂)이라 했다. 그의 부인(婦人) 김씨(金氏)는 남편(男便)의 아호(雅號)가 임벽당(林碧堂)인 연유로 임벽당김씨(林碧堂金氏)라 하는데 신사임당(申師任堂), 허난설헌(許蘭雪軒)과 더불어 조선조(朝鮮朝) 3대(三代) 명원 시인(詩人)으로 일컬어진다. 유여림(兪汝霖)의 아들 유강(兪絳)은 호조판서(戶曹判書) 숙민공(肅敏公)이요, 그의 손자(孫子)요 유강(兪絳)의 조카인 유홍(兪泓)은 좌의정(左議政) 충목공이다. 유강(兪絳)은 중종(宗中) 때 문과급제(文科及第), 벼슬길에 올랐으나 관로(管路)가 순탄(順坦)치는 못하였다. 그는 부정(不正)을 보고 참지(參知) 못하는 천성(天性)이라 당시(當時) 외척(外戚) 권신(權臣)인 윤원형(尹元衡)을 논핵(論劾)하다. 여러번 지방관찰사(地方觀察使)로 축출(逐出)되고 또 위험(危險)한 지경(枝莖)을 넘기기도 했는데 윤원형(尹元衡)이 죽은 후 중앙(中央)에 복귀(復歸)하여 한성판윤(漢城判尹), 형조판서(刑曹判書), 호조판서(戶曹判書)가 되었다. 유강(兪絳)은 스스로 30년 입조(入朝)에 한번도 권세(權勢) 있는 집 문전(門前)에 발을 들여놓은 일이 없음을 말하면서 이와 같은 몸가짐을 자손(子孫)들에게 교훈(敎訓)으로 남겼다. 유홍(兪泓 충목공(忠穆公) 좌의정(左議政)은 명종(明宗)때 문과급제(文科及第) 한림(翰林), 전랑(殿廊), 삼사(三使)를 거쳐 충청(忠淸), 전라(全羅), 함경(咸慶), 평안도(平安道 )등 5도(五道) 관찰사(觀察使)를 역임(歷任)했으며 임진란(壬辰亂)이 일어나자 이조판서(吏曹判書)로서 입상(臨床)하여 좌의정(左議政)에 이르렀다. 또 광국일등(光國一等), 평난이등(平亂二等)의 공훈(功勳)으로 기성부원군(杞城府院君)에 책봉(冊封)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시문(詩文)에도 능했다. 유홍(兪泓 충목공(忠穆公) 좌의정(左議政)이 일찍이 과거(科擧)의 시관(試官)이 되었을 때 응시자(應試者) 중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답안(踏印)이 문과(文科) 소과(小科)에서 모두 가장 뛰어났다. 그러나 채점(採點)을 한 시관회의(試官會議)에서 모든시관(試官)들이 들고 일어나 이이(李珥)는 지난날 불문(佛文)에 들어갔던 과오(過誤)가 있으므로 장원(栗谷) 이이(李珥)을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홍(兪泓 충목공(忠穆公) 좌의정(左議政)은 "옛날 성현(聖賢)들도 젊은 날의 과오(過誤)는 모두 있었다. 이제 여러분들이 이이의 젊은 날의 일을 문제(問題) 삼는다는 것은 오히려 여러분의 잘못이 더 크다" 고 논박(論駁)하여 마침내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장원(栗谷)으로 뽑았다. 유홍(兪泓 충목공(忠穆公) 좌의정(左議政)은 이만큼 사람을 알아보는 식견(息肩)이 높았다. 유여림(兪汝霖)의 증손중(曾孫中)에서 유대수(兪大脩 문과장령(文科將令), 유대진(兪大進 문과참의(文科參議) 유대정(兪大禎 문과참판(文科參判), 유대경(大儆 문과군수(文科郡守), 유대건(大建문관대사헌(文官大司憲) 등이 더욱 출중(出衆)하여 선조조(宣祖朝)와 광해조(光海朝)에 걸쳐 각각(各各) 크게 활약(活躍)했다. 광해조(光海朝)와 인조조(仁祖朝)에 걸쳐서는 좌의정(左議政) 유홍(兪泓)의 손자(孫子) 유백증(兪伯曾 이조참판(吏曺參判), 충경공(忠穆公)과 호조판서(戶曹判書) 유강(兪絳)의 증손(曾孫) 유성증(兪省曾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이 직간(直諫)과 충의(忠義)로 이름을 떨쳤다. 유백증(兪伯曾)은 광해조(光海朝) 초(初)에 문과급제(文科及第)하였으나 난정(亂政)에 벼슬하는 것을 즐겨하지 않고, 폐모사건(廢母事件)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내려갔다.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참여(參與)하여 3등공신(三等功臣)이 되고 사간(司諫)에 특배(特配)되었는데 이때부터 그의 논핵(論劾)과 직간(直諫)은 조정(朝廷)을 진동(振動)시켰다. 병자호란(丙子胡亂)때 남한산성(南漢山城)에 호종(護從)하여 협수사(協修士)로서 대신(大臣)들의 오국(誤國)을 통박(痛迫)하며 척화(斥和)를 주장(主張)했다. 그의 척화주장(斥和主張)은 청사(廳舍)를 죽이자고 할 정도(程道)로 격렬(激烈)했다. 유관이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이르고 영의정(領議政)에 가증(加贈)되었다. 유성증(兪省曾)은 광해조(光海朝)때 문과(文科)에 장원급제(壯元及第)했다. 광해말년(光海末年)에 호조좌랑(戶曹佐郞)으로서 이이첨(李爾瞻)을 공박(公拍)하는 영남유생(嶺南儒生)들의 소를 대작(大爵)했다는 혐의(嫌疑)를 받고 하옥(下獄)되었다.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풀려나 지평(持平)이되고 승지(承旨)로 승진(昇進), 병자란(丙子亂)때는 강화(江華)의 파수대장(把守大將)으로 분전(奮戰)했다. 이어 참의(參議) 도승지(都承旨)등을 거쳐 관이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에 이르렀다. 유성증(省曾)의 두 아들 유황(兪榥 봉주(鳳洲)과 유철(兪㯙 취옹(醉翁)그리고 그의 재종질(再從姪) 유계(兪棨 市南)는 인조(仁祖) 11년 같은 해에 모두 문과급제(文科及第) 했다. 유황(兪榥)은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의 문하(門下)에서 학문(學問)을 닦았고, 병자호란( 丙子胡亂)때는 정언으로 남한산성에 호종하여 척화를 주장했다. 또 청이 척화신들을 압송하려고 할 때 이에 자원하기도 했다. 그는 척화로 말미암아 단양에 유배되고 관이 전라도관찰사에 이르렀으며 충간공(忠簡公)의 시호를 받았다. 유철(?)은 병자호란(丙子胡亂)때 이조좌랑(吏曹佐郞)으로 남한산성(南漢山城)에 호종(護從)하였다. 그 후 누진(累進)하여 39세에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가 되어 성망(盛望)이 높았으나 대사간(大司諫)으로 서변옥사(西邊獄舍)에 대해 진언(眞言)하다가 효종(孝宗)의 진노(震怒)를 샀다. 현종조(顯宗朝)에 다시(多時) 복관(復官)되어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 이조참판(吏曹參判)등을 거쳐 관이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다. 유계(兪棨)는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의 문인(門人)으로 호(號)를 시남(市南)이라 하며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윤선거(尹宣擧)·이유태(李惟泰)등과 더불어 세칭(世稱) 충청도 산림오현(忠淸道 山林五賢)이라 일컫는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는 척화(斥和)를 주장(主張)하다가 임천(林川)에 유배(流配)되고 효종초(孝宗初)에는 인조(仁祖)의 시호문제(諡號問題)로 종성(鍾城)에 유배(流配)되었다. 방면(放免) 후(後) 학문(學問)과 저술(著述)에 전심(傳心)하다가 다시(多時) 조정(朝政)에 들어가 효종(孝宗)의 북벌계획(北伐計劃)에 적극(積極) 참여(參與)하였다. 현종초(顯宗初) 예론시비(禮論是非)에는 송시열(宋時烈)과 동조(同調)했다. 유계(兪棨)는 도덕(道德), 절의(節義), 학문(學問) 문장(文章)에 있어 세인(世人)이 추앙(推仰)을 받았다. 문충공(文忠公)의 시호(諡號)를 받고 전국(全國) 여러 서원(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저서(著書)에 강거문답(江居問答), 가례원류(家禮源流), 여사제강(麗史提綱), 시남집(市南集)등(等)이 있다. 다음 숙종조(肅宗朝)에서는 유헌(兪櫶 참판(參判), 유명일(兪命一 문과부윤(文科府尹), 유하익(兪夏益 예조판서(禮曹判書), 유하겸(兪夏謙 문과승지(文科承旨), 유명웅(兪命雄 좌참찬(左參贊), 유명홍(兪命弘 예조판서(禮曹判書), 유명응(兪命凝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등(等)이 크게 활약(活躍)하였다. 기계인(杞溪人)의 명성(名聲)을 더 한층 빛낸 시대(時代)는 영조시대(英祖時代)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유척기(兪拓基문익공(文翼公) 영의정(領議政)가 일찍이 문과급제(文科及第)하여 정치인(政治人)으로 두각(頭角)을 나타내어 영조(英祖) 15년에 우의정(右議政)이 되고 이어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러 영조(英祖) 중흥사업(中興事業)의 주역(主役)이 되었으며 30년간(年間) 노론(老論) 집권당(執權黨)의 영수(領水)로 임했기 때문이다. 유척기(兪拓基)의 정치적(政治的) 영향력(影響力)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종질(從姪) 유언호(兪彦鎬 忠文公, 좌의정(左議政), 서(壻) 윤시동(尹蓍東) 우의정(右議政), 조동회 이조판서(吏曹判書)등(等)을 통하여 정조시대(正祖時代) 노론(老論) 청류파(淸流派)로 이어졌던 것이다. 유척기(兪拓基)의 호(號)는 지수재(知守齋)이다. 영조시대(英祖時代) 유척기(兪拓基)와 쌍벽(雙璧)을 이룬 유최기(兪最基)는 그의 종형(從兄)이다. 유최기(兪最基)도 일찍이 문과급제(文科及第)하여 좌참찬(左參贊)에 이르렀다. 그는 학문(學問)이 깊고 시문(詩文)에 능(能)하여 영조(英祖)가 항상(恒常) 유신(維新)으로 대우(大優)했다. 영조시대(英祖時代)에는 기계문중(杞溪門中)에 많은 인물(人物)들이 배출(輩出)되어 유건기(兪健基 참판(參判), 유우기(兪宇基 승지(承旨), 유언술(兪彦述 대사헌(大司憲), 유언국(兪彦國 참판(參判), 유언민(兪彦民 대사헌(大司憲), 유한소(兪漢蕭 함경도관찰사(咸慶道觀察使)등이 크게 활약(活躍)하였는데 특히 유언술(兪彦述)은 시문(詩文)과 직간(直諫)으로 이름을 떨쳤다. 영조시대(英祖時代)에 이어 정조시대(正祖時代)에도 기계유씨(杞溪兪氏)의 황금시대(黃金時代)는 계속(繫束)되었다. 정조시대(正祖時代) 노론(老論) 청류파(淸流派)를 주도(主導)했던 유언호(兪彦鎬 충문공(忠文公) 좌의정(左議政)을 비롯해서 유한모(兪漢謨 형조판서(刑曹判書), 유악주(兪岳柱 대사간(大司諫), 유한인(兪漢人 장령(將令), 유한령(兪漢寧 예조참의(禮曹參議) 등이 활약(活躍)했고 한편 학계(學界)에서는 대재(大齋) 유언집(兪彦鏶 이조참의(吏曹參議), 저암(著庵) 유한준(兪漢雋 형조참의(刑曹參議)이 크게 이름을 떨쳤다. 특히 유언호(兪彦鎬 충문공 좌의정(左議政)는 호당(湖堂)에 뽑힌 준재(俊才)일 뿐 아니라 백부(伯父) 유최기(兪最基), 당숙(堂叔) 유척기(兪拓基)의 후광(後光)을 이어받아 정조초(正祖初) 새로 설치(設置)된 막강(莫强)한 권력(勸力)을 가진 규장각(奎章閣)의 직제학(直提學)으로 정조(正祖)의 신임(新任)을 받았다. 또 그는 개성유수(開成留守)로 자원(自願)해 가서 곤궁(壼宮)에 빠진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을 구해(救解)준 일도 있다. 그는 정조(正祖)의 문화정치(文化政治)에 큰 공을 세워 정조묘정(正祖廟廷)에 배향(配享)되었다. 순조조(純祖朝)에서 조선조말(朝鮮朝末)까지 왕권(王權)은 쇠퇴(衰頹)해 지고 대신(大臣) 외척세도정치(外戚勢道政治)가 등장(等張)하여 나라의 형편(形便)은 기울(氣鬱)어 갔다. 그러나 이런가운데서도 기계유씨(杞溪兪氏)는 독자적(獨自的)인 노선(路線)을 견지(堅持)해 가며 유장환(兪章煥) 예조판서(禮曹判書), 유치숭(兪致崇) 형조판서(刑曹判書), 유진오(兪鎭五) 좌찬성(左贊成), 유성환(兪성煥) 판서(判書), 유치선(兪致善) 공조판서(工曹判書)등을 비롯해서 그밖에도 수많은 인물(人物)을 배출(輩出)해서 조선조 명문의 면모를 과시했다. 그리하여 기계유씨(杞溪兪氏)는 조선조(朝鮮朝)에서 문과(文科) 98인, 상신(相臣) 정성(政丞) 3인, 판서(判書) 12인을 기록(記錄)하고 있다. 기계유씨(杞溪兪氏)는 학문(學問)에서 더욱 그 빛을 발휘(發揮)하여 조선중기(朝鮮中期) 이후(以後) 혁혁(奕奕)한 연원(淵源)을 계승(繼承)하고 있다. 시남(市南) 유계(兪棨)를 비롯하여 자교당 유명뢰(慈敎堂 兪命賚), 겸산 유숙기(兼山 兪肅基), 대재(大齋) 유언집(兪彦鏶 이조참의(吏曹參議), 저암(著庵) 유한준(兪漢雋 형조참의(刑曹參議), 봉서 유신환(鳳捿 兪莘煥) 등은 조선중기(朝鮮中期) 이후(以後) 국학(國學)과 후진(後進)에게 큰 영향(影響)을 끼쳤다. 시남(市南) 유계(兪棨)는 사계(沙溪) 신독재(愼獨齋)의 문인(文人)이나, 율곡(栗谷)이 학문(學問)을 추앙(推仰)하여 독특(獨特)한 학풍(學風)을 확립(確立)하였고, 유명뢰(兪命賚),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의 문하(門下)에서 겸산(兼山) 유숙기(兪肅基)은 삼연(三淵)김창흡(金昌翕)의 문하(門下)에서 유언집(兪彦鏶)은 도암(陶菴) 이재(李縡)의 문하(門下)에서 유한준(兪漢雋)은 뢰연 지암(止庵)의 문하(門下)에서 그리고 유신환(兪莘煥)은 노주(老洲) 오희상(吳熙常)의 문하(門下)에서 각각(各各) 학문(學問)을 닦아 대성(大姓)한 학자(學者)들이다. 서화(書畵)에 있어서도 기원 유한지(綺園 兪漢芝), 하산 유치봉(霞山 致鳳), 우당 유창환(愚堂 兪昌煥), 창사 유진찬(蒼史 兪鎭贊) 등이 각각(各各) 독자적(獨自的)인 개성(改成)의 세계(世界)를 이루었다. 유한지(兪漢芝)는 전(篆), 예(隸)에 있어 능했으며 하산 유치봉(霞山 兪致鳳)은 산수(山水)에 또 창사 유진찬(蒼史 兪鎭贊)은 매화(梅花)에 능했다. 시대(時代)가 변천하면서 구체제를 부정하고 우리나라에 신지식과 개화사상을 도입하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한 이는 유길준(矩堂 兪吉濬)이었다. 그는 한국 최초의 일본과 미국의 유학생이며 한국 최초로 국한문을 혼용하여 현대문으로 서유견문을 저술하였다. 또 내무대신으로 갑오개혁을 주도하였으나 12년의 망명에서 귀국해서는 교육과 계몽사업에 전념했다. 저서에『서유견문』,『유길준전서』(兪吉濬傳書)가 있다. 그밖에 유기환(兪箕煥) 외무대신(外務臺臣), 유성준(兪星濬) 내무협판(內務協辦)등이 한말(韓末)의 인물(人物)로 꼽히고 있다. 일제시대(日帝時代)에서 해방초(解放初)에 걸쳐서는 유진태(兪鎭泰) 조선일보사장(朝鮮日報社長), 조선교육협회장(朝鮮敎育協會長), 유정근(兪政根) 임정요인(臨政要人), 15년 복역후(服役後) 옥사(獄死), 유일준(兪日濬) 의학박사(醫學博士), 경의전교수(慶醫專敎授), 유만겸(兪萬兼) 충북지사(忠北知事), 경학원부제학(經學院副提學), 유억겸(兪億兼) 연대총장(延大總長), 문교부장(文敎部長)등이 크게 활약(活躍)했다. 특히 유진태(兪鎭泰)와 유정근(兪政根)은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로 일생(一生)을 헌신(獻身)했다. 기계유씨(杞溪兪氏)를 빛낸 사람들의 일부(一部)를 열거(列擧)했다. 기계유씨(杞溪兪氏)의 가풍(家風)에 대해서 유진오(兪鎭午) 현민(玄民)는 일창 유치웅(一滄 兪致雄) 서예가(書藝家) 기계유씨(杞溪兪氏) 최후(最後)의 문장(文章)이 편한 『기계문헌(杞溪文獻)』서문(序文)에서 『기계유씨(杞溪兪氏)는 자고(自顧)로 청족(靑竹)이라 세상(世上)에 일컬어 왔는데 사실(事實) 기계유씨(杞溪兪氏)의 역사(歷史)를 훑어보면 이상(理想)할 정도(程道)로 탐관오리(貪官汚吏)의 추명(醜名)을 남긴 이가 드물다. 매사(每事)에 중용(中庸)을 집하여 대체(代替)로 조촐한 선비(先妣)의 규구(規矩)를 넘지 않은 것이 시조(始祖) 이래 기계유씨(杞溪兪氏)의 전통(傳統)인 것이다. 권세(權勢)를 일족(一族)의 수중에 모으고 국정(國政)을좌지우지(左之右之)한 적이 없으므로 평범(平凡)한 역사(歷史)이었음에는 틀림없지만 그러나 그것은 자랑할 만한 평범(平凡)이요, 천양(闡揚)되어야 마땅한 역사(歷史) 이었다』고 자찬(自薦)하고 있는데 객관적(客觀的)으로도 기계유씨(杞溪兪氏)는 그렇게 청족(淸族)으로 평가(平家)될 만하다. 기계유씨(杞溪兪氏)는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인 유응부(兪應孚) 장군(將軍)을 배출(輩出)했다. 일찍이 무과급제(武科及第), 평안도 절제사(平安道 節制使)를 거쳐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에 올랐던 그는 1455년 성감문. 박팽년(朴彭年)등과 단종복위(端宗復位)를 모의(模擬)했다. 명(明)나라 사신(使臣)을 초대(招待)하는 연회장소(宴會場所)에서 세조(世祖)를 살해(殺害)하는 소임(所任)까지 맡았으나 김질(金質)의 배신(陪臣)으로 탄로(坦路)난다. 그는 심한 고문(拷問)에도 끝까지 지조(志操)를 지키다 숨을 거둔다. 덕망(德望) 높고 청렴(淸廉)했던 유여림(兪汝霖) 1476-1538은 연산군(燕山君) 때 문과급제(文科及第)하고 예조판서(禮曹判書) 등 여러 벼슬을 지내면서 가문(家門)의 기틀을 다졌다. 조선중기(朝鮮中期) 이후(以後) 이름을 빛낸 기계인(杞溪人)은 거의(擧擬)가 그의 후손(後孫)이다. 그래서 그를 기계유씨(杞溪兪氏)의 중흥조(中興朝)라 부른다. 한말(韓末) "서유견문(西遊見聞)"의 필자(筆者) 유길준(兪吉濬)도 기계유씨(杞溪兪氏)를 빛낸 인물(人物)이다. 유길준(兪吉濬)은 조선말기(朝鮮末期) 이 땅의 선각자(先覺者)였다. 일본(日本)과 미국(美國) 유학생(留學生) 1호를 기록(記錄)한 사람이 바로 유길준(兪吉濬)이다. 갑오경장(甲午更張) 후(後) 김홍집(金弘集) 내각(內閣)의 내부대신(內部大臣)을 지내면서 음력폐지(陰曆廢止), 종두법시행(種痘法施行), 우편제도실시(郵便制度實施), 단발령(斷髮令)등 개혁정책(改革政策)을 수행(修行)했다. 유진오(兪鎭午)는 법학(法學)과 문학(文學)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헌법(憲法)을 기초(期初)하여 건국(建國)에 공헌(公憲)했으며 교육자(敎育者)로서, 정치인(政治人)으로서 우뚝하다. 380명의 과거급제자(寡居及第者)가 있다. 주요파(主要派)는 ▲정동공파(同正公派) ▲전서공(典書公派)파
▲군기사사공파(軍器寺事公派) ▲부정공파(副正公派) ▲통덕랑공파(通德郞公派) ▲신계공파(新溪公派) ▲단성공파(丹城公派) ▲충목공파(忠穆公派) ▲진사공파(慈山公派) ▲자산공파(進士公派) ▲학생공파(學生公派) ▲부제학공파(副提學公派) ▲주부공파(主簿公派) ▲월성군파(月城君派 ▲장사랑공파(將仕郞公派) 등이 있다, 이홍선 봉화 일보 본사고문 칼럼리스트의작성문 일부기고
수안공 13세손 병은(炳銀) 옴긴다 2017, 12. 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