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지미르 말레비치
Kazimir Severinovich Malevich,
러시아, 1878~1935
검은 원
Black Circle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 러시아 미술관
흰 화면 위에 검은 동그라미 세상에 이렇게 단순한 그림이 또 있을까? 물론 그림이 쉬워 보인다고 해서 그 안에 담긴 뜻까지 쉽다는 것은 아니란다. 그림의 단순함과 화가의 철학적 깊이는 전혀 다른 문제니까 말이다. 이처럼 간단한 그림으로 유명해진 화가를 만나보자. 말레비치는 러시아에서 태어나 기하학적 추상이라는 예술지상주의를 탄생시켰단다. 초년기에는 미래주의, 입체주의, 야수파 등의 영향으로 작업을 했었지. 1913년 말레비치는 시대를 바꾸는 새로운 선언을 하게 된단다. 한 가지 색을 사용한 기하학적 형태를 통해 마침내 구상주의 예술을 부정해버린 것이었지. 1915년 말레비치는 자신의 작품에서 이미지로 감지될 수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해버렸단다. 대신 단색의 캔버스 위에 원, 사각형 같은 기하학적 형태를 그려 넣었어.
말레비치 눈에는 전통 예술의 형상들이 잡동사니로 보였던 것이지. 그래서 형태를 과감히 청산하고 가장 간단한 원과 사각형을 끌어왔던 거야. 말레비치는 실용적 목적에서 예술이 배제되길 원했단다. 현실의 기능성으로 봉사하는 예술이 아니라 절대적 이상, 예술에 대한 고민을 담아낸 결과였지. 그는 도상학에도 흥미를 보였단다. 순수한 느낌과 감흥으로 채워진 새로운 사실주의를 추구했던 것이지.
말레비치의 이런 시도는 구성주(constructivism)에서 이후 미니멀리즘으로 변화했단다. 말레비치는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역사와 함께 지켜보았단다. 그는 이 혁명이 물질주의에서 정신적인 자유주의로 길을 열어준 것이라 믿었지만 결국 혁명의 희생물이 되었지.
흰 배경 위에 떠 있는 검은 원. 차분하고 수수한 이 기하학적 형상은 당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단다. 겨우 이것을 그려놓고 작품이라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지. 그럼에도 말레비치는 “검은색은 이 시대의 아이콘이다" 라며 과감한 주장을 했단다. 말레비치의 화면 속에는 어떤 상징적 요소도 보이지 않는구나. 철저한 추상, 오직 그것을 위한 원과 배경이 존재할 뿐이란다. 그 시절 말레비치의 이 담백한 그림은 가장 혁명적으로 평가됐단다. 블랙홀 같기도 하
고 하나의 심연 같기도 하구나. 가만히 응시하고 있으면 말레비치의 이 검은 원은 점점 커지는 것 같기도 하고, 빨려 들어가는 기분도 드는구나. 차원이 다른 공간의 통로처럼 느껴지지는 않느냐? 정적이고 이지적으로 구획한 이 그림을 과연 회화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순전히 기하학을 위한 회화라고 해야 하는 건 아닐까?
말레비치는 인간적 삶을 담고 있던 숱한 이야기와 다양한 형상들을 뛰어넘으려 했구나.
단순하고 텅 빈, 그러나 검은색의 장중한 힘을 보여준 이 그림은 이후 예술의 또 다른 길을 제시해주었단다. 초월적인 형상, 말레비치가 보여준 이 간결함은 마치 동양적인 여백과 응축된 도(道)를 구현하는 것 같지 않니? 조금 어렵긴 하지만 말레비치의 지적이며 동시에 영적인 에너지가 전달되는 것 같구나.
*할아버지가 꼭 보여주고 싶은 서양 명화 101 중
절대주의의 구성 <흰색 위의 흰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