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5. 28. 큐티
예레미야 3:1 ~ 13
배역한 이스라엘과 반역한 유다여 그 죄에서 돌이키고 돌아오라
관찰 :
1) 유다의 음란과 행악
- 1절. “그들이 말하기를 가령 사람이 그의 아내를 버리므로 그가 그에게서 떠나 타인의 아내가 된다 하자 남편이 그를 다시 받겠느냐 그리하면 그 땅이 크게 더러워지지 아니하겠느냐 하느니라 네가 많은 무리와 행음하고서도 내게로 돌아오려느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을 섬긴 것을 부부의 정절을 지키지 않고 다른 남자들과 몸을 섞은 여인의 음란함에 비유하고 있다. 하나님은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가 모두 그렇게 우상을 숭배하고 따른 것에 대해서 그것이 얼마나 악한 행위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려주시고 계시다. 아내가 남편을 떠나 다른 많은 무리와 음란을 행하고도 어떻게 남편에게 뻔뻔하게 돌아올 수 있겠냐고 반문하신다.
- 2절. “네 눈을 들어 헐벗은 산을 보라 네가 행음하지 아니한 곳이 어디 있느냐 네가 길 가에 앉아 사람들을 기다린 것이 광야에 있는 아라바 사람 같아서 음란과 행악으로 이 땅을 더럽혔도다” => 하나님은 유다의 음란을 지적하시고 계시다. 높은 곳에서 우상을 섬기는 신녀와 성행위를 하는 것이 보다 신과 가까운 곳에서 신을 흥분시키고, 신의 은총을 받는 행위라고 인식했었기에 유다의 산 마다 음란한 행위가 자행되었다. “아라바”는 갈릴리 호수 남쪽에서 요단 골짜기를 지나 사해를 넘어 아가바 만까지 이르는 깊은 지대 혹은 사해 남쪽에서 에시온게벨 까지의 메마른 사막지대를 의미했다. 이 지역은 사람들이 거의 없는 지역으로 이곳에서 사람을 기다린다는 것은 강도나 마적들이 하는 행위였다. 아라바 사람이란 그 지역에서 지나가는 나그네를 공격하여 생명을 위협하고, 소유물을 약탈하고, 성적 폭행을 일삼았던 완악한 무리들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유다가 하나님이 주신 가나안 땅에서 그런 행위를 했다고 지적하고 계시다.
- 3절. “그러므로 단비가 그쳤고 늦은 비가 없어졌느니라 그럴지라도 네가 창녀의 낯을 가졌으므로 수치를 알지 못하느니라” => 하나님 앞에서 음란과 패역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때에 따라 허락하신 비를 내리지 않으셨다.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에 따라 공급해 주실 때 그렇게 되는 곳이었다. 하나님이 그곳에 비를 내리시지 않으면, 그 땅은 황폐하고 처박한 광야가 될 뿐이었다. 하나님이 그렇게 사인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창녀와 같이 부끄러움을 모르고 하나님의 사인을 읽지 못하고, 자신의 욕구에 순종하는 후안무치(厚顔無恥)한 모습을 보였다고 말씀하고 계시다.
- 4절 ~ 5절. “네가 이제부터는 내게 부르짖기를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는 나의 청년 시절의 보호자이시오니 노여움을 한없이 계속하시겠으며 끝까지 품으시겠나이까 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네가 이같이 말하여도 악을 행하여 네 욕심을 이루었느니라 하시니라” => 그럼에도 불구하고 뻔뻔하게도 유다는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이 자신의 보호자이심을 근거로 구원을 간청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다. 간교하게 감언이설(甘言利說)로 하나님을 속이며 자신이 원하는 욕심을 이루고, 변하지 않는 우상숭배와 음란을 즐기는 길에서 떠나지 않음을 지적하고 계시다. 하나님은 속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2) 배역한 이스라엘과 반역한 유다
- 6절 ~ 7절. “요시야 왕 때에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배역한 이스라엘이 행한 바를 보았느냐 그가 모든 높은 산에 오르며 모든 푸른 나무 아래로 가서 거기서 행음하였도다 그가 이 모든 일들을 행한 후에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게로 돌아오리라 하였으나 아직도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고 그의 반역한 자매 유다는 그것을 보았느니라” => 예레미야는 시간을 달리하여 요시야 왕 때에 하나님의 계시를 받게 되었다. 그 때 유다는 북 이스라엘이 높은 산마다, 푸른 나무 마다 행음을 하는 것을 보았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한다는 것을 유다가 분명히 보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말씀이다.
- 8절. “내게 배역한 이스라엘이 간음을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를 내쫓고 그에게 이혼서까지 주었으되 그의 반역한 자매 유다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자기도 가서 행음함을 내가 보았노라” => 북 이스라엘의 배역을 보았고, 알았던 유다는 하나님을 향하여 중심을 드린 것이 아니라 더욱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도 우상 숭배함으로 영적 간음을 행했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다.
- 9절. “그가 돌과 나무와 더불어 행음함을 가볍게 여기고 행음하여 이 땅을 더럽혔거늘” => 남 유다는 북 이스라엘 보다 더 지독하게 우상숭배를 했음을 지적하신다. 돌과 나무와 더불어 행음했다는 것은 돌과 나무로 만든 우상을 신으로 섬기고 그곳에 제사를 드린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그 행위가 땅을 더럽힌 것이라 말씀하신다. 하나님 나라를 훼파하는 행위로 인식하시고 계심을 알려주시고 계시다.
- 10절. “이 모든 일이 있어도 그의 반역한 자매 유다가 진심으로 내게 돌아오지 아니하고 거짓으로 할 뿐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그렇게 하나님께서 지적하심에도 불구하고, 북 이스라엘이 망하게 되었음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유다가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체 하면서 사실은 여전히 영적 음란을 행하는 그들의 음흉한 면모를 드러내시고 계시다. 이것이 유다를 파악하시는 하나님의 관점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속죄제를 드리는 행위만 하면 하나님의 눈길을 피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심각한 오류였다. 하나님은 겉만 보시는 분이 아니시고, 내면의 중심을 모두 살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시다.
- 11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배역한 이스라엘은 반역한 유다보다 자신이 더 의로움이 나타났나니” => 하나님은 오히려 북 이스라엘이 남 유다보다 차라리 낫다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남 유다에게 하나님은 북 이스라엘이 음란으로 말미암아 징계받아 박살나는 것을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남 유다는 여전히 이방 신과 음란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 12절. “너는 가서 북을 향하여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노를 한없이 품지 아니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본문은 히브리어 원문상으로 언어 유희로 표현되었다. 직역을 하면, “돌아선 이스라엘아 돌아서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자기 백성이 자신의 음란에 대해서 뉘우치고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는 내용이다. 하나님이 북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이 너무 과했다는 것을 의미하거나 유다가 더 악해서 이스라엘이 용서받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남 유다가 돌아오기를 바라시며, 북 이스라엘도 용서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있으시기에 유다가 돌아오고자 하면 그들을 용서하시고 받아주실 것임을 표현해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시는 것이라 할 것이다.
- 13절. “너는 오직 네 죄를 자복하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고 네 길로 달려 이방인들에게로 나아가 모든 푸른 나무 아래로 가서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하나님은 유다가 자신들의 죄에 대해서 거짓으로 하나님께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자복하고 돌아올 것을 명하고 계시다. 그렇게 하면 용서해 주시겠다는 말씀이다. 이슿라엘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 곧 하나님께서 져주시는 존재인데,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이 용서하고 받아주시는 존재가 됨을 다시금 알려주시고 계시다.
가르침 :
1)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우상숭배를 남편을 두고 다른 많은 무리와 몸을 섞은 여인의 음란과 비유하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인간이기에 다른 인격과 몸을 섞어 하나가 되는 것이 단순이 육체의 교합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연합을 이 땅에서 경험하는 참 하나됨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기에 이런 관점이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아닌 다른 존재를 섬기고 믿고 따르는 것에 대해서 너무나 안타까워하시고, 속상해 하시고, 분노하심을 그렇게 우리에게 알려주시고 계시는 것이다.
2) 남 유다는 못됐다. 북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와 불의로 말미암아 패망하는 것을 오롯이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북 이스라엘보다 더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고, 또 가난한 자를 괴롭히는 악행을 자행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계시다.
3) 남 유다는 자신의 악행을 지적하는 하나님께 돌아서는 척 했다. 그리고 뒤돌아서 다시 우상을 섬기고, 자신들의 욕망을 채웠다. 하나님을 향해 속죄제를 드려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은 외적 행위보다 내면의 중심을 더 분명하게 보시는 분이시기에 그들의 기만에 속아넘어가시는 분이 아니심을 알려주신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 이스라엘이라도 회개하고 돌아오면 받아주는 하나님이시기에 남 유다가 돌아오고자 하면 얼마든지 받아주신다는 마음을 보여주시고 계시다. 유다는 이렇게까지 말씀해 주시는 하나님께 속히 돌아왔어야 했다.
적용 :
1)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진정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시고, 세워주셨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존재로서 하나님을 닮는 존재가 되게 하신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 외에 다른 신, 다른 가치, 다른 솔루션을 찾고 누리는 것은 부부가 다른 존재와 음란을 행하는 것과 동일한 차원의 악행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의 품격에 합당하게 하나님을 닮아가는 자리에서 벗어나서는 안될 것이다. 그것은 나의 욕망대로 사는 삶이 아니라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 성령의 충만을 받는 삶, 성령의 소욕에 자발적 순종하는 삶으로 드러나게 되어야 한다. 하루를 살아도 성령의 인도하심 없이는 그런 삶을 살 수 없는 존재임을 고백한다. 그리고 주님을 더욱 바라보고, 소망하여야 함을 깨닫게 된다.
2) 하나님은 남 유다를 북 이스라엘과 비교하며 책망하셨다. 오늘날 하나님은 얼마나 많은 것들로 하나님을 떠나 사는 자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추구하고 욕망하는 자들에 대해서 징계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시고 알려주시고 계시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다른 것을 추구하고 따라가는 삶을 살아가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자족하고 순종하고 따라가야 한다. 그 길이 최선이고 최고이기 때문이다.
3) 예레미야 선지자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담는 과정이 고통스러웠을 것이라 예상된다. 하나님은 다양한 방식과 표현으로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주시고 계시다. 그런 하나님의 마음은 오늘날 이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부족한 존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간다는 것은 부담되고, 힘들고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래야 하는 것이 메신저의 역할이기에 오늘날도 예레미야의 영성을 소유하는 메시저가 일어나야 함을 깨닫는다. 내가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주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