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3. 20(일) 색다른 투어 cafe의 아침편지
내 속에 빛나는 보석
부산외국어대학교 강당에서 강연 중인 새끼 용문검객.
바다 속에 조개 하나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조개는 이웃에 사는 조개를 만나
하소연을 했습니다.
"내 몸 속에 아주 귀찮은 것이 있어.
무겁고 둥글게 생겼는데 아주 귀찮고 불편해."
그러자 이웃에 사는 조개는
아주 거만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나는 아주 건강해.
몸 속에 아무것도 이상한 것이 없지.
나는 정말 건강해."
"좋겠다. 난 정말 이 둥글고 무거운 것 때문에
살 수가 없어."
그때 이웃에 사는 게 한 마리가 지나가다
조개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곤 건강하다고 자랑하는 조개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건강하지? 물론 그럴 거야.
하지만 네 이웃이 참아내고 있는 그 고통스런 것은
정말 진귀한 진주란다."
그렇습니다.
그 조개가 간직하고 있는 고통은 바로 진주입니다.
아름답고 진귀한 진주를 간직하려면
그만큼의 고통을 감수해야 합니다.
우리는 가족과 친구,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두고 삽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고통을 주곤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과 행복은 고통스러운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보석을 위해서는
고통스러운 짐을 짊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잊고 있는 보물이란
고통스럽지만 함께 해야 할 바로 그 사랑입니다.
- 칼릴지브란 아름다운 생각 中에서 -
칼릴지브란((Kahlil Gibran)
일생 : 1883년 12월 6일 (레바논) - 1931년 4월 10일
데뷔 : 1923년 시집 '예언자'
경력 : 파리, 뉴욕, 보스턴 개인전, 보스턴 북디자이너, 1895 미국 보스턴 이주
시인이자 철학자이자 화가였던 칼릴 지브란(본명 지브란 카릴 지브란 빈 미카일 빈 사드,1883년 1월 6일 ~ 1931년 4월 10일은 수많은 예언자들을 배출한 땅 레바논에서 태어났다. 그가 아랍어로 쓴 작품들은, 그를 아랍어를 사용하는 세계에서 당대의 문학적인 천재이자 영웅으로 추앙 받게 했다. 하지만 그의 명성과 영향력은 아랍어 세계를 뛰어넘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그의 시는 20개 국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조각가 로댕이 시인이자 화가였던 윌리엄 블레이크의 작품과 비교하기도 했던 그의 그림은 세계의 여러 대도시들에서 전시되었다.
그는 생애의 마지막 20년을 미국에서 살면서 영어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1923년 작의『예언자』를 비롯해서 영어로 쓴 다른 여러 시집들 그리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그의 그림들은 수많은 미국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깊은 영감을 고무시켰다.
『예언자』는 20세기에 영어로 출간된 책 중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으로 기록되었으며, 사람들은 이 책을 ‘20세기의 성서’라고까지 불렀다. 그의 저서에는 『눈물과 미소(A Tear and Smile)』, 『부러진 날개(Broken Wings)』, 『광인(The Madman』, 『선구자(The Forerunner)』, 『사람의 아들 예수(Jusus the Son of Man)』 등이 있다.
워싱턴 DC의 칼릴지브란 기념비
지브란은 뉴욕에서 1931년 4월 10일에 간경변과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에 그는 레바논에 묻히고 싶다고 말했는데, 이 소원은 1932년에 메리 하스켈과 그의 언니 마리아나가 레바논에 있는 마르 사르키스 수도원을 구입하여 그 곳에 지브란을 묻고, 지브란 박물관을 세우면서 이루어졌다.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 소개 및 작품 연보
선집『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아주 작습니다』
시집『고요하여라 나의 마음이여』
선집『사랑은 자유하는 삶입니다』
선집『들리지 않는 가락이 고요속에 있습니다』
선집『내영혼 가장 가까이에 그대가 있습니다』
전기『아름다운 영혼의 순례자 칼릴 지브란』
서간집『칼릴 지브란의 러브레터』
잠언집『아홉가지 슬픔에 관한 명상』
작품『계곡의 님프들』(1906년)
작품『반항하는 영혼』(1908년)
작품『부러진 날개』(1912년)
작품『눈물과 미소』(1914년)
작품『광인(THE MADMAN)』(1918년)
작품『행렬』(1919년)
작품『선구자』(1920년)
작품『예언자(THE PROPHET)』(1923년)
작품『모래, 물거품』(1926년)
작품『사람의 아들, 예수』(1928년)
작품『대지의 신들』(1931년)
작품『방랑자』(1932년)
작품『예언자의 동산』(1933년)
토요일 아침. 아들녀석과 함께 마포 풍림사우나에 갔습니다. 아빠와 아들이 목욕탕에 간것은 실로 오랫만입니다. 서로 바쁘게 생활하다보니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는데, 이번에 마나님이 해외성지순례를 갔기에 집의 온수기 조절방법도 잘 몰라 뜨거운 물을 사용하는 것도 번거롭기에 함께 목욕탕으로 간것이지요. 평소 목욕탕에서 타인에게 의존해 때를 밀어본적이 없었는데 아들녀석이 아빠의 등을 시원스럽게 밀어주어 흐믓했습니다. 함께 목욕탕에 입장했지만 아들녀석은 주요한 약속이 있다며 30여분만에 나갔기에 상기인은 이왕지사 목욕탕에 온 김에 이탕 저탕을 두루 거치고 건습 습식 사우나까지 들락거리며 약 1시간 이상을 버티었지요. 감기 몸살 치료와 혈액순환엔 사우나가 최고인것으로 믿습니다. 한결 몸이 가벼워진 것 같았습니다. 멀리 종로에서 마포까지 왔기에 이곳 근처의 지인과 함께 점심식사도 할겸하여 강변북로를 내달려 강화도로 향했습니다.
오래전 한우 만오천원에 푸집하게 먹었던 경험이 있어서 강화의 그 식당으로 향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렵게 어렵게 기억하며 그 식당을 찾았으나, 아직 문밖의 간판과 메뉴판에는 그대로 있으면서도 이제는 당시에 팔았던 한우 2등급은 팔지 않는다고 하며 1등급 한우 4,5,000원을 권하였기에 많이 실망스러워 그 식당을 나왔습니다.
이왕이면 확실한 정육점을 겸한 신뢰 할 수 있는 식당을 찾아야 겠다고 맘먹고 멀리 원거리였지만, 강화군 내가면 외포리 소재의 '한우명가 정육점 식당'을 조회하여 찾았습니다. 식당에 우선 고객들이 많았고 식당내에 정육점이 있어서 신뢰감이 생겼지요. 가격은 등심 안심이 각 2만 5천원이었습니다. 하여 "그래~! 하고 결심하였습니다."
비록 거금 5만원을 내었지만, 역시 강화 한우가 별미였습니다. 쥔장께서 서비스로 제공한 선지국도 일품이었습니다. 강화는 김포한강변도로가 개통된 이후에 서울에서 불과 40여분이면 도착할 수 있어 답답한 머리를 식히는 드라이브를 할 수 있어 참 좋았습니다. 식사후에는 오래전 강화도에 왔을 때 석모도에 교량을 설치하는 공사의 진도가 궁금하여 현장을 답사해 보았습니다. 공사 진척율은 약 50% 정도였으나, 교각을 다 세웠으니깐 상판만 올리면 얼마후 개통이 될 것 같았습니다.
강화도에서 석모도로 가려면 늘 배를 타곤했었는데, 이젠 그런 낭만도 없어지겠으나, 석모도에 해상교량이 설치되면 석모도를 찾는 관광객들도 엄청 많을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곳 석모도에 해상교량을 설치하는 것은 들리는 주민의 말에 의하면 석모도 뒷편의 작은 섬에 쓰레기 매립장을 설치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해상오염만 시키지 않는다면 참 괜찮은 계획이라고 느껴졌습니다. 왜냐하면 인천 쓰레기 매립장이 이제는 포화상태인 까닭이지요. 석모도에 있는 큰 절의 주지께서 외포리에서 석모도로 가는 여객선의 쥔장이라서 그동안 자신의 수익이 크게 줄 것을 예상하고 극구 반대했다는데, 어떻든 해상교량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멋진 추억을 담과 귀가를 서둘렀습니다.
오늘 재경고교동문회의 사이클동호회에서 청평에 팬션을 빌려 놓고 아침부터 자전거를 타자고 제의 했으나, 꽤 긴 시간동안 감기몸살로 기력이 약해졌기에 같이 아침부터 자전거를 탈 수는 없으나 저녁나절 어둡기 전에 청평의 팬션으로 달려가겠다고 약속을 한터라 서둘렀습니다. 허나 강화도에서 서울로 나오는 도로가 생각보다 많이 밀렸습니다. 그리고 어렵게 오후 4시에 가까운 시각 강변북로에 진입했지만, 마포에서 반포에 이르는 강변북로 도로는 토요일 오후라서 엄청 밀린 탓으로 저녁 7시 30여분에 겨우 목적지인 경기도 가평군 청평면 청평역로 17 소재의 '다온팬션'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휴~우~
청평에 거의 이르렀을 때 도로에 다른 승용차들이 박치기한 교통사고만 아니었어도 30분은 당겼을텐데... 그러나 아침 일찍 서울을 출발해 팬션을 얻은 후 청평에서 약 80Km 사이클을 탄 동호회 후배들이 운동을 마치고 막 숙소 앞에서 고기를 굽다가 상기인이 도착하자 모두가 달려나와 열렬히 환영해 주었습니다.
동기생 박사장 외에는 모두 작게는 6년 많게는 10년 이상 차이가 나는 후배들입니다. 지난번 딸아이 혼사때에 이 동호회 멤버들이 모두 참석하여 축하를 해 주었기에 피곤했으나 꼭 참석해야만 했습니다. 감사의 뜻으로 찬조를 하고 회비도 내고 보니 마음이 아주 편했습니다. 어짜피 오늘 밤 이곳 팬션에서 잠을 자야하므로 마음껏 마셨습니다.
밖의 날씨도 저녁엔 다소 쌀쌀하여 2부 행사는 팬션 실내로 들어가 또다시 판을 벌렸습니다. 워낙 먹꺼리를 많이 갖고 왔기에 이를 소비해야만 했습니다. 오늘 무려 80Km 거리 자전거를 탄 위 멤버들이 마치 치질 걸린 넘들처럼 어그적 어그적 걸으며 피곤해 하는 모습이 역력해 2부 행사를 마치고 곧 잠자리에 들기로 했습니다. 모두가 코골이이므로 상기인은 2층으로 올라가 먼저 자는 것이 왕일 것 같았습니다.
상기인은 장거리 야간운전도 했고 또 아직도 감기 몸살기운이 있는데다가 이곳에서 쇠주를 2병이나 마셨기에 실내 2층에 온돌장판도 있기에 그대로 꼬꾸라졌습니다. 아~ 꿀맛 같은 단잠에 빠졌습니다. 오늘 많은 것을 경험한 뜻깊은 날이었습니다.
- 오늘의 일기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