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24일 화요일
[(홍)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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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순교 성인 안드레아 둥락 신부는 1785년에 태어났으며, 사제가 되어 열정적으로 사목하였다. 박해 시대의 중심 인물이었던 그는 관헌들의 끈질긴 추적으로 체포되어, 1839년 하노이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54세였다. 1988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그의 동료 순교자들을 성인의 반열에 올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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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 6,14; 1코린 1,18 참조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지 않으리라. 십자가의 말씀이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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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의 기원이시며 아버지신 하느님, 복된 안드레아와 동료 순교자들이 피를 흘리기까지 성자의 십자가를 충실히 따르게 하셨으니, 그들의 전구를 들으시고, 저희가 주님의 사랑을 형제들에게 드러내어 주님의 참된 자녀가 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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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은 거대한 동상이 부서지는 꿈을 꾸고는 번민에 빠진다.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려고 했지만 누구도 해몽하지 못했다. 그런데 다니엘이 풀이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다니엘은 임금의 총애를 받게 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종말을 예고하신다. 사람들은 그날이 언제인지 묻고 있다.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표징이 먼저 있을 것이라 하신다. 거짓 메시아의 출현과 종말에 대한 난립하는 정보들이다. 평소 준비하며 사는 이들에게는 예전부터 알려진 가르침이다(복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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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 한 나라를 세우실 터인데, 그 나라는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모든 나라를 멸망시킬 것입니다.> ▥ 다니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2,31-45 그 무렵, 다니엘이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에게 말하였다. 31 “임금님, 임금님께서는 무엇인가를 보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큰 상이었습니다. 그 거대하고 더없이 번쩍이는 상이 임금님 앞에 서 있었는데, 그 모습이 무시무시하였습니다. 32 그 상의 머리는 순금이고, 가슴과 팔은 은이고, 배와 넓적다리는 청동이며, 33 아랫다리는 쇠이고, 발은 일부는 쇠로, 일부는 진흙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34 임금님께서 그것을 보고 계실 때,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는데 돌 하나가 떨어져 나와, 쇠와 진흙으로 된 그 상의 발을 쳐서 부수어 버렸습니다. 35 그러자 쇠, 진흙, 청동, 은, 금이 다 부서져서, 여름 타작마당의 겨처럼 되어 바람에 날려가 버리니,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상을 친 돌은 거대한 산이 되어 온 세상을 채웠습니다. 36 이것이 그 꿈입니다. 이제 그 뜻을 저희가 임금님께 아뢰겠습니다. 37 임금님, 임금님께서는 임금들의 임금이십니다. 하늘의 하느님께서 임금님께 나라와 권능과 권세와 영화를 주셨습니다. 38 또 사람과 들의 짐승과 하늘의 새를, 그들이 어디에서 살든 다 임금님 손에 넘기시어, 그들을 모두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임금님께서 바로 그 금으로 된 머리이십니다. 39 임금님 다음에는 임금님보다 못한 다른 나라가 일어나겠습니다. 그다음에는 청동으로 된 셋째 나라가 온 세상을 다스리게 됩니다. 40 그러고 나서 쇠처럼 강건한 넷째 나라가 생겨날 것입니다. 쇠가 모든 것을 부수고 깨뜨리듯이, 그렇게 으깨 버리는 쇠처럼 그 나라는 앞의 모든 나라를 부수고 깨뜨릴 것입니다. 41 그런데 일부는 옹기장이의 진흙으로, 일부는 쇠로 된 발과 발가락들을 임금님께서 보셨듯이, 그것은 둘로 갈라진 나라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쇠와 옹기 진흙이 섞여 있는 것을 보셨듯이, 쇠의 강한 면은 남아 있겠습니다. 42 그 발가락들이 일부는 쇠로, 일부는 진흙으로 된 것처럼, 그 나라도 한쪽은 강하고, 다른 쪽은 깨지기가 쉬울 것입니다. 43 임금님께서 쇠와 옹기 진흙이 섞여 있는 것을 보셨듯이, 그들은 혼인으로 맺어지기는 하지만, 쇠가 진흙과 섞여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처럼 서로 결합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44 이 임금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느님께서 한 나라를 세우실 터인데, 그 나라는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그 왕권이 다른 민족에게 넘어가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 나라는 앞의 모든 나라를 부수어 멸망시키고 영원히 서 있을 것입니다. 45 이는 아무도 돌을 떠내지 않았는데 돌 하나가 산에서 떨어져 나와, 쇠와 청동과 진흙과 은과 금을 부수는 것을 임금님께서 보신 것과 같습니다. 위대하신 하느님께서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임금님께 알려 주신 것입니다. 꿈은 확실하고 그 뜻은 틀림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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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 3,57.58.59.60.61 ○ 주님의 모든 업적들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 영원히 찬송하고 찬양하여라. ○ 주님의 천사들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 영원히 찬송하고 찬양하여라. ○ 온 하늘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 영원히 찬송하고 찬양하여라. ○ 하늘 위 모든 물들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 영원히 찬송하고 찬양하여라. ○ 주님의 모든 군대들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 영원히 찬송하고 찬양하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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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 2,10ㄹㅁ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너는 죽을 때까지 충실하여라. 내가 생명의 화관을 너에게 주리라. ◎ 알렐루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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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5-11 그때에 5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6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7 그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 8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9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10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11 큰 지진이 발생하고,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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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하신 아버지, 거룩한 순교자들의 수난을 공경하며 바치는 이 제물을 받으시고, 저희가 세상의 어려움 속에서도 언제나 주님께 충실하며, 저희 자신을 주님께서 기꺼이 받으시는 제물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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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5,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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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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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하느님, 거룩한 순교자들을 기억하며 하나의 빵을 함께 나누고 간절히 청하오니, 저희가 주님의 사랑 안에 한마음이 되게 하시며, 끝까지 견디어 영원한 상을 받게 하소서. 우리 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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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가짜는 ‘가짜 메시아’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다.”, “내가 재림 예수다.” 겁 없이 외치는 자들입니다. 역사 안에는 그런 인물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죽은 뒤에는 가짜임이 금방 드러났습니다. 지금도 자신을 메시아라 외치는 자들이 있습니다. 가짜가 분명한데도 따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무엇인가에 현혹되어 자신의 미래를 맡기고 있는 자들입니다. 왜 사람들은 종말 주장에 약해지는 것일까요? 가짜 그리스도에 속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는지요? 분명한 것 하나는, 추종자들도 무엇인가 느끼기에 따라간다는 사실입니다. 속이는 자도 무엇인가 ‘보여 주기에’ 사람들을 사로잡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는지요? ‘신비스러운 현상’입니다. 일종의 ‘영적 능력’이지요. 하지만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늘 ‘개인 구원’이 목적입니다. 조직에 들어온 자만이 ‘살게 된다는’ 이론입니다. 그들이 ‘독선과 분열’의 늪에 빠지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성령께서는 인간을 ‘독선’으로 몰고 가지 않으십니다. 일치하여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분께서는 평화와 화목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이천 년 전의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오늘의 현실을 정확하게 예견하고 계십니다. 삶을 두려워하기에 ‘이상한 곳’에 관심을 가집니다. 감사와 기쁨으로 사는 사람은 결코 그런 곳을 기웃거리지 않습니다. |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도 여러 예언자가 성전 파괴를 예고했다.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깨뜨렸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오셨음에도 여전히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느님의 아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왜 그렇게 절망스러울까? 잘못 이끌리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 곰곰이 잘 생각해 보면 자비로우신 아버지가 아들을 무척 사랑하시어 그 속 깊은 비밀을 털어놓으시는 것 같다. 아하! 그렇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내 생명의 주인이신 그 어른을 알아보는 일 말고 무엇이 더 중요한가? 내 작은 생명이, 생명의 원천이신 분을 떠나 어디로 갈 수 있다는 말인가?
주님은 종말을 예고하시면서 어서 당신께 돌아와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마시라고 초대하신다. 아직 자비의 문이 활짝 열려 있다. 무서운 심판이 닥치지 않도록 사랑을 향하여 어서 달려가야 하지 않을까? 영원한 삶이 존재한다면 영원한 죽음도 존재한다. 하느님은 우리 각자에게 자유를 주셨다. 당신의 크신 사랑에 ‘예’ 또는 ‘아니오’ 라고 말할 수 있는 선택은 오직 우리 인간한테만 주어졌다. 나를 위한 영원한 삶은 전적으로 이 대답에 달려 있다.
최후 심판 때 사람의 아들이 왕으로 와서 가난한 사람, 헐벗은 사람, 배고픈 사람, 목마른 사람, 아픈 사람, 낯선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돌보아 주었는지 물으실 것이다. 소외받는 노인들, 보잘것없는 이들을 정성스럽게 맞아들이고 베풀어 주는 이들이 의인의 반열에 들어갈 것이다. 정신이 번뜩인다. ‘주님, 이 행복한 대열에 들게 하소서.’
김순중 수녀(성바오로딸수도회)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연중 제 34 주간 화요일 - 징후 (SYMPTOM)
저희가 살던 곳은 장마 때만 되면 물난리를 치러야하는 시골이었습니다. 제가 태어나던 해에도 물난리가 나서 저는 포대기에 쌓여진 채 집 지붕을 뚫고 헬기로 구조되었다고 합니다. 태어나자마자 비행기를 타 본 것입니다.
좋은 것도 있었는데 초등학교 때는 비만 오면 학교에 가지 않았습니다. 냇가가 있었는데 어린이들이 건너기에는 너무 위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학년 때는 개근상을 한 번도 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장마 때면 초긴장을 하셨습니다. 밤잠을 설치며 피난을 가야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어른들끼리 연락을 주고받던 기억이 납니다.
다른 것보다도 냇가가 불어나서 그것이 제방을 무너뜨리면 큰일이었습니다. 지금 동네에 비가 그쳤더라도 그 물은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에 누군가는 밤새 제방이 안전한지 지켜보는 사람이 있어야 했습니다.
자정이 넘었는데 제방이 무너지려고 한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누군가가 계속 그 제방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안전하게 대피 할 수 있었습니다. 제 기억엔 제방이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더라도 만약 제방이 터졌다면 마을사람들 모두 큰일을 당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어렸기 때문에 밤새 제방을 지켜보던 분이 누구신지 잘 모릅니다. 한 분이었는지 마을 분들이 돌아가면서 지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런 분들이 있었기에 멋모르던 우리들은 편히 잠을 잘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큰 사고가 예고 없이 일어나는 일은 거의 드뭅니다. 제방이 한 번에 터지는 일은 없습니다. 조금씩 물이 새어나오다가 그것이 더 커지면서 제방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틈이 생겨 물이 새어나올 때 재빨리 대피하지 않으면 큰 일이 일어납니다. 이런 것들을 우리는 ‘징후’라고 합니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질 때도 건물에서는 갈라지는 소리가 났고 직원들은 그런 소리들을 이미 여러 번 들었다고 합니다. 성수대교 사고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다리가 갑자기 내려앉을 리는 없습니다. 누군가 작은 문제점이 있을 때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았다면 큰 사고는 면했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 파괴에 대해 미리 예언을 하십니다. 요즘 복음들이 자꾸 이런 종말론적 사건들을 이야기하는데 지금이 전례력으로는 마지막, 즉 종말로 향하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성전의 아름다움을 두고 감탄하자 예수님께서는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있지 않고 허물어질 날이 온다고 예언하십니다. 그러자 그들이 언제쯤 그런 일이 일어나겠느냐고 물어봅니다.
예수님은, 거짓 스승이 나타나 사람들을 속일 것이고 전쟁과 반란이 일어 날 것이고 큰 지진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고 마지막으로는 하늘에서 무서운 일들과 표징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일러주십니다.
이스라엘은 로마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고 전쟁과 기근 등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로마가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기 전에 지진과 하늘의 표징도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조금만 주위를 기울이면 바보들이라도 예루살렘이 언제 멸망할지 알 수 있을 것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이런 ‘징조들’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남아있던 많은 이들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는 그런 징조들을 잘 지켜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한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큰 죄부터 짓는 것은 아닙니다. 아주 작은 것부터 죄를 짓고 기쁨과 평화도 아주 작은 것들로부터 빼앗기기 시작합니다. 그것을 잘 보고 빨리 돌아서는 사람은 큰 어려움에 떨어지지 않겠지만 방관하면 깊은 구렁에 빠지고 맙니다.
죄를 알기 위해 죄에 빠질 필요는 없습니다. 의사가 병을 알기 위해 병에 걸려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의사가 병을 알기 위해 공부하고 다른 사람들의 경우를 보면 충분하듯이 우리도 교회의 가르침과 영혼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다른 이들을 보면 죄의 결과가 무엇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오른쪽 어금니에 자꾸 음식물이 끼어서 오른쪽으로는 음식을 잘 씹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국 들어가 예전에 금으로 때웠던 곳을 다시 하려고 떼어냈는데 그 안이 썩고 있었습니다. 치아가 썩고 있어서 아팠던 것인데 음식물이 끼어서 그런 줄만 알고 있었습니다. 하마터면 치아를 다 썩힐 뻔 하였습니다.
이렇게 몸에 신경이 있어 통증을 느끼는 것도 느낄 때는 아프지만 더 몸이 나빠지지 않도록 예방하는 좋은 역할을 합니다.
삶에 있어서도 작은 아픔들이라도 그 원인을 찾아 잘 고쳐나가야 합니다. 작은 것이 큰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파수꾼이 되어야합니다. 혹은 주위에 자신을 지켜봐주는 그런 파수꾼이 있다면 더 없이 좋을 것입니다. 어쨌든 매일매일 내 자신을 살펴보고 반성하는 묵상이 없는 영혼은 ‘갑자기’ 큰 어려움에 봉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세상 마지막 날이 다가오면 하늘에서까지 굉장한 표징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표징은 미리 준비하라고 예고해 주시는 선물입니다. 우리들의 영혼도 작은 표징들이 있으면 방치해 두지 말고 그때그때 고치려 하는 민감한 의사들이 되어야겠습니다.
11월 24일 화요일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 기념일 - 루카 21,5-11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을>
요즘 우리 사회의 문화 안에서 눈에 띄게 우려되는 측면이 한 가지 있습니다. 제가 가장 혐오하는 부분이기도 하지요. 그것은 다름 아니라 철저하게도 인간이하의 삶을 살아가는 조직폭력배들의 삶이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의리"니 "우정"이니 뭐니 하면서 그럴듯하게 포장되어 자연스럽게 용인되고 미화되는 현상입니다.
그들은 이 시대의 암적인 존재들이지요. 그들에게 찾아볼 수 있는 긍정적인 측면은 거의 없습니다. 오로지 파괴를 일삼으면서 살육을 본업 삼아 무위도식하면서 동물처럼 한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들은 가정과 공동체, 이 나라를 철저하게 파괴시키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조폭들의 일상을 미화시키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문제가 많습니다. 그들은 이 시대 청소년들과 부모들에게 무릎 꿇고 백배 사죄해야할 사람들입니다.
오늘도 9시 뉴스를 보다가 기가 차서 할 말을 다 잃었습니다. 현금지급기에서 볼일을 보고 나오는 한 여성을 한 강도가 쇠파이프로 인정 사정 없이 휘갈기는 광경이 여과 없이 그대로 방영되더군요. 피해자는 너무도 많이 맞아 혼수상태로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고 있답니다. 어떻게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을 그리도 철저히 파괴할 수 있단 말입니까? 불구대천의 원수지간도 아닌데 말입니다.
때로 이 사회 안에 버젓이 그리고 당당히, 너무도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는 구조적인 사회악 앞에서 너무도 분노에 찬 나머지 할 말을 잃을 때가 많습니다.
끝도 없이 퇴폐적이고 향락적인 양상을 더해만 가는 하위문화의 구조 안에서 동물처럼 본능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슬픈 눈동자로 바라만 보고 있어야만 하는 현실이 너무도 가슴 아픕니다.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여야 하는 약육강식의 시대, 아비규환의 세상에서 정도(正道)를 걷는 사람들의 삶이 어리석게만 보입니다.
물고 물리는 먹이사슬 안에서 빈자와 약자만을 골라 등을 쳐서 호의호식하는 사람들, 보통 사람의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접대문화 안에서 그저 하루하루를 동물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본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제 부족한 소견으로도 이런 상황들이 너무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너무 화가 납니다. "도대체 이 세상이 어디까지 갈려고 이러나?"하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귀신은 뭐하나? 저런 *들 데려가지 않고!"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하느님은 도대체 뭐하시나? 저런 *들 벌하시지 않고!"하는 마음을 감출 길이 없습니다.
끝도 없는 이스라엘의 배신과 타락 앞에 예수님의 마음 역시 저 못지 않게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 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죄악도 타락도 어느 정도여야지 해도 해도 너무 한다는 마음을 지울 수 없었던 예수님께서는 극약처방으로 "성전파괴"를 예언하십니다. 비통한 심정, 애끓는 마음으로 예루살렘의 대재앙을 예고하십니다.
그러나 이런 최후의 경고마저 우리 인간을 향한 무한한 예수님의 자비, 아버지로서 애끓는 연민의 정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그 하느님이시기에 죽어 가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최후의 처방전으로 성전파괴와 이 세상의 종말을 예언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