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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류씨
전주류씨의 유래
전주류씨에 관한 기록은 일본(日本) 성덕태자(聖德太子)의 요청으로 사천왕사(四天王寺)를 건축(建築)하러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류중광(柳重光)은 본관이 전주(全州)이며, 그 후손은 지금도 사천왕사를 보수(補修)해오면서 사천왕사 인근(隣近)에 살고 있다.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한 전주인(全州人) 류방헌(柳邦憲) 묘지명(墓誌銘)에는 증조부가 신라 때 각간(角干) 벼슬을 한 류기휴(柳基休)라고 하였으며, 그 계대가 고려말 류능(柳能)의 가문(家門)까지 이어지고 있다. 따라서 전주류씨는 고려 왕건(王建) 때 창성(創姓)된 문화류씨(文化柳氏)보다 훨씬 앞서 백제 때 창성(創姓)된 성씨(姓氏)인 것이다.
그리고 고려말에 문화류씨 류경(柳璥) 등은 전주류씨 류능(柳能)을 살해(殺害)하여 전주류씨 가문(家門)을 몰락시킨 인물인데 이 류경은 전주류씨의 선조(先祖)라고 하는 류양재의 당숙(堂叔)이다. 그런데 전주류씨를 몰락시킨 류경의 당질(5촌조카) 류양재가 전주류씨의 선조(先祖)라고 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문화류씨 류경 등에 의하여 무신정권의 일원(一員)인 류능이 피살(被殺) 당하자 그 일족(一族)은 역적(逆賊) 가문(家門)의 누명을 쓰고 전주로 낙향, 은둔(隱遁)하여 비참(悲慘)한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학문(學文)을 배우지를 못하여 계대(系代)가 실전(失傳)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성이 있다.
한편 효종3(1652)년에 창간한 임진보(壬辰譜)에는 문화류씨로부터의 분관설(分貫說)을 기록하고 있으나 전주류씨 4번째 병자보(1876년)에는“전주류씨보계변증문”을 싣고 전주류씨는 문화류씨 계열이 아닌 토성(土姓) 전주류씨라 하였으며, 미완성 갑자보(1924년)에는 반증문을 싣고 전주류씨는 문화류씨 계열이라 하였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명종20(1565)년에 발간한 문화류씨 가정보(嘉靖譜) 서문(序文)에 전주류씨 분관설(分貫說)이 없고, 또한 본문에서도 전주류씨 시조라는 류양재(柳良梓)는 직함(職銜)도 없고 무후(无后)인데 후에 편집한 족보에는 전성군(全城君)이라는 군호(君號)를 가필(加筆)하고 전주류씨를 그의 후손으로 하였다.
특히 2008년에 간행한 문화류씨족보에는 류양재의 큰아들을 방직(邦直), 작은 아들을 방헌(邦憲)이라 하고, 방헌의 주기(註記)에는 高麗惠宗甲辰生穆宗朝禮部侍郞己酉卒(고려혜종갑진생목종조예부시랑기유졸)이라 기록하였다. 즉,“류방헌은 고려 혜종1(944)에 태어나 목종 때 예부시랑을 하고 목종12(1009)년에 별세하였다”는 뜻이다. 이렇게 1009년에 별세한 류방헌을 1250년 전후 사람인 류양재의 둘째아들로 하였으니 누가 보아도 이것은 족보를 짜마춘 느낌이 든다.
순종2(1908)년 홍문관(弘文館)에서 간행한 증보문헌비고정오(增補文獻備考正誤) 제계고(帝系考)에는“전주류씨 시조 습(濕)은 완산백(完山伯)이다”라하고 그 상계(上系)는 밝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전주류씨는 백제 때부터 이어온 토성설(土姓說), 문화류씨로부터의 분관설(分貫說) 모두 확증(確證)할 문헌이 없어 시조(始祖) 선대(先代)의 계대를 이을 수 없다. 따라서 시조 완산백 습(濕)의 상계(上系)는 문화류씨분관설(文化柳氏分貫說)이나 토성설(土姓說)을 앞으로는 각파 종중(宗中)에서 각종 문헌(文獻)이나 금석문(金石文) 등에 사용하지 않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리고 여기서 첨언(添言)할 것은 전주류씨는 3개 파가 있는 것이다. 즉, 습(濕), 혼(渾), 지(池)를 각각 시조로 하는 3개 파이다. 여기서 혼(渾)파는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한 전주인(全州人) 류방헌(柳邦憲) 묘지명(墓誌銘)에 증조부로 기술한 신라 때의 각간(角干) 류기휴(柳基休)를 비조(鼻祖)로 하고 혼(渾)을 시조(始祖)로 하여 족보를 발간한 바 있다.
전주류씨 연원에 관한 설
가. 전주류씨 개요
전주류씨 최초의 족보로서 1652년에 발간한 임진보(壬辰譜)의 시조(始祖) 기록에는 문화 류씨로부터의 분관설을 기록하고 있으나 1726년 두번째 발간된 구병오보(舊丙午譜) 범례에서 邦直(방직)과 橒(운) 두위를 첫권에 별도로 쓰고있는데 시조와 시조비 비문에는 올려있지 않고 직제학공 비문에도 생원공(휘 橒)은 시조의 考位(고위)로 올려 있으나 都副丞公(휘邦直)은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우리 전주류씨보 와 다른 족보 世系에는 두분 윗대를 문화류씨보에 이어 놓아 柳寬을 도부승공의 아버님으로 하였으나 寬은 조선조 세종시에 우의정을 지낸 분인데 우리 선조중 3世이신 영흥공(휘濱)은 太宗大王과 고려조에 함께 進士시에 합격하셨으며 4世이신 회헌공(휘義孫)은 세종때 참판까지 역임하셨으니 柳寬과는 世系가 맞지않으니 邦直. 橒 두 윗대의 기록은 믿을바가 못되는등, 이를 고증한 전주 류씨가 4번째로 1876 년에 발간한 "병자보(丙子譜)"에는 최초 족보에 기록된 "문화 류씨 분관설(文化 柳氏 分貫說)"의 잘못을 입증하는 사실을 찾아내어 기록한 "전주 류씨 보계 변증(全州 柳氏譜系辨證)"을 수록하고 있다.
나. 『丙子譜』에 收錄된 全州柳氏譜系辨證 16代孫 炳文 謹撰
우리 柳氏는 본래 全州(전주)에서 出系하였는데 중간에 文化(문화)로부터 移籍하였다는 잘못된 說이 있어 지금에 와서 넓게 고찰하고 자세히 변증하여 그 잘못된 것을 아래와 같이 바로 잡는다. 16代孫 炳文(병문)이 삼가 적는다.
삼가『高麗史』(고려사)를 살펴보건대 貞簡公(정간공) 戴肅公(대숙공) 莊定公(장정공) 등 三平章事의「列傳」(열전)이 있는데 모두 全州人(전주인)이라고 되어 있고 『東國輿地勝覽』(동국여지승람)의 「全州人物條」(전주인물조)에도 빠짐없이 들어 있어 檜軒公(회헌공)과 眞一齋公(진일재공)의 윗단에 실려있다.
또한 杏村(행촌) 李公?(이공암)께서 完山(완산) 柳仁雨(류인우)의 詩를 손수 베껴 놓은 것이 海東名蹟(해동명적)에도 실려있으니 곧 全州柳氏(전주류씨)가 존재한 것은 실로 오래된 것이다. 그러니 어찌 掌令公에 이르러 移籍한 것이 처음이 된다고 할수 있겠는가? 年代를 가지고 推定하여 보더라도 貞簡公께서 高麗의 成宗朝에 벼슬하여 이미 禮部侍郎이 되었으니 고려개국과의 시간적 거리가 육십여년에 지나지 않았으니 그 時世가 文化柳氏의 (문화류씨) 大丞 車達(차달)의 시대와 아주 가까운데도 그 당시의 史筆들이 이미 大丞의 親屬이라고 말하지 않았으니 이로 미루어 보아도 곧 文化(문화)와 全州(전주)는 따로 二本인 것이 확실하다 하겠다.
또 살펴보건대 牧隱 李穡公께서 寶文公(직제학공,극서)과 함께 같은 고려 조정에서 벼슬하며 그때 이미 全州柳氏(전주류씨)라고 稱한 바 있고 그후 虎巖(호암) 梧桐坊(오동방) 鍾陵(종릉) 黃竹里(황죽리) 등의 비갈명과 署令 之盛公 眞一齋公과 全陽公墓碣과 遺逸齋와 壺隱公墓誌와 李植(이식)의 『澤堂集』(택당집)에 실려있는 駱峯公諡狀에도 「우리 全州柳氏」가 모두 文化(문화)에서 移籍하였다는 말은 없다.
典翰(전한)벼슬을 지낸 檜軒(회헌)의 文科榜目(문과방목)에 실린 記事 역시 全州(전주)가 본관이라고 쓰고 있는데 우리 全州柳門(전주유문)이 南쪽으로 落鄕한 이후 갑자기 文化柳氏(문화류씨)로부터 나왔다고 말하고 있다. 全州(전주)로 移籍한 지 이백여 년인데 이를 곧바로 고치지 못하고 모든 各派의 狀碣文字에 계속하여 쓰고 있으니 크게 개탄하는 바이다.
○虎巖公 墓碣文에 「公의 姓은 柳요 諱는 克恕(극서)니 系出은 全州(전주)이다.」萬曆丙午〔宣祖 39年1606年〕에 後孫 觀察使 永詢(영순) 지음이라고 하였다.
○鍾陵(종릉)의 墓碣文에 「公의 姓은 柳氏요 諱는 濱이고 系出은 全州(전주)이다.」위와 같음이라고 하였다.
○梧桐坊(오동방) 墓碣文에 「延安克恕(연안극서)도 역시 完山(완산)의 大姓이다」萬曆〔光海君 8年1616年〕丙辰에 郡守 李成吉(이성길) 지음이라고 하였다.
○遺逸齋公 墓誌에「先生의 諱는 ?이니 系出은 完山(완산)이다.」正德〔中宗 10年1515年〕壬申 文平公 李繼孟(이계맹)지음이라고 하였다.
○署令 之盛의 墓碣文에 「柳氏(류씨)는 完山(완산)의 名望있는 가문으로 諱 濕이 掌令을 贈職 받았으며 고려말에 가문에 경사가 거듭되고 복된 터전이 갖추어져 다섯 아드님과 한 분의 사위가 모두 文科에 급제하여 그의 妻는 三韓國大夫人으로 封해졌다.」弘治 庚申〔燕山君 6年 西紀1500年〕提學(제학) 權健(권건) 지음이라고 하였다.
○眞一齋公의 神道碑에 「그의 선조는 完山(완산)에서 나왔으니
고려말에 諱濕께서 집안에 慶事를 쌓았다.」正德 壬申〔中宗 7年 1512年〕晋川君 姜渾(강혼)이 지음이라고 하였다.
○壺隱公의 墓誌에「公의 성은 柳요 이름은 堪이니 完山人(완산인)이다.」隆慶己巳〔宣祖 2年1569年〕嘯皐 朴承任(박승임)이 지음이라고 하였다.
위 일곱 분 位의 묘지와 묘갈은 모두 萬曆〔明나라 연호로 1573- 1619〕이전에 나온것인데도 文化에서 分貫되었다는 언급은 없다.
右七條誌碣. 俱出於萬曆以前. 而不言文化分貫之事.
○黃竹里(황죽리) 묘갈문에 「公의 諱는 末孫이요 系出은 全州(전주)이다.諱 濕이 掌令을 증직 받으셨는데 이 어른이 우리 柳氏의 始祖할아버지가 된다.」〔明陵 乙未 肅宗 41年1715년 後孫 近지음〕이라고 하였다.
○駱峯公 諡狀에「公의 諱는 軒이요 出系는 完山(완산)이다.」 〔年月과 지은이 미상이다〕라고하였다.
○全陽府院君즉 春湖相公의 墓碣文에 「柳氏(류씨)는 系出이 全州(전주)요 고려조로 부터 빛나는 벼슬이 서로 이어졌다.」從子 觀察使 恒이 지음〕라고 하였다.
○『澤堂集』(택당집)「柳氏(류씨) 本貫 全州(전주)는 고려말에 이르러 直提學 克恕(극서)가 더욱 顯達(현달)하였다.」라고 실려 있다.
○墨溪公 旌閭閣의 비문에 「公의 字는 君瑞이고 完山人(와산인)이다.」〔陶菴 李縡가 지음〕이라고 하였다.
위의 다섯 항목은 모두 萬曆以後에 쓰여진 金石文(금석문)인데 역시 文化柳氏로 부터의 移籍은 거론되지 않았고 경기도와 충청도에 거주하는 宗人들의 行狀과 묘갈문에도 「文化」(문화)라는 두 글자는 전혀 보이지 않는데 유독 安東(안동)에 세거한 두 派의 모든 행장과 묘갈문에만 반드시 쓰여져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牧隱集』(목은집)의 「賀 竹溪安氏三子登科詩序」(하 죽계안씨삼자등과시서)에 이르되 「세 아들이 나란히 文科에 급제한 가문으로는 이들 竹溪安氏(죽계안씨) 뿐 아니라 全州柳氏(전주류씨)의克剛(극강) 克恕(극서) 克濟(극제)가 그들이라.」고 하였다.
살펴보건대 譜牒에 말하기를 「諱 濕에 이르러 全州(전주)로 移居하여 그 邑을 貫으로 삼았고 子孫들이 始祖할아버님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상상하여 보건대 掌令公께서 立朝顯達한 일이 없었는데 임금께서 籍을 下賜했을 이치는 필연코 없었을 것이고 특히 移居하였기 때문에 그邑을 本貫으로 하고 자손들이 始祖로 모셨다고 한다면 곧 牧隱의 時代에 全州(전주)로 새로운 貫을 삼은 것이 世上에 들어날 수 없을 것인데 무엇때문에 文化(문화)를 버리고 全州(전주)라고 일컬었겠는가?
이를 제처 놓고도 全州柳氏(전주류씨)는 고려조에 현달하여 앞에는 세 분의 平章事가 계셨고 뒤에는 宰臣으로 柳仁雨(류인우)가 계셨으며 寶文公 兄弟도 牧隱과는 같은 시대에 살았던 家門인 柳氏(류씨)임으로 그 때문에「全州柳氏」 (전주류씨)로 칭하였으니 단지 이 한 줄의 글로도 크게 증명될 사안이라고 할 것이다.
○宣德 丙午〔世宗 八年1426年〕文科榜目에 「生員 柳義孫(류의손)은 全州人(전주인)이다.」라고 하였다.〔이 榜目은 秋淵 禹性傳의 家藏本이다〕
○成化 丙午〔成宗 一七年1486年〕司馬榜目에 「幼學 柳軾(류식)은 본관이 全州(전주)이다.」라고 하였다.
○正德 丁卯〔中宗 二年 1507年〕文科榜目에 「江陵判官 柳軾(류식)은 본관이 全州(전주)이다.」라고 하였다.
살펴보건대 典翰公 이전에 모두 全州人(전주인)이라고 호칭하였다면 남쪽으로 落鄕한후의 戶籍을 무슨 이유로 갑자기 文化(문화)로 바꿔 불렀는가?
삼가 살펴보건대 先代에서 전하여 온 것이 위와 같은데 大略이라도 文化(문화) 두 글자는 언급함이 없었으니 만약 文化(문화)에서 分貫을 하였다면 오늘이나 옛날의 文蹟중에 어찌 한낱의 증명할 만한 것이 전혀 없었겠는가?
다음에는 거짓이란 사유를 역력히 서술하여 조목 조목 변증하기로 하겠다.
○安東(안동)에 소장되어 있는 『晋州柳氏族譜』(진주류씨족보)에는 「全州(전주) 晋州(진주) 瑞山柳氏(서산류씨)는 모두 文化柳氏의 始祖인 大丞 車達(차달)의 後孫들인데 그 世代를 失傳하였고 濕에 이르러 全州(전주)에 移居하여 그 邑을 本貫으로 하였다」고 되어 있다.
살펴보건대 이러한 잘못된 기록은 柳僉正(류첨정) 錫昌氏(석창씨)〔光海 `1年~肅宗 13年 1609~1687年〕의 通諭文에 辨證한 것이 상세하게 記述되어 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것은 『晋州柳氏譜』(진주류시보)가 安東(안동)에서 出刊되어 이와 같은 잘못된 說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安東(안동)에 사는 兩派族譜의 책머리에 확실치 않은 몇 가지 말만 믿고 「戶籍」(호적)과 『鶴峯集』(학봉집)에 실었으나 서울의 다른 派에는 알려지지 조차 않았고 全平君께서 修譜할 때에 이르러 마침내 邦直과 橒(운) 두 代를 족보의 책머리에 잘못 기록하고 또 그 序文에 쓰기를「大丞에 이르러儒州에서 일어났고 掌令公에 이르러 完山(완산)에서 흥하였다.」 고 하였으니 僉正이 이에 곧바로 그 잘못된 것을 배척하였으니 그 文錄이 책 속에 기록되어 있어 상고하여 알만하게 되었다.
柳承緖(류승서)의 家牒에 이르기를 「始祖 車達(차달)은 高麗의 大丞이요 그 아들인 孝金은 左尹이요 孝金의 아들인 金奐(김환)은 大將軍이요 金奐(김환)의 아들 盧一(노일)은 檢校 大將軍이요 盧一(노일)의 아들 寶春(보춘)은 少監이요 寶春(보춘)의 아들 寵 역시 少監을 지냈고 그의 아들 公權은 參政이요 文簡으로 諡號를 받았고 아들 彦琛(언침)은 密直使이고 아들 淳(순)은 翰林學士요 아들 成庇는 文山君이란 君號를 받고 아들 湜(식)은 宰臣의 반열에 올랐으며 아들 安澤(안택)은 判官을 지냈으며 아들인 寬(관)의 옛 이름은 觀(관)이었는데 右議政을 지냈다. 그의아들이 邦祐(방우) 邦輔(방보) 邦直(방직) 삼형제인데 邦祐(방우)의 아들이 樞요, 邦直(방직) 의 아들이 橒(운) ?(재) 樑(량) 三人인데 橒(운)의 아들이 濕(습) 津(진) 형제이니 濕(습)은 全州柳氏(전주류씨)가 되고 ?(재)는 晋州柳氏(진주류씨)가 되었으며 樑(량)의 아들 형제 즉 渾(혼)과 澈(철) 두 아들중 渾(혼)은 瑞山柳氏(서산류씨)로 分貫되었다.」고 쓰여 있다.
위의 牒(첩)은 郡守 金啓光(김계광)이 義興人(의흥인) 李琪林(이기림)에게서 얻었고 李(이)는 淸道郡守 柳信男(류신남)에게서 얻었으며 柳(류)는 兵使 柳承緖(류승서)에게서 얻었다고 했다. 또한 柳兵使는 文化柳氏族譜中에서 얻었다고 말했는데 文化柳氏(문화류씨)의 옛날 족보나 오늘날의 족보에 써있는 邦祐(방우) 以下 열 두명의 이름은 모두가 실체가 없는 망발이어서 상고할 수 없는 것들이다.
다시 살펴보건대 邦直(방직)과 橒(운) 二代의 이름은 文化柳氏族譜에도 실려있지 않으니 이것은 분명히 뒷사람들의 말만 듣고 지어낸 것이다.
虎巖墓碣文(호암묘갈문)에 처음으로 「橒」(운)字가 쓰여있고 『壬辰譜』(임진보) 책머리에 또 邦直(방직)을 추가 하였으니 이것은 참으로 대단히 未安한 일이 겠으나 두 번에 걸쳐서 刊行한 『丙午譜』(병오보)의 世系 첫 줄에 기록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할 것이다.
文化柳氏(문화류씨)『己巳譜』(기사보)〔肅宗 15年 1689年〕에 車達(차달)로부터 淳(순)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上記와 같고 淳(순)의 아들인 良?(양재) 혹은 全州君-仁庇晋州派--로되어 있다.
살펴보건대 良?(양재)「全州君」(전주군)에 대한 說은 심히 의심스러워 辨證하기가 어려울뿐 더러 辛丑年〔世宗 3年 1421年〕에 右代言 穎(영)이 만든『永樂譜』(영락보)와 壬戌年〔明宗17年 1562年〕에 僉正 希潛(희잠)이 撰한 『嘉靖譜』(가정보)를 놓고 자세히 살펴 보아도 모두 위와 같은 내용은 빠져있으니 이는 극히 잘못된 것임이 틀림없다.
大凡(대범) 옛날에 없었다가 오늘날에 와서 있는 것은 만일 확실한 근거가 없다면 이들은 모두 진실이 아닌 거짓 저술이 되는 것인데 하물며 극히 의심스러운 것이야 말로 재론할 필요가 있겠는가?
柳僉正(류첨정) 錫昌氏(석창씨) 그리고 府使 冕(면) 府使 ?(만)의 通諭文에 이르되 安東(안동)에 소장된『晋州柳氏族譜』(진주류씨족보)에 云云-위에 柳僉正(류첨정)의 글은 이미 인용하였다-하였으나 晋州柳氏(진주류씨)의 여러 大族譜를 자세히 살펴보면 곧 僉正 柳希潛(류희잠)이 말하기를「彦琛(언침)이 晋州(진주)로 移居한 入鄕祖라고 하였으나 彦琛(언침)의 曾孫子인 塘湜(당식)의 후손들 모두가 文化柳氏(문화류씨)로 본관을 삼고 있으니 그렇다면 彦琛(언침)이 晋州柳氏(진주류씨)의 始祖가 아닌것이 明確하다.」고 하였다.
또한 安東(안동)의 柳宗禮(류종례)라는 사람이 소장하고 있는 『晋州柳氏族譜』(진주류씨족보)를 고찰하여 보면 역시 全州(전주) 晋州(진주) 瑞山(서산)의「三柳分貫說」(삼류분관설)이 전혀 없다.
또 『文化柳氏大族譜』(문화류씨대족보)를 보면 곧 柳寬(류관)의 두 아들 孟聞(맹문) 季聞(계문)만 나와있고 季聞(계문)의 두 아들 ?(참)과 晥(환)이 쓰여져 있을 뿐 寬(관)의 아들이라는 邦直(방직)과 邦直(방직)의 아들 橒(운) ?(재) 樑(량)에서 分貫하였다는 세 邑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으니 이른바 「全州柳氏」(전주류씨)등이 모두 大丞 車達(차달)의 후손이라고 한 것은 실로 억측한 견해가 아니면 妄說인 것이 분명하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晋州柳氏(진주류씨)의 뿌리 또한 文化柳氏(문화류씨)가 아닌 것이 명확한 것이니 全州柳氏(전주류씨)의 淵源(연원)이 文化柳氏(문화류씨)라는 說은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위와같은 通諭文(통유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단연코 全州柳氏(전주류씨)의 근본이 文化柳氏(문화류씨)에서 나왔다는 것은 그릇된 것이요 더 未盡한 곳 네 가지 條目이 있으니 다음과 같다.
첫째「文化」(문화)의 柳邦直(류방직) 云云 하지만 처음에 邦直(방직)과 橒(운)등 名啣의 白撰을 알지 못하였다.
둘째 柳寬(류관)의 아들은 孟聞(맹문)과 季聞(계문)이나 처음에 柳寬(류관)당시의 世代가 거꾸로놓여진 것을 辨證하지 못하였다.
셋째 이미 彦琛(언침)을 들어 晋州柳氏(진주류씨)의 始祖로 하고 또 橒(운) ?(재) 樑(량)을 끌어 들여 本貫이 나누어진 일을 인용하고 있으나 두 가지의 說이 판이하게 서로 어긋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넷째 全州柳氏(전주류씨)가 이미 高麗朝 初에 시작된 것을 말하지 않고 감춘 것이다.
이와같은 類는 모두 진실에 근거하여 자세히 고찰할 수 있는 사실이 未備함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다만 옛날에 없었던 分貫의 說이 지금에 와서 있다는 것만을 충분하게알 수 있을 뿐이다.
『文獻備考』(문헌비고)〔正祖 六年1783〕에 「全州柳氏」(전주류씨)는 本貫이 文化柳氏(문화류씨)에서 分貫되었다.」라고 되어있다.
살펴보자면 이 책은 正祖때 儒臣에게 命하여 撰進한 命撰本이다. 이 책에 기록된 것이 비록 이와같이 사실과 다르나 儒臣의 특별한 견해가 있어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다만 이것은 우리 柳氏(류씨)의 近世(근세)에 傳하여 온 것이 이와 같기 때문에 그대로 기록된 것일 뿐이다. 보는 이들은 이 책을 근거로 단안을 내려서는 온당치 않은 일이다.
?判 柳誼(류의)의「家史」(가사)에 引用된 文獻(문헌)인『永慕錄』(영모록)〔西厓 柳成龍이 지은 遺書〕에 이르기를 柳寬(류관)의 아들 이름을 邦祐(방우)로 적고 있는데 邦祐(방우)는 곧 고려조 때 사람이고 寬(관)은 조선조의 右議政(우의정)이었으니 앞뒤가 크게 달라 이것이 잘못 전해진것 같고『文化柳氏族譜』(문화류씨족보)에는 예로부터 邦祐(방우)라는 사람은 없었다.
○或者가 이르되 文化柳氏(문화류씨)의 來歷은 잘 알 수가 없고 全州柳氏(전주류씨)는 처음부터 別派라고 말했다.
살펴보건대 『永慕錄』(영모록)은 누가 지었는지 알수 없으나 全州柳氏(전주류씨)에 대한 說이 이와같은 것으로 미루어 이미 옛사람들도 살펴보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살피건대 全州柳氏(전주류씨)가 이미 고려초에 始作되었고 中葉에서 顯達(현달)한 것이 이와 같은데 비록 그 족보의 계통을 잃어버려 자세히 상고할 연유가 없으니 文化柳氏(문화류씨)에서 分貫되었다는 잘못된 說은 다른 증거를 기다리지 않고도 저절로 깨칠 수 있는 것이다.
○家弟인 徽文(휘문)이 말하기를 「全州柳氏(전주류씨)와 晋州柳氏(진주류씨)가 文化柳氏(문화류씨)에서 나왔다는 說은 대개 晋州柳氏(진주류씨)가 文化柳氏(문화류씨) 집안에 장가간 女壻이고 全州柳氏(전주류씨)가 또한 文化柳氏(문화류씨)의 外孫壻가 되기 때문에 아울러 文化柳氏(문화류씨)의 족보에 올라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或者가 理致에 맞지않은 說을 잘못 해석하여 마침내 分貫의 의혹이 생겨난 것이니 이미 晋州柳氏(진주류씨)가 잘못 되었고 따라서 全州柳氏(전주류씨)도 잘못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晋州柳氏(진주류씨)는 그 그릇된 것을 바로 곧 깨우쳤으나 全州柳氏(전주류씨)는 아직도 의혹을 풀지 못하고 있으니 그 잘못이 심하다고 하겠다.
떠도는 말을 가볍게 믿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이와같다.
이는 비단 全州柳氏(전주류씨)만이 그런 것이 아니고 지금 전국의 柳氏姓을 가진 사람들 스스로가 大丞公의 후손 系行을 끌어다 붙이면서「본래 柳氏는 同姓同本이며 잘못된 것은 晋州柳氏族譜(진주류씨족보)일 뿐이라」고들 말하니 그렇다면 高麗太祖의 國舅인 柳天弓(류천궁)까지도 역시 大丞公의 柳氏(류씨)중 하나의 柳氏(류씨)라고 하겠는가?
丙子譜에 수록된 全州柳氏譜系辨證文에서 十六代孫炳文 謹撰
뿌리에 대한 재 정립
우리 전주류씨는 壬辰譜(임진보) 창간 전에 전릉부원군 묘비(춘호공 찬)에는 完山伯 諱 濕을 始祖로 하여 繼代하였고 그 上系는 言及이 없으나 직제학공 묘비(북천공 찬), 전양부원군 묘비(구봉공찬)를 건립한 내용을 살펴보면 邦直(방직)과 橒(운)을 시조의 祖(조),考(고)로 기록은 하였으나 分貫說(분관설)에 관한 기록은 없었다.
그후 60년이 지나 도계공(휘심)께서 족보를 창간하며 많은 고심을 하신 것으로 보여진다. 족보의 편집내용 첫 기록을 別書(별서)로 한 점과 上系(상계)를 실전하여 繼代(계대)를 하지 못하고 완산백 諱(휘) 濕(습)을 시조로 하여 계대하고 효종 3년 壬辰(1652년)에 출간하여 임진보라 명명한 이래 창간보로서 오늘에 전해오고 있다. 영조 2년 丙午(1726년)에 평창군수 選(선)께서 제2 간행본 병오보 출간시에는 창간보의 머리에 기록한 2대(방직,운)의 오류됨을 첨정 錫昌(석창),부사 冕(면),부사 ?(만)등 3숙질이 밝혀내고 있는 것을 凡例(범례)에 辨證(변증)하여 2대를 삭제한다, 하고 기록을 빼버렸다. 점차적으로 후세들은 의문을 갗고 60년 후인 정조 10년(1786년)에 안동부사 義養(의양)께서 제 3간행본인 再丙午譜(재병오보)를 출간하면서도 上系(상계) 2대(방직,운)를 기록하지 않았다. 고종 13년 丙子(1876년)에 副司果(부사과) 南珪(남규)공께서 제4간행본인 병자보 17책을 출간하면서 그간에 素隱公 炳文(소은공 병문),好古窩公 徽文(호고와공 휘문) 형제분이 변증자료로 고려말 문헌 목은 李穡(이색)문고 중 죽계안씨 3자등과(登科) 축하 시문중에는 전주류씨 극강(克剛) 극서(克恕) 극제(克濟)에 기록을 인용하여 완산백 시조(휘 습)께서 전주로 관향이 정해져 있다는 것을 변증하여 범례에 기록하고 있으며 우왕 2년 병진(1376년) 문과에 급제한 극제(해동용방 수록)의 부는 濕(습) 貫(관)은 전주로 기록되어 전하고 있다. 甲子年(1924년) 종사에 참여하여 갑자보를 주관하신 碧(벽)씨는 족보를 출간하면서 南珪(남규)씨가 병자보 간행때 변증한 것을 반증하고 있다. 이것은 문헌비고를 인용하여 문화분관설을 주장하고 있는데 확실한 증빙자료도 없이 증보 문헌비고에 약술된 내용만으로 문화분관설을 받아들인 것은 옳치 않다고 판단된다.
세종 5년 癸卯(1423년)에 출간한 문화류씨의 족보인 永樂譜(영락보) 서문과 명종 17년 壬戌(임술1562년)에 출간한 嘉靖譜(가정보) 서문등 두곳 모두 분관설의 기록이 없는것으로 미루어 볼 때 문화 분관설과 관련,繼代(계대)문제나 分貫(분관)문제에 대한 것,어느 것을 막론하고 확실히 단정 지울수 없으니 우리 후손들은 하나의 설로만 믿어 주시기 바란다.지난 2001년 신사 4월에 駱峰公(낙봉공) 종중에서는 후손들의 의문점을 해소키 위하여 병자보 간행시 서문과 수차례 범례에 변증한 것을 譯文(역문)으로 출간하면서 完山伯(완산백) 시조고의 상계는 참고사료를 구할 길이 없어 아쉬움은 많지만 더 이상 논하지 않기로 한 사실이 想起(상기)된다.
이상의 고찰과 같이 시조 이상의 상계에 대한 역사적인 사료가 아직까지는 추가로 발견 된 바도 없고, 위의 내용들은 우리의 선대들과 타인의 문헌 속에 단편적으로 기술되어 마땅히 확실한 繼代(계대)를 가늠 할 수 있는 근거도 찾을 길 없으니, 이번 癸未譜(계미보) 발간 을 맞아 시조 완산백 습 이상의 상계에 대한 추론이나 문화 분관설 등을 향후 각파 종회에서 문헌이나 금석문등에 사용하지 않는 지혜가 필요할 것으로 판단된다. 우리 전주 柳門(류문)의 최초의 족보 이래로 견지해 오신 선조님들의 뜻에 따라 우리 전주 류문의 뿌리에 대한 논쟁은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어야겠다.
라. 柳字를 姓氏로 한 本貫
全州, 文化, 晉州, 瑞山, 豊山, 善山, 高興, 靈光, 陸昌, 貞州, 白川, 若木, 富平, 延安 등이 있다.
전주류씨의 연혁
1. 전주(貫鄕全州)의 연혁(沿革)
전주류씨의 관향(貫鄕) 전주(全州)는 전라북도 중앙에 위치한 도시(都市)로서 고대 마한(馬韓)의 원산성(圓山城)에서 유래하며, 백제(百濟) 때는 완산(完山), 비사벌(比斯伐) 등으로 불리었고, 신라 진흥왕18(557)년에 완산주로 되었으며, 그 후 경덕왕15(756)년에는 완산주의 완(完)을 의역(意譯)하여 전주(全州)로 고쳤다.
신라 효공왕4(900)년에 견훤이 후 백제를 세워 40여 년간 이곳 완산주를 도읍지로 하였고, 고려 태조19(936)년에 태조가 이곳을 점령하여 안남도호부라 하였으며, 태조23(940)년에 전주로 되었다.
그 후 승화절도안무사, 전주순의군절도사, 안남대도호부, 전주목을 거쳐 공민왕4(1355)년에 완산부로 되었다. 조선시대 태조1(1392)년에 선조(先祖)의 고향이라 하여 완산부로 개칭하였고 태종3(1403)년에 다시 전주부로 되었으며, 여러 번 변천을 거쳐 1949년에 전주시로 개편되었다.
2. 류습(柳濕)파의 연혁(沿革)
전주류씨 시조 완산백(完山伯) 류습(柳濕)의 생몰년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사위 대제학(大提學) 심효생(1349∼1398)이 고려 충정왕1(1349)년에 출생한 기록으로 보면 전주류씨는 약 700년의 역사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1577년 묘갈문에 의하면 시조(始祖) 습(濕)은 슬하에 5남1녀를 두었는데 큰아들 극강(克剛), 둘째 아들 극서(克恕), 넷째 아들 극제(克濟) 및 사위 심효생(沈孝生)은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셋째 아들 극수(克修)와 막내아들 극거(克渠)는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다.
따라서 고려 때 세 아들이 문과(文科)에 급제를 하면 나라 법에 따라 부모에게 벼슬을 주게 되어있어 시조는 봉정대부 사헌부 장령(掌令)에, 시조비(始祖妣) 전주최씨는 국대부인(國大夫人)에 추증되고, 조선 초에 이르러 시조(始祖)의 따님인 심효생의 부인 류씨(柳氏)가 정경옹주(貞慶翁主)가 되었기 때문에 시조는 완산백(完山伯)에, 시조비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추봉(追封)된 것으로 보인다.
시조 류습(柳濕)의 아들 5형제 중 둘째인 극서(克恕)는 고려 말기에 중정대부(中正大夫)로 보문각(寶文閣) 직제학(直提學), 지제교(知製敎), 연안부사를 지내고, 그의 아들 빈(濱)은 조선 초기에 영흥부사를 하였다. 빈(濱)의 아들 경손(敬孫)은 해주 판관을, 의손(義孫, 회헌공)은 세종 때 이조ㆍ예조참판을 하였고, 말손(末孫)은 순창 군수를 거쳐 사헌부 집의(執義)를 지냈다.
경손(敬孫)의 손자 숭조(崇祖)는 18년간 성균관에 재직하며 성리학(性理學)을 깊이 연구하여 경사(經史)에 통달하였고 말손의 셋째 아들로서 회헌공[의손]의 양아들이 된 계동(季潼)은 충무위 부사직을 역임하고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계동(季潼)의 큰아들 식(軾)은 인천도호부사를 지내고, 막내아들 곡(轂)은 전라도 고산현 현감(縣監)으로 부임하여 고산현 율곡리에 있는 시조 묘에 5대봉사(奉祠)의 기틀을 마련하여 모시도록 하니 오늘날 많은 자손들의 조상숭배에 귀감이 되었으며, 식(軾)의 큰 아들 윤덕(潤德)은 중종 때 대사헌, 예조 참판, 한성 우윤(右尹) 등을 지냈다.
말손(末孫)의 손자 헌(軒)은 간신배의 방자함을 탄핵하는 상소(上訴)를 올리자 화가 난 연산군이 제주도로 귀양을 보내고 사간원을 없애버리니 연산군(燕山君) 시대의 마지막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헌(軒)의 아들 세린(世麟)은 기묘사화 때 성균관 유생을 이끌고 조광조를 구제하는 상소(上疏)를 하였으며, 증손 영길(永吉)은 예조참판에 이르렀고 그의 아우 영경(永慶)은 정유재란 때 큰 공을 세워 전양부원군에 봉해지고 영의정이 되어 부친 의(儀)도 전릉부원군이 되었다.
한편 묵계공 복립(復立)은 종부시(宗簿寺) 주부(主簿)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부임치 않았는데 임진왜란 때 진주성을 지키던 외숙 경상 우감사 김성일(金誠一)을 따라가 참모 역할과 함께 수문장(守門將)으로 전투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웠는데 진주성이 왜적(倭敵)에게 함락되어 순절(殉節)하였다.
이순신 장군의 부장으로 참전하여 크게 공을 세운 조생(肇生)은 호성공신으로서 부친, 아들, 손자 4대가 봉군(封君)의 교지(敎旨)를 받았다. 인조 때 전창군(全昌君)에 봉해진 영의정 영경(永慶)의 손자 정량(廷亮)은 사은사(謝恩使), 진향사(進香使)로 청나라에 3번 다녀왔고 도총관(都摠管)에 이르렀으며, 전창군의 부친 열(悅)은 전원군에, 송설체(松雪體) 글씨에 능한 전원군 아들 심(淰)은 참판으로서 전평군에 봉해져 5대가 봉군(封君)이 되었다.
영성(永成)의 셋째 아들 질(秩)은 인조1(1623)년에 알성급제(謁聖及第)하여 병자호란 때 철원부사로서 청병에 맞서다 전사(戰死)하였으며, 청백리(淸白吏)에 오른 경창(慶昌)은 사마시, 문과에 급제하여 강원도관찰사, 대사간에 이르렀다.
영조 때 대사간을 지내고 제자백가와 천문에 정통한 정원(正源)은 병률(兵律)과 도학(道學)에 능통하여 삼산문집(三山文集)과 하락지요(河洛指要)를 지었고 영순(永詢)은 경상도관찰사로 있으면서 안동의 기봉공[복기]과 함께 실전(失傳)된 직제학공[극서] 묘소를 찾아 묘비를 세웠다. 영변부사를 지낸 정양(鼎養)은 문장이 뛰어나 고양시와 용인시에 있는 묵계공 비문을 비롯하여 여러 문중 선조(先祖)의 비문을 지었다.
정조 때 춘관지(春官志) 등을 편찬한 의양(義養)은 승지(承旨)가 되어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편집에 참여하여 문명(文名)을 떨쳤고 홍주목사로 선정(善政)을 베푼 의(誼)는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다.
조선 후기에 완(玩)은 무과(武科)로 참령(參領)을 하였고, 정(珽)은 문과로 교리(校理)를 지냈다. 언론인이며, 교육자이며, 애국계몽운동가인 근(瑾)은 구한말(舊韓末)에 탁지부(度支部, 재무부) 주사(主事)를 하고 장지연 등과 황성신문을 창간하여 5대 황성신문사장이 되었다.
또한 대종교(大倧敎)와 광문회(光文會)사업에 종사하였고, 휘문의숙장[교장], 중앙학교장을 하였으며, 3ㆍ1운동에 참여하고 1920년 동아일보 창간 때는 양기탁과 함께 고문이 되었고 1962년에 건국공로훈장이 추서 되었다.
독립운동가인 임(林)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인식(寅植)은 민족운동가ㆍ교육자로 활약하였고, 영(瑛)은 해방 후 대법관을 지냈으며, 기수(驥秀)는 용인군 제2대 국회의원을 하였고 그의 손자 기홍(基洪)도 제17, 19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한편 치송(致松)은 제6, 9, 10, 11, 12대 국회의원을 하고 민주한국당 총재를 지내었다.
청(靑)은 전주고등학교장을 거쳐 제4, 5, 6, 8대 국회의원을 하고 전주류씨 문중에서 운영하는 “유일여자고등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이 되었으며, 기정(琦諪)은 제8, 9대 국회의원, 중소기업협동조합회장을 하였다.
전주류씨는 1360년경에 관향(貫鄕)인 전주에 터를 잡고 살았으며, 대를 거듭할수록 크게 번성하여 점차 인근으로 세거지(世居地)를 확대해 나가 그중 일부는 관직을 따라 서울과 파주, 의정부, 광주, 이천, 용인 등 경기지역으로 옮겨가 살게 되었다.
한편 영의정 영경(永慶)이 광해정변(光海政變)에 휘말려 일족이 화가 미치자 장단, 평창, 음성, 임실, 진주 등지로 흩어져 살게 되었고 강원감사를 지낸 계반(季潘)의 일부 자손들이 임진강변과 황해도, 강원도 내에 널리 퍼져 살게 되었다.
2000년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주류씨는 남한에 61,650명[19,008가구]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전주류씨는 시조를 달리하는 3개파 즉, 혼(渾)파, 습(濕)파, 지(池)파가 있으므로 습(濕)을 시조로 하는 전주류씨는 이보다 약간 적을 것으로 본다.
류습파의 항렬
항렬(行列)은 같은 혈족 사이의 세계(世系)를 나타내기 위한 문중(門中)의 율법(律法)으로서 항렬자는 이름자 중에 한 글자를 공통으로 사용하여 같은 혈족의 같은 세대(世代)를 나타내는 돌림자를 말하며, 선조들은 자손들의 항렬자와 배합법까지 미리 정하여 후손들이 이를 따르도록 관례(慣例)로 만들어 놓았다.
항렬은 가문(家門)과 각 분파(分派)마다 다르나 대표적인 것으로는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甲乙丙丁戊己庚辛壬癸)”를 순서로 하는 십간법(十干法),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를 순서로 하는 십이지법(十二支法) 및 “금수목화토(金水木火土)”의 변을 사용하는 오행상생법(五行相生法)이 있다.
1924년에 발간한 “전주류씨갑자보”에서는 오행상생법을 이용하여 우리 문중(門中)의 향렬자를 다음 표와 같이 정하였다.
그러나 인구가 많아 이 항렬자 1자(字)로는 동명이인(同名異人)이 많게 되므로 이 항렬자와 함께 금수목화토(金水木火土)”의 변으로 항렬자를 더 정하여 사용하고 있는 문중(門中)도 있다.
전주류씨 항렬표
출처 전주류씨 대종중
http://jjryu.co.kr/index.php?mid=generation
[출처] 전주류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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