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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소천 작사 나운영 작곡
금강산 동요
한상억 작사 최영섭 작곡
홍혜경, 플라시도 도밍고 노래
그리운 금강산
조수미 노래
2004년 7월
금강산 당일관광 시행했을 때
사대부중 12회와 사대부고 9회
구구회(九鳩會)의
내 후임 회장 안광흔 외
6명(계 8명)과
트라제를 운전하여,
고성 대우금강산콘도에서 1박 하고
다음날 입국 수속을 한 후,
버스로 구룡연 코스
온정각에 내려,
여자 안내원의 제지로
내금강 상팔담 중
8담~4담까지만 보고,
하산하여
옥류관에서
평양 냉면과 막걸리를 먹고,
버스에서 삼일포를 보고
출국 수속을 한 후
고성에서 귀경 도중에
설악산 등산하다
운전기사와 함께
추락 사고로 입원한
유니더스 사(Unidus,
You need us.
세계 1위 콘돔회사)의
김덕성 사장(사대부고 9회)을
문병하러 갔는데
이미 퇴원하여 서울로 간 후였다.
미네소타대학을 졸업한
서울대학교 가정의학과 과장
허봉렬 박사(사대부중 12회)가
미국의 저명한 흉부외과 전문의를
한국으로 초빙하여,
갈비뼈가 거의 모두 부러진
김덕성 사장이 치료받아
소생했다.
.
목란관!
이곳은 금강산 관광의 첫날 코스인
구룡연의 출발지에서
첫번째 만나게 되는 명소이다.
온정각에서 버스를 타고
등산로 입구에서 내려
조금만 올라가면 만나게 되는데,
과거 북측의 고위관리들의
휴양소 내지는 별장 정도로
쓰였던 곳이라 한다.
구룡연 1 코스(약 4.3km)는
주차장 - 목란관 - 앙지대 -
삼록수 - 금강문 - 옥류동(연주담) -
비봉폭포 - 구룡폭포 - 구룡대(상팔담) -
동일코스로 약 4시간 정도 소요된다.
비봉폭포!
봉황새가 날개를 펴고
꼬리를 휘저으며
하늘 높이 날아 오르는 것 같다 하여
그리 불린다고 하는데...!
구룡폭포(높이 74m,
길이 84m, 너비 4m)!
구룡폭포 아래 있는 웅덩이를
구룡소라고 하는데
이곳에 9마리의 용이 살았다고 한다.
그 9마리의 용이
이 폭포를 타고
하늘로 날아 올랐다고 해서
구룡폭포라고 불리는데
우리나라 3대 폭포
(설악산 대승폭포,
설악산 대승폭포
대승폭포가 위치한
남설악 지역 대부분은
중생대 백악기의
화강암류가 분포되어
주변에는 인제, 원통, 양양으로
이어지는 단층선을 따라 발달한
단층의 수직 낙하형 폭포이다.
급사면과 단애에
크고 작은 폭포가 분포하고
암석들이 풍화작용과
침식작용을 받아
자연적으로 형성된 암석들이
수려한 경관을 꾸미고 있다.
개성의 박연(朴淵)폭포
박연폭포는
황해도 송도(개성) 박연리에 있는
폭포로 천하절경으로 소문나 있다.
박연폭포를 더 유명하게 한 것은
조선의 명기 황진이가 지은 시
때문이 아닐까 한다.
一派長川噴壑礱
(일파장천분학롱)
한 갈래의 긴 물줄기 뿜어 나와
골짜기를 휘돌고
龍湫百仞水叢叢
(용추백인수총총)
용이 사는 늪은 백길이나 되어
물은 모이고 또 모이네
飛泉倒寫疑銀漢
(비천도사의은한)
날아온 샘물이 거꾸로 쏟아지니
은하수 같기도 하고
怒瀑橫垂宛白虹
(노폭횡수완백홍)
성난 폭포 가로지르니
흰 무지개 곱게 드리웠다.
雹亂霆馳彌洞府
(박란정치미동부)
천둥이 소리 질러 달리니
우박은 어지럽게
넓은 골짜기를 메우고
珠春玉碎澈晴空
(주춘옥쇄철청공)
구슬 절구에 옥 빻으니
맑은 하늘이 더욱 환하다.
遊人莫道廬山勝
(유인막도여산승)
풍류객들이여 말하지 말라
(중국의) 여산이 났다고
須識天摩冠海東
(수식천마관해동)
모름지기 알 것은
천마산이야말로 해동의 으뜸일세.
다시 풀어 해설하면-,
한 갈래의 긴 물길이 뿜어져 나와
골짜기에 떨어지니
맷돌이 돌아가듯
물길을 휘감아 돌아가듯
물결을 휘감아 돌아가고
용이 사는 듯 싶은
백 길이나 되어 보이는 늪에는
물이 모이고 또 모인다.
날아온 샘물이 거꾸로 쏟아지니
은하수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
성난 폭포가 가로지르니
흰 무지개가 곱게 드리운 것
같기도 하여라
폭포수는 마치
천둥이 소리치는 것 같으며
물방울은 우박 떨어지는 것 같아
골짜기를 메운다.
폭포가 구슬 절구에 떨어지니
부서진 옥가루들은
허공을 치솟는다.
풍류객들아 여산이 좋다고
말하지 말아라
천마산 박연폭포야말로
해동에서 으뜸이란다.
어느 날 황진이가
화담(서경덕)에게 가서 아뢰기를
"송도에 삼절(三絶)이 있습니다"라고 하니
화담이 "삼절이라니
그게 무엇인가?" 하자
"박연폭포와 선생님과
저입니다" 했더니
선생이 피식 웃었다고 한다.
<성소부부고 3권>
*삼절에서 절(絶)은
'끊을 절'이지만
여기에선 '으뜸 절',
'빼어날 절'로 읽는다.
황진이(黃眞伊)는
일개 기생인데
어떻게 하여
송도삼절에 들어갈까?
그는 당대 내로라는
남자 대장부들을
패가망신시킨 절세 가인이었다.
일찍이 상사병으로 죽은
동네 총각,
그의 상여가
황진이 동네 어귀에서
움직이지 않자
그녀의 속치마를 벗어
넣어줬더니
비로소 상여가 움직였다는
일화는 물론
부운 김경원, 양곡 소세양,
화담 서경덕, 재상 송순,
종실 이언방, 벽계수 이창곤,
30년 면벽을 파계한 지족선사,
명문 재생가 이생 도령,
선전관 명창 이시종이
그녀의 치마폭에
빠져 헤어나질 못했다.
뿐만 아니라
그녀가 죽은 후 출생한
백호 임제의 일화도 유명하다.
그는 황진이의 시를 흠모하였는데
평양감사가 되어
임지로 가는 도중
황진이의 묘를 찾아
술 한 잔을 따라놓고 읊조렸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는다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허 하노라.
그는 천기(賤妓)의 무덤에
치제를 드렸다는 구설에 몰려
벼슬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죽은 황진이가
산 평양감사의 목을 친 격이다.
이백이 지은
'망여산폭포(望麗山瀑布)'의 한 구절
飛流直下三千尺
(비류직하 삼천척)
물줄기 날듯이 쏟아지니
그 길이 삼천 자
疑是銀河落九天
(의시은하 낙구천)
마치 은하수가
구천으로 쏟아지는 듯
황진이가 이 싯귀를
박연폭포를 바라볼 수 있는
용바위에 머리카락으로
새겼다고 전해 온다.
개성 박연폭포
좌측의 바위가 용바위.
(갈수기의 사진이어서 수량이 적다.)
<사진 자료, 통일뉴스>
개성 대흥산 박연폭포중
하나이다.
매끈한 각선미를 자랑하는 절벽!
그 절벽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는
마치 미끄러져 내리는 옥구슬 같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듯하다.
구룡대(상팔담)는
구룡동에 있는 바위등판으로
골짜기가 한눈에
안겨오는 곳이라 하여
구룡대라고 불리우는데,
상팔담은 골짜기 개울 층층이
잇달린 여러 개의 웅덩이 중에
큰 8개를 뜻하는 곳으로
선녀와 나뭇꾼 이야기의
등장무대이기도 하다.
금강문!
이 금강문을 지나야
금강산 맛이 난다고 한다.
외금강에서 내금강으로 가는
바위 틈 사이 길이 난
금강문을 지나
경사가 가파른 할딱고개를 오르면
펼쳐지는 수려한 계곡.
옥류동으로 이어진다.
계곡을 안전하게
건너게 해주는 다리가
암반과 찰떡같이 붙어있는 모습이
안정감을 준다.
삼라만상이 펼쳐지고 있는
금강산 능선의 봉우리들!
하나둘씩 일만이천봉을 세어보자.
금강산은 주봉인 비로봉을 비롯해
해발 1,500m 이상의 거봉이
10개에 이르며
1,000m 이상의 준봉은
무려 60여개나 된다.
크고 작은 봉우리를 모두 합치면
헤아리기 어려워
선조들은 1만2천봉이라
불렀다고 한다.
'수정 같은 맑은 물이
누운 폭포를 이루며
구슬처럼 흘러내린다'고 하여
옥류동이라고 불리는 옥류동계곡
능선을 타고 오르는 듯한
모양의 거북바위
어떻게 깊이 들어갈수록
신선의 세상이 열리는 것 같아
산행의 노고를 느낄 겨를이 없다.
객석의 관객들을 향해
금방이라도 공연이 이루어질
셋트가 마련된 무대 같다.
만약! 가을에 이곳을 찾는다면
그 황홀경에 넋을 잃는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듯 하다.
봄 금강산(金剛山)
여름 봉래산(蓬萊山)
가을 풍악산(楓嶽山)
겨울 개골산(皆骨山)
한 공간 한 공간!
한 능선 한 능선!
그냥 눈길이 가벼이 스칠 수가 없다.
창공의 파란 하늘마저
남에서 온 방문객을
두팔 벌려 환영해주는 것 같다.
매끈한 미녀의 각선미를 타고 흐르는
섬섬옥수의 물줄기가
옥구슬이 굴러내리듯
잔잔한 소리를 내면서 흘러간다.
갈증이 심해질쯤 좌판이
등장한다!
삼록수는
물에 산삼과 녹용이
녹아 흐른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물 한모금씩 마실 때마다
십년씩 젊어진다는
전설을 가미한 약수 이야기가
생성된 것이다.
꿈에도 그리던 금강산(金剛山)!
산우들과 함께 가질 못해
아쉬운 심정이나
이 산행기를 통해
꿈 속에서 그려 보시길 바라네...
2007년 10월 5일(금)
오후 7시경,
만나기로 약속된
강원도 고성군 화진포해수욕장 옆
금강산콘도에서
우리 4쌍의 산우들은
반갑게 만났다.
먼저 도착한 한 총장은
화진포아산휴게소를
미리 다녀 왔다고 하면서
내일 함께 동행 할 관광객이
약 4천명이나 되어서
1진은 아침 6시까지,
2진인 우리들은
7시 40분까지만
그 곳에 가면 된다고 한다.
잠시 금강산 관광 일정(계획)에 대해
토의가 있었는데,
이 총장의 메일에 의하면
첫째 날인 내일은
삼일포와 교예공연 관람이며,
모래는 만물상 코스의 산행으로
일정이 짜여져 있다.
다들 비가 올지도 모르니
가능한 어렵게 여기까지 온 이상,
일정을 변경해서라도
첫째 날에 만물상을
보는 게 좋겠다 하여
금강산닷컴과
아산휴게소에
전화를 하여
관광 일정변경에 대하여 물으니
가능할 것이라고 하며,
내일 휴게소에 와서
협의하라 이른다.
콘도 인근에 있는
한 음식점에서
저녁식사를 하면서
강원도에서만 맛볼 수 있는
감자전을 주문 하였더니
약 20분이 걸린다고 한다.
감자전은 만들기 직전에
갈아서 부쳐야 맛이 있다고
제 맛을 볼려거든
기다리라고 한다.
동행한 사모님들은
메밀꽃동동주를,
우리는 쐬주를 한잔 하면서
열무김치가 하도 맛이 있어
주인장에게
고향이 어데냐고 물으니
자기 부인인 주방장 아짐씨가
고향이 전라도 고창이라며,
민박도 함께 운영한다며
이 다음에 행여 오실 때에는
자기집에 꼭 유(留)하시라고 이른다.
속담에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이 있듯이
우린 하루전날
배부르게 식사를 하고
콘도 뒤편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후
숙소로 들어와
이창우 산우 부부가 준비한
밤고구마, 초코렛, 과일 등의 안주에
캔맥주를 한 잔씩하고
들뜬 마음을 삭히고
한 총장의 코고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들으며 잠이 들었다.
< 2007년 10월 6일(토) >
일정 : 아산휴게소-남측출입사무소-
북측출입사무소-온정각-
금강산옥류관(냉면)-
구룡연산행(관폭정, 구룡대)-
온정각-문화회관(교예공연)-
금강원(당고기)-해금강호텔(숙박)
산행장소 : 금강산 < 관폭정 및 구룡대
(구룡폭포와 상팔담) >
소요시간 : 4시간(12:30~4:30)
아침 6시경에 일어나
일출을 보려고
베란다 창가로 나서보니
수평선 멀리 구름사이로
붉은 햇살이 보인다.
구름이 약간 끼어있으나
등반하기엔 아주 좋은
날씨인 것 같았다.
아침식사는 김옥란 여사님이 준비한
고구마와 우유 한잔으로
간단히 때우고
7시 반경에
아산휴게소를 향하였다.
휴게소에 도착하니
벌써 많은 관광객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으며,
1진은 벌써 출발하였고,
2진인 우리 팀은
그중에서도 가장 늦게
도착한 것 같았다.
입출입 명찰을 찾아
목에 걸고서
지정된 관광버스(16번)에 탑승하여
아산여직원(가이드)의
여행 시에 주의할 사항 등을 들은 후
남측 출입사무소를 향하였다.
남측 출입사무소는
공항에 입출국시 가지고 가는
짐 등을 검사하는 곳으로서
현대식 건물로 깨끗하게
잘 시설되어 있었다.
신분 확인과 보안검색 등을
마치고 다시 버스에 올라
북측 출입사무소를 향하였다.
간단한 절차에 불과하였으나
주말 성수기라
많은 인원이었기에
지루하기만 하였다.
작년 8월과 금년 7월중에
와 보았던 통일전망대를 지나
비무장지대(DMZ)를 통과하니
그 옛날 청춘을 불살랐던
군시절이 생각난다.
난, 군 시절에 8사단(오뚜기사단)
수색대에 근무하면서
강원도 철원군 김화 지역의
비무장지대(DMZ)를
1년중 6개월 동안은
수색정찰을 하였었다.
나무가 없고
잡초만 있어
황량하기 그지없는 주변 환경,
안내양이 창가로 보시라 하면서
군사분계선을 통과한다고 한다.
시뻘겋게 녹슨 철길 옆에
꽂아 놓은 오래된 세멘말뚝이
군사분계선을 알리는 표지라고 한다.
강원도 양양에서
이북 원산까지
철길이 나 있다고 하지만,
언제쯤 개통되어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으려나?
아무쪼록 남북이 통일이 되어
보고 싶은 북한에 가고 싶은 산들을
찾아 볼 수 있길 기대해 본다.
몇 분 후에 도착한
북측 출입사무소는
간이막사에
낡은 하얀 천막을 씌워
남측 출입사무소와는
대조적이었다.
다시 신분 확인과 배낭검사 등
형식적인 절차를 마친 다음,
관광객들을 태운 버스들은
열을 지어서
온정리로 향하였다.
띄엄띄엄 서 있는
인민군들의 옷차림이
옛 독립군영화에서 나오는
일본군과 같다.
창에 비해 볼이 큰 모자,
밤색 군복,
부동자세로 하나같이
무표정으로 일관하여
마치 허수아비와도 같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온정리 마을로 들어서니
드넓은 옥수수밭과
간혹 벼를 심은 논들도 보이고,
밭에서 무엇인가를
열심히 일하고 있는
사람들도 보인다.
하나같이 반대편으로
돌아앉아 있었다.
푸석푸석한 머리,
칙칙한 색깔의 옷차림,
검은 피부색이
마치 동남아에서 사는
사람들과 흡사하다.
오른편 바다쪽에
짙푸른 호수가 보이고
멀리 낮으막한
바위산 봉우리가 보인다.
안내양은 호수는 거울과 같다하여
‘감호(鑑湖)’라 하고,
봉우리는 금강산 일만이천봉 중
가장 남쪽에 있는
봉우리의 하나로
옛날에 아홉명의 신선이 놀았다는
전설이 있는
‘구선봉(九仙峯)’이라고 말한다.
군부대 입구 양쪽에는
'자력갱생', '강성대국'이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옛 신륵사 터를 지날 때
건물에 걸려있는 현수막이
그들의 어려움을
대변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온정각 인근에 다달았을 때
삼거리가 있고
좌측은 온정각,
우측은 고성항,
금강산골프장이란
이정표가 눈에 들어온다.
온정각에 도착하여
주변을 살펴보니
겹겹으로 포개진
기암준봉들에 포위되어
산과 바다를 끼고 있는
아름답기가 그지없는 곳이었다.
이름에도 있듯
온정리는 온천 마을이라고 한다.
금강산 관광의 출발점이자
중심지로서
관광객들은 낮 동안
금강산을 관광한 후
부근에 있는 온천과 호텔에서
피로를 풀고
내일의 여정을
준비한다고 한다.
빨간 바탕에
하얀 글씨로
큼지막하게 써서 세워 놓은
'천하제일명산 금강산'이란
간판이 눈에 들어오고,
큰 길 한쪽 편에
고 정몽헌 전회장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어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이곳의 명성과 그의 한을
대변 해 주는 것 같았다.
안내양에게
오늘 꼭 만물상을 보겠다고
일정 변경을 요청하니
애당초의 계획이 변경되어
오늘은 구룡연을 관광한다며
북측음식점에서
식사를 할 경우,
사전에 예약식권(점심, 저녁)을 구입하고,
산행 후 저녁 6시 반에
교예공연을 관람할 사람은
예약을 하시라고 한다.
우린 말로만 들어왔던
평양냉면(물냉면)을 맛볼 양으로
‘금강산옥류관’을 찾아갔다.
깨끗하게 지어진 건물에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아가씨가
반갑게 맞이하며
안쪽 원탁 테이블로
안내를 한다.
벌써 우리들보다 먼저 온 손님들이
안쪽부터 자리를 잡고
주문을 한 후
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비빔냉면을 시식 할까(?)하고
물었더니 여기선
물냉면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약 이십여분을 기다리는 동안,
벽에 설치되어 있는 TV 화면을 통해
“반갑습니다” 라는 노래와 함께
전시효과를 노리듯
금강산의 이모저모와
교예공연 장면 등을 보여준다.
테이블 중앙에 놓여있는
메뉴판을 살펴보니
장어구이, 송이버섯구이,
황구렁이술, 들쭉술 등도 보인다.
먼저 나온 감자전과
한참 만에 나온 물냉면은
역시나 조미료가
가미되어 있지 않은 듯
그야말로 담백 무맛이었다.
현관 로비에 비치 해 놓은
단풍이 붉게 물들은 금강산 그림과
파도가 휘몰아 치는 바다그림을 배경으로
사진촬영을 하고
구룡연을 보기 위해
약속된 12시 20분에
버스에 탑승하였다.
온정각에서 목적지인
구룡폭포까지의 거리는
약 12km,
구룡연 초입 주차장까지는
버스가 운행 할 수 있도록
폭이 좁은 도로가 나 있었다.
도로 옆 좌, 우측엔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옛날에 양곡을 보관하던
창고가 있다 하여
‘창터솔밭’이라고 한단다.
붉으면서도 매끈한 소나무(미인송)들이
주차장이 있는 곳까지
잘 조성되어 있는 숲을 지나자
신계사 절이 나온다.
신계사는 신라 때 세운
유명한 절인데
지금은 일부가 훼손되어
화강암 삼층탑만 남아 있다고 한다.
지금은 남과 북이 화합하여
신계사 대웅보전을
복원시키고 있었고
조계종에서 파견된
남측의 스님들이
불사를 돌보고 있단다.
신계사를 지나니
신계천 물가에 너럭바위가 보인다.
옛날 다섯 고을 원님들이
여기에 모여 풍류를 즐겼다는
오선암(五仙岩)이라 부른단다.
신계천은 맑은 물이
옥성분이 많은 암반과
바위 위로 흐르기 때문에
물 색깔이 푸른 빛을 띄고 있었다.
구룡연 입구 주차장에 내리니,
북한의 앳된
남녀 환경감시원들이 보였다.
그들은 산행중 요소 요소에
서 있으면서
사진도 찍어주고,
같이 얘기도 할 수 있지만,
노상방뇨를 감시하고
자연생태를 훼손하는
행위를 감시하는 역할이
주 임무라고 한다.
신계천 계곡을 따라
잠시 오르니
나무로 만든 목란다리가 나온다.
그 뒤편에 목란관(木蘭館)이란
원통형 건물이 있었고,
길가엔 안주거리, 술 등
음식과 기념품을 팔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화장실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고 한다.
이후부터는 환경감시단
(본인들은 구조대원이라 칭했다)이
감시하고 있어서
소변은 1불, 대변은 2불을
지불해야만 했기에
모두들 이곳 화장실을 들렀다.
목란은 나무에 핀 난이란 뜻으로
백목련과 자목련을 통틀어
목란이라 한다.
북한은 이 목란을 국화로 삼아
금강산을 선전할 때는
목란관을 자주 보여 준다고 한단다.
목란관을 지나
암석으로 잘 정비되어 있는
산책로를 지나니
신계천이 끝나고
옥류동으로 가는 길이 있었다.
옥류동으로 가는 주변 경치는
어느 것 하나 흘려 볼 수 없는
절경이었다.
옛부터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금강을 노래하고 그렸지만
문득 방랑시인 김삿갓의
싯귀가 떠오른다.
'松松栢栢岩岩廻
(소나무, 잣나무, 바위사위로 돌아드니)
水水山山處處奇
(물과 산이 곳곳에 아름답구나!)'
이처럼 쉬운 글자로
절묘한 금강의 경치를 노래한
싯귀가 또 있을까?
옥류동을 향해
골짜기를 오르니
하늘도 푸르고,
산도 푸르고,
계곡물도 아래위로 반사되어
시퍼렇다.
풀벌레 소리와
흐르는 계곡수를 들으며
초록빛보다 더 짙은
맑은 물빛을 들여다보고
우리들이 살아 온 인생을
반추해 보는데
정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옥류동 초입에서
단체로 기념촬영을 하고
흐르는 계곡물을 감상하며
길가 바위에 새겨진
글을 읽고 있노라니
다람쥐가 쪼르륵 달려나와
재롱을 떤다.
사람들을 무서워 않고
먹이를 달라는 듯
1m 옆까지 와서 보챈다.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라
사람과 친숙해 있는 듯 하였다.
한참을 오르니
김일성이 말 한대로
본격적인 금강산을 느끼게 되는
금강문(金剛門)이 보인다.
바위가 갈라져 문이 되었다는
금강문 앞에는
김일성의 교시를 새긴
기념대가 있었다.
김일성이 죽은 지 벌써
오랜 시간이 흘렀건만
북한 땅엔 아직도 김일성을
우상화 하는 기념대와
표지석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으며,
그 곳을 향해
손가락질을 한다거나
잠시 쉬려고 걸터 앉으면
벌금을 물린다고 한다.
금강문을 빠져나오니
경치가 달라진다.
이제부터는 외금강이 아니고
내금강이 펼쳐지는 곳이다.
금문교(金門橋)와
백석담(白石潭)을 지나니
앞이 확 트이면서
넉넉한 계곡이 나오고
물살이 우렁차게 쏟아 붇는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옥류동이
한꺼번에 머리로,
가슴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수정 같은 맑은 물이
폭포를 이루며
옥 같은 구슬로 쏟아져 내린다.
그래서 이 계곡 전체를
옥류동이라 이름 붙여진 것 같다.
옥류동은 사면을 둘러싼
산봉우리들에 의하여
골짜기 풍경이 더없이
황홀하고 아름다웠다.
원체 바윗돌인지라
나무가 날 틈이 거의 없지만,
한 치의 틈과 한 줌의 흙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나무가 서 있었다.
좋은 경치는 눈으로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온 몸과 온 마음으로
흡수하는 것이다.
아니, 흡수라는 것도 아니다.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를
세포 세포마다 통과시키면서
영혼을 씻어내는 것이다.
아니 씻어내는 것도 아니다.
씻으려는 의도도 없이
절로 씻기는 것이다.
명소마다 환상이고
봉우리마다 찬사를 아끼지 못하는
금강산 굽이굽이 절경!
그 가운데서도 이 옥류동은
가장 빼어난 아름다움을 지녔다.
이곳에 오면 사진작가나 화가는
구도를 잡기 힘들어하고
시인은 시상이 떠오르지 않아
고심한다고 한다.
그 무엇으로도 그 아름다움을
표현해 낼 재간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물길을 따라 산모퉁이를 돌아서니
쌍둥이 못이 나타난다.
두개의 구슬을 연달아
꿰어 놓은 듯하다 하여
연주담(連珠潭)이라고 한단다.
연주담을 지나니
언덕 전체가 돌층계처럼 된
한 장의 바위가 나타난다.
이 긴 석벽을 타고
폭포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봉황이 긴 꼬리를 휘저으며
날아가는 모양이라 해서
비봉폭포(飛鳳瀑布)라 한다.
비봉폭포는 금강산의
4대 폭포 중 하나로
길이가 166m,
수직 높이만도 139m에 이른단다.
비봉폭포 오른쪽에는
봉황이 춤을 추고 있다는
높이 20m의 무봉폭포(舞鳳瀑布)가
있었고,
두 폭포 사이에 봉황바위가
날개를 펴고 있었다.
한참을 더 오르니
두 골짜기 물이 모여
격랑을 일으키며
굽이쳐 흐르는 개울이 있었고,
은실처럼 곱게 흐른다 하여
은사류(銀絲流)라 한단다.
여기서부터는 구룡동이라고 한다.
은사류를 건너다 보면서 가다보니
오른쪽으로 구름다리인
연담교가 허공에 걸려 있었다.
연담교는 구룡연과 상팔담을 연결하는
뜻이라고 한다.
우린 연담교를 건너지 않고
곧장 올라가니
우측 협곡에 높이 10여 m쯤 되는
주렴폭포가 보이고,
이 폭포를 지나 조금 올라가니
구룡연의 전망대인
관폭정이 보인다.
온정각에서
약 30리나 되는
골짜기 막바지에 도달한 것이다.
관폭정에 올라보니
앞산 골짜기에
깎아지른 절벽에서
거대한 물줄기가
마치 비단 폭을 온필로 드리운 듯
하얗게 깔려 내리는
웅장하고 장엄한 폭포가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구룡폭포(九龍瀑布)인
것이다.
설악산의 대승폭포,
개성의 박연폭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폭포 중의 하나로서,
아홉 마리 용이 하늘로 오른다는
구룡폭포가 양쪽 산세와 함께
장엄하게 펼쳐진다.
문득 휴정(서산대사)의 시가
생각난다.
知異壯而不秀
(지리산은 장엄하나
수려하지 못하고),
金剛秀而不壯(금강산은 수려하나
장엄하지 못하다),
아~! 서산대사님은
왜? 금강산은 수려하나
장엄치 못하다고 했었나?
아마도 서산대사님은
구룡의 승천을 못 보았나 보다?
직접 와서보니
금강산은 수려하고도 장엄 했었다
(金剛秀而亦壯).
이 산우와 함께 관폭정에서
장엄한 폭포를 배경으로
사진촬영을 하고
구룡폭포의 신비로운 아름다움과
장엄함에 취한 채
상팔담을 보기 위해
길을 재촉하여
왔던 길로 내려와
연담교를 건너
구룡대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깊은 바위 계곡을 끼고
올라가는 바윗길은
아슬아슬하게 위험해 보였다.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만들어
놓은 것이기에
가파른 절벽에 쇠기둥을 박고
철 사다리를 놓거나
디딤돌을 만들어 놓았다.
예전에는 아마도
바위를 끌어안고 기어 올라야 하는
가파르고 험난한 코스로 보인다.
경사도 70~80도나 되는
워낙 가파른 바윗길이라
사다리를 밟고 오르는데도
숨이 목에까지 차 오른다.
14개의 철제 사다리를 기어오르니
전망이 좋은 구룡대가 나온다.
천태만상의 봉우리들이
한 눈에 들어오고
으슥한 계곡이 꽤나 멀리까지
들여다보인다.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구룡대에서 내려다보이는
바위 계곡과 물줄기와 담들은
정말 신비로운 장관이었다.
태고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지닌
이 깊고 긴 계곡에
바위가 둥글게 파인 소(沼)가
십수 개에 이른다.
그 중에서 빼어난 여덟을 골라
이름하여 팔담(八潭)이라 하고
구룡동 윗골에 있다 하여
상팔담이라 하였단다.
상팔담의 물이 흘러
구룡대 밑을 지나
쌍둥이 같은 형제담을 이루고
그 오른쪽으로 가는 홈을 타고
떨어져 내리는 것이 구룡폭포이다.
구룡폭포가 떨어져 만든 구룡연과
상팔담을 합하면
구담(九潭)이라 한다.
이 아홉 개의 못에
아홉 마리의 용(九龍)이 와서
있었다고 한다.
위에서 내려 본 움푹파인
상팔담의 물은
그 무엇과도 비길데 없는
비취색으로
진하고 아름답기만 하다.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했음직한
신비로운 곳이다.
그래서 이곳이
선녀와 나뭇꾼의 전설이 있었던
곳이라 했던가?
나무꾼이 사냥꾼에게 쫓기는
사슴 한 마리를 살려 주고,
그 은혜로 이곳 상팔담에
목욕을 하던
한 선녀의 옷을 감추고서
함께 살게 되었다 하던 전설.
아! 그 선녀들은
지금 다 어디로 갔을꼬?
내려 갈 시간이 다 되었다는
안내원의 재촉으로
더 보고도 싶었지만
선녀가 흘려 놓고 간
비취옥의 덩어리를
뒤로한 채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
목란관을 향하였다.
목란관 앞에서
파는 꼬지에다가
시원한 막걸리라도
한잔하고도 싶었지만,
우리들이 좋아하는 막걸리는 없었고
소주와 들쭉술은 있었지만,
모두가 다 신비로운
금강의 신묘한 비경에 취해
머리와 가슴속에 다 담아 갈 양으로
그냥 주차장으로 향하였다.
당초, 첫째 날엔
만물상을 꼭 봐야 한다는
우리들의 생각은
구룡연을 보고서야
잘못된 생각이었음을
새삼 느끼면서
셔틀버스에 올라
평양모란봉교예단이 펼치는
줄타기, 재주부리기, 써커스 등
교예공연을 관람하기 위하여
온정각 금강산문화회관을 향하였다.
< 2007년 10월 7일(일) >
일정 : 해금강호텔-온정각-
만물상(망양대)-온정각-
한국음식점(부페식사)-삼일포-
온정각-북측출입사무소-
남측출입사무소-아산휴게소-서울
산행장소 : 금강산 <만물상과 망양대>
소요시간 : 3시간 30분(09:30~13:00)
이른 아침에
밖에서 딸가닥,
웅성웅성 하는 소리가 들린다.
잠에서 깨어 시계를 보니
6시가 조금 넘었다.
어제 밤 마신 들쭉술과
쐬주를 맘껏 마셨으면
취한 기분에 쉽게 잠이 들었을 텐데
그보다 신비로운 옥류동과
구룡연의 비경에 취해
깊은 잠을 잘 수가 있었다.
창밖을 보니
관광객들이 벌써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다.
샤워를 하고 맑은 정신에
어제 밤 보려다가 보지 못 했던
호텔에 비치되어 있는
시와 에세이로 본
금강산(김영진) 맛있게 보기란
책을 읽어 보았다.
준비 해 와야 할 동반시를
너무나 바쁘게 서둘다 보니
깜박 하였기에
그 책에서 하나 훔쳐 갈 계획이었다.
마침 오늘은 만물상(萬物相)을
가기로 되어 있어
‘만물상’(김영진 시인)이란
시를 옮겨 적었다.
호텔에서 제공한 아침식사
(뷔페식 한식)를 간단히 하고,
온정리를 거쳐서
지정된 버스에 올라
온정령으로 나있는 도로를 따라
만물상 구역으로 올라가노라면
좌측으로 흐르는 온정천이
내내 시선을 붙든다.
어느 산행이든
계곡물을 벗 삼아
거슬러 오르는 길은
전혀 지루하지가 않다.
계곡의 흐르는 물소리가
어느 위대한 작곡가도
흉내낼 수 없는
자연의 교향곡을 들려주기
때문인 것이다.
물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쉬엄쉬엄 올라가야
제맛이겠지만,
우리는 만상정까지 나 있는
도로를 따라 버스로 가야만 했다.
길 양 옆으로
어제 구룡연코스와 같이
늘어선 소나무(미인송)의
행렬이 눈에 서늘한 기쁨을
안겨주었다.
숲속의 한 곁에 초대소가 있었다.
어제 교예공연을 한 단원들이
숙소로 이용한다고 안내원은 말한다.
온정각에서 육화암까지의 7km는
관음연봉과 문주봉 사이의 계곡으로
금강산 계곡들 중에서도
길이가 길고 계곡의 폭이
가장 넓은 곳으로
좌우로 펼쳐지는
금강산의 장대한 산악미에
눈길을 주다보니
어느덧 가파른 오르막길에 다다른다.
버스는 한라산 5.16도로는
저리가라 할 정도의
꾸불꾸불 길을 돌아서
늘름한 관음연봉을
바라보며 올라가니
절벽 중턱에 앞발을 뻗치고
아래로 향하여 목을 쭉 내민
곰같이 생긴 바위가 보인다.
마치 벼랑으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해 버티고
있는 것 같은 자세였다.
버스로 오르다보니
안내책자와 말로만 들어 왔던
문주담과 관음폭포,
육화암, 동자바위,
촛대바위, 망아지 바위,
말바위 등 여러 형상의 바위는
보지 못하고
주차장이 시설되어 있는
만물상의 입구인
만상정에 도착하였다.
주차장은 약 20여대의
대형버스를 한꺼번에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고
화장실과 휴게소도 있었다.
만상정은
아름다운 경치를 편하게 볼 수 있게
지어놓은 휴게소 정자의 명칭이다.
만상정 옆에는
한 번 마시기만 해도
무병장수 한다는
만상천이 있었으나
우린 시간에 쫓겨
화장실에만 잠시 다녀오고
아쉽게도 물맛은 보지 못했다.
등산로 초입에는
환경감시원들이 대기하고 서 있었고,
금강산을 그린 손수건과 고비,
송이버섯 등 기념품을 파는
상인이 있었으며,
많은 관광객들이 한꺼번에
만물상을 먼저 보려고
앞을 다투어 오르니
등산로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좁은 등산로에
주변 산세를 구경하랴
아침 일찍 먼저 등반을 한 사람들은
벌써 내려오는 중이어서
한참동안을 줄을 서 올라야 했기에
답답하기 그지없는 산행이었다.
그렇게 쉬엄쉬엄
약 1km(40여분)를 오르니
철제 계단이 보인다.
잠시 쉬면서
오른편 산을 쳐다보니
일만 이천의 창검을 세운 듯
겹겹이 늘어선 암봉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그 많은 바위와 돌의 모양이
어느 것 하나 같지가 않다.
잠시 눈을 돌렸다 다시 보면
모양이 다시 바뀐 것 같다.
아침과 낮의 모양이 다르고,
해뜰녘과 해질녘의 모양이
다르단다.
계절에 따라 달라지고,
날씨에 따라 다르다고도 한다.
열 사람이 바라보면
열 가지 모양이고,
백 사람이 보면 백 가지로
그 모양을 보고 느끼게 되니,
과연 만물의 모습을
다 지닌 형상이었다.
그래서 이곳을
“만물상(萬物相)”이라 했던가?
어제 구룡연 코스에는
아직 단풍이 물들지 않았지만,
이곳은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여
각각의 암봉들이
오색의 옷을 입은 듯하였다.
높은 곳에 오르면
조망이 더 좋겠지(?) 싶어
초콜렛 하나와 물 한잔을 마시고,
다시 가파른 돌로 잘 정비 된
등산로를 올랐다.
약 10여분 좀 더 오르니
쉼터가 있고
나무로 지은 막사가 보인다.
간이화장실이었다.
길 옆에 이정표가 세워져 있는데,
왼쪽으로 오르면 천선대(天仙臺)로
가는 길이요,
곧장 가면 망양대(望洋臺)로
가는 길이다.
천선대 쪽으로 오르다
잠시 전망이 확 트이고
조망이 좋은 곳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천선대로 오를까(?),
망양대로 갈까(?) 하고 고민 하다가
관광객들이 많이 가는 쪽인
망양대로 오르기로 하였다.
아늑하고 비교적 오르기 쉬운
골짜기를 돌아서니
한 모퉁이에서 마실 물을 받고
등산객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천미터 되는 높은 곳,
그것도 암반에서 나오는 물이니
약수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니
가지고 왔던 물을 버리고
마시고 싶었을 것이다.
잠시 쉬면서 기다렸다가
물 맛을 볼까도 생각하였는데
행복 씬 그냥 오르자고 한다.
조금 더 오르니
가파른 벼랑엔
오십여 미터나 되는
경사도 70~80도의
철제 사다리가 두 줄로
시설되어 있고.
좌우측엔 조망이 탁 트인
공간이 있었다.
일순간에 답답했던 가슴이
싸아~하니 시원하기도 하였지만,
아래를 내려다보니
정신이 아찔하여 오금이 저려왔다.
그 높은 길을 사다리의
좌, 우 난간에 의지하며
천천히 올라 능선에 다다랐다.
눈 앞엔 펼쳐진 동해 바다!
멀리 오른편에 해금강이 보인다.
왼쪽에 천선대가 보이고
많은 등반객이
철사다리를 오르고 있다.
우측으로 능선 길을 따라
조금 더 오르니
오늘의 목표지점 망양대가 있었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온다.
잠시 그 세찬 바람을 맞으며
뒤를 돌아보니
올라오면서 보았던
우측의 만물상과
등산로 좌측으로
보지 못 했던 삼선암,
귀면암, 칠층암과
그 위에 천선대가 자리잡고 있었다.
천선대는
하늘 나라의 선녀들이 내려와
춤을 추고 놀았다는 곳이라 해서
그렇게 명명했나 보다.
조망이 일품이라고 하는 그 곳은
시간 관계상 오르질 못 했으나
만물상 한 복판에 자리잡고 있어서
만물상의 신비한 경관을
한 눈에 바라다 볼 수 있는 곳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산우들이 행여 이 다음에
금강산을 찾을 기회가 된다면
천선대로 오르길 권해 본다.
서편 멀리 금강산의 최고봉인
비로봉(높이 1,693m)과
영랑봉, 옥녀봉이 보인다.
아무쪼록 통일이 되어
자유롭게 왕래가 된다면,
우리 시산회 친구들과 함께
그 곳을 오르기를 희망한다.
망양대에서
우린 준비한 동반시를 읊으려 했으나
천미터 이상의 고지대의 암봉에서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자리가 협소하여
“아~! 만물상!” 하는 감탄사만
연발하고 모든 속세를 잊어버렸다.
“아~! 금강산 일만이천봉!”
천미터 이상의 봉우리만
백여개가 된다고 하는
금강산은
우암 송시열 선생의 싯귀대로
봉우리 일색이었다.
雲歸山獨立
(구름 걷히고 산만 남으니)
一萬二千峰
(일만이천봉우리),
조물주가 세상을 창조할 때
만물의 草를
처음 잡아본 곳이라 하여
일명 萬物草라 하는 만물상은
한 걸음 한 걸음 뗄 때마다
그 모습을 달리하여
만물을 드러내었다.
내려올 때 보니
언제 이렇게 많이 올라 왔는지?
싶을 정도로 멀고도 먼 길이었다.
모두가 다 함께
만물상의 모든 형상을 다 보지 못한
아쉬움을 남기고 하산하여
만상정 초입 등산로 표지판 앞에서
기념촬영을 한 후,
온정각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우리나라의 5악산
(東; 금강산,
西; 묘향산,
南; 지리산,
北; 백두산,
中; 북한산) 중의
동악산인 금강산은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허리춤에 위치한다.
나는
백두산은 회갑기념으로
북파로 등정하여 천지를 등정했고,
금강산은 구룡연 코스로
상팔담만 등산했고,
한라산은 상판악 코스로
동릉을 등정했고,
지리산은 법계사에서
천왕봉을 등정했고
설악산은 오세암, 봉정암 코스로
대청봉을 등정했고,
북한산은 도선사를 경유하여
백운대를 등정했다.
그외 백두대간 10대산중
7대산을 등정했다.
등산과 등정은 다르다.
예부터 우리 선인들은
한 웅큼의 흙도 없이
바위뿐이라고 해서
개골산(皆骨山),
신선이 사는 전설 속의 산이라고
봉래산(蓬萊山),
가을에 단풍이 들면
더욱 좋다고 하여
풍악산(楓嶽山),
화엄경(華嚴經)에
東北海中 金剛山의
그 산이라고 하여
금강산(金剛山)이라 한다.
금강산은 그냥 금강산이 아니다.
“아! 금강산!”이다.
누구나 금강에 와 보고는
세상의 모든 말들이
부족함을 절감한다.
아무리 신묘한 화가라도
이를 표현할 재주가
미치지 못함을 부끄러워 한단다.
이 청아한 물소리
이 천상의 바람소리,
새소리를 화폭이라는
제한된 공간에
어떻게 담을 수가 있단 말인가?
산행기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전문 작가가 아닌,
그것도 한번의 산행으로
어떻게 만가지의 형상과
그 자연의 신비로움을
글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금강산 만물상' 잠깐 보고
쓰긴 했지만,
누가 묻는다면
무엇하나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다.
다만 '百聞而不如一見'이니라
할 수 밖에...
여건이 허락되지 못하여
준비해 간 동반시는
귀경 시 춘천에서
저녁식사를 하면서,
김영희 여사님
(이원무 산우의 사모님)이
읊고서,
되내이듯 한양기 산우가
다시 한 번 읊었다.
짧은 일정으로
금강산 비경을 다 보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만물상' 김영진
우주를 빚은 손이
세상의 만물을
금강에 새겨놓았다.
나는 새, 기는 물고기
어흥!
맹수의 무리로 가득한 이곳
금강은 천의 얼굴, 만의 얼굴을 가졌네
초가집 짓고
기와집 짓고
아니, 하늘을 찌르는
꽃 피고 새 울고
해 뜨고 달 지며
네 자랑 내 자랑
네 기쁨 내 기쁨
오순도순 잘도 사는구나
세상 걱정없이
금강산에 모여
반짝반짝 눈동자를 굴리고 있구나
이틀동안 금강산 일만이천봉의
일백 분의 일도 못 보고 돌아와
아쉬움이 더 많은 건 사실이다.
그러나 남북이
첨예한 대치상황에서
가능했던 제한된 관광코스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첫째 날 저녁,
평양 모란봉 교예단의 써커스와
둘째 날 오후에 시간을 내어
삼일포의 추가 관광은
산행이 아니었기에
여기서는 생략한다.
교예단 공연을 마치고
여자사회자는 한복을 곱게 있고
그 고운 목소리로
마지막을 장식할 때
“동포 여러분 안녕히 가십시오~.”
“동포 여러분 다시 만납시다~.”
박수와 환호소리가
아직도 내 귀에 생생하게 남는다.
하루밤을 묵었던 숙소인
강원도 고성군 장전항
해금강호텔에서의 추억은
북한에서는 볼 수 없는
평화롭고 고즈넉하기만 하였다.
구룡연과 만물상의
산행에서 느낀 점은
금강산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고,
글로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천하제일의 명산’이었다는 점이다.
나는 한동안 넋을 잃고 헤매다가
이제서야 꿈속에서 깨어나
메모한 노트를 끄집어내
잠시 시간을 내어 적어 본다.
그동안 문필가 선현들의
산행기를 읽어서
익히 아는 터이지만,
육당 최남선의 ‘금강예찬’이
가슴에 와 닿는다.
“금강산은 보고 느끼거나 할 것이요,
형언하거나 본떠 낼 것이 못 된다”.
자연경관과 길거리에서
보고 느낀 점은
오염이 안 된 자연 그대로
잘 보전, 관리되고 있다는 점이다.
산과 계곡, 숲과 강을
훼손하거나, 망치지 않으려는 노력이
곳곳에서 엿 보였다.
이따금씩 바위에
글자를 새긴 김일성, 김정일을
찬양하는 암각만은 예외였지만,
다리와 난간, 등산로계단, 매점 등
자연 경관을 해치지 않고 만든 것이
우리의 개발문화와
다른 점이라면 달라 보였다.
길가의 풀 한포기,
소나무 한그루,
돌 하나를 자연 그대로 보전시키고
인공적으로 형질변경 또는
조림하거나, 파헤치지 않은 채
되도록 있는 그대로 놓아둔 것이다.
종이 한 장, 쓰레기나 오물이 없는 계곡은
얼마나 깨끗하게
정리를 잘 해 놓았는지
길가 좌우가 갈퀴나 빗자루로
청소한 흔적이 역력했었다.
또한, 북한 사람의 생활수준과
거주환경이 너무나 낙후된 점이다.
고성군은 1960년대
남한의 농촌마을을 연상케 했고,
시골길은 비포장 도로에다
온통 벌겋게 헐벗은 산과 구릉,
아직도 나무를 이용해
땔감을 마련하여 밥을 짓는
시골의 굴뚝,
가끔 지나가는 달구지와
통통거리는 트럭,
자전거가 유일한 교통수단인 풍경 등
사회주의 국가의 전형(모델)을
보는 것 같았다.
들녘에서 일하는 농부들을
멀리서 보았는데,
중고트럭과 삽자루만으로
수 십명이 집단적으로
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잘 사는 사람과 못 사는 사람,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차이는
자본주의국가인 남한에서도
상존하는 것이지만,
분단 60여 년 동안의
남북한의 경제적 격차가
이렇게도 크게 벌어졌는가를
절실하게 느끼게 하였다.
북에서는 금강산을
“5금강”으로 나눈다.
내금강, 외금강, 해금강 외에
별금강과 신금강이 더 있다고 한다.
그리고 금강산 3대 절경이라는
만폭동, 구룡연, 만물상 중
이번 여행엔
구룡연과 만물상을 보았으니
다음에 기회가 주어진다면
만폭동, 비로봉의 내금강과
수정봉, 세존봉, 해금강과 더불어
온정령 방면의 만물상을
다시 한번 보고 싶다.
“아! 그리운 금강산아!~”
만물상 삼일포 코스
고성의 현대아산 금강산 관광 휴게소
아산휴게소 전경
(1박2일간 함께할 차량들)
아침 5시경 아산휴게소에서
아침식사 장소로 이동합니다.
아침식사 장소인 식당 앞에서 바라본
동해바다 일출
남측 출입국 관리소에서
수속을 마치고...
우리가 타고갈 리무진버스도
북측으로 가기 위하여 넘버를 가리고...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민통선을 지나고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측 출입국 관리소에 도착하여
긴장된 북측 수속을 마치고
온정각에 도착합니다.
(차량 이동중에는 촬영금지)
온정각의 풍경들
온정각에 도착하여
잠시 정리 후
오늘 첫 관광코스인
만물상 등산로 입구로
셔틀버스를타고 이동합니다.
만경대능선
만경대에서 바라본 동해바다
(개스로 인하여 시계가 불량하다)
군데군데 교지 했던 내용의 표지석들이
세워져 있습니다.
16대의 차량에서 쏟아져 나온 관광객들이
동시에 오르다보니 그냥 밀려서 올라갑니다.
귀면암
전망대에서 바라본 망경대
천선대 오르는계단
땅문
망경대 능선...
옮겨온 글 편집
첫댓글 재경 초등동문회에서 그나마 금강산 구경을 했지요.
그때 느낌은 아름답다기보다 설악산보다 소나무도 무성하지 못하고
큰 바위에 붉은 것이 아니고 빨간 글씨로 &위대한 수령님 김일성&이라고 눈 꼴 사납게 여기저기 그려져 있어서 실망이 컷었습니다.
'우리 강산을 저렇게 망가뜨리고 있구나' 생각했었지요.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