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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분옥론
-사상보다 더 깊은 사람, 사람보다 더 멋진 사랑 -
권대근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묏버들 갈해 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대
자시는 창 밧긔 심거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닙 곳 나거든 날인가도 너기소서
- 홍랑, 시조 중에서 -
I. 열며
내용이 무엇이든 언술구조가 어떠하든 수필은 제재에 주제를 담아 화살로 쏘아 올려야 문학이 되는 것이다. 정서니, 사상이니, 상상이니 하는 문학의 구성요소도, 참신성, 형상성, 함축성, 탄력성이니 하는 문학의 네 가지 속성을 갖추어도 주제가 전략화 과정을 거쳐 작품 속에 내재화되지 않으면 아무리 수필의 주제가 인간학을 지향하고 있어도 작문이 되고 만다. 좋은 수필은 반드시 주제가 문학적으로 형상화되어 나타나야 한다. 삶이니 진실이니 하는 특성의 실현보다 앞서는 게 수필문학 본질의 구현이다. 실감의 유리와 보수를 통해 미적 정서로 새롭게 태어난 주제가 마치 사과 속에 녹아 있는 영양분처럼 작품의 전체 구조 속에 진리와 함께 숨어있어야 하는 법이다. 이러한 논리를 전제로 할 때, 한분옥의 인물수필은 문학으로서의 격과 프레임을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명사형으로 되어 있는 제목에서도 수필의 품격은 드러난다.
<백년의 적의>는 우리의 기억 속에 살아있는 동서양의 위인을 제재로 해서 쓰여진 수필로서 대체적으로 주제가 제재에 실려 간접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문학적 성취도가 높은 편이다. 형식적인 구조에서 오는 미적 즐거움뿐만 아니라 인식구조에서 오는 내용도 감동을 준다. 여성 특유의 언술구조 속에 나타난 솔직하면서도 담백한 문장의 맛은 에세이의 진수를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항우의 애비 <우미인>에서 신라의 불상의 미학을 묘파한 <반가사유상>에 이르기까지 한분옥 수필 전부를 한 자리에 모아놓고 보니, 무엇보다도 그녀만의 특유한 문학적 특성이 드러난다. ‘세계인물사’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 정도로 동서고금의 걸출한 인물들이 총망라되어 있다. 이 수필집을 읽히게 하는 기본 동력은 역사의 한 페이지를 풍미한 분들의 삶과 그 사상을 그녀 특유의 여성적 감수성으로 그리고 따뜻한 시선과 어조로 그려나가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겠다.
II. 펼치며
수필을 읽는 맛은 두 가지 통로를 통해서 느낄 수 있다. 하나는 작품의 전체 구조 속에 숨겨진 주제를 작가가 어떻게 문학적으로 형상화해 놓았는가 하는 물음에 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에서 얻어지며, 다른 하나는 작가의 다채로운 내면 풍경을 따라가며 작가의 인간적 체취를 느끼는 데서 나온다. 그래서 수필을 ‘보물찾기’에 비유하는 것이고, ‘인간학’이라고 하는 것이다. 황진이, 매창과 함께 조선의 3대 시기(詩妓)로 꼽히는 <김부용>의 사랑을 평가하면서 ‘상대는 천하의 현관(顯官) 판서대감이요, 그 상대는 비천하기 그지없는 한갓 수청 기생에 불과하건만 주고받는 사모의 정에 어찌 귀천이 있을 수 있을까’라고 한 데서 추론할 수 있듯이 한분옥이 수필 속에서 부르짖고자 하는 메시지는 바로 ‘사랑의 위대성’이다. 특수성을 보편성으로 만들어야 독자를 공감대에 세울 수 있고, 감동의 고지로 몰아갈 수 있다. 이 수필집을 감상하는 포인트는 진정으로 사랑한 여인들에게 한분옥이 내리고자 하는 옷, ‘적의’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 있다. 그녀는 사생사사, 사랑에 죽고 사랑에 산 역사적 여인들에게 왕후의 대례복을 입혀주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한분옥의 인식론적인 관점은 그녀를 초월론적 현상학적 주체로 만든다.
필자는 수필의 참신한 맛은 관조라는 작가의 개성적 묘사에서 우러난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체험의 나열화로 얻는 일상적인 느낌보다는 제재의 의미화를 통한 미적 형상화가 주는 참신함이 더 수필적 감흥을 불러온다는 것이다. <논개>에서도 우리는 ‘적의’의 이미지를 확인할 수가 있다. 적장을 껴안고 남강에 몸을 던진 논개의 충정을 높이 평가하면서 작가는 ‘테양이 떠오르는 그날까지’ ‘그대 붉은 혼은 천추에 지지 않는 꽃이 되어’ ‘뜨겁게 태양을 달구는 식지 않는 사랑’ 등의 이미지를 논개의 사랑에 덧씌우고 있는 것이다. 이런 한분옥의 서술전략으로 인해 수필은 더 문학적 향취를 거둔다. 한분옥 수필은 경험을 넘어 위대한 삶을 살았던 위인들의 사상에 대한 본질적 의미를 찾고, 그 의미에 적절한 이미지를 덧씌우는 정서의 객관화를 통해 독자들을 미적 사유로 안내한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결국 수필을 쓴다는 것은 어떤 대상으로부터 특별한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인 것이다. 관조하는 작가의 주관에 의해서 인물의 소성이 교감되고 새로운 의미가 부여될 때 비로소 문학성이 수필에 담기는 법이다. 자신만의 렌즈로 걸러진 한분옥의 주옥같은 수필들은 문학보다 더 깊은 철학적 사유 위에서 위대한 인물의 삶을 다양한 이해 방법론을 통해 감성과 지성으로 분석하고 있어 독자의 관심을 충분히 끈다고 하겠다.
수필을 관조의 문학이라고 할 때, 한분옥의 수필은 조금도 그 궤를 벗어나지 않는다. 관심이 있는 것이면 모두 수필감이 된다. 다시 말해 ‘볼’ 시視의 차원이 아니라 ‘볼’ 견見의 차원으로 나아가서 종국에는 ‘볼’ 관觀의 경지에 도달해 있다. 수필은의 출발점이 제재라면, 결승점은 그것의 의미화다. <언로, 시의 길>에서 한분옥은 ‘365일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사막에서 어쩌다 내리는 밤이슬 한 방울 받아먹은 선인장의 가시 같은 눈물이…. 황량한 고비에서 뜨거운 눈물, 뜨거운 세월이 누른 황하로 흘러간다.’라고 하면서, 고비사막에서 흘리는 눈물이 ‘시의 길’임을 비유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주제의식을 제재와 연결시켜내는 것이 수필을 문예화하는 데 중요한데, 지금까지 한분옥은 이런 일을 잘 해내고 있다. 그녀가 보내온 사십두 편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관조미학의 토대 위에서 빛나는 인물수필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언로, 시의 길>은 확실히 남다르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곳에 감춰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보아야 할 것을 찾아 조리개를 맞추는 데 남다른 열의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그녀의 믿음직한 도전을 우리는 수필 <언로, 시의 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오뉴월에도 감기 몸살에 오슬오슬 소름이 돋고 추위는 떠나지 않았다. 지나가는 바람자락에도, 따뜻한 말 한마디 그 인정에 애를 태우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어디론가 떠날 때 혼자 사막을 꿈꾸었다. 내 속에 있는 황량한 모래 바람과 열기는 고비에 와서 더욱 달달 볶이고 있다. 나는 열차를 타고 가고 있지만, 창밖에 뜨거운 사막을 걸어가는 또 하나의 나 자신이 나란히 가고 있다. 나는 어떤 경치를 찾아 나선 것도, 이국 풍물을 보고 즐기려 나선 것도 아니다. 늘 존재의 중심 밖에서 서성거리던 자신이, 존재의 중심을 찾아 무의식에서 내친걸음일 뿐이다.
- <언로, 시의 길> 중에서 -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역사는 실제 있었던, 일어났던 사실 하나하나를 그대로 말한다. 반면에 문학은 실제로 일어났을 수 있는, 일어났을 법한 이야기를 쓴다. 그것은 추측이나 상상, 아니면 사건의 자초지종을 보고 당연히 이렇게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추리와 당위성에 의거한 서술을 말한다. ‘언로, 시의 길’은 ‘의식의 나’와 ‘무의식의 나’가 함께 존재하면서 문학의 길이 얼마나 힘든지 구체어인 ‘고비사막’을 제재로 해서 실감나게 전개되고 있다. 따라서 문학은 역사보다 훨씬 진지하며 철학적인 진리성에 가까운 것을 추구한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문학이 보다 깊은 철학일 때 우리는 위인과 만날 수 있다. ‘나는 열차를 타고 가고 있지만, 창밖에 뜨거운 사막을 걸어가는 또 하나의 나 자신이 나란히 가고 있다.’는 진술보다 더 의미있는 철학적인 표현이 어디 또 있을까. 이 수필 외에도 감성의 향기가 세포 속으로 스며들어 오는 <우미인> <별리> <에밀리 브론테> <시몬 드 보바르> <마그릿 생어> <이중섭> <연암 박지원> <반가사유상> 등의 작품을 집중 분석해 보겠다. 수필이 요리라면, 구체어는 연상과 상상을 통한 미적 사유로 독자를 유도할 수 있는 조미료라 하겠다.
1. 운명적 사랑과 이별의 정한
칸트에 의하면 예술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논의 또는 평가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그의 미학적 또는 심미적 취향은 극과 극의 중간쯤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제시된 작품의 가치를 판단함에 있어서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어떤 공통된 그리고 정당한 기준이 존재 가능하다는 가정 위에 성립한다. 이와 같은 가정 위에서 한분옥 수필의 즐거운 가치평가는 탁월한 해석력에서 가능해진다. 바슐라르 이론에 의하면, 문학적 상상력은 물질적 상상력과 원형적 상상력을 양극으로 하고, 역동적 상상력이 물질적 이미지를 변형 발전시켜 나가면서 미지의 보편적 가치를 찾아가는 탐색자 역할을 수행한다. 따라서 미는 상상력의 가장 탁월한 활동 그 자체이며, 상상력은 미학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과거의 체험이 현재의 의식화된 체험 속으로 들어오는 길은 상상의 문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이로 말미암아 과거의 체험은 인간의 심리 속에서 현재의 체험과 결합되고 재구성되어 사실 그대로가 아닌 새로운 체험세계를 창조하게 된다.
한분옥의 수필은 이러한 바슐라르의 이론처럼 상상력과 미의식의 관계를 통해 구축되고 있어 우리는 체험이 문학적으로 어떻게 변용되는지 그 과정을 행복하게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녀의 수필집을 통해 한 작가가 지난 10년 동안 신문 또는 문학지에 연재해오면서 인물연구에 시달려야 했던 고독과 그 시간을 이겨내는 지혜를 함께 읽어나갈 수 있다. 앎에의 기쁨, 성취감, 자아실현이 주는 생기발랄함은 그 어떤 연출가도 잡아낼 수 없는 영혼으로 빚은 예술이다. 무엇보다도 고생을 투자해서 얻어가는 정신적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 쉽게 평가할 수 없는, 유한한 삶 자체에 대한 고민과 그것을 넘어서려는 몸부림이 이 수필집에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인물에 대한 그녀의 천착이 주는 감동은 수필에 재미까지 더해 준다. 인물로 본 사상사라고 해도 될 만한 이 작품은 생활수필을 거부하고 당당하게 인물수필과 마주하고 있다. 깊은 공감과 찬탄으로 가득한 <백년의 적의>는 우리에게 살아가면서 가장 크게 부딪히는 주제인 ‘사랑과 죽음’ 사이에 가로놓인 진실을 파헤친다.
예술의 가장 본질적 조건이 상상의 문을 통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인지한 한 작가는 상상력에 의한 수필의 예술성이 어떻게 가능한지 이 수필집을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 상상에 의한 유추와 상상의 기법을 극대화해 나가는 것만큼 예술성을 높이는 데 효과적인 방법은 없다. 발레리는 문학 속에서 사상이란 과일 속에 묻혀 있는 영양소와 같이 숨겨져 있어야 한다고 했다. 엘리어트는 문학은 사상을 장미꽃 향기와 같이 감각화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문학의 내용에 어떤 사상이나 이념을 시도할지라도 그것이 문학이 되기 위해서는 ‘사상의 정서화’, 이념의 감각화, 내용의 형상화가 철저히 이루어져야 한다. 사상 감정의 정서화는, 신선한 상징들이 신선한 미적 감각을 우려내어 감동을 전해준다고 하겠다. 물론 상상도 관념연상을 일으키지만 진폭이 다양하고 깊기 때문에 작가로서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라 하겠다. 대다수의 수필은 위에서 말한 사상의 정서화나 이념의 감각화, 내용의 형상화가 아주 잘된 작품이다.
그녀의 무덤가엔 해마다 우미인초(개양귀비) 가 바람에 흐느끼듯 피고 있다. 지금 또한 정치의 계절이다. 그 어느 때보다 권모와 술수가 팽배한 링 위의 주자들을 지켜보고 있다. 시대의 승리자가 반드시 역사의 승리자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던가. 그렇다 역사는 언제나 정의의 편에 손을 들어준다는 사실로 존재한다
- <우미인> 중에서 -
항우가 자신의 애비였던 우미인에게 읊은, ‘힘은 산을 뽑을 만하고 /기운은 온 세상을 덮어도 /때가 이롭지 못하니 추도 가지 못하네/ 추가 가지 못하니 어이하리/ 우(虞)여, 우여 너를 어이 하리’라는 시를 듣고, 우미인은 항우의 칼을 뽑아 그 자리에서 자결하고 마는데, 작가는 이를 ‘이별보다 차라리 죽음을 택한 갸륵한 용단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우미인의 죽음에 오열하던 항우는 사력을 다한 전투로 적의 포위망을 뚫고 나아갈 수 있었으나 전쟁에서 대패한 장수로서의 책임감에 자신 또한 오강(烏江)에 이르러 스스로 목숨을 거둔다. 이 글에는 영웅과 미인 사이에 전개된 진실한 사랑의 풍경이 절경처럼 그려져 있다. 권모술수가 판치는 정치의 세계, 그곳은 성인聖人의 무대가 아니라 야심가들의 지략이 판치는 독무대라는 깨우침 속에 작가는 결말부에 가서, ‘지금 또한 정치의 계절이다. 그 어느 때보다 권모와 술수가 팽배한 링 위의 주자들을 지켜보고 있다. 시대의 승리자가 반드시 역사의 승리자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던가. 그렇다. 역사는 언제나 정의의 편에 손을 들어준다는 사실로 존재한다’ 라는 메시지를 들려준다. 목숨을 내던지는 진정한 사랑을 역사의 승리자로 환치시킨 데 힘입은 논리가 설득력을 가지면서 이 수필은 사랑의 진정성에 대한 가치를 한층 드높이는 것 같다. 아름다운 참패를 통해 역사의 승리자가 된 항우와 자결로 사랑을 보여준 우미인을 다시금 생각한다. 아름다운 사랑은 이런 비극적인 결말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일까.
문학이 독자의 감동을 목적으로 한다는 본질을 생각할 때 공감을 주는 설득력은 필수적이며 또 연상에 의한 복잡한 내면의 심상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감각적 접근과 함께 다양한 비유의 구사도 필요할 것이다. 특히 심상에 의한 참신한 기법 같은 것도 시도해 볼 필요가 있겠다. 수필이 어떻게 사실의 세계에 충실하면서도 이를 초월한 상상의 예술세계를 이런 기법으로 구축해 나갈 수 있는지를 보여줄 수 있는 뛰어난 작품의 하나가 한분옥의 <우미인>이라 하겠다. 이 작품의 발단은, 늦가을 국화를 독자에게 상기시키며, ‘국화를 보면 절개 높은 여인을 생각하게 되고, 불굴의 기백을 지닌 사나이가 생각난다’로 시작하면서, 그녀는 작중 인물, 항우와 우미인 두 사람간의 진정한 사랑을 국화 이미지에 덧씌우는 데 성공한다. 두 사람 모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 지점에서 우리는 절절한 사랑의 위대한 힘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우미인은 살아남아 적군의 전리품이 되어 적장의 노리개가 되는 걸 원치 않았던 것이다. 정의를 내세웠다가 역사에 참패하고, 사랑하는 사람마저 죽게 만든 역사의 아이러니를 안타까워 하면서도, 작가는 시대의 승리자가 역사의 승리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판단을 고수한다. 이 수필은 시대의 승리자보다 역사의 승리자가 되기 위해 정의를 택한 위대한 이들에게 바치는 헌사로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선조 원년(1568)에 등과하여 북도평사로 변방인 경성에 와 있을 때 홍랑과 고죽은 서로의 고독과 애정을 문학과 풍류로서 정을 나누었다. 신분의 차이로 이루지 못할 사랑을 홍랑의 가슴에 새겨놓고 다음 임지(臨地)인 서울로 훌쩍 떠나가는 임을 영흥까지 배웅하고 함관령에 이른다. 저문 날 흩날리는 꽃바람 속에서 기약할 수 없는 이별을 어쩔 수 없어 묏버들 가지를 꺾어 자신의 사랑이 지순함을 전한다. 헤어짐의 아픔과 안타까움에 흐르는 눈물 보이지 않고, 차라리 슬픔은 속으로 감추며 시 한 수로 이별을 고한다. 많은 기류(妓類)의 작품이 있고 또 있지만 이렇게 품위 있는 작품은 드물지 않던가. 한갖 기생의 사랑이라 하지만 또 이만큼 격조 있는 사랑이 또 있으랴.
- <별리> 중에서 -
최경창과 부인의 합장묘 밑에 홍랑의 묘를 쓰게 한 최씨 문중 사람들도 대단한 것 같다. 묘 입구에 있는 홍랑의 앞면에는 고죽의 시가, 시비 뒷면에는 홍랑의 묏버들 시조가 있는데, 한분옥은 못다 한 사랑을 죽어서나 한 몸 되어 지내라는 후인들의 뜻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 수필은 3년이란 묘막살이 힘든 삶을 이겨내고, 임진왜란 때는 사랑하는 이의 문집을 들고 피난을 떠난 홍랑의 절의를 잘 담아내고 있다. 진실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고통과 함께 있다. 이 수필은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차가운 진실을 사랑하고, 내면의 고통을 껴안아, 자신을 배반하지 않는 모습으로 살아남게 하는 아름다운 예술이어야 함을 보여주는 것 같다. 수필의 화소는 적어도 가치있는 것이어야 하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어야 한다고 했을 때, 홍랑의 사랑 이야기는 충분히 가치있고, 그 사랑은 누가 봐도 멋지고 아름답다고 하겠다.
한분옥은 죽음을 불사하는 홍랑과 최경창의 사랑을 다루면서, 다른 수필들과는 달리 왜 홍랑의 이야기를 ‘홍랑’이라 제목을 짓지 않고 ‘별리’라 명명했을까. 만약 ‘홍랑’이라고 하면 이야기의 무게 중심과 축이 홍랑에 더 기울지만, ‘별리’로 하면, 최경창과 홍랑의 이별에 포커스가 맞추어진다. 이 점을 작가가 잘 간파했다고 하겠다. 작가는 사랑은 헤어짐과 언제나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이고, 누군가를 사모한다는 것에는 고통이 따른다고 하면서, 그렇다고 사랑 없이 한 세상 산다는 것 또한 서글픈 일이요, 차마 이루지 못할 사랑이란 더욱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고 한다. ‘지고한 사랑은 생명보다 어쩌면 먼저’였던 게 아닐까여기는 작가는 모두에 놓인 ‘묏버들’이란 시 한 편을 상기하는 것으로 발단부를 시작한다. 별리의 안타까운 심사를 묏버들로 형상화한 홍랑의 시를 읽고, 작가는 그 홍랑의 감정에 뛰어들어 그 시 한 편을 우리들 가슴에 심어 천년을 조용히 살아 숨쉬게 한다.
이 인용문의 결구, ‘한갖 기생의 사랑이라 하지만 또 이만큼 격조 있는 사랑이 또 있으랴’라는 대목은 홍랑 시의 위대성과 항구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별리로 인한 두 사람의 내면을 빈틈없이 묘사해내는 그녀의 형상화 능력은 문학적 가치를 드높인다. 구차한 눈물 보이지 않고 천대 만대 남는 시 한 수로 이별을 전하는 홍랑의 품격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 수필은 보이지 않는 부분을 작가의 개성적 시각으로 발견하는 데서 가장 큰 매력이 있다. 여기에 보편성의 공감대를 이루어주는 서정성이 도사리고 있다. 그 대상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깊은 이해가 있으면, 신분도 극복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한 홍랑의 ‘묏버들’은 사랑의 본질을 잘 상징하는 징표로 기능하고 있다.
그 누구를 사모해 안으로 가슴 태우며 숭고한 사랑의 완성을 꿈꾸는 계절이다. 오직 사랑 하나에 그리움으로 혼자 뜨겁게 꽃 피우다가 스스로 흩어져 버리기도 하는 이가 소설 속 주인공 외에 또 없으랴만. 그리워하고 기다린다는 것은 아마도 자신의 존재 확인이며 젊은 날 실존의 한 방식일 것이다. 생애 마지막까지도 하나 흐트러짐 없이 오직 한 사람을 그리워 한다는 것이 얼마나 인생을 값지게 하는 것인지 더 많은 세월이 지나고서야 비로소 깨닫는다. 그리움이란 인류의 구원의 한 방편인 줄도 비로소 알게 된다
- <에밀리 브론테> 중에서 -
마음속에 있으나 영원히 허상 속에 숨겨져 보이지 않는 실체를 소설 속의 인물로 만나고 싶은 마음에서 이 가을 한분옥은 스무 살 즈음에 읽었던 <폭풍의 언덕>을 소환한 것이다. 몇 해 전 명작 순례의 길에 올라 폭풍의 언덕, 황량한 들판에 서서 잊혀진 줄로 알고 있었던 사랑의 멀미로 앓았다던 작가는 문학이 있기에 우리는 이 현실의 멀미를 치유할 수 있으며 지친 영혼을 위로할 수 있다고 하였다. 외로움의 꽃송이가 얼마나 밤새도록 피었다 스러지고 피었다 스러지고 했을까. 마지막에 주인공 히스클리프가 캐스린의 망령을 보면서 황홀경 속에서 죽는 장면은 죽음을 초월한 사랑이지만, 잔악한 복수 행위에 치를 떨면서도 히스클리프를 미워하지 못하고 오히려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브론테의 인물 창조에 작가는 놀라워한다.
죽음 자체도 최후가 아니라 영혼의 개방이며 죽은 자의 망령은 살아 있는 자의 영혼과 신비적으로 교류하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는 표현 속에서 우리는 작가의 사랑관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워하고 기다린다는 것은 아마도 자신의 존재 확인이며 젊은 날 실존의 한 방식일 것’이라 한 것도 역시 사랑의 본질에 상상력의 즐거움을 선사하는 대목이다. 그녀의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문장, 한 문장이 삶의 진통과 내면의 진솔한 고백 속에서 태어난다. 사랑의 전개를 풀어내는 탁월한 역량이 수필의 가치를 드높인다. 롤랑바르트의 말대로, 그녀는 말이라는 재료를 가지고 어떤 언어적 물질을 만들어내는 거인인 셈이다. 마음 속에 있으나 영원히 허상 속에 숨겨져 보이지 않는 실체를 소설 속에서 만날 수밖에 없는 작가의 현실이 안타까움을 불러온다.
이 수필의 발단부는 ‘폭풍의 언덕 요크셔의 황무지에 부는 바람은 거칠었다.’로 시작한다. 사랑과 증오로 얼룩지는 삼각관계의 사랑을 폭풍의 언덕에 비유했던 것이다. 가끔 문맥 속에서 자신의 내면을 게워내는 작가의 고백은 순수한 사랑이라는 주제의식의 의미화를 돕고 있다. ‘내 속에 녹아있는 사랑의 밀도마저 측량해 보고 싶었다’는 작가의 고백은 이 소설이 주는 힘을 실감케 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 글에서 우리는 사랑의 순수함만 보게 되는 것이 아니다. 수필은 삼각관계와 집착적 사랑이 주는 위험 또한 보게 한다. 삼각관계로 인해 세상을 인고로 살아낸 너무도 사랑에 힘들어하는 청춘남녀를 연상하게도 한다. 이 수필에서 작자는 외형적으로 히스클리프와 캐스린 사이 나타난 애증의 갈등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 그것을 통해서 애증으로 ‘사랑과 전쟁’을 치르는 사람들을 다시 소환해내고 있다. 그리고 영혼에 호소하는 사랑의 간절한 절규를 통해서 작가는 진정한 사랑이 지향해 나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있다.
Ⅲ.
이 책은 시조시인이자 수필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울산의 원로작가 중에서도 가장 선도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이 쓴 수필답게 많은 장점을 담고 있다. 무엇보다도 수필집에 담긴 인물들은 한분옥의 감성적 접근에 의해 그 이미지가 다양하게 전달된다. 이런 감성에 의한 설득방법은 독자로 하여금 연상과 상상의 세계로 빠지게 한다. 여기서 작가가 비유를 통해 관념적인 메시지를 감각화시키기 때문에 독자는 상상과 연상에 의해서 주제를 구체화할 수 있다. 즉 우리는 물화된 보조관념을 통해 작자가 숨긴 이면적 상징물에 도달함으로써 작품을 미학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작가의 인물 분석이 매우 탄탄하고 치밀할 뿐만 아니라 사료를 대단히 깔끔한 솜씨로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흔히 인물사는 팩트로 몰입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에서는 그와 같은 경우를 볼 수가 없다. 팩트만큼 의견, 생각, 느낌도 많다. 팩트에 밀착하면서도 적당하게 거리를 두면서 문제의 핵심을 파고드는 데서 작가의 문학적 역량을 만날 수 있다. 다루기 힘든 정치인 미술가 음악가 등 다른 영역의 위인도 작가의 손에서는 깔끔하게 정돈되어 우리 앞에 놓여진다.
한분옥 수필이 주는 맛이 어찌 손맛뿐이겠는가. 향기 또한 가득하다. ‘보이지 않는다의 눈’으로 사람의 내면을 투시하여, 역사적 인물을 되살리고 기억해 주는 행위야말로 얼마나 인간적인가. 동서양의 뜨겁게 산 사람들의 삶을 수필로 써낸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어느 한쪽에 한정하거나 치우치지 않고 동서고금의 위인을 비교적 폭넓게 다루었다는 것도 장점으로 보인다. 문학가, 음악가, 미술가, 무용가, 배우 등 예술가뿐만 아니라 군인 정치인, 장군, 기녀 등 두루 눈길을 주었다는 점도 높게 평가한다. 풍부한 사료와 폭넓고 깊은 논의로 인간세계를 그려나가는 이유를 발견해 낼 때의 감동은 더욱 크다. 기억해야 할 인물의 가치를 독자 자신이 상상력으로 이해했을 때의 기쁨은 마치 땅 속에서 보석을 발견했을 경우와 같다. 모두冒頭에 놓인 ‘밤비에 새닙 곳 나거든 날인가도 너기소서’라는 홍랑의 시조 ‘묏버들’ 에 담긴 뜨거운 열정 하나, 진실 하나로 살아온 사람들의 의로운 결을 발견했을 때의 놀라움과 감동은 얼마나 큰가. 한분순의 수필은 그 위대한 사람들의 삶과 사랑, 사상과 어록이 함께 하기에 누구나 읽고 나면, 이보다 더 이상 감동적일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한분옥이 구사하는 언어는 적절한 표현의 옷을 입고 있어 감동을 준다. ‘적의’는 조선시대, 왕후가 입던 붉은 비단에 청색의 꿩을 수놓은 대례복이다. 왜 제목을 ‘백년의 적의’라고 했는지 그 의도를 찾아보는 것도 이 수필집을 재미있게 읽는 또 하나의 방법이라고 하겠다. <백년의 적의>에서 독자들은 관계성을 중시하는 동양적 사고방식도 발견할 수 있다. 이 같은 발견의 놀라움은 미적 감동을 준다. 다만 바슐라르가 주로 사물을 중심으로 이미지를 논한 것과 달리 한분옥의 경우는 한 생을 열정적으로, 의미있게 산 사람들의 열정적인 멋을 그려내었다는 것이다. 작가는 인물에 자신의 인간사를 투영하고, 자신의 삶까지도 포갠다. 이것은 자기성찰의 바람직한 방법으로 수필에서 많이 이용된다. 햇볕이 나도 그림자를 지울 수 없듯이 그림자도 자아의식의 중요한 반려자가 되어 있다. 위대한 인물 앞에서 작아지는 한분옥 작가를 발견하는 것은 이 책을 읽는 최고의 쾌미다. 이 책의 문학성과 그녀의 성실성에 찬탄하며 한분옥의 문학적인 전도에 무궁한 발전이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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