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end]]
패션·건축·영화… 우주 속으로
로켓… 패션, 우주를 넘보다
우주는 더 이상 먼 이야기가 아니다.
패션, 영화, IT, 건축 등 여러 장르가 우주를 무대 삼는다. 최보윤 기자, 편집=박은혜
성큼 다가온 우주시대… 장르 가리지 않고 우주를 무대 삼아
애플·구글, 우주선 모양 신사옥… 화성 등 우주 다룬 영화 쏟아져
“5, 4, 3, 2, 1!”
지난 7일(현지 시각) 프랑스 파리 그랑 팔레에서 열린 샤넬 2017 가을·겨울 패션쇼장. 올해 83세인 샤넬의 총괄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가 단상에 올라 버튼을 누르자 관중의 환호성이 여기저기서 터졌다. 가수 엘턴 존의 ‘로켓 맨’이 배경음악으로 흐르며 분위기를 달구는 사이, 쇼장 한가운데 35m 크기로 우뚝 자리 잡았던 로켓이 뿌연 연기를 뿌리며 솟아오른 것이다.
추진체를 단 우주 로켓처럼 ‘No.5(샤넬의 유명 향수 이름 호)’ 밑에서 불꽃이 튀었다. 패션쇼장이 아니라 우주정거장의 한 장면 같았다. 맨 앞줄에 앉은 미국의 우주비행사 버즈 올드린(Aldrin·87)은 카메라 세례를 받았다. 그는 세계 두 번째로 달을 정복한 인물이다.
“요즘 사람들은 화면만 바라보는 데 갇혀 세계에서 어떤 일이 실제 일어나는지 보려 하지 않기에 삶이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 우주라는 또 다른 세계로 눈을 확장시키고 싶었다.” 패션 전문 매체 비즈니스오브패션(BOF) 인터뷰에서 라거펠트가 한 말이다. “가능한 것의 한계를 발견하는 유일한 길은 그 한계를 넘어 불가능한 것 속으로 가보는 것”이라는 영국의 대표적인 SF 작가 아서 클라크(1917~2008)의 명언을 증명해 보이려는 듯, 미개척의 세계 ‘우주’를 키워드로 삼았다.
지난 7일 프랑스 파리의 유명 박물관이자 대형 전시장인 그랑 팔레에 ‘로켓’이 떴다. 샤넬의 유명 향수 이름을 딴 ‘No. 5 발사 센터’란 글귀가 전시장을 장식했고, 본격적인 ‘우주 시대’ 개막을 여는 듯 연기를 뿜으며 발사된 로켓은 전시장 천장을 뚫을 기세였다. 2017 샤넬 가을·겨울 의상을 입은 모델들이 로켓 주변에 마련된 무대를 걷고 있다./ AFP 연합뉴스 |
샤넬뿐만 아니라 루이뷔통 쇼에선 암울한 미래상을 그린 스칼릿 조핸슨 주연 영화 ‘공각기동대’가 주요 영감이 됐다. 사운드 트랙이 무대에 퍼졌고, 주인공 스타일의 의상이 오프닝에 등장했다. ‘우주’는 올해 장르를 가리지 않고 가장 주목받는 무대다.
패션·영화·IT·건축… ‘2017 스페이스 오디세이’
FUTURE(미래)가 적힌 구찌 2017 봄·여름 패션쇼 핸드백. |
우주는 최근 가장 각광받는 ‘상업화’의 격전장이다. 외신들은 ‘새로운 우주 시대(New Space Age)’라 명명했다. 인간이 우주에 첫발을 내디딘 1960년대 거세게 불었던 ‘스페이스 에이지’에 대한 열광이 반세기 만에 새로운 열풍이 됐다. 미국 실리콘밸리의 거두(巨頭)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의 ‘스페이스X’, 아마존 제프 베조스 창업자의 ‘블루 오리진’을 비롯해 영국, 네덜란드 등에서도 민간기업이 ‘우주 선점’을 위해 열띤 경쟁을 하고 있다. 미 항공우주국 나사(NASA)가 운영하는 ‘우주인 클래스’엔 지난해 1만8300명이나 참여했다. 미국 MIT는 최근 ‘우주인 기업가 정신(Astropreneurship)’이란 신조어를 내걸고 우주 개발을 연구하는 등 뜨거운 관심이다.
영화 ‘라라랜드’로 아카데미 6관왕에 오른 데이미언 셔젤 감독이 내년 선보일 차기작 ‘퍼스트맨’도 우주가 무대다. NASA 소장인 제임스 핸슨이 쓴 동명 원작이 바탕인데, 1969년 아폴로 11호로 달을 여행한 닐 암스트롱이 주인공이다. 내년은 SF의 ‘교과서’라 불리는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 탄생 50주년이기도 하다.
올해 외계인과의 소통을 다룬 테드 창의 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를 원작으로 하는 영화 ‘컨택트’가 화제에 올랐고, 화성을 소재로 한 영화 ‘스페이스 비트윈 어스’와 ‘라이프’도 연달아 관객을 만난다. 1960년대 NASA에서 활약한 천재 여자 수학자 세 명의 실화를 담은 ‘히든 피겨스’도 23일 개봉을 앞두고 관심을 끌고 있다.
2017 샤넬 가을·겨울 쇼에서 선보인 미래적인 느낌의 외투를 입은 모델(위). 뉴욕 패션위크 닉 그래엄 패션쇼를 장식한 우주비행사 버즈 올드린(오른쪽)의 모습./ 신화 연합뉴스·버즈 올드린 공식 트위터 |
구글·애플 등 첨단 IT 기업은 유명 건축가와 손잡고 신사옥을 선보이며 ‘우주’에 한 발짝 더 다가섰다. 오는 4월 미국 캘리포니아 쿠퍼티노에 문을 열 예정인 애플 신사옥 ‘애플 파크’는 커다란 원형 우주선을 닮아 ‘우주선(The Spaceship)’이라고도 불린다. 영국 건축 거장 노먼 포스터가 설계·디자인을 맡았다. 100% 신재생 에너지를 사용해 전력을 자체 조달하고 인근 마을에도 공급한다.
내년 말 캘리포니아 마운틴뷰에 완공 예정인 구글 신사옥 ‘구글 마운틴뷰 캠퍼스’는 영국 유명 디자이너 토머스 헤더윅과 덴마크 건축가 그룹 BIG(Bjarke Ingels Group)가 맡았다. 화성 표면을 닮은 거대한 반투명 유리 차양을 4개 설치해 공기 유입과 온도를 조절할 수 있고 건물도 빠르게 해체·조립할 수 있다.
일상으로 들어온 최후의 개척지, ‘우주’
트렌드를 선도하는 아티스트들이 ‘우주’에 빠져든 건 ‘우주여행’이 상상에 머무는 단계를 뛰어넘어 일상으로 들어왔기 때문. 최근 1~2년 우주에 1년 가까이 체류한 우주비행사들이 우주에서 찍은 지구와 다른 행성 모습을 트위터나 유튜브에 수시로 올리면서, 수억 광년 떨어진 곳이 아닌 ‘바로 옆 동네 일상’ 같은 소재가 됐다.
지난해 탄생 50년이 된 TV 시리즈 ‘스타트렉’ 속 명대사인 “우주, 최후의 개척지(Space, the final frontier)”가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1970~80년대만 해도 우주여행은 공상과학소설에나 존재하는 일이었지만 최근 들어선 죽기 전에 한 번쯤은 도전하고 싶은 ‘버킷리스트’가 되고 있다”고 전했다.
NASA 등이 촬영한 우주의 풍경은 그 자체로 거대한 화폭이다. 1990년 보이저1호가 찍은 지구의 모습을 두고 우주과학자이자 ‘코스모스’ 저자 칼 세이건(1934~1996)이 표현한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은 음악·패션·영화 등에 다양하게 응용되는 모티브다. 예술역사학자 엘리자베스 케슬러는 최근 외신에 “광활한 우주에서 펼쳐진 별들의 잔치는 영국 유명 화가 윌리엄 터너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며 “우주 과학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 벽화나 잭슨 폴록, 마크 로스코의 작품이 주는 감동을 우주가 보여준다”고 했다.
조지 오웰 ‘1984’의 예언 vs ‘꿈’의 실현
1960년대 NASA 프로젝트의 숨은 공신이었던 천재 여자 수학자 3인방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히든 피겨스’(위). 구글이 최근 공개한 마운틴 뷰 신사옥 조감도./ 이십세기폭스코리아 |
닐 암스트롱 바로 뒤를 이어 달에 발자국을 남기며 ‘조연’에 머물러야 했던 버즈 올드린이 올해 최고 스타로 급부상하는 것도 우주에 대한 경외심을 반영한다. 그는 샤넬 패션쇼에 앞서 뉴욕 패션 위크 닉 그레이엄 쇼에서 자신이 직접 디자인한 ‘화성으로 오세요’ 셔츠를 입고 피날레를 장식했다. 얼마 전 텍사스 오스틴에서 열린 세계적인 음악·IT 마켓 쇼 SXSW에선 ‘화성에서 살기’란 주제로 좌담회를 이끌기도 했다.
핑크빛 기대만큼 불안도 혼재한다. 미국 시사 월간지 ‘애틀랜틱’ 등은 “냉전 시대에는 우주 개발이 정쟁(政爭) 차원이었지만 이젠 해결해야 할 ‘현실’의 문제가 됐다”며 “AI, 드론, 로봇 등 기술이 인간을 대체하는 시대를 두고 종말(아포칼립스)론적 관점에서 다루는 접근이 많다”고 분석했다. 조지 오웰의 고전 ‘1984’가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트럼프 시대를 완벽히 예언했다며 올 들어 큰 인기를 얻은 것처럼 영화 ‘매드맥스’ ‘엑스 마키나’ 등과 드라마 ‘오펀 블랙’ ‘블랙 미러’ 등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그린 ‘컬트’ 작품이 대중에게 높은 호응을 얻고 있다.
국제 우주정거장에서 340일간 체류하면서 소셜 미디어에 우주와 지구 사진을 올리며 화제를 모았던 우주비행사 스콧 켈리가 지난해 귀환한 뒤 ‘타임’지에 기고한 내용이다. “내가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운 행성은 지구였고, 지금 지구에 있다는 건 정말 행운이다.… 무엇보다 테이블에 앉아서 다른 이들과 식사하는 게 얼마나 가치 있는가도 배웠다. 신선하게 조리된 음식을 테이블에 올리고 사랑하는 이 옆에 앉아 즐길 수 있는 건 중력 덕분이다. 우주에서 내가 얼마나 열망해 왔던 일인가!” 우주학자 칼 세이건이 1994년 ‘창백한 푸른 점’을 저술하면서 밝힌 글이 떠오른다. “천문학을 공부하면 겸손해지고, 인격이 형성된다고 한다. 이 작은 푸른 점(dot)을 아끼고 보존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든다.”
ⓒ 조선일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