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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골산 칼럼 제1767호 /그리스도인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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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란 마음이 평안한 상태로 억눌림이 없는 행복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자유에 대해 생각하고 내가 이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는지 알아야 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유를 갈망합니다. 억압을 원하는 사람은 아마 세상에 한명도 없을 겁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반항하는 기질이 있고 이로 인해 항상 서로 싸웁니다. 이 성향이 사람이 억압을 탈출하고 싶다는 증거가 됩니다. 억압에 자유하고 싶을때 반사적으로 자기보호를 하는 것입니다. 반항이란 어느 대상에게 불순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서로 섬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대상은 부모님이 될 수 있고 친구도 될 수 있으며 모든 주위 사람이 이에 해당됩니다. 이 반항하는 기질은 정말이지 지구상에 단 한사람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사람이 모이는 곳은 항상 의견충돌이 있으며 분쟁과 경쟁이 있으며 싸움이 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 분들께 한 가지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댓글로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만 양심에 대답하셨으면 합니다. 스트레스 없는 싸움이 있을 수 있으며 그 싸움과 스트레스를 즐기는 분이 계십니까? 저만의 생각일지 모르겠는데 그런 분은 정말 단 한분도 안계실 겁니다. 서로 완전히 믿지 못해 한순간에 불신하는 것으로 이 불신이 커지면 분쟁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해결 방법이 있을까요? 물론 있습니다. 해결을 하려면 반대로 행동하면 됩니다. 서로 피차 용서하고 이해하며 섬겨야 합니다. 정말 쉬운 결론입니다. 하지만 이 쉬운 결론이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항상 이런 말을 합니다. "니가 해봐라. 참 말은 쉽다." 그렇습니다. 의인이 되는 것은 초자연적인 부분으로 사람의 힘으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누가 반항하고 싶어 했겠으며 범죄하고 싶어 했겠습니까. 이런 죄성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고 스스로 어찌 할 수 없는 불순종의 성향인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종교를 떠나 사람 대 사람으로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노력하면 의인일 수 있다는 사람은 백프로 그의 양심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거나 양심이 굳어 적당히 악행에 타협하는 사람입니다. 서로 완전히 섬기는 것이 불가능한 사람이란 존재는 죄악을 피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 마음을 어찌할 수 없고 이로 인해 죄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단 한명도 예외가 없습니다. 죄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난해도 화목한 가정에서 자랐고 어떤 사람은 가난하고 불행한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자신은 그럴만한 복을 받았기에 그것이 당연한 것이고 타인은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때문에 사실 사람이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은 그럴 이유도 그렇게 해서도 안됩니다. "만약에 내가 그 입장이었다면" 하고 생각한다면 "나는 그렇지 않았을꺼야." 하고 단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나는 그렇지 않았을꺼야." 하고 내 입장에서만 이야기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나라도 그랬을거야. 같이 힘내자." 하고 위로 한다면 상황은 충분히 달라졌을 겁니다. 위로한 후 사랑으로 더 좋은 상황을 권해주면 그는 충분히 알아듣고 더 좋을 길을 선택할 수 있었을 겁니다 .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을꺼야." 하고 그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이가 진전이 없고 깨지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그를 미워하니 그도 나를 미워하고 둘은 원수지간이 되는 것으로 이런 상황은 누구도 원하지 않습니다. 누구도 원하지 않지만 그런 상황이 흔히 벌어지는 이유는 마음처럼 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사람은 태어나 누구를 미워하고 욕하고 화내며 분쟁하는 일은 한명도 예외없이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같습니다. 의인은 하나도 없고 모두 죄인인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 입니다. 앞에서 대놓고 욕하고 싸우거나 뒤에서 수군수군 하거나 다를바 없이 똑같이 악한 행동입니다. 그렇다고 자제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은 짐승이 아니기에 사람입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 태어나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의 행동에는 엄청난 모순이 있습니다. 분명히 자유를 얻은 사람들인데 행동은 마치 계속 뭔가에 억압을 당하고 있습니다. 자유를 얻었지만 그들의 모습을 보면 계속 자유를 갈망하고 있고 자유의 삶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자유를 누리려면 서로 사랑해야 하는 것이 마땅한데 계속 자유를 위해 서로 싸우고 있습니다. 이 부분이 모순중의 모순입니다. 억압을 벗어나기 위해 계속 억압 당하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는 돌고 도는 억압 뿐입니다. 때문에 자유는 절대로 쟁취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끊임없이 자유를 추구하지만 그것을 이루지 못하고 평생을 억압에 살다 죽습니다. 이런 분쟁도 애초에 서로가 원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분쟁을 피할 수 없는 존재가 사람입니다. 태어나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가며 항상 이런 말을 많이 합니다. 세상만사 마음대로 되는것이 하나도 없다. 정말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다 알만하게 살고 있습니다. 버릇처럼 내뱉는 말들에 답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불가능해서 그렇지 이 답도 말로 하자면 상당히 간단합니다. 원수마저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내 혈육과 주위 사람들 간의 사랑이 아닙니다. 모두가 서로 사랑해야 자유로운 삶입니다. 이땅을 자유의 땅으로 바꾸려면 모든 인류가 사랑으로 하나되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불가능하기에 끝없는 갈망에도 불구하고 평생을 무언가에 억압당하며 사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명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이기에 이런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불순종의 죄성을 가진 사람은 불가능 합니다. 열번중에 아홉번을 잘하다가도 한번은 꼭 이런 의문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왜 내가 그래야 하지?"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의식적으로 악한 생각을 합니다. 이 무심코 내뱉은 자기만 생각하는 한마디 말 때문에 서로 감정이 상하고 미워하며 싸우는 것입니다. 절제하여 싸우지 않고 피한다고 해도 내 속에 있는 미움은 나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그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이것이 스트레스 입니다. 때문에 이런 스트레스 뿐인 미움이나 싸움을 아무도 원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정말 답답하게도 피할 방법이 없습니다. 불신은 손쓸 방법이 없습니다. 절제로 그것이 가능할까요? 단언컨데 불가능 합니다. 절제에서 오는 욕구불만으로 인해 스트레스가 쌓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는데 사랑하는 척 믿지 못하는데 믿는 척, 이 얼마나 불행한 모습입니까. 분쟁이 싫어 피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아무리 그 상황을 잘 넘겼다고 해도 인생중에 얼마든지 똑같은 상황은 다시 찾아 옵니다. 때문에 인류는 이 같은 상황을 끊임없이 고뇌하며 이를 해결할 방법이 없을까?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로 인해 많은 종교가 생겨났을 것이며 모든 종교는 사람의 욕구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종교에 의지해 어떤 행위로 자신의 욕구에서 오는 걱정, 불안감 등을 다스리고 이로 인해 마음의 평안을 찾는 것입니다. 명상이나 요가, 기수련 등도 같은 뿌리입니다. 요즘 사회에서 유행하는 긍정의 힘이나 적극적 사고방식 같은 말도 다 같은 뿌리입니다. 하지만 이 같은 행위나 생각들이 옳은 것입니까? 죽음을 해결할 수 없는 죄인인 사람이 욕구를 스스로 해결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죄인인 사람이 자기의 죄를 노력해서 없앨 수 있다고 믿는 것으로 참람된 생각입니다. 때문에 죽음을 이긴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이 중요한 사건입니다. 무당을 불러 굿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명상, 요가, 기수련 등의 방법과 행위를 해서 완전히 변한 사람이 있습니까? 저런 종교적인 행위로 죽음에 이르는 두려움을 잡지는 못합니다. 순간일 뿐입니다. 이렇듯 세상의 종교는 이름만 다를 뿐 다 같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넓은길은 바로 이런 인간적인 생각을 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세상의 종교들이 선한 곳으로 사람을 인도한다면 세상은 벌써 낙원이 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이런 방식은 절제에 불과합니다. 사람은 본질적인 것이 해결이 되어야 즉 죄와 죽음이 해결되어야 진정한 기쁨을 맛보며 모든 사물을 긍정적으로 보고 적극적인 마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과 마음은 억지를 부린다고 해서 해결되는 부분이 하나도 없습니다. 정신병과 스트레스, 불면증 등은 자신이 어찌 할 수 없는 욕구를 억지로 절제하기에 생기는 병입니다. 욕구를 스스로 절제해서 스트레스 받지 않는다면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죄악을 스스로 절제할 수 있다면 사람이 태어나 불행을 느낄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서로 완전히 신뢰하고 견제하며 살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여기서 힌트를 얻습니다. 자유주의 국가에서 살지만 억압당하는 모습으로 사는 이유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억압 당하는 것은 내 안에 있는 육신의 생각 곧 땅에 속한 욕구입니다. 이는 모든 죄악의 뿌리입니다. 내 육신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고 넘어지는 것으로 두려움에 사로잡혀 죄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곧 죽음안에서 죄악에 억압당하는 삶을 살게되는 것으로 사람은 두려움 앞에 연약합니다. 이로 인해 죄악된 쳇바퀴의 삶을 살며 그것을 원하지 않는대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두려움 때문입니다. 나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이 불순종의 죄성을 가지고 있기에 두려움으로 스스로 보호하려는 욕구입니다. 더 좋아야 하고 더 강해야 살아남기 때문에 욕심이 생기고 이로 인해 서로 불신하며 이로 인해 온갖 죄악에 빠집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기분 나빠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은 모두 이러한 죄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세상에 욕심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으며 사람에게 상처 안주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 모든것이 죄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죄를 인정하고 자복해야 용서받을 죄도 생기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의 삶도 똑같습니다.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데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 용서 받을 기회가 없습니다. 반면 내 잘못을 인정하면 상대에게 용서를 구할 기회가 생기고 용서를 받으면 마음이 편안해 집니다. 이 자유는 사람이 태어나서 단 한번도 스스로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스스로 노력으로 얻을수 없으니 그 누구도 자신의 노력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틀림이 없으며 항상 이 가르침을 강조 하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그렇습니다. 위에서도 계속 적어 내려왔듯이 서로 사랑하는 삶이 진짜 자유의 삶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첫째, 우리가 여전히 불순종하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우리가 육신에 속에 죽음안에서 죄악에 종노릇하며 스스로 방어하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도 선악과를 먹은 후 두려움에 가장 먼저 한 행위가 나뭇잎으로 스스로를 가린 것입니다. 두려움에 자기보호를 하는 사람은 분명히 반사적으로 스스로 어떤 행위를 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죽옷을 입히십니다. 행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순종이 필요합니다. 스스로 어떤 행위로 가릴 생각을 버리고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하며 구한다면 내게 맞는 것들을 주십니다. 셋째, 나 자신이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 자부하므로 자신의 죄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 또는 산다라고 자부하는 사람들도 똑같이 분쟁한다는 사실입니다. 선하게 사는 사람들도 혈육이나 주위 사람에게만 선한 것이지 모두에게 선한 것은 아닙니다. 분쟁으로 아무리 쟁취해도 인류의 분쟁은 전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증가한다는 것이 증거가 될 것입니다. 내가 어찌 하지 못하는 욕구를 남들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입니다. 그들도 죽음앞에 연약한 사람입니다. 죄인은 언제라도 상황이 되면 죄를 범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입니다. 때문에 자유를 누릴 자격이 없습니다. 인생에서 충분히 알만하듯 어찌 할 수 없는 욕구와 두려움이 있기에 불순종하는 사람은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죽음 앞에 종인 사람이 죽음을 이길수 없기에 스스로의 노력으로 의인이 되어 스스로 자유에 이를수는 없습니다. 누린다는 것은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것이지 자격이 없는 사람은 스스로 넘어지게 마련입니다. 자유 민주주의 국가가 발전하면 할수록 타락하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죄인에게 자유를 주면 필히 타락합니다. 사람은 사람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구원의 확신을 착각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습니다. 때로는 구원의 확신이 사람을 더욱 악하게 만들 수 있는데 "구원 받았으니 누리고 살일만 남았다."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는 택함 받았으니 살아도 죽어도 모든것이 주의 뜻이라고 하면서 감사하는 생활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틀린말은 아닙니다. 살아도 죽어도 주의 뜻입니다. 하지만 주의 뜻임을 안다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의 뜻대로 사는 삶이야말로 큰 은혜의 삶인데 죽음도 은혜라 고백하면서 감사하지 못한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때문에 이들은 죄악가운데 살아도 주의 뜻이라 생각하며 자기 생각대로 말씀을 오해하고 그것이 순종이라 착각합니다. 모든것을 주의 뜻이라 생각하면서 사는데 막상 그것은 주의 뜻이 아닌 나의 뜻 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10명의 문둥병자 이야기 속에 9명처럼 주님이 나를 깨끗해 해주셨음을 감사하지 못하고 은혜로 얻은 자유를 자기 육신의 뜻대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주님을 떠난 사람은 필히 얻은 자유를 잃고 다시 세상의 억압속에 살게됩니다.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으로 눈뜬 소경이 되어 무엇이 좋은것인지 분간하지 못하고 주님을 떠나 어느 순간 감사를 잊습니다. 지나친 율법주의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나 이것이 주님 주신 자유라며 육신에 타협하는 신앙생활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둘다 자신의 의지로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보혈을 의지하고 믿으면 성령의 9가지 열매가 맺혀지지 않을리 없습니다. 하지만 단 1가지의 열매도 없습니다. 세상 끝날에 주님은 우리 속사람의 열매를 보고 정확히 판단하실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돌이켜 회개해야 합니다. 때문에 그들은 교회 안에서도 서로 분쟁하고 내가 옳다. 너는 틀렸다. 판단하며 심판대의 주인이 된듯 행동 합니다. 주님이 언제 서로 판단하며 분쟁하라 하셨습니까.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책망하신 주님입니다.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회개해야 합니다. 저도 예외가 없습니다. 저도 추악한 죄인입니다. 내가 받고 있는 사랑은 내 노력이 아닌 타인이 댓가 없이 나를 사랑해 주는 것임을 깨닫기를 소망합니다. 내 노력은 타인이 나를 사랑해 줬기 때문에 걸맞는 행동이 나온 것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내 노력은 불안의 스트레스를 피하기 위해 하는 곧 철저히 나를 위해 했던 것임을 알고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이와 똑같은 모습으로 죄악에서 종노릇하는 우리를 건지시고 구원하셨습니다. 하지만 자유를 얻은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죄악에 빠져 스스로 파멸하고, 멸망하고 그들이 그토록 기다려온 구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전세계로 흩어졌습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은혜로 자유를 얻었지만 죄악에 빠져 더 이상 되돌아 가기 힘들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주님을 계속 못박고 있는 우리입니다. 이스라엘은 남의 역사나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의 이야기 입니다. 회개도 마찬가지 입니다. 내가 추악한 죄인임을 보여주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회개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도 마찬가지 입니다. 믿음주시고 회개의 복을 주시지 않았다면 불가능 합니다. 회개로도 부족합니다. 용서가 없다면 소용없습니다. 하지만 정죄하지 않으시고 용서해 주십니다. 그뿐 아닙니다. 우리의 죄를 십자가 보혈로 다 씻으시고 죄없다 하시며 우리를 의롭다 하십니다. 그뿐 입니까. 죽음도 이기는 능력으로 부활하십니다. 또 승천하시고 우리를 위해 잔치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믿었다는 이유 하나로 온갖 좋은것과 필요한 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챙겨 주십니다. 우리가 억압당하는 본질을 빠짐없이 해결해 주시고 자유를 주십니다. 우리는 감사와 순종이 남은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사람들은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고 진정으로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아 자유를 얻었습니다. 믿음을 선물로 받고 회개의 복을 누리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깨닫기 시작한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느끼고 그의 말씀이 전부 이루어지는 모습을 본 후 믿음에 자신을 돌이켜 회개한 것입니다. 아까 이야기 했듯 사람이 자유를 얻으려면 의롭다함 받아야 합니다. 죄사함 없이 자유를 깨달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죄사함이 없이는 그 누구도 깨닫는 것이 불가능한 이유는 죄인은 선한 성령 세례를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선과 악이 공존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악한 곳에 성령님이 계실 수 없기에 죄인은 절대 깨달을 수 없습니다. 이 문제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케 하셨고 믿는자를 구원하시고 영원한 생명 주시고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셨듯 우리도 죽음의 두려움을 벗고 육신에 죽어 거듭나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죽어 없어질 육신에 죽어 영원히 죽지 않는 지극히 선한 자유로운 영의 새로움을 입는 것입니다. 때문에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비록 넘어지고 실수할지라도 주님 손잡고 일어나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사단은 이 세상의 많은 종교로 세상을 구하는 구세주를 모방했지만 죄사함은 모방할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과 같은 분은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정말 유일한 한분 이십니다. 예수님이 믿음을 떠나 사실인 이유입니다. 예수님이 참 구주이자 하나님이신 이유입니다. 세상에 많은 종교가 있고 신이 있지만 사람의 죄를 대속하신 구주가 없는 이유입니다. 사단이 모방한다고 하더라도 종교적인 특권 없이 모든 사람의 죄를 대속하는 죄사함의 권세가 있는 대속주는 없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시지 않으셨다면 그 권세는 거짓이겠지만 부활하시고 또 승천하셨습니다. 죽은 사람을 본받는다면 그와 같이 죽기에 우리가 소망이 없겠지만 그분이 살아계시기에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살아계시다는 충분한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면 충분한 증거가 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하지 않았다면 죽음이 없었겠고 죽음이 없었다면 죄악이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죄없이 잉태 되셨고 순종하셨으며 죽음을 이기시고 그분에게 죄악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분이 우리의 죄를 위해 자기를 드려 단번에 제사드린 바 되셨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이를 진심으로 믿으면 우리도 우리 몸을 그분에게 드려 회개하며 값없이 구원받고 성령의 은사를 받습니다. 습관적인 종교행위로 상한 심령을 잊게 만들어 결국 회개로 인한 속죄제를 드리지 못하게 방해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사단의 계책입니다. 스스로 죄를 기억하지 못하게 하여 믿어도 믿지 못하는 것만 못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예배 드리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종교행위를 하지 않으면 안될것 같은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이런 스스로 열심내는 종교행위에만 빠지면 자신의 기분에만 빠져 습관적인 종교인이 될 뿐 신앙인으로 성장하지는 못합니다. 우리가 왜 죄인인지 깨닫지 못하고 말씀을 지키려는 열심으로 이것이 순종이라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마음이 없는 습관적인 행위에만 의존하는 신앙상태가 되고 후에는 자신이 죄인임을 잊어 회개하기 힘든 상태가 됩니다. 신앙은 삶의 중심입니다. 신앙은 삶의 일부가 아닙니다. 속죄에 대한 지식이 있는 이스라엘도 사단에게 완전 속아넘어 갔습니다. 우리가 넘어지지 않을 이유는 없습니다. 회개하고 죄사함 받았을 때 즉 주님을 영접할 때 내 삶이 변해 영과 진리로 예배 드립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신령한 예배를 드리면 우리에게 기쁨과 평안을 더하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을 영접한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불안할 이유가 없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일만 남은 것입니다. 때로는 고통이 와도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기에 주님 손잡고 이겨내며 결코 사랑하는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의 시작은 회개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고는 회개가 될 수가 없습니다. 회개가 되지 않으면 보혈의 능력을 의심한 것이기에 죄사함이 있을수가 없고 죄인은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사단은 죄사함의 권세가 없기에 죄사함 받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으로 이것이 사단의 최선의 방법입니다. 믿는다고 해도 구원의 확신이 없어 삶에 변화가 없고 자유함이 없는 이유입니다. 육신의 행위로는 회개가 나오지 않습니다. 이런 욕심을 소유한 신앙생활은 아담과 하와가 나뭇잎을 가리듯 두려움에 방법을 찾으며 자신을 의지하며 육신의 행위로 신앙생활 합니다. 반면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라는 말씀은 하나님과 떨어져 빛에 거하는 자유의 삶을 잃을까 두려운 것입니다. 믿음을 잃어 하나님과 떨어질까 두려운 것입니다. 다시 세상에서 억압당하고 고통받던 시절로 돌아아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이런 두려움은 더욱 하나님만 의지하게 만듭니다. 전자는 육적인 두려움이고 후자는 영적인 두려움입니다. 두 경우의 결과는 보시다시피 정반대입니다. 때문에 분명 예수님을 믿는다 시인하지만 그들의 결과는 죄사함이 없어 육적인 두려움이 존재합니다. 요즘같이 이단이 많은 시대 지옥의 두려움에 악몽을 꾸거나 사는것이 고달픈 분들이 아마 많으실 겁니다. 사람에게 의지하지 말고 말씀만을 의지 하십시요. 읽기 쉬운 글자가 큰 성경을 겸허히 그리고 천천히 읽으세요. 아무 유혹이 없는 조용한 방도 좋습니다. 그리고 혼날 각오를 하십시요. 충분히 정죄 받고 내가 죄인임을 느끼십시요. 그 죄책감이 당신을 구할 것입니다. 그 고통이 당신을 구합니다. 그 고통은 주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 회초리는 주님이 눈물 흘리시며 나를 치시는 사랑의 회초리 입니다. 그 사랑의 회초리가 당신을 회개로 인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정죄하지 않으시고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혼내시는 이도 하나님이시고 용서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기에 매를 드시고 사랑하기에 용서를 구하면 용서 하십니다. 독생자를 보내셔서 그의 피로 우리의 죄를 씻어주셨습니다. 하지만 성경에 쓰여있길 율법의 저주라 했습니다. 율법이 도리어 사람의 짐이 되었습니다. 율법은 사람을 온전하게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지키려면 자기 자신의 욕구를 절제해야 했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고민속에 사는 것입니다. 스스로 지키자니 그것이 짐이 되고 안지키자니 벌을 받아야 합니다. 짐이 되는 이유는 불순종의 성향 때문 입니다. 이로 보았을때 세상의 악을 정죄하는 율법은 지극히 선합니다. 하나님의 법이 없는 나라도 같습니다. 사람은 죽음을 피할 수 없으며 사망이 왕노릇 하는 것입니다. 그들도 그들만의 법이 있습니다. 그들의 법에도 사람으로 하지 말아야 할 선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은 이로 인해 고민에 빠집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의 양심은 선한 것이 무엇인지 압니다. 하지만 불순종하므로 그렇게 살지는 못합니다. 스스로 잘나고 지식있는 사람들은 깨끗한 척 이미지 관리하며 사람들을 판단합니다. 스스로 잘나고 지식이 없다해도 사람들은 자신의 방법대로 사람들을 판단합니다. 판단은 심판대에 앉은 분만이 할 수 있습니다. 전부 교만한 심판대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이렇듯 모든 인류가 전부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것입니다. 무거운 짐은 바로 이를 의미합니다. 때문에 사람이 계속 불순종하는 이상 율법은 사람에게 죄악만 더 드러낼 뿐입니다. 불순종하는 사람은 율법을 겉으로는 지키지만 마음다해 지킬 수는 없습니다. 불순종하는 사람은 세상의 방법을 겉으로는 지키지만 마음다해 지킬 수는 없습니다. 불순종하는 사람은 사람의 명령을 겉으로는 듣지만 속으로는 분노를 키울수 있습니다. "내가 왜 당신말대로 해야하는데?" 하며 내 속사람은 불순종의 죄성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선한 법으로 그 중심에 사랑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행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행하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든지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고 믿는자는 누구든지 죄인처럼 억압당하는 일이 없어졌습니다. 세상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사랑으로 행하는 사람이 세상의 악한 죄를 범하지 않습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예배나 예물을 드릴때, 또 서로 섬기며 감사하는 것이 억지가 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선지자나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닌 완전하게 하러 오셨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그 감사에 어찌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부끄러워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이 말씀은 감동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끊임없이 정죄하는 율법에서 자유한 우리는 당연히 정죄함이 없어야 합니다.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계속 서로 판단하며 정죄한다면 입으로 믿음을 시인해도 믿음이 없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이해 못할까봐.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원수도 사랑하라." 친절히 말씀 해주셨습니다. 우리의 짐을 대신 지키고 자유를 주시고 죄없다 하시고 영생 주시고 구원하시고 천국을 약속 하셨습니다. 거기에 무엇하나 바라지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고 머리털까지 다 세시며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왜 이런 분을 우리가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가인의 제사를 드리며 스스로의 노력에 만족하며 믿는다면서 변화없이 죄악속에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그 선물이 끊기면 믿음과 사랑도 깨어집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그렇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드리는 선물의 크기를 따지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마음이 있는곳에 몸도 따라가기 마련입니다. 이제 착각에서 벗어나 세상 따로 주님 따로 하지 말고 주님만 의지합시다. 즐거워 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말씀이 즐거워지고 죄악이 미워지므로 사랑으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갑니다. 믿지 않는 분들도 이 자유를 맛보면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만큼 기쁨에 찰 것입니다. 세상의 종교와 신이 자기만의 특권을 앞세우고 분쟁하지만 그리스도인은 특권이 없는 사랑을 앞세우고 화합합니다. 진정한 자유는 분쟁으로 쟁취하여 육신의 욕구를 내 마음대로 누리는 죄악이 아닙니다. 자유란 육신에 얽매인 죄악된 삶에서 자유를 말합니다. 자유는 바로 사랑입니다. 이 특권이 없는 사랑은 그리스도인들의 특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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