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보 기도라는 용어의 사용 문제
1. ‘중보’라는 용어
‘중보 기도’라는 용어의 사용을 꺼리는 제일 중요한 이유는 ‘중보’(中保)라는 용어를 과연 예수님 외의 다른 사람에게 사용할 수 있느냐 하는 의문일 것이다. 디모데전서 2장 5절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말한다.
여기서 ‘중보’(中保)란 단어의 원어는 ‘메시테스’이다. 이 단어의 뜻은 바우어 사전에 의하면 ‘의견 불일치를 제거하거나 공동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두 편 사이에서 중재하는 사람’(one who mediates betw. two parties to remove a disagreement or reach a common goal)으로 풀이하고 있다. 곧 ‘중재자’(mediator), ‘조정자’(arbitrator)란 뜻이다. 그리고 히브리서 8:6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더 좋은 언약의 중보’라고 말한다. 히브리서 9:15과 12:24에서는 ‘새 언약의 중보’라고 말한다. 이상의 구절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 중재자 되심을 말한다. 곧 예수께서 우리 인간의 죄를 대신 담당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원수 되었던 것(죄)을 치우시고 화목해 하셨다는 의미이다(롬 5:8-11).
그러나 갈라디아서 3:19은 모세에 대해 ‘중보’(메시테스)라고 말한다. 곧, 율법은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려 베푸신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중보’란 모세가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서 중간 매개자 역할을 한 것을 가리킨다. 이처럼 ‘중보’란 말은 그리스도 외의 인간에 대해서도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모세는 그리스도의 예표(豫表)로서 특별한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중보(자)’란 말을 무분별하게 아무에게나 사용하면 안 된다. 하지만 성경은 ‘중보(자)’란 말을 반드시 ‘그리스도’에게 대해서만 제한적으로 사용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어서 나오는 20절에서는 “중보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라”고 말한다. 여기서 ‘중보’란 단어는 단지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중보’의 성격, ‘중보’의 본질에 대해 설명한다. 따라서 ‘중보’란 단어 자체는 원래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배타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넓은 의미에서 두 편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용어임을 알 수 있다.
2. ‘중보 기도’라는 용어의 문제
그렇다면 우리는 ‘중보 기도’라는 용어를 사용해도 좋은 것일까?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헬라어 단어(엔튕카노 휘페르, 휘페르엔튕카노)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실 때(롬 8:34, 히 7:25), 또는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실 때 사용되었다(롬 8:26). 반면에 사도 바울은, 자기가 교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한다고 말할 때와 성도들에게 기도를 부탁할 때에 주로 ‘... 위하여 구하다/간구하다/기도하다’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성경의 용례에서 우리는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겠는가? 먼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위하여 간구하다, 중보하다”(엔튕카노 휘페르, 휘페르엔튕카노)란 단어는 그리스도와 성령에 대해서만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성도들이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할 때에는 ‘위하여 구하다, 간구하다, 기도하다’(데오마이, 아이테오, 프로슈코마이 휘페르)가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용례에 의하여 ‘중보 기도’란 용어를 예수님과 성령의 간구에 대해서만 사용하도록 제한하여 한다고 하는 주장이 타당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다. 왜냐하면 ‘간구하다, 중보 기도 하다’(엔튕카노)는 동사의 명사형인 ‘엔튝시스’(도고, 중보 기도)가 디모데전서 2:1에 그대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디모데전서 2:1의 ‘엔튝시스’는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나아가서는 모든 성도들에게 권면하는 기도의 종류 중에 나온다.
개역판 성경에는 ‘도고’(禱告)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이 단어의 동사형(엔튕카노 휘페르, 휘페르엔튕카노)은 로마서 8:26,34과 히 7:25에서 그리스도와 성령이 우리를 ‘위해 간구하다’로 번역되어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성령의 우리를 위한 간구를 ‘중보 기도’라고 말한다면, 성도들이 성도들을 위해 하는 간구를 ‘중보 기도’라고 부르지 말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원어상 둘 다 동일한 단어에서 왔으며, 성경이 구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성도가 성도를 위해 간구하는 것을 ‘도고’라고 부르고 ‘중보 기도’라고 부르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것도 ‘도고’라고만 부르고 ‘중보 기도’라고 부르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처럼 성경은 ‘기도’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성령의 ‘중보 기도’와 성도들의 ‘중보 기도’를 언어적으로 구별하지 않고 있다.
나아가서 ‘중보(자)’(메시테스)라는 단어에 대해서도 꼭 그리스도에게만 제한적으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다. 모세에 대해서도 ‘중보’라는 단어를 사용했으며(갈 3:19), 나아가서 ‘중보(자)’란 단어는 원래 두 편 사이에서 중재하는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용어임을 말하기도 했다(갈 3:20). 따라서 우리는 ‘중보’라는 단어에 대해 너무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