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과학] 고추
매운맛 못 느끼는 새가 먹고 남미서 북미로 퍼뜨려
입력 : 2023.05.09 03:30 조선일보
고추
▲ /그래픽=유재일
이탈리아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1451~1506)의 가장 큰 업적은 누가 뭐래도 '아메리카 대륙 발견'일 겁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좀 다르게 기억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매운맛', 고추가 전 세계로 전파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기 때문이지요.
신대륙에서 유럽으로 전해진 고추
중세 유럽인들은 동양 문물에 흠뻑 빠져 살았습니다. 동양은 황금으로 탑을 짓는 나라 '지팡구(당시 유럽에서 일본을 부르던 이름)'가 있고 비단과 향신료가 나는 지역이었죠. 유럽은 육로 대신 동양으로 향하는 새로운 무역로를 만들고 싶어 합니다. '신항로 개척 시대'가 열린 거죠.
콜럼버스는 아프리카 대륙을 빙 돌아가는 당시 항로가 비효율적이라고 봤습니다. 그는 반대 방향으로 출발해 대서양을 가로질러 가면 훨씬 빠르게 동양에 도착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곧 스페인 왕실을 설득해 새 항로를 개척하는 항해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콜럼버스가 도달한 곳은 아시아가 아니라 카리브해였어요. 아메리카 대륙 중간쯤입니다.
사실 그가 원했던 것은 당시 한 상자에 수천만 원씩 하던 후추였습니다. 하지만 후추는 발견하지 못했고 대신 원주민들이 '아히(aji)'라고 부르는 작물을 유럽에 가져와 '후추보다 좋은 향신료'라고 애써 위안합니다. 이 아히가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고추랍니다. 콜럼버스 생전 고추는 신대륙에서 건너온 신기한 작물 정도로 취급받았습니다. 수백 년이 흐른 지금은 매운맛으로 다양한 문화권에서 사랑받는 작물이 됐죠. 우리나라에는 17세기쯤 중국 혹은 일본을 통해 고추가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남아메리카에서 북아메리카까지 이동한 고추
로시오 디아나 미국 콜로라도 볼더대 교수팀은 최근 3400만~5000만년 전 고추 화석을 북아메리카에서 발견했다는 연구를 발표했습니다. 미국 콜로라도주 북서부와 와이오밍주 남서부에 있는 그린리버 지층에서 찾아냈다고 해요. 물론 이 화석이 우리가 아는 고추 형태는 아닙니다. 엄밀히 말하면 고추의 조상 화석이라고 봐야겠지요. 고추가 시작된 장소가 남아메리카인 것을 생각하면 굉장히 먼 거리를 이동한 셈입니다. 고추는 어떻게 이동한 걸까요?
고추 이동의 비밀은 고추씨에 있습니다. 씨앗을 보면 식물이 어떻게 자손을 퍼뜨리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민들레는 바람을 타고 씨앗을 퍼뜨려요. 도깨비바늘은 동물의 털에 붙기 쉽게 갈고리 같은 모양이죠. 나무 열매 상당수는 동물이 과일을 먹어도 소화되지 않도록 맛있는 과육 속에 단단한 씨앗이 있습니다. 이렇게 식물은 주변의 동물이나 자연환경을 이용해 씨앗을 멀리 퍼뜨리는 전략을 씁니다. 하지만 고추씨는 바람에 날리거나, 동물의 털가죽에 붙을 수 있는 형태가 아닙니다. 고추는 동물이 열매를 먹도록 해 씨앗을 옮기는 편에 가깝습니다. 다만 매운맛이 문제입니다.
이 매운맛은 실은 '맛'이 아닙니다. 혀가 느끼는 감각 중 하나죠. 데이비드 줄리어스 미 샌프란시스코 캘리포니아대 교수는 매운맛을 내는 물질인 '캡사이신'에 반응하는 세포 수용체를 발견합니다. 이 통증 수용체를 'TRPV1'이라고 해요. TRPV1 수용체는 사람은 물론 포유류라면 대부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과육이 실한 고추라도 야생의 포유류는 잘 먹지 않지요. 먹으면 아픈 열매를 좋아하는 동물은 없으니까요.
대신 고추를 먹는 것은 새입니다. 실제로 중남미 지역에 사는 새는 고추를 즐겨 먹고, 고추를 먹은 새가 배설한 고추씨의 발아율은 70%나 됐어요. 이 새에게도 TRPV1 수용체는 있지만, 포유류와 구조가 조금 다르다는 사실이 2020년 밝혀졌어요. 캡사이신이 잘 달라붙지 못해 매운맛을 느끼지 못하는 겁니다. 캡사이신이 듬뿍 든 매운 고추도 이 새에게는 맵지 않고 맛있는 채소로 느껴진다고 해요.
정반대 생존 전략 선택한 고추와 토마토
고추를 먹다 보면 매운 고추도 있고 덜 매운 고추도 있습니다. 야생 고추 역시 마찬가지예요. 매운 고추와 덜 매운 고추 중 먼저 만들어진 쪽은 매운 고추입니다. 과학자들은 고추가 1900만년 전 가짓과 조상에서 갈라져 나올 때부터 캡사이신을 만드는 유전자를 갖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요. 다만 이 유전자가 실제로 캡사이신을 만든 것은 한참 뒤입니다. 2014년 최도일 서울대 교수팀이 고추 게놈(한 생물이 가지는 모든 유전 정보)을 완전히 해독한 결과, 고추는 처음 가짓과에서 갈라진 이후 900만년이 흐른 뒤에야 캡사이신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본격적으로 먹을 만한 고추는 100만년 전쯤 나타났습니다. 지나치게 매운 고추는 자손을 남기는 데 불리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고추와 아주 매운 고추 '하바네로' 계열이 이때 갈라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고추와 공통 조상을 가진 다른 가짓과 식물 역시 캡사이신을 만드는 유전자를 갖고는 있습니다. 토마토가 대표적이지요. 토마토는 1900만년 전 고추와 갈라져 다른 진화 경로를 거친 식물입니다. 토마토도 고추처럼 캡사이신을 만드는 유전자가 있습니다. 다만 결정적으로 캡사이신 합성을 마무리하는 유전자가 없습니다.
과학자들은 고추와 토마토가 공통 조상에서 분화했지만, 고추는 캡사이신을 만드는 유전자를 좀 더 많이 가진 채로, 토마토는 적게 가진 채로 분화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생존 전략을 다르게 선택한 것이지요. 고추는 캡사이신을 합성해 소화력이 강한 포유류 대신 소화 기관이 짧아 씨앗을 온전한 형태로 배설하는 새가 열매를 먹도록 매운맛으로 진화했습니다. 반면 토마토는 달콤한 과육을 만들어 포유류를 유혹하는 동시에 포유류의 소화 기관에서 씨앗을 보호할 수 있는 젤리 같은 조직을 만들었어요.
고추는 남아메리카 원산으로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오래전부터 재배하였다. 열대에서 온대에 걸쳐 널리 재배하는데, 열대지방에서는 여러해살이풀이다. 한국에는 담배와 거의 같은 시기에 들어온 것으로 보이며 한국인의 식생활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한국에 들어온 내력에는 임진왜란 때 왜군이 조선 사람을 독한 고추로 독살하려고 가져왔으나 이로 인하여 오히려 한민족이 고추를 즐기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일본의 여러 문헌에는 고추가 임진왜란 때 한국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 이재위(李裁威)는 《몽유(蒙纜)》(1850년대)에 북호(北胡)에서 들어왔다고 기록하였다. 민간에서는 장을 담근 뒤 독 속에 붉은 고추를 집어넣거나 아들을 낳으면 왼새끼 줄에 붉은 고추와 숯을 걸어 악귀를 쫓았다.
오가희 어린이조선일보 편집장 기획·구성=김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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