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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요한 1서의 말씀 2,12-17
12 자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그분의 이름 덕분에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13 아버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처음부터 계신 그분을 여러분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이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14 자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쓴 까닭은 여러분이 아버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쓴 까닭은 처음부터 계신 그분을 여러분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이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쓴 까닭은 여러분이 강하고,
하느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머무르며 여러분이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15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
16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17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2,36-40
그때에
36 한나라는 예언자가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37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38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39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예수님의 부모는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40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성탄 팔부 축제 제6일입니다.
태어난 지 40일 만에 아기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봉헌됩니다.
이 봉헌은 예언자 시메온에 의해 거행되는데, 오늘 복음은 그때 성전에 있던 여 예언자 한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봉헌은 구약의 사무엘의 봉헌을 떠올려줍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남편 엘카나와 함께 실로의 성소에서 노사제 엘리를 통해 아기를 주님께 봉헌했습니다(1사무 1,24-28).
그때에 엘리가 한나를 축복했듯이(1사무 2,20)했듯이,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 시메온도 마리아를 축복합니다(루카 2,34).
또 사무엘의 경우, 성소의 문에서 봉사하는 여자들이 언급된 것처럼(1사무 2,22), 예수님의 경우에서도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긴'(루카 2,37) 여예언자 한나가 등장합니다.
한나는 7년 동안을 남편과 함께 살고, 84세가 되도록 과부로 살았습니다.
마치 밤낮으로 하느님을 예배하고 지냈던 과부 유딧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런데 아기 예수님이 봉헌될 때 예언자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습니다.'(루카 2,39)
그녀는 ‘은혜’, ‘호의’라는 그의 이름의 의미대로, 하느님의 은혜와 호의에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것은 마치 시메온이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루카 2,25)를 기다렸던 것처럼, 그녀는 '예루살렘의 속량'(루카 2,38)을 기다려 온 까닭입니다.
마치 유딧이 이스라엘을 구한 다음 하느님을 찬양하며 감사의 노래를 부른 것처럼 말입니다(유딧 15,14-16,17).
이처럼 한나는 시메온처럼 아기가 ‘예루살렘을 속량’할 메시아임을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사가는 그 감사 찬양의 노래를 전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를 한나의 자리로 불러들이는 듯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기 예수님께 직접 감사와 찬양의 노래를 지어 부르도록 말입니다.
아브라함 예수아 헤셀은 ‘헬라인들은 이해하기 위해서 공부하고, 서양 사상가들은 그들의 지식을 실제적으로 적용하기 위해 공부하고, 고대 히브리인들은 존경하기 위해서 공부했다.’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는 하느님을 경외하고 경배하며 영광을 드리기 위해 공부하고 있는지 보아야 하고, 바로 지금 주님께 찬미의 노래를 불러들야 할 일입니다.
한나처럼 밤낮으로 기도하며 성전에 머물며 주님을 찬양하며 예배드려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루카 2,37)
주님!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과부의 마음속의 말을 들으시듯,
미처 말이 되지 않는 제 마음 헤아려 들어 주소서.
성전을 떠나는 일이 없게 하소서.
당신을 떠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언제나 당신 면전에서 기도하게 하소서.
밤낮으로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당신의 자비에 감싸여 감사와 찬양의 노래를 부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안주하는 세상사랑과 구원하는 세상사랑>
오늘 요한 서간은 세상과 그 세상 안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의 사랑이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의 사랑이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세상을 너무도 사랑하신 나머지 하느님이신 분이 사람이 되어 오셨다고 우리는 알고 특히 주님 성탄 축일에 그 의미를 특별히 기념하는데,
주님의 세상 사랑과 우리 세상 사랑은 뭐가 다르기에 사랑치 말라고 하는 걸까요?
오늘 요한 서간은 이어서 이렇게도 얘기합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이 말씀들에 비춰 볼 때 세상 사랑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주님의 세상 사랑과 우리의 세상사랑.
영적인 세상 사랑과 육적인 세상사랑.
그리고 이런 얘기가 되겠습니다.
우리는 안주하는 세상 사랑이고, 주님은 구원하는 세상 사랑입니다.
우리의 세상사랑은 영원한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지나가는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에 안주하게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인생이 불행해지겠지요?
그런데도 우리가 지나가는 세상을 사랑하고 안주하려고 하기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은 이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것이지,
주님께서 설마 우리처럼 지나가는 세상을 사랑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사랑하게 하고 안주하게 하는 것을 육의 욕망이라고 서간은 또한 말합니다.
그러니까 세상은 악이 아니고 주님처럼 세상을 사랑하면 죄나 악이 아니지만,
육의 욕망에서 비롯된 세상 사랑은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기에,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를 지향하지 않기에 악이고 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먼저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사랑하고,
그리고 지나가는 이 세상을 우리도 안주하지 않고 지나가면서 하느님 나라를 증거한다면
우리도 구원하는 세상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어제는 저의 동기 수사님의 장례 미사가 있었습니다.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돌아가신 거지요.
그래서 장례 미사를 봉헌하고 고별식을 주례하며, 돌아가셨다는 말을 새삼 의미 새김을 하였습니다.
돌아간다는 것은 온 곳으로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묵상하니 고향에 돌아가듯 하나도 슬프지 않았습니다.
저도 같은 곳에서 왔으니 제가 돌아가야 할 곳도 수사님이 가는 곳이고,
수사님이 먼저 가신 것은 우리가 가야 할 곳을 선명하게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성탄절에 저는 세상을 떠남과 하느님께 돌아감을 묵상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여러분께 강하게 말씀드립니다.
죽지 말고 돌아갑시다.
그리고 올해 마지막 날 교회 묘지에 가면 쓰여있는 이 경구를 기억합시다.
Hodie Mihi, Cras Tibi(오늘은 내가, 내일은 네가)
이것을 이렇게 바꿔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오늘은 네가(Hodie Tibi), 내일은 내가(Cras Mihi).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천상에 희망을 두어 행복하라>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1요한 2,17)
그러나 현실은 인간의 욕망과 하느님의 뜻 사이에서 방황하고 걸려 넘어지며 은혜를 잊고 살 때가 있습니다.
오늘을 감사하고 늘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사람으로 거듭나기를 희망하며 하느님 안에서 행복하길 기도합니다.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출신 '한나'라는 예언자를 생각합니다.
그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는 벌써 이름에서부터 행복을 누렸습니다.
한나라는 이름은 “하느님은 은혜로우시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프누엘은 “하느님은 빛이시다”는 뜻입니다.
아세르는 “행복”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빛 안에서 행복을 누리고 있으니, 그것이 얼마나 큰 은혜로움이겠습니까?
그는 충만한 은총 안에 있었습니다.
물론 이름만으로 행복을 주진 않습니다.
그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한나는 겉으로만 보면, 남편을 일찍 잃은 불행한 여인입니다.
그러나 여든네 살이 되도록 성전을 떠나지 않고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습니다(루카 2,37).
불행한 처지에 매여 있지 않고, 오히려 그 처지를 하느님을 섬기는 기회로 만들었습니다.
남편이 있다면 밤낮없이 단식과 기도로 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일찍 과부가 된 것은 불행일 수 있지만 온전히 하느님을 차지할 수 있음은 행복입니다.
한나가 행복한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한나의 행복은 그의 처지나 형편에 따라 있고 없는 것이 아니라, 천상 것을 희망하고 추구함으로써 누리는 행복입니다.
환경이나 처지를 탓할 것이 아니라 환경을 이용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한나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기 위하여 성전에 왔다가 메시아이신 아기 예수님을 보았고, 시메온이 예수님에 관해 말하는 모든 것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루카 2,33-35).
그리고 구원자를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관해서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늘 성전을 찾아 기도한 덕택입니다.
우리도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주님을 만나게 되기를 원한다면 꾸준히 기도해야 합니다.
특별히 성체 앞에서 기도하며 주님께 마음을 둔다면 감히 생각하지도 못한 방법으로 주님을 체험케 될 것입니다.
마음의 문을 열기만 하면 주님께서는 사랑과 기쁨, 희망과 평화로 충만히 채워주십니다.
지금은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긴 한나의 기도가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의 모든 희망을 오로지 천상 것에 둘 수 있도록 청해야 하겠습니다.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여라.
그분께서 네 마음이 청하는 바를 주시리라.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
(시편 37,5)
'한나' 예언자가 하느님을 차지해서 행복하였듯이, 우리 모두가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심으로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하느님,
제가 숨 쉬는 것만으로도 당신께 더 좋은 기도가 되게 하소서.
입술보다는 발걸음이 더 좋은 기도가 되게 하소서.”
(토마스 머튼)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가장 확실한 교회의 우군이요 기도 부대>
어제 시메온 예언자에 이어 오늘은 한나라는 여예언자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한나 역시 시메온 못지않은 노인으로서, 평생토록 성령의 이끄심 안에 거룩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당시 유다인들의 평균 연령이 40전후였는데 놀랍게도 한나 예언자가 아기 예수님을 목격할 당시 나이가 여든 넷이었습니다.
일찍 남편을 여윈 한나는 장장 60년 세월동안 성전을 떠나지 않고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기며 살아왔습니다.
그런 한나의 충실한 신앙생활에 하느님께서 크게 응답하셨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전 자신의 두눈으로 메시아로 오신 아기 예수님을 보게 되는 축복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 안에도 한나같은 자매님들이 많이 계십니다.
교회의 보물이요 보루이십니다.
가장 확실한 교회의 우군이요 기도부대입니다.
눈만 뜨면 성당으로 나오십니다.
성당이 삶의 중심입니다.
크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어떤 상황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킵니다.
분명히 하느님께서 이 시대 또 다른 한나예언자이신 그분들을 크게 축복하시고 풍성한 은총을 선물로 베푸실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날로 자유로워지고 경쾌(輕快)해지는 선물인생 - 주님을 "따름"과 "닮음"의 여정>
“새는
가진 것이 없어
저리도 가볍고 기쁘게
하늘을 날 수 있겠지”
- 1998.3.17.
요즘 수도원에는 겨울철인데도 새들이 많습니다.
살다가 흔적없이 사라졌는지 그 많은 새들 중 죽은 시체를 한번도 본적이 없습니다.
자유로이 하늘을 나는 새들이 부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합니다.
그 작은 새들이 무수히 하늘을 떼지어 나는 모습을 볼 때 마다 가볍게, 기쁘게, 비상하는 영적 삶을 상상하게 됩니다.
날로 무겁고 어둬지는 짐같은 삶이 아니라 날로 가볍고 밝아지는 선물같은 삶이 되기를 소망하지만,
몸도 마음도 무겁고 어둬지는 현실이 더욱 분투의 노력과 훈련을 다하게 합니다.
삶은 선물인가 짐인가, 자주 자문하는 질문이자 피정지도 시 주제로 택했던 강의 제목인데,
참으로 날로 기쁨과 감사중에 가벼운 선물인생을 살고 싶음은 누구나의 바람일 것입니다.
어제 복음의 주인공이 시메온이었다면 오늘 복음의 주인공은 한나라는 여자 예언자입니다.
한나에 대한 묘사가 생생하여 눈에 선히 그려집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해를 살고서는 여든 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며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복음의 한나처럼 노년에 이르기 까지 한결같이 치열한 선물 인생을 사시는 초대 안동교구장이었던 두봉 레나도 주교님이 생각납니다.
게시판에 붙은 주교님의 친필 성탄 답신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많은 성탄 카드 중 친필의 축하 서신은 이기헌 주교님과 두봉 주교님뿐이었습니다.
“축 성탄
보내신 카드를 잘 받았습니다.
사진! 예수님 성탄 계기로 삼아 우리는 예수님 닮은 삶을 삽시다.
2023.12.20. 두봉 주교”
1929년 생이니 저보다 20년 연상의 만 94세의 노년에도 ‘가볍고 기쁘게 감사하며’,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로 주님을 따름과 닮음의 선물인생을 사시는 모습이 참 경이(驚異)롭고 이채(異彩)롭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새삼 “주님을 따름과 닮음의 여정”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과연 날로 주님을 따름과 닮음의 여정에 항구한지 성찰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한나와 더불어 생각나는 90세에 선종하신 제 어머니 신마리아입니다.
노환으로 돌아가셨지만 돌아가시기 전 낙엽처럼 바짝 마른 참 가벼운 모습을 잊지 못합니다.
죽음을 직감하셨던지 제가 선물한 묵주, 시계를 내놓으셨고, 어느 수녀님이 선물한 묵주반지만 끼고 계시다 돌아가셨습니다.
서울로 유학하여 공부할 때도, 군입대후 군대시절에도 가장 많이 생각났던 어머니이며,
작금의 나이 들어 가는 노년 인생중에도 가장 많이 생각나는, 끊임없는 회오(悔悟)의 마음을 불러 일으키는 어머니입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기전에 써놨던 “어머니를 그리며” 후반부 내용이 지금도 선명히 떠오릅니다.
“그 흔한 종교나 신앙 없이도 한결같이 사셨던 어머니
삶 자체가 기도였고 신앙이셨고 종교이셨다.
이리저리 감정에 연약하게 흔들렸던 분이셨다면
그 험한 1940-50년대 세상 세월에 다섯 남매 어떻게 키웠을 것인가.
‘외롭다’거니 ‘그립다’거니 감정 표현없이도
따사로운 남편 사랑없이도 과부아닌 과부처럼 흔들림없이 꿋꿋이
가정을 지켜오신 어머니.
내 수도원 들어올 때도 극구 만류하셨다.
‘왜 이제 살만하게 됐는데 또 고생길에 접어드느냐’고
그러다가 하루 지나 내 방에 들어오셔서
‘예 수철아, 네가 좋아하면 수도원에 들어가라’고 허락해 주셨다.
사실 어머니는 은연중 막내인 나와 살고 싶어 하셨다.
지금은 극도로 쇠약해 지셔서 온 종일 방에 누워계신 어머니
정신은 여전히 맑으시고 마음도 고요하시다.
그냥 계시기만 해도 좋은 어머니
‘신마리아’
오래 사셨으면 좋겠다.
나도 이제 나이들어 철이 들었나 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얼마전에 썼던 고백시이며 제 어머니는 18년 전 2005년 6월에 선종하셨습니다.
참으로 끝까지 인내하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사시다 지닌 것 없이 가볍게 세상을 떠나신 어머니 역시 오늘 복음의 한나와 흡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단식과 기도로 깨어 지내던 새처럼 자유로운 영혼의 예언자 한나도
시메온처럼 마음의 눈이 열려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을 만났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이에 대해 알립니다.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 예식을 마치고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가는 예수님 부모 모습도 참 홀가분해 보입니다.
한나도 예수님 부모도 참 초탈(超脫)하고 경쾌(輕快)해 보입니다.
아, 나이들어갈수록 무겁고 어둬지는 삶이 아니라, 푸른 창공을 자유로이 나는 새처럼 몸도 마음도 삶도 밝고 경쾌해졌으면 좋겠습니다.
한나도 예수님 부모도 분명 그러했을 것입니다.
예수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하니 그 부모에 그 아들 예수님임을 깨닫습니다.
자녀 교육에 집착없는 지혜로운 사랑, 자유롭게하는 사랑보다 더 좋은 사랑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여 날로 따름과 닮음의 여정이 깊어갈수록 이탈과 초탈의 경쾌한, 자유로운 빛속의 삶이겠습니다.
참으로 이런 영혼들은 제1독서 요한 사도의 말씀에 더욱 공감할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따름과 닮음의 이탈과 초탈의 삶을 살았던 한나가 우리에게 주는 말씀 같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의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닙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모두가 다 지나갑니다.
사라져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삽니다.
우리 선물인생을 참으로 자유롭고 경쾌하게 하늘의 새처럼 살 수 있게 하는 깨우침을 주는 주님의 참 귀한 가르침입니다.
소유하되 소유되지 않는, 소유가 아닌 존재의 자유로운 본질적 삶을 살라는 말씀이며,
집착없는 초연한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 깨끗한 사랑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주님을 따름과 닮음의 여정에 충실함으로 주님을 닮아 밝고 맑고 향기로운 삶을, 참으로 초탈과 이탈의 자유롭고 영원한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을 섬기는 삶의 정수를 보여 주십니다>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을 섬기는 삶의 정수를 보여 주십니다.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루카 2,37)
아기 예수님이 성전에 봉헌된 날, 그 자리에 함께했던 한나라는 예언자의 삶에 대해 루카 복음사가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세상 즐거움과 위안을 맛본 짧은 결혼생활이 끝난 뒤에 그녀는 온 존재와 삶을 하느님께 걸었지요.
자신의 존재를 그분 앞에 두고, 온전히 그분의 소유로 살아간 것입니다.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루카 2,38)
예언자인 그녀의 역할은 하느님께서 입에 담아 주신 말씀을 전하는 일입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목소리니까요.
이제 직접 눈으로 하느님의 구원을 본 그녀는 무엇보다 먼저 감사를 잊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삶은 대부분 감사로 채워지게 마련이니, 그녀의 반응은 놀라울 것 없이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답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거기에 더하여 직접 눈으로 본 구원을 선포하게 됩니다.
예언에 증언이 보태어진 것이지요.
세상이 아무리 번잡해지고 향락이 일상화되어도 내적 삶을 소중히 가꾸며 구원을 기다리는 이들이 없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한나의 증언은 견고한 희망의 울타리를 둘러주는 것과 같을 겁니다.
함께 듣고 공감하고, 믿고 희망하는 것만으로도 구원에 이르는 길이 훨씬 선명해지니 기쁘고 감사할 따름이지요.
제1독서의 말씀은 세상의 욕망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라고 당부합니다.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
(1요한 2,15)
물론 '세상'이 가리키는 중의적 의미를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받아들여야 하겠지요.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사랑하시는 곳으로서의 세상은 그분께서 사랑하시는 피조물이 각자의 평화와 충만함을 누리는 장이기에 소중하고 거룩합니다.
동시에 세상은 온갖 욕망과 불의와 이기주의를 대변하는 장이 되기도 합니다.
요한 서간 저자가 말하는 '세상'의 의미는 어둠의 힘이 장악한 세속을 가리키지요.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1요한 2,17)
세상이 주는 즐거움과 쾌락, 만족은 일시적입니다.
겉꾸민 허영과 과시, 눈속임과 위선, 질시와 경쟁, 증오와 기만의 태 안에서는 슬프게도 사랑이 쉽게 유산되어 버리지요.
진실도 선함도 착상할 곳을 찾지 못해 쉬이 유실되고 맙니다.
욕망하는 무언가를 들이면 들일수록 더 공허해지는, 심연의 구렁과 다를 바 없는 곳이 바로 그 '세상'입니다.
오늘 복음 속 한나는 영원히 남는 사랑에 전 존재를 던진 지혜로운 여인의 표상입니다.
그녀는 세상 것에 연연하지 않고, 철저히 하느님만 바라보며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로 삶의 모든 공간을 채웁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그녀를 사로잡았고, 그녀의 사랑에 하느님이 매료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녀의 시공 안에 현존하십니다.
"주님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네."
(영성체송)
사랑하는 벗님!
우리가 이미 체험적으로 알고 있듯이 삶에서 우리가 누리는 행복은 재산이나 인맥, 권력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런 것처럼 보일 수는 있지만, 실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상으로 베푸시는 은총에서 우러나는 것이지요.
진정한 행복은 주님의 충만함 안에 녹아들어가 그분 충만함의 일부가 된 영혼에게 주어집니다.
오늘 우리가 만난 한나처럼 말이지요.
신구약의 접점에서 복음 안에 잠시 모습을 드러낸 한 여인의 삶이 우리에게 깊은 울림으로 다가오길 기원합니다.
아기 예수님도 그녀와의 만남을 기뻐하셨을 것이고, 마리아와 요셉도 큰 위안을 받았을 겁니다.
그리하여 각자의 삶에서 조금씩 더 깊이 주님을 섬기는 은총으로 들어가시길 축원합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기" 때문입니다.
한나처럼 하느님을 섬기기 시작한 벗님을 축복합니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제가 5년 전에 미국에 온 이유는 주교님께서 <미주가톨릭평화신문>에서 일하도록 권고하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예’라고 순명하였고, 기쁜 마음으로 왔습니다.
제가 미국에 온 또 다른 이유는 본당은 맡지 않겠다는 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보좌 신부님들이 본당 사제가 되기까지 20년 가까이 있어야 하는 현실이 있고, 저라도 양보하자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제 몇 년이 지나면 저를 포함해서 ‘원로사목자’들이 늘어날 것이고, 보좌 신부님들이 본당 사제가 되는 기간도 짧아 질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 와서 ‘ME 대표 신부’를 맡았던 이유는 제가 한국에서 ME 주말 봉사를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기쁜 마음으로 ME 대표 신부가 되었습니다.
3년 동안 팬데믹 중에도 피정, 소풍, 주말 체험, 총회에 함께 했습니다.
부부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감사했고, 유익했습니다.
제가 ME 대표 신부를 마치고 꾸르실료 지도 신부가 된 이유는 전임 지도 신부가 권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한국에서 꾸르실료 봉사를 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는 신심단체들이 있습니다.
‘성령 기도회, 레지오, ME, 꾸르실료’와 같은 단체들이 있습니다.
사제는 가능하면 이런 신심단체가 성장할 수 있도록 관심과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영화의 주제는 생, 노, 병, 사를 넘어서는 깨달음을 이야기합니다.
달마 조사는 527년 남인도에서 당나라 낙양에 도착하여 소림사에서 9년 동안 면벽 수도를 하였습니다.
인도를 중심으로 하면 달마조사는 동쪽으로 가신 것이며 중국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서쪽에서 오신 것입니다.
서쪽 인도에서 중국으로 오신 행보로 인해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라는 조주 스님의 문답이 있습니다.
조주 스님은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동쪽 당나라로 오신 뜻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달마 조사는 동쪽으로 온 까닭에 대해 답했습니다.
“내가 본래 이 나라에 온 것은 법을 전하여 미혹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함이라. 한 꽃에 다섯 잎이 피어서 결과가 저절로 이루어지리라”고 답했습니다.
사제가 되었으면서도 사제가 된 이유를 모르면 방황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지 못하고 세상의 것들에 빠져들게 됩니다.
사제가 되었다는 것은 달마대사가 동쪽으로 왔던 것처럼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성탄 팔일 축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요한복음은 친절하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성탄을 지내면서 카드를 보내는 것도, 구유경배를 하는 것도, 선물을 보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입니다.
성탄을 지내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지 그 의미를 묵상하는 것도 좋습니다.
오늘 독서는 신앙인들이 삶을 살아가야 할 방향과 목적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요즘 젊은 사람들이 버릇없고 무례하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세대 차이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나이 많으면 예의가 넘치고 무례하지 않을까요?
우연히 뉴스를 보다가 어느 국회의원이 상대 당 국회의원을 향해 “왜 이렇게 예의가 없어?”라고 큰소리치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어떤 상황이었는지 정확하게 알지는 못했지만, 국민을 대표한다는 국회의원들의 모습이 더 예의 없고 무례해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국회의원이 젊은 사람이었을까요?
아닙니다.
분명히 손자 둘 셋은 있을 법한 나이였습니다.
버릇없음과 무례함은 나이와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보다 예민한 사람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어떤 자극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것을 상대는 무례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의 없다며 다시는 상종해서는 안 될 사람이라며 외면할 것이 아니라, 단지 생각이 다를 뿐이라면서 받아들일 여유가 필요한 것입니다.
자기 말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상대의 말도 옳을 수 있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조건 틀렸다면서 예의 없고 무례하다고 말하기보다, 그런 이견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 상대방을 존중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만이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이 제게 눈물을 흘리면서 “하느님께서는 왜 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아요? 제가 한 달 동안 얼마나 열심히 기도했는데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상황만을 보고 하느님은 제대로 보지 않는 모습입니다.
자기가 보기에는 한 달이면 정말로 열심히 기도한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하느님께서는 부족하다고 말씀하실 수도 있지 않을까요?
예수님도 서른이 되어서야 공생활을 하셨지요.
자그마치 하느님의 일을 위해 30년 동안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한나 예언자는 어떠한가요?
그녀의 삶에 대해 복음은 이렇게 전해줍니다.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루카 2,36-37)
보통 15살쯤에 결혼했던 것을 기억하면, 60년 이상을 성전에서 단식하고 기도하면서 하느님을 섬겼던 것입니다.
그 삶이 과연 쉬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런데도 아기 예수님을 보고는 하느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고, 사람들에게 예수님에 대해서 알리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전했습니다.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기다림의 시간을 가졌던 한나 예언자를 떠올리면서, 우리 역시 섣부른 판단으로 하느님 바라보는 것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그래야 우리 삶 전체에 퍼져있는 하느님의 움직임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큰 기쁨 안에서 감사의 기도를 바칠 수 있게 됩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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