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큰소리로 맹세하라"
" 친구여,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주게.
그리고 바라네. 그대들 소중한 추억의 서재에 간직하여주게.
뇌성 번개가 이 작은 육신을 태우고 꺾어 버린다고 해도
하늘이 나에게만 꺼져 내려온다 해도
그대 소중한 추억에 간직된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을 걸세.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의 전체의 일부인 나.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 그리고 도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다니러 간다네. 잠시 쉬러 간다네......"
드르륵 득득, 긴 공장의 밤, 어린 시다들의 여린 손끝이
애처로웠던 청년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살았던 '핫바리 인생'의 절박함이 뼛속에 배여 있기에
열 두어 살 시다들의 고통에 대한 아픔이 더했습니다.
물질이 중요시되는 사회, 가진 자의 폭력과 기만에 몸서리치며,
그것들에게서 여린 마음들을 지켜주고 싶었습니다.
쓰러지는 그 순간까지 청년은 말합니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그리고 '꼭 돌아오겠다'고…
삼십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우리는 그 동안 너무 오래
잊고 지내진 않았는지요,
그리고 청년의 외침과 바램은
그 세월만큼 이루어졌는지 되돌아봅니다.
전태일, 그는 누구인가?
꽃의 아름다움을 볼 줄 모르는 사람은 아름다운 꽃을 키울 수 없다고 합니다. 진실된 사랑을 귀중히 여기는 사람만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자기를 바칠수 있습니다.
전태일의 삶은 사람이 태어나 어떻게 사는 것이 참되게 사는 것인지 가르쳐 주었고, 죽음으로써 참사랑이 무엇인지 일깨워주었습니다.
전태일, 그는 너무나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조금만 불쌍한 사람을 보아도 그냥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이 여린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그러한 환경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에 대한 애달픔으로 심한 가슴앓이를 할 정도였습니다.
전태일, 그는 한없이 성실하고 진지한 사람이었습니다.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어린나이에 여섯식구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고, 구두닦이를 비롯해 신문팔이, 삼발이장사, 껌팔이, 우산장사, 뒤밀이 등등 평화시장의 재단사가 되기까지 숱한 밑바닥 일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스물 두 해의 짧은 생을 사는 동안, 어쩌면 단 하루도 쉬어보지 못하는 날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성실히 일했건만 일당은 14시간 노동에 커피 한 잔 값밖에 안되는 50원! 평화시장의 다락방에서 피를 토해내며 쓰러지는 어린 여공들을 바라보며, 잘못된 사회현실에 대해 강한 의문을 가지게 되었고, 인간은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살 수 있어야 한다는 믿음에 도달하게 됩니다.
전태일, 그는 온 몸으로 사랑을 실천한 사람입니다.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곁으로…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그리고, 그는 마침내 자신을 다 바쳐 어둠을 환하게 밝히는 불꽃이 되었습니다.
1948 대구에서 봉제공의 아들로 태어남.
서울로 이주. 남대문초등공민학교 2년 남짓한 학력
1964(16세) 평화시장 미싱사보조로 취직.
재단사가 되기까지 신문팔이, 구두닦이, 우산장사등 날품팔이 생활
1967 3년 만에 재단사가 됨.
하루 15시간 이상의 노동과 어린 여공들의 질병 등, 근로 조건에 분개함.
1969.6 재단사모임 '바보회'를 만든 뒤 해고됨. 이후 막노동판을 전전함.
1970.9 평화시장 재단사로 다시 취직, '삼동친목회' 결성.
설문지 조사 결과에 따라 근로개선 진정서를 노동청에 제출. 71년 대통령 선거를 앞둔 시점에 신문에 보도됨. 노동청은 실태조사도 하고 근로기준법 위반업체는 고발하겠다고 약속함. 그러나 약속 기한은 거듭 연기되고 국정감사기간도 넘어가자 법 시정 약속 기한인 11.7일이 지나도록 아무런 움직임이 없음. 동료들에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근로기준법 책을 화형하자고 제의,13일 오후 1시로 정함.
1970.11.13 (22세) 평화시장 네거리에서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분신. 모란공원에 묻힘.
거룩한 불꽃이 되어...
한 인간의 삶이 어떤 형태로든 요약되기 마련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마무리하는 시점에 몇 개의 의미있는 마침표를 찍게 될까? 새 천년이 우리에게 또 주어지고 갈수록 퇴색되어 가는 것이 많다 할지라도, 설령 전태일이 생전에 그렇게 염원했던 인간적인 근로 조건이 모두 충족된 후에도 그의 인간과 세계에 대한 진정하고도 절실한 사랑만은 결코 빛이 바랠 수 없을 것이다.
삶을 성실하고 치열하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폐쇄된 자아의 껍질을 벗고 자기를 희생하며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전태일의 정신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우리는 언제나 그의 삶을 통해 자신에 대해 괴로운 응시를 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불우했던 과거를 원망한다면, 그 과거는 너의 영역의 영원한 사생아가 되는 것이 아니냐?
( 1969년 12월 31일 전태일의 일기 중에서 )
어린시절...
전태일은 1948년 8월 26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피복제조업 계통의 봉제공이었던 아버지 전상수(69년 작고)씨는 나이가 들면서 가내업을 차리기도 했지만 몇차례 실패를 하는 동안 폭음과 술주정이 버릇이 되어 버렸고 살림을 팔아 빚을 갚고 나면 빈털터리 가족들을 길바닥에 버려둔 채 떠돌이 노동자 생활을 하다가 또 미싱 한 대라도 차릴 형편이 되면 다시 가족들에게 돌아오곤 했다.
이렇게 도산과 실직, 떠돌이 노동 사이를 오가는 동안 대구에서 서울로, 다시 대구로, 다시 서울로 생활근거지를 옮겨다녔고. 이런 형편 속에서 대부분의 불우한 가장들이 그랬듯이 부친은 폭음 후에 가족들에게 욕설과 매질 등 학대를 통해 고통을 주었다. 1954년 부산에서 소규모 양복제품업을 하다가 장마로 원단이 상해 버리는 바람에 큰 타격을 받자 태일의 가족은 서울로 무작정 상경하게 된다.
태일의 아버지가 일자리를 찾아 헤매고 있는 동안, 어머니 이소선씨는 어린 자식들과 함께 서울역 근처의 염천교 다리 밑에서 노숙하면서 동냥으로 연명도 하였다. 그러던 중 남편이 쥐어준 3천원 쯤 되는 돈으로 장사밑천을 하여 채소행상, 팥죽장사, 찹살떡장사,광주리장사 등 닥치는 대로 한 2년 동안 생활하다가 때때로 남편이 번 돈을 합하여 천막집 한 채에 재봉틀 한 대를 살 만큼 되었다.
이리하여 태일의 집은 오랫만에 그나마 안정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때 여덟 살이었던 태일은 처음으로 남대문 초등공민학교에 2학년으로 편입, 처음이자 마지막인 학교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에게는 태삼이라는 남동생이 하나, 순옥이라는 여동생이 하나 있었다.
그러나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기 직전 태일의 아버지는 어떤 중개업자를 통해 어떤 고등학교의 체육복 수천 벌을 단체주문 받게 되었고 자금을 마련해 납품까지 했는데 4.19혁명이 일어나자 브로커는 학교에서 받은 옷값을 떼어먹고 행방을 감추어버렸다. 결국 채권자들의 독촉에 못견디고 살고 있던 판자집마저 다 팔아 빚을 청산하고 빈 손으로 거리에 나앉게 되었다.
다행히 원단 가게 주인이 그를 동정하여 이태원 외인 주택 근처의 산마루턱에 판잣집 셋방을 얻어 주었으나, 그는 낙담한 나머지 한동안 끊었던 술을 다시 폭음하면서 허송세월을 하였고 태일의 어머니조차 충격을 받아 정신이상자가 되다시피 하였다.
밥 먹는 날보다 굶는 날이 많아졌다. 어머니의 병을 치료할 방도도 없었다. 몇 끼씩을 굶어가며 학교에 다니게 된 그는, 어느 날 신문팔이 소년을 보고 자신도 신문을 팔기 시작했다. 한 집안의 맏이인 그의 나이 열두 살. 학교에 다니면서 수업이 파하고 남는 시간에 신문을 팔아 가지고서는 가족의 식비를 벌기도 어렵거니와 또 너무 힘겹기도 했다. 학교에 결석하는 일이 많아졌고, 4학년초에는 중퇴할 수 밖에 없었다.
밀린 방세를 못 내어 쫓겨난 용두동 개천가의 천막집 생활, 태일이 신문을 판 돈으로 빈병을 사서 닦아서 팔아 보리쌀과 소금은 어떻게 구했지만 반찬이 없어 개천의 썩은 물에 버려진 곰팡이 낀 무말랭이를 씻어 시장에 팔고 남은 것을 먹여야 했던 어머니의 비참한 삶, 병약한 몸에 시달린 그의 어머니는 가슴앓이까지 생겨 운신도 못하는 산송장이 되어버렸다.
한 가족의 생계를 어린 어깨에 떠맡게 된 태일은 어린 동생을 데리고 동대문시장에 나가 삼발이장사를 시작하였다. 물건을 팔아 원금을 입금하고 남는 이문만으로는 여섯 식구의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다. 미수금은 늘어가고 어린 가슴에 큰 고민거리가 되었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가 나던 무렵 어느 날, 그는 서울을 떠나 무작정 남쪽지방으로 향한다. 첫번째 가출이었다. 큰집이 있는 대구에 갔다가 달리 갈 데도 없었던 그는 다시 서울로 돌아온다. 돈을 벌어가지고 집에 가면 야단치지 않겠지 하는 혼자 생각으로 그는 구두닦이 생활을 1년 가까이 하게 된다.
남대문시장 일대를 구두통을 메고 방황하기 1년. 그는 지친 몸으로 1962년 여름, 무작정 부산으로 내려간다. 부모 형제와 함께 살던 기억이 서린 엣동네 영도다리 방파제 바닷가까지 간 그는 바닷물에 떠있는 양배추 속꼬갱이를 보고 정신없이 뛰어들었다. 사흘 동안을 굶어 지칠 대로 지쳐 있었던 그의 의식은 희미해져 버렸다.
한 어부에게 구출되어 모랫바닥에 길게 뻗어 누운 태일의 곁에는 구경꾼들이 놓고 간 십 원짜리 지폐 석장과 동전 몇 닢, 그리고 상한 캬베츠 속꼬갱이, 아직도 물이 흘러내리고 있는 검은 윗도리에, 무릎도 없는 바지, 바닥만 겨우 매달려 있는 검은 운동화 한 짝이 놓여 있었다
부산에 내려온 첫날에 부산 토박이 구두닦이들에게 붙잡혀 몰매를 맞고 구두통까지 빼앗겨버린 , 끝내는 바닷가에서 죽음의 공포를 맛보아야 했던 전태일은, 다시 서울로 돌아가기로 작정한다. 철조망을 넘고 의자 밑에 숨어 기차를 탔지만 객차 바닥에서 잠을 자다가 깨보니 종착역은 영천역.허기진 눈에 벤치 위에 변색된 사과를 보고 집어 먹다가 굴러 떨어졌는데 그의 눈에 보인 백원짜리 지폐다발, 그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역전 식당에 가서 배를 채우고 그 돈으로 대구역까지 간다.
남은 돈으로 옷과 운동화를 사 신고 외가집으로 간다. 대구에 가니 그렇게 그리던 가족들은 이미 대구로 이사해 있었다. 태일의 아버지는 일 년 만에 집에 들어온 아들을 보고 말없이 눈물을 흘리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날 밤 어머니는 몹시 울었다.
운명이란 너무 가혹한 것이었다. 이렇게 태일의 어린 시절을 에워싼 불우함은 50~60년대 하층민 삶의 평균치를 밑도는 참담한 것이었던 듯하다.
꺾인 배움의 꿈...
집에 돌아온 태일에게는 참으로 오랜만에 비교적 안정된 가정생활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그의 아버지는 작은집의 도움으로 재봉틀 한 대를 놓고 삯제품일을 하고 있었는데, 술도 끊고 착실한 가장 노릇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도 건강이 많이 회복되었다. 그는 힘이 닿는껏 집안 일을 돌보리라고 마음 속으로 굳게 다짐한다. 아버지 일을 도우면서 그는 어느덧 재봉틀을 돌리는 데도 제법 익숙해져갔다.
해가 바뀌고 1963년 태일의 나이 열다섯이 되었다. 지루한 겨울이 가고 앞산의 흰 눈이 녹기 시작할 무렵, 꿈 같은 일이 생겼다. 큰집에 다녀온 어머니가 학교입학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 1963년 5월, 태일은 당시 청옥고등공민학교에 입학하였다.
가정사정 등으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던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였다. 태일은 뛸 듯이 기뻤다. 그러나 태일의 학력은 그때까지 국민학교 4학년 중퇴가 전부였으니 진도를 따라가기가 무척 힘이 들었다. 다른 학생들이 놀 때에도 그는 영어단어와 수학공식을 외워야 했으며, 집에 와서는 아버지의 재봉일을 도와야 했다. 쉴 새 없는 고달픈 생활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생전 처음 맛보는 즐겁고 보람찬 나날이었다.
청옥에서 보낸 일 년도 채 못되는 학창시절, 뒷날 전태일은 " 내 생애에서 가장 행복하였던 시절"이라고 회상했다.
꿈 같은 학교생활이 일 년도 채 계속되지 못한 1963년 겨울 어느 날, 아버지는 태일에게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 전적으로 재봉일만 돌보라는 명령을 내린다. 재봉틀 한 대로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형편으로는 , 애초에 태일이를 입학시킨 것부터가 무리였는지도 모른다. 겨울이 되자 옷을 만드는 일은 바빠지고 어차피 태일이를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공부시킨다는 것은 뻔히 불가능한 노릇이고...... 아버지의 생각은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학교를 다닐 수 없게 된 태일이가 집을 뛰쳐나갔다가 사흘만에 돌아왔을 때, 그의 아버지는 돈을 벌어야 공부도 할 수 있다고 발길질로 차고 짓밟으면서 학교를 그만두게 한다.
그러나 태일은 굴복하기 싫었다. 공부를 계속하려면 다시 집을 나가는 길밖에 없다는 괴로운 결심이 싹텄다. 서울에 가서 고학을 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동생 태삼이도 데리고 올라가서 공부를 시켜야겠다고 작정했다. 두 형제는 밤열차를 타고 서울로 간다.
''내 나이 열여섯 살에 중학교 1학년인데 지금 또 학업을 중단하면 나는 영영 배움의 길이 막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냉혹한 현실은 어린 전태일 형제를 또다시 팽개치고 만다. 태일은 집에서 훔친 잠바를 팔아 셋방을 얻고 조그마한 장사라도 해볼 심산이었다. 그러나 잠바를 판 5천6백원으로는 방을 얻을 수가 없었다. 궁리 끝에 사과궤짝 열두 개를 사서 개집 같은 상자를 만들고 파고다공원 뒤 낙원시장 손수레 보관소 담 옆에다 바싹 붙여 놓았다. 동생에게 그 상자를 지키고 있으라고 하고 태일은 하루 종일 일거리를 찾아 서울 바닥을 헤매었다. 밤늦게 돌아와 기다림에 지친 동생을 보자 종일 마음이 울적하였던 태일은 동생을 끌어안고 울었고 흐느끼던 동생도 큰소리로 목놓아 울고 만다.
다음날 아침 태일은 남은 돈으로 구두닦이에 필요한 것들을 산다. 동생에게는 신문팔이를 시킬 작정을 했다. 신문 나올 시간까지는 구두 닦는 것을 배우도록 하고 , 오후에는 헤어져 각자 일을 하다가 밤이 되면 궤짝이 있는 보관소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태일은 구두를 닦는 시간보다 자기 구역을 지키려는 아이들을 피해 다니는 시간이 많았다.
겨우 30원을 벌었을 때 해가 졌다. 밤 11시가 다 되어, 형제는 남은 신문을 팔기 위해 추운 밤거리를 뛰어 서울역으로 달려갔다. 쏟아지는 여행객을 보자 동생은 눈물을 글썽이고 힘없는 목소리로 집에 가자고 한다. 태일은 말없이 동생의 찬 손을 잡고 남대문시장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태일은 다시 그 사과궤짝으로 데리고 갈 수 없어서 합숙소로 가서 하룻밤을 잔다. 합숙소의 온갖 밑바닥 인생들 틈서리에 끼어서, 칼잠을 자고 이까지 옮은 동생은 이제 공부고 무엇이고 그저 집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모진 결심을 하고 서울에 왔던 태일도 이제는 마음이 흔들렸다.
태일은 깊고 캄캄한 절망 속에 몸부림치면서 마침내 대구행 야간열차에 몸을 실었다. 집 떠난 지 사흘. 그의 배움을 향한 꿈은 그렇게 무참하게도 꺾이고 만다.
집에 돌아온 태일은 아버지의 매질에 시달려야 했다. 아들의 가출 사건을 계기로 울화가 치밀어서인지 폭음이 더욱 심해졌고, 집안 형편도 나날이 어려워졌다. 동생은 방학책 값, 밀린 기성회비 때문에 학교에 안 가겠다고 아침마다 울면서 지친 어머니의 마음을 괴롭게 하였다. 해는 바뀌고 밀린 방세를 내지 못해 흙벽돌로 지은 토막집으로 쫓겨난 태일의 집, 병약한 어머니 혼자서 맨손으로 장사를 해야 했다.
그러나 남편의 계속되는 폭음과 욕설, 매질에 견디지 못한 그의 어머니는 1964년 2월, 설날을 하루 앞둔 밤, 태일에게 동생을 잘 돌보고, 매 안 맞게 조심하라고 당부하고 식모살이를 떠난다. 차가운 진눈깨비가 내리는 새벽, 어머니와 아들은 살을 깎는 듯한 생이별을 하였다. 뒷날 전태일은 이때 "마음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는 것 같았다"고 수기에 적고 있다.
아내가 나간 것을 안 그의 아버지는 태일에게 마구 발길질을 했다. 태일은 서럽고 서러운 마음에 조금도 피하지 않고 아무 소리 없이 때리는 대로 맞고 있자, 아버지는 더욱 부화가 치미는지 부엌 살림을 다 부수고 밖으로 나갔다. 그날부터 엿장수를 집에 데리고 와서 가구들을 팔아먹기 시작하니, 보름이 채 못 가서 남은 살림이라곤 덮고 있는 이불 하나밖에 없게 되었다.
결국, 정월 대보름날 태일은 작은집에 가서 오곡밥을 얻어먹으면서 틈을 보아 훔친 작은아버지 손목시계를 팔아 돈 백 원을 장만하고 식모살이 떠난 어머니를 찾아 무작정 서울로 올라간다. 태일의 등에는 보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엄마한테 데려다 달라"고 울면서 보챈 막내 동생 순덕이가 업혀 있었다.
서울에 올라와 태일은 동생을 등에 업고 다니면서 신문장사를 시작했다.그러다가 너무 추운 날씨에 동생이 감기에 걸리자 태일은 전재산인 50원을 다 털어 약을 먹이고, 신문팔이 소년들의 합숙소인 '받들회'로 간다. 그러나 식대를 못 벌어서 2백 80원의 미수금을 남긴 채 찬 바람이 부는 거리로 나와야만 했다. 할 수 없이 동생을 미아보호소에 맡기기로 결심하고 마지막으로 동생의 배를 채워줄 생각으로 입고 있던 학생복 상의를 사정 끝에 30원밖에 못 받아 가지고 돌아설 때는 너무나 서글퍼서 울음도 말라 버렸다.
전태일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구두통을 메고 거리로 나갔다. 구두닦이만으로 모자라면 저녁에는 신문팔이, 한밤중에는 담배꽁초 줍기, 여름이면 아이스케이크 장사, 비오는 날은 우산 장사, 때로는 손수레 뒤밀이. 그것이 그의 열여섯 살 인생의 운명이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그가 '거리의 천사'로서 닥치는 대로 온갖 역경을 헤쳐가면서 부딪친 세상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 '현실이야말로 가장 좋은 교사인 것이다. 그 현실의 가장 깊은 질곡 한가운데에서 몸부림치면서, 자기의 심장으로 느끼고 스스로의 머리로 생각할 수 있었던 사람이야말로, 교과서의 해설이나 권위자의 암시를 통하여 왜곡되는 일이 없는 현실의 벌거벗은 모습을 생생히 보지 않을 수 없었던 사람이야말로, 현실로부터 가장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고 그리하여 자신의 인간성을 가장 열렬하게 지킬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전태일이 바로 그러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앞으로 우리가 이야기하게 될 그의 절절한 투쟁도 그의 눈부신 죽음도 없었을 것이며, 그가 죽은 지 많은 세월이 흐른 오늘에 와서 우리가 다시 그를 추억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평화시장의 노동자로...
어머니와 형이 떠나버린 대구에서 아버지의 매질을 견디지 못해 집을 뛰쳐 나온 동생 태삼이는 서울역 근처에서 거지아이들과 어울려 밥을 빌어먹으며 다니다가 형 태일을 만나게 된다. 다시 만난 형제는 나란히 구두통을 메고 서울거리를 헤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의 옛친구를 통해 어머니 소식을 듣게 된다.
그 후 형제는 어머니 친구의 소개로 무허가 하숙집에서 심부름을 해주며 몸을 붙이고 살게 되었다. 서울에 도착한 태일의 어머니는 직업소개소를 통해 요릿집 주방식모로 들어갔다. 그러나 악화된 건강으로 대량으로 하혈을 하고 의식불명의 상태까지 이르러 그 치료비를 갚기 위해 월급 없이 일을 해주어야 할 형편이었다.
어느날 봄, 평화시장의 시다생활을 시작하던 태일은 그의 어머니를 찾아간다. 어머니와 아들은 한동안은 서로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서로 죄스러운 심정뿐이었다. 이즈음 남산동 하숙집에서 기숙하고 있던 태일은 그 집에서 나와 어머니 친구 집에서 함께 지내게 되었다.
어머니는 건강이 좀 회복되면서부터는 그 좁은 단칸방에서 끼어들어 자기가 정말 미안했다.
날씨가 추운 밤이면 마루밑으로 들어가 가마니를 깔고 어머니는 치마를 벗어 잠자는 아들을 덮어주고, 아들은 또 상의를 벗어 어머니를 덮어주고 하면서 잠을 자기도 하였다. 건강이 회복되자 태일의 어머니는 머리채를 잘라 팔아서 돈 몇 백 원을 장만하고 서울역 뒤 중앙시장의 채소전 있는 곳으로 갔다.
밤중에 야채를 실은 화물차에서 떨어진 우거지를 주어서 파는 일을 하기도 하였다. 그 동안에 태일은 저대로 돈을 벌러 다니다가 한번씩 어머니를 찾아오곤 하였는데 만나기만 하면 으레껏 첫마디가 "엄마 배고프지?" 하는 것이 인사였다. 머리채를 잘랐던 어머니는 흉한 머리를 감추기 위하여 한여름 내내 보자기를 뒤집어쓰고 일했다.
태일은 이른 새벽에 여관을 돌아다니면서 구두를 닦고, 낮이면 시다나 미싱보조로 노동을 하고, 밤에는 껌과 휴지를 팔러 다녔다. 이렇게 하여 그해 가을 모자가 모은 돈 2천5백원으로 헌 천막 하나를 샀다. 김장철이 될 무렵 어머니는 남산동 50번지의 헌 판자집을 삭월세로 얻었고 오랜만에 태일과 태삼 세 모자가 함께 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태일은 중부시장에서 우연히 여동생 순옥을 만난다. 순옥의 말에 의하면 아버지는 중부시장에서 재단일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아버지는 다시는 술을 안 먹겠다고 약속을 하고 간곡하게 함께 살자고 하였다. 셋방을 얻은 지 태일은 천호동 보육원에 가서 순덕이를 데리고 온다. 이렇게 하여 흩어졌던 가족은 다시 서울살이를 하게 된 것이다.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가 완공되면서 판자촌이 철거된 자리에 1961년 연건평 7천4백여 평의 평화시장 건물이 들어선다. 당시 전국 규모의 각종 기성복 공급시장으로서 확고한 상권을 형성한 시장의 사업주들은 영세업자들이기는 하지만, 경기만 제대로 타면 불과 1~2년 사이에 집도 사고 땅도 살 만큼 치부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업주들의 치부와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일하는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은 실로 참혹한 것이었다. 당시 약 1만 명 가운데 미싱보조를 포함 미싱사가 4천 명, 견습공에 해당되는 '시다'가 4천 명, 재단사가 3백 명, 재단보조가 4백 명. 이 중 미싱사와 '시다'는 대부분 가정이 어려워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12~15살의 소녀들이었다.
자신의 밑에 보조공을 두는 일류 미싱사가 되려면 '시다'생활로부터 시작하여 대체로 6~8년이 소요된다. 그러나 어린 소녀들 중에는 그 고된 생활에 질려서 몇 달만 일하고 나가기가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일이 바쁜 철이면 '시다구함'이라는 구인광고가 한 공장 건너 나붙을 정도로 일자리는 많은 편이었다.
이러한 피복제조업의 특성상 숙련된 노동자들에 대한 극단적인 저임금으로 업주들은 치부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평화시장 일대에 수없이 밀집되어 있는 이 영세 기업체들은 일찍부터 '평화시장주식회사'라는 그들의 동맹기구를 통해 일종의 저임금 기업연합을 형성하였다. 일할 노동자들은 얼마든지 널린 그러한 상황에서 거의 숨돌릴 틈도 없이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던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권익을 위하여 단결하고 쟁의를 일으킨다는 것은 전태일의 희생이 있기 전까지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전태일이 평화시장의 노동자로서 본격적으로 일하게 된 것은 1965년 가을 무렵, 그의 나이 17살 때였다. 구두통을 메고 돌아다니던 태일은 평화시장 근처에까지 왔다가 학생복 맞춤집인 삼일사의 '시다구함'이라는 광고를 보게 된다. 그 다음날 그는 찬물에 깨끗이 목욕을 하고 헌 누더기 옷을 떨어진 곳은 깁고 깨끗이 빨아서 다려입은 후, 다시 그곳을 찾아갔다.
주인은 몇 마디 물어보지도 않고 바로 취직을 시켰다. 이렇게 하여 태일은 오랜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고된 임금노동자 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떠돌이 청소년들 - '거리의 천사'들의 오랜 꿈은 바로 기술을 배워 안정된 직장 생활을 하는 것이다. '거리의 천사'들이 끝내 그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가는 곳이란, 형무소를 제 집 드나들 듯하는 범죄생활의 숨막히는 진구렁뿐이다. 그러나 어디에 안정된 직장이 있는가? 그나마 그들에게 좁은 문을 벌리고 있는 숱한 공장과 작업장들이 실은 그들의 목숨을 좀먹는 노동지옥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그들은 결국 형무소냐 노동지옥이냐, 이 두 가지 중의 하나를 선택하기 위하여 고뇌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전태일은 그러나 우선 저 지긋지긋하고 불안하였던 떠돌이 생활을 청산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흥분을 느꼈다. 첫출근을 하는 날, 그의 가슴은 새로운 희망과 꿈으로 부풀었다. 지금 당장 생활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구두닦이 때보다 더 궁핍한 생활, 더 고된 노동에 시달려야 할 형편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이겨나가며 새로운 기술을 배운다면 살 길이 열리리라는 희망, 그것이 그의 어린 어깨를 들썩이게 했다.
'하루에 하숙비가 120원인데 일당 오십원으론 어림도 없지만 다니기로 결심을 하고, 모자라는 돈은 아침 일찍 여관에서 손님들의 구두를 닦고 밤에는 껌과 휴지를 팔아서 보충해야 했다. 뼈가 휘는 고된 나날이었지만, 기술을 배운다는 희망과 서울의 지붕 아래서 이 불효자식의 고집 때문에 고생하실 어머니 생각과 배가 고파 울고 있을지도 모르는 막내동생을 생각할 땐 나의 피곤함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머니와 힘을 합쳐 남산동 50번지에 셋방을 얻게 되고, 어머니가 중앙시장을 다니면서 야채장사를 하면서부터 태일은 " 새벽에 여관에 가서 구두를 닦고, 밤늦게 껌과 휴지를 파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열심히 기술만 배우면 되는 전보다 몇 배나 편안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원래 미싱일에 경험이 있었던 태일은 남달리 빨리 익힌 기술이 주인에게 인정되어 , 곧 월급도 3천 원을 받게 되고 잔심부름을 하지 않아도 되는 '미싱보조'가 되었다. 삼일사의 미싱보조로서 기술을 어느 정도 배운 그는, 1966년 가을에는 통일사에서 어린 아이들 막바지를 만드는 미싱사로 취직을 하게 되었다.
이때 전태일의 나이 열일곱. 오랜 방황도 끝나 가족은 모여 살게 되고 원하던 기술도 익히면서 그는 청년노동자로서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술을 배워 어머니, 아버지를 편히 모시겠다던, 그리고 끊어졌던 배움의 길을 뒤늦게나마 다시 걷겠다던 그의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지기 전에 저 지옥과 같은 평화시장의 처참한 노동현실이 그의 가슴을 압박해 왔다.
재단사의 꿈과 고뇌...
환풍기도 없는 먼지구덩이의 닭장같은 다락방 작업장, 끊임없는 재봉틀의 소음 속에서 여공들은 허리도 펴지 못한다. 변소 한번 가려고 해도 눈치를 보아야 한다. 기름냄새,땀냄새,원단에서 나는 냄새,옷감을 짜르고 재봉할 때마다 풍기는 먼지 속에 둘러싸여 하루를 보내노라면 눈에서는 눈물이 나오고, 코를 풀면 시커먼 콧물이 나온다. 졸지 말고 밤일 잘 하라고 주인 아저씨가 사다준 잠 안 오는 약을 먹고 억지로 밤을 새워 일한 다음날에는 팔다리가 제대로 펴지지 않고 눈만 멀뚱멀뚱한 산 송장이 되는 일도 있다.
햇빛도 통하지 않는 어두운 작업장에서 어린 여공들은 하루 14시간 이상을 일해야 한다. 한 달에 쉬는 날은 2일. 일요일에 그나마 꼭 지켜지지도 않고 그렇게 뼈빠지게 일해도 한 달 임금은 평균 3천 원(1970년 당시 ). 왕복 교통비를 제하고 나면 남는 것이 없다. 집안 생계에 조금씩 보태고 나면 점심 사먹을 여유가 없어서 1개에 1원짜리 풀빵 몇 개로 점심을 때우거나 아니면 아예 굶으면서 일하는 시다들이 태반을 넘는다.
태어나면서부터 굶주림에 익숙해져 영양실조에 걸려 있는 여공들은 언니들이 앓는 기관지염, 빈혈, 신경통,신경성 위장병이라는 병을 얻게 된다. 미싱사 언니는 "평화시장 여공생활 8년 만에 남는 것은 병과 노처녀 신세뿐이더라. 너도 너만한 나이 때 일찌감치 평화시장을 빠져나가는 것이 현명한 일이야"라고 말한다.
30분의 점심시간. 점심을 굶어야 하는 어린 여공들은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평화시장 건물의 옥상으로 올라간다. 매연과 소음으로 가득찬 청계천 바닥. 그 옥상에서 이웃한 덕수상업고등학교 운동장에 작은 돌멩이를 던지는 것으로 그들의 짤막한 여가시간을 보낸다. 그들에게는 푸른 하늘을 쳐다볼 권리도 없고, 오늘을 생각할 시간도 없으며, 내일의 꿈을 키운다는 건방진 여유는 더더구나 없다.
학교에 다니고 싶은 마음이 왜 없으랴만 아예 꿈도 꿀 수 없는 그들, 한창 피어나야할 어린 마음이 나날이 겪는 업주들의 눈총과 생활의 질고에 어둡게 굳어져만 가는 그들, 세월이 갈수록 피로와 권태와 질병뿐인 그들, 평화시장의 여공들에게 내일은 없다. 하루하루 모진 목숨을 이어나가야 하는 숨막히는 노동의 질곡만이 있을 뿐이다.
인간시장의 현장 평화시장. 1966년 전태일은 그 속에서 하루하루의 생명을 팔고 있었다. 매일매일 겪는 자신의 고통, 그리고 숱한 동료 노동자들의 참상을 보면서도 아직 그 근본원인이 무엇인가를, 그 고통을 없애기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1966년 가을, 전태일은 통일사의 미싱사가 되었다.
추석이라 일이 밀려 업주들은 아침 8시부터 밤 11시까지 작업을 시키고 있었으며, 그래도 물건이 딸리면 야간 작업까지 시키고 있었다. 너무 길고 힘든 작업시간에 야간작업까지 하고 나면 초죽음이 되었다. 그러나 그 대가는 '대목 일이 끝난 다음에야 옷 1매당 얼마를 지불한다고 하면서 업주가 재단사와 적당히 타협해서 주는 것이다.
언제나 이 모양이기 때문에 일이 바빠 직공들이 매수를 많이 올려도 겨우 평균 월급보다 조금 나은 월급을 받을 뿐이다'. 미싱사로서는 처음 당하는 일이었지만 전태일은 너무 억울했다. 피땀 흘린 대가가 없었다. 전태일은 그 억울함을 없애기 위해 행동으로 옮긴다. 그것은 미싱사 생활을 그만두고 재단사가 되는 길을 택한 것이었다.
그것은 그의 목숨을 걸게 되었던 고난에 찬 노동운동을 향한 첫걸음이었다.
당시 재단사는 주인에게 무시 못할 존재였다. 아주 큰 공장을 제외하고는 재단사가 공장장까지 겸하여 직공들의 입사와 해고의 문제까지 마음대로 관리하기도 했다. 직공들의 건의사항도 재단사를 통해 주인에게 건의되니, 재단사는 양심껏 중립을 지켜야 할 사람인 것이다. 그렇지만 주인에게 월급을 받는 약점 때문에 자연히 주인 편에 설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업주와 재단사의 유착관계에 대해 태일은 분개하였다.
당시 그는 미싱사로 월 7천 원 정도의 수입을 올리고 있었는데 재단보조공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면 월 3천 원 정도로 수입이 떨어지게 되고, 이것은 집안 생계에 큰 위협이 될 형편이었다. 그는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우울해 했다. 그는 가족들에 대한 의무도 있었지만 2년이 넘도록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어린 여공들의 참상을 접하면서 안타까움과 울분 속에 살아왔다.
그는 이 억압과 불의에 저항하여 무언가 싸움에 나서는 것이 올바른 길이라고 깨달았던 것이다.전태일은 어서 빨리 재단사가 되어 직공들 편에 서서 정당한 타협을 하리라고 결심했다.
1966년 추석 대목일이 끝나고 그는 재단보조 자리를 찾아 '한미사'라는 잠바집에 들어간다. 평화시장 2층 244호. 아침 8시 출근에 퇴근시간은 평균 밤 10시, 원래 고된 일이었지만 그는 환경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시다들이 찾을 부속품들을 잘 정돈해두었다. 시다들에게 하나라도 더 잔심부름을 시키는 것이 보통인 사람들 속에 시다들의 일손을 하나라도 덜어주려고 애쓴다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다.
전태일이 시다들에게 친절하게 대하자 얼마 안 가서 시다들도 그를 오빠처럼 따르고 그에게 아쉬운 사정을 얘기하기도 하고 부탁도 하게 되었는데, 그는 이야기를 찬찬히 다 들어주고 성가신 부탁에도 화 한번 내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당시 그의 가족은 도봉산 기슭의 판자촌에 살고 있었는데 일이 끝나고 집에까지 가려면 미아리종점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거기서 내려 한 시간 남짓 걸어야만 했다.
때때로 그는 점심을 굶고 있는 시다들에게 버스값을 털어서 풀빵을 사주고 자신은 두세 시간을 걸어서 가기도 했다. 그는 어머니가 싸준 밀가루빵 점심도 시다들 안 보는 데서 숨어서 먹거나 그럴 형편이 못되면 자기는 먹지 않고 남을 줘 버렸다고 한다.
일이 늦게 끝나는 날은 주린 창자를 안고 온종일 시달린 몸으로 다리를 휘청거리며 미아리까지 걸어가면 밤 12시 통금에 걸려 파출소에서 밤을 새우고 새벽에 다시 도봉산까지 걸어서 집에 당도하는 일도 있었다. 그 사실을 안 어머니는 가슴이 쓰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하라고도 못하고 하지 말라고도 못했다. 이런 일이 되풀이되는 사이에 파출소 순경들도 사정을 알고 그냥 통과시켜 밤 한 시, 두 시가 지나 집에 돌아오는 일이 버릇처럼 되었는데, 이것은 그 뒤 그가 죽을 때까지 3,4년 동안 계속되었다.
몸이 고된 것 이상으로 그의 마음은 더욱 괴로웠다. 시다들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게 될수록 그의 고통과 울분은 치밀어 오르고 그의 생각은 더욱 깊어져 갔다. 1969년 겨울 어느 날의 일기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 인간의 개성과 참 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을 증오한다.
한미사 재단보조공이 된 지 서너 달 가량이 지난 1967년 2월초경. 그는 한 재단사와 함께 낙산 기슭의 판잣집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음력설을 열흘 가량 앞두고 대목일이 끝났다. 그는 집이 도봉산인데도 갈 수가 없었다. 돈이 없기 때문이었다. 주인 내외가 지방으로 수금을 가면서 그의 사정을 알고 가게에 와서 살면서 가게를 보고 있으라고 하였다.
주인은 처제되는 처녀를 그에게 소개시키고 둘이 함께 가게를 보도록 하였다. 며칠 같이 지내는 동안 서로 호의를 갖게 되고 연정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한동안 무척 가슴이 설레이는 기쁨을 맛보기도 하였고 고민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어느 날, 깊은 죄의식'을 느낀다. 불효자식을 위해 정성을 들이는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내가 지금 이런 사치에 한눈을 팔 때가 아니다'라고 일기에 쓴다. 이것으로 그의 짧은 사랑은 고백 한번 못한 채 끝나 버렸다.
'완전한 재단사가 되기 위해서, 내 스스로 절제할 수 없는 감정의 포로가 되기 전에, 한창 피어나는 사랑을 꺾어 버린' 전태일. 냉혹한 현실 앞에 그에게는 남들이 다 해보는 연애라는 것도 잔인하게 스스로 꺾어 버려야 환상이었던 것이다. 1967년 2월 24일 전태일은 바라던 재단사가 되었다. 명목상 재단사가 되기는 하였으나 그의 형편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주인은 그가 착실하고 일 잘하는 것을 알고 더욱 부려먹을 생각만 했다.
'끝날이 인생의 종점이겠지. 정말 하루하루가 못 견디게 괴로움의 연속이다. 아침 8시부터 저녁 11시까지 하루 15시간을 칼질과 다리미질을 하며 지내야 하는 괴로움. 허리가 결리고 손바닥이 부르터 피가 나고, 손목과 다리가 조금도 쉬지 않고 아프니 정말 죽고 싶다. ······언제나 이 괴로움이 다 없어지나.······- ( 1967년 3월 17일 일기에서 )
평화시장의 그 고된 노동 속에서도 태일은 책을 손에서 떼어놓은 일이 없었다. 학교에 다니고 싶다는 꿈은 그가 평생을 통해 끝내 이룰 수 없는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항상 그의 개인적인 가장 큰 희망이었다. 그 집념은 생활의 고통 가운데서도 여전히 꺾이지 않고 불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1967년 2월 20일 자신의 바지와 곤로를 팔아 연합중고등 통신강의록 <중학1>권을 1백50원에 산다. 수중에 남은 15원으로 10원짜리 노트를 산 뒤 전화비 5원을 주머니에 남겨두면서 그는 취직날까지 3일간 굶기로 작정한다.
"내일부터 23일까지 금식이다. 설마 3일 금식에야 죽지 않겠지. 정신수양의 금식이야. 먹을 게 없어서가 아니다. 그런데 왜 콧잔등이 시큰해오고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구나. " 그리고 '내년 3월에는 꼭 대학입시를 보자. 앞으로 3백76일 남았구나. 하루에 2시간씩 공부하면 내년에는 대학입시를 볼 수 있겠지.'하며 희미해져가는 배움의 정신을 단단하게 붙들어 맨다.
그의 이러한 집념은 결코 그대로는 실현될 수 없는 무모한 꿈,아니 안타까운 발버둥에 지나지 아니하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이렇게 그의 모든 꿈이 걷잡을 수 없이 꺾여지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에게 남은 것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하루하루가 괴로움의 연속인 죽음과도 같은 노동의 괴로움, 의욕의 탈진, 기계처럼 아무 뜻없이 단조롭게 돌아가는,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모든 삶의 보람과 희망과 인간다운 삶의 기쁨을 빼앗겨 버린, 듯한 소외의 나날이었다.
이 때의 재단사 전태일은 살아있는 인간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기계였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소외된 노동이 가져다 주는 좌절 속에서 모든 의욕을 잃은 채 자신을 포기해 버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그의 일기장 곳곳에는 "절망은 없다", "내일을 위해 산다"라는 절규가 수없이 적혀 있다.
사랑과 투쟁의 불길...
재단사가 되고 난 뒤부터 그는 부쩍 집에 돌아와 밤늦게 밥상머리에 앉아 어머니에게 시다들의 딱한 사정 이야기를 하는 일이 잦아졌다. 잠이 안오는 주사를 맞고 일을 해야 하는 가혹한 노동조건으로 몸이 아픈 여공들이 태일에게 통증을 호소할 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없는 돈을 털어서 약을 사주거나 여공이 할 일을 자신이 대신하거나, 그럴 형편이 못되면 그저 참고 일하라고 달래는 것뿐이었다.
만약 업주에게 그 사정을 이야기하면 도리어 그 여공에게 피해가 갈 뿐이므로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이런 사정이 그를 몹시 괴롭혔다. 이제 전태일의 머리 속은 기술자가 되어 돈울 벌겠다든지, 대학교를 가겠다든지 하는 생각보다도 눈앞에 매일매일 부닥치는 동료직공들의 딱한 사정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꽉 메어지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미싱사 처녀가 일을 하다가 새빨간 핏덩이를 재봉틀 위에다가 왈칵 토해내었다. 각혈이었다. 태일이 급히 돈을 걷어서 병원에 데려가보니 폐병 3기라는 것이었다. 결국 그 여공은 해고당하고 말았다. 이 사건은 전태일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불행한 가족들의 가난한 살림살이를 돕기 위하여 혹은 어린 동생들의 학비를 대기 위하여, 남들이 한창 까불고 뛰놀고 배우고 할 나이에 잠 한 번 푹 못자고 주린 창자 한 번 양껏 채우지 못하고 지옥같은 작업장에서 연약한 허리가 꺾어지도록 일만 해온 그녀가 제대로 사는 것처럼 살아보지도 못하고, 캄캄한 절망 속에서 죽어가야 한다. 그 사실을 눈앞에서 보아야만 하는 태일의 가슴은 통곡과 분노로 들끓었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그 비극을 주목하지 않았지만, 아니 모두가 그것을 외면했어도 전태일의 작은 가슴 하나만은, 연민과 분노로 점점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러한 여공들의 참상은 전태일이 본격적인 노동운동에 뛰어든 이후로도 그의 기운이 약해질 때마다 끊임없이 그를 일깨우고 쇠잔해가는 투지를 다시 불러일으키는 동력이 되었다.
" 그는 생각한다. 그리고 환멸과 ······자기 자신의 나약한 소리를 증오하면서. 인간의 둘레를 얽매고 있는, 인간이 만든······인간본질의 희망을 말살시키고 있는 모든 타의적인 구속을······"
피를 토한 여공이 전태일에게 준 깊은 충격은 그로 하여금 이제까지 엄두를 내지 못했던 엄청난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죽어가는 저 여공들을 살리자. 우리의 생명과 건강을 갉아먹고 삶의 모든 기쁨과 보람을 빼앗아가며, 우리를 비정한 현실의 쓰레기로 만드는 저 잔인한 노동조건을 내 힘으로 바꾸어보자.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기어히 해보자.'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인지 없는지를 가리기에 앞서서 그는 우선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절실한 양심의 목소리에 분연히 일어선 것이다. 후일 그는 근로조건 개선은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니 노동운동에 손대지 말라는 주위 사람들의 충고에 대하여, " 이 일은 안할 수 없는 일이니 되든 안되든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겠다"고 대답하곤 하였다.
태일은 밤마다 집에 돌아오면 저녁 먹을 생각도 않고 아버지가 알고 있는 노동운동에 관한 모든 것을 묻기 시작했다. 그는 아버지를 통해 생전 처음으로 근로자를 위한 '근로기준법'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노동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의 단결된 힘이 필요하며 조직이 필요하다는 것, 또 노동자들의 조직인 노동조합이 법적으로 인정되어 있다는 것도 아버지의 체험담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이무렵 그는 재단사로서의 생활이 길어지면서부터 피곤해 견디지 못하는 어린 시다들을 일찍 집에 보내주고 밤늦도록 혼자 작업장에 남아 시다가 할 일을 대신하는 것이 버릇처럼 되었다.
그것을 알게 된 업주가 자꾸 그러면 시다들의 버릇이 나빠진다고 주의를 주었다. 그러나 다음날에도 태일이 혼자 남아서 청소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본 업주는 평소 곱게 보지 않던 터에 주인 말 안 듣고 제멋대로 하는 재단사하고는 같이 일할 수 없다고 하며 그를 해고시켜 버린다. 그로부터 얼마 후 그는 다른 직장으로 옮겨 여전히 재단사로서 일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의 전태일은 이미 어제까지의 전태일이 아니었다.
그는 낮이면 직장에서 재단사 친구들을 틈틈이 찾아다니며 모임을 만들어내는 조직자였고, 밤이면 그의 판잣집에서 '근로기준법'조문을 뒤지며 밤이 새는 줄도 모르고 밝은 내일을 꿈꾸는 그런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전태일의 아버지 전상수씨는 아들이 노동운동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을 알았을 때, 자신의 젊은 시절이 생각났다. 그는 그 시절 노동운동을 적극적으로 주도하던 사람들이 예외없이 일생을 그르치는 피해를 당하는 것을 무수히 목격하였던 것이다. 그는 아들이 노동운동에 뛰어드는 것을 어떻게 해서라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아들의 노동운동에 대한 관심이 의외로 깊고 집요한 것임을 알았다. 그는 생각을 달리하여 차라리 모두 다 아는 대로 이야기하여, 그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깨닫게 해주고, 아니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고, 또 노동운동을 하면 장래 어떤 화를 입게 될 것인지도 알려주어 아주 이 기회에 단념하도록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태일은 아버지의 얘기를 듣게 되면서 차차로 노동운동이 얼마나 험난한 일인가를 짐작하게 되었다. 특히 아버지가 옛날 파업자금을 충분히 마련하지 못하여 실패한 이야기를 하면서, "노동운동도 돈이 있어야 할 수 있다"고 하였을 때는 무척 실의에 잠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버지의 얘기로 용기가 꺾이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강렬한 용기와 새로운 투지를 얻게 되었는데, 특히 아버지와의 얘기 도중에 우연히 근로기준법의 존재와 내용을 알게 되었을 때는 그의 전신에 새로운 희망과 확신과 환희가 벅차올랐다. 근로기준법의 발견은 실로 그의 운명을 좌우할 중대사건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1968년말, 전태일은 재단사 모임을 만들어 근로조건을 개선해 보자고 동료들에게 제의를 한다. 10명 안팎의 재단사들은 매주 한번씩 평화시장 부근 다방에서 모였고, 69년 6월 '바보회'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인간은 누구나 인간적인 대접을 받으며 살 권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태껏 기계 취급을 받으며 업주들에게 부당한 학대를 받으면서도 바보처럼 찍소리 한 번 못하고 살아왔다며 스스로 바보라고 명했던 것이다.
1969년 6월 그의 아버지는 고혈압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부인에게 태일이 하는 일을 너무 말리지 말라 하고 눈을 감는다. 장례가 끝난 후 태일은 친구들과 함께 집에서 새벽까지 열띤 토의를 시작했다.
전태일은 '바보회' 회원들과 함께 근로자들의 노동실태를 조사하고 근로기준법이 준수되도록 투쟁할 것과 바보회를 점차 노동조합으로 발전시키고, 재단사들의 모금으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고 이익을 적절히 배분하는 모범업체를 평화시장 안에 설립해보자는 '혁명적으로 참신한' 제안을 하기도 했다.
모범업체를 만든다는 것은 아직 막연한 이야기였지만 다른 제안들은 우선 실행하기로 결정되었다. 이것이 바보회의 출발이었다.
전태일이 펼쳐보이는 근로기준법 법령집은 동료 재단사들에게는 낯설고 신기한 것이었다. 바보회가 창립된 지 얼마 후 전태일이 어머니를 통해 빚을 내 산 2천7백원짜리 두꺼운 책 <축조 근로기준법 해설>은 다음해 겨울 청계천 길바닥에서 자신과 함께 불살라지는 운명을 맞기까지 잠시도 그의 옆구리를 떠나지 않았다.
태일은 밤마다 창동 천막집에서 호롱불 아래 한자 투성이인 이 책을 넘기며 모르는 한자가 나올 때마다 탄식했다고 한다."어머니 대학생 아들 둔 친구 없어요? 내게도 대학생 친구 하나 있었으면 원이 없겠는데." 태일의 근로기준법 연구는 어두침침한 작업장에서나, 털털거리며 달리는 시내버스 안에서나, 또 그의 집 골방에서나, 틈만 있으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계속되었다. 여름이면 잠과 모기를 쫓으며 밤을 새웠고 겨울이면 불도 없는 썰렁한 냉돌방에서 구멍 뚫린 나이롱 이불을 머리 끝까지 둘러쓰고 손을 호호 불어가며 새까맣게 손때가 묻은 근로기준법의 닳아진 책장을 넘겼다. 그것은 연구가 아니라 실로 사투였다.
태일은 모르는 한문글자가 나오면 옆동네에 사는 나이 많은 대학생 아저씨를 밤 두세 시가 넘어서도 깨워서 미안하다는 말을 열 번도 더하고 물어보기도 했다.
이렇게 근로기준법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태일은 바보회 회원들은 물론이고 주위 사람들에게 기회 있는 대로 근로기준법 이야기를 하면서, 현재 노동자들이 받고 있는 대우가 얼마나 부당한 것인가를 열심히 설명하였다. 이러는 사이 업주들 사이에 태일은 '위험분자'로 소문이 퍼졌고 해고를 당하게 된다. 그러나 태일은 어느 바짓집에서 닷새 동안 일을 해주고 받은 임금으로 노동실태 조사용 설문지 3백매를 인쇄했다.바보회 회원 서너 명이 그것을 평화시장 노동자들에게 돌렸다. 업주들이 눈치 채지 않도록 비밀리에 하라고 했지만 곳곳에서 업주들에게 발각이 되서 빼앗기거나 찢어지는 일이 생겼다.
제대로 걷힌 것은 불과 30매 정도였고, 이 일로 인해 태일은 더 이상 평화시장에 발붙일 수 없게 됐다. 태일은 설문지 1백장 가운데 회수된 30장을 분석해 시청 근로감독관실과 노동청을 방문했으나 무성의한 태도에 "알았으니 가봐라"는 말만 듣고 돌아와야 했다. 그는 노동자들의 참상이 알려지기만 하면 정부나 그 기관인 노동청이나 근로감독관들은 당연히 노동자편을 들어 기업주들을 혼내줄 줄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노동청마저 기업주들과 결탁하고 있는 듯한 태도가 아닌가? 태일은 너무 답답하였다. 나는 도대체 어디까지 상대로 하여 싸워야 한단 말인가? 저 악마같은 현실의 벽은 도대체 얼마나 두꺼우며 또 어디까지 뻗어있단 말인가? 그는 한동안 배반당한 충격 속에 허탈감에 빠졌다. 그는 깊은 실의와 낙담 속에 빠져들어갔다. 그리고 좌절과 자학을 거듭한 끝에 다시 박차고 일어섰다. 보다 뿌리 깊은 분노와 보다 뜨거운 연민이 그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끓어올랏다.
그는 부조리한 현실과 절대로 타협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면서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모든 투쟁 방법을 철저하게 연구하고 재검토해 나갔다.
평화시장에서 쫒겨난 뒤 그해 겨울과 70년 봄,여름 전태일은 막노동판을 떠돌아다녔다. 태일은 이제 친구들과 노동문제를 토의하기보다는 그 혼자서 사회와 인간의 현실에 관하여 깊이 생각에 잠기고 이것저것 마음을 정리하는 일에 몰두하는 편이었다. 그날그날의 생활을 위하여 일터를 찾아 여기저기 떠돌아다니기는 했으나 밤중에 집에 들어오면 방에 틀어박혀서 밤을 밝히면서 글을 쓴다든가 멍하니 앉아 있는다든가 하는 일이 많았다. 사회는 어째서 기업주들의 죄악을 "알면서도 묵인하고 있는가"라고 자문해보았다. 근로감독관이나 노동청뿐만이 아니었다.
정치가도, 신문도, 종교인이나 지식인도, 사회의 어느 누구, 어떤 기구도 노동자의 참상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노동절 행사 때마다 "이 나라 경제성장은 묵묵히 땀흘려 일하는 산업전사들의 헌신의 덕분"이니 무어니 입에 발린 소리를 떠들어대면서도 정작은 노동운동을 탄압하고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노동자들의 복지후생문제가 뒤로 미루어져야 한다고 공언하는 사람들의 뻔뻔스러움에 그는 심한 혐오를 느꼈다.
그리하여 그는 대통령에게 보내는 분노의 편지를 쓰면서 노동자의 참상을 일일이 열거하고 " 이것도 나라의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실태입니까?"라고 항의하였다. 그는 노동자들을 자신들을 '더욱 살찌기 위한 밑거름'으로 사용하는 기업주들의 모습이 이 사회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축도라고 생각하였다.
사회 전체가 "인간의 둘레를 얽매고 있는 타율적인 구속"으로 느껴졌다. 그는 '생존경쟁이라는 없어도 될 악마' 때문에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기본적으로 적대관계에 놓여지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인간은 또한 "서로서로를 필요로 하는 "존재들이다. 모든 인간은 서로의 동등한 인간적 권리를 존중하고 서로의 인간적 요구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떠한 인간적 문제이든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 가져야 할 인간적인 과제이다. ( 1969년 12월 31일 일기에서)
1970년 5월경 시청에서 무허가건물 철거반이 파견되어 그가 살던 집이 헐렸다. 집이 헐리면 태일은 어머니와 함께 밤이면 다시 지었다. 짓고 나면 바로 그 다음날이나 혹은 이삼 일 뒤쯤 되어 철거반 차가 들이닥쳐 다 부숴 버렸다. 그의 집은 이렇게 하여 일곱 번 헐렸다가 일곱 번 다시 지어졌다. 그는 철거반이 와서 힐난하면 "법이 어떻게 되어 있든 살기 위해서 집 짓는 것이니 죄 될 것 없다."고 항변하곤 하였다.
그는 당시 교회에 다니면서 '임마뉴엘'원장을 알게 된 어머니에게 삼각산의 건물 신축공사장에서 인부 노릇을 하면서 밥을 먹게 해달라고 졸라댄다. 삼각산으로 떠나는 태일의 마음은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그는 자신이 죽는 경우를 가정하여 유서까지 써놓은 뒤였다. 그러나 아무래도 확고한 결단이 서지 않았다. 어느 깊은 밤에는 결단이 선 것 같았는데 그 다음날이 되면 또 흔들렸다. 그는 죽음의 결단을 내리려 떠나는 것이었다.
삼각산에 올라간 전태일은 묵묵히 노동만 했다. 낮이면 바위를 깨서 집터를 닦고, 석재를 만들고 우물을 파는 일, 밤이면 목재를 실어 나르기를 밤 12시까지 계속하는 일, 그리고 틈틈이 시간이 나면 지하실에 내려가 근로기준법 책을 읽었다. 임마뉴엘기도원 신축 공사장에서 일한 지 4개월쯤 된 70년 8월 9일, 전태일은 마침내 하나의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일기를 썼다. 일기는 3개월 뒤에 있을 사건을 예고하는 결연한 빛을 띤다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 어린 동심 곁으로,···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오늘은 토요일. 8월 둘째 토요일. 내 마음에 결단을 내린 이날.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때에 한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치오니, 하느님,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주시옵소서.
목숨을 걸지 않는 한 결단은 없고 투쟁도 거짓이다. 그것은 소리치는 양심의 아픔을 일시적으로 달래는 자기 위안의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삶의 문제는 결국 죽음의 문제인 것이다. 전태일이 죽음을 각오한 투쟁을 결단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비인간적 삶에 대한 온갖 미련을 떨쳐 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마음의 준비는 끝났다. 오직 거짓이 없는 그 순간을 위하여 아무 두려움도 남지 않는 그 완전한 순간을 위하여, 그는 이제 돌아가려는 것이다.
남은 것은 오직 행동뿐. 불꽃 같은 행동뿐. 그 처절한 분노와 사랑의 불길. 이슬 같은 사랑의 불길이 되기 위해 그는 돌아가는 것이다.
거룩한 불꽃...
1970년 9월 전태일은 평화시장에 다시 모습을 나타내었다. 한동안 그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평화시장을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때마침 재단사를 구하는 가게가 있어서 거기에 취직이 되었다. 그가 취직한 곳은 왕성사. 취직문제가 일단락되자 그는 동료인 김개남을 찾아가
" 이번에 가서 고생도 많이 했고 생각도 많이 했는데 뜻있는 사람들끼리 다시 한 번 모여서 본격적으로 해보자"라고 한다. 물론 그가 다시 한 번 해보자는 것은 '근로조건개선'문제였다. 그가 평화시장을 떠났던 동안에 흩어져 있었던 바보회 회원들이 그의 출현을 계기로 다시 모였다. 모두 여섯 명의 회원이 다시 규합이 되었다.
나중에 모두 여섯 명의 재단사가 새로 추가되어 도합 열두 명의 재단사가 자주 모임을 갖는 사이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 때를 전후하여 전태일은 틈나는 대로 서울시청, 노동청 등을 찾아다니며 진정서를 내기도 하고 신문기자들을 만나거나 방송국을 찾아가기도 하였다. 태일은 어느날 노동청 정문 앞에서 마침 만난 출입기자들을 붙잡고 사정이야기를 하며 신문에 평화시장의 참상이 보도되도록 해줄 수 없겠느냐고 매달려봤더니 그들이 무척 호의적인 반응를 보이며 3만이 되는 직공에 설문지 30매 정도로는 자료가 충분하지 못하니 좀더 많은 조사보고서를 받고, 구체적인 자료를 모아서 여러 사람 이름으로 정식으로 진정서를 제출해보라고 권한다.
태일은 실로 암흑 속에서 빛을 보는 것 같은 새로운 전망으로 용기백배하였고, 이제껏 소극적이었던 친구들의 움직임도 생기에 차고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1970년 9월 16일 저녁 그들은 그 동안의 '바보회'를 '삼동친목회'로 이름을 바꾸고 새 조직을 만들어 출발한다. 삼동이라 함은 평화시장,동화시장,통일상가의 세 건물을 가리킨 것이다. 그들은 '바보회'의 기업주나 노동당국에 대한 '진정'이나 '호소'의 수준을 넘어 평화시장의 불법적이며 비인간적인 노동현실을 세상에 폭로하고 그것을 하나의 발판으로 하여 공동으로 '투쟁'할 것을 활동지침으로 결의한다.
이들은 곧 1년전 불발로 끝난 설문지를 다시 돌려 1백26장을 회수했고, 1970년 10월 6일 드디어 결과를 분석해 노동청장 앞으로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개선 진정서'를 냈다. 이 진정에 따르면 응답 노동자의 95%가 하루 14~16시간 노동하고 있고, 77%가 폐결핵 등 기관지 질병을 앓고 있으며, 81%가 위장병에 걸려 있었다.
당시 평화시장엔 3만 노동자가 일하고 있었고 대부분이 어린 여공들이었다.
1970년 10얼 7일 마침내 시내 각 석간신문에 평화시장이 참상에 관한 보도가 실렸다. 기다리고 기다렸던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경향신문사 신문 게시판에서 가슴을 조이며 기다리던 전태일은 새로 나온 석간신문 한 장을 사들고 미친 듯이 달렸다. 시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삼동회 회원들은 바라던 기사가 실린 것을 확인하자 환호성을 터뜨리며 모두 얼싸안았다.
' 나어린 여자들이 좁은 방에서 하루 최고 16시간 동안이나 고된 일을 하며 보잘 것 없는 보수에 직업병까지 얻고 있어 근로기준법을 무색케 하고 있다. 이들은 서울시내 청계천 5~6가 사이에 있는 평화시장내 각종 기성복 가공업에 종사하는 미싱사,재단사,조수 등 2만 7천여 명으로 노동청은 7일 실태조사에 나서 근로기준법을 위반한 업체는 모두 전부 고발키로 했다.······'
이 짤막한 몇줄의 기사에 평화시장의 젊은 재단사들은 고무되었다. 그들은 경향신문사로 달려가 신문 3백 부를 샀다. 가진 돈이 없어서 손목시계를 풀어서 신문사측에 담보로 맡겨 놓고 신문대금은 신문을 팔아서 갚기로 했다. 큰 모조지를 잘라서 그 위에다 붉은 글씨로 '평화시장 기사특보'라고 쓴 단장을 만들어 그것을 모두 어깨에다 두르고 시장내 이 건물 저 건물을 쫓아다니며 신문을 돌렸다. 어린 시다들에게는 무료로 주기도 하였다.
신문 한 장이 그때 값으로 20원, 노동자들에겐 신문을 사서 본다는 일이 드물었는데 그 날 신문은 삽시간에 다 팔려 버렸다. 어떤 노동자는 수고가 많다며 신문 한 장 값으로 1천 원을 내놓기도 했다. 그날 저녁 평화시장은 노동자들이 몰려 서서 서로 웅성거렸다.
평화시장의 오랜 침묵이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많은 노동자들이 삼동회 회원들을 찾아와서 인사를 하고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협력하며 싸울 것을 다짐했다.
노동청 출입기자들이 평화시장의 참상에 대해 몰랐을 리가 잇겠는가? 그럼에도 그들은 스스로 평화시장을 찾아가서 그 참혹한 노동실태를 파헤쳐서 보도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럴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또 그런 것을 다루면 달가워할 사람도 없고 신문사의 상사들이 색안경을 쓰고 주시하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태일이 모든 자료를 갖추어 노동청에 정식으로 진정서를 제출하니까 비로소 노동청 출입기자들은 그것을 빌미로 하여 평화시장에 대한 기사를 다룰 용기가 났던 것이다. 전태일과 그의 친구들이 뚫은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두터운 벽의 일각이었다.
인간을 물질화하는 이 세대의 무관심, 억압과 침묵의 벽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평화시장의 비참한 현실을 개혁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하였고 그것이 젊은 재단사들의 투쟁 의지를 불타오르게 했던 것이다. 신문보도가 나자 평화시장의 업주들은 진정서를 낸 사람들을 찾기 시작했다. 삼동친목회 대표들은 다시 회합을 갖고, 평화시장주식회사측에 대하여 요구조건을 제출하기로 결의를 하고 사무실을 찾아가 업주쪽에 11시간작업,일요일 휴무, 정기 건강진단, 다락방 철폐, 환풍기 설치, 노동조합결성의 지원 등을 합친 8개항을 요구했다.
평화시장 20년 역사에 처음으로 녹음된 노동자의 목소리였다.
69년 3선개헌을 강행한 정부는 71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여론에 민감해 있었다. 노동자들의 참상이 매스컴을 통해 계속 보도된다면 그것은 선거에서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고, 노동청은 책임추궁을 당하게 될 것이 틀림없는 형편이었다. 평화시장 진정서가 신문에 보도되자 노동청은 황급히 실태조사도 하고 근로기준법 위반업체는 고발하겠다고 소란을 피웠다. 근로감독관이 삼동회 회원들을 찾아와 전태일 등을 "모범 청년"이라느니, "노동절에 표창하겠다"느니 하는 따위의 말을 늘어 놓으며 그들을 회유하려고 했다.
또 노동청의 근로기준국장도 찾아와 "깡패모양으로 그렇게 직업도 없이 돌아다니지 말고 취직을 하면 일주일 이내로 다 개선시켜주겠다"고 하며 말도 안되는 약속을 했지만 그들은 그 약속이 너무 반가워 모두 일단은 취직을 하였다. 그러나 선처해 주겠다고 약속한 기한이 거듭 연기되며 몇차례 지나가자 전태일은 삼동친목회를 소집하여 10월 20일 노동청 정문 앞에서 데모를 벌이자고 제의를 한다.
회원들의 주변에 엄중한 사찰망을 펴고 있던 당국은 데모계획을 눈치챘고 근로감독관이 다시 찾아와 며칠만 참고 기다려 보라고 애원을 하면서 데모중지를 요청하자 전태일은 "속는 셈치고 또 한 번 기다려 볼 터이니 반드시 약속을 지키라"고 대답하고는 데모를 일단 보류하기로 한다. 그러나 국정감사기간도 넘어가자 근로감독관은
"너희 요구조건은 당초 무리였어. 개인적인 애로사항이 있으면 도와줄테니 이제 노동운동에서 손 떼는 게 어때"라고 태도를 바꿨다. 전태일이 격앙된 어조로 따지고 덤비자 근로감독관은 "이제 국정감사도 끝났으니 어디 너 할 대로 해보라"며 배짱을 내밀었다.
노골적인 기만과 배신이었다. 삼동회 회원들은 모두 격분했다. 그들은 만장일치로 10월 24일 오후 1시에 평화시장의 국민은행 앞길에서 데모를 감행하기로 결의했다. 거사 시각은 가까워지고 오후 1시 약 5백 명 가까이 노동자들이 모이자 곤봉을 들고 늘어섰던 경비원들이 사람들을 해산시키려고 들었다. 경비실 창문가에서 형사가 내려다보며 올라오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순간 그들은 모든 것을 깨달았다. 평화시장에 파견된 정보계 형사와 회사측 사람들은 유들유들 웃으면서 시간을 끌었다. 협박끼 있는 조롱을 하기도 하고 "서로 좋은 것이 좋은 것 아니냐?"고 회유하기도 하였다. 전태일 등이 격분하여 다시 밖으로 뛰어나가려고 하니까 그때서야 그들은 당황한 빛을 보이며 "11월 7일까지는 선처해주겠다. 그때까지만 참고 기다려보라"고 약속을 하였다.
법 시정을 약속한 11월 7일에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자. 전태일은 동료들에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근로기준법 책을 화형하자고 제의했고, 날짜는 13일로 잡았다. 전태일은 회원들을 향하여 "이번만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결단코 물러서지 말고 싸우자"라고 힘주어 말했는데, 그 말이 바로 목숨을 던질 결심을 품고 그 자신의 마음을 다지는 말인 줄은 아무도 깨닫지 못하였다.
태일은 어느 날 저녁 어머니에게 말했다. "노동청에서 근로조건 개선을 약속했다가 국정감사 끝나니 언제 봤냐는 식이에요. 그래서 데모하기로 했어요. 13일 오후 1시 평화시장 앞길로 오세요. 엄마가 꼭 보셔야 해요."어머니는 불안했다. 그즈음 태일의 거동이 어딘지 모르게 수상했다. 어느 날 방청소를 하다가 근로기준법책이 눈에 띄었다. '보기만 해도 징그러운 책'이었다.
불길한 예감이 전류처럼 온몸을 휩쌌다. 어머니는 부엌에 걸려 있는 빈 솥 안에다가 숨겼다. 11월 12일 집을 떠나는 날 아침, 태일은 새벽부터 일어나 정성스레 세수를 하고 방을 깨끗이 정돈하고, 그리고 거울 앞에서 머리를 몇 번 빗고, 작업복 바지도 새로 다리고 평소에는 입지 않던 헌 검정 바바리코트를 꺼내어 먼지를 깨끗이 털고 걸쳐 입는 것이었다. 낯빛은 몹시 침울해 보였다. 얼마 후 그는 근로기준법책을 찾았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거짓말로 핑계를 대보았으나 막무가내였다. 한동안 실랑이를 하다가 하는 수 없이 어머니는 체념하고 책을 꺼내 주었다. 책을 받아든 그는 "죄송하다"고 하면서 무엇을 더 말하려는 듯 잠시 머뭇거리다가 곧 입을 굳게 다물고 침울한 표정으로 한참 동안이나 묵묵히 앉아 있었다.
밥상이 들어왔다. 라면이었다. 동생 순옥이 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태일은 고개를 떨구더니 미안하다는 한마디를 남기고 방문을 나섰다. 따라서 일어서는 순옥을 등진 채로 그는 다시, "순옥아 , 며칠만 기다려라, 곧 월금을 타올테니 ······그리고 순옥아, 아무리 살기가 어렵더라도 어머니께 돈 때문에 졸라대지 않도록 해라" 하였다.
전태일은 죽음의 길을 떠나면서 가족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심장은 찢어지는 듯 하였다. 행상일 나갔다가 점심때 집에 들른 어머니는 헐레벌떡 들어오는 아들 친구로부터 결국 분신소식을 듣게 된다.
"그날은 바람이 많이 불었어요.점심때가 되자 평화시장 사잇골목으로 노동자들이 꾸역꾸역 모여들기 시작했어요. 평화시장 2층 복도에서 형사들과 실랑이가 붙어 우리 종이 플래카드가 다 찢어졌는데 태일이가 우리더러 앞길에 내려가서 기다리라 하더군요. 잠시 뒤 태일이가 길가로 나오며 내 이름을 불러 다가가는데 갑자기 자기 가슴에 성냥을 그어댔어요. 바람이 세차 불길이 삽시간에 얼굴을 삼키더군요.
한참 불기둥처럼 서있다 쓰러졌는데 그제서야 우리가 잠바를 덮어 불을 끄려고 달려들었지요. 쓰러졌던 태일은 일어나 비틀비틀 걷기 시작하면서 외쳤어요.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우리도 엉겁결에 함께 외쳤어요." 동료였던 김영문씨의 증언이다. 그것은 지옥 끝에서도 볼 수 없을 것 같은 실로 참혹한 풍경이었다.
그의 몸은 옷의 엉덩이 부분을 제외하고는 전신이 숯처럼 시커멓게 타고, 온 살결은 화상으로 터지고, 그의 눈꺼풀은 뒤집히고, 입술은 퉁퉁 부르터서 그를 낳고 기른 어머니라 할지라도 누구인지 식별할 수 없을 정도의 모습이었다. 그는 그 참혹한 몰골로, 마지막 남은 생명의 힘을 짜내는 듯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며 울부짖었다.
명동 성모병원 응급실로 달려간 어머니는 "물 좀 달라"는 낯익은 목소리로 비로소 아들을 알아보았다. 어머니는 죽어가는 아들의 가슴에 손을 얹고 기도했다. "근로자를 위하여 애쓰는 태일의 뜻이 이 모양으로 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면, 하나님 뜻대로 하옵소서. 참새 한 마리도 당신의 뜻이 아니고는 떨어질 수 없다고 하였으니 이 가엾은 목숨도 당신 뜻대로 하소서.
" 전태일은 어머니에게 원망하지 말라고 부탁한 후 " 어머니, 내가 못다 이룬 일 어머니가 꼭 이루어주십시오"하며 세 차례나 되물어서 약속을 받아낸다. 그리고 친구들에게도 벌떡 일어나려고 하면서 "큰소리로 맹세하라"고 대답을 요구했다. 전태일의 친구들은 북받치는 울음을 삼키며 큰소리로 외쳤다. 그제서야 전태일은 눈을 감으며 잠잠해졌다.
전태일은 목이 마르다면서 물을 달라고 수없이 졸라대었다. 나중에는 차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어서 어머니가 가제에 물을 적셔 입을 축여 주었다. 저녁이 되면서 한동안 혼수상태에 빠진 듯하더니 눈을 떠서 힘없는 소리로
"배가 고프다 ······"라고 하였다. 그 한마디, 그의 스물두 해의 고통을 말해주는 그 한마디가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 친구여,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주게. 그리고 바라네. 그대들 소중한 추억의 서재에 간직하여주게. 뇌성 번개가 이 작은 육신을 태우고 꺾어 버린다고 해도 하늘이 나에게만 꺼져 내려온다 해도 그대 소중한 추억에 간직된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을 걸세. ·····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의 전체의 일부인 나.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 그리고 도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다니러 간다네. 잠시 쉬러 간다네. ( 전태일의 유서 중에서 )
장례식은 청계피복노조 결성 지원, 정기 건강진단, 일요일 휴무 등 전태일이 생전에 요구했던 8개항을 들어 주지 않으면 장례를 치를 수 없다고 강경하게 버티는 어머니 이소선씨의 주장에 당국이 결국 항복한 뒤 20일에야 치러질 수 있었다. 태일의 어머니는 당국이 회유와 협박을 섞어가며 내놓은 1억원대의 보상금을 단 한푼도 아들의 죽음과 맞바꾸지 않았다. 청계피복노조는 당국의 '지원' 속에 쾌속으로 결성작업이 진행돼 11월 27일 출범했다.
청계피복노조는 70년대 한국노동운동의 푯대였다. 청계노조에 이어 동일방직,원풍모방,YH무역 등에 잇따라 민주노조가 결성됐고, 전태일의 죽음은 평화시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한국 사회에 20년 동안 잠겨 있던 분노와 욕망을 천천히 일어서게 했다.
그렇게 전태일은 우리 곁에 왔다가 한방울의 이슬, 거룩한 불꽃이 되어 우리 곁을 떠났다.
한 사람의 일생이 이렇게 치열하고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인간 존재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본다. 그의 인간에 대한 한없는 사랑과 희망, 고통과 좌절을 따라가면서 자신을 돌이켜 보지 않을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전태일을 더 오랫동안 기억하기 위해 내 가슴 속에 영원히 담아두기 위해 이 책을 요약하는 동안 나는 몇 번이고 눈시울을 붉혀야 했다. 또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만 보고 전태일을 말하려는 자가 있다면, 혹 시간이 없어서 책을 읽을 여유가 없다면 이 요약된 글이라도 제발 반드시 읽어주길 바란다. 그래야만 당신은 전태일이 당신에게 던지고 간 최소한의 빚을 갚는 일이 될 것이다.
마치고 나서
이 글은 <전태일평전>의 순서에 따라 거의 많은 부분은 최대한 저자의 문체와 어조를 그대로 따르려고 애썼다. 혹 내 나름대로의 편집이 고 조영래 변호사에게 누가 되지 않을까 염려될 뿐이다. 또한 내용이 잘못된 부분은 전태일의 삶에 대해 정확한 사실을 알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 과감하게 지적해주기를 간절히 원할 뿐이다. 비록 남이 보기에 보잘 것 없는 작업이었다 할지라도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으로 위로를 삼고 싶다. 지난 11월 13일부터 함께 한 그의 영혼에게 먼저 감사드리며 그의 영전에 향 하나 피워 올리는 마음으로 이 글을 끝맺는다.
참고: 조영래, 전태일평전(돌베개)/ 발굴한국현대사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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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전태일의 삶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사랑"이었을듯...^^(재단사이었음에도 어린 여공들을 안고 갔듯...지금 노동운동 하시는 분들도 더 많이 안고 갈수 있기를....지랄같은 "제3자 개입금지"^^;;)
.......... '전공노'는 노동 3권을 애타게 찾고 있고, 현대 하이스코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노조 설립'의 목마름을 절규하고 있고 ................ 전태일 열사가 외쳤던 "근로 기준법 준수하라"를 35년이 지난 이 시대에도 "노동법 준수하라"고 외치고 있으니 ........................ '혁명'만이 남은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