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비소리
생명을 건져 올리는 숨소리가 있다. 미지의 세계에서 날아든 한 마리의 새가 오래 참아온 인간의 숨으로 소리를 낸다. 인간이 내는 소리지만 흉내 낼 수는 없다. 죽기 직전까지 참아본 자가 살기 위해 내지르는 비명이지만 누군가는 마치 새의 노래 같다고도 한다. 살기 위한 비명이 새의 노래로 들리려면 얼마나 고독해야 했을까. 인간의 고독이 태고의 바다를 만나 비명을 노래로 만들었다. 전사의 한숨들이 모여 외마디 생존 부호가 된다. 오로지 몸뚱어리 하나만 가지고 천년을 산 구렁이의 뱃속 같은 바다를 가로질러 생명을 건져 올리는 이들만이 그 소리를 낼 수 있다. 휘파람마냥 한량도 아니고 한숨처럼 막막하지도 않다. 매일 다른 모습으로 손짓하는 저승사자와 함께 사냥을 나갔다가 살아 돌아온 전사처럼 숨소리의 마지막엔 기세가 등등하다. 왜 무서울 때가 없을까. 굵고 허연 파도를 타고 죽음이 가까이 왔을 때는 질끈 눈도 감았으리라. 어깨가 짓눌려 물 위로 올라갈 수 없을 때는 가라앉고 싶었을 테다. 그때마다 죽을힘을 다해 두 다리로 바다를 밀어 보는 건 전사이기 때문이다. 망사리를 매고 집을 나서는 순간 살아와야 하는 단 하나의 이유만 있다. 반백 년을 넘게 바다에 몸을 던졌다. 아무도 건져 주지 않는다. 숨비소리는 살아야 한다는 외로움이 만들어 냈다.
내가 그녀를 만난 건 십여 년 전이다. 회사 일로 제주를 갔다가 일정을 끝내고 숙소에 짐을 풀었다. 잠이 오지 않은 일행은 ‘해녀의 집’이라는 간판에 혼이 팔려 들어갔다. 해녀라는 글자가 마치 인어처럼 보였다. 반백의 머리카락에 빠글빠글 파마를 하고 그녀는 소라를 까고 있었다. 일행은 해산물이 드문드문 담긴 빨간 고무 대야를 보며 할머니가 해녀냐고 물었다. 검고 주름 가득한 얼굴로 해녀가 늙어서 서운하냐고 농을 했다. 해삼 한 접시를 내준다. 생물이라 바다에서 건져 올리면 하루가 다르니 먹어 버리라고. 두런두런 속내도 보인다. 물질이 도둑질이라 다른 일은 엄두가 안 난다면서도 도둑질해서 둘은 뭍으로 보냈다고 자랑 투다. 겁나지 않느냐고 묻는 내게 뭍에 사는 사람은 출근할 때 겁나느냐고 되묻는다. 오십 년을 거래한 곳이라 겁나는 건 없단다. 거래처가 바다라니.
소라 몇 개를 썰어 또 내놓는다. 괜찮다는 우리에게 사방이 바다라서 지천으로 널린 것 같지만 막상 잡으려고 하면 귀하단다. 그녀는 열일곱에 엄마 따라 물에 들어갔다. “아무리 둘러봐도 돌멩이뿐이라. 어망은 밑에 천진데 왜 못 보느냐 하면서 돌멩이 하나를 줍데. 그게 이거라.” 두려움이 돌멩이와 소라를 구분 못 하게 했는지 모른다. 먹고 사는 일은 상대를 정면으로 응시해야 한다. 상대가 찔끔하고 겁을 먹어야 내 것이 된다. 열일곱은 바닷속의 지도를 모를 때. 첫 물질의 두려움은 당연하다. 숨비소리는 바다를 오래 응시할수록 깊고 차랑차랑하다. 어미가 되면 사냥은 깊고 간절하다. 숨이 턱에 차 정신이 아득해질 즈음 수직으로 빛을 따라 올라온다. 아가미가 없는 인간이 참고 있던 숨을 뱉으려 수면을 향해 서두른다. 하나라도 더 캐내기 위해 참은 숨만큼 육신은 고단하다.
참아야 가져올 수 있는 내 것이 있다. 짠 바닷물 속에서 눈을 부릅뜨고 꿈틀하는 움직임을 낚아채야 하는 것. 일렁이는 바닷속에서 작은 생명의 몸부림을 읽어내려면 수십 년을 그것만 보아야 한다. 모든 것이 한 방향으로 움직일 때 나머지는 거짓이고 하나만 참인 것을 골라내려면 수도 없이 속아야 한다. 내 것은 그런 것이다. 몇천 번 몇만 번의 숨비소리가 날 것으로 올라와서 텅 빈 망사리로 돌아가길 반복하면 여인이 비로소 전사가 된다. 여인은 텅 빈 망사리로 돌아갈 수 있지만, 전사는 그럴 수 없다. 여인은 헤엄을 치지만 전사는 사냥한다. 보호색을 입고 바위틈에서 아닌 척하는 문어를 전사는 본다. 돌인 듯 위장하고 조금씩 이동하는 소라를 덥석 잡는 건 전사다. 마치 피부로 호흡하듯. 아가미라도 숨긴 듯 물 밖에서 기다리는 이에겐 천년인 시간을 헤집고 다닌다. 고요한 바닷속에서 외로운 사냥은 아무렇지 않게 일상이 된다.
뭍으로 가야 한다. 뭍으로 보내야 한다. 치열한 사냥의 목적이다. 그 대상이 처음엔 그녀였다가 지금은 자식이다. 내가 갈 수 없다면 자식이라도 보내야 한다. 자연의 밭과 바다의 품에서 길러진 수확물을 망사리에 가득 담아 와야 하는 이유다. 엄마가 바다로 뛰어들면 그녀는 뭍으로 갈 수 있을 줄 알았다. 흰 저고리 검은 속곳 그대로 망설임 없이 드나들었던 바다. 엄마를 지키던 바위는 그대로다. 그때 부서졌던 파도도 그대로고 건져 올려진 소라도 멍게도 그대로다. 그 안에서 열일곱의 소녀는 눈매가 날카로운 여인이 되어 미역처럼 자라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가 낳은 자식의 수만큼 그녀도 조롱박 같은 자식을 매달게 된다. 엄마는 그녀 때문에 전사가 되었고 그녀는 조롱박 때문에 바다로 나왔다.
육십 년을 바다와 이야기했다. 아이들이 대나무 자라듯 할 때는 바닷속에서 나와 있는 시간이 아까웠다. 가끔 숨을 참는 것이 아니라 가끔 숨을 쉬는 것으로 살아야 했다. 전사처럼 살아도 살림이 어깨를 펴지는 못했다. 어미를 보고 살았기 때문에 서운하지는 않았다. 자식 둘을 뭍으로 보낸 것으로 이생엔 족하다. 그녀는 바다를 짝사랑이라 했다. 혼자 좋아하고 헤어지려고 마음먹었다. 떠나려고 짐을 싸다가도 보물을 풀어주는 바람에 주저앉았다. 요즘도 바다에 나가느냐는 질문에 해녀는 가만히 소라만 깐다. 하긴 먹고 사는 일을 손 놓으면 먹고 살지 못한다. 폐활량이 예전 같지 않아 오래 머물지 못한다는 그녀는 대신에 짧은 시간 아주 정확하게 사냥하는 노병이 되었다.
수십 년을 브레이크와 페달 사이를 오가며 물질했던 나의 바다는 빌딩 숲이다. 퇴근을 알리는 숨비소리가 1층에 멈췄다.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