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만 당돌해집시다 구호가 필요합니다 동료는 잘난 척을 하다 동료들에게 혼쭐이 났습니다 저도 잘난 척의 기질이 있습니다 그러니 많이는 말고 조금만요
늙어도 우리는 무섭습니다 엄마는 겁보입니다 매일 밤이 오다니 엄마는 차를 몰고 저를 데리러 옵니다 보조석의 방석은 꽃무늬입니다 여성이 되기 위해 꽃을 사들이고 무늬를 사들입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우아합니다 스무 살에 꾸었던 꿈의 일부를 이룬 것 같아요
얼핏 불규칙한 나열과 낭비되는 듯한 구절들이 많아 언어의 쓰임이 경제적이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다. 또 이 시에서 ‘부도 직전에 놓인 항공사 직원의 투쟁과 그 일상의 이면’을 읽어낸다고 해도 틀렸다고 말할 이유는 없다. 비록 적대와 모순의 실체를 확인하거나 저항의 동력을 확보할 수는 없지만, 그에 내던져진 개인의 내면을 아프게 되짚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렇지만 이 시는 그렇게 해석되기 이전의 무언가 때문에 쓰였을 것이다.
담담하게 기술되는 사건과 관계들, 이를테면 녹록치 않은 사회생활 중 (인용되지 않은 부분에 드러나듯이) 틈틈이 글을 쓰는 화자의 일상적 풍경이 지속적으로 ‘엄마’와 연결될 때, 우리는 나지막한 이야기의 배후에 고여 있는 서글픔 또는 절박함에 감염된다. 당연한 말이지만, 시어 중 어느 하나가 그 일을 한 것이 아니다. 시어로 표현되지 않은 정념이 읽는 이의 마음에 전해졌던 것.
그렇다면 이 시의 시어들이 한 일은 무엇인가. 그런 독법으로 이 시에서 무엇을 건졌는가. 글쎄, 시어들은 그것을 읽는 시간을 흘러가게 만들었을 뿐이고, 나는 이 시를 읽는 ‘시간’을 가졌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때로 그 순간의 감응만으로도 우리는 충만해질 수 있다. 그 순간이 우리에게 남아 있는 세계의 가능성이라고 말하면 지나치게 느껴지려나.
고백체의 담담한 발화 방식은 최근 시들의 공통 감각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시어가 가진 전언의 깊이보다는 시어가 펼쳐놓은 순간의 파동에 집중하는 것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시들이 그 반대에 골몰한다. 「당신의 당신」(문혜연, 조선일보)은
“새들의 울음은 그들의 이름이 됩니다/우리는, 어떤 이름을 갖게 될까요”로 시작된다. 그리고 첫 구절이 생산하는 짐작 가능한 의미망을 벗어나지 않는다. 새와 사람, 그리고 이름 속에 얽혀 있는 관계에 관한 감각도 그렇거니와 자신의 인식이 시의 의미를 가두고 마는 것이다. 이 시가 아름답다면
“그림자도 생기지 않을 물에는/새의 밑면만 지나갑니다/깊이 가라앉은 바닥, 그곳에서 우리는/떠오를 수 없는 낮은 음, 낮은 울음”과 같은 구절이 거느리는 (의미가 아니라) 문득 서성이게 만드는 ‘이미지’ 덕분일 것이다.
2
각기 다른 층위의 이야기들이 겹쳐져 있는 시가 있다. 화자가 응시하는 대상물이 있고 화자가 영위하는 일상이 있다. 거기에 신화나 설화 또는 상상된 무언가가 개입된다.
이 두세개의 층위가 논리적인 필연성으로 묶여 있는 시가 있고 아무런 필연성도 느낄 수 없는 시가 있다. 대개 각각의 층위들이 논리적으로 튼튼하게 연결된 시들일수록 시인의 의도가 깊게 관여하여 언어적 질감을 해치곤 한다. 아무런 필연성도 찾을 수 없다면 당연히 좋은 시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논리적으로 어떤 필연성도 찾을 수 없지만 각각의 층위가 알 수 없는 연관 속에 배치되고 있다고 느껴지는 시가 있다.
경험의 실감보다는 감각적 배치를 통해 세계를 구축하는 것. 이런 방법론은 최근에 비교적 흔하게 쓰이는데, 다음은 「물고기의 잠」(설하한, 한국경제)의 부분이다.
물고기의 잠 ㅡ 설하한
뜰채에서 튀어 오른 물고기가 수조로 돌아간다 물고기는 잠을 잔다 비가 수면을 두드린다 물살이 물고기를 조금씩 밀어낸다 한 물고기는 뭍에서 헐떡거리다 죽는다 물고기들의 미래에 놓인 것은 얇고 길고 번쩍이는 흰 것
물고기는 꿈을 꾼다 롤러코스터는 트랙을 달린다 정해진 낙차를 따르는 플롯 눈이 먼 늙은이는 젊었을 때 괴물이 낸 문제를 풀어 왕이 되었다 비가 끝없이 내렸다 그는 진창이 된 길 위에서 지쳐버렸다 자신을 이끄는 어린 딸의 손을 잡고 눈물 흘린다 그는 쓰러져 숨을 몰아쉬다 죽었다
몸 위로 칼날이 떨어지는 꿈을 자주 꾼다 어떤 사람들은 물로 뛰어 내린다 바깥은 있습니까 나는 잠에서 깬다 마적 떼는 도착하지 않았다
비는 그치지 않는다 딸은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녀는 오빠를 땅에 묻고 죽는다 죽은 반역자와 왕좌에 앉은 사람 하나의 트랙을 번갈아 달리는 열차들 비가 무덤의 흙을 다진다 나는 슬프지 않으면 두려워진다 우리가 신의 손등 위에 있는 공깃돌이라면 어쩌지? 끝도 없이 떨어지는 꿈을 꾼다
나는 하루에 세 번 약을 먹듯 떠올린다
죽은 늙은이의 볼에 비늘처럼 일어난 피부, 그것을 적셔주는 빗물 같은 것, 가축의 숨통, 물고기의
깊은 잠
(인용하지 않은 부분까지 포함하여) 이 시에 등장하는 물고기와 오이디푸스와 자신은 ‘사건’의 필연성 속에 놓여 있지 않다. ‘두려움’을 둘러싼 ‘비의’의 필연성이라면 어떨까. “우리가 신의 손등 위에 있는 공깃돌이라면 어쩌지?”라고 말하는, 운명에 대한 두려움. 그 두려움은 “나는 슬프지 않으면 두려워진다”는 진술에서 더 선명해진다. 다시 슬퍼지는 것. 추락의 순간에 대한 공포. 그러나 화자는 이미 슬픔 속에 놓여 있지 않은가. 반복되는 추락의 꿈 때문에 이 공포에는 한겹이 더 만져진다.
슬픔이 끝날 것 같지 않은 두려움과 슬픔이 끝날 것 같은 두려움이 그것이다. 왜 슬픔이 끝날 것 같아 두려운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슬픔 다음에 기쁨이 오지 않을 것 같아서이다. 슬픔조차 용납되지 않는 운명의 가혹한 상태라고 할까. 차라리 익숙한 고통에 머물고 싶은, 그 설명할 수 없는 불안을 나는 조금 알 것 같다. 그것이 “하루에 세 번 약을 먹듯” 감지되는 무기력의 이유일 테니 말이다.
그래서 이 시를 닫는 마지막 3행은 단정적인 진술이 아니라 ‘노인의 피부와 빗물과 가축의 숨과 물고기의 잠’으로 이어진 이미지, 곧 예비된 감정의 대리물들로 남겨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이미지’들을 다른 이미지로 대체하며 독자들은 자신만의 두려움과 대면하게 된다.
전통적이라고 할 만큼 단정한 언어를 쓰지만, 「마지막 할머니와 아무르 강가에서」 (조온윤, 문화일보) 역시 개연성 없는 층위를 자연스럽게 겹쳐놓고 있다는 점에서 비슷한 방법론을 가졌다. 할머니와 물고기와 호랑이가 하나의 시선으로 통일되는데 그러한 교차와 중복은 급기야 ‘세계의 공감각’에까지 이른다. 이 ‘세계의 공감각’은 마치 여러개의 광선을 쏘아 만드는 4차원의 홀로그램처럼, 시간과 공간, 인간과 짐승을 넘나들며 이 세계의 알 수 없는 심연들을 무리 없이 비춘다. 하지만 비출 뿐, 해부하려 들지 않는다.
한편, 트렌디한 언어를 구사한다고 생각되는 시에서 느껴지는 피로감도 없지 않았다. 일상적 사물을 응시하며 존재론에 닿고자 한 「랜덤 박스」(류휘석, 서울신문)는 “반성이 시작된 집은 무덤 냄새가 나는 요람 같아요”처럼 시간의 전후를 성찰의 순간으로 결합시키는 재능을 보여주었지만, 전반적으로 굳어버린 반죽을 주무르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캉캉」(최인호, 동아일보) 역시 경쾌한 리듬감 속에 일상과 섭리를 겹쳐놓는 솜씨가 돋보였지만, 어조에 의존하려는 의도가 쉽게 드러나고 여성적 징후들을 소재로 대상화하는 데 대한 점검이 더 필요해 보였다.
3
「너무 작은 숫자」(성다영, 경향신문) 는 앞서 말한 특징들이 미묘하게 결합된 사례이다. 그것을 ‘감각의 필연성’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길지만 전문을 옮긴다.
너무 작은 숫자 ㅡ성다영
도로에 커다란 돌 하나가 있다 이 풍경은 낯설다 도로에 돌무더기가 있다 이 풍경은 이해된다
그린벨트로 묶인 산속을 걷는다
끝으로 도달하며 계속해서 갈라지는 나뭇가지
모든 것에는 규칙이 있다 예외가 있다면 더 많은 표본이 필요할 뿐이다 그렇게 말하고 공학자가 계산기를 두드린다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지만 그렇기에 더 중요합니다 너무 작은 숫자에 더 작은 숫자를 더한다
사라져가는 모든 것은 비유다
망할 것이다
한여름 껴안고 걸어가는 연인을 본다 정말 사랑하나봐 네가 말했고 나는 그들이 불행해 보인다는 말 대신 정말 덥겠다 이제 그만 더웠으면 좋겠어 여기까지 말하면 너는 웃지
그런 예측은 쉽다 다영 씨가 웃는다 역사는 뇌사상태에 빠진 몸과 닮았다
나무 컵 받침이 컵에 달라붙고 중력이 컵 받침을 떼어낸다
물이 끈적인다 컵의 겉면을 따라 물방울이 아래로 모이는 동안 사람과 사물은 조금씩 낡아간다
조용한 공간에 금이 생긴다
되돌릴 수 없다
구사하는 언어의 질감도 그렇거니와 그 언어가 지시하는 내용도 제각각이다. 묘사가 성한가 싶으면 일반론을 들이대고 전언과 독백, 정적이고 동적인 이미지가 뒤섞여 있다. 정작 이상한 것은, 이 시를 따라 읽다 보면 그런 낙차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는 바, 이제 세계는 단일한 과정으로 파악되지 않고 각자의 체험 속에 감각될 뿐이다. 그러므로, 시에서 세계는 행간 사이에 힌트만 남겨놓은 채 뒤로 물러나 있다. 언어가 가진 의미는 행간에 잠시 머물다 떠나는데, 세계는 바로 그 의미가 떠난 자리에 남아 있는 언어의 순수한 힘에 의해 추적된다. 이 시가 문장마다 각기 다른 언어적 질감을 가졌음에도 부대낌 없이 우리를 이끄는 것은 바로 그 힘 때문이다. 문제는 그 힘이 말해지지 않고 드러날 뿐이라는 데 있다. ‘예측’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예감’ 같은 것이니까.
시는 ‘돌 하나’와 ‘돌무더기’를 통해 파멸의 전경과 그것을 수용하는 역설적인 세계 인식을 보여주며 시작된다. 그리고 도심 한쪽에 남아 있을 ‘그린벨트’와 더 작게 ‘갈라지는 나뭇가지’, ‘예외’를 ‘규칙’으로 바꾸며 소실점을 향해가는 ‘숫자’들, 궁극에는 물컵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사람과의 관계까지, 사라짐의 정조 속에 배치한다. 그 모든 순간을 ‘뇌사 상태의 몸’을 가진 ‘마음의 역사’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사실 나는 실연이 만드는 풍경과 마음의 굴절을 읽었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다. 이 시가 거느린 예감의 특별함에 비하면 말이다. 어떤 것은 다른 것으로 치환되지 않기에 절대적인데, 예감도 마찬가지다. 예감은 결과에 종사하지 않는다. 오로지 그 순간으로 남아 있는 것. (심사평에도 썼지만) 이 시를 통해 사라짐의 의미를 깨달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시를 읽으며 우리는 상실의 필연적 과정을 함께 겪는다. 그 ‘순간’을 공유하는 것이다. 그것이 ‘연대’가 아닐 리 없다.
심사평을 따라 읽으며 느낀 점은
시의 의미를 언어의 논리로 완성하는 유비적인 방법론과
그로부터 최대한 멀어진 자리에서
시의 의미를 언어의 감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방법론
사이의 갈등이 지속되고 있다
는 것이었다. (이런 심사평은 없었지만)
세계가 명확한 대상으로 포착되지 않는 상황에서
세계 전복의 노력이나 의미 주체를 뒤흔들 만한 언어 실험이 약화되었다고 한탄하는 것이 타당한지 생각해볼 여지가 있을 것이다. (이런 심사평은 많았는데) 하물며
여전히 내가 아는 곳에 세계가 있다고 믿으며 단일하게 그것을 포착하려는 시선에 대해서는 안타까울 뿐이다. 그것이 「스테이플러 씨」(이규정, 국제신문) 「거미」(권영하, 부산일보) 등등의 당선작이
사람과 사물을 향한 건강한 직정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독후감을 남기지 못하는 이유이다.
신용목 / 시인 2019.1.9. ⓒ 창비주간논평
<2019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거미 ㅡ 권영하
하늘 끝 마천루 정수리에 밧줄을 꽁꽁 묶었다 동아줄 토해내며 낙하하는 몸으로 건물의 창을 닦으며 절벽으로 내려간다 빌딩들 눈부시게 플래시를 터트려도 허공길 유리블록 사뿐히 밟으면서 수족관 물고기처럼 살랑살랑 물호수를 흔들며 헤엄친다 뙤약볕 빨아먹은 유리성이 열을 뿜고 빌딩허리를 돌아온 왜바람이 목숨줄을 무섭게 흔들지만 구슬땀을 흘리며 내려간다 아이스링크에 정빙기같이 생채기를 지운다 유리벽에 갇힌 사람들에게 푸른 하늘도 열어주고 유리창에 비치는 현수막의 사연도 살포시 보듬어 닦는다 의지할 곳도 없는 허공에서 작업복 물에 젖어 파스내음 진동하고 피로가 줄끝에서 경적처럼 돋아나지만 또다시 하늘에 밧줄을 묶는다 땀 흘린 줄길이만큼 도시는 맑아지고 유리벽에 그려진 풍경화도 끼끗해지니까
<시 심사평>강은교(왼쪽), 강영환.
ㅡ 유리벽 청소 노동자의 삶 형상화 뛰어나
투고한 작품들 몇 가지 아쉬운 점
첫째, 시를 오랫동안 익혔으면 좋겠다. 잠깐 보았던 사물이나 여행지의 인상을 그대로 쓴다고 '리얼'의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래 묵혀 충분한 발효를 거친 다음에야 좋은 작품이 되는 것이다.
둘째, 문장이나 문체의 완성도를 높였으면 한다.
셋째, 기괴한 이미지를 썼다고 해서 난해한 좋은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넷째, 의식 또는 사유(사회적, 정치적, 미학적)가 시의 토대를 받쳐주지 못하고 있다.
다섯째, 노래가 없다. 운율 또는 리듬이 그것이다.
'거미'는 현실감을 바탕으로 해 사회를 보듬어 안는 시선이 따뜻하고 정겹다. 유리벽을 청소하는 노동자의 삶이 잘 형상화 되어 있었다. 함께 투고된 작품 '통일론'에서도 통일을 불을 밝히는 전구에 비교하여 표현한 것은 높은 점수를 받을만 했다.
스테이플러씨 이규정...국제신문
그는 서류들을 한 코에 제압하고 있다.
바람의 두께에 따라 뒤집어질 수도 있지만
이미 꿰인 코는 염기서열을 갖는다.
하얀 낱장에 뼈대를 두고 있는얼굴들
묶인 것으로 질서가 된 몸이지만
위아래 각을 맞추는것은 복종의 의미
자세를 낮추고 하나의 각도와 눈높이로사열되어
제왕에 예의를 갖추둣 손발을 맞추고 있다.
어떤 묶음도 첫장 머리에서 움직이고
펄럭이는 팔과 다리를 갖게 된다.
간혹 흩어질까 묶인 것들끼리 권이 된다.
날개를 갖고 있어도
그 손에 한 번 잡히면 그만이다
입이란 하나의 입구
무엇이 채워졌을 때
뜬구름이라도 소화하게 만든다.
솜사탕과 뜬 구름은 종이 한 장 차이
단정하게 정리돈 그의 입에
꽉 물려서 봉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적 있다.
흐트러진 낱장들을 함구시키며 제압하는
따악, 그 소리
일침으로 조용히 봉할 줄 아는 그는
서류의 제왕이다.
심사평 심사위원들은 시의 원형을 새롭게 제시하는, 혈기 넘치는 시를 기대하면서 작품을 읽었다. 탄력이 있고 개성이 넘치면서 새로운 안목을 펼쳐주는 시를 기대했다. 그래서 기시감이 있거나, 지나치게 안정적인 시편은 후한 점수를 주지 못했다. 당선작을 놓고 마지막까지 고심한 작품들의 수준은 높았다.
‘시행이 앞뒤로 결속되고 보완되거나, 시행이 상상력을 통해 훌쩍 넘어서면서 한 편의 시가 완성되는 광경을 매력적으로 보여주는 시편들이었다. 그만큼 오랜 시작(詩作)의 경험이 엿보였다.
당선작 ‘스테이플러 씨’는 서류를 철하는 도구를 시적 대상으로 다루지만, 의미는 중층적으로 읽힌다. 철심이 박힌 서류 낱장에서 나약한 개인의 창백한 얼굴을 떠올릴 수 있다. 그것은 자본사회의 냉담한 구조 안에 강압적으로 편입되고 규율되는 개인이 느낄 공포심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로써 스테이플러는 사물 차원을 넘어서는 상징체로 거듭난다. 좋은 작품을 열정적으로 창작해 시단에 새롭고 산뜻한 바람을 불어넣어 줄 것으로 기대한다.
성선경·이정록·문태준 시인
엄마는 저렇게 걸어오지 않는다 노혜진
예순두 살에 뽀얀 속살입니다 시야각으로도 알아볼 수 있습니다 다 벗고 만날 수 있고 온몸을 훑고도 괜찮아요 엄마는 때수건과 우유를 손에 들고 옵니다 우리는 깨끗해집니다
두꺼운 발톱과 무좀을 병이라 부릅니다 탕의 수증기는 소리와 이야기를 불러 모읍니다 “그 발톱으로 네일 숍에 왔대” 동료들이 웃었습니다
회사에서는 엄마 얘기만 합니다 아빠 얘기만 하는 동료에게 묻지 않았습니다 “엄마가 없니?” 질문은 되돌려집니다 알고도 모르는 것들을 생각합니다
동료를 엄마라고 불렀습니다 아차 하면서 재채기처럼 웃었습니다 자꾸 새어 나오는 웃음만큼 웃음거리들이 쉽게 배어나오는 회사입니다 제가 오늘 재채기를 했던가요
바디 클렌저에서 수영장 냄새가 납니다 미즈노 루리코의 ‘헨젤과 그레텔의 섬’이 떠오릅니다 카페 화장실 앞에서 스콘을 먹어야 했어요 열고 닫히는 문은 섬이었다가 여름이다가 코끼리였습니다 삼십 분 동안 읽었는데요 시 한 편을 오래 보았습니다
매일 달라지는 책을 동료에게 소개하지 않았습니다 쓰는 몰입을 알 리 없어요 동료가 농담을 던졌습니다 “등단을 못 하겠구나” 엉뚱한 발언을 잘 하는 저의 별명은 소설가입니다 “시를 씁니다” 말하지 않아요 동료들은 알고도 모르는 것일까요
“친구들은 어때요?” 하면 엄마가 떠오릅니다 저의 벗입니다 같은 원 안의 피자를 먹고 다른 날 같은 구두를 신습니다 즐거운 시간은 떼어 두었다가 서로에게 선물합니다 기억이 풍성해지면 쪼그라드는 현재들 진짜 벗들은 기억의 원 안에 있어요
조금만 당돌해집시다 구호가 필요합니다 동료는 잘난 척을 하다 동료들에게 혼쭐이 났습니다 저도 잘난 척의 기질이 있습니다 그러니 많이는 말고 조금만요
늙어도 우리는 무섭습니다 엄마는 겁보입니다 매일 밤이 오다니 엄마는 차를 몰고 저를 데리러 옵니다 보조석의 방석은 꽃무늬입니다 여성이 되기 위해 꽃을 사들이고 무늬를 사들입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우아합니다
심사평 "모두가 충분히 시라고 부를 만한 진짜 시"
신춘문예 발표 시즌마다 들리는 비슷한 이야기를 노혜진의 작품은 정면으로 돌파하고 있다. 요즘 시가 시답지 않게 길다, 최근 시는 언어를 정제하지 못한다, 산문시의 경향이 한국시를 망친다 등등. 그런데 과연 그러한가?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일인가? 노혜진의 시는 분명하게 아니라고 답하는 듯하다. 가령 “여성이 되기 위해 꽃을 사들이고 무늬를 사들입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우아합니다”라는 다소 소설적인 문장은 시에 대한 평균적인 인식에 비해 길게 나열된 ‘엄마’의 특정되지 않은 성격으로 인해 그 의미가 넓어진다. 그렇게 우아해진 부분 외 나머지 것들을 더 궁금하게 한다. 나는 이런 전개를 시적이라 부르지 않을 자신이 없다. 경쾌한 발성, 산문 형식을 지탱하는 관점의 전환과 독특한 리듬감, 페이지 전반을 아우르는 페이소스… 이 모두가 충분히 이미 시라고 부를 만했다. 요즈음 시가 아니고, 진짜 시.
이번 심사는 예심과 본심이 함께 진행되었다. 시인에게는 전부라 할 수 있는 자신의 취향을 근거로, 다른 이의 취향을 설득하는 작업을 더욱 치밀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시와 시, 시인과 시인이 서로에게 육박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이 시간을 통하여 새로이 등장한 노혜진 시인의 손을 잡고, ‘시라는 것’을 두고 벌이는 유구한 전쟁의 복판을 함께 걸어가도 되겠다 싶다. 앞으로 그가 이룰 겸허한 돌파를 응원한다.
황인숙ㆍ김민정ㆍ서효인 시인
2019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당신의 당신 ㅡ문혜연
새들의 울음은 그들의 이름이 됩니다 우리는, 어떤 이름을 갖게 될까요 원래 인간은 제 이름보다 남의 이름을 더 많이 부르는 종이잖아요 나는 당신의, 당신은 나의 이름을 새들에게 우리는 우리일까요
우리를 대신할 말을 찾아요 수많은 단어들이 사라져요 뻐끔거리던 입술들이 짝을 짓습니다 입술을 부딪치며, 서로에게 옮아가는 인간들 새들은 인간과 상관없이 날아다닙니다 새들은 새들이고, 우리는 우리입니다 부리를 부딪치는 새들은 정다운 만큼 가벼운가 봐요
자신을 닮은 사람을 세 번 만나면 죽는다는 얘기 들어본 적 있어요 지렁이와, 지렁이 모양 젤리 그걸 공포라 할 수 있나요 머리와 꼬리를 알 수 없는 젤리는 달콤하고 모호한, 주인모를 관계들 우리는 점점 닮아 가는데 누가 누굴 닮은 건지 모를 때는 어떻게 할까요, 당신은 지금 2%의 당신 자신과, 98%의 당신의 당신 순도 높지 않은 당신, 그리고 나 끝 모를 바닥으로 가라앉아요
새들은 언제나 아득한 높이에서 웁니다 그림자도 생기지 않을 물에는 새의 밑면만 지나갑니다 깊이 가라앉은 바닥, 그곳에서 우리는 떠오를 수 없는 낮은 음, 낮은 울음
새들의 이름은 그들의 인사가 됩니다 우리의 울음도 우리의 내일이 될까요 안녕, 당신, 안녕 유언 같은 안부를 주고받아요 우리는 새들의 세계에서도, 서로의 이름만 부르고 인간은 역시, 새들에게는 이해받을 수 없나봅니다
당선소감 [2019 신춘문예] 몰라서 아름답던 순간들… 사랑을 담아 詩 쓸 것
서촌에 있는 이상의 집을 두 번 찾아가고, 두 번 실패했습니다. 첫 번째는 내부를, 두 번째는 외부를 수리 중이었습니다. 늘 어디를 허물고 있는 이상의 집을 보며, 어쩌면 세 번째 방문에도 이곳은 제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을 것만 같았습니다.
제게는 시가 그랬습니다. 다다르고 싶은, 그러나 늘 스스로 허물어지는 집. 완전한 순간을 영영 모를 것만 같아 두려웠습니다. 안과 밖을 다 허물고 나면, 그 후엔 무엇이 남을까요. 끝없는 부서짐 끝에 남은 것이 아주 작은 돌 하나라면, 그것만으로도 괜찮은 걸까요.
지금도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 작은 돌이 주는 아픔을, 아직도 모르겠어요. 그럼에도 감사히 쓰려고 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모를 때 사랑이 생겨난다고, 저는 믿습니다. 제가 당신의 모든 것을 알 때 당신은 제 것이 아닙니다. 몰라서 아름답던 순간들을 기억하며, 사랑을 담아 시를 쓰겠습니다. 딸의 느린 발걸음을 쓰다듬으며 비춰 주시는, 가장 큰 나의 해와 달, 엄마 아빠, 감사해요. 동생 해정, 너는 나의 큰 자랑이야. 이서화씨, 당신의 글에 대한 열정이 늘 저를 부끄럽게 합니다. 시의 뼈와 살, 그 사이를 흐르는 피의 뜨거움을 알려주신 최승호 교수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시를 읽는 눈이 얼마나 깊고 넓어질 수 있는지 보여주신 유성호 교수님, 처음 제 글을 보여 드리던 떨림을 다시 느낍니다. 부서지고 또 부서지면서도 나눠주신 온기로 다시 쓰겠습니다.
―1992년 제주 출생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동 대학원 석사 졸업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재학
심사평 새와 인간의 관계 통해 이 시대 사는 '우리'를 성찰 문정희·시인
시가 운문의 세계인데도 산문적 진술의 세계를 현란하게 드러낸 시가 많았다. 행갈이와 연 구분이 무시된 산문 형태 시를 많이 투고하는 현상은 한국 시의 미래를 위해 분명 경계해야 할 일이다. 내적 운율과 침묵으로 함축되는 시의 본질적 부분이 신인들의 시에서 도외시되는 까닭은 산문성에 기울어진 한국 시단의 유행을 비판 없이 쉽게 따른 탓이다. 산문 시대일수록 시인이라면 시의 고유한 본질을 지켜나가야 하나 그렇지 못하다.
시를 왜 써야 하는지 그 필연성마저 결여돼 사유의 얄팍함이 엿보인다. 시의 본문은 물론이고 제목에까지 외래어나 외국어를 남발하는 점은 그 필연성의 결핍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으리라.
정호승·시인
최종심까지 거론된 시는 '당신의 당신' '만년설' '사랑하는 언니' 세 편이다. '사랑하는 언니'는 어미가 통일돼 있지 않은 데다 지나치게 연 구분이 많아 전체적으로 발랄하지만 다소 가벼워 보인다는 점, '만년설'은 오랜 습작 과정이 느껴질 정도로 안정적이고 모범적인 반면 구태의연함으로써 신선미가 부족하다는 점이 큰 단점으로 지적되었다.
당선작으로 결정한 '당신의 당신'은 시적 감각이 신선하고 섬세하며 사유의 개성이 깊어 신뢰가 갔다. 새와 인간의 관계를 통해 인간 존재의 의미를 탐구함으로써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내면적 삶을 성찰하게 하는 높이가 돋보였다. 당선자는 더욱 노력함으로써 한국 시의 미래가 되길 바란다.
2019 <한국경제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물고기의 잠 ㅡ 설하한
뜰채에서 튀어 오른 물고기가 수조로 돌아간다 물고기는 잠을 잔다 비가 수면을 두드린다 물살이 물고기를 조금씩 밀어낸다 한 물고기는 뭍에서 헐떡거리다 죽는다 물고기들의 미래에 놓인 것은 얇고 길고 번쩍이는 흰 것
물고기는 꿈을 꾼다 롤러코스터는 트랙을 달린다 정해진 낙차를 따르는 플롯 눈이 먼 늙은이는 젊었을 때 괴물이 낸 문제를 풀어 왕이 되었다 비가 끝없이 내렸다 그는 진창이 된 길 위에서 지쳐버렸다 자신을 이끄는 어린 딸의 손을 잡고 눈물 흘린다 그는 쓰러져 숨을 몰아쉬다 죽었다
몸 위로 칼날이 떨어지는 꿈을 자주 꾼다 어떤 사람들은 물로 뛰어 내린다 바깥은 있습니까 나는 잠에서 깬다 마적 떼는 도착하지 않았다
비는 그치지 않는다 딸은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녀는 오빠를 땅에 묻고 죽는다 죽은 반역자와 왕좌에 앉은 사람 하나의 트랙을 번갈아 달리는 열차들 비가 무덤의 흙을 다진다 나는 슬프지 않으면 두려워진다 우리가 신의 손등 위에 있는 공깃돌이라면 어쩌지? 끝도 없이 떨어지는 꿈을 꾼다
나는 하루에 세 번 약을 먹듯 떠올린다
죽은 늙은이의 볼에 비늘처럼 일어난 피부, 그것을 적셔주는 빗물 같은 것, 가축의 숨통, 물고기의
깊은 잠
[심사평] 신화적 상상력을 이미지로 자신만의 세계 만들어내
응모작에서는 시의 잠언화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시는 한마디의 잠언을 위해 수만 마디의 시적 실천이 필요하다. 우리는 구체적 일상과 실존의 경험을 통한 살아 있는 이미지, 사물을 바라보는 번뜩이는 눈, 자신만의 문장을 가진 신인을 찾기 위해 오랜 시간을 공들였다.
설하한의 ‘물고기의 잠’은 단연 눈에 띄는 작품이었다. 설하한은 큰 스케일과 자신만의 문장을 가진 응모자였다. 신화적 상상력을 육화해 시의 소재로 삼고, 떠돎과 회귀라는 서사를 시의 구조에 장착할 줄 안다. 이런 이미지와 진술의 조직력은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가기에 충분했다. 더욱이 그의 시는 이미지가 살아 있었다.
심사위원 : 유안진 손택수 이재훈
2019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역대 가장 작은 별이 발견되다 ㅡ 박신우
별이 깃든 방, 연구진들이 놀라운 발견을 했어요 그들은 지금까지 발견된 별 가운데 가장 크기가 작은 별을 발견 했습니다 그 크기는 목성보다 작고 토성보다 약간 큰 정도로, 지구 열 개밖에 안 들어가는 크기라더군요 세상에 정말 작군요, 옥탑방에서 생각했어요 이런 작고 조밀한 별이 있을 수 있다니 하고 말이죠 핵융합 반응 속도가 매우 낮아서 표면은 극히 어둡다고 합니다 이제야 그늘이 조금 이해되는군요
이 별의 천장은 매우 낮습니다 산소가 희박하죠 멀리서보는 야경은 아름다울지 몰라요 어차피 낮에는 하늘로 추락하겠지만 그래도 먼지가 이만큼이나 모이니 질량에 대해 얘기할 수 있군요 그건 괜찮은 발견이에요
먼 곳에서 별에 대해 말하면 안돼요 다 안다는 것처럼 중력을 연구하지는 말아야죠 피아노 두드리듯 논문을 쏟아내지 말아요 차라리 눈물에 대해 써보는 게 어때요 별의 부피를 결정하는 요소는 여러 가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둘레를 더듬는 일이죠 옥상난간을 서성거리는 멀미처럼 말이에요
여기 옥탑에서는 중력이 약해서 몸의 상당부분이 기체로 존재해요 그래요 모든 별들은 항상 지상으로 언제 떨어질지 숨을 뻗고 있는 거죠
심사평
천양희 시인(왼쪽), 최동호 문학평론가
“자신의 존재 탐색 … 참신하고 발전 가능성 돋보여”
ㅡ 최종적으로 검토 대상이 된 시는 「풍선론」과 「역대 가장 작은 별이 발견되다」 두 편이었다. 심사자들은 상당한 시간 동안 양자의 장단점을 진지하게 비교 검토하였다. 「풍선론」은 이미지도 분명하고 시적 언어도 안정된 모습을 보여 주었으며 「역대 가장 작은 별이 발견되다」는 옥탑방의 화자를 통해 발견이라는 새로움을 무리 없이 전개하고 있었다. 먼저 시적 완성도라는 점에서는 「풍선론」이 앞서 있었으나 그로 인해 발전 가능성은 작아 보였고 마지막 결말의 처리가 추상적이었다. 「역대 가장 작은 별이 발견되다」는 완성도가 상대적으로 미진한 대신 참신성이나 발전 가능성은 더 높게 보였다. 여기서 심사위원들은 숙고의 과정을 거쳐 신춘문예 본래의 기능이라고 할 수 있는 참신성을 더 높이 평가하기로 하고 「역대 가장 작은 별이 발견되다」를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이 시는 질량이나 중력, 기체 등 자연과학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나 이를 어색하지 않게 구사하고 있다는 것이 장점이었다. 옥상 난간을 서성거리는 화자가 가장 작은 별의 특성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생의 구체성의 부여인 동시에 시적 확장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결정하는 데 심사위원들은 의견이 일치했다. 당선자에게는 축하의 박수를 보내드리고 아깝게 탈락한 분에게는 격려의 말씀을 전해 드린다.
ㅡ 당선 취소
“옷 보는 눈 키우듯… 시 쓰는 감각을 키웠다”
박신우 △1992년 포항 출생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재학 중
조문 ㅡ 이서연
빈 방에 남아 빈 방을 닦고 있는 거울처럼 그 집의 벽들은 아직 비에 젖고 있다 현관 앞에 쓰러진 우산이 있고 지붕을 넘어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누군가 소리 내어 운다 나는 꽃을 들고 있다
이른 새벽 청소부가 올 때까지 쓰레기봉투처럼 웅크리고 싶은 밤이 있다 자동차가 달리는 8차선 도로를 천천히 가로질러
죽어가는 밤과 죽은 뒤의 밤을 죽은 사람 곁에 앉아 산 사람이 지샌다 삶이 죽음으로 옮겨가는 낮을 지나 죽음이 삶을 전염시키는 밤으로
눈을 감고 있으면 생각 없는 몸이 어딘가로 간다 생각만 남아 몸을 생각한다
엎어진 화분처럼 방문을 쥐고 있는 젖은 손이 있다 손잡이를 말아 쥔 둥근 손등만 보인다
창문이 없는 방에 바람이 들이쳤다 먹구름과 흰 구름이 방 안을 지나간다 감은 눈 안으로 구름은 어떻게 들어 왔을까?
2018 영남일보 문학상] 시
- 심사평 언어 몰고가는 힘 놀랍고 삶과 죽음 관계 새로운 인식 이끌어
참신한 비유와 더불어 언어를 몰고 가는 힘이 놀라웠다. 무엇보다 행간을 건너뛰는 경쾌한 어법이 신인의 예기(銳氣)를 느끼게 했다. “죽어가는 밤과 죽은 뒤의 밤을/ 죽은 사람 곁에 앉아 산 사람이 지샌다/ 삶이 죽음으로 옮겨가는 낮을 지나/ 죽음이 삶을 전염시키는 밤으로”와 같은 구절에서 보듯 활달한 어법을 통해 삶과 죽음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이끌어내고 있다. 구성의 측면에서 안정감을 주고 있다는 점도 이 작품의 또 다른 자랑거리다.
감각적이고 개성적인 화법으로 일상 언어의 범박함에서 벗어난 작품 신춘문예 당선자에게 요구되는 새로움이라는 덕목에 좀 더 부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