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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발지 대전투>에서 나오는 독일 전차병들이 부르는 독일 전차병의 군가
* 영화 <발지 대전투> 한장면, 로버트 쇼가 주연한 헤슬러 중령, 헤슬러는 아래에서 설명하는 파이퍼 중령을
모델로 했다
* 지도로 살펴보는 발지전투
히틀러의 목표는 오른편의 제6장갑군과 왼편의 제5장갑군이 협공하여 왼쪽 상단의 안트워프까지
진출하여 연합군을 남북으로 두동강내는 것이었는데...초반에는 기세등등했으나 겨우 아래 삼각형
으로 된 돌출부분(발지)까지만 진출하는데 그쳤다. 미군 포로 학살현장인 말메디와 유명한 바스토
뉴 전투가 벌어진 바스토뉴가 보인다.
[ 발지 전투 간략한 개황 ]
1944년 12월 16일, 25만명 이상의 독일군 대부대가 140km에 걸친 아르덴느 전선 전체에 얇게 포진해 있던 8만 3000명의 미군부대를 공격했다.
북부에서는 요제프 디트리히 대장이 이끄는 제6장갑군이 미군 제99사단을 공격하여 서부 방어선을 지나서 독일 본토내로 진격하려던 미군 제2사단을 고립시키려 하고 있었다. 또 중앙에서는 핫소 폰 만토이펠 중장이 이끄는 제5장갑군이 제106사단, 제14기병단, 제28사단을 공격했다. 남부에서는 독일군 제7군이 미군 제4사단, 제9기갑사단과 격돌하여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히틀러의 계획은 제5, 제6장갑군이 앤트워프까지 돌진하고 북쪽의 제7, 남쪽의 제15군이 엄호하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 같은 계획이 성공하면 연합군을 남북으로 양분하면서 이후 연합군과의 강화 협상의 카드로 써먹으려는 의도였다. 이후 강화가 성립되면 모든 전력을 동부전선으로 집중하여 소련군과 자웅을 결하려는 것이 궁극적인 의도였다.
* 진격하는 독일군
그러나 주력부대인 제6장갑군이 미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치면서 지지부진해지면서 계획이 뒤틀려버리게 되었다. 오히려 중앙의 만토이펠이 이끄는 제5장갑군이 이번 발지 전투에서 그나마 가장 멀리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독일군은 공격 개시 10일 동안에는 그 힘이 절정에 달했으나 예상치 못한 미군의 완강한 저항, 겨울날씨의 악천후로 인한 험악한 도로사정, 제공권의 상실, 연료의 부족 등으로 동력이 확 빠지게 된다. 이후 전열을 정비한 연합군의 대반격이 시작되자 히틀러는 1월 8일 돌출부로부터 후퇴를 명령한다.
* 파괴된 독일 전차와 독일군 포로
1945년 1월 28일 발지 전투의 종식이 정식으로 선포되었다. 전투가 개시된 지 43일째 되는 날이었다.
발지전투는 명백히 독일군 그 자체의 종말을 예고하는 신호탄이었다. 한 때 전 대륙을 석권했던 제3제국의 군대와 금쪽처럼 아껴두었던 귀중한 물자들이 이 한판의 싸움에서 완전히 소진되어 버린 것이다.
전쟁은 이후로도 4개월이나 더 계속되었지만, 발지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 독일은 이때부터 히틀러 유겐트의 나이어린 소년들과 60대 노인들까지 긁어모아 구식 엽총 한자루씩을 쥐어주고 전선으로 내모는 신세로 빠져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보다 자세한 전투상황은 아래에서 추가합니다.
< 발지전투에서의 주요 인물들 >
* 독일 제6 장갑군 사령관 요제프 디트리히 SS 대장
거리의 불량배 출신. 전차병으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것이 군 경력의 전부였다. 1930년대 초반에 나치 친위대(SS)에 입대했고, 히틀러가 정적(政敵)인 돌격대장 에른스트 룀을 숙청할 때는 그 행동대장으로 활약했다.
정규의 학교교육이나 전문적인 군사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지만 그는 용맹 과감할 뿐 아니라 타고난 군인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히틀러가 좋아하는 것-나치당과 총통에 대한 열렬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눈부신 승진을 거듭하여 마침내 총통의 경호연대인 제1SS연대의 연대장이 되었고 이윽고 이 경호부대를 기갑사단으로 확대개편하면서 부대장이 되기에 이르렀다.
이 제1 SS 기갑사단은 러시아 전선에서 용맹을 떨치면서 줄곧 독일군 최강의 기갑사단이라는 명성과 함께 다른 부대에 비해 최신형 장비와 물자를 지급받는 정예부대 중의 정예부대였다. 이제 대장까지 승진한 그는 발지전투의 주공을 담담하는 제6장갑군 사령관으로 임명되면서 히틀러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뫼즈 강을 건너 안트워프까지 진출해서 연합군을 남북으로 두동강내는 중책을 맡았으나 미군의 격렬한 저항과 물자의 부족 등으로 뫼즈 강을 도하하지도 못하고 후퇴하였다. 종전 후 말메디 학살사건(아래에서 설명)으로 10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 제1SS기갑사단의 제1전차연대장 요하임 파이퍼 중령
그는 나치와 히틀러에 대한 충성심이라는 공통점만 뺀다면 모든 면에서 디트리히와는 대조적인 인물이었다. 중령은 그야말로 나치 친위대의 선민의식과 엘리트교육이 만들어낸 가장 전형적이고 모범적인 ‘작품’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베벨스부르크 SS 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29세의 나이로 독일군 전체에서 최연소 연대장이었던 파이퍼는 잘생긴 용모에다 재능과 지성을 겸비한 탁월한 지휘관이었다.
러시아 전선에서는 소련군의 방어선을 단독으로 돌파하여 적진후방을 100km나 돌진, 아군 1500명을 구출하여 귀환하는 전공을 세워 최고훈장인 기사철십자 훈장을 수여받기도 하였지만 그는 전장에서는 학살자에 가까웠다.
러시아 전선에서 그의 연대는 독일군 포로가 소련군에 의해 처형당한데 대한 보복으로 무려 4000명의 소련군 포로를 학살해 버렸고, 그의 부대는 발길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을 불태워 버리는 무자비한 만행으로 이름을 떨쳤다.
* 아르덴느 숲을 뚫고 진격하는 최신형 타이거 전차
그런 파이퍼에게 중책이 맡겨졌다. 공세를 앞두고 제1 SS전차연대는 45대의 최신형 타이거 전차를 수령함으로써 기존의 판터,4호전차와 더불어 140대 이상의 전차를 장비한 파이퍼 전투단으로 개편되었다. 파이퍼는 이 전투단을 이끌고 최선봉에 서서 앞길을 헤쳐가기로 되어 있었다.
가장 기대를 모았던 파이퍼도 미군의 극심한 저항, 좁아터진 산길, 연료의 부족 등으로 뫼즈강 직전에 진출이 좌절되었다. 종전 후 말메디 학살사건의 주범 중의 하나로 지목되어 11년 교도소 생활을 했다. 프랑스에서 조용히 살고 있었으나 암살범에 의해 살해된다.
* 종전후 재판정에서의 파이퍼 모습
* 독일 제5 장갑군 사령관 핫소 폰 만토이펠 중장
독일군 중 유일하게 공세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의 지휘를 받은 3개 기갑사단과 4개 보병사단은 아르덴느 중부지구에서 성공적으로 미군 전선을 돌파, 바스토뉴까지 진격함으로써 전 독일군 병력 중에서 최초의 작전의도에 가장 가까이 접근하는 성공을 이루었다.
한때 ‘사막의 여우’ 롬멜의 부하로써 북아프리카에서, 러시아에서 수많은 전공을 세운 노련한 야전지휘관이었다.
애초에 만토이펠 장군은 이 공세작전에서 조연급이었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아르덴느 전선을 3개 구역으로 나눈 다음 이 3개군에 각기 할당했다고는 하지만, 공세의 중역은 최북단을 맡은 디트리히의 제6 장갑군이었으며 다른 2개군은 이들의 남쪽 측면을 엄호하는 성격에 가까웠다.
하지만 남쪽과 북쪽의 공세가 일찌감치 거덜나 버림에 따라 이제 누구보다도 실전경험이 풍부한 전차전술의 달인, 만토이펠이 이끄는 제 5장갑군에 짐이 지워졌다.
* 패튼 제3군의 전차부대 크레이튼 에이브람스 중령
에이브람스 중령은 벌지 전투에서 바스토뉴에서 포위된 제101 낙하산 사단의 구원부대 지휘관의 한 사람으로 있었다. 패튼 제3군이 바스토뉴를 구하려고 북쪽으로 치고 올라갈 때 가장 선봉에서 전차대를 이끌고 독일군의 치열한 포위망을 뚫고 미군을 구출하였다.
그는 2차 대전 중 패튼이 이끄는 제3군 선봉으로서 많은 전투에 참가했다. 그는 활동적인 전차 지휘관으로서 유명했다. 그는 지휘관으로서의 능력과 신뢰성이 높았고, 적극적이며 성공적인 장갑 지휘관으로서 알려져 있었다.
조지 패튼 장군은 그에 대해 "나는 육군으로 최고의 전차 지휘관이라고 일컬어지고 있지만, 나에게는 한 명 동료가 있다. “바로 에이브람스. 그는 세계 챔피언이다."라고 말했다.
후에 한국전쟁과 월남전에도 참전했고 합창의장을 역임했다.
* 바스토뉴 방어전에 투입된 미 101공수사단 부사단장 맥컬리프 부사단장
절박한 바스토뉴에 긴급 투입된 미 101공수사단의 테일러 소장이 회의 참석차 워싱턴에 가는 바람에 맥컬리프 준장이 이 역사적인 바스토뉴 방어전 전투를 맡게 되었다.
12월 22일 오후.
바스토뉴를 포위하고 압박을 가하던 독일군 측에서 4명의 독일군이 백기를 앞세우고 미군 방어선쪽으로 걸어왔다. 전초 지휘소로 안내된 두명의 독일군 장교는 다음과 같은 항복 권고문을 전달했다.
“당신들은 완전히 포위되었소. 당신들에게 남은 선택은 오직 하나-명예로운 항복을 권고하는 바이오” 권고문을 다 읽은 맥컬리프는 종이 쪽지를 손가락으로 퉁기면서 이렇게 뱉어냈다. “Nuts!(미속어로 븅신들, 엿먹어라!)” 방안에 있던 사람들이 폭소를 터뜨렸다.
독일군 장교들은 이 미국식 속어가 이해가 안되자 무슨 말이냐고 안내했던 킨나드 중령에게 물어보자 “이건 쉽게 말해서 당신들이 바스토뉴에 발을 들여 놓기만 하면 우리가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 뭐 이런 뜻이요” 독일군 장교들은 돌아갔고 다시 또 독일군의 포격은 시작되었다.
이날 맥컬리프 준장이 내뱉은 "Nuts!(븅신들, 엿먹어라!)" 이 말은 발지전투 내내 미군들이 입에 달고 살았다.
* 아이젠하워 원수
* 원수 계급장 별 다섯개를 단 아이젠하워 장군
연합군 총사령관 아이젠하워 장군이 독일군의 일제공세를 알게 된 것은 12월 16일 오후였다. 장군은 전날 밤 워싱턴으로부터 자신의 계급이 원수로 승진되었음을 통보받아 썩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브래들리 중장과 더불어 패튼의 제3군을 라인강 건너 독일 본토의 자르지방으로 진격시키는 문제를 논의하고 있었다.
그때 정보장교 니콜스 소령이 다급하게 뛰어 들어와 그 사실을 보고하기에 이르렀다. 두 장군은 일단 사태의 전말을 이해했다.
"지금 당장 그쪽으로 투입할 수 있는 예비병력이 얼마나 있소?" 총사령관이 물었다. "2개 공수사단과 2개 기갑사단이 있습니다." 아이젠하워는 지체없이 명령을 내렸다. " 그 부대들은 즉시 아르덴느로 투입하시오."
그래서 미 제82,제101 공수사단과 제7,제10 양 기갑사단에 아르덴느로 이동하여 방어전에 합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 주요전투 및 특기사항 ]
< 말메디의 학살 >
* 학살된 미군 포로들 시체
파이퍼 전투단은 처음에는 모든 독일군 부대 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진격을 계속하고 있지만, 그들이 진출한 거리는 아직도 30km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출발할 때부터 넉넉지 못한 연료가 벌써 달랑거리고 있었다. 그들의 최신형 타이거 전차는 천하무적의 괴력을 가진 대신에 10km를 주행하는데 무려 70리터의 연료를 퍼먹는 대식가였던 것이다.
파이퍼는 다음 목표인 스타벨로트로 가기 전에 미군의 뵐링겐을 기습하여 배를 좀 채우기로 했다. 뵐링겐의 미군 연료저장고에 난입한 전차들은 약 5만갤론의 연료를 탈취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떠나면서 여기서 포로로 잡은 50여명의 미군을 모조리 사살해버렸다.
만행의 시작이었다. 말메디읍으로부터 남쪽으로 4km 정도 떨어진 본드 마을에 도착하자 쫓겨온 미군과 전선으로 떠나는 미군들이 뒤엉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파이퍼의 전차들이 본드를 덮쳤다. 마침 140명의 병사를 태운 트럭이 앞을 가로막았다.
전차가 포문을 열자 순식간에 맨 선두에서 달리던 트럭이 산산조각이 났고, 살아남은 병사들은 두손을 하늘높이 쳐들 수 밖에 없었다. 모두 120여명이었다. 독일군은 이들의 시계, 방한화, 돈지갑들을 강탈하고 방한 자켓을 모두 벗긴 다음 찬바람이 씽씽부는 벌판으로 몰고 갔다.
그리고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불안감을 느끼고 있을 때, 한 대의 장갑차가 덜커덕거리며 굴러와서 그들 앞에 멎었다. 전차대열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포이어(발사)" 명령과 동시에 장갑차에 설치된 기관총이 불을 뿜었고, 포로들은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그 자리에 픽픽 쓰러졌다.
일부 병사들이 운좋게 이 학살현장을 피해 도망쳤다. 순식간에 아르덴느 일대의 모든 미군 방어진지에 이 말메디 학살에 관한 소문이 쫙 퍼져나갔다. 미군들은 이제 최소한 독일 친위대 놈들과 싸울 때는 항복을 해도 소용이 없고, 자신들 역시 그들을 포로로 잡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요하임 파이퍼는 이 발지전투 이후 1945년에 종전될 때까지 긁힌 상처 하나없이 말짱하게 살아남았지만, 이 말메디의 학살로 인해 종전 후에 열린 뉘른베르크 재판정에 서게 된다. 그는 이 학살사건에 대한 책임으로 비교적 작은 형기인 11년의 형을 언도받고 복역하다 석방된다.
이후 프랑스의 한 마을에서 가명으로 살다가 1976년 암살범이 투척한 화염병에 의해 살해된다. 그때 나이 61세
< 위장 특공대 >
발지전투 초기에 깜쪽같은 독일군의 대규모 역습 외에 연합군을 혼란에 빠뜨린 독일군의 작전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위장특공대를 연합군 후방에 잠입시킨 것이다. 이 위장 특공대는 전원이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자들로 선발되어 미군복을 입고 카빈소총으로 무장했으며, 껌을 찍찍 씹어대는 모습까지 미군과 똑같아 보이도록 세심하게 훈련되었다.
2,500명이 되는 이 위장 특공대는 주로 무장 SS(친위대)의 특수 요원들이었지만 병력이 모자라서 육군과 공군에서도 영어를 할 수 있거나 미국에서 생활한 적이 있는 사병들을 빌려왔다. 이들은 미군으로부터 노획한 지프와 트럭을 주로 사용했고 모자라는 경우에는 자기네 차량에다 녹색을 칠하고 큼직한 백색의 별을 그려 사용했다. 이들은 패주하는 미군들 후미에 붙어 여러 가지 교란작전을 벌이면서 미군을 혼란에 빠뜨렸다.
거미줄처럼 숲속을 가로지르는 오솔길이 태반인 아르덴느의 도로표지판을 바꾸어 놓는다든가 해서 미군들을 엉뚱한 데로 이동하게 했고 또 멀쩡한 도로 위에 지뢰밭 표시를 해둠으로써 미군 1개 포병대의 발을 하루 종일 발을 하루 종일 묶어 놓기도 했다.
또 어떤 경우에는 미군 지휘관에게 접근하여 전방의 적정에 대하여 거짓 정보를 흘려줌으로써 이들이 점령지를 포기하고 후퇴하도록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팀은 미군 내부의 사소한 관습을 잘 모르는 바람에 정체가 드러나 사살되기도 했다.그들은 검문을 받게되자 ‘기병사단의 E중대’라고 대답했는데 기병사단은 중대를 말할 때 통상적인 ‘Company'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유독 ’Trooper'라는 표현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또한 체포된 어느 팀은 심문을 받게 되자 자신들은 파리까지 침투하여 시내에서 집결, 베르사이유로 옮겨와 있던 연합군 총사령부를 기습하여 아이젠하워 총사령관을 암살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는 허무맹랑한 진술을 태연하게 늘어놓았다. 이래서 파리에는 비상 경계망이 펼쳐졌고 아이젠하워 장군은 세겹 네겹의 엄중한 경호에 둘러싸여 졸지에 사령부 안에 유폐되기에 이르렀다.
아르덴느 전선의 미군들은 이제 서로를 믿지 못하게 되었다. 신경이 곤두선 헌병들이 검문을 강화함에 따라 부대의 이동은 더욱 시간이 걸리게 되었고, 헌병들은 계급고하를 불문하고 누구라도 불러 세운 다음 미국인이면 누구나 알고 있지만 외국인은 알기 힘든 질문을 퍼부어대는 방법으로 독일군 스파이를 찾아내려고 했다.
예를 들어 “미키 마우스의 애인은 누구인가?” “일리노이주의 주도는 어디인가?” 따위의 질문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초기에 연합군을 혼란에 빠뜨린 독일 위장특공대들의 활약도 점차 진정되어 갔으나 그러나 발지전투 내내 연합군의 신경을 곤두세우게 한 것은 틀림없었다.
이들 특공대들은 체포되었을 경우 미군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정규군이 아니라 스파이로 분류되었고, 전시의 스파이 행위는 제네바 협약에 의하더라도 총살형을 면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신분이 밝혀지는 대로 즉석에서 총살 되었다.
* 미군복을 입고 잡힌 위장특공대들에 대한 즉결처분, 전시에는 이같은 경우 스파이로
처리되기 때문이다
< 바스토뉴 포위전 >
* 바스토뉴 전장 지도
파이퍼 중령이 이끄는 전차대가 벨기에 항구도시 안트워프를 향해 아르덴느 숲 북쪽으로 돌파구를 열고 있는 동안 아르덴느 숲 남쪽에서는 역전의 노장 만토이펠 장군이 이끄는 독일군들이 활로를 개척하고 있었다. 한때 ‘사막의 여우’ 롬멜의 부하로써 아프리카에서, 그리고 러시아에서 수많은 전공을 세운 이 노련한 야전지휘관은 능수능란하게 미군을 유린하면서 진격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르덴느 숲에 포진하고 있던 미군을 격파하면서 진격하던 만토이펠의 독일군이 미군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한 곳은 숲 가운데 위치한 그 유명한 조그만 바스토뉴 읍이었다. 이 바스토뉴가 발지전투의 운명을 짊어진 중요한 전투장소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발지전투가 발발했을 당시 미군은 일시 혼란에 빠지긴 했었으나 아이젠하워 장군은 차라리 잘 됐다 싶은 심정이었다.
맨 처음에는 ‘다 죽어가던 독일놈들’이 선제공격을 걸어 왔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으나 이제 링으로 기어 올라와 한판 붙자고 나타났으니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어디 있겠느냐 하는 심정이 된 것이다.
아이젠하워는 즉각 미군 101 공수사단을 바스토뉴로 급파시켜 그곳을 지키던 현지 미군 보병사단을 지원케하고 아르덴느 남쪽에서 제3군을 지휘하던 패튼에게는 바스토뉴를 구하도록 전차대를 선발하여 즉시 출발할 것을 명령했다.
* 급식을 받고있는 바스토뉴 미군병사들
바스토뉴는 상주 인구가 3,500명 정도로써 이 지방에서는 꽤 큰 시골마을이기도 하거니와 이 마을 광장에서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7가닥의 포장도로는 근처의 프랑스와 네델란드, 룩셈부르크,그리고 독일의 주요 도시들과 곧장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했다.
바스토뉴를 지키고 있던 미군들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들이 맞서 싸워야 할 상대는 만토이펠 중장의 독일 제5장갑군 예하 3개 기갑사단 가운데서도 가장 막강한 전력을 가진 전차교도 사단이었다.
이제 바스토뉴는 독일군에 완전 포위되었다. 발지전투가 시작된 이후 계속되는 악천후로 연합군은 공군의 힘을 빌릴 수도 없었고 오로지 패턴 전차부대가 구조하러 올 때까지 버티고 있을 수 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바스토뉴를 둘러싼 인근 마을에서 치열한 격전이 시작되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폭설과 함께 모든 도로가 진창으로 변해버리는 바람에 전차가 기동하기에 고약한 상태가 되는 바람에 독일 전차부대가 바스토뉴로 진입하고 있지 못하고 있었다.
12월 23일.연일 계속되던 짙은 구름과 안개가 거짓말처럼 활짝 개었다.200대가 넘는 아군 수송기가 날아와 무기를 포함해서 보급물자들은 바스토뉴에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 선물이 하루일찍 도착한 셈이군. 오래살다 보니 공군 친구들이 일을 제대로 하는 걸 다 보게 되는구먼” 미군 병사들이 너스레를 떨었다. 일시적인 한파와 청명한 날씨는 101사단에게 공중보급이라는 선물을 안겨주었지만, 그 대신 독일군에게도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진창길이 단단하게 얼어붙자 전차대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크리스마스까지 바스토뉴로 진격하여 아군을 구출하고자 정신없이 달려오고 있는 에이브람스 중령이 이끄는 패튼 전차부대에게 패튼의 질타가 날아왔다.“뭘 꾸물거리고 있는가? 도상의 모든 도시들을 그냥 내버려 두고 바스토뉴로 직행하라고 하지 않았는가?”
에이브람스 중령이 결코 꾸물거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바스토뉴를 16km 정도 앞둔 ‘바르나흐’에서 악귀처럼 달겨드는 독일군을 뿌리치는데 꼬박 하루가 걸려 버렸다. 이제 바스토뉴를 둘러싼 미군의 전초 진지로부터 8km 떨어진 외곽까지 도착하였다. 당장에라도 바스토뉴로 진입해야 했지만 또 다른 복병이 기다리고 있었다.
* 한시가 급한 미군 전차들, 빨리 바스토뉴로...
독일 전차를 저지하기 위해 바스토뉴의 101사단이 매설해 놓은 지뢰와 숱한 도로 장애물이 아군 전차대에게도 적잖은 방해물로 등장했던 것이다.
12월 26일 이른 아침.에이브람스 중령은 가볍게 몸을 날려 전차위로 뛰어 올랐다.“바스토뉴로 곧장 직행한다. 죽더라도 그곳에 가서 죽는다! 알았나?”하지만 이 최후의 한걸음‘조차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대전차포를 든 독일병들이 도로 요소요소에 매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녁 4시 45분.드디어 에이브람스 전차대가 바스토뉴로 진입하게 되었다. 닷새간에 걸친 바스토뉴의 포위망이 풀리는 순간이었고, 히틀러의 대공세가 끝장나는 순간이었다. 이제 공은 미군편으로 넘어 간 것이다.
* 미군의 반격(파란선)
[ 발지 대전투 : 히틀러 최후의 도박 ]
“절대적으로 판세가 불리할때면 한 장의 카드에 모든 것을 걸어보는 모험도 해볼만 하지 않겠는가?” - 알프레드 요들 독일 육군 참모총장
1944년 10월만 해도 연합군은 연말이 가기 전에 독일의 항복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낙관하고 있었으나 독일 국경으로 가까워지면서 독일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이러한 희망은 물건너 간것처럼 보였다.
1944년 10월 22일
히틀러는 육군 총사령관 빌헤름 카이텔 원수를 비롯하여 요직에 있는 장군들을 자신의 별장으로 모두 불러 모았다. 비장한 결심을 한 것 같은 표정의 히틀러가 입을 열었다.
“대대적인 반격작전이 개시된다. 이 공세에는 20개 사단 30만의 병력, 전차와 장갑차량 1,000대,화포 1,000문, 각종 항공기 약 1,800대가 동원된다. 이 작전을 위해 이미 425만 갤런의 연료와 화차 50대분의 탄약이 비축되어 있다."
대반격!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1943년을 기점으로 전 전선에서 패주만을 계속하던 독일군이 드디어 1940년의 그 찬란한 영광을 다시 한번 재현하는 것이다! 장군들의 가슴은 뛰기 시작했다. 룬트슈테트 원수는 "이것이야말로 총통의 군사적 천재성이 만들어낸 작품"이라며 반색을 했지만, 모델 원수는 이것을 가리켜 "이대로 앉아서 죽느니 한꺼번에 다 몰려 나가서 죽자는 뜻"이라고 이죽거렸다.
육군 참모총장 요들은 “절대적으로 판세가 불리할 때는 한장의 카드에 모든 것을 걸어보는 모험도 해볼만 하지 않은가? 그게 안된다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라며 이 작전의 의미를 함축적으로 평가했다.
하여튼 이렇게 하여 훗날 '발지 대전투'로 불리우게 되는 1944년 연말 독일군의 이른바 크리스마스 대공세는 결정되었다 발지(Bulge)는 특정한 지명이 아니라 영어로 돌출부란 뜻이다.
이 전투가 개시되던 1944년 12월 당시의 전황지도를 살펴보면 프랑스와 벨기에 전역, 그리고 네델란드 남부를 장악한 연합군의 점령지역이 중부 벨기에의 아르덴느 지역에서 독일군의 침공 초기에 서쪽을 향해 불쑥 점령을 하고 이 지역에서 치열한 혈전이 벌어졌기 때문에 발지(Bulge)란 이름이 붙게 되었다.
작전명은 <바하트 암 라인> 즉 '라인수비'작전으로 정해졌는데, 이것은 물론 아헨방면에서 라인강을 도하하려는 연합군을 저지하기 위해 대규모 수비작전을 전개하는 것처럼 적을 기만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아헨 동쪽으로부터 쾰른에 이르는 라인강변으로 병력을 집결시켰는데, 이 부대이동 작업은 세상이 다 알만큼 시끌벅쩍한 소란 속에 이루어졌다. 그 반면 아르덴느 정면으로 항하는 주력부대의 이동에는 엄격한 보안 조치가 행해졌다. 그 결과 12월 중순까지는 화차 1만대분, 약 144,500톤의 무기와 탄약, 그리고 각종 보급품이 집결할 수 있었다.
작전 개요는 단순했다.
주공부대는 요제프 디트리히 SS(친위대)대장이 지휘하는 제 6장갑군으로, 이들은 아르덴느 북방을 돌파하고 뫼즈강을 건너 안트워프를 탈환한다. 그 남쪽에서는 폰 만토이펠 중장의 제 5장갑군이 뫼즈강을 건너 주공부대의 좌익을 엄호하며 에리히 브란덴베르거 중장의 제 7군은 주공부대의 남쪽에서 연합군의 반격을 견제한다.
마지막으로 귄터 블루멘트리트 중장의 제 15군 역시 돌파지역의 남쪽에서 동일한 임무를 수행하게 될 것이므로, 이 작전에는 처음부터 예비병력 따위는 없었다.
특히 히틀러의 특별지시로 구성된 오토 스코르체니 중령의 제 150위장 기갑여단이 있다. 이들은 그라이프 즉, 유령부대란 별명이 붙은 그의 부하들은 전원이 노획한 미군 군복을 입고 미국제 무기로 무장했다. 이들은 주력부대보다 앞서 뫼즈강으로 직행하여 그곳에 있는 다리를 확보하는 한편으로, 미군들의 후방에 혼란을 조성하라는 특수임무를 부여받고 있었다.
아르덴느 서쪽의 미군들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1944년 12월 16일 오전 5시 30분, 북으로는 몬샤우로부터 남으로는 에히테르나흐에 이르는 140Km의 아르덴느 전선에 대한 공격이 시작됐다.
제6장갑군의 파이퍼 전투단은 12월 18일 스타벨로트 마을에 도착했지만 그들은 그곳에서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이들이 전진한 거리는 불과 30Km남짓이었지만 이들은 가장 멀리까지 진출한 부대였다.
* 미군 포로들
12월 17일 아침까지도 로스하이머 그라벤과, 크링켈트, 로세라트등의 주요 거점 대부분이 여전히 미군의 수중에 남아있었고, 독일군은 한발도 전진하지 못했다. 대공세 작전의 시작단계에서부터 뜻하지 않게 발목을 잡힌 독일군의 진격은 예정시간보다 최소한 24시간 이상 뒤쳐져 있었다.
12월 20일 제 12 SS기갑사단은 포위망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엘젠보른 고지의 99사단을 향해 필사적인 공세를 펼쳤지만 모두 허사로 돌아갔고, 정예 히틀러 유겐트사단의 전차들은 이 과정에서 속절없이 소멸되어갔다. 아르덴느 북익을 담당한 제 6장갑군의 공세는 실패로 돌아갔음이 분명했다.
연합군 총사령관 아이젠하워 장군이 독일군의 일제공세를 알게 된 것은 12월 16일 오후였다. 그는 랭스 근처에서 휴식하고 있던 제 82,제101공수사단과 제7, 제10 기갑사단에 아르덴느로 이동하여 방어진에 합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7일 밤 자정 무렵에 증원부대로 투입된 제 10 기갑사단의 전차들이 굉음을 울리며 에히테르나흐 시내로 쏟아져 들어왔고, 다른 전선과 달리 전차의 지원이 전혀 없이 보병부대로만 구성되어있던 독일 제 7군의 공세는 쉽게 저지당했다.
* 영화에서 바스토뉴 읍내
제 4사단의 북익에서는 미군 제 28보병사단이 선전을 펼치는 사이 제9기갑사단과 제5보병사단의 증원부대가 차례로 투입되어 단단한 방어선을 구축해 버림에 따라 전선 최남단에서 시작된 독일군의 공세는 가장 먼저 한계상황을 맞게 된다.
그사이 제 5장갑군의 만토이펠은 다른 전선과 달리 포격 후 전차를 발진시키는 데신 보병부대를 먼저 진격시켜 기습을 가하는 방법을 채택했다. 제5장갑군의 보병부대는 그날 오후 미군의 방어선을 완전히 돌파하고 있었다.
독일 제 47장갑군단 예하 3개 사단은 이날 밤 서부전선에서 미군의 가장 큰 휴양소가 있는 클레르브를 함락했다. 클레르브를 점령한 이들은 다음 목표로 32Km 서쪽에 있는 바스토뉴였다.
12월 19일 아침 아이젠하워 원수가 서부전선의 군단장급 이상 지휘관들을 베르당으로 소집했다. 제 3군 사령관 패튼 중장에게 예정되어있던 독일본토 진공작전을 잠시 중단하고 아르덴느 지역에서 반격작전을 실시하라고 지시했다.
생비트에 대한 독일군의 공세는 20일 저녁부터 시작되었다. 6개의 포장도로가 교차하는 이곳은 양군에게 모두 중요한 곳이었다. 미군 제7기갑사단이 생비트 방어 작전에 책임을 떠맡았다.
그리고 제 28사단과 제 106사단의 잔존병력도 자연스럽게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오후 8시경 생비트 외곽 방어진지가 돌파 당했다. 23일 새벽 제 7사단은 생비트를 모두 철수했다. 22,000명으로 전투를 시작했던 그들의 병력은 6,000명으로 줄어있었다.
* 독일군 포로
101공수 사단에게 바스토뉴를 사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제 10기갑사단의 B전투단도 합류했다. 이들이 맞서 싸워야 할 상대는 만토이펠 중장의 독일 제 5장갑군 예하 3개 기갑사단 가운데서도 가장 막강한 전차 교도사단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바스토뉴 약 10Km 지점에서 잘못된 정보로 만 하루이상을 낭비하고 미군은 시간을 벌수 있었다. 19일 아침 이미 전투는 시작 되었다. 미군은 점점 더 좁은 지역으로 밀리고 있었으나 12월 26일 제 4기갑사단이 바스토뉴에 도착하자 전세는 역전되었다.
이 시간 독일의 제 2 기갑사단은의 야포 사정거리에 뫼즈강이 들어왔다. 제 2 기갑사단은 적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면 우회한다는 원칙으로 작전목표 가장 가까운 지점 까지 온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점점 더 강력해지는 미군의 반격을 혼자서 받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들은 어떤 적 전차도 상대할 수 있는 타이거 전차가 있었지만, 공중의 연합군의 타이푼 전투기에게는 상대가 되지 못했다.
* 진격하는 미군들
그리고 만토이펠의 제 5장갑군 예하의 제 9기갑사단이 뫼즈강까지 겨우 도달하였지만 미 제 2기갑사단에게 저지당해 더 이상 전진할 수가 없었다. 이제 독일군에 남겨진 선택은 아르덴느로 밀어넣은 기갑부대들이 그나마 완전히 소멸되기 저에 재빨리 철수시키든가 아니면 현 전선에서 같이 자멸하는 것 뿐이었다.
보름간의 분투로 아르덴느 전선 서쪽으로 약 70Km정도 전진하는데 성공했지만 연합국의 점령지역 안쪽으로 불쑥 튀어나온 이 돌출부는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12월 30일 미 제3군이 제 11기갑사단을 선두에 세우고 북상하기 시작했다, 1월 3일 에는 제1군의 부대들도 북쪽에서부터 협공을 가하기 시작했다.
* 바스토뉴 공방전에서 미군들의 서서 쏴 자세
뫼즈강 건너편에 대기하고 있던 영국 30군단의 전차들도 이 돌출부의 서쪽 끝에서 서서히 압박해 들어옴에 따라 독일은 삼면에서 공격을 당하는 형세가 되었다.1월 8일을 기해 히틀러는 아르덴느 전선의 모든 독일군 부대에 철수를 승인했다. 히틀러의 마지막 도박은 실패로 끝났음이 분명했다.
독일군은 이 라인수비작전에서 약 10만의 사상자를 내었고, 미군의 사상자는 8만이 조금 넘었다. 전쟁은 이후로도 약 4개월간 지속되었지만 마지막 한 장의 카드를 써버린 독일로써는 더 이상의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첫댓글 아이구 이거 어마어마한 리얼 전사를 총망라 하셧구만유
독일군 SS친위대 디트리이트 이런 망난이도 충성심하나로 출세하는군요
나치 장교들 모두 미남....반쯤 일고 나누어 진행하겠읍니다
무쟈게 수고하셧읍니다
영화<발지전투>는 우리 고등학교 2학년때 피카디리 극장에서 단체관람 했을 겁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독일군 전차들은 모두 미군 전차에 십자가를 그려 출연(?)시킨겁니
다. 허긴 종전 한참후에 독일군 탱크들을 찾기가 쉽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것도 한대도
아니고...독일탱크는 제1호,제2호,제3호,제4호,제5호(판저),제6호(타이거)로 나누어집니
다. 작년에 개봉한 브래드 피트 주연의 <퓨리>에서 진짜 타이거 전차가 나왔더군요. 엄
청 괴물같은 전차인데, 잔고장이 잦았고,기름을 너무 잡아먹는 흠이...전쟁 후반기에 나
와서 독일군으로서는 좀 아쉬웠습니다.사실 발지전투를 쓰려면 책한권이 될텐데 이만큼
줄이는 것도 애 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