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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어느 간증을 들었습니다.
30대 남자 성도님이었어요.
어릴 적 부모님이 많이 다투셨데요.
특히 덩치가 크고 힘이 세셨던 아버지는
어머니를 매일같이 욕하고 구타했답니다.
10년간 폭력 속에 살던 엄마는
결국 집을 떠나고 말았어요.
그 뒤로 아버지의 주먹은 아들을 향합니다.
집에서 누워 있으면 왜 누워있냐며
발로 밟히고,
밤늦게 아버지가 술에 취해
주정을 부리는 걸 듣다가 잠깐 졸면
왜 자냐며 주먹으로 얼굴을 맞았답니다.
매일 두려움에 잠도 자지 못하며 살던 아들은
학교에서 불량 청소년이 되었습니다.
술, 담배, 폭력, 도둑질을 일삼으며 살다가
고등학교를 중퇴합니다.
그리고 배달 일부터 시작해서
안 해본 일이 없다고 해요.
나중엔 돈을 벌면 그게 자신을
안전하게 해준다는 생각에
불법적인 일에도 손을 댑니다.
불법 성매매 업소에서 실장으로 일하며
큰돈을 만졌어요.
그러던 중 어릴 적 동창이었던
지금의 아내를 만나 사랑에 빠집니다.
우여곡절 끝에 결혼을 했어요.
처음으로 아내의 가족들과 식사를 하는데,
장인어른과 아내가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데요.
‘어떻게 아버지와 저렇게
행복한 모습으로 밥을 먹을 수 있지?’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분이 도박에 빠진 거예요.
처음엔 작은 돈으로 시작했어요.
그런데 점차 잃은 돈을 메우려다 보니
아이의 돌 반지와 결혼 반지까지 팔았답니다.
그렇게 천만원이 넘는 빚을 지고 나서
아내에게 들킨 겁니다.
결국 아내도 극심한 스트레스 때문에
우울증에 걸렸죠.
여러분, 이분의 이야기를 들으시며
어떤 생각이 드셨습니까?
유년 시간 내내 무서운 아버지라는
거대한 벽이 그의 인생을 애워쌌습니다.
나이가 차서 돈이라는 망치로
그걸 깨부순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 돈 때문에 빚이라는
거대한 벽이 그를 둘러쌌죠.
이처럼 우리 인생은 우리 힘으로 깰 수 없는
거대한 벽에 가로막힐 때가 있습니다.
그 벽 앞에 무력한 자신을 발견할 때
우울증도 오고, 건강도 나빠집니다.
오늘 본문에 이스라엘도
도저히 깰 수 없는 벽을 만났습니다.
바로 ‘미디안’입니다.
미디안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사사기 6장에 먼저 등장합니다.
사사기 6장 1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사기 6:1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칠 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넘겨 주시니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죄를 짓자
주님께서는 회초리를 드셨습니다.
그 회초리가 바로 미디안입니다.
미디안 사람들은 이스라엘과
친척지간입니다.
아브라함의 세 번째 아내
그두라로부터 낳은 네 번째 아이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들을 통해
이스라엘을 치셨습니다.
이러한 압제가 얼마나 심했는지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사기 6장 6절을 읽어볼까요?
사사기 6:6
이스라엘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궁핍함이 심한지라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추수철이 되면 미디안 사람들이
아말렉과 더불어 동맹하여 올라왔습니다.
그리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어놓은
농작물은 모두 빼앗아갔죠.
이들은 메뚜기처럼
모조리 다 가져갔습니다.
우리나라가 일제강점기 시절에 겪었던
수모가 이와 비슷하지 않았습니까?
일본이 제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면서
전쟁물자를 바치라고 하면서
집에 있는 수저까지 내놓으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어떤 기분이었겠습니까?
일본의 ‘이응’만 나와도
분노가 치미는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궁핍하다’는 말은 ‘달랄’입니다.
이는 ‘쇠약해지고 비천해지다’는 말입니다.
옛말에 아무리 양반이라도 배가 고프면
남의 집 담을 넘는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는 고통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극심했을 것입니다.
본래 이스라엘이 머물고 있는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아름답고 좋은 땅에
자신의 자녀들이 머물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집트에서 광야를 통과하여
지금 있는 곳까지 이끄신 것이죠.
그러나 복의 땅이 저주의 땅으로
변해버렸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의 죄 때문입니다.
죄는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저주로 바꿉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둘째 아들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유산을 요구합니다.
아직 살아있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는 것은
얼마나 무례한 행동인지요.
만약 저희 아들이 저에게 그런 말을 했다면
처음 한 두 번은 웃고 넘겼겠죠.
그런데 매일 볼 때마다
그런 말을 하면 어떨까요?
‘얘가 왜 이러나?’ 싶을 것입니다.
왜죠?
나중에 아버지가 종들을 시켜
잔치를 준비하라고 하는 걸 볼 때,
이 집은 잘 살았던 걸로 보입니다.
재산이 꽤 있었나봐요.
그러니까 아들이 달라고 하는 유산은
적어도 억단위는 아니었을까 싶어요.
그만큼 큰 돈을 아직 어린 아들이 갖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버지는 다 알았어요.
그러나 시도 때도 없이
“유산 주세요”를 외치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결단하고 줍니다.
안타깝게도 아버지의 불안한 예상은
적중하고 말죠.
아들은 먼 나라로 가서 그 돈을 술 먹고,
친구 사귀고, 여자 만나는 일에
모두 써 버립니다.
결국 남은 것이라고는 거지처럼 변해버린
몸뿐이었죠.
아버지의 집에 있었으면 먹을 것과 입을 것은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는데,
세상의 쾌락에 빠져 살다보니
모두 잃었다는 죄책감과 후회만
남았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혼자의 힘으론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죄가 주는 달콤한 유혹이 너무 커서
끊어내려 해도 자꾸 손이 가게 되죠.
술을 마시는 분들이
술을 끊지 못하는 이유가
술이 맛있어서가 아니랍니다.
술을 먹을 때 분위기 좋아서래요.
담배는 또 어떤가요?
담배를 태우는 사람도 옆에서
누가 담배 연기를 풍기면 싫어해요.
그러나 자기가 입으로 니코틴을 빨아들이는
그 때의 기분이 좋아서 계속 피는 거랍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니코틴이 몸에 들어가면
뇌에 도파민 분비를 촉진시킵니다.
이게 행복감과 기분 좋은 느낌을 유발하죠.
니코틴에 중독되면
그걸 끊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또 하나가 습관입니다.
식후 땡이란 말을 아십니까?
저는 군대에서 처음 들었는데요.
밥 먹고 나면 곧장 나가서
담배를 태워야 한답니다.
그때 한 손에는 담배 한 개피와
다른 손에는 믹스 커피 한 컵이 들려있죠.
이 습관이 몸에 밴 사람은
담배를 끊기 힘듭니다.
죄도 이와 비슷합니다.
죄가 주는 달콤한 유혹이
우리 뇌를 자극해요.
음란도 그렇고, 도박도 그렇죠.
그게 습관화되면 ‘중독’이라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죄에 중독되면 큰일나요.
죄는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축복을 저리 밀어냅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을 낭비하게 하죠.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 중독되시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죄로 인해 쇠약해지고 비천해진
이스라엘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바로 이런 궁핍함 중에 이스라엘 백성이
했던 행동이 있습니다.
우리 사사기 6장 6절을 다시 볼까요?
사사기 6:6
이스라엘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궁핍함이 심한지라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지속되자,
죄악 속에 살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것도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주여...”를 말한 게 아닙니다.
“부르짖었다”라고 나왔어요.
이 말은 울부짖는 것을 의미해요.
“주님 내 힘으로 안 돼요.
내 의지로 이길 수 없어요.
죄를 끊고 싶은데 이길 수 없어요.
도와주세요.”
바로 이런 기도가 나오기 전에
접속사가 있습니다.
“이에”라는 말이에요.
7년동안 이스라엘 백성의 발목을 붙잡았던
저주의 시간을 “이에”라는 망치가
부숴버린 겁니다.
이건 앞서 예를 들었던 누가복음 15장의
둘째 아들 이야기에도 동일하게 등장합니다.
누가복음 15:16-20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거지가 된 둘째 아들에게 남는 거라곤
돼지에게 주는 쥐엄 열매 뿐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돼지는
정말 불결한 짐승입니다.
그들에게 주는 밥을 몰래 빼앗아 먹는
최악의 상황에 이른 거죠.
그런 궁핍함 속에서 그가 깨닫습니다.
‘돌아가야겠구나!’
저주의 벽을 부수는
망치가 바로 “이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께 돌아오길
원하십니다.
그러면 진짜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인생이 우리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종종 찾아옵니다.
왜 이렇게 삶이 안 풀리는지,
갑자기 찾아온 질병으로 인해,
혹은 경제적 위기 때문에
우리는 거대한 벽을 마주합니다.
그것이 나의 죄 때문이라면,
이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품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바라기는 오늘 이 시간을 통해
저주의 담이 완전히 부숴지고
새롭게 되길 축복합니다.
자, 이제 오늘 본문의 이야기로
들어가 봅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주님께 부르짖자
그들을 위해 한 사람을 부르십니다.
바로 ‘기드온’입니다.
그는 남의 눈치를 보는 소심한 남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큰 용사여!”라고 부르시며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리더로 세우십니다.
주님을 만난 후로 기드온은
담대한 용기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날 밤에
자신의 아버지가 섬기는 바알 제단을
가루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곁에 있던 또 다른 우상인
아세라 상까지 박살냈습니다.
그 뒤로 그에게 별명이 생깁니다.
바로 “여룹바알”입니다.
그 뜻은 대단히 멋진데요,
“바일이 그와 직접 싸우게 하라”는
의미입니다.
바알 조각상을 부쉈으니까
바알과 싸우는 사람이 된 거죠.
저는 이 부분을 보면서
‘우리 그리스도인이 바로
이래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바알과 아세라와 같은 게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힘으로 진화론을 가르치는
일반 교육을 어떻게 이기겠어요?
그러나 멈추지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노력을 해나갑시다.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려면 배워야 해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부모가 먼저 무장해야 합니다.
기도로 아이들을 지켜달라고
부르짖어야 해요.
부모의 기도는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봅시다.
기드온은 사람을 모읍니다.
미디안과 싸울 군대를 소집하는 거죠.
그렇게 해서 보인 수가
3만 2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물론 미디안과 아말렉 연합군이
13만 5천 명인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만 하더라도 어느 정도
싸워볼 만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다.
이들을 데리고 가면 미디안을
넘겨주지 않겠다.
이 얼마나 황당한 말씀 아닙니까?
어떻게 해서 사람들을 모은 건데 말입니다.
지금처럼 KTX가 있었습니까?
아니면 비행기가 있었나요?
아무것도 없었어요.
고속버스도 없었어요.
그냥 걸어서, 혹은 나귀 타고 강을 건너
산을 넘어 온 겁니다.
그런데 이들을 데리고 싸우면 질거라뇨?
도대체 그 이유가 뭘까요?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3만 2천 명이 모였지만 이들 중에
태반이 승리한 후에 이렇게 말할 거랍니다.
”봐봐, 내가 이긴다고 했지?
내가 나가면 안 될 것도 된다니까.“
교만하게 되어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될 거란 말씀입니다.
기드온은 이 말씀을 듣고
”집에 가고 싶은 사람은 가십시오.“
라고 했습니다.
충격적이지만 이 말을 듣고
2만 2천 명이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제 남은 수는 1만 명뿐입니다.
이들은 13배가 넘는 적들과 싸워야 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또 다른 명령을 하십니다.
물가에 가서 물을 마시는 모습을 보고
남을 자와 떠나야 할 자를
구분해 주시겠답니다.
그대로 했더니 하나님은 무릎을 꿇고
마시는 자들만 남게 하십니다.
이 부분을 예전에는
”주위를 잘 살피며 먹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택하신 거다“라고 설교했어요.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두 부류 중에 많은 쪽이 아닌
적은 쪽을 택하셨을 뿐이에요.
어떤 이유에서 였을까요?
그들이 스스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고
하신 거죠.
다시 말해 모든 전쟁이 하나님께 속했음을
고백하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이 전쟁은
이미 승패가 결정 난 싸움이었거든요.
그러니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을
택하신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일은
다수만이 답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때론 다수보다 소수의
믿음이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다윗과 골리앗’ 아닙니까?
다윗은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았어요.
전쟁이 여호와께 속한 것임을 알았죠.
그래서 이미 이긴 전쟁이라고 믿고
골리앗 앞에 섰던 것입니다.
우리 이 말씀을 읽어볼까요?
사무엘상 17:46-47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나아간
다윗은 믿음대로 승리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 믿음입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도 소수였지만
그들 안엔 믿음이 있었어요.
비록 현실은 우리가 연약한
메뚜기 같고, 저들은 거인들이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저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선포한 겁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 이런 믿음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연약한 우리를 연단시키십니다.
그래서 그들을 미디안 진영 아래 두십니다.
8절에 보면 ‘그 삼백 명은
머물게 하니라’고 나왔어요.
여기서 ‘머물게 하다’는 말은
원문으로 보면 ‘하(카)자크’입니다.
의미는 ‘강하게 하다’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삼백 명을 택하시고
그들을 강하게 하셨다는 말이 되죠.
저는 이 부분을 묵상하며
우리 성도님들이 떠올랐습니다.
코로나19를 거치며 한국교회가
많이 힘들어졌습니다.
우리교회도 예외는 아니었죠.
그러나 지금 계신 여러분들이
바로 남겨진 자들 아닙니까?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를 강하게 하실 것입니다.
아니, 이미 강하게하고 계신 줄 믿습니다.
앞서 나눴던 그 남자 성도님의
간증입니다.
우울증에 걸렸던 아내가 언니의 권유로
아내가 건강한 교회를 다니게 되었어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아내는
이전과 달라진 모습으로 남편을 대했죠.
남편은 변화된 아내를 보며 놀랐답니다.
그리고 아내의 권유로 교회에 가서
주일 예배에 잠을 잤데요.
부족한 수면 시간을 채우기 위해
교회 뒷자리에 앉아서
매주 시간을 보낸 거죠.
그런데 어느 주일 예배 시간에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날도 어김없이 잠에 들 준비를 했는데,
마태복음 14장 31절이
귀에 꽂히더랍니다.
우리 함께 읽어볼까요?
마태복음 14: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이전까지 자신이 하나님을
의심했던 게 떠올랐답니다.
그리고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이후로 목사님의 도움을 받아
도박 중독도 끊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분의 간증은 여기서 끝나지 않아요.
나중에 은혜를 받고 나니
아버지를 향한 미움이
긍휼로 바뀌더랍니다.
그러면서 ‘아, 아버지도 엄마가 떠난
배신과 아픔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런 생각이 들었답니다.
그리고 이 분의 고백이
어릴 적 아버지의 술주정을
맞아가며 듣다보니
현재는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는 자세를 갖게 되었다고 해요.
그게 감사한 일이래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인생은 우리 힘으로
바꿀 수 없어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 힘으로 미디안과 같은 적들을
어떻게 맞서 싸웁니까?
그런데 주님은 이미 그들을
이기게 하셨답니다.
믿으십니까?
저는 우리 교회를 생각하며
오늘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가 세상과 싸워
이길 수 있는 게 뭐가 있습니까?
교인 수가 많습니까? 아닙니다.
재정이 넘쳐납니까? 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마치 물을 떠서 마신 300명처럼
아무것도 내세울 게 없는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평범한 자들을 통해
비범한 일을 행하십니다.
왜요?
하나님이 택하시면 하나님께서
준비시키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소수정예입니다.
여기서 ‘소수’는 ‘적은 수’를 의미하죠.
‘정예’에서 ‘정’은 ‘정결할 정’입니다.
‘예’는 ‘날카로울 예’입니다.
다시 말해 수는 적지만 깨끗하고
날카로운 것을 소수정예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은
바로 이런 자들입니다.
주님 앞에서 정결하기 위해 힘쓰며
부르심에 충성되어
날카롭게 준비된 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우리가 그런 성도가 되길 원합니다.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이런 교회를 한 마디로
‘건강한 교회’라고 합니다.
수가 많다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게 아닙니다.
수는 적어도 정결하고 예리한
믿음의 삶을 사는 교회가
주님의 기쁨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주님 앞에 소수정예가 되어
이 시대에 귀하게 쓰임받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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