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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 제3차 공세와 1.4후퇴
제 1절 개 요
1. 전선 상황 요약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제2차 공세에 밀려 평양과 흥남일대에서 철수하여 1950. 12월 20일, 임진강하구-연천-춘천 북방-양양을 잇는 38도 선상에 방어진지를 편성하였다. 그러나 방어정면이 광대해 1개 사단이 30km가 넘는 광정면을 담당함으로서 부대 배치의 공백지대가 많아 중공군과 북한군의 침투를 용이하게 하였다.
이 무렵 중공군은 38도선으로 남하하여 서울을 목표로 개성-문산-서울과, 철원-의정부-서울의 2개 축선 상에 전투력을 집중 투입하였으며, 이들의 일부가 원주를 점령함으로서 중앙선 축선을 따라 남진할 수 있는 발판을 확보하였다. 이와 별도로 철의 삼각지대에 제2전선을 형성했던 북한군 제2군단이 인제-현리-평창 축선을 따라 침투하고 있었다.
이 때 중국 정부는 청천강과 장진호에서 유엔군을 격파한 승리에 도취되어 마치 세계에서 본인들이 최강의 군대가 된 것처럼 인도 등 중립국들이 제안한 결의안(전쟁이전 단계로 회복)들을 무시하고 굴복을 강요하였다.
이러한 정황속에서 중공군이 1951년 1월 1일 새벽에 전 전선에서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소위 중공군의 제3차 공세(신정 공세)는 6개월 전의 북한군의 남침과 유사하에 중공군 제13병단이 주공으로 철원-의정부-서울 축선 상에서 , 중동부 전선에서는 북한군이 돌파구를 확대하여 안동부근까지 침투하고 있었다.
이에 유엔군은 '51. 1. 3일 중공군이 수도권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자, 서울을 포기하고 1. 4일 서울 남쪽 60km 지점의 평택- 삼척을 잇는 선, 37도선으로 철수를 하여 1월 7일 새로운 방어선을 형성하였다. 정부는 1월 3일 부산으로 내려갔다.
중공군은 1월 8일에는 수원-여주-강릉선까지 진출하자, 그동안의 전력의 손실로 더 이상 진출을 못하고 수세로 전환하였다. 당시의 긴박한 상황에서 유엔군이 설정한 병력 배치선은 다음과 같다
12월 31일선 : 강화- 문산 북방-전곡-영평-춘천 북방-인제-홍천-평창북방-양양
C방어선 : 인천-서울 북방-의정부-양평-이천-홍천-주문진
'51. 1. 6일 : 한강선-양평-횡성-평창-강릉선
'51. 1. 7일 : 평택-안성-원주-단양-정선-삼척
D방어선 : 평택-안성-원주-횡성-평창-양양 (수정된 D 방어선 : 횡성-정선-삼척)
제 2절 중공군의 신정공세와 유엔군의 방어
1. 개 요
1950년 12월 하순, 38도선 북방에 전개를 완료한 공산군은 12월 31일 주공을 철원-의정부-서울 축선으로 지향시키고, 화천-춘천-원주 축선에 조공을 지향시켜 38도선을 돌파하기 위한 공격을 개시 하였다.
이로인해 국군과 유엔군은 1. 4일 서울을 포기하고 1. 7일에는 37도선인 평택-삼척선으로 철수하여 신 방어선을 형성하였으며 공산군은 1. 8일 수원-여주-강릉선까지 진출하였다.
하지만 더이상 진격이 없이 수세로 전환하여 그들의 한계를 보였다. 다라서 유엔군은 바로 37도선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재반격의 준비를 하였다.
2. 상황평가 및 의도
가. 공산군측 상황평가 및 의도
(1) 상 황
제3차 공세시 공산군의 공격 방향은 중공군 제13병단이 주공으로 개성-서울축선과 의정부-서울 축선에서, 북한군이 조공으로 화천 동쪽 지역을 담당하여 부대를 전개하였다.
중공군은 제3차 공세를 위해 식량보급과 수송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식량은 현지조달로 하기로 하고 북한정부나 혹은 북한 각 개인으로부터 빌린 식량은 모두 차용증을 발급하고 추후 중국 정부가 모두 상환해 주도록 했다.
(2) 작전목표와 기도
중공군은 2차에 걸친 공세작전으로 입은 병력손실을 보충하기 위하여 중공에서 고참병 8만 4천명을 차출하여 전선부대에 보충하고, 보급을 개선하기 위하여 경의선(정주-맹중리)-만포선(회천-개천)의 일부 철도도 긴급 복구하였다.
작전계획은
"제38군, 제39군, 제40군을 집중하여 한국군 제6사단, 제1사단을 소멸한다. 제42군과 제66군 주력은 춘천 서북지역의 국군 제2사단과 국군 제5사단 1개 연대를 소멸하고, 제66군은 1개 사단으로 하여금 화천에서 남진하여 춘천 이북과 동북의 한국군 제2사단 주력과 제7사단을 향해 양공한다. 먼저 한강, 임진강에 배치된 한국군을 해결하고 38선을 장악하여 미.영의 38선을 이용한 정전음모가 물거품이 되도록 하게 한다. 제50군은 고랑포로 근접하여 집결한다. 북한군 제1군단은 개성으로 집결하고 제2, 5군단의 양구, 인제에서의 남진은 변함없다"
여기서 북한군 제5군단은 양구, 인제로 진출하여 한국군 제1, 2군단의 전투지경선을 따라 공격하여 홍천으로 진출한다. 퇴로가 차단된 국군을 전방부대와 협조하여 포위 공격한다.
북한군 제2군단 공세가 시작 되기 전에 은밀하게 38도선에 침투한 후 홍천 동남방으로 진출하여 전선부대와 연결 작전을 준비한다.
북한군 제3군단은 원산을, 제4군단은 서해안을 각각 방어한다. 그리고 중공군 제9병단은 51ㄴ면 3월까 함흥지역에서 계속 정비와 휴식을 취한다.
"낙동강 전선 성주에서 무기력하던 북한군 제10사단?"
북한군의 작전 방침은 제2전선 부대의 주력 북한군 제10사단 및 길원팔 유격부대 병력을 전선 동부에서 아군 종심으로 깊숙히 침투시켜 춘천-원주-대구의 중앙도로에 연한 주요 지점을 선취하여 중동부 전선 주력의 남하에 호응하도록 한다는 것이였다.
이런 방침에 따라 중동부 전선의 주력 부대들 작전개시에 선행해 12월 하순부터 제2전선(12월 말에 제2군단으로 개편)의 길원팔 유격부대와 제10사단을 투입하기 시작했다.
곧 양구 서쪽의 제8사단 지역에서는 북한군 제10사단의 일 부병력이 산악을 타고 침투하기 시작했고, 동쪽 국군 제9사단 우측의 태백산맥과 그 좌일선의 산악지대에는 길원팔 유격부대가 침투하기 시작했다. 이들 북한군 제2전선 부대는 12월 30일 양덕원리(홍천 서남 10km)에 진출하고 주력은 영월 및 단양-안동부근까지 침투하였다.
나. 유엔군측 상황평가 및 의도
(1) 상 황
38도선으로 철수한 미 제1군단은 김포반도에 터키여단을, 개성-문산 도로를 가로지르는 임진강 하류에 미 제25사단을, 고랑포-적성 일대에 국군 제1사단(12. 14일을 기해 제11연대를 고랑포, 제12연대를 법원리, 제15연대를 신산리에 배치)을 배치하여 주저항선을 형성하고 여 제29여단을 군단 예비로 고양 신둔리에 집결시켰다.
한편 신계에서 철수한 미 제9군단은 국군 제6사단(제7연대를 한탄강 남쪽에, 제19연대를 백의리, 제2연대는 예비로 동두천)을 연천-의정부 축선상의 전곡일대, 미 제24사단을 김화-의정부 축선의 영평일대, 영 제27여단을 예비로 덕정부근에 배치하였다.
그리고 영등포에 집결한 미 제2사단은 충주로 이동시켰다.
중부전선의 국군 제3군단은 '50. 12. 10일 공비토벌작전을 완료한 국군 제9사단과 제11사단을 육본으로 원복조치 하였다. 그리고 군단은 양평으로 이동해 국군 제2사, 5사, 8사를 배속받아 군단창설이후 최초로 전선에 투입된다
.
국군 제2사단은 가평으로 이동해 제17연대를 철원에, 제32연대를 의정부 부근에, 그리고 배속된 제5사단 35연대를 구하리에 배치하여 연대별로 패잔병을 소탕하도록 하였다. 제5사단은 춘천으로 이동해 제27연대를 청평 호명산 일대, 제36연대를 가평 일대, 배속된 제2사단 제31연대를 홍천에 배치해 주저항선을 구축하기로 한다.
그러나 군단의 우전방 제8사단이 진출이 늦어지면서 구하리일대에서 많은 피해를 입고 연천으로 철수한 후 원주로 이동하여 재정비한 후에 화천저수지 남쪽 전선에 투입되었다.
한편 육본은12월 15일, 제3사단의 방어종심을 보강하고 유사시 증원 부대로 사용하기 위해 홍천에서 정비 중인 제7사단을 춘천으로 이동시켜 육본 예비로 하였다.
동부전선을 담당한 국군 제2군단은 연천을 경유 12월 14일 원주에 도착하였다. 군단은 제7사단을 육본 직할로, 제8사단을 제3군단에 배속전환하고 동부전선에서 광정면을 방어하고 있는 제9사단을 배속받고, 함흥에서 구룡포로 철수한 제3사단을 배속 받았다.
그러나 군단이 방어선을 구축하기도 전에 동부전선의 방어력을 보강하기 위해 흥남에서 철수하는 제1군단이 묵호에 상륙하여 동해안지역을 담당하게 된다, 따라서 제9사단이 다시 제1군단에 배속 전환되어 홍천으로 진출한 제3사단 만을 가지고 인제 남쪽의 부평리-관대리 간을 방어하였다. 제3사단의 좌인접은 국군 제3군단 예하 제8사단이고, 우인접은 국군 제1군단 예하 9사단이었다.
이에 따라 동부의 제1군단은 묵호로 상륙하여, 제2군단으로부터 제9사단이 방어 중이던 관대리-현리-서림-양양 선을 인수하였다. 그래서 좌전방 제9사단이 관대리 - 서림 선을, 우전방 수도사단이 서림- 양양 선에 배치되고 군단 후방에는 3개 경비대대를 영월, 정선, 하진부리에 각각 배치하였다.
이와같이 각 군단이 재편성 및 주저항선 방어진지를 구축하는 동안 적 제69여단은 양양 북쪽에서 재편성 완료하였고, 북한군 제2군단 예하의 패잔병들이 인제부근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특히 2,000명의 패잔병이 오대산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어 국군 수도사단은 제1연대는 진지를 강화하고 제26연대와 기갑연대를 오대산 서쪽지역에 투입하여 수색정찰을 명령였다.
(2) 작전목표와 기도
한. 중 국경에서 철수한 국군과 유엔군은 '50. 12. 20일 38선상에 미 제1군단(국1.미25.터키)이 고랑포리-문산 간에, 미 제9군단(국6,미24,영27)이 의정부 정면에, 국군 제3군단(국2.5.8사)이 춘천 정면에, 국군 제2군단(제3. 7사)원대리-관대리 간에, 국군 제1군단(수도사. 9사)이 양양-서림-현리-원대리 간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제일선 부대들의 철수 시에 차기 행동을 준비하기 위하여 국군 제7사단과 미 제2사단은 원주부근에, 대구에는 미 제10군단 사령부와 미 제7사단이, 미 제1해병사단은 마산에서 재편 중에 있었다. 서부전선의 미 제9군단 후방 의정부에는 미 제1기병사단이, 그리고 미 제10군단 후방인 평택에는 미 제3사단이 위치해 있었다.
당시에 유엔군은 적이 주공목표를 서울에 두고, 국군 제1사단의 고랑포 정면과 미 제9군단의 의정부 북방으로 공격하면서, 조공은 춘천북방에서 돌파에 의한 포위를 기도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따라서 적의 주공이 예상되는 고랑포 일대의 국군 제1사단은 미 제1군단의 우익으로써 제12연대를 사단 우일선으로 도감포-마포리-가월리 일대에, 제11연대를 좌일선으로 가월리-주월리-두지리-자장리-자하리-장파리 일대에, 그리고 제15연대는 예비로 적성-마지리 남쪽에 각각 배치하였다.
(3) 작전계획
12월 26일, 미 제8군사령관에 부임한 리지웨이 중장은 유엔군은 추가적인 증원이 없이는 38선상에서 재반격은 이루어질 수 없다고 보고 적의 전력을 소모시킴으로서 공세로 전환한다는 계획을 검토하였다.
따라서 "공세적 방어작전을 반복함으로서 공수의 전환을 도모한다"는 전략 방침을 확고히 하고, 이를 위해 단계별 방어선을 구체화하였다.
제1통제선 : 38도선 진지로 임진강 남안에 연하여 양양에 이르는 선
제2통제선 : 수원-양평-홍천-주문진을 연하는 선
제3통제선 : 37도선 진지로 평택-안성-원주-삼척 선
제4통제선 : 금강선으로 금강 남안과 소백산맥을 연하는 선
제5통제선 : 소백산맥 선으로 , 낙동강 방어선을 준비하기 위한 시간을 확보하기 위한 선
제6통제선 : 1950년의 낙동강 방어선
이 방어계획은 미 제8군이 낙동강방어선까지 몇 개 선으로 구성되는 방어진지를 준비하여 한 선에서 적에게 최대으 타격을 가하고 다음 선으로 이동하는 기동방어 계획이었다.
(4) 전투 편성
중공군의 제3차 공세 경과('50.12.31-'51.1.8)
평강
토산
철원 김화
장풍
국1사 국6사 미24사 화천 양구 속초 '50.12.31
포천 국2 국5 국8 인제 양양
'50.12.31 미25사 춘천 국3사 수도사
터 가평 국7 국9 C선
D선
강화 의정부 홍천 강릉
미3사 C
서울 C
영29
C선 C
미1기병 횡성
D
수원 187공전 원주
오산 국2 수정된 D선
국8 국7 D선
D 국5 정선 국수도 삼척
평택 안성 미24 국9 1월 7일 미3 국1 영27
1월7일 D선 영29 국6 미7 영월
제천 태백산
충주 미9연, 미17연
천안 32연
국2 국3사
터어키 청주 31연
조치원 안동 적10사
미1기병, 미25사
서부전선의 미 제8군은 '50. 12. 13일까지 1주일에 걸쳐 38도선 이남으로 철수를 완료하고, 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은 12월 24일 흥남에서 최종적인 해상철수를 실시하여 부산지역에 집결하였다.
한반도 250km를 횡단하고 종심 60km인 전선에 두 개의 기본 방어선을 편성하여 제1방어선인 A선은 서쪽의 임진강 하구에서-문산-38도선을 따라 양양에 연결하는 선, 제2방어선인 B선은 서쪽 고양에서 의정부-가평-자은리-동해안 동덕리까지 연결선, 또 방어종심을 확대하기 위해 영등포에서 한강 남안을 따라 양평--횡성-강릉으로 이어지는 C선, 수원에서 이천-원주-평창--삼척을 연하는 D선, 37도선을 따라 평택-충주-삼척을 연하는 E선으로 편성하였다.
이에따라 미 제1군단은 좌측의 터키여단이 서울 서쪽 염하수로 하구-김포지역을, 중앙의 미 제25사단이 서울 북방의 임진강 하류 제방을, 그리고 우측의 국군 제1사단이 임진강진지-33번 도로를 각각 방어하고 군단예비인 영연방 제29여단이 서울 근교 1번국도를 따라 집결하였다.
미 제9군단은 좌측의 국군 제6사단이 주월리-양문리를, 우측의 미 제24사단이 의정부-포천의 3번국도의 방어를, 그리고 군단 예비인 영연방 제27여단은 33번도로와 교차로 부근을, 미 제1기병사단도 서울-춘천 도로의 방어를 담당하였다.
동부전선의 좌측방인 국군 제3군단은 좌측 제2사단이 양문리-탑두울, 중앙의 제5사단이 탑두울-배후령, 그리고 우측의 제8사단이 경운산-추전리 방어를 담당하였다. 또한 전선 중앙의 국군 제2군단은 제3사단이 추전리-갑둔리 지역 방어를, 우측의 국군 제1군단은 좌측의 제9사단이 갑둔리-도채동, 우측의 수도사단이 도채동-동해안 지역 방어를 담당하였다.
미 제8군의 예비는 미 제3사단과 제7사단, 그리고 미제1해병사단으로 미 제7사단과 미 제1해병사단은 부대정비 중에 있었고 미 제3사단은 아직 해상에 머물고 있었다. 미 제2사단은 네덜란드와 프랑스 대대의 증원을 받고 충주에, 서쪽의 미제187공정연대전투단은 타일랜드 대대를 배속받아 수원에 집결하고 있었다.
이들 부대를 제외하고 국군 제11사단과 12월 중순 한국에 도착하여 8주간의 훈련을 실시하고 있던 캐나다 경보병대대가 있었고, 뉴질랜드 제16야전대대와 미 제2공수특전중대와 제4공수특전중대가 12월 31일 도착 예정이었다.
3. 전투 경과
가. 서부지역 전투
(1) 임진강 지역 전투('50. 12. 31~'51. 1. 3)
임진강지역 전투는 국군 제1사단이 '50. 12. 31일 부터 '51. 1. 3일까지 제3차 공세를 개시한 중공군 제39군에 맞서 임진강 일대에서 도하저지작전을 수행하고 고양 봉일천을 거쳐 한강 남족 영등포 일대로 축차적으로 철수하면서 적을 지연한 전투다.
사단은 평양 이남으로 철수하면서 사리원에서 남천으로, 위천리와 구하리 일대에서 지연진지를 점령ㅎ면서 패잔병을 소탕하고 아군부대드르이 철수를 엄호하면서 미 제1군단의 철수가 완료되자 고랑포,법원리, 신산리 일대에 진지를 점령하였다.
중공군의 주공이 서울 방면의 고랑포 일대 국군 제1사단 지역이 될 것으로 판단하여 제1사단장 백선엽 준장은 좌전방 제11연대를 비장리 일대에, 우전방 제12연대를 도감포 좌측 일대에, 제15연대를 예비로 적성의 마지리 일대에 배치하였다.
이때 중공군 제39군은 12월 30일 까지 국군 제1사단 방어지역에 제115.116.117 사단을 배치하고 영하 25도의 혹한 속에서도 볏짚 등으로 화포나 박격포 등을 위장하며 공격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12월 31일 17시에 중공군은 38도선 전전선에서 제3차 공세를 개시하였다. 중공군이 인명을 돌보지않고 강습도하와 돌파로 우회와 포위의 양면전수를 전개하여 적중 고립을 피하고 차선책으로 사전 게획된 철수를 단행하게 되었다.
임진강 지역 전투('51.12.31~'51.1.3)
백학
중115사 중116사 중117사
자작리 마전리
고랑포 임진강 어유지리 마포리 도감포
주월리 가월리 율포리
12연대
장좌리 비장리(자장리) 적성
11연대
마지리 설마리
15연대 감악산
장파리
파평산 사기막
금곡리 구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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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풍리 법원리 노고산
11연대 15연대 가납리(백석읍 위 : 양주)
신산리(광탄)
중공군 제1사단 우측의 제12연대 방향에 2개 연대를 집중하여 인해전술로 피리불고 징과 꽹과리, 북과 나팔로 다시한번 운산의 아픔을 연상케하는 침투식 기동으로 부대간격이 돌파되고 포위되면서 철수를 강요하였다.
사단 좌측의 제11연대 지역은 '50. 12. 31일 당일 오후 18시 30분 경, 우측 제12연대 1대대를 돌파한 적이 공격을 해왔고 주월리 남쪽으로 적이 침투하였다.
사단 예비인 제15연대는 적정 남쪽 고지군에 병력을 배치하고 있었는데 날이 어두워지면서 제12연대 병력과 중공군이 뒤섞여 연대 방어진지 정면으로 접근하여 182고지(현재 180m)가 피탈되었다.
전반적으로 사단의 주저항선이 무너지고 축차진지에도 중공군이 부대별 간격을 이용하여 침투해 들어오고, 이에 제1사단은 연대단위로 예비 대대를 투입하여 역습을 하면서 제11연대와 제15연대는 법원리 와 노고산을 연하는 선으로 내려서고 있었다. 제12연대는 측방이 노출되어 거의 건재를 유지하지 못한 채로 가납리로 내려서고 있었다.
'51. 1. 1일 , 중공군은 05시에 동두천 남서쪽 비상리, 선암리에 진출한다. 제12연대는 지난밤 분산되었던 제1대대가 경신리 비석거리 부근에서 재집결하여 연곡리 일대를 경계하고, 제2, 3대대는 동두천 서남쪽에서 다시 포위되어 가납리 서쪽으로 이동했다.
제15연대는 제3대대가 감악산 서록(사기막, 설마치고개 위로 추정)의 도로 양측고지에 우측의 제12연대 일부병력과 배치되었으나 아군의 낙오병에 뒤섞인 채 밀려드는 적의 압력으로 축차진지상으로 계속 철수하게 되었다.
제11연대는 금곡리-법원리 도로를 중심으로 제1, 3대대를 배치하고 제2대대는 금병산부근에 배치하였으며 이대 사단사령부는 신산리에서 서울 녹번동으로 이동하였다.
중공군 제3차 공세 3일째인 1월 2일, 제1사단은 군단명령에 따라 사령부를 안양으로 옮긴 가운데 전방의 각 연대를 한강 이남으로 철수하게 되는데 먼저 와해되어 철수한 우측의 제12연대는 과천으로 옮기고 동작동-흑석동-한강철교선을 방어하도록 하였다.
제15연대는 제1대대가 덕도리-오산리선에서 고양리에 집결, 철수 후에는 노량진 일대 점령, 제2대대는 은곡리-비암리 전진바위 일대에서 연대의 철수를 엄호하고 고양리에 집결, 철수후에 영등포일대를 점령, 제3대대는 가업리(백석읍)로 이동, 의정부 본도를 확보하고, 철수시 의정부-송추-일영리를 경유 고양리에 집결, 철수 후에 여의도 진지 점령토록 하였다.
그러나 이미 제3대대는 전날 명령이전에 주력과 대대장이 서로 분산하여 이탈하는 혼란을 맞기도 했다. 제1대대와 대전차대대도 돌파되었고, 제2대대는 법원리에서 적 1개대대와 교전을 했으나 좌측 제11연대 1, 3대대 간격으로 침투한 적에게 배후를 기습당해 진지가 무너지고 말았다. 제2대대는 대육리 일대에서 집결하여 진지를 고수하고 있다 철수하여 결국 모든 부대들이 차량으로 한강 도하교를 넘어 영등포에 이동하였다.
제11연대는 계속 법원리를 방어하던 중, 미군의 차량지원을 받아 한강 이남으로 철수하였다. 이 사이에 제12연대가 우일선을, 제15연대가 좌일선에서 동작동-노량진-영등포 일대의 한강선을 방어하였다.
사단은 제2훈련소로부터 632명의 병력을 인수하여 제12연대에 400명, 대전차공격대대에 232명을 보충하였다. '51. 1. 4일 사단은 서울 철수를 완료 하였고, 사령부를 안양에서 수원으로 , 이어서 37도선 점령지시로 안성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방어진지를 구축하게 된다.
국군 제1사단은 이번 임진강 부근 전투에서 제11연대와 제15연대는 적 사살 1,151명, 살상 150명의 전과를 올렸고 아군전사는 63명, 부상 153명, 실종 490명의 손실을 입었으며 대부분이 우측 연대인 제12연대와 대전차 대대 소속이었다.
이때 교두보선을 학보하고 있던 미 제25사단과 영 제29여단이 국군 제1사단의 철수를 엄호 하였다.
이후 국군 제1사단은 '51. 1. 6일 천안 입장으로 이동하였고, 광주 판교를 거쳐 철수한 제12연대는 예비대로 안성 일대에, 제15연대는 전방부대로서 안성천 남안의 진지를 강화하고, 제11연대는 과천에서 안성 서쪽으로 철수하여 경부국도 연변을 경계하였다.
이때 사단의 우측에는 미 제9군단이 장호원-죽산 북쪽 선을 담당하여 국군 제6사단이 우인접 부대로 방어진지를 구축 중에 있었고, 좌측에는 미 제3사단이 평택 일대에 진지를 점령했다. 이 무렵 적은 아군과의 접촉이 끊어졌다.
이러는 동안 국군 제1사단은 부대정비를 실시하고 1월 7일 육군 보충대로부터 약 1천여 명의 신병을 인수하여 제12연대에 250명, 제15연대에 450명, 사단 대전차 대대에 293명을 각각 보충하였다.
(2) 동두천 지역 전투('50. 12. 31~ '51. 1. 3)
동두천 지역 전투는 동두천-의정부 북쪽 38도선 일대에서 방어편성을 하고 있던 국군 제6사단이 '50. 12. 31~'51. 1. 3일까지 중공군 제38군을로부터 제3차 공세를 받아 소요산과 마차산 일대로 철수하면서 적을 지연시킨 방어전투이다.
국군 제6사단은 미 제9군단의 좌일선 부대로서 제9군단장 무어 소장은 국군 제6사단으로 동두천 북쪽 10~20km의 38도선 일대를 방어하라는 임무를 부여하였다.
국군 제6사단(사단장 장도영 준장)는 동두천 일대로 철수한 후 38선 부근에 주저항선을 편성하엿다. 사단은 전곡-동두천 도로 좌측의 고능리 부근에 제7연대를, 우측의 추동리에 제19연대를 배치하였다. 그리고 제2연대는 방어종심을 유지하기 위하여 마차산과 쇼요산일대의 예비진지에 배치하였다. 포병대대는 봉암리에 공병대대는 덕정에 배치하였다.
사단의 우익에는 미 제24사단이 포천 북쪽을 담당하고 좌익에는 국군 제1사단이 적성 일대를 점령하게 되었다.
동두천 지역 전투('51.2.31~'51.1.3)
만유촌
중38군
통현리
중112사 중113사 중114사
전곡
고소성리(백의리)
마포리 고릉리 초성리 대전리 추동리 주원리 영송리 양문리
제7-2대대 제7-1대대 제19-1대대 제19-2대대
어유지리
하봉암리
제6-7연대 제6-2연대
상봉암리
소요산 금동리
제6-19연대
걸산리 안홍리
동두천 국사봉
국군 제6사단은 1950년 12월 중순부터 보름동안 방어진지를 강화하였으며 거의 완전한 3개 연대를 갖추었다.
드디어 중공군이 '50. 12. 31일 공격을 감행하였으며 비무장의 양민을 앞세워 지뢰지대를 통과하도록 하는 야만적인 공격을 감행하였으며, 이어 주력부대가 인해전술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들은 주로 야습과 우회를 혼용하고 교란전을 배합하여 공격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최초 공격은 최후방어사격으로 주저항선에서 저지하였으나, 12. 31일 18시 40분경 사단의 좌인접 국군 제1사단 제12연대가 돌파되어 적의 일부가 사단의 후방인 안홍리(동두천 서북방) 부근으로, 우인접 미 제24사단이 돌파되어 적이 동두천을 기습 공격함으로서 위기를 맞게 되었다.
중공군 제3차 공세 이틀차인 '51. 1. 1일 새벽에 중공군이 사단 후방지역으로 침투하면서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어 사단 지휘소를 덕정으로부터 서울 창동으로 이동 개설하고, 사단 주력은 예비인 제2연대 엄호하에 예비진지로 철수하도록 하였다.
"한겨울, 복숭아 밭에 핀 하얀 꽃"
제19연대장은 회암리와 송우리일대의 예비진지를 점령하라는 명령에 따라 동두천으로 철수하는과정에 바로 미 제24사단 지역으로 돌파한 중공군에 기습을 당해 분산되어 덕정으로 철수를 개시하였다.
제7연대장은 용암리와 매정리의 예비진지로 철수하려 했으나 이미 적이 침투하여 계속하여 덕정을 경유하여 의정부, 창동으로 집결하게 되었다. 제1대대가 걸산리에서, 제2대대는 상봉암리에서 안홍리쪽으로 침투하는 적을 견제하다 적과 교전 후에 연대는 덕정을 거쳐 계속되는 적의 압력에 21시경 창동으로 철수하였다.
제2연대는 인접사단을 돌파한 적이 동두천을 공격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방어진지를 점령하였다.
중공군 제3차 공세 3일차인 1월 2일, 국군 제6사단은 주력 대부분이 창동에 집결하여 수도권 방어를 위한 준비중, 미 제8군의 의정부지역 방어를 영 제27여단에 부여하여 한강 방어선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이에따라 국군 제6사단은 1월 2일에 연대별로 철수를 하여 제2연대는 창동에서 차량으로 한강 남안의 신장리로, 제7연대는 창동에서 경기 광주로, 제19연대는 경기 광주 수진리로 이동하였고 사단은 지휘소를 용인 동림리(모현면)에 개설하였다.
이 전투에서 제6사단은 적 사살 594명(추정), 포로 22명이었으며 사단은 전사 50명이였다고 기록된다.
사단은 제2연대가 금량장리를 거쳐 안성 동북쪽 일죽면에, 제7연대는 광주에서 양지리를 거쳐 백암리일대에, 제19연대는 만등리에서 죽산을 거쳐 진천 북쪽의 대풍리로 철수하였다.
(3) 서울 철수 작전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제3차 공세를 받고 불과 며칠 사이에 38도선에 물러나 서을을 철수하는 위기를 맞았다. 새로 부임한 리지웨이 미 제8군 사령관은 "우리는 한반도에서 물러나지 않겠다"는 이승만 대통과의 약속은 거짓이 되어갔다.
그런데 여기서 서울 철수를 하게되는 결정적 사건이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한강 상에 설치된 교량을 통제하는 공병부대에서 올린 보고서였다. 보고서에 민간인들이 교량이 아닌 한강을 도보로 횡단하는 모습을 보고, 한강이 완전히 결빙되어 한강을 통한 적의 공격시 포위될 위험에 있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동부전선의 불안이었다. 1월 3일까지도 C방어선인 양평-홍천-원포리를 잇는 선을 점령하지 못하게 되자 미 제8군 사령부 작전참모가 리지웨이 장군에게 현 상황에서는 D선(평택-안성-장호원-원주-원포리)도 점령하기 어렵다고 보고한 것이다.
이 무렵 중공군 제66군은 제42군의 지원을 받아 가평을 점령하였다. 3일 8시에는 중공군의 긴 종대가 서울-춘천 도로를 따라 가평 남서쪽으로 이동 중이었다. 그 선두는 퇴계원 일대를 방어중인 미 제1기병사단의 15마일 전방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따라서 중공군이 기병사단을 우회하여 서쪽으로 공격한다면 1번국도가 차단될 수 있는 가능성도 농후하였다.
'51. 1. 3일, 중공군은 유엔군의 서울 철수를 간파하고 전과확대를 위해 3일, 계속 공격을 명령하였다.
1번 국도를 따라 진출하는 중공군 제50군이 3일 03시경 미 제25사단을 공격하기 시작하였고, 이어서 아침 무렵에는 333번 도로(철원-연천-의정부)를 따라 중공군 제39군의 일부가 영 제29여단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미 제1군단장과 제9군단장은 상호 협조하에 교두보선에서 철수를 계획하고, 미 제1군단이 서을 남쪽에 2개의 교량을 이용하고, 미 제9군단은 동쪽의 1개 교량을 이용하도록 하였다
당시에 한강에는 미 공병대가 가설한 다리가 중장비가 기동이 가능한 다리가 남쪽에 1개, 동쪽에 1개 그리고 사람이 걸어서 넘는 도보교는 5개가 가설되어 있었다.
고양 덕양 일영-선유동의 아픔: "영 제29여단의 엄청난 인명피해, 300여명 손실, 전차 10대 파괴됨"
1. 3일, 미 제1군단은 미 제25사단 제27연대의 엄호하에 사단 주력이 철수를 완료하자 이어서 18시 40분경 영 제29여단이 이동을 개시하였다. 그런데 이동중인 자정 무렵 중공군 제39군의 주력 부대가 영 제29여단의 후미를 기습 공격하였다. 엄호임무를 수행중인 제27연대를 제외하고 모든 부대가 한강이남으로 철수하여 증원 부대가 없었다. 이 과정에서 영 29여단은 200명에서 300명에 이르는 인명피해와 탱크 10대의 손실이 발생하면서 4일 03시 30분경 한강이남으로 철수가 완료 되었다.
" 원래 영국군 참전비는 설마리가 아니고 이곳에 있던 것이 설마리로 옮겼다고 한다."
한편 미 제9군단의 철수는 적의 방해가 없이 마치 훈련을 하듯 진행되었다.
강북의 모든 부대들이 철수를 완료한 4일 02시부터 공병에 의한 교량해체 작업이 진행되었으나 강추위로 부품들이 얼어붙어 어려움이 많았으며 결국 07시 30분경 교량 폭파 명령이 내려갔다.
교량이 폭파된 후 1시간 가량 지나서 중공군이 서울에 입성하였고 서울 시청 건물에 인공기가 걸렸다.
인천항도 5일까지 폭파하여 적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고 한강을넘어 수원역 일대에 모인 약 10만의 피난민이 열차의 운행에 차질을 가져옴으로서 유엔군은 이에 대한 통제대책을 강화하였다.
이로써 철수작전이 일단락된 미 제1군단은 평택 남쪽의 1번국도 좌측 서해안 지역에 영 제29여단(태국 대대 배속), 우측 구릉지역에 미 제3사단, 17번 도로 우측 안성 일대에 국군 제1사단을 배치하여 주저항선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방어종심을 유지하기 의해 미 제25사단과 터키여단을 천안에 군단 예비로 확보하였다.
미 제9군단도 국군 제6사단을 좌인접 국군 제1사단과 연결하여 죽산리일대에, 영 제27여단을 법천리 일대에, 미 제24사단을 장호원 일대에 배치하여 주저헝선을 형성하고, 미 제1기병사단은 군단 예비로 충주에, 제5기병연대는 단양일대에 활동중인 적 유격대의 공격에 대비하여 충주-문경간 도로를 점령토록 하였다.
"고랑포에서 생긴 중공군 소령과 방마담의 러브스토리"
한편 중공군 사령관 팽덕회는 국군과 유엔군이 의도적으로 평택-안성-제천-삼척선으로 물러나 중공군을 유인하기 위한 철수작전이라고 판단하고 8일 추격작전을 중지시켰다.
나. 중동부 지역 전투
(1) 춘천 지역 전투('50. 12. 30~'51. 1. 1)
춘천 지역 전투는 국군 제3군단이 제2사단을 명지산 북쪽의 고지군에, 제5사단을 화천-춘천 도로변의 지촌리에, 제8사단(제7연대 3연대 증강)을 화천저수지 남쪽의 내평리 일대에, 그리고 제3사단을 인제 남쪽 소양강변의 청구리에 배치하여 주저항선을 편성하였다.
'50. 12. 31일 자정을 넘기면서 제2사단과 제5사단 지역에 중공군의 집중공격이 가해졌다.
제2사단의 좌전방 만세교리 동쪽에 배치된 제17연대와 우전방 화악산 일대에 배치된 제32연대는 적의 초기 공격에 주저항선이 돌파되어 철수를 개시하려 했으나 좌우 인접 사단과의 전투지경선으로 침투한 적이 퇴로를 차단하여 분산 철수하게 되었다. 바로 예비인 제31연대를 투입하여 진출 중인 적을 차단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사단이 지휘통제 마비 되었다.
제5사단은 좌전방 제36연대는 북한강 동쪽 지암리 일대에서, 중앙의 제35연대는 송암리에서, 우전방 제27연대는 고성리 일대엣서 중공군의 공격을 받아 35. 27연대는 경미한 피해를 입으며 춘천으로 집결하고 있었으나 우전방 제36연대는 좌익 제2사단 제32연대 지역으로 침투한 중공군이 완전히 퇴로를 차단하고 있어 분산하여 북배산을 경유 북한강을 넘고 용문을 거쳐 양평에 철수하였다.
제8사단은 내평리를 방어하고 있다 접적이 경미하여 주저항선을 유지하였으나 좌우 인접 사단이 철수하면서 적중에 고립될 위기에 직면하여 사단도 홍천으로 철수하였다.
춘천 지역 전투('50.12.30~1.1)
중66군 북2군단
중118사
화천 양구 북2사
중116사 중117사
내평리 북12사 북10사
국8사 인제
국7사 국3/국9사
국5사 상수내리
미24사 /국2 지촌리 청구리
국2사
명지산 관대리 국3사
어론리
춘천 국3/국2 국2/국1
가리산
자은리
가평
(2) 인제-현리부근 전투
중서부 전선의 국군 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신정공세를 받고 있을 무렵, 중동부 전선의 국군 제2군단(배속 : 제3사)과 제1군단(배속 :제9사. 수도사)의 상황은 판이하게 달랐다. 양 군단은 오히려 정면공격보다 신정공세 이전에 후방으로 침투하여 퇴로를 차단한 북한군 제2군단과 제5군단의 일부 부대와 격전을 벌이게 되었다.
국군 제3사단은 흥남에서 부산으로 철수한 직후 제2군단에 배속되어 12월 15일, 원주로 진출한 다음 인제지역 38선 상에 배치되어 적을 포착 격멸하라는 명에 따라 인제로 북상하였다. 이와 함께 제26연대는 수도사단으로 수도사단의 제18연대는 제3사단으로 예속이 전환되었다.(당시 철수시 같은 제대에 있던 관계로 함께 이동중 고려)
이 무렵 동해안 주문진에서 서쪽 소양강 일대 38선을 연하는 북쪽에 중공군 제9병단 예하 66군과 북한군 제2군단(제2전선 부대)부대들이 공격준비를 하고 있었다.
북한군 제2군단은 아군의 총반격작전 시기 북한군 패잔병들을 모아 편성한 혼성 유격부대로서 아군이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부진할 무렵 낭림산맥과 태백산맥 및 철원-금화-평강 일대를 거점으로 하면서 아군의 후방을 교란하였다.
국군 제3사단이 38선 남단에 배치하였을 때 전면에는 북한군 제2사단이 진지를 강화하고 있었고 병력은 약 2,700명 수준으로 신병 등 혼성 부대였다.
국군 제3사단이 1950년 12월 20일 경 춘천부근 방어를 위해 홍천에 집결을 완료하였다. 이때 20일, 제2군단 예하였던 제9사단과 제1.2.3경비대대가 제1군단으로 배속 변경되고 대신 제3사단과 제7사단이 제2군단에 배속되었다.
제7사단은 이미 춘천부근에서 진지를 점령하고 있었고, 제3사단은 제7사단 우측에서 인제 남쪽의 38도선을 중심으로 중동부전선에 진지를 점령하게 되었으며 제2군단은 제3사단의 1개 연대를 홍천에 집결시켜 군단 후방을 경계하도록 하였다.
제3사단은 관대리 일대에 주저항선을 구축하고 있었고, 바로 정면에 북한군 제2사단이 증강되고 있었으며 창봉리에 적이 출현하였다. 또한 사단의 우인접 제9사단의 현리지역을 돌파한 적 1개 연대가 제3사단 후방을 교란하기 위해 횡성 북쪽에 출현하고 창봉리로 북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3사단장 최석 준장은 전방에 2개 연대로 방어토록 하고 예비인 제23연대로 , 사단을 증원하기 위해 북진 중인 미 제2사단 제23연대와 협동으로 삼마치 일대에서 '50. 12. 31일 적을 격퇴하고 연결함으로서 사단의 퇴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날 제3사단은 육본으로부터 제2군단에서 배속 해제와 동시에 군 예비가 되어 평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아군전사 1명, 부상 2명의 전투손실 과연 맞는 것일까?, 반대로 적은 오대산 등지에서 261명 사살, 포로 26명"
한편 현리 남쪽의 상남리 부근을 방어 중인 제9사단은 1월 1일 오덕준 준장의 후임으로 사단장에 부임한 김종갑 준장의 지휘하에 수일전에 피탈당한 현리지역을 재탈환하기 위하여 상남리-1091고지-광주동-방태곡-용포를 목표로 공격을 재개하였다.
그런데 좌인접 제3사단 지역을 돌파한 적 1개 연대규모가 오마치 고개 서쪽의 금부리 전방으로부터 기습공격을 가해와 2일 18:00시까지 혈전을 펼쳤으나 일몰로 방대곡으로 철수하게 되고 이 과정에 제29연대 제3대대가 적중에 고립되어 분산 철수하게 되었다.
1월 3일, 제9사단은 13시경 제1군단에서 제3군단으로 전속되고 차기 방어선을 점령하기 위해 철수를 단행하였다. 그러나 이미 적이 사단 후방을 차단하고 있어, 금부리 1091고지와 광주동에서 상남리 일대로 철수한 제29, 29연대는 퇴로가 차단되고 사단과의 연력도 두절되어 각 연대별로 도보로 사단 사령부가 있는 속사리로 철수를 단행하여 진내로 침투한 북한군 제10사단 일부와 교전을 하며 4일 창촌을 경유 속사리에 집결하였다.
그러나 다시 오대산으로 침투한 적 2천여 명이 사단 후방을 차단하려 하고, 좌인접 제3사단도 적 12사단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어 제3군단장 이형근 준장은 제3사단과 제9사단을 황우선(영월-삼척)으로 철수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동해안을 방어 중인 수도사단은 도채동-서림-양양선에 주저항선을 구축하고 있었으나 적은 정면공격보다는 오대산과 설악산으로 연결되는 산악지지형을 발판으로 사단의 후방으로 진출하여 후방을 교란하는 작전을 기도하였다. 이대 제26연대는 12월 30일 제9사단 제30연대와 협동작전으로, 사단 후방지역인 대사리에 진출하여 이 일대에 진출한 적 약 1,000명을 포착하여 제3대대가 하진부리가지 진출했으나 구축에는 실패했다.
이런 상황에 '51. 1~2일 어간에 욱두동고지와 영월 동북 고지 일대에 북한군 제2전선부대들이 침투하자, 군단장은 즉시 경비대대를 투입하여 적을 두일리 방향으로 격퇴하였고, 바로 수도사단 제26연대 제3대대가 두일리의 적을 격퇴하였다.
한편 격전장을 시찰하던 리지웨이 제8군 사령관은 항공정찰을 통하여 철원 방면에 적의 대부대들이 내려오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에 따라 국군 제2, 5사단 등이 안전 포위 될 위험에 처하는 등 현 전선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판단하에 '51. 1. 1일 정오에 미 제1, 9군단은 서울 교두보선으로 철수하고, 국군 3개 군단을 C방어선(한강-양평-홍천-원포리)으로 철수 명령을 내렸다.
다. 중동부전선의 위기
중공군은 신정공세에, 주공을 서부전선의 미 제1군단과 제9군단에 지역으로 지향하였고, 조공은 중부전선의 국군 제3군단을 공격하엿다. 아군이 중서부전선에 관심을 집중하는 사이에 또 하나의 조공부대인 인민군 제2군단과 제5군단이 태백산맥의 준령을 이용하여 중동부 전선으로 소리없이 침투하고 있었다.
중서부전선 부대들이 중공구네 밀려 서울과 한강 북쪽에서 철수하여 D방어선을 점령할 무렵, 신정공세를 마믈라도 하려는 듯 이번에는 인민군을 동원하여 중동부전선에서 혈전이 평쳐지게 되었다.
(1) 북한군 기도
북한 군 제2군단은 아군의 반격작전에 괴멸의 위기까지 몰렸으나 중공구늬 참전으로 2개월의 시간을 벌어 재편성을 완료한 후 신편인 제5군단과 함께 중동부 전선에 배치 되었다. 이 두군단은 중공군의 신정공세를 지원하기 위해 12월 하순 태백산맥의 준령과 아군의 부대간격을 이용하여 제2사단과 제12사단을 아군의 주저항선 후방으로 침투시켰다.
이로 인하여 국군 제3군단 예하 사단들이 퇴로가 차단되어 주저항선에서 물러나게 되고, 인제로부터 홍천에 이르는 돌파구를 허용하게 되었다.
바로 이때 원주를 방어주인 미 제2사단이 생포한 포로진술을 통하여 춘천-홍천-횡성을 연하는 29번 도로를 연하여 서측은 방호산이 지휘하는 북한군 제5군단(제6.7.12.27.28.43사)이 동측에는 최현이 지휘하는 제2군단(제2.9.10.31사)이 산악을 타고 남쪽으로 기동하여 원주, 제천, 단양, 그리고 대구를 공격한다는 진술을 확보하였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이 '51. 1. 6일 밤 횡성에서 남하한 북한군 제6사단과 제27사단이 다음날 여명을 기해 원주북방에서 전투태세를 완료하였고 대기하였다. 이에 앞서 홍천-횡성으로 진출한 북한군 제2사단이 원주 북서쪽을 방어중인 국군 제8사단 10연대의 전방으로 이동하고 북한군 제10사단도 원주 동쪽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이 무렵, 설악산에는 길원팔이 지휘하는 유격대 2,000명의 공비들이 후방진출을 노리고 있었다.
(2) 아군 상황
중공군의 신정공세를 받아 중동부전선에서 물러난 국군은 제1군단의 수도사단만이 2일 계획된 C방어선(양평-홍천-원포리)을 점령하였고, 제3군단 예하의 제2. 5. 8사단의 전황은 불투명 하였다.'
군단의 좌전방 제2사단은 제5사단 좌측방을 뚫고 들어온 중공군 예하 66군 부대들에 가평 북방에서 고립되었고, 중앙의 제5사단과 우측의 제8사단은 통신마저 두절되어 상황 파악도 어려웠다.
한편 군단 예비인 제7사단은 원주 북방에 집결중에 있었고, 국군 제3사단은 24번 도로를 따라 홍천으로 이동 중에 있었으며 평창에 집결할 예정이었다.
적의 신정공세에 산악지대의 넓은 광정면을 담당한 중부전선의 제2. 5. 8사단의 춘천 정면이 돌파되고, 적의 유격대가 도처에서 아군의 보급로와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이에 미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는 부대정비에 주력하던 미 제10군단을 조기에 투입 결정하고 인제-홍천 일대의 돌파구의 확대를 저지하기 위해 1월 3일부로 주력부대인 미 제2사, 미 제7사단을 투입하여, 국군 제3군단으로부터 배속받은 제2. 5. 8사단 등 5개 사단으로 춘천-홍천 도로를 중앙에 두고 C방어선 상의 48km에 달하는 방어선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가평, 춘천 일대의 작전지역을 미 제10군단에 인계한 국군 제3군단은 제7사단과 국군 제1군단으로부터 배속받은 제9사단으로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 사이의 험준한 태백산맥 지역을 맡아 적의 돌파구 첨단을 저지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제9사단은 전투로 고전하고 있고 제7사단도 서쪽으로 이동해야 하므로 상황을 낙관할 수 없었다.
다른 군단에 비히여 북한군과의 접전이 경미한 제1군단도 제사단을 제3군단에 배속전환하고, 대신 제2군단에서 제3사단을 배속받아 태백산맥 동쪽에서 동해안까지 전선을 방어하게 되었다. 그러나 제3사단이 홍천에서 남쪽으로 우회기동하여 군단에 복귀하는 데는 많은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어 동해안의 수도사단과 원주 북쪽의 미 제2사단 사이에는 배치 공간이 생겨 매우 불안한 상황 이었다.
이 무렵 육본은 5일 밤, 국군 제1, 3군단에 원주-삼척간의 수정된 D선으로 철수를 명하였다. 이에따라 6일 원주를 지나 충주-제천-영월-삼척 선으로 철수 남하 함으로서 원주 일대에서 국군의 철수를 엄호하던 미 제2사단의 동측방이 노출되어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 이 무렵 철수 중인 국군 부대들은 너무 자주 수정되어 내려오는 명령 때문에 부대지휘의 혼란과 불필요한 이동으로 체력소모도 많았다.
(3) 원주 쟁탈전
미 제10군단장은 38도선에서 철수한 국군 제5사단을 남한강 동쪽에, 중앙에 국군 제8사단을, 원주에는 미 제2사단(제9연대 결)을 배치하여 원주 방어에 중점을 두었다. 이때 미 제7사단의 주력과 미 제2사단의 일부는 제천으로 이동하고 있었고, 국군 제2사단은 군단 예비로 충주 남쪽에 집결하도록 하였다.
미 제2사단장은 원주 외곾을 따라 서쪽과 남쪽에 제23연대를, 제38연대를 북쪽과 북동쪽에 배치하여 주저항선을 편성하였다.
북한군 제5군단은 주력부대의 공격에 앞서 7일 05:30분 400명 가량을 민간인으로 위장시켜 29번도로를 따라 내려오는 피난민 대열에 잠입시켰다. 이들이 미 제2사단의 후방까지 내려와 부대를 공격하므로서 침투공격을 알게 되었다.
이 공격과 동시에 북한군 제12사단이 사단의 좌인접으로 문막 북동쪽 국군 제8사단 제10연대를 공격하여 이 지역을 돌파하고, 남동쪽으로 진출함으로서 미 제2사단의 방어진지가 돌파되어 버렸다.
원주 지역 전투('51.1.6~1.12)
묵계리
북연대? 북5군단 우항리
안홍리
누산
섬강
미2-23연
북12사 미2-8연 원주 미2-38연 치악산
외남송 단구리
국8-10연
문막 ▲ 247
▲ 599 남대봉
명봉산
미천 (토지문학관)
국8-10연 미2-38연
덕가산700 백운산1066 가리파
이렇게 미 제2사단은 사단의 방어선 유지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원주-목계동 도로로 철수하여 7일 밤에 제23연대는 원주 남쪽 7km 위치에, 제38연대는 그 보다 더 남쪽인 미천 부근에 배치하였다.그러나 너무 남쪽으로 철수하여 경포사거리 원주가 벗어나 있었으므로 미 제10군단장은 8일 새벽까지 4개 대대를 시가지 바로 남쪽에 배치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미 제2사단은 8일 새벽 근접항공기의 지원 아래 외남송 일대 247고지를 제23-2대대가 점령하였으며 마침 취침중인 적을 발견하여 200명을 사살하였으나 다시 적 연대규모의 역습으로철수하여 미촌 서쪽에 배치하여 국군 제8사단의 철수를 엄호하게 된다.
이에 미 제10군단자은 다시 247고지를 확보토록 명하여 제23연대는 2개 대대를 투입하여 9일 10:00시부터 공격하기 시작하여 적의 강력한 저항으로 탈환에 실패하였다.
"청천강변 군우리의 패배를 설욕하다"
'51. 1. 10일에도 수차례 혈전이 진행되어 이날 하루 전투에서 미군은 적 2,000여 명을 사살하였으며 연대도 다수의 피해를 입어 11일 오후에 프랑스 대대와 네덜란드 대대의 일부를 증원 받았다. 그리고 다시 공격하여 적 1,100명을 사살하고 247고지를 수중에 넣었다.
이후 북한군 제5군단은 전부대를 원주로 투입하여 미군과 최후의 일전을 기도하였으나 많은 인명손실과 탄ㅇ냑마저 바닥나 17일 제27사단을 전방에 투입하여 접적을 유지하면서 주력은 횡성부근으로 철수하여 미군의 승리로 일단락 되었다.
이로서 원주에서 중동부전선에서 국군 철수부대를 엄호하고 동시에 적의 돌파구확장을 저지하고 아군의 반격작전을 위한 요충지를 고수하였다. 특히 미제2사단이 지난 11월 말 청천강 중류 군우리전투에서의 오명을 씻는 영광된 결전이었다.
미 제2사단은 '51. 1. 12일 원주를 탈환한 후 14일, 미 제8군사령부의 명에 따라 제천일대에 배치된 미 제7사단과의 연결을 위해 영월-모산리(제천북쪽)-죽관리(목계 동북)-담암리(장호원 동북) 선으로 철수 하였다.
(4) 단양-영월 돌파구차단
중동부전선의 험준한 산악지형을 방어한 국군 제1군단과 제3군단은 신정공세 첫날부터 전방과 후방에서 협공을 받아 방어진지 유지가 어려웠다. 1월 1일에는 C방어선(홍천-원포리선)으로 철수한데 이어 5일에는 D방어선(원주-원포리)으로 철수하였다.
이때 현리부근의 제9사단은 4일 창촌을 경유, 속사리로 이동 중이고 홍천의 제3사단은 홍천-횡성을 경유 4일에는 평창에 집결해 있었다. 또 홍천-춘천으로 북상했던 제7사단은 춘천 동북쪽에서 홍천-횡성-원주를 경유, 목계-창동 선으로 철수 중이었다.
그러나 미 제8군사령관은 전방 사단들이 원주-원포리선을 점령도 하기 전에 다시 64km남쪽의 원주-정선-삼척선으로 조정하였다. 이유는 국군의 공격준비 시간학확보와 원주 동쪽의 방어력을 보강하는 차원이었다.
이에따라 제3군단의 제3사단은 7일 홍천에서 영월로, 제7사단은 신림리에서 영월로 이동 중 적과 조우하여 격전을 치르고 있었거, 제9사단은 장평에서 적과 접촉을 유지하며 정선으로 철수 중에 있고, 제1군단의 수도사단은 주문진에서 삼척으로 이동 중에 있었다.
이러다 보니 사실상 원주축선에 미 제2사단이 북하군 제5군단의 정면 공격에 맞서 있고 국군 제1, 3군단은 새로운 방어선을 점령하려 이동중에 있어서 원주 - 동해안 간에는 적의 진출을 저지할 부대가 없어 공백지역이 발생하였다.
이렇게 되자 북한군 제2군단은 이러한 아군의 취약점을 파고들어 원주-제천-단양 도로의 동쪽 산악지대를 따라 남하하였다. 이들의 선두부대인 제2, 제9사단은 아군의 새로운 방어선인 원주-삼척선보다 훨씬 남쪽인 영월부근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이때 길원팔부대를 통합지휘하게된 북한군 제2군단은 군단주력으로 정면을 공격하고 제2전선부대를 국군 제9사단의 우측방인 오대산-대관령-태기산-보현산 일대에 침투시켜 후방교란을 획책하려 하는 것으로 판단 되었다.
이로써 미 제8군사령관의 기대는 물거품이 되었고 영월일대에 대돌파구가 생겼다. 따라서 미 제8군사령관은 미 제10군단장에게 적이 영월 남쪽으로 한발짝도 넘지 못하도록 적을 저지하도록 명령하여 미 제10군단장은 원주를 공격하는 북한군 제5군단보다 영월로 진출하는 적 제2군단의 영월 남쪽 진출 저지에 작전의 우선권을 두었다.
이에 국군도 제3군단장 이형근 소장을 해임하고 육본 참모차장인 유재흥 소장을 다시 군단장으로 임명하였다. 유재흥 소장은 당시에 관하여 본인이 임무를 받고 부임해 보니 제9사단은 정선에, 제7사단은 영월 남동쪽에, 제3사단은 춘양에 집결하고 있었고 , 북한군 제2군단은 길원팔 부대와 함께 영월-춘양을 경유 영주-안동으로 바져 나갈 기세였다고 한다.
(5) 정부의 총력전 태세 구축
(가) 국민방위군 편성
국민들의 결의에도 불구하고 평양을 철수한 유엔군의 후퇴가 계속되자 정부는 중공군과 맞서 싸우기위한 목적으로 국민방위군을 설치하기로 결정한다.
1950년 12월 21일 국민방위군 설치법을 제정하고 만 17세 이상 40세 미만의 남자를 대상으로 집단적으로 소집하게 된다. 육본은 김윤근 준장을 사령관으로 약 50만명을 소집하게 되며 교육연대가 전국 51개소에 설치되어 주로 후방지역에 위치하게 되는데 방위군 사령부는 대구에, 지역 방위군은 주로 대구 . 부산 등지에 집결하였다.
그러나 이동간 방위군사령부 고급 간부들이 방위군의 이동과 수용에 사용되어야 할 국고금, 양곡, 피복, 의료품 등을 착복하고 영하의 기온속에 이동 도주에 와병 또는 탈주자, 심지어 아사, 동사, 병사가지 생기는 등 대사건이 발생하여 그 창설 목적에 부합되지 못하고 '51. 4월에 국민방위군 사건을 끝으로 해산되고 말았다,
(나) 대한청년단 무장시도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청년단 50만명을 무장시키기로결심하고 미국에 장비제공을 용청하였다. 사실 당시에 유엔군은 추가 병력획득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맥아더는 기존부대의 임무수행 상태가 너무나도 좋지않기 때문에 새로운 부대의 창설에는 이점이 없다고 반대하였다. 그리고 그는 대한청년단은 기존부대의 보충요원으로 운용하는 것이 최선책이라하여 반대하였다.
(다) 정부의 이전 검토
미국정부가 1951년 1월 12일 중공군의 참전과 관련하여 결정한 유엔군의 전쟁지도 지침에는, 강압에 의한 철수시 유엔군은 일단 일본으로 철수하되, 한국정부와 군경은 제주도로 이전시켜 저항을 계속 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망명정부 위치는 제주도로 결정하였으나 이곳에 이미 피난민과 포로 25만 명이 수용되어 있어 식수가 부족하고 추가 수용이 불간응한 상태로 먼저 포로들을 인근 근해도서로 이송하기로 하였다.
4. 참전용사 증언 및 유해발굴 위한 탐사 / 탐문결과
가. 참전용사 증언
"한겨울 복숭아 밭에 핀 꽃"
김용철 참전용사(제6-19연대) : 우리가 다시 38선을 넘어 남으로 후퇴하였다. 이건 후퇴라기 보다는 도망가는 것이다. 우리는 처음에 춘천북방에서 있었기에 이곳의 지형은 잘 알지 못했다. 우린 너무 희천에서 온정에서 당하여 피리소리만 들어도 몸이 오그라 들고 눈동자만 커져 싸울 생각보다는 또 포위되었그나 하는 생각이 앞섰다. 그러니 지휘도 필요없다. 먼저 도망가는게 사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상황인데 1.4후퇴 때도 그랬다. 한탄강인지 임진강인지 강 이남에 잠깐 진지를 점령하고 신정이라고 그래도 주변 마을에서 뭘 위문이라고 가져오기도 해서 먹고 긴장감이 다소 누구려졌는데 역시 그놈들이 뒤에서 나타났다.
우리가 동두천을 지나는데 길 옆에 복숭아 과수원이 있었는데 무슨 하얀 뭉치들이 수없이 널려 있다. 마치 눈밭에 눈사람같기도 하고 무슨 하얀 복숭아가 떨엊져 있는 것 같았다. 주변 주민들 이야기를 들으니 야밤에 2연대인데 들어와서 진을 치다가 중공군에 걸려들어 다 죽었다고 한다. 또 누구는 중공군이 떼로 밀려왔다가 죽었다고도 한다.
바로 옆에는 동쪽으로 소요산이고 서쪽에는 마차산이 있었다. 그런데 이미 적이 이 모든 곳을 사전 점령하여 있었고 우리 좌측에 1사단이 있었는데 그쪽으로 뚫여서 우리 뒤로 올가매버렸다. 우린 뿔뿔이 흩어져 각자 덕정으로 의정부로 내려가야 했다. 얼마나 누가 죽었느지는 모른다.
지역주민 이규숙(81세외 1명, '12) : 1.4후퇴 당시에 동두천 사과나무밭에 우리 6사단이 하얗게 죽었다. 하얀 사과가 떨어진 것처럼 너무 많이 죽었다. 나는 여자의 몸인데 당시 비행기 폭격으로 오른팔이 절단되었다. 현재 연찬 상리 공병대 뒤에 유해가 너무 많이 썩어가고 있어 걷기도 힘들었다. 내 아버지가 동두천 창말 지역에서 20구씩 나눠 국군 제6사단 군인을 2002여구 가매장 했다.
"기다려도 오지않는 중대장 한철민"
유격대원 박기학 : 일사후퇴시 평양에서 국군을 따라 남하하여(육사 8기생인 한철민 대위가 통제) 가평 북방 어딘지 도착했는데 미군 비행기가 오폭을 하여 다 죽었다. 겨우 몇명인지 살아남아 현리지역에서 제9사단 제30연대에 인계되어 특공대로 활약했다. 현리일대에서 많은 피해를 입고 방태산을 넘어 평창 미탄으로갔는데 갈골이라는 곳에서 북한군의 매복기습으로 거의 전사했다. 온다던 중대장은 오지않았다.
"돈 가마니 14개, 그리고 포로되어 갔다가 '53. 8월에 귀한"
"유곡리 공동묘지 근처에 수많은 포로들이 죽어서 몇구씩 구덩이를 파고 묻었다."
진기병 참전용사(제2-31연대, '12년도 12월 증언) : 1. 4후퇴 당시에 좌측에 17연대가 먼저 빠져버려 가평 북방에 2개 연대가 완전 포위 되었다. 포위되어 있는데 그것도 모르고 공격하여 매봉을 올라갔다. 아군 폭격기가 오폭하여 피해가 엄청 났다. 비행기 포격을 피해 교통호안으로 뛰어들었는데 그 속에 인민군 부상자들이 즐비하게 있었다. 돈다발이 14가마니나 있어 군속들에게 다 나누어 주었다.
누가 먼저 총을 쏘느냐의 절대절명의 순간에 내가 먼저 갈겼다. 호안에 있는 적군 머리에 총알이 들어가고 골이 터져 전투복 야상의에 범벅이 되어 벗어 던지고 남쪽으로 튀었다. 능선을 따라 내려오는데 누군가 부시력거려 살펴보니 연대장인데 인접 32연대장이다. 몇명하고 동행하고 있었다. 왜 여기까지 올라와 있는지는 모르겠고 함게 일행이 되어 남으로 계속 내려가 가평시내인지 청평시내인지 모르겠는데 병력이 계속하여 후퇴하고 있다. 31연대를 찾을려고 했으나 없다. 그런데 갑작스레 걸을 수가 없게 되었다. 발에 동상이 걸려 아예 주저앉아 일어나질 못했다. 눈만 뜨고 있는 바보상자가 되어버렸다.
증공군이 계속 뒤에서 쫒아오고 아군은 남으로 후퇴하고, 나는 남겨지고 중공군 위생차가 있었는데 그 차에 실려졌다. 나말고도 이미 꽈 차있다. 여자군인이지 간호원이지 몰핀 주사를 놓았다. 그리고 몇일있다 도착한 곳이 유곡리한 곳인데 포로들이 엄청 있는 것이였다. 미군도 있고 높은 계급도 있는데 북쪽으로 오성산이 보였다.
"포로수용소 근방에 죽은 군인의 가매장가 많다"
유곡리에서 포로생활을 하다 평강으로 갔다 다시 평양 옆으로 갔다 다시 강계로 갔다 압록강변까지 갔다. 낮에는 모두 산속에 숨어서 지냈다. 미군 폭격기가 수시로 상공에 나타나 폭격을 하기때문이다. 유곡리에서도 무슨 병인지 부상인지 엄청 죽어나가는데 바로 옆에 마을 공동묘지가 있었는데 그곳에 한곳에 몇구씩 다 묻었다. 가보면 알 수 있다. 미군도 산 밑에 묻는 것 보았다. 북한지역 포로수용소가 있는 곳은 수시로 옮겨다녔는데 대부분 광산촌 입구가 많았다. 죽으면 돌돌 말아서 입구촌 산허리춤에 묻는데장소가 거의 동일하다. 찾는다면 바로 포로 수용소가 있던 곳의주변을 탐문하면 수없이 찾는다. 나는 100명도 함께하고 500명도 함께하고 했는데 무슨 병인지 돌림병에 한곳에 100여 명 이상은 죽어서 실려나갔다.
최초는 '50년 10월 말에 매봉에 올라갔다. 그때는 우리 부대가 철원에도 있었다. 나는 첩보요원으로 철원까지도 들어가 민간인을 만나 동향을 파악해서 돌아왔다. 11월에 철원지역에 가니 중공군이 왔다고 해서 보고하니 증거품을 가져오라하여 다시 사방거리로 들어갔는데 그때가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날 밤이었다. 마침 어느 집에 들어가니 돼지가 있어서 돈다발 주고 한마리와 찹쌀을 구해 갔고와서 회식도 했다.
"1. 4후퇴시 현리, 그리고 어느 산속에 눈속에 빠져 다 죽었다."
"구례경찰서 유치장에 양민들을 가둬놓고 기름을 뿌리고 떠나간 북한군"
"현리에서 살아(북한 여군장교도움), 백마고지도 저격능선도 전투에 참여했다"
김진수 참전용사(9사 28-2대대) : 나는 마산 진동리에서 미 제24사 카츄사로 참전했다. 흑인을 따라 다니는데 어디선가 자다보니 흑인이 혼자 도망가 버렸다. 무슨 고개일대 였다. 도망쳐서 죽기살기로 진동쪽으로 갔는데 학교 연병장에 미군이 있어 들어가니 흑인이 그곳에서 씩 웃고 있다.
북진 작전간 미군을 따라 구례. 곡성으로 오는데 경찰서 유치장에 북한군이 사람들을 포개서 쌓아놓고 기름 붓고 살아있는데 불지르고 퇴각했다.
불은 타오르고 그 곳에 간 미군들이 너무한 모습에 비명을 지르며 튀어나오고, 경찰서 뒤에는 구덩이를 파고 사람을 생매장하고 퇴각했다.
대전에서 제9사단으로 재편성하여 들어갔는데 이건 보급이 말이아니였다. 그래서 하사관학교에 지원하여 교육받던 중에 원주로 해서 현리로 들어갔는데 어디에서 잠들었는데 따발총 소리가 요란하여 눈을 떠보니 북한군에 부대가 포위되었다고 한다.
나는 이제 영낙없이 죽었구나 하고 머뭇거리는데 앞을 보니 북한군 여자 장교가 서있다. 그런데 다른 곳을 바라본다.
아무말도 없지만 나는 도망가라는 표시로 알고 도망쳤다. 산으로 산으로 도망치는데 눈이 얼마나 오느지 동료들이 눈속에 많이 죽었다. 나는 현리에서 '51. 1월초에 포위되어 살아났다.
51년 말에 철원 독립고지 281고지에서 중화기반장을 했다. 그 당시는 못 도망가게 뒤에는 독전대가 있었다. '52년도 10월에 백마고지 전투시에 낮에는 우리 밤에는 중공군이다 아군도 많이 상했지만 중공군은 떼로 죽었다. 그냥 놔두면 썩어 벌레가 득실거리고 냄새가 고약해서 옆에 있는 교통호나 포탄이 떨어진 장소애 밀어놓고 몇삽 덮어버린다. 전투를 하다 뛰다보면 물컹거리는 곳에 발이 빠지는데 사람 송장구덩이다. 백마고지, 저격능선은 어디고 파면 나온다.
나는 동생과 함께 저격능선 전투시 있었는데 휴전 당일 몇분 남겨놓고 전사했다. 그 당시에 거기 무슨 강이 있는데 중공군이 넘어와 함께 먹을 것을 나누어 먹으며 놀기도 했었다.(?)
"내가 건의하여 서해안 일대 자생 유격대에 무기와 보급품을 지급했다."
이영철 미 극동군사령부 제2정보사 교동파견대 교육대장(월간조선인터뷰) : 6.25전쟁 당시에 개성에 살았으며 26의 나이로 '50. 10월에 미국 극동군사령부 주한연락처(KLO)에 입대해 '54년 부대해체까지 강화 불음도에서 근무했다.
서울과 평양에서 첩보교육을 받고 11명이 미군과 함께 평양으로 북진해 갔다. 이 중에 8명은 함경북도에서 전사했다. 중공군이 개입하여 함께 휴전선 이남으로 철수하여 '50. 12. 12일 정보수집을 위해 적지인 황해도 황주에 낙하산으로 침투했다. 항주지역 북한군과 중공군의 위치, 보급로, 부대 이동상황 등을 보고하는 것이다.
그런데 적지에 떨어진 후 1시간 정도 지났는데 총을 들고 군인이 나타났다. 적이 아니고 먼저 들어온 KLO였다. 12월 27일 평산으로 이동한 후 상부에 적상황을 보고하려는데 무전기가 고장이다. 이때 이 대원의 통제는 미 해군 클라크 대위였다. 이러 상황에서 '51. 1. 5일 범선을 타고 서해로 탈출하여 대구에 있던 미 8군사령부에 가서 정보장교인 클라크 대위를 만났으며 그들은 이 대원이 전사한 것으로 알고 있다가 무척이나 반가워하고 놀란 모습이었다.
여기서 이영철 대원은 북한지역에 자생 유격대가 있으며 이들에게 무기와 전투물자를 지급해야 한다고 건의한 것이 받아들여져 도서지역에서 활동중이던 자생유격대에도 무기와 보급품이 지급되기 시작했다.
"연백군 남산에 적부대 격멸 및 강화에 들어온 북한군 격퇴에 기여"
이 대원은 '51. 1. 15일 현역 군인 황해룡 하사와 연백 호동면 남당리 벌판에 낙하하여 지역주민을 포섭하여 중공군와 북한군의 위치를 알아내어 부대규모를 보고하였다. 비행기 4대가 투입돼 적을 괴멸시켰다.
1월 26일에는 강화도에 북한군 2,600명이 있다는 사실을 보고하여 미군 공군과 바다에서 함포가 사격을 시작하였으며 사격하던 배에서 연락이 와서 가보니 유격대원드리 요구했던 탄약과 수류탄, 그리고 미군화기들이 지원되었다.
참전용사 최창성(제3-18연대) : 나는 '49년도 처음에는 제6사단 제8연대에 들어갔다가 제18연대로 갔다. 1.4후퇴시 홍천북방 어론리지역 전투시 치열한 교전이 있었고 이때 아군전서자가 많았으나 현지매장하거나 방치후 후퇴하였다.
〔 이때 당시의 전사개요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압록강-두만강변에서 철수를 개시한 국군과 유엔군은 38도선 확보를 위해 동부전선을 담당하게 된 국군 제2군단은 청천강에서 철수할 무렵 제6사단을 미 제9군단에 배속전환하고, 12월 8일 화천 동북방의 진지를 점령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무렵 북한군 제2, 5군단 패잔병들이 평강-금화-화천도로를 차단하고 있어 부득이 연천응 경유하여 철수하게 되었다. 한편 군단이 철수하는 동안 동부전선에는 대구에서 공비토벌작전을 실시한 제9사단이 12월 8일 긴급히 원주, 강릉으로 이동하여 춘천 북방 내평리에서 동해안의 인구리까지를 담당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고려 서둘렀으나 12월 14일 원주에 도착하였다. 군단은 재정비할 겨를도 없이 육본 명령에 청천강 교두보와 시변리에서 고군분투한 제7사단을 육본직할로, 제8사단을 제3군단(2. 5. 8사 배속)으로 배속전환하고 대신 동부전선의 광정면을 방어중인 제9사단과, 함흥에 구룡포로 해상 철수한 제3사단을 배속 받았다.
그러나 군단이 방어선을 구축도 하기전에 명령이 수정되어 흥남에서 묵호로 철수한 제1군단이 동해안지역을 담당하게 되어 제9사단이 다시 제1군단에 배속되어 군단은 홍천으로 진출한 제3사단만으로 인제 남쪽의 부평리-관대리 간을 방어하게 되었다. 이에 제3사단장 최석 준장은 제18연대로 제8사단 제16연대가 방어하던 홍천고개와 하수내리-상수내리지역을, 제22연대는 제9사단 제28연대가 방어하던 음양리-수리봉지역을 인수하여 방어하고 예비로 제23연대는 홍천에 배치하였다. 이로써 사단으 좌전방은 제8사단, 우전방은 제9사단으로 연결되어 주저항선을 형성하게 되었다.
'50. 12. 23일경 모든 부대들이 38선 방어선을 점령하고 진지강화에 주력할 무렵 신정공세를 계획한 중공군은 주력부대의 공격에 앞서 국군 사단들이 배치된 지역의 퇴로를 사전 차단할 목적으로 인민군 제2군단과 제5군단이 국군 제1군단과 제2군단의 전투지경선으로 침투하여 춘천과 홍천을 차단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북한군의 선제공격이 시작되었다.
●북한군의 홍천부근 돌파기도
화천-양구-인제 선으로 진출한 북한군 제2군단은, 국군 제2군단예하 제8사단 정면의 오항리, 제3사단 정면의 관대리, 그리고 제9사단 정면의 인제 일대에 각각 1개 연대 규모를 배치하고, 이들 중 일부가 제3사단을 양익포위할 목적으로 좌인접 제8사단가 우인접 제9사단의 전투지경선 부근으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12월 23일, 제8사단의 저항선을 돌파한 적의 일부가 홍천고개부근으로 진출하여 자은리를 위협하였다. 이에 제3-18-1대대는 이곳으로 진출한 제8-10연대와 협동작전으로 714고지의 적을 소양강 북쪽으로 격퇴시켰다.
그러나 제3사단의 좌인접 소양강변으로 진출한 제8-10연대가 적의 역습으로 자은리로 철수하고, 또 제18연대도 지역도 적의 공격을 받기 시작하면서 제10연대를 배속받아 소양강 남쪽 내평리 일대의 주저항선을 회복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적 1개 연대규모가 야간에 홍천고개로 진출하여 퇴로 차단을 극복하기 위해 에비인 제23-1대대가 제18연대를 증원하였다.
하지만 적은 소부대규모로 계속 침투시켜 우인접 제9사단의 제28연대 지역을 돌파한 적이 제3사단의 우측방을 위협함에 따라 제3사단장은 각 연대들에게 홍천고개-장남리-부봉을 연하는 선으로 철수를 지시하며, 이 과정에서 상수내리에 배치되었던 제18-3대대가 철수과정에 어론리에서 다수의 피해를입었다.
12월 27일, 군단의 주저항선 회복명령에 따라 제3사단은 좌측에 제18연대는 제8사단의 증원부대로 군단에서 투입한 제7사단 제8연대와 병진공격하여 소양강 남쪽의 정자동 일대를, 우측의 제22연대는 어론리 북쪽의 하다물리를 확보토록 하였다.
12월 27일 새벽에 공격을 개시했으나 좌측의 제7-8연대의 가리산 북쪽으로의 진출이 지연되는 가운데 북한군 2개 연대 규모가 제18연대 정면의 천촌일대에 집결했다 미군의 항공폭격에 큰피해를 입고 분산되었다.
12월 29일, 결국 제18연대는 적을 소양강 북쪽으로 격퇴하고 정자동 일대를 점령하고, 제7-8연대도 소양강을 통제할 수 있는 물노리 부근에 진지를 제8-10연대에 인계하고 양덕원리로 철수하였다. 그리고 제3사단은 매봉-정자동-어론리를 연하는 주저항선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이후 이 지역은 북한군 제10사단이 북한군 제2사단을 지원하기 위하여 상수내리 부근으로 진출하고, 또 제3사단의 후방인 창봉리에 2개 대대 규모의 북한군 패잔병이 활동하고 있어 양구-인제 남쪽의 소양강변은 언제 적이 공격을 재개할지 불안한 상황이었다.
●춘천 지역 전투('50. 12. 30~'51. 1. 1)
춘천 지역 전투는 국군 제3군단이 제2사단을 명지산 북쪽의 고지군에, 제5사단을 화천-춘천 도로변의 지촌리에, 제8사단(제7연대 3연대 증강)을 화천저수지 남쪽의 내평리 일대에, 그리고 제2군단의 제3사단을 인제 남쪽 소양강변의 청구리에 배치하여 주저항선을 편성하였다.
●인제-현리부근 전투
이에 따라 제3사단은 인제-홍천 도로를 방어하기 위하여 소양강변 관대리에 주저항선을 형성하였다, 이때 북한군 1개 연대규모가 우인접 제1군단의 제9사단 제28연대지역을 침투하여 후방교란 및 보급로를 차단할 목적으로 횡성북방 창봉리에 출현함으로서 제3사단장 최석 준장은 전방 연대는 자은리-홍천-원주 진출을기도하는 북한군 제2사단을 저지하도록 하고, 사단 에비로 퐁천에 있는 제23연대로 하여금 사단을 증원해 주기 위해 올라오고 있는 미 제2사단 제23연대와 협동으로 31일 한미 양국 군대는 남북에서 포위공격으로 이들을 삼마치일대에서 격퇴하고 퇴로를 확보하였다.
중공군의 신정공세를 받아 중동부 전선에서물러난 국군 부대중에 제1군단 예하 수도사단만이 '51. 1. 2일 계획된 C선(양평-홍천-원포리)를 점령하고 있었고 제3군단의 제2. 5. 8사단은 완전히 붕괴되어 지휘통제가 무너지고, 군단 에비인 제7사단은 워누북쪽 20마일 지점에 집결 중에 있었고 제3사단은 홍천으로 이동중이며 홍천 일대의 돌파구 차단을 위해 평창에 집결할 계획이었다.
이에따라 미 제8군사령관은 춘천 북방 국군 제3군단의 3개 사단(2. 5. 8사)을 미 제10군단에 배속하여 통제토록 하고, 국군 제3군단은 국군 제7사단과 국군 제1군단에서 배속받는 제9사단으로 미 제10군단과 구군 제1군단 사이의 험준한 태백산맥 지역을 맡아 돌파구 첨단을 저지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 시강에 제9사단은 북한군과 격전을 치르고 있었고 제7사단은 홍천에서 서쪽으로 이동중에 있어 상황을 낙관할 수 없었다.
이후에 상황이 바로 원주지역에서 미 제2사단의 원주지역 전투가 대승을 거두며 원주를 지탱하게 되고 이어 단양-영월 돌파구 차단 작전이 벌어지게 된다.
이렇게 각 사단들이 수시로 변하는 배속명령의 변경 속에 제1군단도 제9사단을 제3군단에 전환하고, 대신 제2군단의 제3사단을 받아 태백산맥 동쪽에서 동해안까지 전선을 방어하게 되었다.그러나 제3사단이 홍천에서 남쪽으로 우회하여 군단 책임지역으로 들어오기가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고 이로 인하여 동해안의 수도사단과 원주 북쪽의 미 제2사단 사이에 공백이 발생하게 되었고 계속되는 북한군 제2. 9. 31사단이 횡성지역에 육박하기에 앞서 육본은 5일 밤에 국군 제1, 3군단에 원주-삼척선의 수정된 D선으로 철수하도록 함으로서 국군이 6일 충주-제천-영월-삼척선으로 철수 남하하게 되어 국군을 엄호하게 된 미 제2사단의 동측방이 노출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상의 전사 내용에서 1.4후퇴 당시에 어론리에서 피해가 많이 발생했다는 최창성 참전용사님의 증언은 1.4후퇴라고 보기보다는 바로 북한군의 선제공격이 있었던 '50. 12월 말경의 전투로 이해되며 물론 평창으로 이동해 가는 과정에도 얼마든지 어론리 일대에서 피해는 있을 수 있다고 본다.
더구나 이 지역일대의 지역주민들의 제보는 대부분 중공군 4월 공세와 5월공세에 관련된 내용으로 국군 제5사단이나 제7사단을 목격했다는 이야기는 많다. 하지만 제3사단을 보았다는 이야기는 못보았다.
그동안 자은리나 홍천고개, 그리고 어론리 지역에서의 발굴된 유해는 많다. 홍천고개~매봉구간애서 5구, 홍천고개-가리산구간에서 '13년도 13구 등 20여구, 자은리 지역에서 '09년 11구 등이 발굴 되었다.
참전용사 박무호(제8-21-2-1중대) : 나는 '50. 9월 9일 입대하여 제8사단 제21연대에 가서 북진작전간 참여했다. 북한지역에서는 어떻게 전투했는지도 모르겠고 중공군이 피리불고 꽹과리 치면 너나나나 다 도망쳐서 살기 바빴다. 대부분 포로가 되ㅇ=거나 행불이 되었는데 운이 좋아서 살아서 후퇴하다 또 시변리인지 구하리인지 모르겠는데 사단장은 도망가버리고(사다 사려부와 일부 병력을 차량화 하여 철수하고 연대가 연천 북방으로 철수하다 북한군에 포위되어 많은 피해 발생, 이 일로 사단장 징계받음) 많이 다쳤다. 어떻게 해서 춘성 북방으로 들어왔는데 먼저 들어온 제5사단이 있고 우리 우측에는 제7사단 병력도 일부 있었다고 들었다.
"'51. 1. 1일 신성공세에서 중대원이 20~30명만 살았다."
우리 앞에는 큰강이 있었는데 나중에 들으니 소양강이였다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는지 신정이라하는데 우리 뒤에서 난리가 났다. 중공군인지 북한군이지 침투하여 우리 대대를 기습했다. 우리는 다시 영원북방에서의 악몽이 되살아나 무조건 뛰었다. 그래서 얼마를 오니 홍천인데 병력을 수습하기에 다시 복귀하게 되었는데 우리가 그전날 신병 100여 명을 받았었는데 나중에 보니 20~30명 밖에는 없었다. 그러니 어디서 죽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소양강과 홍천 어간이라는 것외에는.
나는 '51.2월에 횡성에서 포로가 되어 '1. 9월 9일날 아군지역으로 탈출하여 원대복귀하였다. 포로들을 그놈들은 교화시켜서 많은 인원을 다시 전투현장에 내려보냈다.
"가평 멱골의 한숨 : 사창리 이정술 할머니(1.4후퇴시 18세)의 제보"
나는 가평 멱골에 살다 전쟁이 났다. 처음 전쟁때는 전쟁도 모르고 북한군이 앞마당에 와 있었다. 그놈들은 처음에는 상당히 신사였다. 동네 빨갱이들이 온갖 못된 짓을 다했다. 그러다 얼마안되어 국군이 들어와 동네는 뒤집어졌다. 부역자들을 잡아다 이번에는 무슨 청방대인지 하는 것들이 설치고 다니며 기분나쁘면 잡혀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동란이 되어 싸리재를 넘는데 군인이 베낭을 메고 여기저기 죽어있다. 국군은 남쪽으로 있고 북한군은 북쪽으로 있었다. 중공군이 쏼라쏼라 하며 산에서 내려오고 거기에 북한군이 붙어있었다. 쓸데없이 산속에 있지말고 집에 가 있어라 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얼마후에 북한군이 몇명 들어왔는데 국군 포로를 끌고 와서는 구덩이를 파고 그 속에 집어낳고 총을 갈기고 묻어버리더라.
중공군이 우리집에 함께 있었다. 그런데 내가 다 큰 여자인데 같이 방에서 자면서 건드리지 않는다. 그런데 전쟁통에 참전용사한테 시집을 갔다. 그런데 남편이 부상을 당하여 부산 36육군병원에서 명예전역했다. 그런데 상이등급이나 어떤 혜택도 없었다. 이유는 남편이 죽은 전우도 있는데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죄인이라고 했다. 그런데 나이먹어 후휴증이 나타나 몸속에 파편이 수십개가 있었는데 황당한 것은 그 병원에 입원했던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니 나는 뭐인가. 그러다 남편은 하늘나라에 갔다. 참전용사로서 살아서는 그 알량한 한 20만원 받았는데 죽고나니 아무것도 없다. 지금 현충원 한번 기려해도 차비도 없다. 어떻게 해야하나. 좀 방법을 알려달라.
"일병 고, 양손호님의 기막힌 따님의 만남"
나는 '07년 8월에 가평 백둔리의 애재비고개-귀목고개-명지산을 혼자서 탐사에 나섰다. 이미 이 내용은 몇번 언급이 되었으리라. 얼마나 덥고 담이 비처럼 쏟아지는지 휴대했던 물이 끝이나다보니 머리가 아파왔다.
"개인호를 따라가다 실신상태에 이르다"
김밥 한줄기 올랐던 산인데 내가 큰 실수를 한 것이다. 다른 열량을 보충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미 산에 올랐으니 도중에 포기도 못한다. 올라섰더니 개인호가 수없이 있어서 따라가다보니 점심시간도 지났다. 가평지구는 '51년 중공군 4월 공세시 사창리에서 포위된 국군 제6사단이 밀리면서 사단이 와해된 곳으로 통상 알고 있지만 실제는 1.4후퇴시 국군 제2사단과 국군 제5사단이 또한 엄청난 피해를 입은 장소다.
"경찰이 통제하여 다 묻었다는 유해는 흔적도 없다"
그러니 당연히 호가 수없이 있다. 이른 아침에 오르는데 애재비고개-죽터사이에 벌목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나이드신 분들이 있어 이야기를 해보니 이 구간에도 군인이 발로 차일정도로 죽어있었는데 모두 경찰이 통제하여 몇군데에 묻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 흔적조차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몇번에 걸쳐 산불이 났고 산사태도 발생하여 이제는 찾기 힘들다 한다.
"애재비고개-연인산, 애재비고개-괴목고개, 애재비고개-명지산 구간에는 모두 개인호가 있다"
뛰다시피 하며 탐사를 하였는데 하산시간이 오후 2시가 넘었다. 5시에 출발하여 양짓말에서 6시부터 올라서서 연인산구간은 중간에 뒤돌아 나와 귀목고개로 올랐다. 산판을 하는 분들 이야기가 귀목고개가 귀신고개라 하여 옛날에는 여기로 넘어서 일동으로 가평 현리로 갔는데 임꺽정같은 산두목들이 숨어있어 인명피해도 있었다고 했다.
"귀목고개의 의미를 아십니까?" "정말 부처님 귀보다 더 큰 귀가 참나무에 붙어있다"
귀목고개에서 명지산을 오르는데 등골이 오싹하다. 혼자서 탐사를 한두번 한것도 아니지만 중간에 귀신이야기가 마음에 걸린 모양이다. 그런데 명지산에 오르는데 정말 귀목고개, 귀목봉의 의미를 알아냈다.
이곳 명지산 귀목고개 일대에 있는 참나무드르이 수명이 꽤나 오래 되었다. 그런데 묘하게 여러 그루의 나무에 정말 사람 귀하고 똑같이 생긴 모습이 달려있다. 처음엔 사람이 죽어서 원한이 쌓여 귀가 나무에 붙어있는 느낌이다. 정말 오싹했다. 이런 나무들이 여러그루 있다.
"점심 식사 있으세요?"
난 너무 배가 고팠다. 새벽에 올라서 김밥 1줄로 해결했으니 산악탐사에 무리였다. 원래는 귀목고개만 갔다오려 했는데 개인호가 연속적으로 있으니 미쳐서 한번 보았다하면 안가면 안된다. 무조건 가야한다. 이것이 운명이었다. 오후 3시가 되어 양짓말에 내려왔다. 배가 등에 붙어있다. 그래서 산판일을 하는 사람들 점심을 하는 집에 들어갔다.
"사장님 점심 먹을 수 있나요?"
"아이고 어쩌나 너무 늦었어요. 다 잔밥처리하고 아무것도 없는데"
"라면이라도 몇개 끓여 줄 수 없나요. 나와 운전병이 먹을 수 있게"
"아니 계급도 높은 분이 이 시간까지 뭐하시느라 점심시간도 넘기고, 옷은 소금이 찌들어 하얗게 되었네요"
"저기 명지산에 6.25전쟁 때에 전사한 군인 유해를 찾을려고 갔다 왓습니다."
"아니 벌써 50년도 넘었는데 그게 있겠어요?"
이런 대화를 주고 받으며 아주머니는 라면을 끓이는 중이였다. 운전병은 차에서 기다리며 우발상황에 대비해 전화소통이 가능한 곳에서 대기한다. 정말 고마운 군인이다. 드디어 라면이 끓여지고 밥상이 차려졌다. 아무것도 없더니 찬밥도 한그릇 나왔다. 너무 배가 고픈 우리는 정신없이 먹는데 정신이 없었다.
"경찰이 왔다, 간첩 잡으러?"
한참 먹고 있는데 누가 와서 바라보고 있다. 경찰이다. 어떻게 왔느냐고 물으니 방범순찰하다 잠깐 들렸다고 한다. 알고보니 이 아주머니가 살며시 간첩출현 신고를 한 것이다. 대단한 아주머니 연기다. 경찰이 달려와 밖에 주차된 국방부 차량을 보고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한다.
이런 경우는 많이 경험해 보았다. 가족과 주말에 전투지역 동네에 경로당을 찾았다가도 신고되어 경찰이 출동하기도 했다.
"아주머니 훌륭하십니다. 신고정신이 좋습니다. 이런 산악지역은 그런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여기 사십니까?"
"죄송합니다. 높은 분이 꼴이 영 아니라서 그렇게 힘들게 다니는지는 몰랐어요. 편하게 있고 시키는 일만 하는지 알았어요"
"죄송하긴요. 절대 그렇지않습니다. 어디 사셍ㅅ?"
"아참 나는 여기가 고향이 아니고 도대리 백자동입니다. 여기서 한 10분 걸리는데 전쟁때도 거기 살았어요. 할아버지와"
"밤에 할아버지가 나가는데 나도 따라가서 봤어요. 시체를 바로 길옆에 묻었어요"
지역주민 허정순(76세. '07) 제보 : 바로 라면을 끓여주고 경찰서에 간첩신고를 한 아주머니가 엄청난 제보를 했다. 본인은 전쟁이 나고 한번도 고향을 더난 적이 없다고 한다. 부모님들은 피난을 떠났지만 본인은 할아버지 할머니와 남아 있었고 어려서 누가 건드리지도 안했다.
"엄청 추운 겨울날인데 동네에 군인들이 있었는데 갑짜기 모두 사라졌어요. 여기저기서 총알이 날아다니고 포탄이 떨어져 난리가 나서 방공호에 꼼짝안고 있었어요. 그러다 밤이 되면 나가서 집에 갔다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새해가 왔다는데 눈이 하얗게 쌓였는데 밤새 폭탄이 터지고 난리가 났어요. 그 밤이 지나고 살며시 밖에 나가보니 눈위에 시체들이 즐비하게 널려있어요. 할아버지가 나가지 말라고 해서 방공호에 가만히 있었어요.
"나타난 중공군과 북한군"
바로 중공군이 방공호로 나타나 모두 나오라해서 나갔는데 앞에는 북한군인지 한국말을 잘하는 군인이 있어, 그 사람이 하라는 대로 앉으라고 하면 앉고 일어서라 하면 서고 시키는재로 했어요. 그러면 죽이지않는다고 했지요.
얼마가 지났는데 눈이 갑작스레 다 녹아버리고 집 주변에 시체가 정말 많이 있었는데 낮에는 움직이지 못해요. 중공군이 못움직이게 했어요. 그런 어느날부터 동네에 치안대인지 내무서원인지 하는 사람들이 밤에 사라믈 데리고 어딜 가요. 나는 무섭지않아서 할아버지 지게를 잡고 따라 갔어요
"동네 어르신들이 지게와 들것으로 시체를 모아서 묻는다"
지금은 그 사람들이 모두 북한군을 따라서 다 북으로 가버렸지만 당시에는 그들 끄나풀역활하는 몇몇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설쳐대고 다니며 시체를 다 모아서 엄청나게 큰 구덩이에 집어넣도록 하였다.
나는할아버지 지게다리를 잡고 따라 다녔다. 다른 어른들이 귀신온다고 해도 무섭지않았다. 동네에 몇군데 있는데 시집오고나서 그후로 많이 변했다. 그래도 한곳은 바로 길옆에 큰 잣나무인지 있는데 그 일대에 묻었는데 변하가 없다.
"그렇습니까, 그럼 제 차로 한번 같이 가서 알려주시겠습니까?"
"그렇게 하지요. 어차피 저녁 밥은 안하니 괜찮아요"
우린 사장님께 양해를 구하고 백자동으로 달렸다. 탐사할 필요도 없이 바로 길 옆이고 탐지기를 대보니 요란하게 발신음이 들린다. 그리고 몇군데 더 돌아다녔고 동네 남자어른도 만났다.
"할아버지 혹시 저기 잣나무 크게 자란 곳에 전쟁대에 죽은 사람 묻었다는데 모르세요?"
"그거 동네사람들 다 알아요. 이제와서 파봐야 뭐하겠어요?"
"어르신, 지난번 경로당에서 간담화할 때에 계셨잖아요. 왜 발굴을 하는지 설명했었는데"
"갔었지요. 그런데 그게 참 그래요. 하고 싶어서 한 것도 아닌데 지금와서 조사하는 것이 조금 부담이 되어요"
할아버지는 혹시나 이것이 그때 부역에 참가한 사람들을 붙잡아 벌주는 것처럼 오해하고 계시었다. 아니라 하더라도 이 질곡의 역사는 민초들에게 그런 오해를 갖도록 해 왔던 것이 또한 부인하지 못할 현실이었다.
"철모가 나오고, 전투화가 나오고... 36명의 유해가 발굴되다."
11월이 되어 그동안 몇번의 추가적인 조사과정을 거쳐 기동발굴을 시작했다. 준화팀장이 팀원을 데리고 발굴을 통제했다. 바로 깊옆이라 오가는 차들이 멈춰서서 궁금해서 다가오고 결국은 눈물을 펑펑 쏟고 가는 사람도 있다. 기가 막혔다. 과거 가평에서 사창리로 들어가는 유일한 75번 길이다.
묘하게 길을 넓히는 과정에 이곳은 전혀 피해가 없이 살아 남아서 60년 세월을 기다렸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유해들이 훼손되었을까 하는 마음에 무심코 지나친 지난 세월이 서러워진다. 13만 4천명의 찾지못한 호국용사님에게 드릴 말씀이 없다.
"5개월된 딸을 놓고 전쟁터로 간 양손호 일병"
2009년에 우린 대구역에서 유해감식을 위한 대구지역 지역주민 간담회를 했고, 동대구역에서 유가족 DNA 샘풀채취행사를 했다. 그때에 한 아주머니께서 다가와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가 참전용사라며 혹시 모르니 감식을 요청하였다. 그런데 하늘이 보우하사 바로 가평 백자동에서 발굴된 유해 36구중 한분과 일치하는 결과가 니왔다.
발굴당시에는 철모를 쓰고 군화를 신고있어 국군인줄은 알았는데 제2사단이지, 5사단인지, 제6사단인지 알수가 없었는데 역으로 이렇게 해서 용사님의 이름이 밝혀지고 제2사단 제32연대라는 것도 확인이 되었다. 그 아주머니는 통곡을 했다. 멀지도 않은 대한민국 땅에 있었는데 이렇게 60년 세월을 지날 수 있는냐며... .
홍천 내면 방동리 지역주민 권오륜 노인회장 등 다수 : 1.4후퇴시 9사단 공병 1개 소대가 죽었다.(밭을 개간하여 훼손?)
전쟁이 나기전에도 '50년 3월에 북한군이 매봉까지 들어와 전투를 했다. 동란당시(1.4후퇴)에 이곳으로 9사단 공병소대가 왔다. 홍천 샘물 들어가는 길 개울가에 집이 한채 있었는데 그곳에 있다가 북한군에 모두 죽었다. 1개 소대가 다 죽었다.
북한군이 들어왔는데 하얗게 눈이 내린 저 개울가 옆에는 9사단 장교도 죽어서 묻었다. 지금 파면 나올 것이다.(발굴 완료) 더 끔찍한 것은 지금 방동 초등학교 안에 우물이 있었는데 그 곳에 일대에서 죽은 국군 시체를 단가에 들어가 집어넣었다. 북한군이 통제하여 지역주민이 부역으로 가서 그렇게 했다고 들었다. 지금은 그 우물을 메워버리고 옆에 다시 파서 수돗물처럼 해 놓았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안고 있다.
남양주 별내 용암리 지역주민 이내훈외 다수 제보 : "간나새끼 죽여버려라"
우리는 동네 뒤산에 중공군이 버리고간 미숫가루 등을 주어다 먹었다. 산속 호마다 중공군이 한구씩 죽어있었다. 별내 초등학교 6학년때 담임 선생이 골수 공산당이었다. 6.25전쟁 이전부토 우리가 소풍가면 무슨 전쟁놀이를 시킨다던지 노래도 음악책에 없는 이상한 노래를 가르쳤다.
그러다 전쟁이 나니까 피난도 안가고 남아서 본인이 교장이라고 으시대고 다녔다. 그러다 국군이 다시 올라온다니가 어디에 숨었는지 보이질 않았다. 이미 국군과 경찰에 신고가 되어 찾으려고 하는데 그 어머니가 있어 지금 나오면 교장시켜 준다고 하니 나왔다. 그리고 그는 수락산 계곡에서 총살 되었다.
1.4후퇴시는 군인들이 내려오는데 6.25전쟁때도 그랬지만 알지도 못했다. 갑작스레 동네 일대에 군인이 몰려들어 오는데 유엔군도 있었다. 한강을 걸어서 넘는데 따라가서 구경도 했다. 그런데 동네 뒷산인 수리봉에 광복당도 있고, 호부대, 추부대, 제17연대, 경찰 등이 숨어있는데 중공군이 가만히 있었다.
"호주머니에 쌀을 넣고 가면서 끌려가는 위치를 알리던 용사님"
이 유격대들은 숨어있다 중공군이나 북한군 내무서원 등이 찾아가면 기습사격으로 사살해 버렸다. 동네에서 몰래 쌀도 갔다주었다. 어느날은 북한군이 국군 포로들을 끌고 북을로 가는데 발에 동상이 걸려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더라. 그래서 동네에서 잠깐 머무는 사이에 북한군 동조자들이 집집을 뒤져 벼를 찾아내서는 방앗간에서 도정을 했다.
그걸 집에 잠깐 놓아두는데 한주먹을 쥐어서 호주머니에 넣고 다시 끌려가면서 호주머니 구멍으로 한알씩 떨어트렸다. 하얀 눈위에 보이질 않는데 길을 건너는 곳에서 뒤따르던 북한군이 낌새를 알아채렸다.
그리고 그 용사는 죽어갔다. "간나새끼 죽여버려라" 전쟁이 참 무섭다. 아무나 죽이고 싶으면 죽여도 벌도 안받는 시대엿다.
고양 덕양 일영-선유동의 아픔: "영 제29여단의 엄청난 인명피해, 300여명 손실, 전차 10대 파괴됨"
위의 내용은 전사책에 기록된 사살이다. 그러면 과연 그러했는지 나는 일영역과 선유동에 몇번에 걸쳐 현장 탐사와 탐문을 통해 관련사실을 찾아갔다.
이곳 일영역 북쪽에는 탄약대대가 있고 지금도 녹슬은 철길은 그대로 있고 일영터널도 그대로 있다. 바로 터널 위릐 고지에 올라서면 개인호들이 다수 발견된다. 그러나 그 당시에 영국군 제29여단은 산에 올라 지역방어를 한 것이 아니고 기동방어로 전차위주 작전을 전개하여 미 제1군단 철수를 엄호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탱크가 탱크를 이고 있더라"
실제 선유동에서 만난 지역주민은 그 당시의 중공군과 영국군의 전투를 목격했으며 주변 논밭에 숙영을 하던 영국군이 새벽에 중공군의 기습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는 과정에 전차병들이 전차를 운전하여 탈출하는 과정에 선유천과 석현천 강둑에 걸려 뒤집어 지기도 하고 강과 논 사이에 전차가 엎어져 있는데 다시 그 위로 올라타 마치 탱크가 탱크를 이고 가는 모양새로 주변에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
아침에 중공군이 영국군 수백명을 줄세워 끌고 가는 모습도 직접 보았고, 나중에 다시 수복 되면서 영국군 유해발굴에도 참여했다고 한다. 물론 영국군이 와서 한 것이 아니고 우리 경찰이 통제해서 지역 주민들이 나서서 선유동과 지금의 탄약대대 야산을 뒤져 유해를 찾아내는 일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에 영국군 화장터도 있었고 추모비도 이곳에 있었는데 나중에 설마리로 추모비가 이전되었다 한다.
"고랑포에서 생긴 중공군 소령과 방마담의 러브스토리"
이미 앞에서 언급한 내용이지만 싯점은 지금이다. 바로 가수 진미령의 실제 아버지인 예비역 대령 김동석(동작동에 안장)님이 미 제8군의 정보원으로 활동하던 때였다.
중국에서 태어나 중국말과 일본말, 러시아어에 능통한 육사 8기인 김대령은 당시 대위의 신분이었다. 바로 대전지구 전투시 귀순한 북한군 제105전차 사단 대대장 출신인 김웅을 교화하는데 일등공신이다. 그 후로 주로 정보요원으로 할동하며 서해안 지구 구군 제1사단 5816부대장을 맡기도 했다.
"맥아더 장군이 지명한 "This Man"의 실제 주인공이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청천강변에서 철수하게된 맥아더 사령부는 아마도 중공군이 38도선을 넘어 남쪽으로 공격해 올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였다. 그래서 38도선에 정보요원을 운용하여 그들의 동향을 파악하는데 노력했고 여기에 절대적으로 기여한 인원이 김동석 대위였다.
그는 전쟁초기부터 제1사단 소대장이었기에 이곳 지리를 잘 알고 있었고 특히 고랑포에 유명한 술집도 잘 았았다.고랑포가 당시에는 면사무소도 있고 방앗간도 있고 38선 상에서는 가장 번화한 곳이였다 한다.
김동석 대장은 휘하의 첩보원들을 이용하여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술집의 마담을 상대로 중요한 정보를 얻게 된다. 12월 중순경에 이미 중공군 첩보부대들이 이곳에 침투해 들어왔고 이 술집의 마담에 중공군 팀장인 소령이 빠져버렸던 것이다. 정보를 수집했으며 돌아가야 하는데 가질 않고 수시로 들러 회포를 풀고 갔다. 이걸 이용한 것이다.
결국 얻어낸 정보는 중공군이 서울을 향해 곧 진격한다는 사실이고 이게 맥아더사령부에 보고되고 그럴 수 있다는 판단아래 38선 상의 모든 국군과 유엔군을 한강선 이남으로 철수하게 하고 그 공간지대에 강력한 화력을 계획하여 중공군을 괴멸시킨다는 계획이 수립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나중에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의 환담자리에 김동석님이 배석한 적이 있고 이승만 대통령의 갑작스런 한강이남으로의 철수계획에 대한 질문을 받고 맥아더가 답변하는 과정에 "이 사람"이 정보를 제공했다고 한다.
정말 이 고랑포의 중공군 정부팀장 소령급은 거의 2주 이상을 매일 이 주막에 들러 방마담과 로멘스를 갔고 헤어지다 결국 아군 김동석 팀의 올가마에 붙잡혀 미군에게 인계되어 중공군의 신정공세 일부를 말하게 된 것이다.
"청천강변 군우리의 패배를 설욕하다"
원주지역 전투는 춘천북방이 무너지면서 국군의 철수로를 엄호하기 위하여 미 제8군은 충주지역에서 재편성 중이던 미 제2사단을 충주-원주선을 따라 진출시켰다. 당시에 국군 제2군단은 청천강에서 철수하여 춘천-가평 선에서 방어이무를 하던 국군 제2. 5. 8사단이 중공군의 신정공세기간에 후방이 차단되어 위기에 처하게 되자 바로 미 제2사단을 투입하게 되었다.
당시에 미 제10군단장은 38도선을 철수한 국군 제5사단을 남한강 동쪽에, 중앙에 국군 제8사단, 원주에는 미 제2사단(제9연대 결)을 배치하여 원주 방어에 중점을 두었다. 이대 미 제7사단의 주력과 미 제2사단의 일부는 제천으로 이동 중에 있었다. 그리고 분산 철수한 국군 제2사단은 충주 남쪽에 집결하고 있었다.
북한군 제5군단은 7일 05:00시에 400명 가량을 피난민으로 가장시켜 29번 도로를 따라 사단 후방지역으로 침투시켰다. 이 공격과 동시에 사단 좌측방의 국군 제8사단 10연대지역에도 침투하여 돌파됨으로서 미 제2사단은 방어진지가 돌출되어 버렸다. 따라서 미 제2사단은 원-목계동 도로로 7km나 철수하였다가 군단의 강력한 지시로 다시 외남송 일대의 247고지군으로 진출하게 되는 과정에 '51. 1. 10일에도 수차례 혈전이 진행되어 이날 하루 전투에서 미군은 적 2,000여 명을 사살하였으며 연대도 다수의 피해를 입어 11일 오후에 프랑스 대대와 네덜란드 대대의 일부를 증원 받았다. 그리고 다시 공격하여 적 1,100명을 사살하고 247고지를 수중에 넣었다
북한군 제5군단은 주력을 이곳에 집중 투입하였다가 엄청난 피해를 입고 17일 제27사단을 전방에 내세워 접적을 유지하게 하면서 주력은 힝성부근으로 철수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미 제2사단은 '50년 11월말 크리스마스 공세기간 군우리에서 중공군에 포위되어 당했던 오명을 씻게 되고 적의 돌파를 저지하게 되었다.
"덕가산에 나타난 용사 아니면 귀신!?"
우리는 이곳 일대에서 발굴작전을 거의 한달간 해봤다. 북한군이 약 3,000명 죽었다면 미군이나 국군 일부라도 있지않을까 하는 바램이었다. 그 주변을 다 올라가 보았고 실제 지역주민과 덕가산도 올랐다. 작은 양아치고개, 큰 양차고개, 백운산, 십자봉등 다 올라가 혹시라고 미군을 따라온 카츄사나 경찰을 찾으려 했던 것이다. 지금 토지문학관이 있는 미천 지역이 미 제2사단의 연대들이 점령한 곳이라 지역주민들이 많이 미군을 목격했다는 제보도 했다.
우리와 함께 덕가산에 오른 지역주민은 본인이 덕가산에도 총을 지제 바작에 가득 주워서 파출소에 갔다 주기도 했다고 했다. 하지만 올라가 보니 개인호는 그렇게 많이 남아 있지않았다. 그런데 묘하게 한 개인호를 사진에 찍었는데 사진을 인화하여 보니 부상당한 학도병 모습으로 교복에 총을 짚고 있고, 한 분은 부상으로 다리가 없는데 북한군 별표 모장이 달린 모자를 쓰고 있는 모습이 나타났다. 정말 괴이한 사진이었다. 이 사진은 내가 증평에서 연대장 시절에 찾아온 참전용사 한 분이 가져가시고 돌려받지는 못했다.
"3,000명이 죽은 전투 현장에 북한군 시신포함, 시신이 한구도 없다"
북한군이 얼마나 죽었는지 미군이 북한군을 불도저로 길 좌우측으로 밀어버렸다고 하는데 우린 아군은 고사하고 북한군도 못찾았다. 과연 적군의 시체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 후에 경찰들이 통제해서 보이는 시체는 다 파묻고 불로 태웠다고 하는데 그 실체가 그래도 남아 있어야 하는데 없다. 남원주에서 충주방향으로 들어서자마자 바로 외남송이고 247고지 주변인데 유해가 없다.
모두 미군의 네이팜탄에 타버린 것인지 아니면 어느 한 골짜기에 집단으로 매몰되었는지, 그렇게 많은 북한군이 다 자연재해로 유실되었다고 보기에는 너무 이해하기가 곤란하다.
참전용사 황창규 증언(제5-27-2대대. '16) : 나는 전쟁 기간중에 대대본부 위생병으로 전투에 참여했다. 1. 4후퇴 당시에 우리 부대는 춘천 북방에 있었다. 우리는 전투도 제대로 못해보고 중공군에 포위되어 북한강을 건너 그저 후퇴만 했다. 우리는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처음으로 보았다.
"춘천에서 우리 중대에 비행기 오폭으로 다 죽고 1개 소대만 살았다."
그때는 춘천댐도 없었고 강이 있었는데 우리는 강을 건너가지는안했다. 바로 춘천북방 고탄리 무명고지에 중대병력이 올라갔는데 미군 폭격기가 잘못 하며 오폭하는 바람에 다 죽고 1개 소대 정도만 살아 남았다. 하지만 이미 중공군에 포위되어 있는 바람에 전사자를 처리 못하고 그냥 방치하고 왔다.
"'12년도에 58구 발굴"
우리는 그런데 이미 '12년도 붓다리 고개 정상 좌측 무명고지에서 58구의 유해를 찾아냈다. 당시 고탄리 마을 주민이 살아계셔서 현장에 함께 가서 증언을 해 주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유해가 아군인지 북한군인지 또는 주공군인지 알지 못하고 무명용사로 처리했었다.
실제 발굴 위치도 고지 정상부근에 큰 분화구같은 것이 있었는데 사실 고탄리와 이 붓다리고개와는 다소 차잉가 있지만 참전용사 증언과 지역 주민의 제보가 상당부분 일치하면서 우리 제5사단이 비행기 오폭으로 전사했다고 잠정 결론을 내렸다. 발굴된 유해의 형태가 대부분 본쇄된 모습으로 포탄에 의해 형성된 탄흔이 다소 있었다.
참전용사 이병만(제7-3-1대대. '16) : 우리는 덕천에서 중공군 3개 사단에 포위 되어 후퇴하였다. 그러다 홍천 북방 소양강근처에 갔다 다시 영월로 철수하여 갔다. 영월 어딘지는 모르겠는데 야간에 육박전이 벌어졌는데 누군지를 구분하지 못한다. 그래서 손으로 어깨를 만져보고 금속 장식(계급장)이 있으면 아군으로 대검을 안찌르고, 없으면 북한군으로 찔러 죽여야 했다.
"하루살이 소위"
전투에서는 소대장들이 앞장을 서고 진격해야 움직이게 되는 경우가 많아 소대장이 밥이다. 현지 임관자들은 그래도 잘 사는데 바로 교육을 받도 오는 소위들은 하루살이 목숨이다.
우리가 영월에서 망경대산이라는 곳을 공격하는데 피해가 많이 났지만 그보다도 평창에서 진부로 오는 도중에 더 죽었다.
"포탄이 터져 아군 50여 명이 죽었다."
지역주민 김수경의 제보(74세, '16) : 내가 6살 되던 해에 이목리라는 곳에 살았는데 아군 7사단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아군진지에 포탄이 떨어져 약 50여명이 죽었다. 옛날에는 상동읍이라 했는데 지금은 중동면 이목리다.
우리는 바로 녹전리 운교산부터 망경대산일대, 이목리 뒷산인 예미산(989m) 일대, 석항리 등도 탐사 및 탐문을 했지만 이목리나 석항리에서는 유해발굴을 못했다. 단지 녹전리 고장골에서 1구, 김삿갓면 옥동리에서 1구(신원이 확인됨. 고, 김영철 하사)가 발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