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빙, 힐링, 같이 가는 삶 / 신순규
지난주 금요일 시카고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고대했던 형제자매 특별 주말을 같이 보내기 위해서였다. 메인주와 콜로라도주에 살고 있는 쌍둥이 누나들과 플로리다에 살고 있는 작은형을 시카고 공항에서 만나 큰형 집에 같이 가기로 했다.
큰형 데이비드는 41년 전 대학교를 시카고 쪽으로 간 후 그곳을 터전으로 삼고 아주 성공적인 사업을 하면서 살아왔다. 1년에 적어도 두 번은 북서 뉴저지에 위치한 집으로 와서 명절을 같이 지내곤 했었다. 대학교에서 만난 아내와 함께 그들이 낳은 큰딸과 입양한 두 아들을 키우는 한편 자원봉사활동도 열심히 하는 극히 이상적인 커플이었다. 그래서 나와 나의 아내 그레이스가 롤모델로 생각하며 잘 따르던 형과 형수였다.
그런데 2013년 여름, 나는 꿈에도 상상치 못했던 이메일 하나를 받았다. 형수와 헤어졌다는 것을 나에게 알려주기 위해 형이 직접 쓴 이메일이었다. 회사에 앉아 있던 나는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그러곤 1시간이 넘도록 넋이 나간 사람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며칠 후 뉴욕으로 찾아온 형수를 만났다. 형수는 형에게 생긴 여자에 대해 말해주었다. 딸 둘을 키우고 있는 내과 의사라고 했다. 형은 이 모든 일이 자신의 잘못이며 책임은 다 자기에게 있다는 말을 아이들에게 해주고 집에서 나갔단다. 나는 그다음 주 출장을 핑계 삼아 시카고로 날아갔다. 형을 만나 직접 얘기를 들었다. 그는 봉사활동을 하면서 만나게 된 여자와 사랑에 빠졌다고 했다.
형은 많은 사람들의 설득을 들어주긴 했지만 누구도 그의 마음을 바꿀 수는 없었다. 형은 곧 이혼 절차를 시작했고, 결국 2015년에 그 여자와 결혼했다. 그 후 뉴저지 집에 온 형과 새 형수를 두세 번, 그것도 잠깐 만났다.
작은형과 누나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시카고로 향했는지 모르지만 나는 '이젠 시간이 된 것 같다'는 말을 나 자신에게 되풀이하며 비행기와 호텔 예약을 했다. 이젠 불륜, 배신과 같은 단어는 마음속에서 삭제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비행기를 탔다. 시카고는 춥고, 눈이 많이 오고, 바람이 강하게 부는 도시다. 거기에 그것도 1월 말에 가기로 한 것은 꽁꽁 얼어붙은 나의 마음이 녹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풀기 위해서였다.
금요일 오후부터 일요일 오후까지 같이 시간을 보냈다. 옛이야기를 하며 웃고, 다들 쉰이 넘은 터라 건강을 위한 음식 선택에 초점을 두는 대화가 잦았다. 새 형수와도 그리고 그녀의 딸들과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때를 잘 맞춘 덕에 오페라 리허설을 감상하기도 했고, 밀레니엄공원에 가서 산책하며 여러 가지 신기한 것들을 구경했다.
그런데 결국 나의 마음이 녹기 시작한 것에 더 큰 영향을 준 사람은 형의 딸 리즈였다. 금요일 저녁에 리즈가 아빠의 집에 처음으로 찾아온 것이다. '이젠 시간이 되었다'는 생각을 했다면서 의붓엄마와 의붓동생들을 만나러 왔다고 했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점점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리즈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가족이 이런 거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빠의 새 가족과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하는 서른두 살 난 조카가 자랑스러웠다.
미국인은 이혼을 해도 친구처럼 잘 지낸다는 말을 한국 사람들에게 들은 적이 있다. 그런 이들도 있겠지만 우리 가족의 경험은 달랐다. 많은 사람들이 아파했고 그것은 지금도 그리 달라진 것 같지 않다.
'형의 새 아내에게 마음을 여는 것은 원래 형수를 배신하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내게 드는데, 형의 아이들은 어떨까? 그래도 리즈가 첫걸음을 내디뎠다. 남동생들이 따라올까? 그들의 엄마가 전남편의 새 가족을 만나는 날이 올까? 이런 질문의 답은 확실하지 않지만 서로의 힐링을 위해 우리는 계속 같이 갈 것이다. 힐링을 위해서는 용서가 있어야 하고, 용서할 수 있는 힘은 사랑에서만 비롯되기 때문이다. *
[신순규 시각장애 월가 애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