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와 전국의 거북바위 전설 모음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1. 충청남도 공주시 금학동에서 전승되고 있는 거북바위
[개설]
[거북바위 전설」
동해 용궁인 신라와 서해 용궁인 백제가 다투다가 망하지 않고,
만약 한 나라만 있었더라면 길지인 공주가
수도로서 백성들도 영원한 태평성대를 누렸을 것이라는
비판적인 역사의식이 투사되어 있다고 하겠다.
(상왕산에 있는 두개의 거북바위)
[채록/수집상황]
1992년에 공주시·공주문화원에서 간행한
『공주의 맥』과 역시 같은 해 공주문화원임헌도
[내용]
아득한 옛날 우리나라의 동해와 서해에는 수많은 거북이 살고 있었다.
이들 거북은 공주의 ‘우금고개’ 뒷산에 있는
천년초(千年草)를 뜯어먹기 위해 이곳을 다녀갔다.
천년초를 먹으면 수명이 천년을 넘어
무한히 살 수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공주에 사는 한 나무꾼이
우금고개 뒷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는데
놀랍게도 큰 거북들이 열심히 무슨 풀을 뜯어먹고 있었다.
이것을 지켜 본 그 나무꾼도 이 풀을 뜯어 먹으니
그 향취가 좋을 뿐만 아니라 맛이 퍽 특이하였다.
나무꾼은 거북을 자기 집으로 인도하여
맛있는 음식을 먹이며 우대하였다.
그리고 거북을 따라 용궁에 들어갔다.
나무꾼은 용궁에서 진수성찬을 대접받으며 꿈같은 세월을 보냈다.
하루는 용왕에게 고향에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였다.
용왕은 인간 세상에서 거북을 우대해 준 데 대하여
깊이 사례하며 여의주(如意珠) 한 개를 주었다.
고향에 돌아온 나무꾼은
인간 세상이 어느 사이 수백 년이 지나 있음에 놀랐다.
하지만 이내 적응하여 배필을 얻고 행복하게 살았다.
또한 천년초를 먹으러
공주를 방문하는 거북을 초대하여 음식을 대접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우금고개에서 거북 두 마리가
서로 천년초를 독점하려고 싸우는 것을 보았다.
이들은 각각 서해와 동해의 거북이었다.
머무는 용궁세계가 달라
천년초를 캐가지고 자기의 용궁으로 가려 하는 것이었다.
나무꾼이 이들을 화해시키려 하였지만
싸움은 더욱 치열해져 그만 포기하고 돌아왔다.
마침내 하늘에 먹구름이 사방에서 모여들며 폭풍이 몰아쳤다.
천지가 뒤집히는 것만 같았다.
뇌성벽력과 함께 사나운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하더니
우금고개는 온통 아수라장으로 화하였다.
날이 밝아 나무꾼이 우금고개에 가보았다.
두 거북이 싸우던 장소에는 천년초도 사라지고
거북이 모양을 한 바위 두 개만 남아있었다.
사람들은 탐욕스런 거북이에게
하늘이 벌을 내린 것이라고 하면서
이들 바위를 거북바위라 불렀다.
2. 용궁에 갈 수 없게 된 거북이
(거북바위)
만폭동 구담에는 피둥피둥 살찐 거북이가
엎드려 있는 것과 같은 “거북바위”가 파란 담수 위에 떠있고
그 옆에 있는 너럭바위에는 어린애들이 드나들 수 있을 만한 큰 구멍이 뚫어져있다.
이 거북바위와 바위구멍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깃들어 있다.
한 옛날 용궁에는 마음씨 어질고 부지런한 거북이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거북이는 금강산경치가 좋다하기에
용궁 앞에 엎드려 금강산 구경을 시켜줄 것을 간청하였다.
용왕은 착하기로 이름난 거북이의 소원이기에
쾌히 승낙하고 단풍이 떨어지기 전에 돌아오라고 타일렀다.
너럭바위 위에 뚫어진 구멍은
바로 그때에 금강산 구경을 온 거북이이가
용궁에서 땅위로 기어나 온 구멍이었다고 한다.
거북이가 이 구명으로 해서 만폭동 골짜기에 나와 보니
계절은 가을이라 풍악산 계곡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온 계곡이 빨갛게 물들었는데 양쪽에는 기암괴석이 층층이 쌓여 있고
꼭대기에서 떨어지는 폭포수는 진주를 뿌리는 듯
알알이 흩어져 내리며 파랗게 고여 있는 담수는 가을하늘보다 더 맑다.
(겸재의 금강전도)
거북이는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한 걸음 한 걸음 옮겨가면서
여덟 담소를 차례로 보았는데 그 경치가 너무도 아름다워 다시 한 바퀴 더 돌아보았다.
금강산에는 아름다운 곳이 많았지만
거북이로서는 이곳을 떠나 다른 명승지에 가볼 여념이 없었다.
볼수록 더욱 좋았다.
그래서 또 한바퀴....이렇게 몇 번 돌아다니며 보니
그만 돌아가야 할 날짜를 까맣게 잊어버렸다.
한잎 두잎 단풍이 지기 시작해서야
거북이는 “아뿔사”하고 자기 잘못을 깨달았다.
바쁜 걸음으로 본래 나왔던 구명을 찾아와서 용궁에 가려고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머리만 들어가고 몸뚱이는 모서리에 딸 걸린다.
아무리 몸부림치며 발버둥질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금강산의 경치가 하도 좋은데다가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한창 가을시절에
산삼녹용을 씻어 내린다는 계곡의 물을 마시며
명승지를 구경하고 나니 그 사이에 뚱뚱보가 되었던 것이다.
"봉래 풍악산인 금강은 가장 으뜸의 조화를 이룬 동천"
이라는 한문글씨가 음각되어 있다.
그러나 거북이는 분명 자기가 나왔던 구멍인데
왜 다시 들어갈 수 없는지 그 까닭을 알지 못하였다.
거북이는 기진맥진하였다.....
구담에 두리번거리며 엎드려있는 “거북바위”가
바로 금강산에서 살쪄 용궁에 돌아갈 수 없게 된
바로 그 거북이 화신이라고 전한다.
이후부터 그 바위를 “거북바위”라 하고
그 소를 “거북이 못”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북한 조선화 작가의 그림 관음폭포 만폭동)
3. 거북바위
옛날 강천산 산골에 살던 한 청년이 병든 어머니를 위해 산삼을 찾아 헤메다가
달빛에 비친 산삼을 발견하고 정신없이 달려가다 그만 폭포에 빠지고 말았다.
때마침 폭포 아래 용소에서 목욕을 하던 선녀가 청년을 발견하고
어머니를 향한 그 청년의 효심에 감동한 나머지 산삼을 찾아주고
둘은 곧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옥황상제는 그 둘에게
천년 동안 폭포에서 거북이로 살다가 천년이 되는 날
동트기 전까지 폭포 정상에 오르면 하늘로 올려 주리라 약속을 했다.
마침내 천년이 되는 날...
두 거북이는 폭포 정상을 향해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암 거북이를 먼저 정상에 올려 보내고,
숫 거북이가 정상으로 오르려는 순간,
그 들을 시기한 호랑이의 공격을 받고 싸우다가 그만 동이 트고 말았다.
이를 지켜보던 옥황상제는
이루지 못한 그 들의 애절한 사랑을 영원히 지켜주고자
그 들을 바위로 변하게 했다.
이 후 사람들은 그 바위를 거북바위라 부르게 되었다.
- 거북바위 전설에서-
(동판을 보고 거북바위를 보면)
4. 만폭동 거북바위전설
글 교무부
보덕암(普德庵) 위에는 만폭동의 절승경개를 굽어볼 수 있는 좋은 전망대가 있다.
이곳에서 둘러 보면 나는가 하면 뛰는 것 같은 기묘한 바위들과
듬성듬성한 소나무 숲이 훤히 드러나는 대향로봉,
소향로봉이 속삭이듯 나란히 앉아 있다.
보덕암에서 다시 분설담으로 내려와 만천(萬川)을 따라 오르면
계곡을 가로지른 커다란 반석을 타고 넘으며
13m 높이에서 장쾌하게 떨어지는 진주폭포가 등장한다.
이 폭포에서 쏟아지는 물은
층을 이룬 바위 턱에 부딪혀 진주알처럼 방울방울 흩어져서
쪽빛같이 푸르고 수정처럼 맑은 소(沼)에 내려앉는다.
이 소가 만폭팔담 중에서 가장 기세 좋고 웅장하다는
진주담(眞珠潭: 깊이 7.5m, 넓이 214m²)이다.
진주담 위에는 개울바닥에 돌확 하나가 크게 패여 흐르는 물을 받았다가
진주폭포로 넘겨 보내는 못이 있는데 진주담 위에 있다 하여 윗소라 부른다.
윗소를 지나면 개울 양쪽에 솟은 봉우리들이
계곡 안쪽으로 좁아지면서 돌이 많던 산의 모습이
점차 울창한 산림으로 바뀐다.
왼편의 향로봉 경사면에는 ‘法紀菩薩(법기보살)
‘天下奇絶(천하기절)’, ‘釋迦牟尼佛(석가모니불)’이라는 글씨가 나란히 새겨져 있다.
법기보살과 천하기절은 해강
김규진씨의 글씨로, 그가 쓴 구룡연의 ‘彌勒佛(미륵불)’ 다음으로
금강산에서 큰 글씨이다.
오른편 법기봉에는
사람처럼 생긴 큰 바위와 작은 바위가 마주 서 있다.
큰 바위는 무엇을 가르치는 것 같고,
작은 바위는 공손히 머리를 수그린 채 가르침을 받는 듯하다.
이렇게 기묘하게 생긴 바위들
이 법기보살(法起菩薩)과 파륜보살(波崙菩薩)의 화신으로 알려진
법기암과 파륜암이다.
여기서 계곡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면
오른쪽 바위 밑에 거북이처럼 생긴 바위가 머리를 쳐들고
물 가운데 앉아 있는 소가 있다.
만폭팔담 중에서 여섯 번째로 등장하는 구담(龜潭)인데 그 주변에
는 ‘龜潭(구담)’이란 글씨와 ‘天下第一名山(천하제일명산)’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구담에서 흰 너럭바위를 씻으며 왼쪽으로 꺾여 흐르는 물길에도
거북모양으로 패인 자그마한 확이 있다.
약 1.5m 깊이로 패인 이 ‘확’과 파란 담수 위에
피둥피둥 살찐 거북이가 엎드려 있는 듯한
‘거북바위’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옛날 바닷속 용궁에는
마음씨가 어질고 부지런하기로 소문난 거북이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
거북은 조선의 금강산이 천하제일의 명산이란 얘기를 듣고
꼭 한번 구경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용왕이 계시는 궁궐 앞에 엎드려
금강산에 다녀오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간청했다.
용왕은 어질기로 소문난 거북이의 소원이었기에 흔쾌히 승낙했지만,
단풍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반드시 돌아와야 한다고 명했다.
거북이가 용왕이 알려준 통로를 이용해 땅 위로 기어 나왔더니,
만폭동 계곡의 너럭바위 위에 자신이 서있었다.
그는 다시 돌아갈 때를 생각해 이 구멍의 위치를 잘 기억해 두었다.
계절이 가을인지라 계곡마다 붉은 단풍으로 수를 놓았고
봉우리들은 오색으로 치장하여 참으로 아름다웠다.
붉게 물든 계곡의 산 중턱에는 기암괴석이 층층이 쌓여있고,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폭포수는 진주를
뿌리듯 알알이 흩어져 내렸으며,
파랗게 고여 있는 담수는 가을하늘보다 더 맑았다.
난생 처음 보는 절경에 도취된 거북은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며
팔담(八潭)을 차례로 보았지만,
그 경치가 너무도 아름다워 다시 한 바퀴 돌아보았다.
금강산에는 경치가 빼어난 곳들이 많았지만
거북은 이곳을 떠나 다른 곳을 둘러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만폭동의 경치는 보면 볼수록 더욱 좋았기 때문에
또다시 한 바퀴 더 돌았다.
이렇게 몇 차례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 자신이
용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말았다.
한 잎 두 잎 단풍이 지기 시작하자 비로
소 거북은 “아뿔싸!” 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걸음을 재촉하여 처음 나왔던 그 구멍으로
돌아와서 용궁에 가기 위해 대가리를 들이밀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대가리는 들어가는데
몸뚱이가 그만 모서리에 걸리고 말았던 것이다.
거북이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도 소용이 없었다.
금강산의 절경을 구경하느라 허기진 데다가
천고마비의 계절에 먹을거리도 풍성해 그것들로 배를 채우다 보니
어느 사이에 체중이 많이 불었던 것이다.
분명 자기가 나왔던 구멍인데 왜 다시 들어갈 수 없는지
그 까닭을 몰랐던 거북은 결국 기진맥진하고 말았다.
그 후, 못 가운데서 두리번거리며 엎드려 있는 바위가
금강산에서 살이 쪄서용궁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거북의 화신이란 말이 전해 내려왔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못과 바위를
각각 ‘구담(龜潭)’과 ‘거북바위’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4. 충북 보은군 수정봉과 거북바위 전설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 209번지
법주사 서편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산을 수정봉이라 한다.
수정봉이라 하는 이유는 법주사를 중심으로 남쪽에는 남산(南山)이 있는데
남쪽은 화기(火氣)가 있는 곳으로
법주사는 모든 건물이 목조로 되어 있어 남산의 화기 때문에
화재가 자주 일어나 이를 우려하여
법주사 뒷산을 수성(水性)을 가진 수정으로 산 이름을 지어
남산의 화기를 눌러 법주사에 화재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수정봉이라 하였다.
이 수정봉 정상에 넓고 편편한 큰 바위가 상하 두 계단으로 깔려서
백여명이 앉아 즐길만한 곳으로서 한눈에 법주사 경내 일원이 똑똑히 보이는 명당이다.
반석 위쪽에는 거북모습을 갖춘 자연석이 있는데
이 거북머리가 중국쪽을 향하고 있는 전설은 이러하다.
옛날 당나라 태종이 세수를 하려다가 세숫물에 큰 거북그림자가 비쳤다.
이상히 여긴 태종은 유명한 도사를 불러 물으니
도사가 대답하기를 동국(한국)명산에 큰 거북의 모습을한 이물로 인하여
중원(中原:중국)의 재화(財貨)가 동국으로 가고 있다고 말하며
거북모습의 물형을 없애라 하였다.
태종은 도사의 말대로 사람을 보내어 사방을 찾다가
마침 속리산 수정봉의 거북돌을 발견하고 돌거북의 목을 자르고서도
안심이 안 되어 돌거북 등어리 위에 10층의 석탑을 쌓아서 거북의 정기를 눌렀다 한다.
그리하여 목이 끊어지고 탑에 눌린 돌거북이 되고 말았다.
목 잘린 거북은 서기1665년 충청병마절도사 민진익(閔辰益)이
속리산 수정봉에 올라 탑을 보고
또 여기에 사는 스님의 이야기를 듣고서 탑을 헐어 버리라고 하였다.
지금도 거북등에는 탑을 세웠던 흔적이 있고
법주사 방향으로 수정봉 중턱에는 파손된 탑신들이 남아있다.
5. 가야산 거북바위
토끼가 경주서 져서 원통하메
비장한각오로 내기를걸고 다시경주를 신청하게되었다
거북이수심이커 아내에게 고백하니
아무리 하늘의 별을 따는 재간이 있다한들
어찌 당신이 해결하겠소'' 하니
2인1역으로 이기니
토끼 "어쩔수없으니 거북이 자식되길 산신께 청하니
산신" 묵화로 거북이 자식을그리는 도중
새가 그만 그림을 끝내지 않은체
물고 날아가 버리고 그곳에 버리니
그곳에 바위가 되었다는 전설입니다
믿거나 말거나...
6. 대구 향교 남쪽의 제일여중 자리는
옛날 연귀산으로 대구를 지켜주는 신이었습니다.
제일여중 교정 한구석에는 특이한 모양의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의 이름이 거북바위입니다.
그리하여, 이 산의 이름도 연귀산이 되었습니다.
즉, 이산에 돌로 거북을 만들어 머리를 남쪽으로,
꼬리를 북쪽으로 향하게 해 비슬산에서 오는 지맥을 통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산의 이름도 거북귀로 하여 연귀산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연귀산 있는 윗 부분의 거북등처럼 갈라진 이 바위에는 여러 가지 전설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옛날 대구에는 불이 자주 발생하여
불과 상극인 물에 사는 거북을 상징하는 바위를 두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그 후에는 정말로 불이 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7. 장수를 상징하는 거북이는 신령스럽고 상서로운 동물로
기린, 봉황, 용과 더불어 사령四靈이라 했다하지.
또 이 사령중 유일하게 거북이만은 실제했고
나머지는 그야말로 사람들이 만들어 낸 실제치 않는 상상의 동물이지.
그러니 누구도 본적이 없고, 해서 전설도 많고..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나오는 구지가龜旨歌라는 노래에서는 김수로왕을 뜻하고
수로부인조水路夫人條에서 해가사海歌詞에는 수로왕부인을 뜻했다 하네.
그리고 신라도 건국설화에서 박혁거세가 알에서 나왔다는 전설이 있고..
또 천살을 먹은 거북이는 몸에 털이나고 사람과 말도 통할수 있다하고
오천살은 신귀神龜, 만살은 영귀靈龜라 했다하고
천살먹은 거북의 껍질은 잘게 빻아서 불태운뒤 그 재를 사람이 먹으면
거북이 처럼 천년을 산다는 전설도 있다하네.
강원도 영월인가 동강근처 작은 산마을에는
거북이마을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는데
그 유래가 또 거북이와 얽힌 전설때문이라 하네.
동네에 사람이 죽어 장사를 지낸다고 장지에 산역山役을 하는데
땅속에서 하얀 너래가 나오자 지관이 그만 파고 하관하라고 하는것을
상주가 바위위에다가 하관 할수는 없다면서 조금 더 팠더니
커다란 거북이 한마리가 나와서는 동강으로 들어갔다 하네.
그래서 이후부터는 마을 이름도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 하고..
이건 또 그 동네 노인이 전한 얘기였다 하고...
동해안에 있는 삼척 어디에도 상서북 바위,
또는 구정암龜頂岩이라 불리는 바위가 있는데
이도 왕건이 궁예에 쫓겨 은신했을때
그곳의 처녀와 사랑에 얽힌 전설,
왕건이 떠난뒤 왕건을 기다리다 죽어 바위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고..
그리다가 죽었다고 해서 또 거북이를 닮았다고 해서 이름도 그렇게 붙여졌다 하지.
나는 몰라서 더 얘기를 할수 없다해도
전국에 흩어져 내려오는 거북이와 관련된 전설같은 얘기가 어디 한둘일까?
혹 아는 사람이 있다면 여기에 덧부쳐도 좋겠지.
8. 고령읍 지산동 주산에는 거북 모양의 작은 바위가 하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바위를 ‘거북바위’라고 불렀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거북바위는 없어졌지만,
대가야국의 마량장군과 그 바위에 얽힌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마량장군은 어릴 적부터 매우 총명하였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로부터 선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어린 마량을 보는 사람마다 한 마디씩 칭찬을 했습니다.
“저 아이는 틀림없이 훌륭한 장군이 될 거야.”
“암. 그렇고말고. 장차 우리 대가야국을 지킬 장군이 되어야지.”
마량이 자라나면서 날로 기골이 장대해져 갔습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볼 때면 꼭 한 마디씩 축복의 말을 했습니다.
주위 사람들의 기대에 못지않게 마량은 올곧게 성장해 갔습니다.
그런 마량의 하루하루는 늘 희망이 넘쳤습니다.
훌륭한 인품을 지닌 아버지의 가르침 따라 마량의 예의범절 또한 남달랐습니다.
마량의 집에는 커다란 연못이 하나 있었습니다.
연못에는 선대로부터 함께 지내온 수 백 마리의 거북이 살고 있었습니다.
마량의 아버지는 거북을 가족처럼 아끼고 잘 보살폈습니다.
늘 아버지를 지켜보며 자란 마량 역시 거북을 마치 형제처럼 생각하였습니다.
그런 가정환경에서 성장한 마량은 동식물의 생명까지도
함부로 하지 않는 마음이 넉넉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한편 마량은 나약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무
술을 연마하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마량은 늠름한 청년으로 자랐습니다.
나라의 부름을 받은 마량은 대가야국의 훌륭한 장군이 되었습니다.
무술과 지략이 뛰어난 마량은 나라를 지키는 일에 늘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런 중에 대가야국을 비롯한 6가야국의 주변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로 이루어진 삼국이라는 왕국이 형성되었습니다.
그 나라들은 이웃의 부족국가들을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습니다.
6가야 중 대가야국을 제외한 모든 가야국은 세력이 강한 신라에게 항복을 했습니다.
대가야국만은 끝까지 항복을 거부했습니다.
신라의 진흥왕은 수많은 군사를 동원하여 대가야국을 침략하였습니다.
신라에 비해 세력이 너무나 약한 대가야국은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대가야국은 전투마다 번번이 패하고 말았습니다.
마량장군이 이끄는 대가야국의 군사들이 신라군에게 포위가 되었습니다.
마량장군은 항복하지 않고 대항하여 싸웠습니다.
그러나 마량장군은 끝내 죽음으로써 장렬한 최후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마량장군이 전쟁터에서 죽은 지 사흘째 되는 날에
마량장군의 혼령이 생전의 모습대로 나타났습니다.
마량장군은 나뭇잎 배에 수많은 거북군사들을 태우고
신라군을 무찌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생전의 모습으로 돌아온 마량장군의 혼령과 거북군사들의 힘에 쫓겨
신라군은 도망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잠시, 결국 대가야국은 신라에게 패하여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마량장군이 죽은 자리에는 이상한 바위 하나가 솟아났습니다.
바위의 형상이 꼭 거북처럼 생겼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바위를 ‘거북바위’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사람들은 한자의 거북 구(龜)자를 따서
마량장군을 ‘구장군’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그 거북바위는 없어졌습니다.
대가야국의 멸망을 서러워하듯
한동안 파란 이끼만 소복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제 세월이 더 흐르면 마량장군과 거북바위에 얽힌 이야기마저도
사람들의 머리에서 차츰 잊혀 지겠지요.
※ 이 글은 《우리 지방의 민담·전설 및 지명 유래》(88·고령·문화원).
「거북바위」(배창복)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이야기임.
권영세(아동문학가)
임란때 의병 지켜준 바위와 쌀 쏟아지는 절
- 장소: 기장군 철마면 임기리
- 부상병 추격하던 왜병들
- 선바위 기운에 눌려 돌아가고
- 백성·의병들 먹여살리기 위해
- 배석사는 쌀이 쏟아지는데
- 이후 주지의 탐욕에 폐사돼
- 거북바위는 선바위를 지켜줘
9. 기장군 철마면 임기마을에서 임기천을 따라 상곡마을로 향하다 보면
지장암 남쪽 산기슭 선바위골에 선바위가 있다.
임기천 돌매암골에서 150m 절벽 위에
마치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놓은 비석처럼 생긴
이 거대한 바위(높이 4m, 폭 1.5m)는 사람이 서 있는 모습을 닮아
선바위(立岩)라 불렀다.
이처럼 절벽 위에 우뚝 솟아 서 있는 바위 앞에
사람들은 저절로 두 손을 모아 절을 한다.
이 선바위는 경건한 마음을 갖게 하는 신비한 영혼이 감돌고 있다.
사람들은 이 선바위를 절을 하게 하는 돌이라 해서 배석(拜石)이라 부르기도 했다.
예부터 이 지방의 지세가 배(船)의 형국인데 이를 지관들은 배설(船穴)이라 하였다.
그 배설의 중심지가 되는 곳에 배의 돛대가 되도록 선바위를 돛대처럼 높게 세웠다.
마을 사람들은 선바위가 의연하게 우뚝 솟아 있는 한
이 마을은 순풍에 돛단 듯이 순조로워질 것이라 굳게 믿었다.
선바위골 아래 돌매암골(돌바위가 많은 골짜기)의 하천 한가운데에는
거북바위가 있다. 거북처럼 생긴 이 큰 바위는
예부터 선바위의 신령을 지켜주는 거북이라는 것이다.
선바위에서 임기천을 따라 상류로 거슬러가면 상곡마을을 만난다.
상곡마을은 백운산 줄기가 뻗어내린 산기슭에 터를 잡고 있고,
그 앞은 철마산의 거봉이 앞을 막고 있다.
상곡마을 앞 철마산 기슭에는 배석사(拜石寺)라는 큰 절이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배석사에는 선여(仙如)라는 여승이 주지를 하고 있었다.
황산도 소산전투(김정서 의병장이 소산고개에서 유격전술로 전공을 세운 전투)에서
부상병들이 왜적의 추격을 피해 깊은 계곡인 임기천 상류 쪽에 위치한 배석사에 모였다.
부상병을 추격하던 왜병들은 돌매암골 선바위 앞까지 와서는
그 거대한 바위에 머리를 숙이고 이곳이 임기천 계곡의 끝인 줄 알고 되돌아갔다.
선바위에서 얼핏 보면 지금의 지장암이 있는 곳에서
철마산의 실개천이 끝난 것처럼 보여
상곡마을 쪽 계곡은 산에 감추어져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부상병들은 선바위의 위력 때문에 모두 무사히 배석사로 피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배석사의 주지 선여 스님은 그 많은 부상병들에게 식량을 제공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밀교 스님이었던지라 비밀진언을 염송해 절에 있는 샘물에서
필요한 만큼의 쌀이 흘러나오게 하였다.
배석사는 백운산 산정 바로 옆에 있었던 선여사(船餘寺)의 말사였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백여사에 어느 탐욕 많은 한 스님이 주석했다.
하지만 본사인 통도사와 선여사에서 간섭이 많고
객승이 많이 찾아와 괴롭히는 것이 싫었다.
해서, 못된 술객(術客)의 말을 듣고 통도사의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
돌매암골의 거북바위를 통도사로 향하게 돌려놓고,
객승들이 잠을 못 자도록 요사채에 빈대를 많이 넣어두었다.
쌀이 흘러나오는 샘물구멍은 넓게 하여 쌀이 많이 흘러나오도록 욕심을 부렸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샘물에서는 쌀이 흘러나오지 않게 되고
빈대가 들끓어 객승들이 머물지 못하게 되자 통도사와 선여사는
배석사를 돌보지 않게 돼 배석사는 빈대만 득실거리게 돼 폐사되었다고 한다.
가마골향토역사연구원장
10. 괴산 화양동계곡에 '거북바위 가족'이 출현해 화제
거북바위를 알린 이는 '이거북' 씨로 거북과 기이한 인연.
충북 괴산 화양동계곡에 거북바위 가족이 출현해 화제다.
아빠 거북, 엄마 거북, 형제 거북형상이 한 바위에 여러 방향으로 나눠져 있다.
화양동계곡에서 환경지킴이 활동을 하고 있는 박창규(65) 씨에 따르면 '
거북바위 가족'이 출현한 것도 기이하다.
박 씨는 화양동 계곡의 구곡 중 하나인 운영담 앞에서 '운영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이 식당을 수십년째 찾아오는 단골손님 중 한분이
거북바위 가족의 소재를 알렸다고 한다.
이 손님은 거북형상의 바위가
화양구곡 중 마지막인 9곡인 '파천' 입구 30여 미터 지점의 산책길에
거북바위 가족이 있다고 전언으로 알려줬다.
박 씨는 어릴때부터 아무 생각없이 지나쳤던
그 바위에 다가가자 진짜 거북이 한마리가
물가에서 뭍으로 올라오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거북이가 입을 벌리고 있고, 앞갈퀴가 선명하고,
뒷다리는 접혀 있는 형상이 살아있는 거북이라 해도 믿을만 한다.
등에는 거북이 오래사는 장수동물을 상징하듯이
소나무 몇 그루가 자라나 있어 더 신기함을 준다.
거북이가 한마리라 생각했으나 이내 그것이 착각이었다.
같이 동행한 괴산타임즈 와 에이엔티뉴스 기자가
산책길 모퉁이를 돌며 본 것은 아빠 거북바위고,
왼쪽으로 돌자 엄마 거북, 아래로 내려가자 새끼 거북바위가 나타났다.
확인한 것만 4개 정도고 더 자세히 확인한다면 거북이 개수가 늘어날 것이다.
더 기이한 것은 거북바위를 알려준 이의 이름이 '이거북' 씨다.
어릴때 거북이라는 이름으로 놀림을 받고 창피해, 현재 이름을 개명했다고 한다.
이 또한 기연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전화로 통화하면서 박 씨는 너무나 신기하고 기이해
진짜 이름이 `이거북'이냐고 여러번 재차 확인했다고 한다.
박 씨는 "'거북바위 가족' 출현으로 괴산군에 좋은 일을 가져다 줄 길한 징조"라며
"침체기에 놓여있는 괴산 화양동계곡에 많은 관광객을 몰고올
또다른 관광명소가 될 것"이라며 기대감을 감추지 못했다.
또한 박 씨는 "앞으로 괴산군과 속리산국립공원 등 관계당국에 알려,
이 거북바위에 대한 설화나 전설, 민속자료 및 향토사료를
체계적으로 연구해 볼 것"이라고 말했다.
11. 거북바위
사전위치
한국민속문학사전 > 설화 > 전설
집필자
박성석(朴性錫)
갱신일
2016-11-29
정의
거북 형상의 바위가 증거물로 남아 있는 곳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
역사
거북 형상을 한 바위에 대한 설화는 장수(長壽)의 상징이자
상서로운 동물로 알려진 거북을 신성하게 여기는 데서 출발한다.
예로부터 거북은 용, 기린, 봉황과 함께 사령(四靈)으로 일컬어졌으며,
재복을 가져다주거나 신령스러운 일을 하는 능력을 보여 주는 일들이
거북을 통해 일어난다고 믿었다.
줄거리
만석지기 최부자 집에는 늘 손님이 드나들었고,
최부자는 손님을 대접하는 일을 귀찮아하지 않았다.
집 앞에는 거북 모양의 바위가 엉덩이를 집 쪽으로 하여 입을 벌리고 있었다.
최부자에게는 공부할 생각이 없는 아들이 있었는데,
선비에게 보내서 교육을 부탁했다.
행실이 좋아지고 공부도 경지에 이르렀을 때, 선비의 딸과 결혼했다.
아들이 과거 보러 한양에 간 사이
며느리는 매일 드나드는 손님을 치르느라 바빴다.
소식 없는 남편을 기다리다 지친 며느리는
스님에게 손님을 줄일 수 있는 방편을 물었다.
스님은 거북바위의 머리를 깨면 손님이 줄어들 것이라고 했다.
하인을 시켜서 거북바위의 머리를 깨뜨리자
그 뒤로 최부자의 집은 기울기 시작했고,
아들은 몹쓸 병에 걸려 돌아왔다.
변이
이 설화는 장수를 뜻하는 동물 중의 하나로 알려진 거북이
재복을 가져다주거나 신성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데서 출발한 이야기이며,
영웅의 탄생을 알리는 태몽에도 등장한다.
충청남도 공주 지역에서는 천년초를 두고,
동해와 서해의 거북이가 다투다가 천년초도 사라지고
두 거북이가 바위로 변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경상북도 고령군에는 대가야국의 마량 장군이
신라군을 무찌르고 죽은 자리에 거북 형상의 바위가 있었다고 한다.
분석
거북은 장수와 재물을 가져다주는 상서로운 동물이다.
상서롭고 영력이 있는 동물에게
해를 가하거나 몹쓸 짓을 하면 벌을 받는다는 것과
탐욕이 가져올 파멸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다.
특징
거북 모양을 한 바위를 통해 사령신앙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거북바위와 관련 있는 설화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인간의 끝없는 욕심이 거북바위를 훼손했을 때
가져올 재앙에 대한 것과 훌륭한 인물의 탄생이나 삶과 관련된 것이다.
의의
<거북바위>의 주요 모티프는 ‘신성한 바위의 훼손과 가족의 파멸’
‘신성한 바위의 태몽과 영웅의 탄생’ 등이다.
출처
공주의 맥(공주시․공주문화원, 1992), 김제 시사(김제시 편찬위원회, 1995),
진천군지(진천군지 편찬위원회, 1994),
한국구비문학대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0~1988) 2-4, 797.
참고문헌
이야기 충북(충청북도․충북학연구소, 충북발전연구원, 2004),
후백제 전주의 도성구성에 나타난 사령체계
(조법종, 한국고대사연구29, 한국고대사학회, 2003)
12. 진천 거북산 거북바위
북 진천군 이월면 송림리 일대에 위치한 진천 거북산은
산 위에 거북바위가 있어 거북산이라 하였다.
정상 조금 못미처에 이 바위가 있는데
실지로는 전혀 거북처럼 생기질 않았고 오히려 곰을 더 많이 닮았다.
거북바위와 관련하여 전설이 하나 전해지고 있는데,
멀리 임진왜란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조선의 천기를 보니,
조선의 중심지에 거북이 한쌍이 있어
명나라를 향해 노려보고 있는 것이다.
당시 명나라에는 곳곳에서 반란이 잦았었는데
이여송은 이것을
이곳의 거북바위 탓으로 돌려 거북이의 목을 치고,
앉아있는 방향도 북쪽에서 남쪽으로 돌려놓았다는 것이다.
13. 거북 바위의 전설 경북 경산시에 소재하고 있는 환성사 입구에는
큰 거북 바위가 있는데 그 모양이 거북이와 너무 많이 닮아서 붙인 이름이다.
심지 왕사가 이 곳에 절터를 잡을 때 이 바위를 보고서,
‘이 바위가 있는 한 이 절은 쇠하지 않을 것’이라 하였는데,
이 또한 희미한 기억 속의 전설이 되었다.
조선 초의 일이다.
나라에서 불교를 억압했으나 환성사만은
하루도 신도가 끊어지는 날이 없었다고 한다.
이때 한 스님이 이곳에 주지로 있으면서 젊어서는
큰 덕으로 불자들의 숭앙을 받았으나
늙어서는 게으름이 늘어 손님이 많은 것이 귀찮게 느껴졌다.
그러자 혼자 곰곰히 생각한 끝에 사람을 시켜
절 입구의 거북 바위의 목을 자르게 했다.
그렇지만 거북 바위의 목을 정으로 깨뜨리니
(경북 경산 환성사 전경)
갑자기 연못의 물이 붉게 변하여
이것을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절이 오히려 더 소란해졌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한 거지같은 객승이 찾아와 묵고 가기를 청하니 주지가
이를 귀찮게 여기며 구석진 골방을 주고 공양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이튿날 객승이 길을 떠나면서,
“ 이 절에 사람이 많은 것은 저 연못 때문이니 저것을 메우시오.” 라고 말했다.
주지는 이 말을 듣고 즉시 마을 사람들을 불러 연못을 메우게 했다.
그런데 흙을 한 삽 퍼붓자 갑자기 연못 속에서 금송아지 한 마리가 날아오르더니
슬피 울고는 산 넘어 동화사 쪽으로 날아갔다.
동네 사람들은 겁을 먹고 더 이상 메우려 하지 않아
주지는 절의 사람들을 동원해 메우게 했다.
꼬박 백일이 걸려 연못을 메우고 마지막 한 삽 흙을 퍼붓자,
갑자기 온 절에 불이 붙기 시작하여 그 웅장하던 건물들을 모조리 불태우고
겨우 대웅전과 수월관만 남았으니
그 이후로는 절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동해 용왕의 신하인 거북이가
역시 금강산 구경을 나왔다가 골짜기를 흘러내리는
인삼, 녹용이 씻긴 물을 실컷 먹고
너무 살이 쪄서, 나왔던 바위구멍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되어서
죽어서 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거북바위)
14. 남해제일 관음성지 향일암
향일암은 1300여년 전 선덕여왕 8년(서기 659년)
원효대사가 기도 중에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원통암"이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습니다.
그 후 고려 광종9년(서기 958년)운필대사가
산의 형세가 마치 금거북이가 불경(경전 바위)을 등에 지고
용궁으로 들어가는 것 같다하여 "금오암"이라 부르다가
조선 숙종 때 인묵대사가 수행 정진 중 대웅전을 짓고 금불상을 봉안하면서
처음으로 "해를 향하는 암자"라는 뜻의 향일암이라 이름지어
지금까지 불리게 되었습니다.
예로부터 한국의 해수관음 성지는 여수 향일암,
남해 보리암, 강화 보문사, 낙산사 홍련암으로
4대 관음기도처라 하였습니다.
관음성지란 "관세음보살님이 상주하는 성스러운 곳"이란 뜻으로
이 곳에서 기도발원을 하게 되면
그 어느 곳보다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를 받아 소원을 성취하는 곳입니다.
남해제일 관음성지 향일암을 참배하는 모든 분들께서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로 모든 소원이 이루어지고
항상 행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향일암 안내비석 내용-
15. 봉골산 거북바위
봉화산 골짜기 산이래서 봉골산이라 했지
옛날 옛적에 그 봉골산에
거북이 한 마리가 살아
목마르면 봉골산 입구 남천으로 늘 물먹으려 왔었지
어느날 물먹으러 온 거북이가 하천가에서 죽어
작은 집채만한 거북바위가 되었고
삼면이 훤한 전망대로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네
개구쟁이들은 거북바위 오르내리며
병정놀이 숨박꼭질에 해지는 줄 몰랐었지
더우면 거북바위밑 남천 큰 보(洑)에서 멱감았었지
그 거북바위는 마을의 지혜와 장수 부귀의 상징이었지
바위의 정기받아 아이들은 공부도 잘 했었지
그런데 어는 날 개발붐으로 거북바위가 아파트부지로 편입되어
무자비하게 무식하게 폭파되어 흔적없이 사라졌네
소년은 출향했다가 어른이 되어 몇 십년만에 돌아와 보니
옛 동무들은 의구한데 거북바위는 간데 없네
아! 전설의 거북바위여! 뒹굴며 함께 뛰놀던 거북바위여!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으리야”
16. 왕산리 통개포구에는 커다란 넙쩍 바위를 지반으로
거북이와 흡사한 모습을 가진 큰 바위가 올라 앉아 있다.
이 바위의 형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황해 바다쪽이면서도 연평도 방향을 바라보며 입을 벌리고 있고,
꼬리부분은 서풀 마을 삼현과 김해 김씨네 집안들이 살고 있는데
마을을 바라보고 있는 홍문이 있는 부분에
똥 자루가 달려있는 것 같이 보이기도 한다.
이 바위의 전설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지금 살고 있는 홍자 돌림자로부터 11대조 되는 선친이
영종도 서풀 신불도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다.
섬중에 섬으로 와 정착하게 된 이들은 밭을 개간하고
뚝을 막아 논을 풀고 하여 가며 근근히 살아오다가
육대조에 내려와 字가 '형보'인 사람이 작고할 때,
낮설은 손님 한사람이 지나다 들리어
'시장기가 들어 들렸노라'하여
상주는 초상집이지만 차려 놓은 음식과 술을 잘 대접하였다.
그랬더니 다 먹고 난 손님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것이었다.
'시장기가 들어 맥이 다 풀리던 중 대접을 잘 받았으니
조금이라도 신세를 갚아야 도리인것 같으니 묘자리나 잡아 드리겠노라'하여
상주는 쾌히 승낙하고 그를 따라 산으로 올랐는데
이곳 저곳을 다니다 한 자리를 잡아주며
'방향은 을좌신향으로 잡아야 되며
이 방향이 바로 왕산이 통개포구에 있는 거북바위를 향하여 안을 잡으면
거북은 황해바다 고기떼를 듬뿍 먹고 이곳을 향하여 똥을 누는 형국이니
좌청룡 우백호가 뚜렷하고,
이만하면 후대에 부귀영화를 누리리다'하며 설명해 주었다.
상주는 너무나 고마워 며칠 묵어가라 권유하였으나 바쁘다는 이유로 그 길손은 갔다.
상주는 그가 가르쳐 준대로 장례를 치르고 열심히 일하며 살아 가던 중
홍자 돌림자 조부 항렬의 깁종우 할아버지때
외국에서 온 광산 기술이 있는 분들이 영종도에 와서 시굴을 하여본 결과
질좋은 금이 상당량이 매장되었음을 발견하고 광권허가를 받아
금광이 대성황을 이루게 되었는데
김종우, 종현, 달현, 동일, 등이 그 광업에 뛰어 들어 대부가 되어
김종현, 김달현같은 형제들은 문화사업은 물론
도서민들의 생활에 고통을 알고 다소나마 편리하게 다닐 수 있도록
自費로 돌다리를 놓아주는 등 많은 자선 사업을 하여
서풀, 삼목, 용유 학교에 송덕비가 세워져 있어 후세인들의 칭송을 받고 있다.
이로 인하여 왕산리 통개포구에 사는 사람들은
지금도 거북바위는 삼현파 김해김씨를 위하여 생긴 바위라 전해지고 있다.
17. 수리산 산신제당에서 관모봉으로 올라가는 길 중턱에는
‘노랑바위’라는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에 얽힌 재미있는 전설이 하나 있습니다.
옛날 옛적에, 어질고 착한 임금님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임금님은 나이가 마흔 살이 넘도록 대통을 이을 왕자를 얻지 못했습니다.
“여보 중전, 짐이 부덕해서 하늘이 미워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소?
왜 삼신할머니께서는 우리에겐 왕자를 점지하지 않으시는지······.”
“아닙니다, 전하. 모두 소첩의 죄가 중한 탓이옵니다.
아무래도 전국의 명산대찰을 찾아서 비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임금님께서는 전국에 있는 명산대찰에 명을 내려서 기도를 드리게 했습니다.
“나라의 적통을 이어갈 왕자를 점지해주옵소서.”
그렇게 석 달 열흘 동안 지극정성으로 부처님과 천지신명님께 기원한 덕이었을까요?
하늘이 감복하셨는지 중전마마가 아기를 갖게 됐습니다.
그리고 열 달 후에는 튼튼하고 잘 생긴 왕자님이 태어났습니다.
임금님께서는 하늘에 감사를 드리는 제사를 올리고,
백성들과 함께 기쁨을 나눴습니다.
“왕자의 탄생을 축하하는 잔치를 열어라.
부처님께 불공을 드려라.”
온 백성과 함께 왕자의 탄생을 축하하며 즐거워하셨습니다.
그 후, 임금님은 왕자가 무럭무럭 자라나는 모습을 보시는 기쁨으로
나라 일을 보살피셨습니다.
그런데 왕자가 세 살이 되던 해, 큰 난리가 났습니다.
그래서 중전마마와 왕자는 강화도로 피난을 가게 됐습니다.
그런데 나룻배를 타고 가는 도중에 갑자기 폭풍을 만나고 말았습니다.
거센 바람이 불어오고, 집채만한 파도가 몰아치기 시작했습니다.
“왕자를 지켜야 한다. 왕자를 살려야 해
왕자야, 내 너를 꼭 지켜주마.”
중전마마는 안절부절 못하면서 왕자를 꼭 껴안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거센 바람과 밀려드는 파도를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산더미 같이 덮쳐오는 파도에 휩쓸려 배가 부서지고 말았습니다.
중전마마는 간신히 신하들의 손에 구출됐지만 왕자의 행방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왕자야! 왕자야! 어디 있니.”
중전마마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질렀습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험한 파도소리뿐이었습니다.
그 때, 넘실대는 파도 위에 거북이 한 마리가 나타났습니다.
“아! 거북아. 우리 왕자를 구해다오.”
중전마마는 황급히 소리쳤습니다.
“거북아, 왕자를 구해다오. 용왕님, 왕자를 구해주세요.”
육지를 향해 유유히 헤엄치는 것이 보였습니다.
“중전마마, 걱정 마세요, 제가 꼭 왕자님을 지켜드릴게요.”
거북이는 관모봉 중턱에 있는 바위 옆에 왕자님을 내려놓았습니다.
“왕자님, 정신 차리세요. 먹을 걸 구해 올게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며칠을 굶고 파도에 시달린 왕자는 기력이 다해 곧 쓰러질 것만 같았습니다.
거북이는 근심 어린 얼굴로 왕자를 바라보면서 말했습니다.
“왕자님, 금방 다녀올게요. 어디 가지 말고 꼭 여기서 기다리셔야 해요.”
그러고는 먹을 것을 구하러 마을로 내려갔습니다.
거북이는 물에서는 빨리 헤엄을 치지만,
육지에서는 걸음이 느려서 마을을 찾아가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아이 배고파. 거북이는 뭘 하느라 아직
안 오는 거야.”
한참동안 거북이가 돌아오지 않자, 왕자는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놈의 거북이가 날 버리고 가버린 거 아냐?”
참을성 없는 왕자는 불평을 늘어놓으면서 투덜대기 시작했습니다.
“이 거북이 놈을 가만 두지 않을 거야. 오기만 해봐라.”
화가 잔뜩 난 왕자는 주먹을 불끈 쥐고 씩씩거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거북이는 왕자가 이렇게 오해하고 있는 것도 모르고,
이집 저집 돌아다니면서 왕자님에게 드릴 음식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거북이걸음으로 부지런히 돌아왔습니다.
“빨리 가자. 왕자님이 시장하실 테니 어서 음식을 갖다 드려야지.
얼마나 배가 고프실까?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
거북이는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왕자님을 향해서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하지만 왕자는 기다리다 지쳐서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랐습니다.
“거북이까지 날 버려. 에이, 더는 못 참겠다.”
왕자는 화를 참지 못하고 옆에 있던 바위를 주먹으로 힘껏 내리쳤습니다.
“우르르르 쾅쾅, 우르르르 쾅쾅.”
그 순간, 천지를 뒤집는 것 같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바위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비탈길을 기어서 올라오던 거북이도 이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지? 설마 왕자님이 잘못된 건 아니겠지? 빨리 돌아가자.”
거북이가 허겁지겁 올라가는 사이에 왕자님은 무너진 바위에 깔리고 말았습니다.
“악, 거북아. 아악.”
“왕자님!”
바위에 깔린 왕자님은 노란 피를 흘리면서 숨을 거뒀습니다.
그리고 부지런히 기어오르던 거북이도 흩어지는 바위부스러기에 깔려 죽고 말았습니다.
그 때부터 사람들은 이 바위를 ‘노랑바위’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광정마을에 안양군의 신도비가 서있는 바위는 ‘거북바위’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안양군 이행의 어머니는 성종의 후궁인 귀인 정씨이다.
연산군은 생모인 폐비 윤씨 사건의 원인을 성종의 후궁인 정씨와 엄씨가
무고하게 왕에게 고(告)했기 때문이라 판단,
연산군 10년(1504)에 안양군과 정씨, 봉안군(성종의 여섯째 아들)에게 사약을 내렸다.
그러나 1506년에 중종이 즉위하며 공회(空懷)라는 시호를 내려 복직되었고,
중종 15년(1520)에 부인 상소에 따라 다시 장례를 지내도록 교지가 내려져
고종2년(1865년)에 양주에 묘가 마련되었다가
광무 5년(1901)에 군포시 산본동 산27번지로 이장해온 것이다.
18. 거북바위와 양씨 손자(남원양씨의 정착설화)
남원양씨의 정착 설화
까마득히 먼 옛날 일이다.
이곳(현 순창군 동계면 귀미마을)을 찾아 온 어떤 부인이 있었다.
아들 하나와 종 몇 명을 데리고 이 마을을 찾아오기 위해서
비홍재(남원과 순창 중간에 위치한 고개)에서 잠깐 짐을 풀고,
피곤한 몸을 쉬던 부인은 갑자기, 무량산을 바라보더니
무엇인가 결심이라도 선 듯이 두 주먹을 꼭 쥐었다.
부인은 무량산의 모양과 그 밑의 산세를 바라보니
그 곳이 분명 터를 잡아 살 곳임을 점치고 있는 것이었다.
할머니가 아들과 딸, 그리고 종들을 데리고 그 무량산 밑엘 도착했을 때
그 곳에는 이미 어떤 사람이 집을 짓고 살고 있었다.
부인은 그 사람보다 한발 늦었구나 생각하고 실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부인은 어떤 일이 있어도 이곳을 떠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주인에게 사정을 하는 것이었다.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멀리 송경에서 여기까지 왔으니
방 한 칸이라도 좋으니 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주인은 사정이 딱하다는 듯이 생각하면서도 거절을 해버리는 것이었다.
"사정은 잘 알겠사오나 이 집은 보시다시피 빈 방이 없습니다."
그래도 부인은 지지 않고 헛간이라도 좋다고 사정을 했다.
"이집은 주인이 따로 있기 때문에 빈 방이고 헛간이고 간에 빌려줄 수가 없답니다.
다만 저는 이 집 주인이 올 때가지 집을 지켜 줄 뿐입니다."
"그렇다면 주인은 어디 계시며 누구시온지요."
주인은 대답하기를, "부인께서는 알으셔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저도 이 집 주인을 잘 모르니까요.
다만 알고 있다면 양씨 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만 알 뿐입니다."
부인은 깜짝 놀랐다.
자기의 아들이 양씨 자손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아이는 고려 나라의 직제학 벼슬을 하신 양수생이라는 사람의 아들입니다."
주인은 그때서야 정중한 예의를 갖추어 말했다.
"그렇습니까? 진즉 몰라 뵈어 죄송합니다.
이 집은 분명히 부인께서 살으실 집이 분명합니다."
주인은 몇 번이고 굽실굽실 절을 하고는 금방 간데온데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양수생은 평생 불도에 많은 시주와 정성을 쏟았으므로
죽어서도 부처님의 뜻이 있어 도승으로 하여금 여기에 집을 짓고
그의 부인인 이씨가 올 때까지 기다린 것이었다.
부인은 아무래도 부처님이 도와 준 것이라고 생각하고
더욱 불공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며칠이 지났다.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하는 말이,
"이 터는 일찌기 내가 많은 돈을 주고 산 곳이니 내어 놓으라."는 것이었다.
이씨 부인은 그럴리 없다고 딱 잡아 떼었다.
그러나 며칠간이고 쫓아 다니며,
"이 집은 내가 산 것이니 나에게 넘겨주고 딴 곳으로 떠나라."는 것이었다.
부인은 아무리 그래도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 사람은 얼마 전 부인이 이 집으로 이사 오기 전에
몇 차례 찾아와 이 집을 팔 것을 졸랐으나
주인이 자기가 아니라고 거절하자 돌아갔다가,
주인이 없고 딴 사람이 와 살으니
자기 집이나 되는 것처럼 윽박지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다시 찾아와 하는 말이
그렇다면 내기를 해서 이기는 사람이 이 집을 차지하자고 제의를 하는 것이었다.
얼마동안 생각에 잠겼던 부인은 내기를 승낙하고 말았다.
내기는 달걀 쌓기였다.
졸부는 순식간에 달걀을 쌓아 천장에 닿게 했다.
이씨 부인은 금방 천장까지 쌓아놓은 달걀을 헐어 거꾸로 쌓아 천장에 닿게 했다.
졸부는 금방 풀이 죽어 말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도망치듯이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부인은 그렇게도 바라던 집에서 여생을 보냈다.
그 뒤 자손들이 600여년간을 이 집에서 살아 왔으며
그 집터에서만 수십명의 양씨 자손들이
과거에 급제하는 기적을 낳기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거북과 같이 생긴 바위가 하나 있는데
이씨부인이 이 마을에 오는 날 집을 지켰던 도승이 그 곳을 떠나면서
그 거북바위의 꼬리를 이 마을 쪽으로 돌려 놓았던 것인데
그 거북바위의 꼬리가 마을 쪽으로 향해져 있다 하여
이 마을 이름을 귀미라고 부르고 있다.
위의 전설은 고증이라도 하는 듯 양씨의 대대종손인 양대우씨가
보물로 지정된 고려홍패(과거에 급제한 사람에게 왕명으로 교부한 합격증) 2점과
이조홍패(이조시대 과거에 합격한 사람에게 왕명으로 교부한 합격증)2점등
7점을 보존하고 있다.
-순창삼육회 까페에서-
19. 거북바위와 모자바위
영광백수 해안도로 해변에는
거북바위와 모자바위가 있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1. 거북바위는
“옛날, 천년 묵은 거북이 한 마리가
등 위에 흙을 얹고 간지동 해안으로 올라와 알을 낳기 위해 모래
밭 위에 죽은 듯이 엎드려 있었는데
이 마을의 가난한 농부가 상을 당하여 묘자리로 쓸 곳이 없어
흙이 불룩한 지형을 택해 묘를 만든 것이다.
거북이 등에다 묘를 만든 농부는
삼우제를 지내고 성묘하려 그 자리를 찾아가 보았는데 큰 바위로
변해있었고 부근에서는 붉은 피가 솟아오르고 있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그 후부터 그 곳을 '거북바위'라고 불렀다고 한다.
2. 母子바위는
옛날 대동마을에 살던 한 어부가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왜구들에게 잡혔는데 그 사실을 알지 못하던
어머니와 아들은 어부가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나 어부가 돌아오지 않자 모자는 지친 나머지 죽어
바위로 변했다는 슬픈 전설이 깃들어 있다.
출처 - 빛가람뉴스
20. 전설1 - 심악산 거북바위에 얽힌 전설
파주시 교하면 심악산은
옛날 경기 5악(송악, 감악, 심악, 북악, 관악)으로 유명한 산이다.
이 산은 상봉과 중봉(3태봉) 끝봉이 북에서 남쪽으로 나란히 솟아있는데
봉우리마다 자그마한 내령이 뻗어있다.
교하면 산남리 47번지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노총각 송사련(안당정승서고모의 아들)이
어느 여름날 중봉상에 있는 거북바위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데
아래 내령 거북뫼(고양 구산리)에서 두 마리의 청룡과 황룡이 올라와
자기 가슴에 안기어 깜짝 놀라 깨어보니 꿈인지라 이상하게 생각하며 하산하였다.
이날 밤 바로 이 동네 34번지에 살고 있는 안당 정승댁에 기고가 있어
일을 도와준 뒤 집으로 들어왔는데 비녀(연일정씨)가 제사음식을 가지고
홀로 있는 자기방으로 들어오자 설레는 마음에 욕정을 참지 못해
이를 겁탈 한 후 같이 살게 되었는데
당시 유명한 대학자 송 익필, 송 한필을 생산하였다 한다.
전설2 - 파주시 교하면 심악산과 천자지지에 얽힌 전설
교하면 동패리에 소재하고 있는 심악산은 한강하류에 있는 산으로
동편은 동패리, 서편은 서패리, 남편은 산남리등 3개리가 둘러 있다.
가운데에 우뚝 솟은 봉우리와 동체는
마치 대호가 옆으로 누워있는 형상인 것 같기도 하고
어찌보면 물위에 떠있는 큰 군함같기도 하다.
또한 장군 영병 비룡상천형이라고도 한다.
산봉우리 주위는 바위로 둘러싸여 있으며
중심부 10여평 남짓한 편편한 곳이 있는 이 자리는
수십자를 파도 비세황토 흙이 나온다는 것이다.
바로 이곳이 풍수지리설로 천자가 나올 자리(천자지지)라 전해져
욕심내는 사람들은 밤중 남몰래 수 차에 걸쳐 시체를 암매장하였다 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 자리에 시체를 매장하면
산이 울며 동네에서 병고가 일어나
동네 사람들을 일제히 동원하여 상봉에 올라 시체를 파헤쳤다 한다.
조선조 말 김포에 살던 예안이씨 이지열이
이 마을에 들어와 훈학을 하였으나
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이곳에 몰래 시체를 암매장하였다.
그러자 이 동네에 사는 김면제 성균관박사 댁 하인이
일자무식한 사람인데 별안간 미쳐서
이지열이가 여기다 산소를 써서 큰일 났다며
동네를 뛰어다니자 동네 사람들이 산에 올라가 파헤쳤다.
이러한 연유로 인하여 지금은 아예
묘를 쓸 생각조차 못한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또한 이 묘자리 턱 바로 아래 발복지지 묘도 2개소가 나란히 있다 한다.
옛날에는 이 산 주위로 물이 흘러 한강 가운데 있는 섬으로 되어 있었다 한다.
그러므로 한강 물을 막고 있다하여 당초에는 수막산으로 불리게 되었으나
조선조에 내려와 언제나 홍수가 있을 때에는 한강물과 조수물이 넘쳐 수막산이
물 속에 잠기게 됨으로 깊은 물에 들어갔다 하여 심악산이라 불리우게 되었다.
그리고 경기 오악(송악, 감악, 심악, 북악, 관악)중에 하나로 불리우고 있다.
그후 조선조 숙종대왕 시절 왕궁에서 학을 기르다가 학 두 마리가 도망을 치자
궁궐에서는 이 학을 찾기 위해 사방으로 수소문하여 찾으러 다니다가
심악산에 와 있는 것을 보고 잡아간 후 숙종대왕께서 이 산에서 학을 찾았다
하여 심학산으로 명명하여 부르게 되었다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항간에는 수막산으로 불리우고 있으나
각종 문헌에는 심악산으로 명기하고 있으며
이 심악산 동편 중턱에는 유명한 법성사 절이 있고
위에는 속병이 잘 낫는다는 신기한 약수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수시로 모여들고 있다.
또한 이 산은 조선조에 유명했던 송구봉선생께서
이 산의 정기를 받아 탄생하여 성장하신 명산이다.
따라서 일설에는 송구봉선생이 출생할 때
정기를 흡수하여 이 산에 초목이 일시 고사(枯死)하였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 공주 상왕산 원효사 심우실에서-
(글:해월스님 2019년 08월 06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