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국의 명장, 남원출신 무민공 황진 장군 부조묘와 기념관
남원시 대산면 대곡마을에는 임진왜란 진주성 전투에서 장렬하게 순절한 무민공 황진 장군의 부조묘와 정려비 기념관이 있습니다.
황진(1550~1593) 장군은 장수(長水) 황씨로 조선왕조를 통틀어 가장 명망 높았던 재상 황희(1363~1452)의 5대 손인데요, 남원 주생면 출신으로 1576년 무과에 급제해 1593년 임진왜란 당시 충청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가 진주성 전투에서 실질적인 총지휘관으로 활약하다 순절한 무장입니다.
황진 장군은 훗날 좌찬성에 추증되고 1611년(광해 3년) 나라에서 장군의 충절과 전공을 기려 무민공(武愍公)이란 시호와 함께 정려를 내렸는데요, 장군의 출생지이자 묘가 있는 주생면 반송리 큰 길가에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큰길이 외딴 샛길이 되어 정려각은 비바람에 퇴색되고 무너져 심하게 훼손되었다는데요, 이에 장수 황씨 호안공파 무민공 종중 후손들이 힘을 모아 2018년 무민공의 부조묘가 있는 곳으로 본 모습대로 복원해 이건 했다고 합니다.
정려는 무민공 황진 장군과 장군의 손자 당촌 황위의 정려가 나란히 있는데요, 황위 (黃暐 1605~1654)는 1633년 사마시에 합격한 뒤 생원이 되었으며 1636년 병자호란 때 남원에서 창의해 의병 수천 명을 이끌고 남한산성을 향하다 적군을 만나 승전했다고 합니다. 1638년에는 정시 문과에 장원급제해 정언이 되었으나 병자호란 때 척화에 앞장섰던 김상헌이 주화론자에게 배척당하자 상소로 구제에 나섰다가 파직되었습니다.
그러나 1649년 효종이 즉위하면서 등용돼 함경도 도사와 평양서윤을 지냈으며 1893년 (고종 30년) 나라에서 정려를 내렸습니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정려를 받은 것도 드물지만, 이렇게 한 정려각에 함께 모신 경우도 드문 것 같은데요, 정려 이건에는 무민공의 12대 손 황운주 등의 성금과 전국 각지 장수 황씨 문중의 후원이 있었다고 합니다.
무민공 황진과 당촌 황위 정려각 뒤로는 황진 장군 기념관과 부조묘가 있습니다.
대게의 사당은 문이 잠겨 있어 둘러보기 어렵지만, 황진 장군 부조묘는 장군의 기념관과 한 담장 안에 있어 참배객들에게 편의를 제공했지만, 정려는 문이 잠겨 있어 내부를 볼 수 없음이 아쉬웠습니다.
무민공 황진 기념관 옆으로 황진 장군 부조묘가 보입니다.
먼저 기념관에서 황진 장군에 대해 살펴보고 부조묘를 보도록 합니다.
황진 장군 기념관은 남원시에서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장수 황씨 무민공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어 상시 근무를 하지 못하는 관계로 기념관을 관람한 사람들은 드물더군요. 하지만, 오늘은 날도 좋은 날이어서 그런지 마침 문이 열려 있어 장군의 기념관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날 당시 황진 장군은 동복 현감이었는데요, 전라 병마절도사였던 선거이 (宣居怡)를 따라 근왕병을 이끌고 경기도 수원 독성과 사평 등지에서 산발적인 전투를 수행했으며 진안에 침입한 왜장을 사살하고 훈련원 판관이 돼 이치 전투에서 승리한 공으로 익산 군수 겸 충청도 조방장에 올라 1593년 충청도 병마절도사에 올랐습니다.
전세가 불리해진 왜적이 1593년 한양에서 물러나 경상도로 철수했지만, 황진 장군은 왜군을 추격하며 상주에서 왜적을 크게 무찌르기도 했는데요, 이후 호남으로 진출하려는 왜적에 맞서 진주성에 들어가 순성장의 직임을 맡아 위급한 곳을 돌며 수성전을 전개하다 진주성 함락 하루 전 왜적이 쏜 총탄에 맞아 순절했습니다. 황진 장군은 비록 진주성을 끝까지 지키지 못했지만, 남은 장군과 병사들이 죽음으로 맞서 왜적도 전력이 크게 상실돼 호남으로 진격을 하지 못했는데요, 결국 명나라와 화의 교섭이 진행되면서 정유재란까지 소강상태에 이르게 되었답니다.
이러한 내용은 기념관 내에 황진 장군의 후손 가에 400년간 전래되어 오던 고문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데요, 고문서 모두가 보물 제942호로 지정되었으며 보물인 고문서를 보다 더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수장고이자 기념관을 지난 2015년 개관했습니다.
♨출처 / 글.사진=남원시 블로그 기자단, 김정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