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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북도 박천군 봉성리(구.봉하리)
최재환의 큰아버지가 최용건
(50년 전 라디오 극장에서 나왔었음.)
최용삼의 부친께서는
이름 끝에 (회)자 돌림
최용삼 (이름 가운데 (용(用)자 돌림
최재환 (이름 가운데 (재)자 돌림
(나머지 가족 이름 나이 불분명 )
최재환의 모친은 (안)씨로? 기억됨.
최왈선 (최인혁.최인호 ) 돌림 안씀.
최왈복 (최 지민 ) 돌림 안씀.
(평북 박천 경주최씨 족보가 영구 제명되어 세보나 세거지에 대한 정보가 찾기 어려움.)
남한 어디에도 최재환의 흔적 외에는
가족 (부모.형제)생사를 모름. 하여,
나 최정순은 가물거리는 기억을 여기에
서술함.
호 박천 博川
최정순
2011년 문학공간 등단
시집으로 (하늘의 아버지에게 보내는 시) (홀로 가는 길)
평북 박천이 고향인 아버지 최재환은 일본 유학에 김일성 대학을 다녔다.아버지는 한국동란 때 인민군을 탈영하여 고향에서 미군 통역병을 했다.중공군 춘계 대공격 시 가족 두고 남하하다. 미군을 다시 만나 통역병으로휴전에 들어갔다. 그때부터 가족이 모두 모여 있는 고향은 영영, 갈 수 없는 먼 나라로 나착되고 말았다. 북한에 두고 온 약혼녀와도 만날 수 없었다.아버지는 일본에서 혈혈단신 찾아온 하숙집 주인 딸 가네무라 히지꼬(김절자)와 결혼하여 고향 닮은 아산 설화산 자락에 둥지를 틀었다. 시련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버지 집안은 공산당원이였고, 백부는 북한 고위 실력자였다. 북한으로부터 무슨 조그마한 도발이라도 있으면 아버지는 경찰서에서 살다시피 했다. 고문으로 한쪽 눈을 잃었다. 심신은 망가져가고 있었다. 그러다 암으로 이승을 하직해야했다. 참으로 모진 삶이었다. 현실과 적당히 타협했으면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왜, 그런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카멜레온 같은, 아버지는 가족을 건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틈틈이 책 읽고 시를 썼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경찰서 형사들이 아버지의 다락방을 뒤져 서재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다. 아버지는 책과 비망록, 그리고 시들을 모두 불살랐다. 그것을 보며 허공향해 미친 사람처럼 웃어젖히던 아버지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중년넘긴 나는 아버지 추억을 더듬으며 시들을 썼다. 이 시집은 그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시집을 아버지 영전에 삼가 바친다.
2011년 봄에
글쓴이 최정순 절.
최정순 시인의 시는 분단의 모순 상황에서 민족적 비극의 일면을 극한의 통한으로 리얼하게 투영하고 있다. 이는 민족 분단 비극의 당사자인 아버지를 통해 보다 극명하게 형상화 되고 있다. 여기서 시인에게 그리움의 대상인 아버지는 곧 한국 현대사의 한 맺힌 절규를 떠올리게 한다. 이처런 최정순 시인의 시세계는 개인적 정감을 담아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와 애상의 정서를 자아내고 있다.
─ 최광호 시인의 <서문> 중에서
임진각에서
博川 최정순
음력 원단(元旦),
칼바람 칼춤 추는
임진각 자유의 다리 앞
아버지 영정 들고
서성이는 눈물의 어머니
망부 혼 달래며
자리 떠 날 줄 모르는데
생전 다시 가보지 못한 고향
혼불이나마 마음 놓고 날아가라며
북녘바라기 할 때
방송작가 카메라 앵글 초점
아버지 영정 떠날 줄 몰랐네.
아버지 집안,
공산당 분단 위원장
백부 실력자 손가락 안 들고
학구열 높은 장손 아버지
월반 일본 조기 유학
탄탄대로 거침없었네.
집안끼리 튼 혼사
사랑 알밤처럼 튼실해
이를 시기한 신
전쟁으로 갈라놓고
남과 북 갈 수 없어
전처 그리움 애태웠는데
망자 되어 찾아가니
아버지 알아나 볼까.
간이역
博川 최정순
기차 서지 않는 허공 매달린 역
반세기 넘게 남북 빗장 걸고
딴죽 걸며 지나친 역
독사 까마귀 떼만 들끓는 역
칼날 같은 세월 아버지 머리
흰 눈 내리고 듬선듬성하던
이마저 모두 빠져 버렸다.
오늘도 공중에 매달린
간이역 보며 아버지,
박천 가는 기차 기다린다.
등대
博川 최정순
모진 해풍 홀로 껴안으며
자식들 항해 밝혀주다
해무 속 영원히 갇혀 버린 성
붉은 울음 울다 지쳐
온몸 하얗게 바래지면
누더기 그림자 던져놓고
멀리 떠난 자식들
눈 바라기 하며
홀로 한숨짓는다.
봉린산 심원사
博川 최정순
지금은 갈 수 없는
부친 고향
평북 박천군 산양리
산정(山頂) 바위 봉황새 나래 펴고
아래 너럭바위 기린 목 닮아
봉린산(鳳麟山) 심원사(深源寺)
배흘림 통 굵은 기둥 보광전에
조모 백일기도 스며들어
얻은 부친,
고향바라기 하며 기도할 때
법당 창 쏟아지는 별빛
높새풍 예졔없이 춤추고
야화 성글게 뒹구는 뒤란
목어 홀로 울 적
청천강 새밭 추억
마음 황포 돛배 싣고
서해로 흘러,흘러
꿈에서나 만나네,
봉린산 심원사 조모를.
아버지 고향
博川 최정순
개구멍 없어도
동네 모든 닭 개 고양이
제집 나드는 울바자 밑
참대 숲 뒤 울 안 장독 소 우리
참새 식솔 무리지어 편히 앉는 시골,
아버지 고향일세.
올챙이 쫓는 병아리
호드기 부는 개구쟁이들
홍매화 진달래 개나리 화들짝
모란 난초 살구 꽃 병풍
칡소 워낭소리 울리는 산골짝,
아버지 고향일세.
백두산 혈 받아
대지 정기 챙겨주는 청천강
물 흔한 마을
어름치 금강모치 둑중개
철엽 물장구 재미지던 강가,
아버지 고향일세.
너럭바위 쌓인 옥수수
홀테 호전기 쉼 없는 가을
한 식솔 분주한 가을걷이
기러기 늪가 노닐며
풍작 노래하는 곳,
아버지 고향일세.
먹이 찾아 나선
산악 수리개 푸드득
눈꽃 살금살금 떨어지면
사랑방 모여
고치곶감 무구덩이 무
동치미랭면 먹던 박천 고을,
아버지 고향일세.
아버지 나의 아버지
博川 최정순
(1 )
송공불 밝혀 청천강가 가면
털게 갈댓잎 잡고 그네 타는
평북 박천군 봉하면 전부
경주 최씨 집성촌 대가족
6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지
밭 만 평
논이 한 마을 크기였어.
네 할아버지 산간지역 돌밭
황소 두 마리로 다랑이밭 일구었지
봄이면,
너럭바위에 흙 덮고 감자 고구마 심었어.
가을이면,
네 할머니 콩 한 가마 쑤어 축구공만 한 메주 만들고
큰 항아리 동치미 담았지
겨울이면,
메밀 갈아 바가지 구멍 내려
동치미 국물에 찬 국수 말아먹고
부침이 해먹고
감자떡,수수떡,옥수수떡도 만들어 먹었어.
네 할머니 음식 솜씨 그만이었지
얘야, 오늘도 저 북쪽으로 가 그것들 먹고 싶다
누가 나를 못 가게 하는 것이더냐
( 2 )
일정 때 왜놈 우리 물자 착취 위해 기찻길 만들었어.
네 할아버지 수확한 것 모두 왜놈이 거두어 갔지
네 할머니 소나무 껍질 떡 해먹였어
솜씨 좋아 목화 심어 물레 실 세 겹씩 짜내 양식도 구했지
해방 되자 수확하면 당에서 나와 일일이 세었어.
한 평에 얼마나 거두었나, 따져 정부가 관리했지
뭐 별로 좋은 세월은 아니었어.
그래도 재미있었지
송아지 동무 있어 즐거웠고
청천강 변 소 꼴 먹이던 언덕배기 큰 나무 능 쪽 아래
구럭 던져 놓고 문적 보다
심심하면 황소 풀어 이웃 소와 싸움 시켰지
그때 황 발길질 옆구리 채인 상처 남았단다.
그래도 좋았지
황소 등 올라 청천강 변 나가 물 수제비 뜨고
허리끈 잡고 서로 밀고 잡아당기며
왜놈들 씨름놀이도 했어
그네 잘 타고
나무 잘 타고
산 잘 타서 짐승도 많이 잡았지
얘야, 오늘도 저 북쪽으로 가고 싶다
누가 나를 못 가게 하는 것이더냐
( 3 )
동네 무당 아들 즈네 엄마 돈 잘 번다.
거드름 피워 "곧바로 해라야."
죽살이 두들겨 팼어.
무당이 쫓아와 종 주먹이었지
별명이 호랑이 할아버지
무당 앞에 성난 체 꾸짖다 가버리면
"야 , 잘했다.잘했어, 남자는 그래야 되야."
호탕하게 웃으셨지
얘야, 오늘도 저 북쪽으로 달려가고 싶다
누가 나를 못 가게 하는 것이더냐
( 4 )
중학교부터 일어,러시아어,영어 독학했지
월반으로 조기 졸업하고
분단 위원장 아들이라
김일성대학서 초청장 왔어
그것이 내 배 밑구멍 뚫을 줄이야
그래도 좋아
얘야, 오늘도 저 북쪽으로 날아가고 싶다
누가 나를 못 가게 하는 것이더냐
( 5 )
할아버지 북쪽 하늘 바라보며 늘 그렇게 말씀하셨지
아들아, 딸아, 나는 그때 그 말씀들이 무슨 이야기인지 몰랐어,
할아버지 혼불 되어 북으로 간 지 오래되었는데
내 머리 속에 왜 이렇게 생생히 남아 있지
얘들아, 나도 너희 할아버지 따라 북녘 가고 싶구나.
누가 나를 못 가게 하는 것이더냐
무엇이 나를 못하게 라는 것이더냐
아버지의 겨울
博川 최정순
능구렁이 구불텅 중령 돌아서
삼신三神과 함께 사는 유서 깊은 산골 마을
산등성이 타고 뒤늦게 내려오는 봄 기다리며
동네 초입 치성 칠성나무 새끼줄
오색 헝겊 수많은 염원 달고
나무 붙잡고 헐떡거리는데
햇살 담아 고드름 눈물 뚝뚝, 떨굴 때
마을 사람 아버지 사랑방 모여
붉동나무상 펼쳐 윷놀이 하다
날 저물어 호롱불 속
옛날이야기 도란도란 꽃피우는데
북방 동장군 막는 덧문
낮에도 밤처럼 어두워 윷만 구별할 뿐
밤인지 낮인지 모르고
겨울 끝 하루를 보낸다.
한설
博川 최정순
한설 무렵
평북 박천 봉하리 마을
사나흘 굶긴 매 방울 달아
꿩 사냥 나서면
날 선 동천冬天 선벽鮮碧에
은 이불 덮고 누운 산하
매와 날리는 휘파람
산 허리춤 조카들 그물망 포위
매 꿩 포식 전 방울 소리 듣고
구럭 무게 커져간다.
꿩 깃털 넣어 푹신한 베개 만들고
발갯깃 먹물 뚝뚝 수묵 담채화 치고
꿩 꽁지 잉크 묻혀 쓰던 일기 덭으면
가마솥 꿩뼈 우려낸 국물
김치 꿩고기 다져 넣은
입 안 가득 채우는 주먹 꿩 만두
고향 설 풍경
아버지 이제,함께 하겠지요.
겨울풍경
博川 최정순
산 내천 얼음골
넓은 평야 쌀농사 거두고
층층 밭 잡곡 실어 나르면
밀 옥수수 엿 되고
찰 가루 튀겨 깨 콩 잣 송홧가루 강정
소쿠리마다 배 불룩하고
메밀 도토리 상수리 묵 쑤어
베보자기 깔아 묵판 담아 두면
안 먹어도 배부른데
알궁둥이로 뒹구는 누런 호박 거둬
호박죽 펄펄 끓는 솥으로
다랑이 타고 겨울 오면
먹거리 지천
아버지의 겨울 풍경
아버지의 추억
博川 최정순
평양 학창 시절 참 좋았어.
동쪽 대동강 서쪽 보통강에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지
금수산 을밀봉의 을밀대 모란봉
동쪽 깎아지른 청류벽 위 부벽루
많은 추억 흩뿌리고 다녔지
언제나 다시 가볼까
감은 아버지 눈에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한설
博川 최정순
한설 무렵
평북 박천 봉화리 마을
사나흘 굶긴 매 방울 달아
꿩 사냥 나서면
날 선 冬天 鮮碧에
은 이불 덮고 누운 산하
매와 날리는 휘파람
산 허리춤 조카들 그물망 포위
매 꿩 포식 전 방울소리 듣고
구럭 무게 커져간다.
꿩 깃털 넣어 푹신한 베개 만들고
발갯깃 먹물 뚝뚝 수묵 담채화 치고
꿩 꽁지 잉크 묻혀 쓰던 일기 덮으면
가마솥 꿩 뼈 우려낸 국물
김치 꿩고기 다져 넣은
입 안 가득 채우는 주먹 꿩 만두
고향 설 풍경
아버지 이제, 함께 하겠지요.
아버지의 마지막 수업(1)
博川 최정순
봄 오면
흐드러지게 피는 꽃동네
평북 박천군 봉화리
엄한 할아버지
고풍스런 임하풍미(林下-風味)
빛바랜 검정 두루마기처럼
정갈한 기와지붕 아래
오순도순 정겨운 가족 풍경화
일제 강점기 끝나
허튼 것 없던 시대
열심히 흡입하던 수업
포성(砲聲) 배앓이
숨죽여 살던 아버지
인민군 입대 명령서
집총(執銃) 싫어 숨다
정혼녀 마을 피신하여
돼지우리 안 덤불 속
한 달 숨어 지내다 남행
책보 등에 업고
할머니 챙겨준 전대 허리 묶어
밤을 낮으로 남쪽 능선 따라 발걸음 재촉
비질 총알보다 더 무서운 배고픔
고래 심줄 같이 질긴 목숨
온양 설화산 허벅지에 둥지 틀었다
오전 수업 듣다
받아든 인민군 입영통보
아버지 마지막 수업이었다.
아버지의 마지막 유서에서(1)
博川 최정순
나 있던 박격포 부대 전선에 십 리 는 좋이 떨어져 조금은 안전했지
하지만 사방이 적이요 위험지대였어 싸우다 혼자 되면 포로가 되던
가 복귀하던가. 탈영하던가. 그래야 했지 나 하는 일 적군 동태 알
아내는 것 무기는 무엇이고 언제 후퇴하였는지 그런 것 내가 하와
이 사람과 통한 것 피차 일어 영어 잘 알아 의사소통 가능했던 때
문 속지 말라는 많은 삐라 하늘서 눈처럼 뿌려지는데 중공군 가냘
픈 피리 소리로 국군 마음 들쑤셔 고향 생각나게 하고 한국군 아리
랑 확성기 틀어 중공군 자수하게 했지 장거리 소포에 엎드리고 박
격포 소리에도 엎드리니 양쪽 사격하는 사이로 통과하여 건너편 산
후퇴하라 했어 후퇴하다 숨 가쁘면 시체 덮고 바짝 엎드려 숨 돌리
다 먼저 간 아군 쫓아가려니 때는 늦었네. 이왕 죽을 바에 포복이 무
슨 소용이던가. 비질하는 실탄 속 뛰고 뛰었지 그러다 숨 가쁘면 엎
드려서 쉬다 다시 뛰었지 사람 목숨 길며 짧기도 한 모양이여 전사
한 시체 넘고 넘으면서 마침내 아군 있는 곳 도착하였어. 몇 명 남지
않은 우리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계속 후퇴 거듭했지 전시 군인 식
사 늘 사잣밥 언제 어느 곳 죽을지 모르는 인생이니까 후방 내려 갈
수록 민간인 많이 볼 수 있었지 부모 형제 생각나서 반갑기는커녕
슬픔부터 앞서네. 혼자 살겠다. 배반했다는 죄책감 뜨거운 눈물 지렁
이 되어 꿈틀거리고 아, 나는 누구 위해 싸워야 하며 부모 형제 가슴
에 총부리 겨눠야 하는가. 이 아픔 접고 차라리 죽어 버릴까 갈등도
많았어, 충주 주둔했던 우리 부대 실종 군인 보충시켰는지 다시 이동
했지 차에 올라 바람인 듯 어데로 가는지 알 수 없는 적막강산 어둠 깔
린 밤 부대는 침묵 속에서 전진 중 느닷없이 굉음 신음 소리 정신 가
다듬어 팔 다리 움직여 보니 때는 늦었지 기운 없어지고 정신 흐려져
그냥 엎드렸네. 정신 차려 보니 장호원 병원이었어. 알고 보니 칠흑
같은 밤에 앞길 헷갈려 급경사 언덕 밑으로 굴러 떨어져 차 뒤집히고
실렸던 박격포 실탄 괘짝 우리 덮쳤지. 지나간 인생 돌이켜보니 파
리만도 못한 목숨 힘들었던 사연 생각 하면서 통곡하건만 누가 알아
주겠니. 차라리 저 허공의 달이 되었다면 부모 형제라도 바라보련만
웃는 낯 해후 자위하면서 무덤 없는 붉은 노래 보낸다. 아버님 어머님
'기다리지 마시고 만수무강 하세요.'그리고 난데없는 휴전 휴전선은
철통선이 되고 말았어. 죽어서나 가보려나 그리운 저 북녘 땅.
아버지의 마지막 유서에서(2)
博川 최정순
김일성고지 찾아야 서울 뺏기지 않는 중요한 고지여
바로 이 고지 쟁탈전 시작 되었어 비행기 폭격 동시
박격포 가세 무성히 자랐던 식물 말없이 사라지고 몬
지만 폴싹폴싹 총 한 방 쏘지 않고 김일성 고지 점령
마음 놓고 기뻐할 때 웬 날 벼락 산 중턱 사방에서 공
격 때 이미 늦었네. 북쪽 장거리포 아군 비행기 폭탄 쏟
아 부어 정신없네. 막 대결하며 한 곳 뚫어 목숨 걸고 김
일성고지 후퇴 갱신히 살아났지 그 많던 전사자 중 나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없는 일 병사 보충 돌진 굴마다
수류탄 던지며 김일성고지 재탈환 경천동지 아비규환
어디론가 사라지고 적막감 전쟁 끝나 이제 고향 간다
기쁨 넘쳤는데 하늘의 무슨 뜻이던가. 휴전 돌입 이게
말이 되는 소리던가 이기든 지든 끝 봐야 부모 형제
볼 것 아니던가 유엔군 일본으로 사라지고 갈 곳 없는
이 몸 반겨줄 사람 없는 남으로, 남으로 내려왔지 명절
오면 고향 생각 절로 나 한 맺히니 터질 듯 아픈 가슴
아 누가 알아주랴 술 먹고 나면 왜 나만 외톨일까 눈물
앞 가려 잠 못 이루는 밤 뻐꾹새 슬피 울어 밖에 나오니
보름달만 휘영청 달에 부모 형제 눈물짓고 서 있었지
이런 고달프고 외로운 인생 나만 겪는 일 아니겠지 불효
지은 죄인 몸 쇠약해져 병원 갔더니 웬 날벼락인가 암
진단 받고 보니 더 생각나는 건 부모 형제 눈물만 강을
이루는구나! 병원 침대 누워 과거사 돌이켜 보니 자식
노릇도 아비 노릇도 못한 나 실낱 목숨 하루 하루 지내
며 창문에 뜬 달 보며 고향으로 달려가고 있네.
아버지의 마지막 유서에서(3)
博川 최정순
머리 잔설 내리면
외롭고 슬픈 일
정해진 유한자가
자연에 와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길
희한 얼룩진
돌이킬 수 없는
세월의 강
가슴 속 뭉쳐진
검은 숯덩이 안고
이렇게도
카론의 강
빨리 건너야 하는가.
* 카론의 강 : 죽음의 강, 카론은 죽음의 강을 건너 주는 저승사자.
아직도 전투 중
博川 최정순
북진 몇 번 밀고 올랐다
후퇴 남행, 또 몇 번
전투 중 먹을 것 없어
죽은 사람 주머니 뒤져 먹고
눈을 뭉쳐 먹기도
강원도 계곡
아버지,
사선 넘나들며 배곯을 때
축구공만 한 벌집 벼랑서 떨어졌는데
다른 사람
무섭고 달다 안 먹는 거
벌떼 쫓아내고 독식
목숨 삼줄처럼 질긴 것
아버지,
전투 굶주림 지쳐 잠들어
하얀 할아버지 나타나
지팡이 가리켜 깨어 보니
붉게 빛나는 꽃 한 송이
백년 묵은 산삼 아니던가.
머리 큰 구멍 물 가득하여
꿀맛으로 먹고
며칠 꿈속 헤맸네.
꿈에 가본 고향,
깨어 보니,
아직도 전투 중
아버지의 꿈
博川 최정순
부모 찾아
재 넘고 강 건너
노녘 구름 발치
평북 박천 봉하리 고개
오늘은,
해빙解氷 되어 자식 올까
남풍 바람결 자식 소식 올까
청천강 물결 자식 모습 보일까
부모는 숨죽여 기다리는데
휴전선 독사처럼 누워 혀 날름 이고
독수리 먹구름 속 발톱 치켜세워
아버지 감시하는데,
지뢰 묻힌 무인지대無人地帶에
차가운 겨울비만 주룩주룩 내리네,
아버지 꿈결에서.
아리랑 성냥
博川 최정순
미루나무 작은 막대기 끝
얼싸안은 유황
날아갈 듯 여인의
장고춤 그림 팔각 성냥
전기 없던 시절 집들이 선물
언제나 아버지 동무였다.
논밭 둔덕 쉬며 노녘 바라기 하다
담배 한 개비 유황 하나 부딪히면
담배 연기는 저편으로 사라지고
아버지 콧노래,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나네.
하늘 저 멀리서 들리는 장고 소리
세마치 덩 덩따쿵따
중모리 덩기닥 쿵 따기닥따쿵쿵닥 쿵
허공 가르며 내려치는데,
어깨 들썩들썩 흥겨웁다가
한스러이 흐느끼는 아버지의 콧소리
쉽게 켜지는 가스불처럼
아리랑 팔각 성냥과 함께
아버지 추억 지워질까 두렵다,
아버지의 첨성대
博川 최정순
경주 시내 술병 모양 첨성대 있지
천체 움직임 관찰하던 곳이었어.
하늘 알아 책력 만들어야 명실 공히 천자거든
당나라에 신라 자주국 알리는 쾌거 아니던가.
자갈 황토 섞은 벽돌로
아버지 첨성대 닮은 뒷간 만들었지
동네 사람들 신기한 눈으로 보고
외지인 사진 박으며 설왕설래
마을 사람들 아버지 흉내 내려 하나
번번이 실패했어.
수학 교사하던 아버지
수학 공식 이용한 작품이거든
원통부 구멍으로 바람 나들며 속삭이고
정井자형 꼭대기 북두칠성 환히 웃으니
뒷간에서도 천자가 된
아버지 기분.
누가 알아줄까.
두 여인의 노래
博川 최정순
아버지 고향
박천 봉화리 할머니
호롱불 밤새 바느질
풀 먹인 옷가지
박달나무 방망이
또닥또닥, 또닥또닥
구김살 없이 펴 반드러워
아버지 품새 내려면
다듬이질 마주 앉아
박자 맞춰 노래하며 두드려야 제 맛
아버지 입혀 남으로 보냈다.
온양 거르미 어머니 박달나무 방망이
또닥또닥, 또닥또닥
다듬이질하며 노래
두 여인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우리네 같은 풍속도
접동새 구슬피 우는 달밤
아버지 옷 다듬는
남과 북 공간 허무는
한 많은 두 여인의 소리
아버지 꿈길 밟히어
서둘러 북에 가셨나 보다
설화산 동화
博川 최정순
개암나무 잎 져
설화산 하얀 이불 덮이면
산토끼 잡으러
동네 사람 여럿 올랐지요.
송아지만 한 노루 만났어요.
사람들 추적하다 지쳐 포기하였지요.
아버지 혼자 세 바퀴 돌아
맨 손으로 잡았어요.
동네 노루 잔치 발였지요.
산등성이 토끼풀 많아
소쿠리 차고 나무하는 아버지 따라 나섰지요.
풀꽃 반지 엮어 가며 토끼풀 뜯다
아버지 목에 토끼풀 목거리 걸어 주었어요.
아버지 소년 되어 환하게 웃었지요.
아버지 풀섶 여기저기 튀는
개구리 잡아 졸대 꿰어 집에 가
돌멩이 세 개 세워 불 피워
뒷다리 구워 나에게 주었지요.
내가 먹고, 엄마 먹고, 동생 먹고,
돼지 먹고, 닭도 먹었어요.
우리 집 개구리 잔치 벌였어요.
골짜기 참외밭 너구리
다 파먹는다. 담요 들고
아버지 밭고랑 사이 누워
칠흑의 밤 불침번 섰지요.
사위가 안 보여도
너구리 다가오는 기척과 안광 쫓아
너구리 몽둥이로 때려잡았어요.
동네 너구리 잔치 벌였지요.
황토밭 밤고구마
아버지 호미로 캐내면
졸졸따라 마대자루 담아
50여 자루 가득 채웠어요.
땅거미 지고
노녘 산봉우리 불빛 세 개
왼쪽 중공군,
오른쪽 일본군,
중앙은 미군,
오늘은 그만 싸우자는 휴전의 불
아버지 고구마 잔치 벌이며 나 놀렸지요.
다랑이 밭 파꽃
흰 물결 출렁이던 날
물앵두 다다귀다다귀
빨갛게 익은 가지 꺾어
병석의 아버지 드렸지요.
먹지도 못할 물앵두
봄이 이만큼 익었다고요.
내 아버지에게 해 줄
잔치는 그것뿐이었어요
많은 추억 어쩌라고
준비하지 못한 사별
심심산천 물앵두 익어가며
예제없이 그리우면
아버지 빈자리 무엇으로 채울까요.
그리고 오늘은 무슨 잔치 벌인다지요?
설화산 전설
博川 최정순
개밥바라기 흔들며 수탉 홰치면
산새들새 세수하고 먹는
우듬지 까치밥
이웃집 경운기 일 나갈 채비
인기척 개 짓는 소리
시골 기상음
아궁이 나뭇가지
타닥타닥 타들면
부뚜막 올라앉은 가마솥
소죽 여물 구수하고
어머니 새벽동자 달그락달그락
뒤란 굴뚝 구름 꽃 피워내는데
들깨 참깨 팥 콩 햇살 껍질 투둑,
도리깨 탁! 탁! 탁!
아버지 가을걷이
논들 밭들 사역질 땀 흘려 흙 밟아
대지는 땅거미 까미하고
아버지 등허리 굽어 가는데
시냇물 물길 막아 더위 식히던
부끄러울 것 없었던 벌거숭이 소녀
살사리 하늘거리던 신작로
숫눈길 뽀드득뽀드득
밟는 재미 환장하여
화로 밤 고구마 새까맣게 태웠지
아버지 지게 동바 풀어내
진달래 수줍은 잎 따 먹고
산딸기 새콤달콤 따 먹으며
머루 다래 으름 입 안 가득 따먹고
그럭저럭 보내온 아름다운 세월
열구름인 듯 가뭇없는데
이제 설화산 자락
고샅길 풀섶 헤쳐
찾아 나서면 아버지 없어
그리움 깊어 가는데
풀벌레 소리 애처롭고
주인 잃은 밭 잡초만 무성하다.
참새
博川 최정순
함박눈 밤새 소리 죽여 소복소복
햇살 받아 반짝반짝 보석처럼 빛날 때
참새 무리 먹이 찾아 볏가리 날아들면
재잘재잘 소란스럽다.
Y자 나뭇가지에
넙적 고무줄 새총
살금살금 접근
눈치 챈 참새 도망간다.
참새 날아오는 길목
곡식 뿌려 놓고
삼태기 부지깽이 고여
줄 매어놓고
기다리던 아버지
포르르 날아든 참새들
삼태기에 가뒀다.
구어 먹고 볶아 먹던
아버지처럼 고소한 참새의 맛
지금은 어디론가 날아가고 없다.
아버지의 망향가(1 )
博川 최정순
눈 시린 가을 하늘
적단풍 선혈처럼 붉고
금파(金波) 물결 들녘 수놓을 제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
임진강 변 통기타 튕기며
북쪽 하늘 바라보고
노래 부르는 사람 있었네.
아버지 예전 모습
같아 너무 반가웠지
통한(痛恨)의 가락
바람결 가물가물 흩어져
북으로, 북으로 흘러가는
또 다른 아버지 망향가.
아버지의 망향가(2)
博川 최정순
태천군 연변군 운전군
둘러싸인
평안북도 박천 땅
청천강 대령강 하류
충적평야 넓게 이루고
청천강 대령강
얼싸안고 서해로 흘러드니
먹고 살기 어려움 없었네.
청룡산 봉린산 수리산 사이
강냉이 익어 가는 마을
긴 돌담 이어진 고샅길 정겨워
고향으로, 고향으로
달려가던 아버지 눈길.
파도
博川 최정순
억겁을 사납게 몰려들어
물 부수고 바위 깨는 파도야
어미 품에서 갈라져 나온
몽돌 부수지 마라
너한테 지지 않으려
둥글게 살고 있지 않냐
세월의 파도에
고개 숙인 아버지.
물고기
博川 최정순
망망대해 유람하다
황망간 어부 그물 들어
유리 상자 갇힌 신세
다른 물고기에 지느러미 잘리고
비늘 기계총처럼 여기저기 뜯겼구나.
도마 위 흩어진 살점들
혀 날름이는 기름통 튀겨져
한갓 식도락가 입에 들 것
너의 이념이 무엇이든
너의 사상이 무엇이든
대가리 하나에 먹물 눈 둘 남아
너 닮은 아버지
한스럽게 쳐다보네.
임진강에서
博川 최정순
남북 바다
자유롭게 유영하다
임진강 들려 깜박 졸던
그물 따라 올라온 황복
회 치고 끓여 놓아
소주 곁들이는 아버지
솜털구름
강 위 둥실 떠가다
아버지 보고 눈짓한다.
강 이편저편 떠돌며
자유롭게 활주하던 물새
아버지에 손짓한다.
자신들과
어서 북녘 고향 가자고
아버지 술 잔 놓고
강 위 물상들만 멀거니 바라본다.
청천강 변
博川 최정순
찔레꽃 향기 대지 흠뻑 적시고
고향 그리움 가슴 가득 메우면
종달새 하늘 땅 한恨 소식 전하며
천지간 넘나들어 가슴앓이 하고
보리 물결 바람에 하늘하늘 춤출 때
보리 알곡처럼 익어 가는 그리움
살며시 다가와 눈에 잡히면
아버지 고향,
청천강 변으로
구름만 바람 따라 잘도 흘러간다.
겨울밤
博川 최정순
꼬리 없을 것 같은 긴 겨울밤
자유 찾아 와,
감옥 아닌,
감옥 갇힌 아버지
이북 고향 부모 형제 그리움
잊기에 버리기에 너무 마음 쓰라려
눈물 펑펑 쏟으며 처연한 달빛만 보다
고향에서 먹던
절구에 찹쌀 찧어
손바닥만 한 떡 채반 말렸다가
가마솥 참기름 튀겨 자식들 먹였다
사르륵사르륵, 눈 내리는 밤에.
해금강
博川 최정순
사자바위 천년 송 사이
일출 황금빛 내던지면
단잠 깨는 장생포 앞바다
해풍 간질이면 아기섬 웃고
언덕 위 풍차 기지개 켜는데
수억 년 버틴 십자동굴
바닷물 들락날락 사통하고
신선 내려와 놀던 신선대
괭이갈매기 아우성
고향 떠난,
아버지의 배따라기들.
비망록
博川 최정순
아버지 비망록 넘치는 낱말
평북, 박천군, 청천강 변, 어머니
소쩍새 울음보다 애절한데
웃고 울면서 써 내려가
낱장마다 스며 있는 복장 터지는 농담들
가슴에 비수 되어 칼질하고
아버지 그리며 골짜기 헤매는 마음
기댈 곳 없으니
설화산 기슭 초승달만 외롭다.
아버지의 산
博川 최정순
당신 얼굴 표정 없어
아픔 가신 줄 알았는데
가슴 깊이 패여 눈물 흐르고
산짐승 배설물 가득하네
원줄기 그리워 가슴앓이 하는데
멧부리 튀어 떨어져 나간 자식들
아버지 마음 모르고 저마다 잘나 사는데
산은 매일 허물어지고 갈라져
시체처럼 눕는다,
진남포항
博川 최정순
어둠 팔 벌려
평택항 감싸 안고
살진 보름달빛 흩뿌리면
화물 운반 크레인 잠들고
중국 가는 여객선 닻 올리면
봄날 고양이처럼
사위 잠들어 가고
가로등 긴 그림자 끝
누운 박천 고향 추억
아버지 마음 배에 실어
진남포향으로
동풍에 푸른 돛 달고
이물 돌려 달려가네.
구름
博川 최정순
바람결 쫓기고 쫓겨 어디론가
휘청거리며 흘러가는 먹구름
폭풍에 갈기갈기 찢긴 몸뚱아리
팔다리 한 맺힌 무서리 내려
석류알처럼 벌겋게 충혈 된 가슴
다독여 어루만지며
나그네 혼불 되어
북녘 고향 찾아 간다오.
춘난(春蘭)
博川 최정순
척박한 고산지대
바위틈서 날아와
봄이면 산기슭 양지에
분홍과 흰색으로
인생의 출발을 알리는 너
평북 박천 땅 떠나
인생의 숲 길 잃어
넘어지고 자빠지며 산 삶
살아남기 위해
격렬한 파도에 맞서고
뒤틀린 소음 털어내다
분노로 바뀌면
너를 보며
아버지는,
늘 인생을 새로 시작했다.
탁족만리(濯足萬里)
博川 최정순
사선 넘고 넘어
다시 사선 오가며
설화산 계곡
발 담그고
표표한 마음으로
아버지는 말씀하셨지요.
천 길 벼랑 위 옷깃 떨치고
만리 흐르는 냇물 발 씻노라
유월 초하루
천하 덮는 햇살
흰배추나비 표표히 날고
대지는 현현히 고양되어
양기가 천지간 충만한데
선거 앞둔 세상
선거만큼 어지럽고
날씨는 무더워
세숫대야 찬물 발 담그고
아버지 탁족만리(濯足萬里)
다시 배우네.
무창포
博川 최정순
기차 타고 웅천 내려
시내버스 타거나
변산반도 옆구리 간질이며
21번국도 달리다 보면
개양할미 서해바다 선물
석대도 열림 길
사대주의자들
모세 기적이니 뭐니
떠들어 대는 열림 길 만난다.
밀물 썰물 따라 여닫는 길
학망 중 제길 잃어
독살에 갇힌 망둥어
눈 크게 뜨고 숨만 헐떡헐떡
국방군 인민군 조류에
갇힌 신세 망둥어 비슷하다
썰물에 언제나 저 휴전선 열릴까
아버지,
무창포에서 손꼽아 기다린다.
대왕암
博川 최정순
아버지 함께 떠난 여행
신라 왕릉 집결처 경주 시내
한참 떨어진 외로운 대왕암
보문 지나 해 맞으러 가보니
황금빛 해무海霧 가득한데
문무왕 누운 황금빛 암석岩石
갈매기 황금빛으로 날고
심문왕 만든 동해 배수로
장방형 우물엔
감은사지 둥실 떠 있다.
아버지 잃어버린 고향과 함께.
아버지의 유서(遺書)(1 )
博川 최정순
아버지 유서 쓰려고
어머니 볼펜과 종이를 건넸어.
움푹 패인 두 눈에
생기 잃은 동공이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하네.
당신의 인생이 통한이기에 몇 자 쓰다가
애면글면 손을 쉬기도 여러 번
오자가 많아지면 어머니 고쳐주기도 여러 번...,
애써 태연한 척 지켜보자니 가슴 아린다
분위기 바꾸려 헛말을 늘어놓지만
애별리고(愛別離苦)의 절필은 비수(悲愁)의 덩어리
당신의 부모님께 크나큰 불효자식임을 통념한다.
그런 당신 옆에서 순연해져 눈길 둘 곳 없다.
부모 자식 간의 인연은 천륜이라
철없이 굴었던 일들 자꾸 커진다.
사후에 자식들 구순히 지내라 당부한다.
홀로 남은 어머니 귀찮아도
안부 자주하고 비싼 것 안 사줘도 좋으니
소홀함이 없이 종종 들리란다.
유서 몇 자 쓰다가 흐르는 눈물
눈치 없이 글자를 흐려놓아서
어제도 그제도 쓰다가
알게 모르게 흐르는 눈물이 앞을 가려
다 못쓴 유서"여보, 오늘도 우느라 그럴 거면 차라리
쓰지 말자"고 어머니 안쓰러워하네.
그래도 써야지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표현"인데.
당신 마누라님 자식들에게 홀대 받을까 봐
재산 정리해 준다며
마누라님 앞으로 사는 집 명의 해준단다.
한 끼 라면으로 때울지언정
두 다리 쭉 뻗고 편히 잠잘 집이니
"혹여 그런 일은 없겠지만" 만의 하나
집은 처분하지 말라는 당부다.
농사를 짓지 못하니 사용 안 하는 농기구
알아서 처분하고
몸이 아프니 "평소 알아서 약 먹는 것 거르지 말라"
나 없어도 약 잘 챙겨 먹으란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멀건 한 곡기는 사잣밥이라 말하는 아버지
차마 눈 둘 길 없어 짐짓 고개 돌린다.
하늘도 회색빛이다.
기다림
博川 최정순
고향 잃고 타향 터 잡아
고통 점철된 어려운 삶
말술 줄담배 허파 정상인 삼분의 일
보호막 얇아져 암세포 활개 치나
농사꾼 정신으로 산
일본 유학생 김일성대학 졸업생
결장암 덩어리 떼 내고 삼 년
아버지 대소변 받아내며
지병 자심한
어머니 조각 잠자는데
자식들 저마다 핑계 있어
고향 오지 않고
두 노인네 고생 깊어 가는데
며칠 한 번 어쩌다 자식들 전화만
말하기 힘들어 반가운 눈물만 어리는데
어머니 퉁바리, 울긴 왜 울어
아버지 아무 말 없이 송수화기 내려놓고
눈물 글썽여 방문 열어 달라며,
"우리 애들 아직도 안 오나?"
망향초(望鄕草)
博川 최정순
일죽 유토피아
아버지 안치하고
오는 길섶
모질고 척박한 땅
무더기 지어 피는
아버지 닮은 흰 망초꽃
황금빛 놀에 환하게 웃고 있네.
누구를 탓하랴
그저 세월이 그랬던 것
너도 가족과 이별하고
바람결 묻어와
이 강산 수많은 사연 흩날리며
청천강서 설화산 거쳐
아버지 따라 일죽까지 오지 않았더냐.
순결한 학의 삶으로
길가에 조용히 누워
바람 따라 잔잔히 물결치며
미소 짓는 망초 꽃
흰옷 즐겨 입고 늘 웃으시던
아버지 닮았구나.
너를 망향초라 부르리라
어머니
博川 최정순
꿈자리 사납다 꼭두새벽 납골당
눈 속 헤쳐 다녀온 어머니
겨울밤처럼 지루한 삶 한탄하며
혼자 덩그러니 앉아 소쩍새 울음
아버지 좋아하던 원두커피
영정 사진 앞 두 잔 놓고
그리움 타 모두 홀짝홀짝 들이켜도
눈앞 가시지 않는 망자 추억
아버지 소매 붙잡고 가고픈 어머니
종일 영정 사진만 보고 있다.
아버지의 영정 사진
博川 최정순
봄, 어머니
여행 길 나서는데
천추의 한 맺힌
영정 사진 따라나서
나란히, 나란히
진달래 핀 산길 걸어가네.
너무 다정하여
사람마다 물었지
"누구예요?"
어머니 웃으며 답했어.
"내 신랑이야!"
사각 틀 속 아버지
웃고만 있었지
사람들,
"할머니 놀이 오는데
할아버지도 왔군요."
라고, 말했어.
아버지 미소 지으며
돌아섰지
항용 마음 밭에 계시는
아버지 오늘도 웃고 있네.
노안도(蘆雁圖)
博川 최정순
눈 덮인 겨울
물가 갈대밭 기러기 한 쌍
모안(母雁) 자는 머리맡
부안(父雁) 영정 사진에는
보리밥 시금치국
귤 하나 초코파이 둘
늘 조촐하다
부안 영혼 먹고 남은 것
모안 먹다 울면
부안도 영정 속에서 운다.
상주해수욕장
博川 최정순
아버지 영정 안고
추억 따라
어머니 남해 끝
상주해수욕장 찾아왔는데
허리통 굵은 해송 사이
사지 활짝 벌리고
누워 있는 바다엔
낮이면 갈매기
옛 추억 찾아 활공하고
나래 접어 은모래와 속살거리다
밤이면 초승달에 숨죽이네.
아버지 동행했을 때도 그랬지
오늘도,
그리움 지친 어머니
눈물 감추려
바닷물에 몸 담근다.
붉은 벽돌집 성당
博川 최정순
평택서 삼팔국도 타고
승용차 는적는적 달리다 보면
장호원 터미널 지나
다리 건너
왼쪽 산 아래
선혈처럼 붉은 큰 벽돌집 성당
어머니,
손가락 허공 푹, 찌르며
네 아버지 말한 교회야
전쟁 때,
공산군 점령 연합군 점령
이쪽저쪽 총탄 수난 겪어
피로 얼룩진 성당인데
그 아픔 하늘에 알리려
십자가 높이 매달아
아직도 피 철철 흘리며
철탑 뾰족하게 일어서 있다고.
군항제에 내리는 꽃비
博川 최정순
벚꽃 질 무렵
진해 군항제 오니
꽃비가 폭포로 쏟아지는데
생전에 함께 왔던 날도 그랬지요,
아버지.
꽃비에
당신 사랑의 편린들
번뜩거려 정겹게 보이네요,
아버지.
갑자기 부는 사나운 바람
꽃비는 강물 되어 흘러가고
당신의 모습도 멀리멀리 흘러가네요,
아버지.
한밝뫼
博川 최정순
아이슬란드 화산 폭발 0.1㎦ 화산재
유럽 항공대란 일어났는데
먼 옛날 한밝뫼(白頭山) 화산 폭발
10배나 100배 넘는다,
전문가 분석 있었지
발해 거란에 멸망한 것
한밝뫼 대폭발 때문
원귀만 늘어 갔었고
오늘도 이산가족 한밝뫼 주변
원혼으로 떠돌다
하늘 못(천지天池) 고여
20억t 물 되었네.
전쟁 상흔 안고 살다
죽은 수많은 눈물
어찌 아버지뿐이랴
답 없는 탁상공론 뱀 떼 출몰하고
원귀 마그마 되어 오늘도
한밝뫼가
소리 없이 대폭발한다.
천안 함
博川 최정순
번개와 천둥, 폭우 속
격랑의 세월
참혹하게 파괴된 과거를 안고
벌거벗은 몸뚱아리로 우뚝 섰다는데
참혹하게 파괴된 잿더미에서
세상은 발전인지 퇴보인지
검은 세월 혼란만 가증되고
우리의 뇌리에서 지워져 가는 전쟁
아버지의 머릿속
해마다 6월이면
악령처럼 되살아나는데
분단을 잊는 세대
아니, 잊게 만드는 정치 술수에
아버지처럼 땅으로 잦아드는
오늘과 내일의 수 많은 목숨들
아버지처럼.
죽어서 갈 곳 없는 구천의 영혼들이여!
알밤
博川 최정순
대수술 받은 이듬해
거동 순조롭다며
뒷산 올라 버섯 따고
밤 주워 가루 만들어
손수,
전 부치고
수제비 뜨고
튀김 만들어
몸 좋아진 것 같아 좋아하면서
철없이 먹어치운 불효자식
저승길 마지막 선물이었네
산길 지나다
떨어진 아람 밤송이 보니
아버지 생각에
차마 줍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네.
아버지에게 가족사진을 바치며,
博川 최정순
당신의 정원
대대로 내려온 그것,
각종 꽃들 만발하고
수목 울창하여
훌륭했지요.
남과 북,
미군과 중공군의 대포,
정원 초토화되고
사선 넘어,
남으로, 남으로
죽은 듯 흘러들었지요.
당신은 일본 대학 가봤고,
김일성대학에도 가봤잖아요.
그런 당신이,
무지렁이 터 잡아 사는
초야의 집성촌락
설화산 기슭 똬리 틀고,
가족 위해 숨죽이며
다시 일군 정원 아니던가요.
매일 찾아드는 검정양복들,
틈만 나면 부르던 전갈 독사들,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나요.
주름의 강 건너
저승꽃 피우던 만년
다시 당신의 정원은 벌레 먹었네요.
저녁이면 북녘 바라보며
망향가 지어 불렀던 당신,
이제 가슴에 맺힌 한 모두 버리셨나요.
안성 유토피아 추모관,
아직도 혼자인 당신 영정 안타까워
여기 딸, 가족 모두 모인 사진
가져다 옆에 나란히 놓습니다.
당신과 함께, 당신 북의 고향, 가기 위해.
아버지의 그림자
博川 최정순
이유 없는
그리움이
뭔지 알아질까.
오래 묵힌
뒤돌아선 그림자
곰삭아져
툭! 떨어진
그리움 하나
있다.
그것은 아버지
시인의 말
절실히 살아가는 삶의 길목에서 비 맞은 낙엽처럼 추운 인생을 떨구며 잃어버린 인연을 찾아 詩를 쓴다
언제나 내 마지막의 언어를 기억하며 詩集을 내어 놓는다.
2015년 사월에
글쓴이 최정순
사랑
博川 최정순
꽃 시들었다고 함부로 말하지 마라
몸은 죽어 가도 향기는 남는 것
눈 감을 때까지 온전한 생명체인 것을.
당신
博川 최정순
둘레둘레 사위 살펴보아도
지금은 당신의 모습 없어
매순간 포개지는 슬픈 음조들
햇살에 반짝이는 풀잎
바람과 소근거리는 나뭇잎
의자 몸 길게 펴 누워 있는 길목
계절이 바뀌고 바뀌어도
당신은 변함없이
그곳에서 오롯이 웃고 있는데
갈색 마음의 여백 채우고 채우면
성큼성큼 달려와 줄 것만 같은
향기롭고 상큼한 당신은
욕망의 잔혹한 묘사 비밀스레 그리다
조각조각 맞추는 능란하고 능란한 붓질
내 마음의 붉은 종피種皮 속
알알이 폭죽처럼 터트린다.
님
博川 최정순
터지고 찢긴 영혼 감싸 주며
사랑하고 미워하더니
오늘도 뜨겁고 차가운 정
가득 담은 사연 접었다 폈다
당신은 이 꽃 저 꽃
찾아 나는 한 마리 나비던가요
이제 그만 날개 접고
내 그늘에서 쉬세요.
님의 뒷모습
博川 최정순
까닭 없이 그리운 사람이여
세월 앞에 등 떠밀려도
까닭 없이 보고프네
칡넝쿨인가 어울더울
내 몸과 마음으로 파고들어
찬란한 보석 빛깔 만들었던
눈부신 그리운 사람아,
흔적 없이 내밀히 물들어 가는
아픈 사랑이었더구나!
이별
博川 최정순
구름 벗고
살그머니 다가와
향기로운 입맞춤 남긴 당신
먹구름 쌓여
얼굴 감추더니
뇌우雷雨 깊은 상처 주고
구멍 난
내 가슴 깊이
대못 하나 쾅, 박고 떠나가네.
너
博川 최정순
늘 부대끼며 살아도 알지 못하듯
서로 간 살길 찾아 무심할 때
나 위해 두 발 포근히 감싸 주었어
내가 어디를 가거나
긴긴 날 병상에 누워 있을 때
늘 곁에서 위로해 주었지
어느 섬 모퉁이 돌아가거나
산비탈 억센 길 팍팍하게 오를 때
아무 조건 없이 옆에서 지켜 주었어
내 얼굴 파도 같은 주름살 늘고
흰 백발 서리처럼 내릴 때에도
나 위하여 늙은 몸뚱이 된 너였지
씻기는 은하의 별무리 찾아 떠나면
눈 시린 아침 파란 편지 빼곡히 쓰고
나는 수줍은 새색씨처럼 반겨 했었어.
6월의 노래
博川 최정순
고열로 뒤척이던 길고 긴 밤 갈 때
밤하늘 수놓던 별 부풀어 터지고
아침 햇살 병실 가득 툭툭 던져
창문 활짝 열고 밖을 보니
찔레꽃 아카시 꽃 물푸레나무 꽃
하얗게 하얗게 웃고 있는 길
그래, 저 길 어느 즈음이던가
저렇게 웃고 살던 내가 있었지
청옥빛으로 활개 치며 붓질하던
덜 익어 풋풋한 내가 있었지
알 수 없는 아릿한 그리움에
발목 하얗게 적시고
어머니 젖무덤 같은 동산 서면
농부 희망 심어 놓은 연초록 진영
빈 논물 채우듯 나는
죽어 가는 육신 영혼 채워야지
몸은 6월 향기 잃어 갔어도
하얗게 하얗게 웃으며 살아야만 하지.
여로 (旅路)
博川 최정순
땅 끝에서
또 다른 땅 끝
잃은 것 어느 하나
메울 길 없는 마음으로
여명黎明의 새벽길 허청이며 달려
청갈치빛 서늘한 하늘에
이별의 필무가筆舞歌 튕기우며
헐떡이며 울렁거리는 가슴
흰 보자기 가득 담아 두고
서먹하게 서먹하게
모두를 잃고
모두를 얻으러
다시 가야만 하는 발길
나그네 족적足跡.
회자정리(會者定離)
博川 최정순
푸른 옷 걸치고 팔다리 활짝 편
나무 겨드랑이 튼 축구공 둥지
음습한 자궁 박차고 나온 어린 새
밝은 세상 노래 불러 찬미하며
어미 물어다 주는 음식 받아먹고
날마다 날갯짓 익혀 어미 사냥 배워
세상 온 몫 하려다 천적 물려
어미 가슴속 먹구름 물들이다
겨드랑이 피멍 들며 폭우 속 날아가면
어미 새 낙엽 위 주둥이로
장문의 작별 편지 쓴다.
세월의 강 (1)
博川 최정순
대기 중 부유하는 먼지만큼이나
많고 많은 상처 속으로 잠재우며
야속히 흘러가는 세월의 강물
처연한 마음으로 뒤돌아보니
삶 다독여 주던 하많은 사람들
강물 따라 속절없이 흘러가고
이제는 추억으로만 남았네
그리운 마음 고독이 덮어 버리며
무심천無心川 따라 굽이굽이 흘러가니
가슴 가득 졸밋졸밋 저려 오는 아픔
저 멀리 흘러가네.
세월의 강 (2)
博川 최정순
지천명 넘도록
가슴에 묻은
비밀 한 올 한 올 풀어
내가 살아온 만큼의 황금빛 빛나는
등신불로 경건히 단장하려 했던 강
상수上壽 못 누릴 바
쉬었다 흘러도 좋으련만
저 혼자 불길 태우고 태워
꿈꾸는 기암단애 에돌고
수문 머물러 지친 몸 뒤척이다
바다로 스며들어 작별하니
지나온 길이 하나, 하나 그립구나.
쌈지골목
博川 최정순
우리네 전통 거리 인사동
수많은 골동품 수예품 미술품
눈으로 손으로 이어진 고아한 맵시
골목골목 화려하고 찬란한
꽃으로 만발하였었지
외국인들마저 눈에 불을 켜고
끊임없이 소리 높여 감탄하던 곳
무계획 무차별 신개발
사랑방 터전 허물어져
세월의 칼날 팔다리 잘려 나가고
액세서리 잡화점만 매소부처럼 늘어섰네
주머니 골목이라 쌈지 골목
명맥의 맥박만 겨우 헐떡이며
오가는 사람 처량한 눈길 주니
나이 들어 내침 당하는 나의 모습 같아
애처롭기 그지없네.
축시
博川 최정순
금강의 빛나는 든든한 나의 아들
오늘 소중히 맺어진 물오름 달
환한 인연 꽃 폭죽처럼 터뜨려
서로 서로에 기둥 되어 의지하고
서로 서로에 지붕 되어 덮어 주며
끊임없이 샘솟는 새물뿌리 되어
험난한 파도와 골짜기
외눈박이 비목어比目魚처럼
둘이서 서로의 눈으로
영겁永劫의 세월 멈춤 없이
외날개 비익조比翼鳥처럼
함께 서로의 날개 되어
이제 두 사람 한몸 약속하였으니
천년 한결같은 연리지連理枝로
항상 서로의 반쪽으로
사로思路 언로言路 소통
자기 수련 통해 마음 비움 배우고
매사 서로 보탬 되는 지혜 찾아
인생살이 여러 갈래 있으나
길이 아니면 가지 말고
늘 서로 배려하는 동행되어라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며늘아,
항상 더 높은 곳을 향해 약진하며
건강하고 행복해 다오.
나의 쉼터에서
博川 최정순
세파에 허우적거리다 찾은
자연지형 살린 친환경 별똥카페
녹슬어 흑석 같은 외벽에
사위가 컴컴하여 그냥 산속
화전민 소원하던 성황당
전통 민속 공연장
설치작가 규화목
세월의 검은 이불 덮었네
잔별 무리 져 나무지붕 아래 쏟아지고
반딧불이 박꽃 주위 원무하는데
아득한 산골짜기 계곡 물소리 청아하여
돌계단 따라 야트막한 공원 오르니
저 멀리 의림지엔
월신月神이 은가비 소요하고
신선이 잠자는 원시림 속
피톤치드 세로토닌 음이온
폐부 깊숙이 들이마셨다 내뱉으며
세속의 앙금 말끔히 씻어내니
내 잠자는 육신에서 날아오르는 새
요부의 춤사위처럼
현란한 오색 형광 폭포수에 춤추다
눈 먼 어리석은 이슬 되어 내 찻잔에 빠진다.
풍속도
博川 최정순
오늘을 사는 우리
민속설 연휴 맞아
콘도 놀러가 인터넷 주문 제상
술 취한 가족들 꽃 멍게 얼굴로
오가는 욕설 끝 주먹다짐
위아래도 장손도 장남도
위계질서 무너지고
우리의 설 간 곳 없는데
준비해 간 영정들
자손 내려다보며
이제부터 뼈대 족보 일 없으니
바람 따라 구름 따라
너희 마음대로 살아라
눈망울 툭, 튀어나오네.
홀로 가는 길
博川 최정순
어느 닭 울던 날 새벽
빈손 울음 터트리며 세상 움켜쥐고
종달새 짝 찾아 하늘 교감하는 벌판 넘어
독사 대가리 치켜들어 독 품는 골짜기 지나
벌 나비 향기롭게 춤추는 장미 정원 가로질러
달 별 꽁꽁 어는 극지방 어둠 서성이다
지천명 고개 허위허위 올라 보니
저 멀리 이순 고개 운무雲霧 쌓여 아득한데
바위 달린 팍팍한 무거운 발걸음
오르다 뒤돌아보니 외로움만 길게 누워 있네
진애塵埃 고개마다 돌아보면 혼자인데
폭풍한설 사지 동강나며 위태위태 걸어온 길
저 고개는 또, 누구와 함께 갈까.
말
博川 최정순
눈에 보이는 것
다가 아니듯
입 뛰쳐나간 게
다는 아니지
아름다운 향기 품은
입바른 꽃잎들
거센 바람에 흩어지듯
허공에 뿌려지는 수많은 말
피지 못한 꽃
몽우리 터져 죽은 기억
가지야, 너는 아는가
뿌리야, 너는 그 슬픔 아는가
생각의 가지 마음의 뿌리
인고의 계절 견디며 너희들,
화신花神 만나 순리 배워
말의 꽃을 피워라.
성황목(城隍木)
博川 최정순
제주도 한라산 둘레길
구불텅 팍팍한 길
몸집 큰 성황당에
삼백 년 묵은 느티나무 고목
버팀대 몸 의지하여
벌거벗고 찬바람 견디며 섰는데
사람들 정성 사연 엮인 헝겁
바람결 저마다 한들한들 춤추며
가지에서 오방색으로 웃고 있네
북풍한설 의연히 다 보내고
가슴속 샘솟는 불꽃
몸통 통과하여 손발 찌르니
꿈으로 피어나네,
새파란 새순.
나비
博川 최정순
멀고 먼 고향 소식 그리워
화선지 앉은 너의 모습
붓길의 물감 마르기 전
핏빛 목단 사방에 덧깔면
꽃처럼 하늘하늘 여울지는
가는 봄의 설운 상념들
텅 빈 공백에 흩뿌리운다
그리움 가득 묻은 호수
저어 오는 작은 조각배 벗처럼
따뜻한 봄바람 되어 화선지
옷 주섬주섬 입혀 주니
거친 파도 갇힌 질긴 인연들일랑
싸늘한 빛에 모두 묻어 버리고
너는 홀로 고독한 혼 되어
하늘로 하늘로 날아오르는구나.
모란
博川 최정순
태백산맥 준령 넘어
비탈길 따라 내려오던
뜨겁고 칼칼한 풍염風炎의 이향異香
대지 가슴 사무치게 붉어지며
그리움만 차곡차곡 쌓이고 쌓이는데
부질없이 붉어진 고개 떨구니
나 두고 가는 급한 바람
잠시 더 쉬어 가면 좋으련만.
민들레
博川 최정순
임진강변 철조망 날아가
싹 틔운 눈부시게 아름답고
매력적인 꽃 아니더라도
다소곳이 고개 숙이고
북녘 향해 북바라기하며
피어나는 외줄기 그리움
매일 새로이 꽃을 피우며
개화開花의 아픔에
눈물 흘리며
잔잔히 미소 짓는
철조망의 민들레.
佛心
박천 최정순
부처님 오신 날
마을 산속 절 가보니
구름처럼 모여든 많은 인파
수행정진 관음보살 불심佛心 아니어도
빈자貧者의 소박한 축원 한 자락
사해四海 처처處處 부처님 자비 얻고자
기와불사起臥佛事 시주 소원 성취 기원하네
부처님 찾아 지붕 올라가려다
복 짓지 못하고 모질게 산산조각
처참히 부서져 나뒹구는 무더기
공양물 용처用處 죽어 버린 기와들
이리저리 구석구석 처박혀
발에 밟히고 밟혀도 불심佛心 아니던가.
두견새
博川 최정순
님의 숲에서
목 터져라 피 토하며 우는 밤
한때 걸쳤던 진주홍빛 옷 벗고
벌집처럼 시커멓게 구멍 난 시간들
주체할 길 어찌할 길 없어
튼실한 이음줄로 지배했던
지난날의 특별함 속으로
걸망 하나 둘러메고 날아가니
버리고 싶지 않은 수많은 단상들
오로지 너 향하던 님의 선연한 눈빛
어디에도 꼬리 감췄네
무섭게 몰려드는 갈증 떨치려
이슬에 술 타 마시는 밤
눈물의 꽃가람에 홀로 닻 내리고
저 멀리 멀어진 님의 곁 그리워
목이 타도록 너는,
울고 울더라.
망부석
博川 최정순
삭풍 해송림 붙잡고
징징 울어 대는
인적 끊긴 안면도 꽃지 해변
허위허위 달려가니
백사장 갈매기 한가롭고
할매바위 할배바위
서로 그리워 눈물 짓고 있네
표표히 먼 길 떠난 님
해무 갇힌 질곡의 장구한 세월
못다 한 정情 모래 위 쌓고 쌓으니
된바람 달려들어 흩어 놓고
사무치게 헤적이다 어디론가 날아갔네
할배 그리워
밤이면 빈 가슴 달빛 먹고
올동백 피눈물 뚝뚝 흘리다
바위로 환생하여 수평선 바라보니
님 망망대해 건너와 곁에 섰네
할매 할배 망부석
발치 아래 뿌리내린 천년송千年松
할매 할배 굽어보며
길고 긴 세월 감싸 안고 있다.
구름꽃
博川 최정순
하늘에 덩실덩실 떠 있는
터질 듯 부풀은 구름
타래마다 사랑 행복 희망 담고
하늘하늘 몽실몽실
날이면 날마다
여기저기 정처 없이 떠다니다
억겁의 인연 찾아
오늘도 서로 어울리는데
저 하늘 집이던가 고향이던가.
청옥처럼 푸른 하늘의 하얀 꽃밭
해 서편 바다 빠질 무렵
붉은 구름꽃 활짝 만발한다.
구름과 나
博川 최정순
하늘이 제 집이라서
바람결 주춤주춤 흘러와
계곡 어느 외딴집
지붕 위 잠시 머물다
장독대 항아리 속
간장에 헤엄치며 놀다
물수제비 뜨는 개구쟁이
눈 속에 머문다
내 마음도 구름 같아
바람 부는 대로 이리저리
정처 없이 흘러 다니다가
어느 날 무심히 돌아선
당신의 그림자에 내려앉는다.
야생화
博川 최정순
멀고 깊은 산길
명지바람 흔들리는 잡목 사이
너 고개 숙여 수줍은 미소 짓는데
잠깐 고개 숙여
이름 없는 너를 보며
제자리 종종 돌다
황망히 네 자리 떠나며
등 돌려 뒤돌아보니
아주 오래전
알았던 사람이던가 싶어
가던 걸음 멈추고
쉬이 못 가네.
이름 없는 들꽃에게
博川 최정순
천둥 비바람과 싸우며
날밤 새워 낙화 위해 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름 없는 너
독기 어린 향기 품고
찬 이슬에 고개 숙이다
서리 맞아 떨어진다고
가슴 뜯으며 울지 마라
누군가의 발길질
어느 누가 던진 돌
머리통 산산이 깨어져도
너 사랑하는 나 있고
너의 씨 산화하여
새 봄 맞으면
사지 넓게 펴고 활짝 웃으며
이 산 저 산 향기 가득하리라.
막걸리
博川 최정순
우리 전통 명주 막걸리
막 걸러 탁하고 볼품없지만
영양 많고 암 덩어리까지 제압한다는데
부지간 슬그머니 틈입한
일본주 중국주 구미주에
설 자리 잃고 저 멀리 떨어져 서성이네
내 불쌍히 여겨
목로 차려진 탁사발에
희뿌연 막걸리 하강시켜 들이켜고
불콰해진 노을빛 얼굴로
태평가 한 대목 멋들어지게 부르니
천국이 따로 없네.
파초
博川 최정순
고향 멀리 떠나 반그늘지고 습기 많은 땅
뿌리 줄기 잎 밑동 감싸 헛 줄기 이루고
연노란 꽃 여름 가을 두 줄로 나란히 펴
장관 이뤄 기세등등 만산편야滿山遍野하였지
잎 하나 우산만 하여 얕은 돌담 덮고
거칠 것 없이 황금 꽃 피웠네
폭풍에 흔들리고 폭우에 고개 숙이다
삭풍 전선줄 붙잡고 울기 시작하면
자랑스런 황화黃花 푸른 잎 모두 떨구고
갈색 퇴물로 변하여 하늘 보면
맥없이 멀어져 간 아스라한 전설들
누구도 고칠 수 없는 고질병
남쪽 향한 그리움에
복장 터지는 울음으로
온몸 부여안고
속으로 운다.
상엿집
博川 최정순
팍팍한 다리 두들기며
동네 모퉁이 돌아
비포장 신작로 지나
울퉁불퉁 패인 언덕길
명줄 다한 인생
눈물다발 가슴에 품고
저승길 올라타고 가는
서글픈 노래 감도는 상엿집
죽은 자 이야기
구름처럼 피어나는
꽃상여 집.
우리옷
博川 최정순
여인네 입으면 우아하고
남정네 입으면 학 같은
선 곱고 맵시 나는 한복
무명 직물 오방색
천연염색에 하늘 기운 들여
내자의 빼어난 바느질 솜씨로
한 땀 한 땀 정성들여 만든
우리의 고유 의상
애옥살이 궁핍하여
희미한 등잔 화로 옆
서방님 모시적삼 중이적삼
찹쌀 푸새 다듬이질로
인두질로 구김살 폈지
아내들이여,
당신네의 솜씨가 빚어낸 힘은
우리 민족의 혼이며
천만년 이을 영원한 문화유산.
낮달
博川 최정순
밤길 잃은 한 마리 흰 사슴
하얗게 빛바래 야윈 빈 껍질로
먹빛 어두운 기억 훌훌 털고
여기저기 잘려 나간 희망의 가지 모아
삿된 것 버리고 초연히 천공에 둥실 떠
시나브로 모든 고통 이리저리 흘려보내고
갖은 이념에 찢기우고 망가진 온몸 추슬러
어제의 그리움 목울음 삼켜 다시 퍼 올리며
중천에 하얀 꽃으로 눈부시게 피는구나.
혜성
博川 최정순
직선 서둘러 그으며 낙하하던
긴 꼬리 묻었던 눈물 털었나요
그 옛날 당신 떨어져 누운 자리
이제 발모가지 덮는 숲길로 변하여
시월의 어우러진 잡풀 붉게 태우고
동짓달 고추바람 서리 옷 둘렀는데
나 호올로 규화목硅化木 의자 앉아
당신 뒤따르는 자손들 보며
서글픈 별나라 전설 나누다
당신들처럼 세상사 모두 내려놓고 싶어
가이없는 서러움 울컥 토해내니
한별곡恨別曲 되어
모진 삭풍에 흩어지고 맙니다.
둥지
博川 최정순
둥지는 또 다른 한 누리
우리는 보이지 않는 어미가
알을 품듯 품고 있었음을
서로 어미가 되어
상봉하며 알았네
앞으로도 그렇게 어미는
우리를 한 둥지에 품어
하나로 만들 것이기에
실망과 좌절 딛고
아픔 다스리며 살 것이네
참을 만치 참아가며
사랑으로.
낙락장송
博川 최정순
고난의 산등허리
허위허위 바람결 타고 넘어
고래처럼 거대한 바위틈
씨 던져 튼실한 뿌리 내려
시샘하는 폭풍 맞서며
사지를 활짝 폈다
산기슭 산 정상 소요하는
운무에 온몸 목욕하고
고고하고 기품 있는 모습으로
천하를 굽어보며
주변 풍광 제압하던 낙락장송
지인들이여, 들리는가?
내가 가는 상여 주위 맴도는
귓가로 부서질 나의 푸른빛 풍금 소리
낙락장송 바람 소리.
보따리
博川 최정순
물건 안아 꾸린 뭉치
너 보따리라 부르지
누가 처음 만들었을까
가슴 텅 빈 보자기를
사람들 너
싸고 들고 풀며
사연들 얼마나 많았더냐
책보따리 꾀보따리 익살보따리
하많은 추억 웃기도 많이 했어
피난보따리 삶보따리 이별보따리
상처 난 짐승처럼 울기도 많이 했지
얼마 남지 않은 내 삶의 여로
또,
어떤 보따리 싸 들고 가다 풀 것인가.
그리움(1)
博川 최정순
당신이 어느 날
뜬금없이 잊으라기에
먹구름 되어
찌푸린 하늘 떠다니다
시뻘건 바다에 풍덩 빠져
망각의 벌판
차가운 별무리 가득하고
인정 없는 기억들만 가혹한데
날마다 눈 뜨는 그리움 어쩌지 못해
당신의 굳게 닫힌 문
다가서다 무서움에 오그라들고
잊기 위해 골백번 악무는 어금니
조금도 그립지 않다 속다짐
당신을 하루에 한 줌씩 버리고
그도 안 되면 반 줌씩 버리다
그것도 안 되면 그냥 쌓아 두지요
쌓고 쌓다 보면
썩는 날도 올 겁니다.
그리움(2)
博川 최정순
문득 먼 아득한 하늘 쳐다보니
당신은 회색빛으로 거기 누워 있네
그날,
고개 떨구고 이별의 모습으로
묻어 두어야 할 사연 감추며
가슴으로만 감싸 안던 수많은 이야기들
내 가슴에 들어와 괴롭히던 속앓이
동그랗게, 동그랗게 무심히 그려 놓고
당신은,
그리움이라는 올가미 하나
튼실하게 걸어 두고 저 멀리 떠났네.
꽃불
博川 최정순
봄 오면 아름다운 꽃들 얼굴 내밀고
서로 반기며 눈웃음 짓지요
사랑스런 해맑은 미소로
봄버들 봄바람에 살랑거리면
하늘 어디선가 눈가 이슬 맺혀
북녘 바라보는 아버지
수없이 오가는 봄
아, 작별 인사 없이 남북으로 갈라져
부모 형제 그리며 산 모진 세월
그리움 꽃잎 되어
텅 빈 가슴에 겹겹이 내려
당신의 꽃무덤 적시니
아버지 꽃불로 환생하여
아지랑이 타고 북으로,
북으로 날아가네.
자유로에서
博川 최정순
자유로 달려
임진각 가는 길
평양 개성 77 표지판
언제부터 있었나
배꼽 걸려 숨통 끊긴
저 철책 꼬리 감추면
북으로 북으로 단숨에 달려
아버지 고향 박천 당도하여
혼이나마 해후하련만
말로만 자유로 가장자리엔
봄꽃 아우성치며 부서지는 임진강
속으로 울며 여울지는 피눈물은
고향 떠나 서럽게 살다간 아버지 통곡.
어머니
博川 최정순
허물 벗어던지고
떠난 자식
머리 하얀 눈 앉고야
어머니 마음 헤아리는가
검붉게 녹슨 기억 저 너머
닳고 닳은 고무신 신고
인생의 비탈길
허위허위 달려가던
팔순 근처 어머니
정리되지 못한
병든 생명줄 하나 달랑
모지락스레 붙잡는데
어머니 이마 위 떨어지는
어버이날 석양
카네이션꽃인 양 붉다.
아버지
博川 최정순
흙 일궈 잡초 뽑아
채소 키워 솎아 먹으며
잘된 것 장에 팔고
자식들 골고루 나눠 주던 당신
그런 행복한 세월
영원이라 생각했지요, 정말
터밭 당신 그림자마저 없어지고
흰머리 덮는 할머니 되었는데, 이젠
심신마저 병들어 허공 보며
눈물 쏟는 날만 더 많아지는군요
당신 향한 그리움 사무쳐
별무리 청옥처럼 피어오르면
은하銀河에도 감출 수 없는 나만의 그림
당신의 초상화
당신은 분명 어디엔가 있는데
당신은 어디에도 없어, 여전히
다시 만나지 못하는
또 서러운 새날을 맞이합니다.
하얀 카네이션
博川 최정순
자식 농사 소박하나 구순하여
아이들 명랑하고 씩씩하니
저승 가면 조상님 뵐 면목 선다며
서쪽 하늘 보며 호탕하게 웃던 아버지
아버지 낳으시고 아껴 준 어진 은혜
염치없는 핑계로 피하고 피하다
창졸지간 이승과 저승으로 갈라지니
아쉽고 그립기 그지없어라
목매어 불러도 대답 없는 북녘 고향
그리고 그리다 지친 한 많은 세월
가슴앓이 하던 아버지 가신 지 몇 년 지나
하늘 계신 아버지에게 보내는 시
모으고 모아 어렵사리 시집 펴내니
북에서 온 혈육 언니 시집 보고
인연인지 기적인지 기별 닿아
어버이날 영전에 꽃 두 송이 바치니
부족하고 부족한 딸들의 회한
아버지 가슴처럼 숯덩이 같은 밤하늘에
둥근 보름달이 둥실 떠오르며
딸들이 올린 하얀 카네이션 달고
아이처럼 밝게 활짝 웃고 계시네.
빈집의 꽃들
博川 최정순
미숙이 돈석이 나와 함께 살다
떠나 버린 텅 빈 전설 같은 집
장독대 주변 이들이들 핀 꽃들
어제의 향기 아련히 꿈틀거리고
돌배나무 가지 위 참새 기웃거리면
허리 허물어진 돌담 아래
사금파리 무덤에선 조무래기들
재잘거리며 튀어나온다
미숙이, 돈석이, 나
미숙이 족두리꽃 머리에 얹어
시집갈 준비하고
돈석이 분꽃 목에 걸어
님 맞을 준비하였는데
미숙이 십팔 세 폐병
순백합화로 고개 숙여 다시 피어나고
반백이 다 되도록 돈석이 시집 안 가
허리 굽은 순할미꽃 되었네
도깨비 불꽃으로 살다가는 나,
심심산천 시들지 않는 도라지 꽃
마음에 가득 담았네.
동구 정자나무
博川 최정순
커다란 가지 쩍쩍 벌리고 잎 틔워
하많은 세월 품은 마을 정자나무
동네 어귀에 일백 년 말없이 서
오가는 사연 모두 안고 있었지
매미 소리 소낙비처럼 쏟아지고
태양 열탕에 숨 턱턱 막히던 날
전기톱 괴물에 굵은 허리통 잘려나가
몸뚱이 기둥 되고 팔다리 지붕 되어
팔각정으로 변했지
마을 정자나무처럼
세월도 인심도 변한 시골
옛것과 정 버리고
노닥이는 늙은이들 감싸 안고
매연 뒤집어쓰고 오는
마을버스만 망연히 바라본다.
고향 저수지
博川 최정순
설화산 허벅지 기산리 위
젖무덤 사이 작은 저수지
까까머리 단발머리
규섭이랑 춘심이랑 가재 다슬기 잡다
푸른 음모 우거진 수초 아래 더듬으면
송사리 피라미 참붕어 많기도 했지
매운탕 끓여 놓고 물수제비 뜨면
입 큰 개구리 깨금발로 걸어 나와
입 크게 벌리고 뱅글뱅글 함께 웃었지
우렁이 녀석 물방울 몽글몽글 만들면
쇠백로 눈길 피해 우렁이 잡아먹던
저수지 훼방쟁이 말썽쟁이 웅어
규섭이 한 손에 냉큼 잡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걀걀 웃었지
매운탕 먹고 장수잠자리 쫓으며 낮 보내고
밤이면 반딧불이 잡아
호박꽃에 가두고 마을 휘저었지
규섭인 판사 되던 해 등반 사고로 죽고
규섭이 좋아하던 춘심이
시집가서 한 달 만에
이 저수지 뛰어들었는데
그네들은 간 곳 없고.
저수지 담 아래
봉숭아꽃만 노을에 더 붉네.
방앗간
博川 최정순
참새 방앗간 들르니
아무도 없네
가족도,
이장도,
누렁이도 없네
곡물 옷 벗기려 피대 돌던 기계도
마차 쌀가마니 싣던 마부도
조강불포糟糠不飽 풍속화를
미덕으로 알던 인심도 없네
우리네 농부들 업 삼던
디딜방아 연자방아 물레방아
절구 공이 빻던 흔적 가뭇없어
이제는,
곡물 쪼아 먹던 참새 도시로 달아나
전봇대 위 누옥 짓고 사네
마누라 눈 가리고 쌀가마 빼내어
정 다방 김 양 쌍가락지 사주던 박 씨 없고
칼날 매운 시집살이 울던 아산댁도 없이
전설만 남겨둔 채,
텅 빈 방앗간 죽어 가고 있다.
산국화를 보며
博川 최정순
고향 그리워
인적 없는 산골짜기 찾아드니
너희들 무더기 져 황금빛으로 환하게 웃고 있구나
너의 얼굴 얼굴 속 드리운 그리운 흔적
꿈에도 잊지 못할 고향 얼굴들
아버지 밤나무 가지로
숟가락 만들어 줘 소꿉놀이하던 친구
어머니 헌옷가지 인형 만들어 줘
신랑 각시 놀이하던 저 세상 명구
구매박골 계곡 물 가둬
멱 감고 물장구치던 동무들
돌틈 엉금엉금 기어가는 앙증스런 가재 보며
개울물에 희희덕거리며 빨래하던 너희들은
모두 내 기억의 모퉁이로 돌아서고
산에 핀 국화에서
너희들을 찾고 그리는가.
울엄마
博川 최정순
호박잎 데쳐 쌈 싸먹고 싶은데 엄마가 만든 강된장 먹고 싶은데 곁에 엄마가 없다 허공에서 엄마가 말한다 강된장은 물 많이 잡지 말고 매운 고추만 들어가면 되여 나는 고개 절레절레 흔든다 근디 나는 안 되네 비빔국수 먹고 싶은데 엄마가 만든 김장 김치 먹고 싶은데 엄마가 안 보인다 나이 먹을 대로 먹은 자식 엄마가 해주던 음식들 생각나 엄마 찾는데 엄마가 보이지 않는다 작달막한 체구 항아리 같은 체구 엄마 자식들 엄마 속 무던히도 썩혔지 여러 자식 입맛 챙겨 주던 엄마 장독 장맛처럼 곰삭은 애정으로 지켜 주던 엄마 잘 익은 묵은지 같은 엄마 그리워한다 천만년 끄떡없을 줄 알았던 울 엄마 벽시계처럼 시침 분침 망가져 가다 멈출 날만 남았네.
종이학
博川 최정순
종이학 접으며, 아버지
날개 있지만 세월의 무게
짓눌려 날지 못하는
주둥이 있어도 재갈 물려
목청껏 노래 못하는
텅 빈 가슴 활활 불태우고
속으로 잦아드는 울음 삼켜
반미치광이로 세상 버티다
종이학에 그리움 실어
북녘으로 날리며 살았지
살아서는 죽어 있었고
죽어서야 종이학 타고
고향으로 가셨다.
망부의 한
博川 최정순
천지 피로 물들이며
포성 목 터지게 울던 날
평북 박천 봉하리 막혀
말고개 숨 가쁘게 넘으며
가슴 터져라 통곡했지
남으로, 남으로 향하는
고독한 발걸음 눈물 흘리고
비마저 추적추적 내리는데
떠나는 사람 붙잡지 못하여
기적 소리도 목이 쉬도록 울었지
휴전선 허리 동강 나
아득한 망연자실
평생 속울음 안고 살았을 아버지의 한
철없이 산 내 가슴 적신다.
낮에 나온 반달
博川 최정순
아버지,
요람에 싸였던 손자 어느덧 청년 되어
한 쌍 원앙 거듭나 축복 받는 날
어머니 도라지꽃 빛깔 한복 곱게 단장하고
아버지 가신 빈 자리 대신하였습니다
아버지,
삼 일이면 되가겠지 두고 온 북녘 고향
남하하여 피붙이 없이 떠돌다 어머니 만나
북쪽 하늘 보며 현구고례見舅姑禮하던 날
북극성 통곡하는 향수의 밤이었다지요
아버지,
바닷물 깊이 몸 담근 몸뚱이 허리 동강 나
분단 신음하며 산하 철책서 서리꽃 피 흘리다
은하수 물에 하염없이 그리움 담금질하며
유경流景 그림자 베이고 있었지요
아버지,
노을 진 내밀內密의 숲 품고
보내지 못할 편지 썼던 아버지처럼
불꽃처럼 돋아나는 심혼 날마다 공책에 쓰며
그리움을 달고 사는 어머니,
손자 결혼식장에선
낮에 나온 반달이랍니다.
막내동생 결혼식
博川 최정순
손잡은 오빠 손에
저승 아버지 내려와 인도하니
시월의 꽃으로
터질 듯 부풀어 오른
탐스럽고 예쁜 수련
깨끗 청순한 마음으로
피어나라 나의 축복 기도 속
금강보다 더 굳게 맺은 백년가약
축하객 천둥 우뢰 박수 소리
신랑 신부 반기는데
아버지 가신 빈자리
어머니 이슬로 채운다.
봄(2)
博川 최정순
머리 헤치고 달려오다
바람 쉬어 가는 보갑골
하늘 눈물 뚝뚝 흘려
실개천 보태는,
호드기 불던 선돌
이남박 인 언년
남몰래 눈 얽혀
가슴 터지는,
백년해로 부뚜질 마주하며
씨앗 뿌려 울고 웃던
그림자 품은 언덕에
산벚꽃 흐드러지는,
온 산야 얼음 털고
알몸 드러내 네 활개 활짝 펴고
양광 악수하며 기지개 펴는,
그네들의 봄. 봄. 봄.
헤이리의 봄
博川 최정순
명지바람 나풀나풀 춤사위
새초롬히 버들가지 애무하는데
감자 고구마 어린 손 슬그머니 벌리네
미소로 정다웁게 재롱떠는 꽃길
봄 햇살 자박자박 까치걸음
순진무구한 아기처럼 날아들고
쇼윈도 책 찢어 마구 던진 모습에
창작의 무늬 쑥쑥 발돋움질
작가의 고뇌 반추하며 흩어져 있네
헤이리 봄의 향연
여기저기 꿈틀꿈틀 속살거리며
생명의 꽃 피우고 있더라.
칠장사에서
博川 최정순
발길 천 근 나그네
잠시 쉬어 가는 칠장사
경내 둘러보니
험상궂은 사천왕상
눈 부릅떠 노려보는데
풍상에 상처받은 무명석탑 주위로
들꽃 활짝 펴 위로하는데
허허, 탱화에 궁예와 임꺽정이
뜬금없이 웬 말이련가
서글픈 전설 안은 칠장사 단청
빛바래 지쳐 있네
명당이 도대체 무엇이관데
세도가들 불 질러 뺏고 뺏겨
철당간 깃발 주인 바뀔 때마다
칠장사 동종 탄식하였다지
나그네 발길 옮기며
무심코 흘러나오는 소리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이제와 다를 게 무엇이더뇨.
부처님 오신 날에
博川 최정순
님께서 연꽃 즈려밟고 오신 날
각양각색 연꽃등 대롱대롱 불 밝혀
홍진에 물든 중생 마음 밝히니
삼라만상 모두 허공 보고 웃는데
무릎 관절 앓는 노모
거북처럼 어기적거려 내,
근처 나뭇가지 주워 지팡이 삼게 하니
노모 미소 꽃비처럼 퍼지고
종두 스님의 명종 108번 울어
자비 깨우쳐 연기緣起 알리니
노모 독실한 불자 아니어도
오늘만큼은 탐욕그릇 저 멀리 던지네.
스승의 날 근처에서
博川 최정순
스승의 그림자는 밟지도 않는다고 했던가 하필 스승의 날 다음 날 TV에 이런 프로가 방영되다니 구제불능의 학생을 어쩔 수가 없어 그냥 넘어갈 수가 없어 착하고 순진한 어느 여교사가 언성을 높이며 회초리를 들었다고 악동 친구 학생이 스마트폰인가 뭔가로 녹음하고 촬영하여 당한 학생에게 건네서 학부형이 득달같이 찾아와 폭언 폭력을 과시하고 경찰에 고소하고 그야말로 난장판을 쳤던 게 아니던가. 사회의 잘못인가 학생의 잘못인가 선생의 잘못인가 스승의 날 근처의 마음만 쓸쓸하네. 창밖에는 잔뜩 찌푸린 하늘에서 봄비만 하염없이 내리고.
농촌풍경
博川 최정순
자식 키워 대처 내보내
둘 남은 산촌 노인네
척박한 손바닥 논
써레질하는 할아버지
못밥 나르는 할머니
염천 달래려
얼음 둥둥 띄워 마시는
막걸리 탁배기잔에
어리는 자식들
밤 오면 평상 누워
눈길 뜨락 돌리면
은빛 달 먹고
지천으로 피어나는 달개비꽃
개구리 개골개골
쓸쓸함만 더 하네.
위도의 꽃
博川 최정순
해무에 온몸 포박당한 격포항
잠시 갈 길 잃고 서성이다
핵 폐기물에 몸살 앓았다던
궁금하고 궁금하여 찾은 위도
허균의 이상세계 율도국
고슴도치 닮았다 위도蝟島라네
가파른 망월봉 비척비척 오르니
넓디넓은 해변 그림처럼 누워 있고
험준한 봉우리 내려가다 보니
자장율사 창건한 내원궁 내원암
나를 잠시 쉬어 가라 하네
암자 대청마루 앉아 눈길 멀리 던지니
망망한 푸른 물결 보며 퍼렇게 울다 지쳐
길마다 산등허리마다 꽃 피운 상사화
하얀 미소로 육지 향해 하늘거리며
포구 버리고 떠난 사람들에
그리움 가득 안고 하얀 손짓하네.
청산도에서
博川 최정순
완도 저 멀리 남쪽
몇 마리 새끼 거느린
산 푸르고 물 푸르러 청산도靑山島
그러나 바닷길 요충지라 전란도 많았지
불쑥 솟은 매봉산 허위허위 올라 굽어보면
산에서 발원한 작은 하천들 진저리 치며
뱀처럼 구불거리며 좁다란 평야로 스며들다
아득히 펼쳐진 넓디넓은 바다에 발 적시네
고샅 고불고불 둘레길 어깨 마주하고 늘어서
산 찾아 물 찾아온 나그네 발길 끊임없이 이어지고
바람결 고개 끄덕이는 청보리 파도 속
파랗게 일어나 서글프게 일렁이는 그리움 하나
느리게 느리게 님의 초분草墳 넘어간다.
천수만에서
博川 최정순
운명이 된
쓰린 가슴 삭이며
안면도 영목항 떠나
효자도 지나는 뱃길
맥주 거품 하얀 길
꼬리 무는 선미파 뒤로
괭이갈매기 시김새하며 선회하고
수면은 고기비늘처럼 반짝인다
거센 물살 몸 가누면서
이마 맞대고 속살거리는 조각섬들
옹기종기 동양화처럼 떠 있는데
거센 바람 외씨버선발로 뛰어가며
한 음 한 음 키운 처절한 한恨 소리
이 섬 저 섬 휘돌다 허망하게 부서진다
아득한 옛날의 지순한 사랑
가뭇없이 묻혀 가는 슬픈 전설
파도길 타고 슬그머니 흘러들어
팔작지붕 처마 끝 올라앉은 바다제비
목 놓아 소리하는 부침새 꺾음새는
미학의 절제 없이 제멋대로 출렁인다.
간월암에서
博川 최정순
넓게 팔 벌려 얼싸안은 모감주나무
섬 속 섬에서 달 보다 도 얻은 무학대사 도량처
물때 따라 열고 닫는 속세 이음길
갈매기 우웽우웽 소리치며 나그네 인도하니
소원 한 자락 소원 탑에 올리고
채움 비움 답 찾아 해탈문 올랐는데
몇백 년 풍상 견디며 살아온 사철나무
홀로 파란색 옷 입고 외로운 나그네 반기니
마음의 채움과 비움 바로 거기 있었네
경내 들어서 좁쌀만큼 비우고 좁쌀만큼 채우니
중생들 수복修福 기원하는 스님의 독경 소리
중생들 번뇌 씻어 줄 스님의 독경 소리
갈매기 날개 실어 멀리멀리 날아가고
간월암 황금빛 낙조 길게 누우면
나그네 하많은 응어리 풀어헤치고
얼굴 붉게 물들이며 활활 타고 있다.
안성 바우덕이 축제에서
博川 최정순
집안 무고 기후 순풍 풍년 들어
가축 무사 객지 나간 가족 건강
어름산이 빌고 비는 비나리 마치고
높으나 높은 삼줄 생명 걸어
신들린 공처럼 튀어 올라
흔들흔들 휘청휘청 줄꾼
양반네들 야유 허공에 흩뿌리네
신명나는 홍재비 풍치기
오방색 부채꽃으로 피어나는 창공
하늘 땅 사람과 교감하여
하늘 당기고 땅 일으키는 풍물재비
어름산이 배우씨 주고받는 재담
풍자 해학 가을 수놓는데
안성 바우덕이 남사당패
익살맞게 육실허게 잘도 논다.
만추(晩秋)에
- 박천 최정순
혼재된 적갈 가을빛 받으며
멀고 긴 자드락길 걷고 걸으니
잠자는 잡목들 침묵으로 덮고
구름 떠난 하늘은 시리기만 한데
앙상한 나목들 겸허히 고독 씹고
정령精靈의 고해만 대롱대롱
바람 따라 낙엽 쌓이다 흩어지고
알몸으로 험한 세파와 조우하는데
해 저무는 등허리의 검붉은 바다
성근 별 창백한 그림자 희미하고
반쪽 푹 썩어 문드러진 야윈 반달
허무에 순응하려는지 이별마저 붉다.
낙엽(1)
博川 최정순
개밥풀꽃 핀 듯
적단풍 버릇처럼 취하여
앵도라진 붉은 입술
중심 잃은 몸뚱이 꿈틀대고
낙하하며
세상을 씹어대며
넘어지고 자빠져
시체처럼 포개지고
치기 어린 항거도
거두지 못할 흑빛 무덤도
부질없는 인사만 겹겹이 쌓여져
죽음의 그림자에 쫓겨
절망 아래 널브러진다.
낙엽(2)
博川 최정순
여명 고개 드는 새벽
안개 덮인 계단 내려서니
소복소복 낙엽 진영
모두 날개 잃고 누웠네
밤새 먹빛 여의도록
달도 별도 울고
황금기 찬란한 전설
서릿발 아래 차갑기만 한데
사납게 흘러가는 세월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어디론가 흩어진다.
가을비
博川 최정순
가슴속 응어리진 한 북받쳐
만물 휘젓는 휘모리장단
넓고도 황홀한 풍악산 일만이천봉
층층 비단결 수놓은 만첩홍산萬疊紅山
바람 따라 절승경계絶勝境界 돌고 돌다
하염없이 무심히 내리고
묘향산 칠성골 반석 위
휘감고 휘감기어 몸부림치다
박천 떠난 최씨 가문 소식에
한스러운 피눈물 씻으며
쓸쓸한 청천강 서편으로
서럽게 울고 간다.
가을 바람
博川 최정순
가파른 하늘재 넘어
송림松林 사이로
다가서는 한 뭉텅이
감나무 부딪히고 사과나무 얽혀
열매마다 핏빛 멍울 짙게 남기고
단호박 짙게 드리운 주름살 펴며
필사적으로 머물다 간다
회갈색 깊디깊은 구렁이 계곡 따라
인고의 상처 눈물 발 밑 뿌리며
먼저 지나간 인연 허위허위 쫓아와
인적 드문 산등성이 골짜기
이리저리 소요하며 거닐다가
허수아비 혼자 하늘 보고 꺼덕이는
몸서리치게 외로운 텅 빈 들판에도 머물다
콩 줄기 비집어, 비집어 툭툭 건들며
석류알 터져라 사력 다해 불다
겨울로 간다.
가을밤
博川 최정순
나무 옷 훌훌 벗어
땅 위 포목布木 되어 눕고
서리 입은 꽃잎 남루한 소복만
담장 밑 서성이며 떨고 있는데
돌밭 호박 나체로 뒹구는
벼폭 다리 잘려나간 황금들판
허수아비만 허허로이 서
하얀 비닐봉지에 덮인 짚덩이
북녘서 다가오는 겨울바람 소리
풀벌레 마지막 노래 서글픈데
둘 곳 없는 마음 들녘 헤매면
먹빛 어둠 속 잡념만 무성하네
이슬 끊임없이 가슴에 내려
도둑맞은 잠 뜨개질로 달래며
저 멀리서 나를 향해 손짓하는
죽음 향해 한 발 한 발 걸어가네.
중앙탑에서
博川 최정순
한반도 한가운데 세워진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중원에 홀로 우뚝 서
한반도 치솟는 정기 모아
천하 굽어 살피고 있으니
나그네 잠시 발길 멈춰
인간사 무사무탈하기를
큰 절 올려 간절히 빌고 비니
저 멀리 찬바람 맞는 빨간 능금
알알이 옹골차게 영글어 가고
탄금호 핏빛 석양에
정겨운 우륵 가얏고 한 가락
갈대꽃 살랑살랑 흔들며 지나간다.
석상(石像)
博川 최정순
한반도 막내 제주
금능 석물원
땅 뚫고 나와 멈춘
곰보 용암석 깎아
여기저기 사람
얼굴 수놓았는데
각양각색 수없이
많은 인간 표정
환하고 밝은
얼굴 있는가 하면
일그러지고
어두운 얼굴도 있네
왜,
내 눈길은 자꾸만
어두운 쪽으로만 갈까
아무래도,
알 수 없는 노릇일세.
귀부龜趺
博川 최정순
중원 미륵리 미륵대원彌勒大院 터
거대하게 버티고 있는 한반도 최대
중원中原 미륵리彌勒里 사지寺址 귀부龜趺
비석 받치던 너의 모습
비신碑身 없어져 구멍만 달랑 남았고
석비石碑 세월의 강물에 흔적 없네
그래도 두 마리 새끼 거북
천년 칼바람 굽이치는 파도 견디며
어미 품 올망졸망 남아 있네
강산 옷 아무리 바뀐다 해도
누구도 갈라놓지 못할
거북이 가족.
첫눈
博川 최정순
사락사락 덮고 덮는 반가운 손님
포근한 하얀 솜이불 온 누리 덮고 덮어
나무, 지붕, 마당, 빨랫줄 잠재우고
쏟아지는 양광에 소년의 은빛 눈물 되어
하염없이 땅속으로 스며드는데
더럽고 추악한 세상살이 수정처럼 정화되어
삼라만상 오롯이 형형하게 빛나고
살아온 추억들 뇌리로 녹아드는구나.
겨울비
博川 최정순
아무 데도 쓰잘 데 없는 너
아무도 반기지 않는 너
외롭고 고독의 눈물 뿌리며
온다, 오누나
떨어진 낙엽 짓뭉개며
마른 가슴속으로 파고들며
온다, 오누나
네 마음 닮은 나
주방 부리나케 달려가
달콤 쌉싸름 청춘차
곰삭은 애통차
갇혀 버린 두메차
독한 망각차 끓여 내놓으니
섬돌 내려앉아
차 한잔씩 하고 가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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