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왜 단식을 하며, 무엇을 위해 하며, 누구를 위한 단식인가?
구약성경에서 ‘단식’은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판관 20,26-28), 회개의 표시로(요엘 2,12),
죽은 이를 위한 애도의 표시로(2사무 7,6) 행해졌으며,
이사야는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단식(이사 58,6-7)에 대해 언급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전에 광야에서 단식하셨으며(마태 4,2), 사도의 임명이나 파견 때
행해졌고(사도 13,2-3;14,23), 마태오 복음사가는 단식할 때의 바른 자세(마태 6,17-18)에 대해 언급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단식 논쟁을 통해서, ‘새로운 때’가 도래했음을 선포하십니다.
곧 ‘신랑이 와 있는 때’가 도래한 것입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마태 9,15)
이는 단식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지금은 단식할 때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신랑이 와 있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바리사이들과 요한의 제자들은 <레위기> 16장 34절에 따라, 구약의 속죄일을 지키기 위해 단식을 했습니다.
곧 잘못을 벗고 정결해지기 위해 1년에 한 번씩 단식했습니다.
그리고 열심한 바리사이들은 신심 행위로 1주일에 월요일과 목요일, 두 번씩 단식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은 단식을 하지 안았고, 요한의 제자들은 그 이유를 물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단식을 거부하신 것이 아니라 지금은 그 '때'가 아님을 말씀하시면서,
그 이유를 아무도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신랑’이라고 부르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혼인잔치의 비유’(마태 22,1-14)와 ‘열 처녀의 비유’(마태 25,1-13)에서
당신 자신을 ‘신랑’으로 암시하셨습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신랑’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요한 3,29).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새 천'과 '새 포도주'에 비유하여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태 9,16-17)
그러니 이제는 ‘새 포도주를 담을 새 부대’가 필요합니다.
새 부대는 새 시대를 살아가는 ‘변화된 삶’을 의미합니다.
곧 새 포도주를 담을 ‘변화된 삶’이 필요합니다.
한편,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습니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마태 9,17)
사실 이 비유들은 ‘새 것’(헝겊, 포도주)과 ‘묵은 것’(옷, 포도주 부대)의 부조화를 강조하면서,
신랑이신 예수님의 때는 단식이 적합하지 않는 특별한 순간임을 말해줍니다.
이는 마치 유다이즘과 그리스도교 사이의 비연계성을 보여주는 듯하면서도,
마태오 복음사가는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마태 9,17)는 이 말은 붙임으로써 다른 전환을 가져다줍니다.
곧 ‘묵은 것’을 잃기를 원하지 않으며, 오히려 ‘묵은 것’이 ‘새 것’에 의해서만 보존된다는 것을 제시해줍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태 9,17)
주님!
제 마음이 당신의 부대이오니, 사랑의 술을 부으소서!
제 삶이 당신 사랑의 잔이오니, 술잔 가득 사랑을 채우소서.
취해, 기뻐 흥겨우리이다.
온통 젖어, 향기 품으오리이다.
만나는 이마다 축복과 기쁨, 생명과 진리, 그득 담아 건네오리이다.
오늘, 저의 삶이 화들짝 달구어지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