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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5일(어린이 주일)
에베소서 6:4
건강한 자녀 양육의 원리
하늘사랑교회 주일예배 설교문
연역적 대지 설교형식
김규태 목사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이 땅에서 자녀를 둔 부모의 한결같은 바람은 자녀들이 잘되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농사를 꼽으라면 자식 농사를 꼽을 수 있습니다. 그만큼 자식 농사 짓기가 어렵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처음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우유를 먹일 때 파스퇴르 우유를 먹인다고 합니다. 적어도 내 아이 만큼은 자라서 민족사관고등학교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자 아이에게 연세우유를 먹인다고 합니다. “그래 적어도 연세대 정도는 들어가야지.”라고 생각한 겁니다.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우리 아이가 그렇게 똑똑한 아이는 아이라는 생각이 들게 되고, 이때 우유를 건국우유로 바꾼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좀 더 지나면 ‘그래 아무 대학이나 들어가면 어떠냐? 그래도 건강이 최고지’하는 마음으로 매일우유로 바꾼다고 합니다.
과연 우리가 자녀를 잘 키운다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 과연 우리 자녀들은 어떤 존재들일까요?
먼저 우리 아이들은 마치 정원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어떤 집에 가면 집 한쪽에 잘 가꿔진 정원이 있습니다. 잘 정돈된 잔디밭 한쪽에 알록달록한 꽃이 심겨져 있고, 한쪽에는 잎사귀가 푸른 나무가 심겨져 있어서 보는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해줍니다.
그런데 아세요? 우리 눈에 보기에는 좋을지 몰라도, 그 집 주인이 평소 그 정원을 관리하기 위해서 들어간 시간과 노력은 얼마나 많겠습니까? 저절로 아름답게 유지되는 정원은 없습니다. 다 수고하고 노력한 대가를 누리고 있는 것뿐이지요.
우리 아이들은 마치 정원과 같은 존재입니다. 부모가 아이들에게 관심을 두고 사랑을 쏟아부어야 아이들이 잘 자랍니다. 그렇지 않고 무방비 상태로 놔뒀다간 정말 아이들이 어떻게 될지 몰라요.
부모들은 정기적으로 아이들에게 훈계를 해 줘야 합니다. 그냥 자기들이 알아서 잘 크겠지 생각하면 오산이에요. 아이들의 인격이 형성되고, 언어가 순화되기 위해서 부모들은 끝없이 아이들에게 잔소리도 해야 하고, 징계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아이들이 비틀어지지 않고 잘 자랍니다
또한, 우리 아이들은 그림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하얀 도화지 한 장에 부모가 어떤 밑그림을 그려 넣느냐에 따라, 앞으로 아이들의 미래가 달라집니다. 좋은 밑그림을 그려주면, 자녀들은 그 밑그림 위에다가 자기 나름대로 좋은 인생들을 채워 넣을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아이들이 성장하기 전까지는 부모의 역할이 절대적입니다. 그런데 이게 정말이지 말처럼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저는 목사로서 소원하고 있습니다. 훗날 제 자녀들이 아빠를 기억할 때, 우리 아버지는 정말 선한 목사였다는 평가를 해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제가 자녀들을 양육해보니까 아이들을 키우는 것이 정말 만만치 않습니다. 돈만 갖고 되는 것이 아니고, 정말 많은 기도와 인내가 필요합니다.
아이들 앞에서는 아빠인 저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아빠로서 저의 바람은 이런 것입니다. 제 자녀들이 저의 부끄러운 민낯을 보더라도 ‘우리 아빠도 별수 없는 사람이구나!’하고 너그럽게 저를 이해해 주면 좋겠습니다. 어디 저만 그럴까요? 여기에 계신 우리 부모님들의 바람도 저와 비슷하지 않을까요?
세계인이 존경하는 인도의 성자 간디를 여러분은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인도의 간디는 세계인들에게 얼마나 존경받는 인물입니까? 비폭력, 무저항 정신으로 인도인뿐만 아니라 세계인의 존경과 추앙을 받는 분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훌륭한 간디도 그의 맏아들 ‘하리랄 간’과 갈등을 겪었습니다.
비록 간디는 인도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을지 모르지만, 정작 자신의 가족들은 간디의 이상을 이루기 위해 많은 희생을 감당해야만 했던 겁니다. 그래서 결국 맏아들 하릴리 간은 아버지를 떠나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말았습니다.
간디와 그의 아들은 무려 40년간이나 갈등을 겪었고, 아들은 그사이에 술과 창녀, 범죄에 찌들어 살다가 결국은 아버지 간디와 의절을 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간디가 암살되기 몇 달 전에 큰아들 하리랄 간도 알코올 중독으로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간디같이 훌륭한 사람도 자식 농사에 실패한 것을 보면, 정말 이 세상에서 자녀를 잘 키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우리를 실감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본문을 조금 더 유심히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우리 한 음성으로 오늘 본문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에베소서 6장 4절 말씀입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여기에서 “아비들은” 단순히 아버지들만을 가리키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 땅에서 자녀를 낳아 키우는 모든 부모를 가리킵니다.
부모로서 우리가 붙들어야 할 자녀 양육의 첫 번째 원리가 과연 무엇입니까?
첫째로, 부모인 우리는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과연 부모들이 자녀를 노엽게 한다는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부모들이 자녀를 노엽게 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부모가 과도하게 엄격한 것, 부모로서 권위를 남용하는 것, 독선적인 것, 공평하지 못한 것, 계속 잔소리를 해서 자녀들을 심리적으로 괴롭히는 것, 함부로 섣불리 정죄하는 것, 자녀에게 인격적인 모독을 주는 것, 더 나아가 굴욕감을 느끼게 하는 것, 자녀의 필요에 대해서 완전히 무감각한 것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제가 조금 전에 소개해 드린 목록 중에서 혹시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습니까? 이 가운데 우리가 특별히 경계해야 할 몇 가지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부모인 우리는 자녀에게 지나치게 권위적인 태도를 경계해야 합니다.
부모는 분명 자녀에 대해 일종의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부모는 이 사회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릴 권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부모는 자녀의 경제적 근원이 됩니다. 그러다 보니 자칫 부모가 가진 권위가 자녀에게 지나치게 적용이 될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어린 자녀들은 부모의 지나치게 권위적인 태도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주신 권위는 신중하게 사용돼야 합니다. 부모는 그저 큰 윤곽만 정해주고, 세심한 부분은 본인이 결정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부분을 부모가 결정하려고 하고, 또 그 결정에 따를 것을 자녀에게 요구할 때 자녀는 노여워하게 됩니다.
그다음으로, 부모인 우리는 공평하지 못한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제가 예전에 한 교회의 부 교역자로 있을 때, 저는 청년들을 인솔해서 몽골에 단기선교를 떠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청년들과 함께 한두 달 전부터 몽골 아이들에게 선물할 옷가지며, 풍선이며, 얼굴을 예쁘게 꾸미는 페이스 페인팅 같은 것들을 준비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몽골에 가서 어린아이들에게 미리 준비한 것들을 나눌 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한 청년이 몽골 아이들의 얼굴에 예쁜 그림을 그려 넣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자신의 다른 한쪽 볼에도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 청년은 아무 생각 없이 다른 한쪽 볼에도 예쁜 그림을 그려 넣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다른 몽골 아이들이 이 청년에게 거칠게 항의를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몽골에서는 아이들에게 선물을 줄 때 누구에게든지 똑같이 나누어야 하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나누어 줄 선물을 가져왔는데 그만 실수로 한두 개가 모자란 경우에는 전체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주지 말아야 합니다.
반대로 준비한 것 이상으로 한 두 개의 선물이 남았을 때는 우리나라처럼 정에 이끌리어 특정한 아이들에게 무심코 남은 것을 주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때 우리 청년들이 적잖이 당황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정에 이끌리는 문화잖아요? 그래서 무엇을 하더라도 항상 여유 있게, 넉넉하게 준비해서 필요한 사람은 더 받을 수 있게 하는 문화인 데 비해, 몽골은 그것이 통하지 않았던 거지요. 분명 우리와는 다른 문화이지만, 우리도 그들에게 배울 점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경에 나오는 야곱과 요셉 이야기를 조금 더 해 볼까요? 야곱에게는 모두 열두 명의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여러 아들 중에서 유독 열한 번째 아들인 요셉을 편애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원래 야곱이 더 사랑했던 아내는 레아가 아니라 라헬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열 아들은 모두 레아의 소생이고, 오직 요셉만이 야곱이 더 사랑했던 라헬이 낳았던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유독 요셉에게 집착했고, 다른 형제들과 달리 요셉을 위해 채색옷을 지어 입혔습니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던 형들이 비록 아버지에게 이야기는 하지 못했지만, 마음속에 시기심을 숨겨놓고 있다가 결정적일 때에 동생 요셉을 구덩이에 집어넣어 버리고 말았던 겁니다.
화목한 가정을 깨는 경계대상 1위가 부모의 자녀들에 대한 편애입니다. 결국, 아비들에게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은 자녀 양육에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이 다름 아닌 부모 자신이라고 말하는 셈입니다. 맞습니다. 다른 외적인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자녀 양육의 가장 큰 걸림돌은 부모 자신에게 있습니다.
부모의 태도가 성공적인 자녀 양육의 승패를 결정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녀를 잘 양육하려면 먼저 부모인 자기 자신을 잘 돌아보아야 합니다. 좋은 부모 밑에서 좋은 양육방법이 나오고, 좋은 부모 밑에서 좋은 자녀가 양육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부모는 자녀에게 뿌리와 같은 존재입니다.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다(마 7:17).”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좋은 자녀를 양육하기 원하는 모든 부모가 귀담아들어야 할 금언입니다.
둘째로, 부모인 우리는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자녀들을 양육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자녀를 양육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교훈’이라는 말의 헬라어 원어는 ‘파이데이아’입니다. 이 말은 ‘징벌’이라는 뜻입니다. 자녀들을 잘 양육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불가피한 징벌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부모들이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이 자녀를 징벌하지 말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히 부모가 자녀를 잘 양육하기 위해 정당한 징벌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잠언 13장 24절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자녀를 잘 키우기 위해서는 매를 아껴서는 안 됩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자녀를 미워해서 매를 대서는 안 됩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매를 대야 합니다. 물론 어느 부모가 자녀를 미워해서 매를 대겠습니까마는, 여기서 매질의 목적은 적어도 자녀를 사랑하는 한 방편이 되어야 합니다.
부모의 성질을 이겨내지 못해 매질하거나, 교육적 목적을 염두에 두지 않고 감정적으로 자녀를 때려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교육적 효과를 달성하기 위한 사랑의 매는 자녀들에게도 도움이 됩니다. 왜냐하면, 자녀들도 우리 부모가 어떤 목적으로 나를 때리는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교훈’이 자녀들을 위한 사랑의 매질이라면, ‘훈계’는 말에 의한 교육을 의미합니다. 훈계라는 헬라어 원어는 ‘누테시아’입니다. 이는 매질이 아닌 말로써 훈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혹시 ‘잔소리 교육’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어떤 통계자료에 의하면, 부모의 잔소리가 심할수록 아이들이 더 똑똑하다고 합니다. 참 의외이지요? 엄마의 잔소리가 아이들을 잘 훈련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무조건 잔소리라고 해서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의 잔소리가 자녀들에게 도움이 되려면 분명한 한 가지 전제가 있어야 합니다. 바로 부모와 자녀와의 신뢰 관계입니다.
자녀들은 부모에게 교육적 차원의 매를 맞거나 혹은 잔소리를 들어도 끊임없이 부모의 사랑과 관심을 확인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부모가 삶을 통해 자녀들에게 좋은 모델이 되어 주지 못한다면, 잔소리는 그저 잔소리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적어도 잔소리가 자녀에게 훈계가 되게 하려면, 평상시 부모의 모습을 통해 자녀들에게 존경을 받고, 신뢰를 얻어 내야 한다는 겁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을 때로는 채찍으로 징계하시고, 때로는 말씀으로 훈계하시는 좋으신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녀들을 잘 양육하기 위해 중요하게 전제되어야 할 것은 바로 우리가 우리의 영적인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무엘 하 7장 1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우리 하나님은 자녀들이 죄를 범하면 반드시 매와 채찍으로 징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건강한 자녀를 양육하기 위해서는 먼저 부모가 하나님과의 분명한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사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자식을 양육하는 올바른 부모의 모범은 오직 성령 충만의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한 장만 앞으로 넘어가면, 에베소서 5장 18절에 보면,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 받으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은 곧바로 성령 충만을 가정생활에 적용하십니다. 가장 먼저 부부관계로, 그리고 부모와 자녀의 관계로, 그리고 종과 상전의 관계로 성령 충만한 삶을 적용하십니다. 무슨 말입니까? 성령 충만은 하늘나라에서 먼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장 먼저 가정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겁니다.
사실 나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가족들 아닙니까?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전도하기 쉬워도 나를 가장 잘 아는 가족전도가 더 어렵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분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서 가장 기본적인 사회구조인 가정에서부터 성령 충만의 열매들을 맺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먹고 잘 곳도 없는 한 청년이 파리의 한 의상실 앞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습니다. 청년은 이탈리아의 유복한 사업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으로 부친의 사업이 망해 가족이 다 프랑스로 이주하였고, 생활이 어려워 적십자사에서 아르바이트로 근근이 생활을 이어 나갔습니다. 끼니를 잇기 어려운 형편이라 옷을 사 입을 수가 없어서 이 청년은 스스로 자투리 천을 구해 옷을 만들어 입었습니다.
어느 날, 비를 피해 의상실 앞에서 의상실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마침 의상실에서 나오던 한 부인이 그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가 물었습니다.
“어머 그 옷 참 멋이 있네요. 어디서 맞추었지요?”
“네? 이 옷은 맞춘 것이 아니고 제가 만든 것입니다.”
“그래요? 정말로 멋집니다! 당신에게는 옷을 만드는 특별한 재주가 있나 봅니다.”
청년은 이름 모를 이 부인의 한 마디에 눈이 번쩍 뜨였다고 합니다. 1950년, 그 청년은 부인의 한 마디에 빚을 얻어 의상실을 차렸습니다.
그런데 디자인 솜씨가 뛰어나다는 소문이 퍼지고, 영화 ‘마녀와 야수’의 의상을 담당해 줄 것을 제의받아 성공적으로 해냈다고 합니다. 그가 바로 이름 모를 부인의 칭찬 한마디로 유명한 디자이너가 된 ‘피에르 가르뎅’입니다.
2020년에 세상을 떠난 잭 웰치(Jack Welch)는 미국의 제조업체인 제너럴 일렉트릭사(GE)의 회장직과 최고경영자(CEO)였고, ‘전설적인 경영자’라는 별명을 가진 최고의 실업가였습니다.
그런 잭은 어렸을 때부터 말을 더듬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늘 부끄러워하고 소극적인 행동으로 일관된 삶을 살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어머니가 아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입버릇처럼 해주었다고 합니다.
“잭! 말을 더듬는 버릇은 단점이 아니야. 네 머릿속의 생각이 네가 이야기하는 속도보다 빨리 움직이고 있으므로 말을 더듬는 것뿐이란다. 말을 더듬는 것은 네 머리가 그만큼 좋다는 증거야.”
어쩜 이렇게 지혜로운 생각이 펼쳐질 수 있었는지 놀랍기만 합니다. 어쨌든 잭 어머니의 이런 칭찬 때문에 잭은 자신의 단점에 어떤 콤플렉스도 느끼지 않고 밝게 자라 미국 최고의 경영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출처: <iframe src="https://www.facebook.com/plugins/post.php?href=https%3A%2F%2Fwww.facebook.com%2Fnadurebak%2Fposts%2F2850573848428508&show_text=true&width=500&is_preview=true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 앞에 좋은 신자, 좋은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자녀들이 부모의 신앙과 삶을 바탕으로 행복한 인생, 행복한 신앙인으로 성장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자녀들을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합시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이 자라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준 재능과 가능성의 꽃을 활짝 피우도록 도웁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