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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담긴 고요한 아침의 나라] (11) 찰고(察考)
대부분 읽지도 쓰지도 못하지만 찰고 때 ‘요리문답’ 술술 암송
- <사진 1> 황해도 청계본당 팔상공소 신자들이 본당 주임인 빌렘 신부에게 찰고를 받고 있다. 노르베르트 베버, ‘찰고’, 1911년 5월 22일 팔상공소, 유리건판,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요리문답 제대로 외우지 못하면 불호령
1909년 성 베네딕도회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선교사들이 한국에 진출해 1911년 서울 백동수도원을 설립하기 전까지 조선대목구는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교황 파견 선교사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물론 한국인 성직자도 있었다. 1911년 당시 한국에서 사목하던 한국인 신부는 불과 15명이었다.
“독일인 새내기 선교사들은 신자 7만 1252명, 프랑스인 사제 41명, 한국인 사제 15명, 수녀 59명, 신학생 41명인 아주 작지만 매우 활기찬 대목구의 공동 과업에 즉시 합류해야 했다. 대부분의 본당 사목구에는 외교인 20~30만 명 속에 신자 2000~3000명이 살았다. 그래서 광대한 영역을 돌보아야 하는 사제는 신자들을 기껏해야 1년에 한두 번 정도 방문할 수 있었다. 모두가 교리 문답서를 외우고 정기적인 찰고 내용을 암송하긴 했지만, 종교적 지식은 늘 빈약했다. 뮈텔 주교는 특히 신자들의 어린 자녀들에게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새 시대의 역군으로 키워내야 했다. 대대로 물려받은 신앙이야말로 참되고 확실한 법이다.”(「분도통사」 67쪽)
‘찰고(察考)’는 예전에 비해 그 강도가 엄청 약해졌지만 아직 세례를 앞둔 예비신자와 판공성사를 받으려는 신자들이 치르는 교리 시험이다. 과거엔 질문·답으로 치러졌으나 지금은 필기로 한다. 불과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사제가 “사람이 무엇을 위하야 세상에 났느뇨” 하고 물으면 찰고자가 “사람이 천주를 알아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세상에 났느니라”라고 답해야 했다. 또 “사람이 천주를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려면 반드시 어떻게 할 것이뇨”라고 되물으면 “사람이 반드시 천주교를 믿고 봉행할지니라”라고 응대했다. 만일 요리문답을 제대로 외우지 못하면 불호령은 물론 부모까지 공동 벌을 받기도 했다.
- <사진 2> ‘마을로 들어가는 선교사들’, 연도 및 장소 미상, 유리건판,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본당 사제들, 1년에 두 차례 공소 사목방문
“건장한 남자, 원기 왕성한 젊은이, 그리고 열두서너 살 먹은 소년 등 꽤 많은 신자가 모였다. 그들은 매년 두 차례씩 사제가 실시하는 교리 시험(찰고)을 치르고 싶어 했다. 대부분 읽지도 쓰지도 못하지만 이 곤고(困苦)한 사람들이 교리서를 술술 암송하고, 아이들까지 교리를 훤히 꿰고 있는 것을 보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자녀를 가르치는 것은 부모의 당연한 의무다. 밭일 나가는 엄마가 치맛자락에 매달려 아장아장 걷는 아이에게 신앙의 진리를 가르치는 모습을 자주 목격한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202쪽)
찰고 날이다. 공소 마당에는 멍석이 깔리고 찰고자들이 긴장한 얼굴로 순서를 기다린다. 베버 총아빠스는 1911년 5월 22일 황해도 청계본당 팔상공소에서 치르는 빌렘 신부의 찰고를 참관했다.<사진 1> 1911년 주님 부활 대축일이 4월 16일이었으니 성령 강림 대축일을 준비하면서 찰고가 있었던 듯하다.
“한낮의 열기가 잦아들어 한결 그윽한 봄날 저녁, 다들 공소 앞마당에 모였다. 멍석을 깔고 사제를 중심으로 한쪽에는 남자, 다른 쪽에는 여자, 가운데는 아이들이 앉았다. 어눌하고 답답함이 어찌 없겠는가마는 그래도 대부분 답변들을 시원시원하게 해 주었다. 어려운 질문이 나오면 유창하던 말문이 막히기도 했다. (⋯) 호기심 많은 외교인들이 빙 둘러서서 오가는 문답들을 들었다. 그들은 자주 그랬다. 한마디 말이 그들 마음에 닿아 조금이라도 그리스도교에 가까워졌으려나, 우리도 그들과 더불어 말 없는 청중이 되어 신자들의 자신감 넘치는 답변에 경탄하고, 사제를 쳐다보는 아이들의 반짝이는 눈빛에 기뻐했다. 검게 탄 남자들과 할머니들이 그들의 빈한한 가사를 작파하고 공소까지 먼 길을 달려와 파릇파릇한 소녀들과 외운 교리 실력을 겨루고 있다는 것은 엄청난 감동이었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453~454쪽)
본당 사제들은 이처럼 관할 사목구 공소를 1년에 두 차례씩 방문할 때마다 그 기회를 이용해 신자들의 찰고와 고해성사를 하고, 미사를 거행했다. 공소 방문은 ‘사목 여행’이었다. 선교사들은 사목 여행 내내 한국인들과 더불어 한국인처럼 산다. 한식을 먹고 한옥 공소에서 묵는다. 얇은 돗자리 하나 깔린 딱딱한 바닥에서 잔다. 조랑말이나 나귀를 타고 다닌다면 안장을 베개로 삼기도 한다. 탈것이 없으면 내내 걸어 다닐 수밖에 없다. 녹초가 되어 본당 사제관으로 돌아오면 본당 신자들이 반겨주지만 새로운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 본당 성당에서 몇 달을 바쁘게 지내고 다시 관할 공소 순방에 나서는데 늦가을 여정이 특히 힘들다.
- <사진 3> 베버 총아빠스 일행이 안성 한 교우촌에서 첫 한식 밥상을 받고 있다. 노르베르트 베버, ‘한식 대접을 받고 있는 선교사들’, 1911, 안성, 유리건판,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베버 총아빠스 일행, 첫 한식 밥상 받아
누가 언제 어디에서 촬영했는지 알 수 없으나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에는 ‘마을로 들어가는 선교사들’이란 제목의 유리건판이 보관돼 있다.<사진 2> 수단 모양으로 보아 파리외방전교회 두 선교사가 산골 교우촌으로 가고 있는 모습이다. 짐도 없는 차림새로 보아 이 교우촌에 상주하는 선교사들인지, 아니면 이미 짐을 풀고 산책을 갔다가 되돌아오는 중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사진 제목과 달리 선교사들보다 그들에게 예를 표하는 청년이 눈에 띈다. 거름 가마니인 듯한 지게 짐을 내려놓고 선교사들이 가는 길에 방해되지 않도록 길 가장자리에 비켜서서 두 손을 가지런히 앞으로 모으고 차렷 자세로 서 있는 청년의 모습이 사뭇 경건하다.베버 총아빠스 일행은 1911년 4월 17일 안성의 한 교우촌에서 첫 한식 밥상을 받았다.<사진 3> “30㎝가 채 안 될 정도로 낮고 소담스런 소반에 접시 너덧 개가 놓여 있었다. 젓가락은 포크와 같은 용도로 쓰여 그걸로 마른 생선도 집어 먹고, 한국인들이 없으면 죽고 못 산다는 김치도 집어 먹고, 잘게 썬 깍두기도 짠 국물에서 건져 먹는다. (⋯) 음식 맛의 다양성은 인상적이었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270~271쪽)베버 총아빠스 일행은 당시 프랑스 선교사들과 한국인으로 살아야만 했던 공소 사목 여행을 체험한 것이다.
[사진에 담긴 고요한 아침의 나라] (12) 노인
신앙의 눈으로 가장 단순하면서도 기품있는 노인들 일상 포착
- <사진 1> 노르베르트 베버(?), ‘노인’, 유리건판, 연도 및 촬영지 미상,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신앙과 삶의 품격 온몸에 배어있는 노인들
예수회 신학자 칼 라너 신부는 참으로 인간다운 삶이란 자유 안에서 하느님을 향한 믿음과 희망, 사랑으로 포착되는, 영원한 하느님의 무게를 지닌 삶이라고 정의했다. 곧 향주덕의 삶, 하느님을 향한 삶이 참으로 인간다운 삶인 것이다. 그러면서 라너 신부는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을 찾아 얻게 하는 것은 실상 이념이나 고상한 말이나 자아 반영이 아니라, 이기심에서 나를 풀어주는 행위, 나를 잊게 해주는 남을 위한 염려, 나를 가라앉히고 슬기롭게 해주는 인내 등”이라고 했다.
인생에서 하느님의 무게를 지닌 삶을 진지하게 깨달을 때가 노년기일 것이다. 물론 어리고 젊은 나이에 삶의 의미를 직관하는 이들도 적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노인이 되면 하느님을 경외하고 지혜를 논할 만한 삶의 경륜이 쌓인다.
그래서 구약성경 집회서는 “노인들의 이야기를 소홀히 하지 마라. 그들 또한 조상들에게 배웠고 이제는 네가 그들에게서 지각과 적절한 때에 대답하는 법을 배우리라”(8,9)며 “풍부한 경험은 노인들의 화관이고 그들의 자랑거리는 주님의 경외함”(25,6)이라고 예찬한다. 이런 이유로 구약성경은 노인을 존경하라고 권고한다.(레위 19,32)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1911년·1925년 두 차례 한국을 방문하면서 노인들을 적지 않게 촬영했다. 그는 단순히 나이 든 늙은이를 찍은 것이 아니라 신앙과 삶의 품격이 온몸에 배어있고,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이 얼굴에 드러나는 이들을 담았다. 비단옷이 아닌 하얀 무명옷을 입고, 가죽신이 아닌 짚신을 신었어도 베버 총아빠스가 사진에 담은 노인들은 한결같이 기품이 있다.
먼 곳 응시하는 깊은 눈은 삶을 달관한 듯
기품은 하루아침에 풍겨나는 것이 아니다. 오랜 일상에서 배어 나오는 것이다. 신앙을 토대로 담백하고 성실하게 받아들여진 일상에 머무는 것이야말로 하느님의 숨은 은총 속에 사는 삶이라 하겠다. 신앙이 일상이 될 때 인생은 인내의 태도, 성실과 공평·책임감의 태도, 사랑이 깃든 몰아의 태도를 보여주게 된다. 베버 총아빠스가 촬영한 노인들은 이런 모습을 보여준다.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한국사진 아카이브에 있는 ‘노인’<사진 1>은 삶을 달관한 표정이다. 먼 곳을 응시하는 깊은 눈은 담담하게 살아온 넓은 인생의 지평을 엿보게 한다. 선한 눈빛은 자신의 내심을 드러낸다. 구릿빛 피부는 노인의 인생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음을 웅변한다. 굳게 다문 듯하나 옅은 미소가 피어나는 것은 만사를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아는 여유를 보여준다. 흑발과 백발이 뒤섞인 긴 수염은 위엄과 평정을 드러낸다.
- <사진 2>노르베르트 베버, ‘장기를 두는 노인들’, 유리건판, 1911년 2월, 홍릉 인근,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환갑이면 노인 대접을 받았다. “환갑의 기쁨은 담뱃대로 그치지 않는다. 이 잔칫날에는 아들딸과 손자 손녀, 친척과 친지들이 모두 부모 곁에 모인다. 다들 찾아와 축하 인사를 건넨다. 물론 이 땅에 다른 주인(일본)이 다른 법도를 들여온 후에는 민족 정서를 마음껏 표출했던 옛 풍습이 많이 사라졌다. 옛날에 왕과 왕비의 환갑잔치는 가장 성대한 축제였다. 이날은 축제의 기쁨이 거센 파도처럼 방방곡곡에 넘쳐흘렀다. 아마 이런 시절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죄수가 부모의 환갑잔치에 참석하기 위해 잠시 석방되었다가 잔치가 끝난 후 정직하게 다시 돌아와 수감되는 불문율 또한 새로운 체제하에서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울 것이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75쪽)베버 총아빠스 일행은 1911년 2월 25일 명성황후가 묻힌 홍릉을 둘러보고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어느 집 앞에서 장기판에 빠져있는 노인들을 사진에 담았다.<사진 2> 노인 넷이 양지바른 담장 앞에 가마니를 깔고 앉아 장기를 두고 있다. 장기판은 막판을 달리고 있다. 장기판 왼편 노인이 장기알을 움직이려 하자 그 옆의 노인이 훈수를 둔다. 이 훈수가 맘에 들지 않는지 장기를 두는 상대 노인이 주먹 쥐듯 왼손을 움켜잡는다. 그 옆의 노인은 이 장면이 재미있는지 담뱃대를 문 채 옅은 미소를 보인다. 그리고 이 장면을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 둘러서 지켜본다.
베버 총아빠스는 이 사진을 찍으면서 노인들의 신발에 주목했다. 장기를 두는 노인이 나막신을 벗어놓았기 때문이다. “한국 나막신은 일본 나막신과 판이하다. 일본 나막신은 두 개의 굽을 나무 밑장에 덧대지만, 한국 나막신은 통나무로 깎아 만든다. (⋯) 이 둔한 신을 처음 신으면 몸이 앞뒤로 기우뚱거려 몹시 위태롭다. 그러나 한국인의 몸놀림은 나막신을 신고도 안정적일 뿐더러 우아하기까지 하다. (⋯) 짚신은 가볍고 편해서 도보 여행에 좋고, 자갈투성이의 험한 산길에도 제격이다. 산행이 가볍고 잘 미끄러지지도 않는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99~100쪽)
- <사진 3> 노르베르트 베버, ‘짚신 삼는 노인’, 유리건판, 1911년 5월, 황해도 청계리,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신틀도 없이 짚신 삼는 노인의 솜씨에 감탄
베버 총아빠스는 1911년 5월 황해도 신천군 청계리를 방문했을 때 두건을 쓴 노인이 마당에 앉아 짚신을 삼고 있는 걸 촬영했다.<사진 3> 그는 신틀도 없이 짚신을 삼는 노인의 숙련된 솜씨에 감탄했다. 짚신을 삼는 것은 지나친 고역은 아니지만 삶을 유지하게 하는 일상의 노동이다. 양쪽 엄지발가락에 새끼를 꼬아 지탱하며 짚신 꼴을 만들어가는 노인의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다. 이마의 굵고 짙은 주름과 팔뚝에 불끈 솟은 핏줄이 평생 가족을 위해 헌신한 노인의 수고를 보여준다. 베버 총아빠스가 본 짚신 삼는 노인은 가족을 향한 희생과 공동선을 향한 순종과 극기의 모습이었다.
- <사진 4> 노르베르트 베버, ‘지팡이를 짚은 노인’, 유리건판, 1911년 5월, 황해도 청계리,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베버 총아빠스는 청계리에서 또 한 분의 노인을 사진에 담았다.<사진 4> 무명 두루마기를 입고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다. 머리에 쓴 갓은 높이가 낮고 양태가 매우 좁고, 귀 밑에 끈을 달아 턱 밑에서 묶는 형태다. 고종의 갑신의제 개혁 이후 전형적인 남성들의 성장(盛裝)이다. 흑립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고 행전을 치고 버선발에 초혜를 신는 정갈한 차림이 당시 남성의 일상복이었다.
베버 총아빠스가 촬영한 일상 사진들은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어려운 모습을 그의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고 담은 것이다.
[사진에 담긴 고요한 아침의 나라] (13) 국수
생일이나 잔칫날 · 제삿날 먹으며 기쁨과 슬픔 함께 나눈 국수
- <사진 1> 노르베르트 베버, ‘독상을 받은 신부의 손님들’, 1911년 5월 21일 황해도 신천군 청계리, 유리건판,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잔칫상과 제사상에 빠지지 않고 오른 국수
우리 민족은 예부터 국수를 잔칫날 함께 나눠 먹으면서 기쁨을 나눴고, 상가에서 음복하며 먼저 세상을 떠난 이를 추모하고 슬픔을 달랬다. 돌·생일·회갑 등 태어난 날과 혼례 등을 축하하는 잔칫상에, 또 제사상 제수로 빠지지 않고 올라오는 음식이 바로 국수였다.
국수는 고려 시대 송나라에서 들어왔다. 스님들이 송나라를 왕래하면서 국수를 들여와 절간 음식으로 먹었고, 이후 상류사회 잔치와 제사 음식으로 퍼져나갔다고 한다. 지금은 밀을 수입해 밀가루가 흔하지만 20세기 초반만 해도 밀은 비싸고 귀했다. 국수가 의례 음식으로 생일과 잔칫날·제삿날 등 특별한 날에 먹을 수 있는 별식 대접을 받은 것도 이 때문이다.
밀이 귀하던 조선 시대에는 주로 메밀과 녹두·녹말로 국수를 만들어 먹었다. 이외에도 콩·칡가루·밤 등 다양한 재료로 만든 면에 쇠고기나 꿩고기를 우려낸 육수나 여러 채수로 국수를 만들었다. 멸치 육수는 20세기 이후 들어 사용했고 밀국수는 해방 후 수입 밀가루가 많아지면서 일반화됐다고 한다.
이 참에 국수와 관련된 우리 풍속도 살펴보자. 조선 시대에는 아기가 출생한 지 3일째 되는 날에 축하 손님에게 국수를 대접했다. 아이의 첫 생일을 축하하는 돌잔치에는 흰밥과 미역국·나물·구이·백설기·수수경단·과일과 함께 반드시 국수를 돌상에 올려놓고, 국수장국으로 손님을 대접했다. 아울러 ‘돌잡이’로 쌀·돈·국수 등을 놓고 아이의 미래를 점쳤다. 그리고 61세 회갑을 맞은 이에게 국수장국을 차려주고, 축하객들에게도 잔치 국수를 대접했다고 한다.
지방과 집안에 따라 다르지만 제사상에 ‘면서병동’(麵西餠東)이라 하여 국수를 서쪽에, 떡을 동쪽에 놓는다. 제수로 올리는 국수를 ‘메국수’라 하는데, 국수를 놓을 때는 삶은 국수사리만 제기에 담고 그 위에 계란채·잣·깨소금 등을 고명으로 얹어놓는다. 음복 시에는 장국밥이나 비빔밥 등 제삿밥에 메국수를 고명처럼 얹어 먹기도 한다.
- <사진 2> 노르베르트 베버, ‘국수를 먹는 사람들’, 1925년 함경남도 안변군 내평리, 유리건판,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 <사진 3> 노르베르트 베버, ‘혼례식 후 국수 먹는 여성들’, 1925년 함경남도 안변군 내평리, 유리건판,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혼례식 후 국수를 먹는 사람들 촬영
우리는 보통 “국수 언제 먹여줄래?”란 말을 “결혼 언제 할 거냐?”란 뜻으로 쓰곤 한다. 이는 혼인 잔칫날 손님을 대접하는 음식이 국수가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 민족은 국수에 장수와 백년해로, 추모의 뜻을 담아 면을 끊지 않고 먹었다.
국수는 계절에 따라 여름에 냉면, 겨울엔 온면으로 먹는다. 냉면은 차갑게 식힌 육수에 동치미·배추김치·나박김치 국물을 섞어 쓰거나 육수만 단독으로, 혹은 동치미나 김칫국물만 따로 쓴다. 면을 만 다음, 오이절임·배·편육·동치미 무 썬 것, 달걀 등을 얹어 낸다. 온면은 국수를 삶아 헹군 뒤 사리를 만들어 두었다가 미리 만들어놓은 장국에 ‘토렴’하여 데운 후 그릇에 담고 쇠고기볶음·편육·달걀지단 등 꾸미를 얹어 더운 장국을 부어 만든다. 비빔국수도 있다. 고기 고명과 각종 나물·김치를 비빔 재료로 사용한다. 오늘날 춘천 막국수와 함흥회냉면 등이 대표적 비빔국수다.
국수는 가공 방법에 따라 절면(切麵), 압착면(壓搾麵), 타면(打麵)으로 나뉜다. 절면은 밀가루나 메밀가루 등을 물에 반죽해 끈기가 있게 잘 치대어 밀판에 놓고 밀대로 얇게 밀어서 가늘게 썰어 만든 국수를 말한다. 압착면은 잘 치댄 반죽을 국수틀에 넣고 압력을 가해 뽑아낸 국수다. 타면은 반죽을 양손으로 밀판에 치고 당기기를 반복해 가늘게 뽑아낸 국수를 가리킨다.
산업화 이전까지 국수를 삶을 때는 ‘광주리’와 ‘석자’를 빼놓을 수 없었다. 농가에 흔했던 광주리는 삶은 국수사리를 담아놓기 제격인 용기였다. 또 바가지 모양의 석자는 삶은 국수사리를 건져내는데 제격인 도구였다.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이 소장하고 있는 한국 사진 중에 국수와 관련한 사진이 4장 있다. 그중 3장은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가 촬영한 것이고, 나머지 한 장은 촬영자를 알 수 없다.베버 총아빠스는 1911년 5월 21일 황해도 신천군 청계성당을 방문했을 때 한 혼례식에 초청받았다. 그곳에서 신부 측의 높은 손님으로 보이는 여인들이 각자 소반을 앞에 두고 앉아 있는 장면을 촬영했다.<사진 1> 이 사진은 이미 혼례식 때 소개한 바 있다. 여인들이 받은 소반 위에는 그릇 2개가 놓여 있다. 아마도 그릇에는 국수와 양념간장이 담겨 있을 것이다.
베버 총아빠스는 1925년 함경남도 안변군 내평성당을 방문했을 때 또 한 번 혼례식에 참여한다. 이때 혼례식 후 국수를 먹는 남성들<사진 2>과 여성들<사진 3>을 촬영했다. “수탉이 울고 암탉들이 그 주위에 모여드는 통에 촬영이 중단되곤 했다. 외교인들은 색다른 체험에 즐거워했다. 폭염 속에서도 촬영에 여념이 없는 총아빠스와, 새 필름을 갈아 넣을 때까지 혼례 중간에 종종 기다려야 했던 신랑 신부가 고생이었다. 혼례 장소로 쓰인 성당 마당과 정원이 넓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 일정이 너무 빠듯한 탓에 애석하게도 총아빠스는 하루도 쉬지 못하고 바로 원산으로 떠났다.”(「분도통사」 297쪽)
- <사진 4> 촬영자 미상, ‘국수 먹는 남학생들’, 1910~1945, 유리건판,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소풍 가서 국수 먹는 덕원 소신학교 학생들
베버 총아빠스는 바쁜 일정에도 한국의 전통 혼례식을 촬영했다. 그는 혼례를 마친 후 남녀가 구분되어 잔칫상을 받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남자들은 노인과 장정·어른·아이 없이 멍석에서 따로 잔치 국숫상을 받았다. 제법 큰 놋쇠 그릇에 담겨 나온 국수를 누구 할 것 없이 국물 하나 남김없이 맛있게 들이키고 있다. 장정 한 명이 참기름병인지, 간장병인지 모를 빈 병을 들고 제법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멍석은 성당에서 정말 긴요한 도구다. 볕 좋은 날에는 멍석 위에서 교리 공부도 하고 한글 수업도 한다. 또 찰고도 한다. 또 혼인성사와 같은 잔칫날이나 장례를 치를 때면 어엿한 식탁이 되기도 한다.
여인들은 남자들과 달리 툇마루에서 잔치 국수를 먹는다. 아이들을 돌보고 잔치 일을 도와야 하기에 남자들보다 여유가 없다. 한 아낙은 아예 선 채 국수를 먹고 있다. 이미 국수를 다 먹은 이들은 여유 있게 옷매무새를 바로잡고, 한 여인은 어린아이를 가누고 있다. 바로 곁에서 오른손에 젓가락을 쥐고도 이를 마다하고 국수사리를 손으로 집어 막 입에 넣으려는 여자아이가 천진하다.
국수와 관련한 또 하나의 사진은 촬영자와 연도·장소가 알려지지 않은 ‘국수 먹는 남학생들’ 이다.<사진 4> 모자 교표와 교복으로 보아 아마도 덕원 소신학교 학생들이 소풍을 가서 국수를 먹고 있는 장면인 듯하다. 덕원신학교는 1940년대에 한국 교회 중심 신학교였다. 원산은 물론 서울·평양·대구·전주·연길 등 전국 교구 신학생들이 이곳에서 공부했다. 소신학생들은 종교 수업뿐 아니라 성경과 라틴어를 배웠다. 또 여러 악기를 배우며 사제의 소양을 키웠다.
사진 속 학생들의 표정이 장난스럽다. 국수를 쉽게 먹기 위해 모자를 비틀거나 위로 올린 모습이 귀엽다. 모자챙이 구겨지고 실밥이 뜯어진 것으로 봐서 모두 엄청 개구진 듯하다. 국수 국물이 새까매질 만큼 간장을 그득 부었다. 한입 가득 국수를 채운 학생은 이제 막 시작한 듯하고, 옆의 친구는 벌써 그릇을 거의 다 비웠다. 또랑또랑한 눈빛이 호연지기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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