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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소년 시절의 너`라는 영화가 재개봉했다. 아무런 기대 없이 관람했지만, 여운은 굉장히 짙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배우들의 연기력과 더불어 학교폭력의 실태를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주인공은 같은 반 학생들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하지만, 부모도 선생님도 경찰도 어른들은 이 학생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결국, 괴롭힘을 당하는 학생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거나, 친구에게 의지할 뿐이다.
예나 지금이나 학교폭력은 끊이질 않고 있다. 변한 게 있다면, 과거에는 불량학생이라 불리는 이들이 가해자로 인식됐으나, 최근에는 모든 학생이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이 다르다. 특히 상류층 가정의 학생들이 가해자가 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따라서 학교폭력의 원인은 불우한 환경도 열등감도 아니다.
가해자의 대부분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다. 장난으로 한 욕설과 폭력은 한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망가뜨리는 파괴력을 가지고 있지만, 가해자 부모들은 `우리 애는 그럴 리 없어요`라며 두둔하며 학교폭력 처분에 대해 불복한다. 안타까운 것은 공부 잘하고 명문 학교일수록 가해자의 부모가 돈이 많고 지위가 높은 경우가 많아서 오히려 피해자가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결국, 가해자는 타인에 대한 아픔에 무감각하고 부모가 뒤처리를 해주었기 때문에 죄의식을 찾아볼 수가 없다. 운이 나빴다는 식으로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기에 급급해한다. 나중에는 이러한 엘리트라는 사람들의 자녀들이 다시 사회의 지도자로서 지위를 누리게 되어 사회를 이끈다는 사실에 씁쓸하기만 하다.
그렇다면 피해자는 제대로 보호받을 수 있을까? `소년 시절의 너`라는 영화 속 피해 학생은 어른을 믿지 못한다. 어른들은 세상과 타협하기 때문이다. 가해자가 순순히 자기 잘못을 받아들이면 다행이지만, 사회적 지위가 높은 부모는 학폭위를 마음대로 주무르고 나도 피해자라며 맞고소를 한다. 특히 소송 중에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분리되지 않아서 피해자는 전학이나 자퇴, 극단적 선택을 하는 일도 있다.
실제로 학교폭력 피해 학생의 50%가 어른들이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는 설문 결과가 있다. 정치, 경제 등 사회를 움직이는 위정자들의 미성숙한 양심은 학교폭력 피해 학생들의 불신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어른들은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상대 후보에게 흠집을 낸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상대의 단점을 부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학생들도 심각한 경쟁 구도 속에서 우월감을 얻기 위해서는 폭력을 주도해야 하고 가해자 외에도 함께 즐기거나 방관하여 대리만족을 느끼는 이들도 참여하면서 학교폭력 피해자는 더욱 나락으로 떨어진다.
결국, 학교폭력은 학교라는 기관에서 발생한 범죄이다. 당연히 1차적 책임은 해당 학교와 교육부에 있다. 하지만, 피해자는 학교를 믿지 못하고 어른을 믿지 못한다. 도움을 요청해 봤자 일이 더 커지거나 이야기해도 소용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선뜻 말문을 열지 못하고 있다. 학교폭력 관련 기관이 제 기능을 못 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모습을 보고 자란다. 학교폭력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어른들 문제가 아니라, 아이들 문제로 보기 때문이다. 학교폭력을 바라보는 어른들의 시선과 방향이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학교폭력으로 피해를 보았거나 목격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교육하고 피해 학생들이 마음 놓고 이야기할 수 있도록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는 세월이 흘러 교사가 된 피해 학생이 지금까지의 어른들의 잘못을 범하지 않고 학생들에게 끈질긴 관심을 가지는 모습을 보여 주며 끝이 난다. 이처럼 부모의 한 사람으로서 학교폭력이 영원히 사라지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