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에 왜군(倭軍)의 포로(捕虜)가 되어 왜국(倭國) 본토(本土)에서 3년 동안 곧 1597년 8월 12일부터 1599년 7월 28일까지 피수생활(被囚生活)을 하다 귀국(歸國)한 사인(士人) 정희득(鄭希得, 1573년~1623년)의 피로기록(被虜記錄)인 <해상록(海上錄)> 제1권(第一卷)에는 ‘일본총도’(日本總圖)가 수록(收錄)되어 있는데, 거기에 등장(登場)하는 지명(地名)들 가운데 일부(一部)를 소개(紹介)합니다.
예(例)를 들면, 16세기(世紀) 말엽(末葉) 왜국(倭國)의 ‘山陽道’(산양도)에는 ‘上關’(상관)과 ‘下關’(하관)이라는 지명(地名)이 있었습니다.
<번역문(飜譯文)>
산양도(山陽道)는 8국(八國)이다.
우리나라(=朝鮮)로부터 출입(出入)하는 길이다.
파마(播摩) 파주(播州) 16군(十六郡)과 병고(兵庫)가 여기 있다.
미작(美作) 작주(作州) 6군(六郡)은 휘원(輝元)과 수가(秀家)가 나눠서 식읍(食邑)으로 한다.
비전(備前) 비주(備州) 14군(十四郡)은 수가(秀家)의 식읍(食邑)인데, 수가(秀家)는 수길(秀吉)의 양딸 사위(養女婿)로서 한산도(閑山島) 싸움에 독전(督戰)하던 자(者)이다.
비중(備中) 비주(備州) 12군(十二郡)은 휘원(輝元)ㆍ수가(秀家)가 나누어 식읍(食邑)으로 한다.
비후(備後) 비주(備州) 15군(十五郡)은 휘원(輝元)의 식읍(食邑)이다.
안예(安藝) 예주(藝州) 8군(八郡)은 휘원(輝元)의 식읍(食邑)이다.
주방(周防) 방주(防州) 6군(六郡)은 휘원(輝元)의 식읍(食邑)인데, 상관(上關)이 여기 있다.
장문(長門) 장주(長州) 5군(五郡)은 휘원(輝元)의 식읍(食邑)인데, 하관(下關)이 이곳에 있다.
<원문(原文)>
山陽道八今國。 自我國出入之路也。 播摩 播州十六郡。 兵庫在此。○美作 作州六郡。 輝元,秀家分食之。○備前 備州十四郡。 秀家食之。秀吉養女婿。督戰於閒山者也。○備中 備州十二郡。 輝元,秀家分食之。○備後 備州十五郡。 輝元食之。○安藝 藝州八郡。 輝元食之。○周防 防州六郡。 輝元食之。上關在此。○長門 長州五郡。 輝元食之。下關在此。
[출처=한국고전종합DB, http://db.itkc.or.kr/itkcdb/mainIndexIframe.jsp]
한자(漢字)로 표기(表記)된 지명(地名)이지만, 일본어(日本語) 발음(發音)으로 ‘下關’(하관)을 ‘시모노세키’(しものせき)라고 훈독(訓讀)하며 ‘上關’(상관)을 ‘카미노세키’(かみのせき)라고 훈독(訓讀)합니다.
‘下關’(しものせき)은 189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이 체결(締結)된 장소(場所)로 유명(有名)한 곳이며, 이 조약(條約)은 ‘마관조약’(馬關條約)이라고도 합니다.
혹자(或者)는 주장(主張)하기를, 본래(本來)의 ‘下關’(하관)은 중국(中國) 대륙(大陸)의 강소성(江蘇省) 강녕현(江寧縣)에 있는 장강(長江) 하류(下流)의 ‘下關’(하관)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정희득(鄭希得)의 <해상록(海上錄)>에 나오는 ‘上關’(상관)을 어디로 비정(比定)할 수 있을까요?
‘下關’(하관)의 위치(位置)를 특정(特定)하였다면, ‘上關’(상관)의 위치(位置)도 구체적(具體的)으로 비정(比定)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장강(長江) ‘하류’(下流)에 ‘下關’(하관)이 있었다고 전제(前提)한다면, ‘上關’(상관)은 장강(長江) ‘상류’(上流)의 어느 지역(地域)에 있었을까요?
아니면, 전혀 다른 곳에 ‘上關’(상관)이 있었을까요?
참고(參考)로 언급(言及)하면,
정희득(鄭希得)의 <해상록(海上錄)>에는 나오지 않지만, ‘上關’(상관)과 ‘下關’(하관)이라는 지명(地名) 이외(以外)에도 ‘中關’(중관)이라는 지명(地名)도 있으며 일본(日本)에서는 이것을 ‘나카노세키’(なかのせき)라고 발음(發音)합니다.
그 이름은 ‘上關’(상관)과 ‘下關’(하관)의 중간(中間)에 있다는 뜻에서 유래(由來)한 것이며, 일본(日本)에서는 그 세 지역(地域)을 ‘防長三関’(ぼうちょうさんかん; 보-쵸-산칸)이라고 합니다.
일본(日本)의 기록(記錄)에 따르면, 왜경(倭京)에 가까운 순서(順序)대로 ‘上關’(かみのせき), ‘中關’(なかのせき), ‘下關’(しものせき)이 설치(設置)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그 세 지역(地域)에는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의 숙박소(宿泊所) 및 접대소(接待所)가 있었다고 합니다.
정희득(鄭希得)의 <해상록(海上錄)>에 따르면, ‘上關’(상관)과 ‘下關’(하관)이 있는 왜국(倭國)의 ‘山陽道’(산양도) 8국(八國)은 “조선(朝鮮)으로 출입(出入)하는 길”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조선(朝鮮)에서 왜국(倭國)의 경도(京都)로 출입(出入)하는 교통(交通)의 길목에는 통행(通行)하는 사람이나 물건(物件) 등(等)을 조사(調査)하는 세 개(個)의 ‘關門’(관문) 곧 ‘上關’(かみのせき), ‘中關’(なかのせき), ‘下關’(しものせき)이 존재(存在)하였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上關’(상관), ‘中關’(중관), ‘下關’(하관)의 위치(位置)를 중국(中國) 대륙(大陸)의 어느 지역(地域)으로 각각(各各) 비정(比定)할 수 있을까요?
마지막으로, 지명(地名)의 복수성(複數性)에 관(關)하여 살펴봅니다.
현재(現在) 일본(日本)의 자료(資料)에 따르면,
오늘날 ‘下關’(しものせき; 시모노세키)라는 지역(地域)은 원래(元來) ‘馬關’(ばかん; 바칸)이라고 불리었는데, 1889년 시제(市制)의 시행(施行)에 따라 ‘赤間關’(あかまがせき; 아카마가세키)로 변경(變更)되었으며, 1902년에는 ‘下關’(しものせき; 시모노세키)로 개칭(改稱)되었다고 합니다.
[출처=http://homepage3.nifty.com/jpnships/meiji01/meiji01_kokunai_osk01_.htm]
그리고 ‘赤間關’(あかまがせき; 아카마가세키)는 본래(本來) ‘赤馬關’(あかまがせき; 아카마가세키)라고 표시(表示)되었으나, 한문풍(漢文風)으로 줄여서 ‘馬關’(ばかん; 바칸)이라 표기(表記)되었다고 합니다.
[출처=http://ja.wikipedia.org/wiki/%E4%B8%8B%E9%96%A2%E6%9D%A1%E7%B4%84]
또한 ‘下關’(しものせき; 시모노세키)이라는 명칭(名稱)은 1895년 당시(當時) 강화조약(講和條約)을 공포(公布)한 문서(文書)에 ‘下ノ關’(しものせき; 시모노세키)라는 지명(地名)이 공식적(公式的)으로 사용(使用)되었던 것에서 유래(由來)한다고 합니다.
[출처=http://www.kawashimashin.com/09/essay/bakanjoyaku.html]
바로 위에 언급(言及)된 일본(日本)의 자료(資料)에 따르면,
‘下關’(しものせき; 시모노세키)라는 지명(地名)이 1895년 조약(條約)을 공포(公布)한 문서(文書)에 공식적(公式的)으로 사용(使用)되었으므로, 그 이름은 1895년 이전(以前)에 존재(存在)하였다고 추정(推定)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1895년 당시(當時)에 일본(日本)의 관계자(關係者)들이 조약(條約) 체결(締結)을 위(爲)하여 일부러 그 지명(地名)을 새롭게 만들었다고 볼 수 없으며, 설령(設令) 그 지명(地名)을 급조(急造)한다고 하여도 당시(當時)의 일본(日本) 국민(國民)들이 그것을 인정(認定)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1895년 강화조약(講和條約)의 관계자(關係者)들은 기존(旣存)의 지명(地名)을 문서(文書)에 사용(使用)할 수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여기서 필자(筆者)는 ‘下關’(しものせき; 시모노세키)라는 이름이 역사상(歷史上) 최초(最初)로 사용(使用)된 시기(時期)를 특정(特定)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16세기(世紀) 말엽(末葉) 정희득(鄭希得)이 기록(記錄)한 <해상록(海上錄)>에는 ‘上關’(상관)과 ‘下關’(하관)이라는 지명(地名)이 등장(登場)하므로, ‘下關’(しものせき; 시모노세키)라는 지명(地名)이 사용(使用)된 시기(時期)는 16세기(世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하여간(何如間), 메이지(めいじ; 明治) 시대(時代)에 공식적(公式的)인 ‘시명’(市名)으로 사용(使用)된 것은 1889년의 ‘赤間關’(あかまがせき; 아카마가세키)와 1902년의 ‘下關’(しものせき; 시모노세키)이었습니다.
‘赤馬關’(あかまがせき; 아카마가세키)는 고칭(古稱)이며, ‘馬關’(ばかん; 바칸)이라는 이름은 시제(市制) 이전(以前)의 한문풍(漢文風) 명칭(名稱)이었습니다.
<해상록(海上錄)>에 나오는 왜국(倭國)의 지명(地名)을 원용(援用)하면, ‘下關’(しものせき; 시모노세키)라는 이름도 고칭(古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유구(悠久)한 세월(歲月)에 따라 지명(地名)의 유래(由來)는 다양(多樣)하므로, 하나의 지역(地域)을 지칭(指稱)하는 데에 복수(複數)의 이름이 사용(使用)되었던 사례(事例)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下關條約’(하관조약)이든 ‘馬關條約’(마관조약)이든 둘 다 옳은 표현(表現)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해상록(海上錄)>에 등장(登場)하는 ‘上關’(상관)과 ‘下關’(하관)의 지리적(地理的) 위치(位置)를 확정(確定)하는 것은 금후(今後)의 연구과제(硏究課題)이므로, 회원(會員) 여러분도 참여(參與)하시면 좋겠습니다.
첫댓글 정확히는 알 수가 없습니다만, 下關條約’(하관조약)=馬關條約’(마관조약) 이라는 명칭에서 말과 해당지역은 말과 관련있었던 지역일 가능성이 높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죠. 말 이야기는 많이 나왔었죠... 남쪽에 있고, 말이 있고...
아마도 중국대륙에는 "상관(上關) 중관(中關)"은 없다고 보는 모양이시군요. 그럴까요? "하관(下關)"이라고 해서 그 하나뿐일까요? 2곳? 3곳? 아니 7곳이라면요? 그렇다면 "상관(上關)"은 1곳뿐일까요? 이것도 몇 곳이나 되지 않을까요?
<해상록(海上錄)>에는 上關(상관)과 下關(하관)이라는 왜국(倭國)의 지명(地名)이 나오며, 그 당시의 그곳들을 각각 하나로 특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정희득(鄭希得)이 기록한 지명(地名)을 구체적으로 찾아내야 합니다. 대충, 대략이 아니고요...
따라서, 그곳들을 16세기 말엽 중국 대륙의 어디로 각각 비정할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연구하자는 뜻입니다.
왜국(倭國)의 경도(京都) 곧 왜경(倭京)에 가까운 순서대로 上關(かみのせき), 中關(なかのせき), 下關(しものせき)이 설치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 일행(一行)도 지나간 길이라고 합니다.
조선(朝鮮)에서 왜경(倭京)으로 출입하는 "교통의 길목"이므로, 이들은 매우 중요한 지명(地名)이라고 봅니다.
또한 절대로 간과하면 안되는 것은...
왜인(倭人)은 下關(하관)을 시모노세키(しものせき)라고 훈독(訓讀)하며 上關(상관)을 카미노세키(かみのせき)라고 훈독(訓讀)한다는 사실입니다.
한자(漢字) 표기가 똑같다고 해서, 모두 다 똑같은 지명(地名)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