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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원하시는 하나님
로마서 2:17-29 /권오진 목사
명절 때마다 빠지지 않고 나오는 뉴스 가운데 하나가 <과대포장>에 대한 것입니다. 내용물을 보호하고, 돋보이기 위해서 포장을 하는데, 내용물의 본질은 오간데 없고 포장에만 신경을 써서 선물을 받은 사람들도 실망시키고, 후에 포장재로 인해서 환경을 오염시킨다는 것입니다. 과도한 예를 들어보면 포장박스는 <영주한우>라고 멋지게 만들어 놓았는데, 내용물은 한우가 아닌 <돼지 뒷다리 살>이 들어 있다면 선물을 받는 사람의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실망을 할 것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이 바로 이런 내용입니다. 바울은 로마교회에게 편지를 쓰면서 이방인의 죄를 1장에 지적한 후에, 2장에서는 유대인의 잘못을 신랄하게 지적합니다. 본문 말씀에 유대인의 잘못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을 시작하는 말씀을 보세요. 17절에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라고 시작합니다. 이 표현은 유대인들의 긍지를 꼬집는 말입니다. <유대인이라고 우쭐대는 자네 말이야 …>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유대인들의 특권의식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이었습니다. 그들이 쓴 글 중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유대인은 하나님 앞에서 개인 자격으로 심판을 받지 않는다. 국가적으로 민족적으로 구원의 약속을 받기 때문에 개인은 자동적으로 그 구원에 포함된다.
할례만 있으면 비록 죄인이라도, 순종치 않아도 아브라함의 혈통을 타고난 자손들은 천국을 상속받게 된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은 <지옥불의 땔감>정도로 여겼습니다. 문제는 이런 특권의식에 빠져 있는 유대인들을 바울이 보니 보통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인의 실체를 발가벗기며 이것이 현재 너희들의 실체야! 하고 말씀한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바울은 유대인의 종교적 이점과 특권(17-20)을 네 가지씩 소개합니다.
1) 유대인의 종교적 이점(17-18절) ①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에게 율법을 주셨다. ② 하나님께서는 유대인과 특별한 언약을 맺으셨다. ③ 유대인은 율법을 받았기 때문에 그분의 뜻을 안다. ④ 인간의 도덕 표준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그것(善)만을 인정한다.
2) 유대인의 종교적 특권(19-20절) ① 소경들을 인도함 ② 어둠에 있는 사람들에게 빛이 되어 줌 ③ 어리석은 자의 교사가 됨 ④ 어린 아이들의 선생이 됨 유대인의 이런 이점과 특권을 잘 활용하여 멋지게 살았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의 현실은 21-23절 말씀과 같았습니다.
같이 읽어볼까요?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율법을 받아 알고는 있었지만 삶에서는 율법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8계명 <도둑질하지 말라>를 가르치고는 그들이 – 도둑질했고, 7계명 <간음하지 말라>를 가르고는 그들이 – 간음했습니다. 1-2 계명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 /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절하지 말고, 섬기지 말라>는 말씀을 가르치고는 정작 자신들은 신전에 있는 물건은 진짜 신에게 바친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그 물건을 가져갔습니다.
그러면 우상 숭배하는 것과 무엇과 차이가 나느냐며 바울이 지적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유대인들은 <말로는 가르쳤지만, 삶은 따라가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말로는 가르쳤지만 삶이 따라가지 못한 유대인을 묵상하다보니 얼마 전 읽은 <인도 우화> 하나가 생각이 났습니다. 고대인도 왕궁에 <왕자와 왕자의 사촌들을 모아 놓고 공부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있습니다.> 왕자는 다섯 명이었는데 맏아들이 가장 똑똑해서 선생님은 앞으로 이 나라는 맏아들이 왕위를 이어받을 것이라고 특별히 신경을 써서 가르쳤습니다.
어느 날 선생님은 왕자들을 모아 놓고 어디까지 책을 읽고 공부했는지 물었습니다. 동생들부터 답을 하는데 모두들 열심히 책을 읽고 공부를 했다고 대답을 합니다. 드디어 맏이차례가 되었습니다. 맏이는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밝고 행복하게 대답했습니다. <예, 저는 글자를 익혔고, 이제 첫 문장을 배웠습니다.> 선생님이 놀라서 물었습니다. “그게 전부인가? 그 이상은 배운 것이 없는가?” 그러자 맏이가 약간 주저하며 말했습니다.
<어쩌면 두 번째 문장도 … > 선생님은 맏이의 말을 듣고 화가 났습니다. 누구보다 부지런히 높은 지식과 지혜를 배우기 위해 공부에 전념하리라 기대했는데, 확인 결과 동생들보다 굼떴으니 기막혔던 것입니다. 선생님은 맏이를 당장 자리에 일어서라고 명령합니다. 선생님의 평소 교육지론은 <매를 아끼는 것은 아이를 망치는 길>이라고 믿었기에, 맏이에게 종아리를 걷게 한 후 사정없이 회초리로 후려쳤습니다. 선생님이 잔인할 정도로 매를 휘둘렀지만 맏이의 모습은 이상할 만큼 평온 했습니다. 매를 맞기 전과 다름없이 밝고 행복한 표정이었습니다. 선생님이 지칠 때까지 맏이에게 매질을 가했지만, 맏이의 얼굴에는 <분노나 두려움, 억울함 같은 감정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선생님의 마음도 차즘 진정되었습니다. 선생님은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왕자이기에 말 한 마디로 나를 파면할 수도 있고, 언젠가는 나를 다스리고 인도 전체를 통치할 이 소년이 어찌 이리 평온한가? 가혹하게 매질을 당하면서도 조금도 분노하지 않는다. 다른 동생들은 내가 엄하게 대할 때마다 분개했고, 내 회초리를 잡아채 나를 때리기까지 했는데, 맏이는 전혀 화를 내지 않는다. 변함없이 명랑하고 침착하고 차분하다> 그때서야 선생님의 시선이 배웠다는 첫 번째 문장에 꽂혔습니다.
인도 초급교과서에는 <우리나라 초등학교 1학년 책과 같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교과서 내용은 인생의 조언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이 쓰는 알파벳이 먼저 나온 후에 ... 첫 번째 나온 문장은 <화내지 말라. 결코 흥분하지 말라. 이성을 잃지 말라>이였습니다. 이어져 나온 두 번째 문장은 <진실을 말하라. 언제나 진실만을 말하라> 이였습니다. 맏이는 선생님의 숙제 질문에 처음 대답할 때 <첫 번째 문장을 배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약간 망설이면서 두 번째 문장을 배웠다고 말하려고 하다가 멈췄습니다.> 선생님은 첫 번째 문장을 다시 읽고 있었습니다. <화내지 말라. 결코 흥분하지 말라. 이성을 읽지 말라> 선생님은 그 말을 읽고, 자신이 맏이하게 한 행동을 돌아보면서 맏이를 꼭 껴않아 준 다음 맏이에게 말합니다. “적어도 한 문장을 진정으로 배운 것을 축하한다. 나는 그 한 문장조차 제대로 배우지 못했고, 알지 못했다. 쉽게 화를 내고 흥분해서 냉정과 이성을 잃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든 나를 화나게 할 수 있다.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네가 더 많이 알고 있다. 네가 나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 네가 나보다 더 많이 배웠다.”
여러분 왕자를 가르치는 선생님의 모습이 <유대인>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종교적 이점, 특권을 가지고 있었고,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그들은 십계명도 지키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유대인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는커녕 모독을 받게 되었다고 24절에서 쇄기를 박아버립니다.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24절)
여러분 이스라엘의 존재목적이 무엇입니까? 그들의 존재목적은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성품을 세상에 알리고, 다른 민족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할 때 성전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라고 선포 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전 세계를 구원하라는 <선교적인 사명>을 받은 백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사명을 완수하지 못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도 이점을 질책합니다,
에스겔 5:5-6a “주 창조주께서 이와 같이 이르시되 이것이 곧 예루살렘이라 내가 그를 이방인 가운데에 두어 나라들이 둘러 있게 하였거늘 ○ 그가 내 규례를 거슬러서 이방인보다 악을 더 행하며 내 율례도 그리함이 그를 둘러 있는 나라들보다 더하니” 그래서 결국은 심판을 받게 됩니다. 에스겔 5:15 “내 노와 분과 중한 책망으로 네게 벌을 내린즉 너를 둘러싸고 있는 이방인들에게 네가 수치와 조롱 거리가 되고 두려움과 경고가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런 과거의 아픈 역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자신의 포장>을 자랑합니다. 우리가 이런 사람이야! 하면서 겉포장 이야기합니다. 그 겉포장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할례>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례를 받게 된 유래는 창세기 17장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며 두 가지 약속을 주셨습니다.
①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하는 것 창 17:4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② 하나님과 관계 맺음 창 17: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이 약속을 주신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신 것이 “할례”였습니다. 창 17:10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이렇게 시작된 것이 할례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할례를 행하고 할례의 표를 몸에 지니며 <하나님과 이런 아름다운 관계를 맺은 것에 늘 감사하며 살았어야 합니다.> 매일 매일 “맞아, 자격 없는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하나님처럼 거룩한 삶을 살아야지”결단하며 살아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그 귀한 마음과 정신을 잃어버렸습니다. 정신은 잃어버린 채, 나중에는 할례 자체가 구원 얻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 시대까지 그러했습니다. 마음은 없어도 할례만 받았으면 구원 받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 말씀 25-29절 말씀이 그런 내용입니다. 같이 읽어보십시다. “25.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 26.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27.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 28.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29.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사실 이런 지적은 사도바울이 처음 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하기 700년 전쯤 활동한 예레미야 선지자도 이에 <유대인의 할례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예레미야 9:26 “무릇 모든 민족은 할례를 받지 못하였고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느니라 하셨느니라.” 예레미야 시대에도, 바울사도의 시대에도 유대인들은 몸에만 할례의 표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지적한 할례에 대한 부분을 표로 이해하기 쉽게 만들어 보았습니다.
할례자(유대인) + 율법 × = 무 할례 자(효력) 무할례자(이방인) + 율법 ○ = 할례 받은 자(효력) 바울이 소개한 두 번째 무 할례자는 초대교회 성도들을 말하는 것을 보여 집니다. 초대교회 많은 이방인이 성령을 받아,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쓰고, 말씀대로 살았더니 그들은 하나님의 칭찬을 받았고, 구원받게 된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자 말씀을 정리해 보십시다. 사도바울은 유대인이 하나님께 엄청난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관리하지 못해서 비참한 결과를 맞았음을 말씀합니다.
여러분 <유대인>이란 호칭은 언제부터 불렀는지 아십니까? 유대인의 호칭은 바벨론 70년 포로생활을 마치고 귀한 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유대인>이라고 불렀습니다. 바벨론 포로 전에는 <남 유다, 북 이스라엘>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남 <유다>라는 말은, 이스라엘 12지파 중에 <유다지파>의 이름이고 유다지파의 조상은 야곱의 12 아들 중에 <유다>에서 시작됩니다. <유다(야곱의 4째 아들) → 유다지파 → 남 유다(북이스라엘) → 바벨론포로에서 귀한 → 유대인> 유다 – 이름의 뜻은 “찬송 혹은 칭찬”이란 뜻이 있습니다. (창 29:35 / 창 49:8)
하나님은 유다의 탁월함으로 인해서 나머지 11형제에 의해서 찬송 받고, 칭찬 받는 자가 될 것이라고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유다에서 발전되어 유대인으로 불린 그들은 주변 열국에게 칭찬받고, 찬송받기는 커녕 본문 24절에 기록된 대로 <유대인들도 모독을 받게 되고, 유대인들로 인해서 하나님의 이름도 모독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유는 그들의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 거창한 포장 - 빈 내용물 = 하나님과 사람에게 실망시킴 포장은 영주한우 – 내용은 돼지고기 뒷다리 살 = 받는 사람은 실망함 본문에서 하나님은 이런 말씀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나는 너희의 겉모습 포장을 원하지 않아! 너희의 마음을 원하고 있어!> 이는 다윗을 선택하실 때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말씀하신 내용과 같습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하나님은 언제든 우리의 마음 중심을 보시고 칭찬하시고, 책망하신다는 것입니다. 자 그럼 오늘 본문 17절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라는 말을 우리에게로 가져와 적용시켜 보십시다. 이 말씀을 여러분의 직분에 적용시켜 보세요. “목사라고 불리는 네가” “장로라고 불리는 네가” “안수집사로 불리는 네가” “권사로 불리는 네가” “서리집사와 성도로 불리는 네가” 라고 할 수 있지요. 오늘 우리도 많은 특권을 가졌습니다. 몇 대 신앙을 이어받았습니다. 세례 받고, 성찬에 참석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다 보니 직분도 받았습니다.
교회 안에서 사람들에게 인정도 받았습니다. → 그냥 이대로 살면 당연히 구원 받을 줄 압니다. 그런 우리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야! 너 포장을 보지 말고, 저 중심(마음을 들어다 봐줄래) 그리고 그 마음을 나에게 주고 있는지 확인해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제 질문에 답을 해 보십시오. 오늘 한국교회 내에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의 마음이 있습니까? 오늘 우리교회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의 마음이 있습니까? 오늘 여러분의 가정에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의 마음이 있습니까?
오늘 여러분 각자의 마음에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의 마음이 있습니까? 아니면 지금 <한국교회 안에, 우리교회 안에, 내 안에> 예수님과 예수님이 마음이 없어서 오히려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모독할 빌미만 제공하지 않습니까?> 지금 세상은 기독교를 욕합니다. 지금 세상은 목사를 욕합니다. 지금 세상은 기독교인을 욕합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오늘 우리의 모습이 겉포장만 번드르르 했던 유대인과 같이 되었기 때문이 아닙니까? 이제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의 포장이 아니라, 너의 마음이다. 그 마음을 나에게 줄래!” 라고 말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고백하십시다. <예, 주님, 이제부터 제 마음을 온전히 드리겠습니다.>고백한 대로 사시기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