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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부활의 주님 요한복음 21장 15-19절
"사랑은 미안하다고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에요(Love means never having to say you're sorry)." - 이것은 '러브 스토리'라는 영화에서 대판 부부싸움을 벌인 후에 집을 나가 버린 아내를 겨우 찾은 올리버가 그녀에게 사과를 하려고 할 때에 제니퍼가 그에게 했던 유명한 대사입니다.
적지 않은 연인들이 이 말을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사과를 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뜻으로 오해함으로써 그들의 관계를 악화시켜 버린 부작용도 많이 일어났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제니퍼가 그런 말을 한 원래의 의미는 '나는 당신이 날 사랑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이미 모든 것을 다 용서했다.'는 뜻이었습니다.
옥스포드 대학의 역사학 교수였던 토마스 아놀드 (Thomas Anold)말하기를 "나는 여러 해 동안 과거의 역사를 연구하고 그 사실을 조사하고 이에 대하여 기록한 문헌과 유물을 고증하여 그 사실 여부를 조사하여 오는중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표징, 곧 그리스도가 죽으셨다가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보다 더 분명하고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실을 인류 역사에서 나는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1. 부활절에 찾아오는 주님의 은총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난 조선의 정세는 매우 불안하고 혼란스웠다. 당시 국제 사회는 조선을 ‘소망 없는 은둔의 땅’으로 보았다. 그러나 황무지이기 때문에 더욱 복음이 증거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미국의 젊은 선교사들이 있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였다. 그들은 순교의 각오로 파송을 자원했다. 1885년 4월5일 부활절. 거센 풍랑을 헤치고 한 척의 배가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단순한 입항이 아니었다. 이 나라에 처음으로 복음이 들어오는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그렇게 부활절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조선땅을 밟았다. 황무지에 소망의 빛이 비치는 순간이었다. 아펜젤러는 본국에 보낸 첫 선교 보고서에서 이 날의 감동을 이렇게 밝혔다. “우리는 부활절에 이곳에 왔다. 그날 사망의 철창을 쳐부수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조선의 결박을 끊어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빛과 자유의 세계로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했다.”
14절에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부활 후에 여러 사람들에게 나타나신 횟수로 치자면 더 되지만 제자들에게만 나타나신 횟수로 따지자면 이번이 세 번째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이미 두 번이나 제자들에게만 나타나셨는데 왜 또다시 지금 몇 명의 제자들이 고기를 잡고 있던 "디베랴 바다" 즉 갈릴리 호숫가에 찾아오신 것이겠습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특별히 베드로하고만 나누실 말씀이 있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본문 15절 상반절은 이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상대로 1대1의 개인 면담을 시작하는 배경을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라고 묘사했습니다. 참으로 긴한 말을 나누기에 딱 좋은 분위기가 잡혀 가고 있었습니다. 밤새도록 고기를 잡느라고 피곤과 추위에 지쳐 있던 차에 따뜻한 모닥불 곁에서 따끈한 아침을 먹는 것은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이었겠습니까?
그런 후에 예수님께서는 시몬 베드로를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냥 "시몬아"라고 부르지 않으시고, 우리나라말 식으로 하자면 성과 이름을 다 붙여서 정식으로 부르고 계시는 것은, 지금부터 하고자 하시는 이야기가 매우 의미심장한 것임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밑도 끝도 없이 그저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똑같은 질문을 세 번 하셨습니다. 베드로 역시 그때마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똑같이 세 번 대답했습니다.
우선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이 본문에서 사용되고 있는 '사랑하다'라는 헬라어 동사의 해석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 본문의 대화 속에서 예수님의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질문에서는 '아가파오'라는 단어로 되어 있고 마지막 세 번째 질문에서는 '필레오'라는 단어로써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베드로는 세 번 다 "필레오"라는 단어로써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아가파오' 즉 '아가페'의 동사형은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을 뜻하는 것이고, '필레오'는 '친구 지간의 우정'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차원 높은 아가페의 사랑으로 물어 보셨는데 베드로는 감히 그런 수준의 사랑에는 이르지 못했음을 스스로 겸손히 고백하는 의미에서 필레오의 사랑으로 대답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의 실제 대화는 신약성경이 기록된 헬라어가 아니라 당시 유대인들의 일상 언어인 아람어로 진행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아람어에는 헬라어처럼 '사랑하다'라는 뜻의 동사가 민감하게 구별되어 있지 않습니다. 두 종류의 단어를 사용한 것은 당시 흔히 그랬듯이 문체의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한 목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똑같은 질문을 세 번씩이나 베드로에게 하신 것이겠습니까? 베드로가 대답하면서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말한 그대로 그 질문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은 너무나도 분명한 것이었고 예수님께서도 이미 잘 알고 계시는 사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런 문답을 세 번씩이나 반복하셨던 것입니까?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그 세 번의 문답을 통하여 베드로에게 '말로 표현되지 아니한 실로 깊고 뜨거운 사랑'을 일깨우고 계셨던 것이었습니다.
2.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은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시는 말씀입니다.
오스카 와일드가 쓴 ‘그날 이후’라는 글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글에는, 예수께로부터 직접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그 후에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기 위해서, 예수님이 땅에 내려오셔서 그들을 만나보시는 내용이 있습니다.
지상에 내려오신 주님은, 제일 먼저 어느 술주정꾼을 만났습니다. 거의 폐인이 되어서, 그는 손발을 심히 떨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형제여 어떻게 이 지경까지 되었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술주정꾼은 주님을 가만히 보더니 “저를 고쳐주신 분이군요! 제가 절름발이로 있을 때, 당신은 제 다리를 고쳐서 건강한 다리로 만들어주셨지요. 제가 절름발이로 있을 때에는, 구걸하며 살아도 부끄럽지 않고, 그런 대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두 발로 걸어 다닐 수 있게 된 다음부터는, 얻어먹을 수도 없고, 마음에 맞는 직장도 없고 해서,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이처럼 되었답니다.”하고 깊은 한숨을 쉬었습니다.
예수님은 깊이 근심하면서 이번에는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한 불량자가 선창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싸우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대낮에 이게 무슨 짓이오?”하고 야단쳤습니다. 그랬더니,
그가 금방 예수님을 알아보고서는 “예수님이 아니십니까? 전에, 제가 앞을 못 보던 소경이었을 때, 당신은 진흙을 발라 제 눈을 뜨게 해주셨습니다. 그때는 정말 기뻤고, 온 세상이 저의 세상이 된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정작 눈을 뜨고서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니,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일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래서 속이 상하여 아무나 붙들고 화풀이를 하게 되었고, 결국에는 이런 생활이 상습적인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하고 흐느껴 울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죄에서 헤어나지 못하여 영원한 멸망을 코앞에 두고 살았다."(엡2:1)고 했습니다.
지금은 비록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 앉아 있지만 이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했던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저 유명한 '베드로의 부인 사건', 그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일이었습니다.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베드로는 "다른 사람 모두가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끝까지 죽는 데까지라도 주님을 따라 가겠습니다."라고 큰소리를 탕탕 쳤었습니다. 그런데 한갓 여종 하나가 그를 가리켜 "당신도 저 예수 제자지?"라고 추궁하는 말 한 마디에 그만 바짝 얼어붙어서 "나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오."라고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나중에 곁에 있던 다른 사람들까지 합세해서 그를 추궁하자, 베드로는 "이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엉뚱한 소리로 생사람을 잡는 거야? 모른다면 모르는 줄 알아야지."라고 저주하고 맹세까지 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했던 일이 바로 엊그제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그 베드로의 입장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래도 앞의 두 번은 다른 여러 제자들과 같이 만났으니 조금 나았을지 모르지만, 이제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일부러 자기를 혼자 불러 앉혀 놓고 얼굴을 맞대고 계시니 그 베드로의 기분이 어떠했겠습니까? 정말이지 고개를 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부끄러움, 그 창피함, 그 후회막심, 그 자기혐오감 - 이런 온갖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서 베드로의 얼굴은 후끈후끈 시뻘겋게 달아오르면서 어디 시선조차 둘 곳이 없었을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당장 들어가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그 누구보다도 우리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그런 입장과 심정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처럼 부끄럽고 당황스러워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베드로를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다른 아무 말씀 하지 않으시고 그저 첫마디부터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만 물어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세 번을 물어 주셨습니다. 아마도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그처럼 세 번 물으시는 동안 자신이 세 번 예수님을 부인했었다는 사실을 틀림없이 상기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지금 자기를 일부러 혼자 불러 앉혀 놓으시고 어떤 꾸중을 내리실지, 어떤 호통을 치실지 정말 몸 둘 바를 모르면서 가슴 졸이고 있던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웬걸 예수님께서는 다른 아무 말씀도 않으시고 그냥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어와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쉬운 대답을 하도록 물어 주셨습니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다 아시면서 일부러 물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물론입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제가 예수님 정말로 사랑하고 있다는 이것 한 가지 만큼은 예수님도 잘 아시는 사실이지요." 베드로는 정말 하고 싶었던 말, 정말 자신의 가장 진실한 심정을 다 담아서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소망을 주시는 주님
십자군 전쟁 때의 일이다. 로잘린부인은 전쟁터에 나간 남편이 전사했다는 소문을 듣고 절망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 틈을 이용해 재산을 가로챈 후 로잘린을 마을에서 내쫓았다. 그녀는 이곳 저곳을 전전하다 어느 조그마한 마을에 안착했다. 마침 부활절을 맞아 마을 어린이들에게 줄 선물을 준비했다. "얘들아, 너희들의 나무를 하나씩 정하렴. 그리고 나무 밑에 둥지를 만들어 놓아라. 그러면 둥지에 예쁜 알이 들어있을 것이다." 로잘린은 둥지에 형형색색의 그림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글이 적힌 달걀을 놓아두었다. 어린이들은 신기한 표정으로 색달걀을 받았다. 그런데 한 소년이 달걀을 들고 친척집을 가던 중 길가에 쓰러진 부상병을 만났다. 소년은 부상병에게 달걀을 주었는데 부상병은 그곳에 적힌 글씨와 그림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것은 내 아내 로잘린의 그림인데. 그리고 이것은 가훈이 아닌가" 그때부터 부활절 달걀은 '사랑'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 부부가 3층에 살았는데, 부인이 오래 앓다가 죽었습니다. 장의사를 불러 관에 시신을 넣고 내려 오다가 관을 놓쳤습니다. 쾅쾅쾅! 그만 관 속의 부인이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중병을 앓던 사람이라 그 부인이 얼마후에 또 죽었습니다. 이번에도 3층에서 관이 내려 오는데, 그 남편이 관을 들고 내려오는 사람들에게 여간 조심을 시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미국의 노부부가 성지순례차 고향 땅 이스라엘을 찾았다. 그런데 갑자기 아내가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남편은 장의사를 찾아 시신 처리와 장례 절차를 물었다. 장의사는 두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하나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에 묻힐 경우 축복도 받고 비용도 150달러면 충분하다는 것. 다른 하나는 시신을 방부처리해 미국으로 공수하는 방식인데, 절차도 번거롭고 비용도 5000달러나 된다는 것이었다. 노인은 망설이다 결심했다. 비싸더라도 미국으로 시신을 옮겨 묘지에 묻겠다는 것이었다. 유대 땅에 묻히면 그 옛날 어느 분처럼 자기 아내가 부활할지도 모르는데, 그게 감당하기 어렵다는 ‘뼈 있는’ 이유였다. 우리는 부활을 바란다. 지금의 아내와 남편들도 함께 부활을 바라는가. 부활의 생명이 오늘의 유한한 생명 속에 꽃피고 열매맺기를 정녕 바라는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바로 베드로를 위해서 일부러 똑같이 세 번째 물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이신데, 제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졸장부처럼 비록 세 번이나 주님 모른다고 부인하는 못난 꼴을 보였지만 그게 제 진심은 절대로 아닌 줄을 주님은 아시지요. 제가 속으로 진짜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이것만큼은 예수님께서도 다 알아주고 계시지요."
예수님은 "너 왜 나를 부인했니?"라는 질책은 한 마디도 없었습니다. "너 어쩌다 그렇게 날 배반까지 하게 되었니?"라는 부드러운 꾸중조차 하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가 그 얼굴을 들 수 없는 입장에서도 그래도 자신 있게 "예"라고 대답할 수 있는 유일한 한 가지 질문으로 그에게 세 번을 물어 주셨던 것입니다.
스칸디나비아에 베드로라는 한 어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사랑하는 아들과 함께 고기잡이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그 날 따라 전혀 예상치 못했던 폭풍이 몰아치고 어선은 의 어산은 나그뭇잎처럼 표류했습니다. 칠흑같은 밤, 베드로는 파도와 강풍에 맞서 몇 시간을 싸웠으나 방향과 기력을 모두 잃고 자포자기한 상태였습니다. 바로 그때 먼 곳에서 강렬한 불기둥이 솟구쳤습니다. 불기둥은 곧 육지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페드로는 사력을 다해 불기둥이 있는 곳으로 노를 저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곳은 자신이 사는 마을이었습니다. 아내가 남편을 맞으며 통곡했습니다. “여보, 제 실수로 우리집에 불이 나서 세간을 몽땅 태웠어요. 이를 어떡하면 좋아요” 그는 아내를 껴안으며 밝은 표정으로 말합니다. “여보, 고맙소. 주님이 당신이 실수하게 해서 난 불이 나와 아들의 목숨을 구했소. 불기등이 없었으면 우린 모두 침몰했을 것이오. 집에 불을 내줘서 고맙소” 이 이야기는 실화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생명의 불기둥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미국 대통령을 지낸 부시가 부통령 시절에 소련 부레즈네프 수상의 장례식에 미국 대표로 참석했습니다. 장례식은 공산당의 관례대로 진행되었는데, 모든 것은 죽음을 상징하는 검정 색이나 붉은 색으로 덮여 있었습니다. 장례식의 말미에는 고인을 위한 마지막 경의를 표하는 순서가 있었고 이때 고인의 부인이 앞으로 나왔습니다. 그녀는 품에 간직했던 백합 한송이를 꺼내어 관 위에 놓았습니다. 백합은 전통적으로 러시아 정교회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상징하는 꽃이었습니다. 그리고 미망인은 남편의 시신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 순간 식장은 정적에 휩싸였습니다. 여인은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잠시 후 일어선 그녀는 성호를 그었습니다. 이 순간, 여기 저기서 미망인을 따라 성호를 긋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충격이었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았던 조지 부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 얼어붙은 소련 땅에 기독교 신앙은 완전히 죽어 버린 줄 알았다. 그런데 이 순간 부활 신앙이 부활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4. 사랑의 회복을 주시는 주님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낙심하고 넘어져 있을 때, 우리가 부인하고 배반하고 온갖 못난 짓 다하고 쓰러져서 다시 주님을 뵐 면목조차 없을 때에도,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당신 편에서 먼저 우리를 찾아오셔서 그저 "너 날 사랑하고 있지?"라고만 물어 주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26, 27절 말씀처럼 우리 모두를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시사 티나 흠이나 주름 잡힌 것이 없기를 원하십니다.
종교개혁자들은 구원론을 확실하게 세웠습니다. 바티칸과 카톨릭이 행위로 구원 받는 것처럼 하니까 '그것은 아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다.’ 라며 구원의 문제를 확실하게 붙잡았습니다. 동시에 구원론과 함께 교회론도 교회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확인해주었습니다. 구원론과 교회론이 분리될 수 없는 중요한 성경적 교리가 되었습니다.
루이스 쉐퍼라는 신학자는 ‘구원에 관한 교리를 배운 후에 신자가 반드시 배워야 할 하나님의 교리는 다름 아닌 교회론이다.’라고 했습니다. 교회론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16장 18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합니다. "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베드로가 16절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고백할 때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라"라고 하십니다. 교회론의 핵심은 주님의 교회를 주님이 세우시는 것입니다. 내가 내 교회를 세운다는 이 말씀 안에 포함되어 있는 뜻은 교회의 최종적인 권위와 결론은 예수님께서 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0장 28절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마태복음 16장 18절 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라고 하셨는데 마귀의 가장 강력한 권세라고 하는 죽음의 권세조차도 주님의 교회의 은혜를 이길 수 없다는 말입니다. 교회의 존재를 건드릴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정말 고맙게도 그런 말은 한 마디도 꺼내지 않으시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만 물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하여 "예 그렇습니다. 제가 주님 사랑하는 것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너무나도 행복한 사람입니다.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곧 그에게 죄를 다 고하리라"라고, 십자가에서 내 죄 위해 대신 죽으신 그 예수님을 사랑하고 주님 앞에서 내 죄를 부끄러움을 안다면 여러분은 이미 용서받았습니다. 이미 우리 예수님의 기억에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과거에 어떤 무서운 죄들응 저질렀습니까? 남들에게 알려지면 고개를 들고 다니지 못할 정도로 부끄러운 죄를 저질렀습니까? 예수님께서 바로 그런 나 같은 죄인을, 그처럼 부끄럽고 창피한 죄로 가득 찬 나를 사랑해 주고 계심을 믿으십니까?
죄인 중에 괴수와 같은 날 위하여 당신의 육신을 대신 십자가에서 찢겨 주신 그 구세주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계십니까?
여러분 마음에 예수님 사랑하는 고백만 진실하다면, 여러분의 그 죄는 이미 어떤 기록에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목사님, 너무 쉽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저만 아는 저의 끔찍하고 악한 죄들이 어떻게 그렇게 간단하게, 그렇게 순식간에 다 씻겨질 수 있다는 말입니까?"라는 생각이 드는 분이 혹 계십니까? 그지없는 중한 죄가, 평생토록 내 양심 속에서부터 도저히 용서받을 길이 없어 보이는 무거운 죄악들이 어떻게 그렇게 간단하게 소멸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 라는 의문이 드는 분이 혹 계십니까?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능력을 그렇게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요" -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그 어떤 교권주의도, 아니 우리 자신의 양심까지도 이미 예수님께로부터 용서받은 우리를 다시는 송사하거나 정죄할 수 없습니다. '제가 주님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예수님께로부터 '완전무죄'라고, 하나님 앞에서는 벌써 '의인이라고 칭함'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유치환 씨의 유명한 '행복'이라는 제목의 시에 보면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물론 사람이 다른 어떤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행복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사실상 '사랑 받지는 못하고 사랑하기만 하는 것'은 애타는 일이고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런 '일방적인 짝사랑'이 아니라 '서로 오가는 사랑'이 되어야 진정 행복한 사랑이며 그것이야말로 실제로 유치환 씨도 그 시를 통하여 진정으로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기독신자들은 모든 과거의 죄들을 완전히 용서받음으로써 은혜가 더욱 충만하고 뜨거운 사랑의 삶을 살게 됩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는 말씀처럼 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사랑은 우리의 그 어떤 죄도 다 덮어 버리고 완전히 도말해 버리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교리적으로 정리하면 교회는 4가지 특성을 갖습니다. 통일성, 보편성, 거룩성, 사도성을 지닌 교회입니다. 통일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지체로서 통일성을 지닐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보편성은 모든 교회가 공동으로 동의할 수 있는 보편적인 진리가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주의 교회의 기초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받고 거룩해진 모임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회중입니다. 사도성에 대해서는 에베소서 2장 20절의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 신약의 사도들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소명을 이루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는 교회가 교회다울 수 있습니다.
A.W. 토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약시대 교회에서 성령님의 역사를 뺀다면, 그들이 했던 활동의 90%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난 다음 주님께서는 예루살렘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예루살렘 교회를 세우시고 그것을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인 예루살렘교회가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사도행전 1장 8절에 두 가지를 얘기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또 하나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공포의 외인 구단'이란 만화를 영화로 만든 스토리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엮어가는 데에 결정적인 열쇠의 역할을 하는 아주 중요한 한 대사가 있습니다. 주인공으로 까치머리의 오혜성인가 하는 친구가 "난 네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어."라는 유명한 말을 합니다.
정말 얼마나 진솔한 사랑의 고백이겠습니까? "나는 네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한다." 가슴이 찡하게 저려오는 말입니다. 그 주인공은 고등학교 야구부 시절에 한 여학생을 우연히 만난 바로 첫 순간에 그녀를 향한 사랑에 빠지게 되고 바로 그 자리에서 그녀에게 이 사랑의 고백을 던집니다. 그리고 오혜성은 자신의 사랑의 서약을 지키기 위해 고등학교 야구 선수 시절 때에도 그 여학생의 남자 친구가 상대팀 타자로 타석에 등장했을 때 일부러 한 가운데 직구를 던져 주어 홈런을 치게 해 줍니다. 비록 사랑의 경쟁 상대이기는 하지만 그 선수가 홈런을 치는 것이 자기가 짝사랑하는 여학생을 기쁘게 만들어 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프로 야구 선수가 된 후, 즉 '공포의 외인 구단'에 소속되어 드디어 한국 시리즈 최종전을 맞이했을 때에도 이제는 이미 그 여인의 남편이 된 그 상대방 타자를 또 만나게 됩니다. 그때에는 오혜성이 투수가 아니라 일루수가 되어 있었는데, 그 사랑하는 여인의 남편 타자가 친 타구가 자기 앞으로 라이너로 날아 왔을 때 일부러 에러를 범해서 러닝 홈런이 되도록 해 주어서 자기 팀이 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나는 네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한다.' - 사랑의 힘은 이처럼 대단합니다.
인도 수상 네루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수천 년의 세월이 흐르도록 인도의 종교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땅을 개간하고 집을 짓고 늪지를 메우고 댐을 건설하도록 자극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교회가 칭송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세계 도처에서 인간의 짐을 덜어 주려고 노력해 왔다. 교회가 인간을 자극하고 이끌었던 힘의 근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에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갈릴리 호숫가에서 베드로를 만나 일대일의 면담을 하실 때에도 바로 그런 '사랑의 헌신 서약'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사랑 확인을 통하여 베드로로 하여금 '주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위한 결단' 하게 하셨습니다.
5.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은 우리가 장차 죽도록 충성할 수 있도록 격려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3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한행위는 단지 예수님 앞에서만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의 동료인 다른 제자들 앞에서도 평생 지우기 힘든 수치였습니다. 베드로의 수제자로서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정말 꼴이 말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를 찾아 오셔서 '너 아직 날 사랑하고 있으면 그것도 괜찮다.'라고 원래 받았던 사명을 일깨우며 격려해 주셨습니다.
"비록 네가 나를 부인하는 실수, 더구나 수제자로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큰 잘못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네가 나를 진실로 사랑하는 것만 틀림없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 사랑만 있으면 너는 여전히 내 양을 먹일 수제자의 자격이 있다."
본문 18절에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고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어지는 19절에서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고 기록된 그대로 이것은 베드로의 순교를 예언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순교하기 전에 충성할 기회를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명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내 어린 양을 먹이라"(15절), "내 양을 치라"(16절), "내 양을 먹이라"(17절)는 말씀입니다.
어느 날, 한 기자가 옥탑방에 사는 부인에게 물었습니다. “언제 가장 행복하죠?” 그녀가 말했습니다. “밤에 빨래를 널 때가 행복해요. 그때 하늘의 별을 바라보면 행복이 느껴져요.” 그때 기자가 “왜 밤중에 빨래하느냐?”고 묻자 그녀는 대답했습니다. “낮에는 주인집에서 빨랫줄을 쓰니까 밤에만 제 차례가 와요.” 당시 그녀의 남편은 5년 동안 식물인간으로 누워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행복을 잃지 않은 힘의 원천은 바로 “나는 행복하다!”는 창조적인 자기 대화에 있었습니다. 그 힘으로 낮에는 식당 일을 하고 밤에는 빨래를 거는 고달픈 상황에서도 그녀는 마음의 여유와 행복을 잃지 않았고, 초등학생 딸도 티 없이 잘 자라고 있었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나중에 순교하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거꾸로 달렸다고 전해지는 말이 사실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그가 십자가에서 죽게 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비록 성경 기록에 남아 있지는 않지만, 베드로가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당하게 되었을 때 그의 머릿속에서는 바로 갈릴리 바닷가의 새벽에 주님께서 그에게 해 주셨던 이 격려의 말씀이 생각나지 않았겠습니까? "다른 사람은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만은 죽는 데까지라도 따라가겠습니다."라고 자기 용기를 자랑하던 베드로는 실패했지만,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라는 그 사랑을 끝까지 간직하고 그 무서운 고통의 십자가에 꺼ㅏ꾸로 메달려 오히려 감사하면서 기꺼이 감당해 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결단력을 과신했던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양을 치기는커녕 자기 자신의 신앙 하나도 제대로 간수하지 못했습니다.
자기 용기를 앞세웠을 때 베드로는 순교는커녕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조차 못했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예수님께서 베드로로 하여금 주를 향한 사랑이 자기 속에 있음을 깨닫도록 일깨워 주셨을 때, 그는 '죽음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순교의 자리까지도 넉넉히 따라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합니다. "기독교에서는 40일 금식기도를 하는 사람보다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을 영적으로 높은 사람으로 보는 종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힘으로 섬기기 때문이 아니고 은혜로 섬기기 때문입니다."
솔제니친의 노벨 문학상 수상작인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라는 소설에 보면 소련의 시베리아 강제노동 수용소의 죄수 생활이 어떤 것인지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200그램의 검은 빵, 멀건 양배추 국 한 그릇이 그 하루 11시간 중노동 하는 죄수의 한 끼 식사였습니다.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강추위 속에서 잠시라도 가만히 서 있으면 그대로 몸이 얼어붙기 때문에, 선 채로 꼿꼿한 동태가 되지 않으려면 아무리 배고프고 힘없어도 죽도록 곡괭이를 휘두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그들의 일과였습니다. 쥐라도 한 마리 잡아서 구워 먹을 수 있으면 그야말로 최고의 몸보신이 될 수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작품에서 바로 그런 강제노동수용소에 실제로 갇혀 살다가 출감하게 된 한 성도가 간증을 하는 장면도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다른 몇 신자 동료들과 함께 수용소로 이송되던 도중에 원래 지병이 있던 한 동료 신자가 아무 치료도 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것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던 순간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또 자기가 수용소에 있던 중 어느 추수감사절에 정말 모처럼 얻게 된 생선 두어 마리와 양파 몇 개를 앞에 놓고 함께 수감되어 있던 동료 신자들 몇 명과 함께 하나님께 뜨거운 감사기도를 드리면서 자기네들로서는 그야말로 '풍성한' 추수감사절 잔치를 했던 것을 간증하기도 했습니다.
정말 문자 그대로 "환난과 곤고와 핍박과 기근과 적신과 위험과 칼"이 그들 주위를 완전 포위하고 있는 가운데서도 "넉넉히 이기느니라(More Than Conquerors)"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신출귀몰하는 제갈공명이라 해도 자기편이 '환난과 곤고와 핍박과 기근과 적신과 위험과 칼'에 완전포위 당해 있을 때에는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는 장담은커녕 실낱같은 희망조차 가질 수 없습니다. 아무리 최첨단 스마트 전자 무기로 무장한 최정예 군대라 할지라도 아군 병사들의 대다수가 '죽임'을 당하고 겨우 조금 남은 병력조차 다 '도살할 양' 같은 처지에 빠지게 되었을 때에는 그저 백기를 들 도리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기독신자는, 절대적으로 불리해 보이는 상황에서 그야말로 재기불능처럼 보이는 절망을 당해도' 오히려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아주 여유 있는 승리의 확신을 선언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북한의 정치범수용소에 갇힌 기독신자들이 이삭목사님이 탈출을 다 마련해 놓고 "이제 갑시다"고 하자 "한번 더 기도해 보고요." 기도해 보더니 "이 고난당하고 있는 형제들을 등지고 우리만 갈 수는 없다고 탈출을 포기하는 겁니다. 육십 몇 명이 다 탈출을 포기 하는 겁니다. 고난을 '넉넉히 이길낍니다'고 고백하는 승리의 선언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35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5-37) - 실로 얼마나 놀라운 승리선언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성도는 이처럼 '과거의 모든 죄를 용서 받음'과 동시에 '미래의 사명을 위하여 죽도록 충성'할 수 있게 됩니다.
로마서 5장 6절 이하의 말씀은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기 훨씬 이전에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해 주셨는지를 정말 감동적인 말씀으로 증거해 주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벌써 예수님께서는 "경건치 않은"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향하여 '주여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사랑의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 성도는 과거의 죄를 이미 완전히 용서받은 '행복한 의인'입니다.
인류가 소유한 기록 가운데 4복음서보다 성스럽고 진실된 피 묻은 기록은 없을 것입니다. 특히 요한복음의 거의 절반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일주일 간의 기록입니다. 사도행전의 수백 명의 순교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증인들이었습니다.
"내 평생에 힘쓸 그 큰 의무는 주 예수의 덕을 늘 기리다가 숨질 때에라도 내 할 말씀이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라는 고백만 분명하면 그 어떤 시험과 핍박도 '넉넉히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이 주님의 질문 앞에 '예수님 정말이지 저도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이것 하나만큼은 언제든지 진심으로 대답할 수 있는 '행복한 예수 제자', '충성된 그리스도의 군사'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