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 삶과 죽음의 의미 (최성준 신부)
가톨릭교회는 11월을 위령성월로 지냅니다. 세상을 떠난 이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시기이지요.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의 죽음을 생각하다 보면 자연스레 죽음의 의미에 관해서 묵상하게 됩니다. 찬바람이 불고 가로수도 하나둘씩 잎을 떨으뜨리는 깊어지는 가을에 죽은 이들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무가 나뭇잎을 떨어뜨려야 추운 겨울을 무사히 나고 다시 봄이 되면 새로 잎을 틔울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현대사회를 이야기하면서 흔히 `몸 중심`의 사회라는 표현을 씁니다. 사실 몸과 마음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는 없지만 어느 쪽에 더 가치를 두고 있느냐에 따라 몸 중심의 사회와 마음 중심의 사회로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시대는 몸 중심의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외모의 아름다움. 멋진 자동차. 화려한 집. 명품 옷과 가방으로 치장을 하고 다른 사람들의 눈에 멋있게 보이는 것이 자신의 가치를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돈이 필요하고 돈이 최고의 힘을 발휘하지요. 그리고 이 돈을 쟁취하기 위한 무한 경쟁이 시작됩니다.
타인과의 관계보다 나 자신이 가장 중요합니다. 반면에 마음 중심의 사회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중요시합니다. 마음의 평화. 소통과 배려. 용서와 사랑 같은 것들입니다. 여기서는 관계가 최고의 가치입니다. 그리고 사람들 모두가 서로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여겨져. 너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되고. 너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 됩니다.
몸 중심의 사회에서는 자신의 몸이 망가지면 모든 게 무너집니다. 눈에 보이는 몸에 최고의 가치를 두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병이 들고. 늙어 가는 것은 너무나 큰 불행이고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죽음이란 절망의 정점이지요. 하지만 마음 중심의 사회에서는 몸이 아니라 마음이 최고의 가치이기에 늙어 가는 것이 피하고 싶은 두려움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삶의 지혜가 쌓여 가며 영적으로 성장해 가는 기쁨입니다. 그리고 죽음마저도 절망으로 귀결되는 끝이 아니라 영원으로 나아가는 새로운 시작으로 받아들여지지요. 하지만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몸 중심의 가치만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죽음은 무섭고 피하고 싶은 대상일 뿐입니다.
성현들이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자연스러웠습니다. 봄이 되면 다시 새싹이 필어날 것을 알고 죽음과도 같은 혹독한 겨울을 나기 위해 가을부터 잎을 떨어뜨릴 줄 알았습니다. 죽음은 마치 잎이 떨어지는 것과 같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습니다. 특히 도가 사상가들은 인생의 모든 지혜를 자연에서 보고 배웠지요. 그 가운데 장자가 단연 압권입니다.
(To be continu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