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WOEsdGReS5Y?si=J2_XDfRM-soCl5Vx
이 곡은 러시아 St. Petersburg 태생의 글라주노프가 1900년에 이중주곡으로 작곡하였고, 고대 현악기 구슬리를 연주하며 서사시를 노래하던 중세 러시아의 음유시인의 노래를 바탕으로 한 작품입니다.
*구슬리: 러시아의 발현악기로서, 현재는 러시아 민속악기의 앙상블로 쓰인다. 러시아의 음유시인이 구전문학의 주요 장르의 하나인 빌리나의 반주에 사용하였다고 한다.
글라주노프 (Glazunov, Alexandr Konstantinovich, 1865.8.10~1936.3.21)
러시아 작곡가. 페테르부르크 출생. 9세부터 피아노와 음악이론을 배우고, 13세에 이미 작곡법을 익혔다.1879년에 발라키레프로부터 천재적 재능을 높이 평가받았다. 그동안 꾸준히 작곡한 교향곡 제 1 번이 82년 발라키레프의 지휘로 페테르부르크의 자선음악학교 연주회에서 초연되어 큰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이해 가을 출판업자 벨랴예프의 살롱을 중심으로 림스키코르사코프 및 그에게 배운 제 2 세대 젊은 작곡가 모임이 생기자 그는 유력한 멤버가 되었으며 뒷날 지도적 역할을 하게 된다. 83년 예페테르부르크대학 청강생이 되어 역사문헌학 강의를 받고, 84년에는 벨랴예프와 함께 서유럽을 여행하여 독일의 바이마르에서 리스트를 만나 그의 지휘로 제 1 교향곡을 연주하였다. 85년 벨랴예프가 주최하는 러시아 교향악연주회가 발족되었는데, 이 제 1 회 연주회에서 글라주노프는 교향시 《스텐카 라진》을 발표하여 보로딘에게 헌정했다. 88년 러시아 교향악연주회에 지휘자로 처음 등장한 뒤 러시아 각지에서 눈부신 지휘활동을 했다.
80년부터 20세기 초기에 걸쳐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제 3 번에서 제 8 번까지의 교향곡, 제 3 번에서 제 5 번까지의 현악 4 중주곡, 그 밖에 《발레 정경》 모음곡과 《중세에서》 등의 관현악곡, 바이올린협주곡, 3개의 발레음악이 이 시기의 작품이다. 이들 작품에서 그는 러시아적 성격을 기조로 하면서 유럽 음악의 전통적인 엄격한 형식성과 모든 민족의 음악양식을 흡수하여 새로운 음악을 창조했다. 1900년부터 페테르스부르크음악원 교수를 지냈으나, 1905년의 혁명으로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음악원에서 추방당한 사건에 동조하여 사임했다. 그 시기에 혁명적 민중에 바치는 뜻으로 《볼가강의 뱃노래》를 합창과 관현악으로 편곡했으며, 이 사건 수습을 위해 같은 해 가을에 페테르부르크음악원 원장으로 취임해 17년의 러시아혁명 뒤부터 28년까지 그 직책에 있었다. 주요작품으로 발레음악 《레이몬다(1898)》와 《사계(1901)》가 손꼽힌다.
작곡자, 지휘자 및 교육자. 부유하고 잘나가는 출판업자의 아들로 태어난 글라주노프는 아주 어릴 적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여 10대가 되기도 전에 개인 피아노 레슨과 작곡 공부를 받게 되었다. 1879년에 발라끼레프를 만난 후 그는 림스끼-꼬르사꼬프에게서의 개인적인 작곡 레슨을 받으며 날로 성장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러한 것은 1882년 겨우 그가 16세 되던 해에 상뜨 뻬쩨르부르그에서 그의 첫 교향곡이 대단한 갈채를 받으며 연주됨으로써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곧 부유한 상인이었던 벨랴예프는 글라주노프를 자신의 휘하에 두게 되었고 그의 작품들을 출간하고 또한 연주가 이루어지게 함으로써 그의 이력을 쌓아주기 시작하였다.
글라주노프는 진보적인 벨랴예프 써클의 일원이 되어 이 후원자의 집에서 열리는 음악의 “금요일”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 1883년에 글라주노프는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였으나 곧 그만두고 자신의 주된 관심사인 음악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1884년 벨랴예프와 함께 바이마르로 가서 리스트를 만난 후, 글라주노프는 1887년에 니꼴라이 림스끼-꼬르사꼬프와 더불어 보로진의 작품들을 편집, 완성하는데 매달렸으며, 여기에는 미완성의 오페라 ‘이고리 공’도 포함되어 있었다.
곧 글라주노프는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어 파리와 런던 등에서 자신의 음악을 지휘해왔으며, 1899년에는 여러 개의 4중주곡과 시곡들, 교향곡들, 그리고 그의 세 편의 발레곡인 ‘라이몬다’, ‘사랑의 계략’ 및 ‘사계(四季)’를 작곡하였을 뿐만 아니라, 상뜨 뻬쩨르부르그 음악원의 작곡 및 관현악과 교직을 내락받게 되었으며, 소요사태 중에 림스끼-꼬르사꼬프가 쫓겨남에 따라 일시적으로 동조 사직을 하였다가 1905년에는 교장이 되었다. 이 기간동안 그는 대다수의 성숙기 작품들을 썼으며, 여기에는 8번 교향곡과 바이얼린 협주곡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파리와 런던에서 계속적으로 국제적인 공연에 참가해왔으며, 1907년에는 캠브리지와 옥스퍼드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기도 하였다.
새로운 소비예뜨 정책 아래서 글라주노프의 활동 가운데는 국가적인 음악 조직에 참여하는 것과 전통적인 러시아 예술 음악을 초기 소비예뜨 음악가들에게 연결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1922년에 작곡가 데뷔 40주년을 맞아 소련 인민 예술가 칭호를 받았다. 그가 음악원 교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많은 중요하고 지속적인 개선이 이루어졌으며, 혁명 후에도 음악원의 명성이 올라가도록 하였지만, 자신의 작곡 분야에서의 활동은 현저하게 줄어들어 버렸다.학교에서의 진보적 이념에 대한 그의 보수적인 대립은 있었지만, 마찰은 없었다.
그는 1928년에 소련을 떠나 맨먼저 비엔나에서의 슈베르트 탄신 100주년 행사에 참가하였고, 그런 다음에는 음악원으로 계속 복귀하지 않으면서 유럽과 미국까지 지휘를 하며 연주여행을 다녔지만, 음악원과는 계속 연락을 유지하면서 소비예뜨 음악 활동에 공헌을 해왔다. 결국 그는 파리에 정착하여 작곡을 계속하게 되었으며, 다시는 조국으로 돌아가지 않고서 1936년에 사망하였다. *(1865. 8. 10. 상뜨 뻬쩨르부르그 출생 - 1936. 3. 21. 파리 사망 <그의 시신은 1972년 레닌그라드로 이장되었다>)
글라주노프가 태어난 1865년 무렵에는 러시아의 음악계 역시 태동기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1856년부터 62년 사이에 발라끼레프를 중심으로 뀨이, 보로진, 무소르그스끼와 림스끼-꼬르사꼬프가 만나 서로를 격려하고 영감을 나누면서 러시아 민족주의의 음악들을 쓰기 시작할 때였으며, 1867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들을 가리켜 ‘발라끼레프 써클’ 혹은 ‘힘찬 소수(могучая кучка)’라 지칭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루빈쉬쩨인 형제 - 안똔과 니꼴라이 - 를 중심으로 하는 일단의 음악가들은 좀 더 서유럽, 특히 독일-오스트리아의 정통적인 음악작곡과 교육을 지향하여 1859년에 러시아 음악협회를 만들고 차이꼬프스끼와 같은 이들을 조련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서로간의 반목으로 치닫던 그들의 관계는 차이꼬프스끼가 ‘5인조’를 방문하여 교류를 하기 시작하고, 특히 림스끼-꼬르사꼬프와는 죽을 때까지 경쟁적 친구관계를 유지하게 됨으로써 마침내 진정한, 음악에 있어서의 ‘러시아 전통’이 성립되어가는 도상에 있었고, 그 시기에 글라주노프는 태어났습니다.
글라주노프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이미 1782년에 모스끄바에서 창립되어 오래된, 그리고 알아주는 출판사인 “왕조(династия:The Dynasty)”의 오너였으며, 대문호인 알렉산드르 뿌쉬낀(Александр Пушкин)도 이 출판사를 통하여 자신의 대표작인 ‘예프게니 오네긴’을 출판하였다고 합니다. 출판업 및 서점을 하는, 부유하고 지적인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적부터 미술이나 음악 쪽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고 하며, 개인적으로 발라끼레프에게 피아노와 음악 레슨을 받고 있던 글라주노프의 어머니는 그가 13세가 되자 발라끼레프(Милий Валакирев)에게 인사를 시킵니다.
글라주노프의 재능을 한 눈에 알아본 발라끼레프는 5인조 가운데 가장 어리지만 가장 이론적으로 열심이고 열의에 가득 차 있던 해군 무관 니꼴라이 림스끼-꼬르사꼬프(Николай Римский-Корсаков)에게 그를 인도하였고, 림스끼-꼬르사꼬프의 가르침은 마치 마른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 글라주노프에게 전해져서 마침내 림스끼-꼬르사꼬프는 그를 가리켜 “매일매일이 아니라 숫제 매시간 음악적으로 진보한다.”는 말을 털어놓게 만듭니다.
글출처: 웹사이트
https://youtu.be/t0IwbIp5KQE?si=gWWpPbXbvaqYlOEU
Anastasia Kobekina - Chant du Menestrel by Alexander Glazuno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