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어당(林語堂)
총기 유출 사고로 중대 열외 되고, 김대지 건으로 중대 V-Vip 되자, 나는 부대에서 할 일이 없었다. 아무도 날 건드릴 사람이 없었다. 작전 다녀와도 누가 차량 물세차를 시키나, 불침번을 시키나, 나는 일이 없었다. 그래 빈둥빈둥 책이나 읽었다. 범일동 철도골목에 헌책 파는 노인네가 있었다. 그는 대나무 장죽 입에 물고, 신문지 위에 헌책 널어놓고 팔았다. 김소월 시집, 토정비결, 사상계, 미군부대서 흘러나온 풀레이보이 같은 책이다. 나는 싼맛에 멋대로 펼쳐놓은 이책 저책 뒤적거리다가 그속에서 책 하나를 발견했다. 임어당의 ‘속(續)생활의 발견’이란 책이다.
단기 4292년 명동의 삼문사(三文社)에서 나온 책인데, 거기 책 앞장에 <우리의 명세>가 있다. 1우리는 대한민국의 아들 딸 죽음으로서 나라를 지키자. 2 우리는 강철같이 단결하여 공산침략자를 쳐부수자. 3 우리는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 날리고 남북통일 완수하자. 책은 4백 페이지 분량인데, 종이는 누렇게 변색된 모조지고, 인쇄도 엉성했다. 그러나 임어당의 글은 해학적이고 재미있다. 상식 밖의 철학이 있다. 나는 그 책을 읽고 비로소 내가 동양인 임에 자부심을 느꼈다. 처음으로 백인 철학의 영향권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 책은 ‘The importance of Living’이란 제목으로 서양 독서계를 강타하면서 동양의 멋을 서양에 최초로 알린 책이다.
그는 우선 크리스트교 교직자에게 독설을 퍼붓고 이교도의 세계를 소개한다. 그는 소크라테스가 탄생한 것은 서양문명의 일대 재액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알키메데스적 과학적 분석적 방법은 돼지에게나 줘버리라고 선언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데칼트의 유명한 명언에 대해서 ‘농담을 해도 웬만큼 하시지요. 혹시 오식(誤植)이 아닌지요?’ 하고 빈정댄다. 그는 ‘저녁 하늘에는 구름이 아름답고, 호상(湖上)의 저녁놀은 꿈처럼 곱고, 만추의 국화 옆에서 먹는 게는 비길데 없이 맛있다’ 면서 서양적인 현학 대신에 현실적인 중국 사상을 들이민다. 그는 철학자처럼 생각하고 시인처럼 느낀다.
‘꽃을 심음은 나비를 꾀우기 위함이요, 바위를 쌓음은 구름을 부르기 위함이요, 솔을 심음은 바람소리를 듣기 위함이요, 파초를 심음은 비를 기다리기 위함이요, 버들을 심음은 매미를 청하기 위함이다’.
‘미 중에는 섬세한 미, 우아한 미, 장중한 미, 준엄한 미, 괴기한 미, 불균제의 미, 힘의 미, 창고(蒼古)의 미 등 여러 가지 미가 있다. 솔은 창고의 미 때문에 별격의 자리에 오른다. 죽장을 끌고 산길을 걷는 일인(逸人)이나 은자의 품격이 있다. 소나무와 함께 세한삼우로 일컳어지는 매화는 향기의 청고함과 낭만적인 미를 감상한다. 송나라 시인 임화정(林和靖)은 매화는 내 아내, 학은 내 아들이라 했다. 그가 매화를 암향부동월황혼(暗香浮動月黃昏)이라 표현했는데, 매화의 정수는 이 칠언에 다 들어있다. 대나무가 좋은 건 잎과 줄기의 날씬하고 간드러짐과 화사하고 온아함에 있다. 그런데 어쩐지 이 대나무의 자태는 억센 바위와 잘 조화된다. 그러기에 두어 포기 대와 엎드린 바위가 종종 그림을 이룬다. 버들은 호반 같은데 많다. 이 나무는 무엇보다 여성적인 매력으로 사람의 감상을 돋운다. 중국 부인의 섬세한 허리를 유요(柳腰)라고 한다. 버들처럼 가는 허리라는 뜻이다. 버들숲에 바람이 스치는 모양을 유랑(柳浪)이라 한다. 버들의 물결이란 뜻이다.
바위에 대한 중국인의 생각은 이렇다. 예술적으로 보면, 암석은 위대하고 장중하고 가파르고 기이한다. 거대 완강(頑强)한 암석은 영웅같은 성격을 지녔고, 지상 3백척 높게 솟은 단애는 워험한 매력이 있다. 또다른 면에서 관찰하면, 암석은 속세를 떠난 학자같은 고고함과 초연함을 가지고 있다. 날마다 산에 갈 수 없으니 암석을 가정에 놓을 필요가 생긴다. 이를 이해하고 관상 못한다고 해서 서구인을 책망할 수는 없다. 송나라 화가 미불(米芾)은 완석(頑石)에 대한 저술을 남겼고, 두관(杜琯)은 돌의 족보에 대한 운림석보(雲林石譜)란 책을 냈다. 돌은 그 빛깔, 촉감, 외양, 무늬, 농담, 두드렸을 때 음색까지 까다롭게 논한다. 돌에는 호수나 동굴에서 발견된 구멍투성이고 극단으로 불규칙한 것도 있고, 나무의 화석도 있다. 상해나 소주 부근 돌은 태호(太湖)의 호수 바닥에서 파내는 것으로 해파(海波)의 자취가 보인다. 그런데 선을 부득불 고치지않으면 안될 곳이 있으면 정으로 고쳐, 다시 호수 바닥에 넣어 1-2년 방치한다. 최고의 벼루나 도장 재료의 수집과 관련해서도 돌의 이론이 관련된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박(璞)을 역설했다. 자연을 너무 비꼬아 만지작거리지 말아야 한다. 지고의 예술품은, 시나 문장도 마찬가지지만, 하등의 인공적 흔적이 없이 구부러져 흘러가는 곡수(曲水)나 뜨있는 구름같은 부운(浮雲)처럼 자연스러워야 하고, 고친 흔적이 없어야 한다. 상류 중국인의 서재의 걸상은 혹투성이 괴목뿌리가 사용되는 일이 있는데, 이런 걸 소중히 여기는 심정도 여기 있다.’
나는 임어당을 통해서 동양의 멋과 깊이를 확연히 깨달았다. 중국인의 사군자 선호, 수석 취미, 그들이 왜 매화를 사랑하고, 서재에 괴목을 갖다놓는지 알게 되었다. 당시 한국 식자들은 모두 백인 문화에 굽신굽신하던 때다. 한국 철학계는 일제 때부터 내려온 소위 ‘데칸쇼’, 데칼트, 칸트, 쇼펜하우엘의 미망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때다. 나는 임어당의 동양사상에 대한 자존심 있는 태도에 감동 받았다. 그 책을 읽으면 머리 속이 박하사탕 먹은 듯 시원해짐을 느꼈다. 이때부터 우리 중대가 부두에서 GMC에 짐을 실을 때, 혹은 기지창에서 짐을 하역하는 그 무료한 대기시간에 다른 동료들은 낮잠 자며 시간을 때웠지만, 나는 책을 읽었다. 아마 이것이 내가 그동안 관심 두었던 서양의 염세주의를 떠나, 막연하지만 동양사상을 존경하고 관심을 두게된 최초의 분수령이었지 싶다. 나는 이때부터 사군자나 바위에 관심 가졌고, 노자 사상을 배우고 싶었다.
이 당시 우연한 기회에 옥녀가 서면 로타리 뒷골목에 어머님과 살고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 바로 달려갔다. 벌써 2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나는 가슴에 상병 계급장을 달고있었다. 옥녀에게 하고싶은 이야기가 태산 같았다. 철수 자살 때문에 나는 입대했다. 훈련소에서의 고통, 229대대의 살벌한 이야길 들려주고 싶었다. 그 고생을 이야기하며 옥녀의 따뜻한 위로를 받고 싶었다. 철수 대신 오빠가 되고 싶단 이야기도 하고 싶었다. 내가 실존주의 소설처럼 자살을 할려고 했단 이야길 하면 옥녀가 얼마나 놀랠까? 그동안 나는 살벌한 세상을 한참 돌아다녔다. 배가 고파 짬빵통 음식 끼니 때마다 줏어먹었고, 해운대 거친 칼바람을 씌었고, 하이에리어 부대 근처 사창가를 맴돌았다. 이제 나는 고등학교 시절의 내가 아니다. 나는 그동안 충분히 나자신을 괴롭혔고, 황야의 들개가 되었다. 그 외로움을 옥녀의 따뜻한 위로로 풀고싶었다. 나는 이런 달콤한 생각을 혼자 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황은 달랐다. 서면 로타리 뒷골목 삐거덕거리는 그 집 대문을 밀치고 들어선 순간, 거기서 내가 만난 건 봇물 터지듯 슬픔에 흐느껴우는 두 여인이었다. 그들은 상병 계급장 달린 내 군복을 보자 더욱 복바치는 모양이었다. 철수도 살아있었다면 그런 군복을 입었을 것이다. 철수는 인물 잘생기고, 운동과 공부 둘 다 잘하던 모범생 이었다. 그래서 아들 죽은 진주를 원통해서 떠났는데, 거기 내가 나타난 것이다. 찾아가서 내가 한 일은 그 집을 때아닌 눈물바다로 만들어 놓은 일이다. 어머님은 나에게 한마디도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그 차그운 침묵 앞에 일 없이 한참을 머뭇거리고 있다가, 그 집을 나왔다. 옥녀만 골목 밖에까지 나와 배웅해주고 갔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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