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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장 1-40절. 조창훈목사강해(칼빈주석에 근거)
출 25: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출 25: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고 기쁜 마음으로 내는 자가 내게 바치는 모든 것을 너희는 받을지니라
헌물- 자발적인 순종을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헌물이 강제로 부과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자기 좋을 대로 자유롭게 바치도록 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 좋을 대로 자유롭게 바치도록 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9:7)하는 바울의 말은 역사 이래 진리요 자발적이 아닌 순종은 어느 것도 하나님께 기쁨이 될 수 없다는 점은 모든 성경의 가르침이다. (이드베누)라는 단어가 번역자들에 따라서 여러 가지 의미로 번역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결론은 즐거운 마음으로 바치는 예물이 하나님께 기쁨이 된다는 것이다.
출 25:3 너희가 그들에게서 받을 예물은 이러하니 금과 은과 놋과
가난한 자들의 가난 중에 바치는 예물
하나님께서는 금, 자색실, 그리고 귀금속 못지 않게 염소의 털도 거룩한 예물로 받아 주시므로 가난한 자들이 그들의 없는 데서 바치는 것이 부요한 자들의 풍성할 때문에 빛을 잃는 일이 없다는 점이 더욱 더 확증되고 있다.
출 25:4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 실과 염소 털과
출 25:5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과 조각목과
출 25:6 등유와 관유에 드는 향료와 분향할 향을 만들 향품과
출 25:7 호마노며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이니라
출 25:8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
성막, 제단, 돌판, 언약궤는 하늘의 모형을 보여주는 그림자와 형상에 불과하다
그가 무지한 자들의 연약성을 감안하셔서 눈에 보이는 상징을 통해서 그의 은혜와 도우심이 그들과 함께 하고 있음을 증거하고자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명심할 점은 이미 지적한 대로 거기서 거했던 것은 하나님의 무한한 본질이 아니라 그의 이름, 또는 그의 이름에 대한 기록 뿐이었다는 점이다.
그 재료는 시딤나무였으며 그 위로 금 조각이 덮여 있었다. 이 나무의 종류에 대해서는 히브리인들마저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는데 다만 그것이 아름답고 귀한 것이었다는 추측만이 가능할 뿐이다.
모세에게 산에서 제시된 영적 모형에 따라서 정리되었다는 점을 명심해야겠다(출25:4). 그리고 스데반과 히브리서의 사도는, 마치 외형적인 의식에 종교가 들어 있는 것처럼, 그것들만 계속 고집하며 그것을 휘감으려 드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꾸짖고 있는데, 이것은 현명한 일이다(행7:44, 히8:5). 그러므로 성막, 제단, 돌판, 언약궤란 하늘의 모형을 보여 주는 그림자요 형상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한 스데반과 그 사도야말로 보여 주는 그림자요 형상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한 스데반과 그 사도야말로 우리에게 최선의 주석가들인 셈이다.
제 아무리 하찮은 내용이라도 거기에 풍자적인 설명을 붙이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데 법궤의 경우 그 칫수를 가지고 쓸데 없는 상상을 펴는 자들이 그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건전하고 온건한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율법이 아름다운 기구에 담겨지는 편을 택하신 것은 그 율법의 위엄이 식별되도록 하려는 뜻에서였다는 사실로 만족할 것이다.
출 25:9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모양대로 장막을 짓고 기구들도 그 모양을 따라 지을지니라
출 25:10 그들은 조각목으로 궤를 짜되 길이는 두 규빗 반, 너비는 한 규빗 반, 높이는 한 규빗 반이 되게 하고
출 25:11 너는 순금으로 그것을 싸되 그 안팎을 싸고 위쪽 가장자리로 돌아가며 금 테를 두르고
출 25:12 금 고리 넷을 부어 만들어 그 네 발에 달되 이쪽에 두 고리 저쪽에 두 고리를 달며
출 25:13 조각목으로 채를 만들어 금으로 싸고
출 25:14 그 채를 궤 양쪽 고리에 꿰어서 궤를 메게 하며
출 25:15 채를 궤의 고리에 꿴 대로 두고 빼내지 말지며
출 25:16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둘지며
율법은 증거이며 언약이며, 계약(compact)이다
율법에 대한 명칭으로 종종 사용되고 있는 증거라는 명칭이 여기에 나오고 있는데, 이것은 거기에 올바르고 거룩한 생활 원칙 이상의 무엇이 담겨 있다는 얘기다. 곧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의 백성과 묶는 계약(compact)이 담겨 있다. 그러므로 뒤에 가서는 ‘언약의 돌판’이라는 단어가 ‘증거’라는 단어 대신에 사용되고 있다. 이처럼 이 구절과 그와 비슷한 구절에 나오는 (에두트)는 흔히 약정(convention)으로 말하는 계약(contract)과 동의어다.
출 25:17 순금으로 속죄소를 만들되 길이는 두 규빗 반, 너비는 한 규빗 반이 되게 하고
속죄소는 그리스도의 덮음을 상징한다
이 명사형의 원형동사 (카파르)는 역청 물질로 칠하다이지만 그것이 힢일 변화에서는 속죄하다. 제거하다 호의로 받아들이다라는 뜻이 되며, 여기서 (코페르)는 속죄로, (카포레쓰)는 덮개나 뚜껑으로 쓰이게 되었다. 그렇지만 나는 모세의 말에는 비유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는 점을 의심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율법이란 우리의 범죄를 감추는 덮개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추측컨대 그리스도를 가리켜 (힐라스테리온; 롬3:25)으로 말하는 바울과 (라스몬; 요일2:2)으로 말하는 요한은 모두 이 상징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다.
출 25:18 금으로 그룹 둘을 속죄소 두 끝에 쳐서 만들되
출 25:19 한 그룹은 이 끝에, 또 한 그룹은 저 끝에 곧 속죄소 두 끝에 속죄소와 한 덩이로 연결할지며
출 25:20 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
출 25:21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출 25:22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출 25:23 너는 조각목으로 상을 만들되 길이는 두 규빗, 너비는 한 규빗, 높이는 한 규빗 반이 되게 하고
진설병
하나님께서 그 당시 당신에게 드려진 빵을 황금 접시에 두게 하시며 거기에 항로와 수저를 놓게 하신 것은 당신에게 먹고 마실 필요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들 가운데 식탁을 펴는 척 하심으로써 당신의 백성의 절제에 대한 의무를 규정하려는 뜻에서였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거룩한 빵을 만드는 바로 그 밀가루를 먹을 때 이 상징을 통해서 그들은 마치 그들이 한나님을 손님을 모시고 같은 식탁에 앉아서 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들의 음식을 먹고 술을 마셔야 한다는 점을 지적받았다는 얘기이다.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는 음식이 어떤 면에서 이처럼 하나님께 거룩하다는 점을 가르쳐 주신 것은 그들이 간단하고 소박한 음식으로 만족하며 당신의 예배에 바쳐진 것들을 더럽히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뜻에서였다. 그러므로 이 예물은 얼핏 터무니없고 조야한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거기에는 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그들의 식탁을 주관하셨다는 점을 인정하게 하는 올바른 의도가 담겨있었다는 그것은 그 빵이 모든 백성의 이름으로 성전에서 하나님 앞에 바쳐졌기 때문이다.
출 25:24 순금으로 싸고 주위에 금 테를 두르고
출 25:25 그 주위에 손바닥 넓이만한 턱을 만들고 그 턱 주위에 금으로 테를 만들고
출 25:26 그것을 위하여 금 고리 넷을 만들어 그 네 발 위 네 모퉁이에 달되
출 25:27 턱 곁에 붙이라 이는 상을 멜 채를 꿸 곳이며
출 25:28 또 조각목으로 그 채를 만들고 금으로 싸라 상을 이것으로 멜 것이니라
출 25:29 너는 대접과 숟가락과 병과 붓는 잔을 만들되 순금으로 만들며
출 25:30 상 위에 진설병을 두어 항상 내 앞에 있게 할지니라
출 25:31 너는 순금으로 등잔대를 쳐 만들되 그 밑판과 줄기와 잔과 꽃받침과 꽃을 한 덩이로 연결하고
등잔과 등불
하나님께서 일곱 개의 밝은 등불이 성전에서 밤 낮으로 비취게 하신 목적은, 첫째,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이 하나님을 올바르게 예배하는 방법에 대해서 당신 자신으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고 있으며 모든 오류의 흑암을 분산시킬 불빛이 자신들 눈 앞에 세워져 있다는 점을 알게 하려는 뜻에서요, 둘째, 그들이 자신들의 터무니없는 고안으로 순수한 하나님 예배를 흐리게 할 것이 아니라 율법의 가르침에 집착하는 가운데 모든 의식에 있어서 순수하고 밝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하려는 뜻에서다.
일곱 개의 환한 불을 가진 등불은 백성들에게 그들의 하나님 예배에 있어서 그들이 하늘의 가르침의 빛에 집착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시켜 주고 있었다.
이 상징에 대한 실체(the truth)가 스가랴의 환상에서 제시되고 있는데, 그것은 이 모형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적잖은 도움을 주고 있다(슥4:2). 하나님께서 거기서, 당신의 교회에 다른 모든 도움이 없을지라도 그의 성령의 능력이면 그것으로 족할 뿐 아니라 족하고도 남는다는 점을 약속하고 있다.
촛대의 재료는 순금인데 이것은 그것이 상징하는 것의 탁월성을 뜻한다.
등불을 맨 위에다 두게 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저 높은 곳에서 그의 교회를, 그것도 밤낮으로, 일깨우며 비춰 주시지 않을 경우, 인간들은 이 땅에서 흑암 속에 휩싸일 뿐이라는 점을 깨닫도록 하려는 뜻에서였다. 그러기에 이사야는 이 상징의 실제를 마침내 드러낸 그리스도의 왕국을 묘사하면서,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영한 빛이 될 것임이라”하는 말을 하고 있다. 하나님은 빛의 아버지이신만큼 조명의 은혜에는 성령 안에 있으며 여러 다양한 은사는 성령에 의해서 분배되므로 이 일곱 등불은 바울의 다음 내용을 눈에 보이게 대표하는 것이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고전 12:7-11). 하지만 일곱이라는 숫자에서 제멋대로 하나의 신비스런 해석을 끄집어 내는 사람들이 있는데 여기서 성령의 7중의 은혜라는 말이 로마 가톨릭계에 퍼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위에 인용한 사도 바울의 문장과 더 많은 숫자의 은사를 열거하고 있는 이사야서 제 11장에 의해서 충분히 반박되고 만다. 내 생각에는 오히려 일곱 등불은 이 상징의 일반적으로 인정되던 용법에 따라서 완전을 뜻하는 것 같다. 곧 하나님께서는 이런 방식을 통해서 오직 유일한 원천으로부터 완전한(full) 조명을 추구하는 신자들에게는 결코 그것이 부족하게 되지 않을 것이요, 둘째, 성령께서 모든 종교 의식을 주관하시는 가운데 교회에게 그의 은사를 밝게 비춰 주신다는 점을 밝히 선언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출 25:32 가지 여섯을 등잔대 곁에서 나오게 하되 다른 세 가지는 이쪽으로 나오고 다른 세 가지는 저쪽으로 나오게 하며
출 25:33 이쪽 가지에 살구꽃 형상의 잔 셋과 꽃받침과 꽃이 있게 하고 저쪽 가지에도 살구꽃 형상의 잔 셋과 꽃받침과 꽃이 있게 하여 등잔대에서 나온 가지 여섯을 같게 할지며
출 25:34 등잔대 줄기에는 살구꽃 형상의 잔 넷과 꽃받침과 꽃이 있게 하고
출 25:35 등잔대에서 나온 가지 여섯을 위하여 꽃받침이 있게 하되 두 가지 아래에 한 꽃받침이 있어 줄기와 연결하며 또 두 가지 아래에 한 꽃받침이 있어 줄기와 연결하며 또 두 가지 아래에 한 꽃받침이 있어 줄기와 연결하게 하고
출 25:36 그 꽃받침과 가지를 줄기와 연결하여 전부를 순금으로 쳐 만들고
출 25:37 등잔 일곱을 만들어 그 위에 두어 앞을 비추게 하며
출 25:38 그 불 집게와 불 똥 그릇도 순금으로 만들지니
출 25:39 등잔대와 이 모든 기구를 순금 한 달란트로 만들되
출 25:40 너는 삼가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양식대로 할지니라
시내산 언약 보다 그리스도 통치 때 분명한 증거
스가랴 선지자는 그리스도의 통치시대에 분명한 증거를 통해서 밝히 보여 주실 것이라고 예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