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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27일 연중 제30주간 수요일
제1독서 : 로마 8,26-30
복 음 : 루카 13,22-30
그때에
22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하시는 동안,
여러 고을과 마을을 지나며 가르치셨다.
23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24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5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26 그러면 너희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27 그러나 집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하고 너희에게 말할 것이다.
28 너희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가 하느님의 나라 안에 있는데
너희만 밖으로 쫓겨나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29 그러나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30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코로나로 인해 힘든 사람이 많습니다.
특히 고용 불안으로 많은 이가 불안 속에 있습니다.
이 형제님도 점점 어려워지는 회사 상황에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이들 교육비를 포함해서 아직도 지출할 것이 많았고,
그러다 보니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노후 자금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실직은 절대로 이루어지면 안 되었습니다.
형제님께서는 매일 성당에 가서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자신이 실직되지 않기를 그리고 회사가 잘 되기를,
그래서 우리 가족에 불행이 닥치지 않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이 기도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형제님의 바람대로 되었을까요?
아쉽게도 형제님은 실직하셨습니다. 그러나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매일 기도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기도 바치는 시간이 행복하게 느껴졌고,
하느님께서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실직했어도 좌절하지 않고 계속해서 기도하며 희망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곧바로 취업하게 되어 기쁘게 지금을 살고 계십니다.
기도는 자신이 원하는 것 이상의 선물을 얻게 합니다.
그러나 원하는 것만을 보다 보니 그 이상의 것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순간에서도 기도를 멈춰서는 안 됩니다.
기도를 통해 불가능한 것도 가능한 일이 되며,
내가 원하는 것 이상의 필요한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라는 어떤 사람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라고 하십니다.
좁은 문이란 어떤 문을 말하는 것일까요? 쉽게 들어갈 수 없는 문입니다.
특히 불의를 일삼는다면 절대로 들어갈 수 없는 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기 위한 불의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물론 그 불의로 자신의 욕심은 충분히 채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구원의 문으로 들어갈 자격은 사라지고 맙니다.
주님의 일을 했다면서 주님께 매달릴 수 있습니다.
“저는 성당에서 열심히 봉사활동을 했습니다.”,
“건축금도 성실하게 봉헌했습니다.”,
“주일미사에도 몇 번 빠지지 않았습니다.” 등등의 말을 하면서
주님께 구원의 문에 들어갈 수 있도록 간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했다는 그 모든 주님의 일이 주님의 영광이 아닌,
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다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외면하실 것입니다.
이 문으로 들어가는 데 필요한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어떤 순간에서도 멈추지 않는 기도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중요한 도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 기도를 통해 우리는 주님을 알게 되고, 주님처럼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를 긴장시키십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루카 13,24)
예수님께서 "구원받을 사람이 적습니까?"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하십니다.
구원이 좁은 문의 심상과 직결되는 듯 들리지요.
"좁은 문"은 여러 각도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좁은 곳을 통과하려면
존재적으로 군더더기 없이 단촐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외적으로 세상 것 다 움켜쥐고, 또 내적으로도 탐욕이 가득해서는
그렇게 될 수 없으니 선택과 집중이 필요해 보입니다.
물리적으로 소유한 많은 것을 몽땅 다 끌어안고
하느님 나라의 문을 통과해 보려는 이,
탐욕과 이기심에 정신과 영혼이 잔득 비대해져 도무지 비워지지 않는 이,
고통과 희생은 회피하고 설렁설렁 편하게만 가고 싶은 이에게
어쩌면 하느님 나라의 문은 지나치게 좁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모른다."(루카 13,25.27)
게다가 집주인은 정해진 때가 오면 가차 없이 문을 닫아버리고,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며 주인과 스친 인연을 내세우는 이들에게
주저 없이 "모른다" 하는 분이십니다.
힘써서 좁은 문을 통과해 들어오는 이들은 반기지만,
너무 거대하고 둔중한 자아 때문에
그 문을 통과할 수 없는 이들에게는 냉정하기까지 하십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구원에 이르는 길을 차근히 알려 줍니다.
"미리 정하신 이들을 또한 부르셨고, 부르신 이들을 또한 의롭게 하셨으며,
의롭게 하신 이들을 또한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로마 8,30)
하느님께서 구원하시려는 이들을 미리 뽑으시고 정하십니다.
친히 그에게 당신 목소리를 들려주시어 부르시고, 믿음의 은총을 내려 주시지요.
그가 기꺼이 믿음으로 응답하면 그 믿음을 의롭다 인정해 주시고,
그에게 당신 영광을 나누어 주십니다. 구원의 여정이지요.
누구도 세상에 펼쳐진 모든 길을 욕심껏 다 갈 수는 없습니다.
어느 길을 선택한다면 다른 길은 포기했다는 표현이니까요.
구원이 "좁은 문" 너머에 있다면
그 문으로 이어지는 길을 선택하여 그 여정에 집중해야 합니다.
버려야 할 것과 지켜야 할 것의 선별은 그 여정에서 이루어지기 마련이지요.
"성령께서는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로마 8,26)
이 여정 안에서 부르심과 믿음, 의화가 이어집니다.
주님의 선제적 주도권과 우리의 응답이 없으면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어렵지요.
영적 여정 안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우리를 이끄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우리를 대신해 간구해 주시는 성령과 함께 이 과정을 거치면서
영혼은 더 단촐 해지고 존재는 더 경쾌해집니다.
구원에 알맞게 정화되고 성화되어 설령 문이 없어도 통과하게 되지요.
구원입니다.
"하느님이 복음을 통하여 우리를 부르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차지하게 하셨네."(복음 환호송)
하느님께서 구원으로 건너가는 좁은 문을 지날 수 있도록
우리에게 복음을 건네셨습니다.
복음에는 우리가 가야할 길의 내용과 방향이 적혀 있지요.
어떤 격려는 기쁘고 어떤 가르침은 버겁지만,
무지하고 나약한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차지하기 위해
무엇을 선택하고 어디에 집중해야 할지 세세히 알려 주십니다.
각자의 구원 여정에 놓인 "좁은 문"을 들어갈 수 있도록
말씀 안에서 길을 찾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그 문이 좁은 이유는 저마다 다를 것이고,
왜 좁은 문인지도 자신이 제일 잘 알 겁니다.
우리를 위한 간구를 그치지 않으시는 성령께 의지하여,
좁은 문을 향해 힘써 나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구원 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조욱현 토마스 신부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23절)
얼마나 많은 사람이 구원받겠느냐는 질문에
예수께서는 어떻게 해서 구원을 받을 것인지가 더 중요함을 말씀하신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24절)
그래서 이렇게 동문서답 같은 대답을 하셨다.
어떻게 해야 구원받는 것인지 아는 중요하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생명으로 가는 문은 왜 좁다고 하시는가?
그리고 들어가려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바르고 더럽혀지지 않은 믿음과
흠 없는 도덕성을 갖추어, 의로운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렇다면 우리 중에 누가 이런 사람에 해당될까?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하셨다.
그 길을 가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24절) 하셨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수적으로 적다 많다가 아니라
질적으로 어떤 사람들이냐를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인으로 선택받았다.”
혹은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해서
다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세례 받은 자답게 살고, 있는 힘을 다해서
신앙생활에 충실해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26절)
세례를 받고 성당에 와서 미사 봉헌을 하고 복음의 가르침을 듣기는 하나
성경의 진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 삶은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를 갈며 비통해할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모른다고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하셨다.
세례를 받는 것으로서 구원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따라 십자가를 지고 부름을 받은 자로 살아야 한다.
예수께서 오늘 복음에서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25.27절) 하신 이유는
“불의를 일삼았었다.”라는 데 있다고 하신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함으로써 참으로 하느님을 아는 자녀들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고 불의를 일삼게 되면
그 하느님 백성의 자리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 뜻을 올바로 실천한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질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다.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29절)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가 하느님의 나라 안에 있는데
그들만 밖으로 쫓겨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지 않도록 항상 깨어 있는 삶을 살도록 하여야 한다.
좁은 문은 하느님과 이웃을 받아들이기 위한 십자가 고통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좁은 문’을 선택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복음 본문의 흐름으로 보면 좁은 문은 아주 분명합니다.
우선 예수님은 안식일을 설명하시며
‘열여덟 해 동안 허리를 펴지 못했던 여인’을 고쳐주십니다.
저는 열여덟이 세속-육신-마귀의 합쳐진 숫자라 해석했습니다.
세속-육신-마귀가 인간을 땅을 보는 짐승처럼 살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그녀를 ‘말씀과 은총’으로 구원하셨습니다.
그녀의 병이 나았다고 말씀하시고 안수로 은총을 주셨습니다.
그다음 ‘하느님의 나라’를 비유로 말씀하시며
‘겨자씨와 누룩’으로 표현하십니다.
겨자씨는 말씀과 같고 누룩은 은총과 같습니다.
누룩은 밀가루 서 말 속에 넣어집니다.
세속-육신-마귀로부터 자유롭게 만드는 은총의 역할입니다.
그리고 겨자씨가 자라나면 새가 날아와 쉬게 할 휴식처를 제공합니다.
사랑의 실천입니다. 그리스도의 모범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진리의 삶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진리와 은총은 그 사람 안에서 자신을 죽이고
이웃을 위해 살게 만들어 짐승의 삶에서 자유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 말씀에서 ‘좁은 문’은
‘겨자씨와 누룩’ 때문에 당해야 하는 ‘십자가의 고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누룩으로 자기 자신이 죽는 것도 고통이요,
이웃을 위해 겨자나무가 자라나게 하는 것도 고통입니다.
폴 브랜드는 선교사이고 의사입니다.
루이지애나주에서 의사로 일할 때 한 엄마가 딸아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 아이의 발엔 붕대가 감겨있었습니다.
폴은 아이가 아프지 않게 붕대를 하나하나 풀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남의 일인 양 진료실 여기저기를 둘러보는 것이었습니다.
붕대를 다 풀었을 때 폴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발바닥에 종양이 생겨 발이 썩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이의 엄마가 어느 날 집에 돌아왔는데 아이는
비닐 위에 빨간색으로 소용돌이를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낙서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가까이 와서 보니
아이는 자기 손가락에서 나온 피로 그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입을 보니 치아에도 피가 묻어있었습니다.
아이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손가락을 물어뜯은 것입니다.
아이의 한 손가락은 그렇게 이미 짧아져 있었습니다.
발에 난 상처는 못이 박힌 줄 모르고 돌아다니다가 썩은 것입니다.
남편은 이런 ‘괴물’을 어떻게 키우느냐며 집을 나갔습니다.
결국, 그 아이는 얼마 뒤 양발과 손을 절단해야 했습니다.
‘나병’에 걸린 것입니다.
상처가 났는데 아프지 않으면 자신의 몸이 망가집니다. 성장할 수 없습니다.
나병균이 손과 발, 눈 등에 영향을 주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나병균은 그저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것뿐입니다.
눈이 이물질이 들어가면 고통을 느껴 깜빡이거나 이물질을 빼내야 하는데
눈이 곪고 썩어 들어가도 감각이 없으니 눈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기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발에 뼈가 드러나도 그 뼈로 걷고, 불에 데면서도 손으로 뜨거운 것을 짚습니다.
처음은 고통을 느끼는 것이 특권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 때문에 자신이 망가지는 것을 봅니다.
그렇게 고통이 없는 이 병은 아이러니하게도
이 지상에서 체험될 수 있는 가장 큰 지옥의 고통이 됩니다.
폴 박사가 해외에서 나병 환자를 위해 봉사하고 미국으로 돌아왔을 때였습니다.
심하게 지쳐있는 데다 몸에 열이 난 상태로 강연까지 소화해야 했습니다.
간신히 기차를 타고 강연장까지 가서 연설하고 집에 돌아와 누웠을 때는
발에 아무 감각이 없었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바늘로 발을 찔러보았더니 아무 감각이 없었습니다.
더 깊이 찔러도 아프지 않았습니다.
폴 박사는 절망감에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의사가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면 환자를 치료해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손에 감각이 있어야 치료해 줄 수 있고 눈이 보여야 하는데
나병에 걸렸다면 이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할 뿐입니다.
음날 다시 바늘로 찔렀는데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따끔했습니다.
몸이 안 좋은 상태로 기차를 타고 왔는데 한 다리가 눌려서
혈액순환이 되지 않아 일시적으로 마비가 되었던 것입니다.
폴 박사는 고통이란 것이 그렇게 큰 은총인지 그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참조: 『고통이라는 선물』, 폴 브랜드와 필립 얀시, 두란노서원]
다미안 신부님도 나병 환자들만 모아놓은 섬에 들어가
그들이 하느님의 자녀임을 알려주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주받은 삶을 사는 그들은
신부님의 사랑을 그저 하나의 동정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신부님도 나병이 걸리고 자신들을 형제라고 부르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는 신부님의 사랑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정말 많은 나병 환자들이 주님을 받아들입니다.
만약 다미안 신부님이 본래 나병 환자였다면
그저 환자에 불과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인이 ‘감사하게도’ 나병에 걸려
그들의 고통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은총과 진리를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고통받으신 것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만 보이게 하신 것이라면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확신할 수 있을까요?
우리도 이웃을 위해 고통을 받을 준비를 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데 왜 아파야 해요?”라고 묻는다면
사랑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여 나를 봉헌하는 것도 고통이어야 하고
또 이웃에게 내 피를 흘려주는 것도 고통이어야 합니다.
고통이 없으면 누룩도 밀가루 서 말을 부풀게 할 수 없고
겨자씨도 나무로 자라지 못합니다.
따라서 고통의 신비를 아는 사람만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이웃을 그리스도처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고통을 회피하는 사람이 아니라
고통 때문에 사랑이 가능함을 믿는 사람이 됩시다.
그래서 그 은총의 고통을 할 수 있는 한 조금 더 받으려고 노력합시다.
딸아이가 나병에 걸린 것을 보고 도망치는 아버지처럼 되지 맙시다.
좁은 문, 십자가의 길.
이는 주님을 받아들이기 위해 받아야 하는
고통, 이웃을 위해 받아야 하는 고통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 좁은 문만이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용산 성당에 있을 때입니다.
성당은 언덕 위에 있었습니다.
행정구역상 성당의 대부분은 용산구에 있었지만
수녀원이 있는 곳의 일부는 마포구에 속해 있었습니다.
지리산이 경산도와 전라도의 경계에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성당이 두 개의 행정구역에 속해 있는 것은 처음 보았습니다.
애리조나 피닉스에 홍보를 갔었고, 본당 신부님의 배려로
‘앤텔롭 캐넌(Antelope Canyon)’엘 다녀왔습니다.
그랜드 캐넌이 지상에 있는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한다면
앤텔롭 캐넌은 땅 아래에 아름다운 경치가 있었습니다.
경치를 보려면 땅 아래로 내려가야 했습니다.
빛과 계곡이 조화를 이루면서 신비로운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앤텔롭 캐넌을 보면서 색다른 경험을 하였습니다.
앤텔롭 캐넌은 유타와 애리조나 주의 경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타와 애리조나는 시차가 1시간 있었습니다.
시간의 경계에 있는 체험이었습니다.
유타 주에 속한 앤텔롭 캐넌에서는 분명 11시였는데
애리조나 주에 속한 입구는 10시였습니다.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은 우리가 정한 약속이라는 것을 실감하였습니다.
어제 예수님께서는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의 나라를 말씀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희망은 영원한 생명을 향한 이정표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로 사랑하는 딸을
가슴에 묻어야 했던 자매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33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날의 일이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른다고 합니다.
카세트테이프를 바닥에 떨어트린 청년이 카세트테이프를 줍는 과정에서
그만 사고를 내고 말았다고 합니다.
꿈속에서 사랑하는 딸이 환한 빛을 향하여 올라가는 모습을 보았다고 합니다.
슬픔은 컸지만 청년의 실수를 용서하였고,
일상의 삶으로 돌아 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땅 아래에 있는 계곡이 빛을 만나면서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주었듯이,
우리는 신앙을 가지면서
이 세상에서 천상의 삶을 체험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은 무한 경쟁의 수레바퀴를 벗어나서
나눔과 희생, 겸손과 인내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실의 삶이 우선인 사람에게는
하늘나라로 가는 길이 너무 좁게 느껴질 것입니다.
성공, 돈, 명예, 출세가 우선인 사람에게는
하느님 나라는 먼 훗날 가도 되고, 안가도 할 수 없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잠시의 쾌락과 경쟁에서의 승리 때문에
기도와 미사는 나중에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하느님 나라는 아주 먼 나라의 이야기 일 것입니다.
예전에 맹인가수 이용복씨가 부른 노래가 있습니다. 제목은 어린 시절입니다.
“진달래 먹고 물장구 치고 다람쥐 쫓던 어린 시절에
눈사람처럼 커지고 싶던 그 마음 내 마음.
아름다운 시절은 꽃잎처럼 흩어져 다시 올 수 없지만 잊을 수는 없어라.”
하느님 나라는 이렇게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고,
추억을 마음에 담고 사는 사람에게는 결코 좁은 문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하늘나라는 사법고시 보듯이 공부를 해서 가는 곳은 아닐 것입니다.
월등한 체력과 실력이 있어야 가는 곳은 아닐 것입니다.
엄청난 재력이 있어야 가는 곳도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뛰어나고, 능력이 있고, 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더 좁게만 보이는 곳이 하늘나라일지 모릅니다.
하늘을 두려워하며 섬기는 사람, 가족을 사랑하고 돌보며,
이웃과 더불어 평화롭게 지내는 사람에게
하늘나라는 결코 좁은 문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구원의 문을 열수 있는 열쇠는 희생과 나눔입니다.
십자가와 사랑입니다. 믿음과 희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와 사랑으로 천국 문을 여셨습니다.
믿음과 희망으로 천국 문을 여셨습니다.
희생과 나눔으로 천국 문을 여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길은 편하고 좋은 길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길은 비록 좁고 험하지만 누구나 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미리 정하신 이들을 또한 부르셨고
부르신 이들을 또한 의롭게 하셨으며,
의롭게 하신 이들을 또한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