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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주님께서 그대에게 대를 이을 구원자가 끊어지지 않게 해 주셨다. 그가 다윗의 아버지인 이사이의 아버지다.>
▥ 룻기의 말씀입니다. 2,1-3.8-11; 4,13-17
엘리멜렉의 아내 1 나오미에게는 남편 쪽으로 친족이 한 사람 있었다.
그는 엘리멜렉 가문으로 재산가였는데 이름은 보아즈였다.
2 모압 여자 룻이 나오미에게 말하였다.
“들로 나가, 저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는 사람 뒤에서 이삭을 주울까 합니다.”
나오미가 룻에게 “그래 가거라, 내 딸아.” 하고 말하였다.
3 그래서 룻은 들로 나가 수확꾼들 뒤를 따르며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 가문인 보아즈의 밭에 이르게 되었다.
8 보아즈가 룻에게 말하였다.
“내 딸아, 들어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갈 것 없다.
여기에서 멀리 가지 말고 내 여종들 곁에 있어라.
9 수확하는 밭에서 눈을 떼지 말고 있다가 여종들 뒤를 따라가거라.
내가 종들에게 너를 건드리지 말라고 분명하게 명령하였다.
목이 마르거든 그릇 있는 데로 가서 종들이 길어다 놓은 물을 마셔라.”
10 그러자 룻은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말하였다.
“저는 이방인인데,
저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시고 생각해 주시니 어찌 된 영문입니까?”
11 보아즈가 대답하였다.
“네 남편이 죽은 다음 네가 시어머니에게 한 일과
또 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네 고향을 떠나
전에는 알지도 못하던 겨레에게 온 것을 내가 다 잘 들었다.”
4,13 이렇게 보아즈가 룻을 맞이하여 룻은 그의 아내가 되었다.
그가 룻과 한자리에 드니, 주님께서 점지해 주시어 룻이 아들을 낳았다.
14 그러자 아낙네들이 나오미에게 말하였다.
“오늘 그대에게 대를 이을 구원자가 끊어지지 않게 해 주신
주님께서는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에서 기려지기를 바랍니다.
15 그대를 사랑하고 그대에게는 아들 일곱보다 더 나은 며느리가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 이 아기가 그대의 생기를 북돋우고 그대의 노후를 돌보아 줄 것입니다.”
16 나오미는 아기를 받아 품에 안았다.
나오미가 그 아기의 양육자가 된 것이다.
17 이웃 아낙네들은 그 아기의 이름을 부르며,
“나오미가 아들을 보았네.” 하고 말하였다.
그의 이름은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가 다윗의 아버지인 이사이의 아버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3,1-12
1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3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4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5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6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7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8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9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10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11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모압 여자 룻은 보아즈의 아내가 되어 오벳을 낳는데, 그가 다윗의 아버지인 이사이의 아버지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며, 그들의 행실을 따라 하지 말라고 하시고, 가장 높은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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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이 이삭을 주우러 간 곳은 엘리멜렉의 친족인 보아즈의 밭이었다. 룻에게 호의를 베푼 보아즈는 룻의 요청대로 룻과 결혼하여 엘리멜렉의 대를 이어 준다. 그 집안에서 다윗이 태어나게 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말은 듣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말라고 가르치신다. 우리는 모두 형제들이므로, 스스로 스승이나 아버지로 자신을 내세우려 해서는 안 된다. 자신을 낮추며 섬기는 사람이 가장 높은 사람이다(복음).
오늘의 묵상
참신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충실한 종교인이라고 자부하는 바리사이들의 위선과 거짓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들으며 그 시대 바리사이들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 이를테면 부모들과 교육자들, 그리고 사제들의 모습이 어떠한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말하거나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모범을 보이는 생활이 중요합니다.
술 취하거나 태만한 부모, 품행이 바르지 않은 스승, 세상 것에 심취한 목자가 자기 자녀와 제자들 그리고 자기 양들에게, 정작 자신은 지키지 못하는 것을 지키도록 가르치며 스스로 거짓말쟁이가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마태오 복음사가는 당시 교회 안에 있던 두 가지 교회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나는 바리사이 같은 교회의 모습으로, 명예와 권력을 좇는 지도자들로 말미암아 겉은 화려하고 번지르르하지만 속은 텅 빈, 잘못된 권위주의와 형식주의에 매인 모습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적인 교회의 모습으로 직무와 책임을 맡은 이들이 서로 친구요 형제로 대하며 말을 넘어 행동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지키는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 교회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그분 자신을 삶의 지표로 삼아 다양한 역할과 책임을 맡은 이들이 겸손하게 형제들을 섬깁니다(20,26 참조). 부끄럽지만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용기를 냅시다. 우리를 위하여 한없이 자신을 낮추어 스스로 우리의 종이 되신 예수님의 겸손과 사랑을 기억하며 형제들에게 다가가 말뿐 아니라 행실로도 그들을 섬깁시다.(정용진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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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당시 유다교 지도자들의 하느님 말씀에 대한 사랑은 놀랍기만 합니다. 양피지에 구약 성경의 핵심 구절(탈출 13,1-16; 신명 6,4-9; 11,13-21)을 적어 양피지로 만든 작은 갑에 넣습니다. 이것이 ‘성구갑’입니다. 이를 이마와 왼팔 윗부분에 묶는데, 머리로 율법을 생각하고 왼팔 윗부분이 맞닿는 심장으로 율법을 사랑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또 겉옷의 네 귀퉁이에 흰 실과 푸른 실을 꼬아 술을 만들어 달았는데, 그것을 볼 때마다 주님의 모든 명령을 기억하고 그대로 지키도록 하라는 말씀(민수 15,38-39 참조)에 따른 것입니다.
이렇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왜 심판의 대상이 되었을까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어깨 위에 무거운 짐을 지우고는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입법자인 모세는 백성의 울부짖음을 들으신 하느님을 만났고, 백성이 그분의 뜻을 법으로 지키게 하였습니다. “나는 ……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 그래서 내가 …… 내려왔다”(탈출 3,7-8). 유다인 종교 지도자들은 하느님께서 백성의 울부짖음을 듣고 내려오셨다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요? 이는 우리 자신에게도 물어보아야 합니다. 장 바니에는 “하느님은 ‘파라클리토’라고 합니다”(『눈물샘』, 159면). 그리스 말인 ‘파라클리토’(Paracletos)는 ‘곁에’(para)와 ‘부르다’(kleo)가 합쳐진 단어로 일반적으로 보호자, 변호자로 번역되며 ‘곁으로 불려 온 이’, ‘부름에 응답하는 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가장 중요한 모습은, 도움을 청하는 백성의 부르짖음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마치 아이가 엄마를 부를 때 이에 응답하여 파라클리토 엄마가 되듯이, 우리도 다른 이의 울부짖음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섬기는 사람이 되는 방법이 아닐까요?(서철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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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위선과 허영을 질책하십니다. 높은 자리를 찾으며 남에게 인정받기를 바라는 마음은 알맹이 없는 삶이며 쭉정이 같은 겉치레를 낳습니다. 바리사이였던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깊이 새겼습니다. 사도는 율법의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리는’(2코린 3,6 참조)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남에게 보이려고 선행과 기도를 한다면, 바리사이처럼 ‘회칠한 무덤’이 됩니다. 우리가 모든 계명을 잘 지키고 있다고 자신한다면, ‘율법 학자의 교만’을 따르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윗자리를 좋아하고 존경받기를 바란다면, 그들의 허영을 배우는 것이 됩니다. 그리스도를 스승으로 모시는 우리는 그분의 겸손과 고난을 따라야 합니다.
율법은 거룩한 것이지만, “율법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죄 많은 여러 욕정이 우리 지체 안에서 작용하여 죽음에 이르는 열매를 맺게”(로마 7,5)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사는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살아갑니다. 율법의 행위로 완성되지 못한 구원이 속죄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를 통해 영적으로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율법에 사로잡혀 말로만 하느님을 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은총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율법의 의로움은 외적인 행위로 하느님을 완전히 섬길 수 있다는 자만을 낳습니다. 은총의 의로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모든 죄를 용서받고 성덕에 이르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합니다. 성령에 따라 살며 그리스도의 생명과 평화를 누립시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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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당시 지도층에 속하는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질타하실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위선자’라는 그리스 말에는 가면을 쓴 연극배우라는 뜻이 담겨 있는데, 위선자는 하느님 앞에서, 다른 사람들과 심지어는 자기 자신 앞에서도 연극하는 것처럼 위선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 런데 앞의 말씀은 우리가 건설적인 비판이라고 자위하면서 누군가를 비난할 때 흔히 쓰는 표현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특히 정치적으로든 사회적 또는 종교적으로든 권위를 지닌 사람들 아래 있는 이들이 자주 되뇌는 말이기도 합니다. 저도 이 범주에 속하는 사람이기는 합니다만 ……. 그러면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예 수님의 말씀 가운데 특별히 한 구절이 새롭게 눈에 들어옵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행실이 올바르지 않은 사람들의 말은 권위마저 잃게 되지요. 그래서 말만 번드럽게 하고 실천하지 않는 경우, 그들의 말은 들을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 지만 어떤 사람이 옳은 말을 한다면, 그가 그대로 살지 않는다고 해서 그의 말을 완전히 무시해 버릴 수는 없습니다. 우리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잘 알면서도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위선자처럼 살아가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가르침에는 귀를 기울이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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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보면,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가끔 예수님을 반대합니다. 그들의 심성이 악하거나 악의 세력과 연계되어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하여 앞장서서 노력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질책을 듣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의 신앙이 위선과 형식에 젖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지닌 잘못은 말과 행동이 일치되지 않는 믿음, 하느님보다는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는 신앙, 공동체보다는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자세 등입니다. 그러니 계명을 잘 지키고 열심히 단식하고 아무리 애써 기도해도 참된 존경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기는 자세가 없으면 그렇게 된다고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러기에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자기를 낮추는 자세는 마음먹는다고 저절로 갖추어지지 않습니다. 은총의 도움이 함께하여야 합니다. 섬기는 자세로 사는 사람에게는 그에 합당한 은총이 주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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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신문에서 대학생들에게 설문 조사를 하였습니다. 오늘날 가장 존경받지 못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물었습니다. 그 결과 가장 존경받지 못하는 제1순위는 ‘정치인’이었습니다. 한편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누구인지 물었더니, ‘환경 미화원’이라는 답이 가장 많았습니다. 젊은이들 마음속에 가장 힘없어 보이지만 묵묵히 세상을 위해 일하는 가난한 사람이 가장 존경스러워 보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사회적 권위는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과거와 달리 어떤 인물이 사회적으로 권위를 인정받고 존경받게 되는 것은 그 사람의 신분이 아니라, 그 사람이 한 행위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리 높은 지위와 신분을 가졌어도 멸시받을 수 있으며, 아무리 약하고 힘없어 보이며 작은 일을 한다 해도 존경받으며 권위를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옛날 이미 이런 문제를 지적하셨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을 가리키시며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삶에 알맹이는 없으며, 쭉정이 같은 겉치레에만 신경을 쓰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야말로 생색내기에만 열중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 가운데에는 묵묵히 진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겉꾸밈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데에만 관심을 두고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후자와 같은 사람들은 결국 ‘자기가 아닌 자기’가 주인이 되어 광대와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사람들은 결국 그를 광대로만 바라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과 수많은 사람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알고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것처럼 주변 사람들도 진실한 내 삶을 보고 싶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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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참스승은 주님뿐이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분으로부터 인정받고 힘을 받아야 ‘또 다른’ 스승이 될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생명은 주님께서 주셨습니다. 그분께서 허락하셨기에 우리는 매일매일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진정한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는 한 분이시며, ‘하늘에 계신 그분’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를 못 알아보고 있습니다. 지식과 ‘이론의 틀 속에 갇혀’ 못 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자신을 낮추라고 하십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주님 앞에 서라는 말씀입니다. 겸손하면 하늘이 도와주고 은총이 보호합니다. 신앙에 대해 우리는 얼마만큼 이해할 수 있을는지요? 먼저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이끌어 주십니다.
‘바리사이’들은 민중과 떨어져 살려고 애썼습니다. 함께 살면 율법을 어기고 부정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율법의 스승으로 처신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은 율법의 ‘근본 정신’을 위배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선자라고 꾸중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1970년대에 아이오와 주립대학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미식 축구 코치 헤이든 파이는 원정팀이 사용할 라커룸을 분홍색으로 칠하게 했습니다. ‘계집애 같은 색’으로 적들의 남성적 저돌성을 악화시키겠다는 작전이었습니다. 이 작전은 성공했을까요? 대성공이었습니다. 그 뒤 아이오와 주립대학의 키닉 스타디움은 원정팀의 무덤으로 악명을 높였습니다.
이렇게 색깔 하나에도 영향을 받는 연약한 인간입니다. 이 점만 봐도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스스로 대단한 척합니다. 색깔 하나만으로도 승패가 결정될 정도로 나약한데도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내가 하는 그 모든 것은 결국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겸손을 강조하신 주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겸손을 통해서만 하느님 존재에 대한 큰 믿음을 갖출 수 있으며, 자신을 낮춤으로 인해서만 나의 이웃과 함께할 가능성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없이 이 세상을 살기에는 너무 나약하고 부족합니다. 그래서 잘난 채 해봐야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철저하게 하느님을 찾아야 하고, 철저하게 하느님과 함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 없이도 충분히 잘 살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오히려 하느님을 팔아서 자기를 더 높이려고만 합니다. 이런 이가 바로 예수님께서 그토록 위선자라고 꾸짖었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말은 하느님에 관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키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말라고 하지요. 이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말만 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도 말씀만 하시고 아무런 행동을 보여주시지 않은 것이 아닌,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께서 하신 그 모든 일은 우리에게 본보기를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하셨지요. 우리가 보고 따라 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철저하게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에게만 유리하게 율법을 지키면서 자기를 높이려고만 했습니다. 이로써 다른 사람들을 더 힘들게 하면서 하느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실천하고 있을까요? 인간의 나약하고 부족함을 기억하면서 어떻게든 주님을 따르는 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록 부족하고 나약하지만, 주님의 뜻을 실천하려는 우리의 노력을 통해 주님과 더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그만큼 영원한 생명을 얻을 가능성도 커지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대는 신랑이신 분께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분께서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히에로니무스).
목숨 걸고 막지 못한 우리 역시 역사 앞에 대죄인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따지고 보니 이웃 복이라고는 지지리도 없는 우리나라입니다. 이 세상 수많은 나라들 가운데, 상호 존중하며, 이웃 간의 평화를 지향하는 기품있고 양식 있는 나라들이 얼마나 많은데, 왜 하필 국격은 바닥인 데다, 천박하고 폭력적이며, 기본적인 양심도 없는 일본이라는 나라가 이다지 가까이 있는지?
언제는 군사력을 동원해서 이웃들에게 절대 해서는 안 될 침략과 약탈, 폭력과 살상을 밥 먹듯이 자행하던 일본이었습니다. 그들의 야수 같은 폭력성으로 인해 주변 국가들이 입은 피해는 천년 만 년 동안 싹싹 빌어도 부족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오염수 방류를 통한 또 다른 폭력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 일본이라는 나라는 인류 역사 안에 대대손손 가장 자신들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집단, 민폐의 끝판왕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가 아니라 유치원 정도만 다녀도 이건 아니라는 것을 다 아는 사실인데, 백주대낮에 너무나도 당당히 지구촌 마을의 공동 우물인 바다에, 자기 집에서 발생한 냄새 진동하는 폐수를 퍼부은 일본은 인류 역사에 씻을 수 없는 대죄인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정말이지 저자들의 머릿속은 죽었다 깨어나도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생각이 없는지? 대체 머리는 장식품으로 달고 다니는 것인지? 자신들에게 가장 큰 독이 될 오염수를 자신들의 영역에다 자랑스럽게 퍼붓는 꼴은, 마치 열 명이 먹기 위해 라면을 끓인 큰 냄비에 바보 얼간이 같은 한 사람이 침을 뱉은 형국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위치에서 살아가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가장 먼저, 가장 큰 규모의 피해를 입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일입니다. 지구상 수많은 나라들 가운데 가장 앞장서서 방류를 막고자 애를 써야 했습니다. 따지고 보니 합심해서 목숨 걸고 막지 못한 우리 역시 역사 앞에 대죄인입니다.
그런데 방류 저지를 위해 제일 선두에서 깃발을 들어올려야 할 사람들의 태도를 보십시오. 경천동지할 노릇입니다. 우리 수산업 종사자들은 이제 더 이상 희망이 없다며 울부짖고 있는데도, 아무런 생각도 없는 그들은 괜찮다, 걱정하지 마라, 안심하라는 홍보 동영상을 만들어 널리 유포하고 있습니다. 일본 수상 입장에서 이보다 더 감사한 일이 다시 또 있을까요?
자기들이 싸질러놓은 오물, 자기들 영토에 묻어 놓던지, 저장해 놓던지, 하는 것은 강아지나 고양이들도 다 하는 행동인데, 그것조차 못하는 사람들이니,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이젠 늦었다고, 이젠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해서는 안 될 사안 같습니다. 어떻게든 인류 공동 우물인 바다를 악의 무리요 인류의 적인 그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야 할 순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정말이지 신랄한 표현을 다 사용하시면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과 이중성을 강하게 질타하십니다. 듣고 있노라면 가슴이 섬뜩해질 정도의 뼈 때리는 표현입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마태 23, 5-7)
일본이라는 나라도 똑같은 것 같습니다. 나름 지구촌 사람들 앞에서 G7 회원국, 선진국이라며 어깨에 힘 딱 주고 꼴값을 떨고 있습니다. 입만 열면 평화, 자유를 외치지만, 뒤꽁무니로는 군사력 증강을 위해 기를 쓰고 있습니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저들의 회개를 위해서 기도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는 요즘입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저들의 부끄러운 행동으로 인해 곤경에 처한 인류를 굽어보시어, 좋은 해결책을 선물로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미국에서 5년간 교포사목을 마치고 한국을 귀국하는 신부님의 송별회식이 있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을 함께 보냈기에 정이 많이 들었습니다. 함께 캠핑가고, 자전거 타고, 여행을 다녔습니다. 이렇게 한분 한분 귀국하는 신부님들을 보내고 보니 이제 저의 차례도 멀지 않았습니다. 송별의 자리에 빠지지 않는 것이 있으니 ‘술’입니다. 며칠 전에 술에 관련된 단어를 읽었습니다. ‘수작(酬酌)과 짐작(斟酌)’입니다. 한국의 음주문화에서는 상대방에게 술잔을 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인이 손님에게 술을 권하고, 손님이 술을 마신 후에 술을 권하는 것을 수작(酬酌)이고 합니다.
그런데 이 수작이라는 말이 부정적인 의미로 쓰일 때가 있습니다. 따뜻한 마음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흑심을 품고 상대방에게 접근하는 것을 수작 부린다고 합니다. 더 부정적인 말로 표현할 때는 그 앞에 ‘개’라는 단어가 붙기도 합니다.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이것저것 질문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럴 때 ‘수작’ 부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제가 성무에는 관심이 없고 취미활동에만 전념하면 이 또한 ‘수작’ 부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생명의 물을 말씀하시는 것은 진정어린 수작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전에는 술잔이 투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술잔이 비었는지 살펴보고 따라주는 것을 ‘짐작(斟酌)’이라고 합니다. 저도 술자리에서는 ‘짐작’을 잘 하는 편입니다. 상대방의 술잔이 비워지면 바로 채워주곤 합니다. 성격이 급한 것도 제가 짐작을 잘하는데 일조하고 있습니다. 짐작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이고 관심의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짐작의 달인이십니다.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실 때도 미리 방을 예약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식사를 못했을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축성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눠주라고 하셨습니다. 오천 명이 먹고도 12광주리나 남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성체성사’는 예수님의 짐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빵을 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 포도주를 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짐작’ 못한 적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피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하는데 제자들은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수난을 예고하시는데 제자들은 영광의 날이 오면 ‘높은 자리’를 달라고 하였습니다. 짐작도 못한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반하였고, 짐작도 못한 대사제와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였습니다. 저 자신 술자리에서 짐작은 잘하지만 이웃에 대한 배려와 관심에는 짐작도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롯과 보아즈는 따뜻한 마음으로 수작하였고, 배려와 관심으로 짐작하였습니다. 롯은 홀로된 시어머니를 정성껏 모셨습니다. 보아즈는 그런 롯이 밭에서 곡식을 얻을 수 있도록 짐작하였습니다. 수작과 짐작이 만나서 롯과 보아즈는 결혼하였고, 이 가정을 통해서 다윗이 태어났고, 다윗의 가문에서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수작을 하지 못하고 수작을 부리는 바리사이를 비판하셨습니다. 짐작하지 못하고 허세를 부리는 바리사이를 비판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있는 그대로>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헛되이
나 아닌 나로
보이지 않고
참으로
나인 나만으로
보이기를
헛되이
너 아닌 너로
보지 않고
참으로
너인 너만으로
보기를
헛되이
나 아닌 나로
불리지 않고
참으로
나인 나만으로
불리기를
헛되이
너 아닌 너로
부르지 않고
참으로
너인 너만으로
부르기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23,3)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23,12)
자연인 한 분이 찾아왔다. 통성명을 했다. 외모부터 겸손하신 분이었다. 내 명함을 드리자 ‘저는 퇴직 후 명함이 없습니다. 누구라고 합니다.’ 인사를 나누었다.
누구신가? 인터넷 검색을 했다. 대전 대덕연구단지 내, 한국천문학연구원 원장을 역임하신 분이셨다. 물리학을 전공했고 수학의 천재였음을 알게 되었다. 우주, 천체, 별들에 관한 연구,망원경 제작, 세례를 받지 않았지만 별의 인도를 따라 하느님의 신비를 캔 분이셨다. 아내 분은 신심깊은 가톨릭 교우라고 했다.
이란의 13세기 시인, 페르시안 제국 등을 이야기 하며 영문판 시인의 시를 번역 감수를 거쳐 책을 출판할 계획을 알리고 있었다. 어떤 시일까? 벌써부터 기대가 되었다.
그분을 보면서 인성에서 뿜어진 품성을 볼 수 있었다. 겸손해서 사귀고 싶은 분, 그에 대한 존경심이 생겨났다. 어제 만난 모든 분들이 그랬다. 서로에게서 고수의 내면을 보고 기뻐하였다. 자신의 열매가 충실해 오랜만에 닮고 싶은 분들을 만났다.
서로에게 ‘선생님’이라고 불러 주고 싶었다. 각자 생애가 아름다워 드려다 보니 예수님을 닮았기 때문이다. 사랑과 봉사, 나눔과 희생을 사시는 분들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마태23,10)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말을 잘하는 것은 기능적인 것이라 사람에 따라 얼마든지 숙련에 의해서 가능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이가 웅변학원에 다니면서 기능적으로 말하는 기능을 익히며 얼마든지 훌륭한 연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말을 잘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말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어떻게 다가갈 수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찬미를 잘 드리는 것도 노래를 기능적으로 잘 부른다고 찬미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하느님께 진심을 다해 드리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것 역시도 진심을 전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섬김의 의미는 어쩌면 진심의 의미와도 같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진심을 다해 하느님과 이웃을 섬기고 있는지 성찰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알려주십니다. 그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일을 하지요. 예수님께서는 말씀에 대해 실행하지 않는 그들을 비판하십니다. 신앙인은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함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르쳐주십니다.
다음으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이 아닌 사람들 앞에서 살아가기를 좋아함을 비판하십니다. 자신의 삶을 통해서 하느님께 영광을 돌려야 함에도 그들에게는 하느님이 아닌 자신들이 영광 받기를 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느님 말씀의 뜻은 모르고 말씀에 드러난 형식을 중요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중요한 것은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이 삶과 다르게 살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사실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의 삶을 보면 그 시대에도 그랬지만 현재의 삶을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즉 세상에 가치를 두며 사는 사람들의 모습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윗자리에, 높은 자리, 인사받기, 등등 이 모든 것이 세상의 삶을 사는 이들의 모습이 아닐까요. 하지만 우리 신앙인들은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삶을 살아서는 않되겠지요.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에 가치를 둔 삶을 살기를 바라지 않으시기에 하느님 나라에 가치를 두고 살아가길 바라십니다. 이러한 삶을 사는 방법이 바로 섬기는 삶과 하느님 앞에 자신을 낮추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아멘!
하느님의 인사
노우재 미카엘 신부님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인사받기를 …좋아한다.”고 질책하십니다. 아마 지금도 우리는 같은 말씀을 들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나를 못 본 척 한다.” “아는 척 안 한다.” “왜 인사 안 하나” 하며 서운해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하느님과 사람 사이 어느 편에서 먼저 인사할까요?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인사하신 장면을 우리는 잘 압니다. 하느님의 사절인 천사가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인사하며 성모님께 나타나신 장면도 잘 압니다. 영혼과 육신으로 하느님과 일치하신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실 때, 성모님께서 먼저 인사하신 것도 잘 압니다. 하느님은 누구이신가? 우리를 먼저 만나러 오시고, 우리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시는 분입니다. 하느님과 일치하는 이는 누구인가? 하느님의 은총을 전하며 먼저 인사를 건네는 사람입니다. 인사하지 않는다고 이웃을 못마땅해한다면, 먼저 인사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이고, 그분께 감사를 드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인사해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도 먼저 인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먼저 인사하면서 하느님의 평화를 전하는 이가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느님 앞에선 모두 자녀요 제자인 우리들
박찬호 사도요한 신부님
신학교에서 강의와 신학생 지도를 하며 살고 있는 저는 매년 5월이 되면 가시방석에 앉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성모성월인 5월에는 기억하고 감사해야 할 날이 많지요. 그 가운데 5월 15일 스승의 날이 되면 신학생들이 미사 후에 교수신부님들을 제대 앞에 불러 세워놓고는 카네이션을 달아주면서 ‘스승의 은혜’를 불러준답니다. 그러고는 “스승이며 영적 아버지인 교수신부님들”이라는 호칭과 함께 감사의 마음을 표현합니다. 그럴 때마다 쑥스럽기도 하고 부족함에 몸 둘 바를 모르겠는 것은 둘째 치고, 예수님이 절대 듣지 말라고 한 말만 골라서 듣고 있는 것 같아 죄스럽기 이를 데가 없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고 말씀하십니다. 언뜻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말라는 것인가?’ 하는 조금은 야속한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호칭 자체가 아니라 호칭으로 인해 규정되는 관계성입니다. 제자에 대한 스승의, 자녀에 대한 아버지의 자세가 권위적이고 지배적인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대화의 시작이 호칭을 부르는 것이니 시작부터 애정과 겸손의 마음을 가지라는 권고의 말씀인 것입니다.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연중20-토)
하느님의 성품을 닮기를...
옛날에 어느 마을에 아주 고약한 부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찌나 지독한 구두쇠였는지, 옆집에서 굶어 죽어가는 사람이 있어도 못 본체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에...이 구두쇠 영감은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더 이상 구두쇠 소리를 들었다가는 죽어서 지옥에 갈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선 마을 사람들에게라도 인심을 얻어야 하느님이 나를 천국으로 부르실 것이다.”
그래서 부자는 높은 담 위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써 붙였습니다.
“모두 오세요. 배고픈 사람들에게는 밥을, 병든 사람들에게는 약 값을, 돈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공짜로 나누어드립니다.
언제든지, 누구든지 환영합니다.”
대문 밖에 나온 부자는 글을 한번 읽어보더니, “좋아, 아주 좋아.”하고 신나게 말했습니다.
“허허허, 나도 이제 착한 사람으로 소문나겠는 걸..."
이 소식은 삽시간에 퍼져서 배고픈 사람, 병든 사람들, 돈이 필요한 사람들이 부잣집으로 꾸역꾸역 몰려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사람들이 부잣집에 들어갈 때는 밝고, 기쁘게 행복하게 들어가는데...나올 때는 찡그리고, 침 뱉고 욕하면서 나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대문 안을 쳐다보니 사람들이 화가 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문 안쪽에 사냥개 10 마리가 으르렁거리며, 한 사람도 집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알고 보니 구두쇠 영감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좋은 소문이 나게 하여야 하겠고, 그러나 자기 재물은 나누어 주기는 아깝고요...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이런 사냥개 방법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보이려고만 하는 사람을 본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혹시 우리 마음 안에도 사냥개 10마리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본받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특히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이 하는 짓을 본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말만 하고 행동이 없는 것, 다른 사람들에게 짐만 지우고 자기는 짐을 지지 않는 것,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 등등...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예수님은 가장 지위가 높고, 지혜가 많으시고, 세상의 주인이 되신 부자이셨지만, 가장 낮은 모습으로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높여야 하고 자랑해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성품을 본받으라.”고 말씀합니다.
즉, 하느님의 성품은 “죄를 미워하는 마음이요,” “사랑하는 마음이요,” “용서하는 마음이요,” “할 수 있다는 마음”입니다.
특히, 우리가 오직 본받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신명기 6장에서...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 두어라.”
사랑하는 고운님들!
프란치스꼬 교황님께서 한국을 방문하시고 돌아가시는 비행기 안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 앞에서는 중립을 지킬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과 눈높이 사랑을 맞추시는 것입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느님의 둘째 사랑은 눈높이 사랑(낮은 마음)”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첫째 사랑은 “숨을 불어 넣어주신 사랑”이고, 하느님의 둘째 사랑은 “눈높이 사랑”입니다.
영적일기를 마무리 하면서...
어느 누군가에 숨통을 틔워주는 사랑을 하고...또한 누군가를 배려하고 위해주는 눈높이 사랑을 베풀면서...저희가 하느님의 성품을 닮을 수 있는 은총 가득한 날이 되시기를...아멘.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함승수 신부님
바빌론 유배를 마치고 돌아온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 이상 성전에서 희생제사를 지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자연스레 그들의 신앙생활은 ‘율법’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되었지요. 율법을 얼마나 철저하게 잘 지키는가에 따라 그가 하느님의 뜻에 충실하게 사는 의로운 사람인지, 아니면 하느님 뜻을 거스르며 사는 죄인인지가 판가름 났던 겁니다. 자연스레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율법학자들이 민중을 이끄는 지도자 역할을 하게 되었고, 율법의 세부조항까지 철저하게 지켰던 바리사이들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예수님은 율법의 ‘전문가’들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율법에 대해 가르치는 것은 철저하게 실행하고 지키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실만은 따라하지 말라고 하시지요. 그들은 말로만 가르치고 정작 본인은 스스로가 말한대로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거룩하고 의로운 사람으로 드려내려고 율법을 잘 지키는 척 ‘위선’을 떨었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그들이 몸에 달고 다니던 ‘성구갑’과 ‘술’이었습니다. 성구갑은 구약성경의 핵심구절을 적은 양피지를 넣은 작은 갑입니다. 이를 이마와 왼팔 윗부분에 묶는데, 머리로는 율법을 생각하고, 왼팔이 맞닿는 심장으로 율법을 사랑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또 겉옷의 네 귀퉁이에 흰 실과 푸른 실을 꼬아 술을 만들어 달았는데, 그것을 볼 때마다 주님께서 내리신 모든 명령을 기억하고 그대로 지키도록 노력하겠다는 결심을 되새기려는 것이었지요. 물론 그 의도 자체는 참으로 바람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달고 다니던 성구갑이 유난히 크고 화려했다는데에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사람들의 눈에 자주, 쉽게 띄었습니다. 본인 입으로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그들의 모습은 마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였지요.
“여러분 이 멋진 성구갑을 한 번 봐주세요! 내가 하느님 말씀을 얼마나 자주 되새기고 묵상하는지, 내가 성경 말씀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를 말입니다.”
하지만 하느님 말씀은 마음에 새기는 것이지 옷에 달고 다니는 게 아닙니다. 그분 말씀을 행동으로 실천해야 내 모습과 삶이 그분 뜻에 맞갖게 변해가는 것이지, 그저 머리로 생각하는 것만으로 그쳐서는 아무 것도 바뀌는건 없지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몸으로는 하느님 말씀과 가장 가까이에 있었지만, 그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따르지 않았기에 하느님과 그분 뜻으로부터 가장 멀리 있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진정 의로운 사람이 되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의로운 ‘척’만 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한 쪽 귀로 듣고 다른 쪽 귀로 흘려버리면서, 자신이 그분 뜻을 따르는 의로운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다른 사람들과 자기 자신 모두를 속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느님 말씀과 뜻에 깨어있지 않으면 언제든 그들처럼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이해와 용서, 양보와 배려, 희생과 선행,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려는 노력은 하나도 하지 않으면서, 그저 영성 깊은 신부님이 하시는 강론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 자기 삶이 거룩해진 듯한 착각에 빠져 산다면, 어느 순간 주님께서 그런 나를 가리키며 ‘얘야, 저 사람처럼은 살지 말아라’고 말씀하시는 가슴 뜨끔한 상황을 맞게 될겁니다.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우리에겐 장유유서라는 연령에 따른 서열, 그것도 상향식 충효를 생활 속 깊이 예의라고 새기고 있는지라, 나이가 들면 들수록 가시방석입니다. 누구보다도 먼저, 깊이 헤아리고 움직이지 않으면, 다른 분들이 다 알아서 대접해 주기 때문에, 어느새 섬겨야 할 내가 거꾸로 섬김을 받고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11-12) 라고 하십니다.
편하고 게으름에서 벗어나 마음속 깊이 겸손과 희생을 되새기고, 우리가 꿈꾸는 고운 복음의 이상들을 삶 속에서 스스로 섬기며 구현함으로써, 사랑 가득한 주님의 사도가 됩시다.
말의 의미는 말하는 사람의 따라 다르다<마태23/1-12>8/26.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우리는 자기주장을 세우려고 다른 사람의 말을 이용해서 합리화 시키려고 합니다. 신학을 논하려면 신학에 정직하고 진실하고 열정을 다해 연구하고 말하는 사람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외구에 가서 공부하고 돌아와서 누구에게서 배우고 익히고 깨우치고 왔느냐에 따라 말하는 사람의 권위가 인정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진실되게 사랑하며 맒슴 안에 사는 것입니다.
말은 듣는 사람에 따라 그 의미가 진실인가 아닌가 달려있습니다. 말쉬가 없는 사람 신학적 영적 지식이 없으면 이단자가 무슨말을 해도 잔성하고 받아들입니다. 가금 여론 조사기관에서 문의가 어면 저는 전화를 끝습니다. 앞뒤를 분간 못하면서 찬성 반대 하게 됩니다. 1950년 6,25전쟁은 미군이 철수함으로 생기였는데 그당시 미군정하에서 공산주이와 민주주이를 여론조사 하니 85%가 공산당을 주장하여 이나라를 믽화 되기 어렵다하여 미군이 떠났다고 합니다. 인민군이 서울와서 3일동안 머무는 동안 많은사람이 그대로 있다가 인민군의 해동을 보고 14후쾨 때는 서을이 비었다고 합니다.
말을 알듣는 것은 경험이 최고입니다.저의는 48년도 이북에서 넘어오면서 알았기에 인찬에 있으면서 시내를 피해 시골로 나가군 하였습니다.
오늘 주님은 말을 앞세우는 사람 보고 말만하고 실천하지 않은사람 따라 살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려면 진실과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 만이 말을 하고 듣게 할 수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은 믿기만하면 되는 것 아니라 믿음을 실천하는 사람의 믿음이 참 믿음입니다. 듣고 알고 있는 사람이도
실천이 이없으면 믿음이 아닙니다. 듣는 지식 듣고 실천하는 믿음을 지니고 가는 사람만이 믿음이 길로 나갑니다.
그 믿음은 바로듣고 진실하게 깨닫고 바로 살천하여 씨를 뿌리고 결실을 맺듯이 결실이 나와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열매가 자유 평화 기쁨이듯이 봉사 나눔 친교의 씨를 뿌리고 자유 평화 기쁨의 열매을 거두어 드려야 합니다.
이는 좋은씨앗을 심고 풍요로운 결실을 맺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수도자들이 매일 시편을 노래하며 묵상과 기도를 하는 것 안에 큰 기쁨과 평화를 느낍니다. 주님이 주시는 말의 의미를 알이듣고 깨우처 믿음 희망 사랑의 삶을 통해 가난한 마음으로 하느님 나라를 살기를 기도합니다.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 23, 3)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
자아의
참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인격의 결단이
간절히
필요한 실천의
때입니다.
악습을 끊고
선을 행하는
실천입니다.
우리의
현실 안에
스며있는
온갖 모순을
여태까지
반복해온
잘못된 행위를
끊어내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말은 쉬워도
실행은 더디고
어렵습니다.
오염되고
매몰되어지는
우리의 건강한
실행입니다.
반성적 결단으로
건강한 실행을
부활시키시는
주님이십니다.
올바른 실행은
올바른
사랑입니다.
올바른 사랑은
올바른 정신의
실천입니다.
아름다운 삶을
시작하는
첫시작은
언제나
아름다운 삶을 위한
올바른 복음의
실행입니다.
올바른 삶이란
사람의 삶을
우리가
건전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삶이란
실행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실행이 없는 사랑
실천이 없는 신앙은
모두 가짜입니다.
비판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양심을 속이는
사람입니다.
올바른 사랑을 위해
올바른 실행으로
발길을 돌립니다.
하느님의
자비안에서
자아의 참모습을
제대로 본 사람은
올바른 실행으로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상황과 환경
공동체가
엉망인 것이
아니라
비판과 비난으로
점철된 세월을
살아온 그 사람이
엉망인 것입니다.
말만하지 말고
실행하는
사람이길
제자신부터
기도합니다.
사람이 되는
공부는 양심과
복음을 통한
올바른 실행입니다.
밥때가 되면 식사 준비를 합니다. 제일 먼저 살피는 것은 냉장고 안입니다. 무엇이 있는지를 보고서, 찌개나 국을 만들고 또 여러 반찬을 직접 만듭니다. 사실 처음 직접 해 먹어야 할 때는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어서 인스턴트 음식만 해 먹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오랫동안 혼자서 하다보니 자유롭게 음식을 하게 됩니다.
처음 요리책을 보고서 요리할 때, 책에 적혀 있는 재료가 다 있어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또 요리 순서를 어기면 큰일이 나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요리를 계속하다 보니 이런 틀에서 자유롭게 됩니다(물론 맛은 그리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제 음식을 먹어본 사람이 맛있다고 하지 않더군요).
저만의 방식이 생긴 것입니다. 저만의 방식으로 뚝딱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내공이 생겼습니다. 이런 저를 보면서, 우리의 신앙도 이렇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방식도 자기만의 방식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주님과 함께하려고 노력할 때, 자기만의 방식이 만들어지고 그 안에서 주님과 기쁨의 만남을 가질 수가 있게 됩니다.
문제는 자기 방식만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 방식대로 상대방이 하지 않는다고 틀렸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람의 방식 역시 주님께 다가가는 또 다른 방식이 되기 때문입니다(물론 이단은 이야기가 다릅니다. 그래서 교회의 가르침에 충실해야 합니다).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탄생 200주년 기념일입니다. 신부님께서도 신부님 나름의 방식을 가지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그 방식은 자기만족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딱 1년 간의 사제 생활이었지만, 착한 목자의 모습으로 충실하게 주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들과 제자들을 향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자주 꾸짖으셨습니다.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지요. 사람들에게 보이는 행동만 하려 하고, 진심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옳고 남은 옳지 않다면서 판단하고 단죄하는 행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행동은 분명히 옳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모세의 자리에 앉아 가장 올바른 사람인 척하면서 살았던 것이지요.
이런 위선을 주님께서는 절대로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착한 목자의 모습으로 짧은 이 세상의 삶을 사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떠올리면서, 겸손한 모습으로 주님의 뜻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따라야 하겠습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자기만의 방식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이기심이 들어가면 주님께 나아갈 수 없음을 잊지 마십시오. 오로지 겸손만이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되는 길입니다.
진실로 현명한 생각은 모두 이미 많은 사람이 몇 천 번 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진실로 우리의 것으로 만들려면, 깊이 숙고해서 개인적 경험에 뿌리를 내리게 만들어야 한다(요한 볼프강 폰 괴테).
긍정적 버튼, 부정적 버튼
백화점에 가서 엘리베이터를 탔습니다. 8층에 자신이 사려는 가전제품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몇 층 버튼을 눌러야 할까요? 당연히 8층 버튼을 눌러야 합니다. 그런데 지하 1층을 누르고서는 왜 가전제품을 팔지 않느냐고 항의한다면 어떨까요? 당연히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원하는 층수를 눌러야 정확하게 자신이 가려는 층에 도착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도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긍정적 버튼’을 누르면, 긍정의 층으로, ‘부정적 버튼’을 누르면 부정의 층으로 갈 것입니다. 그런데 ‘부정적 버튼’을 누르고는 긍정의 층에 도착하지 않았다고 항의하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이상한 사람입니다.
자신이 불행한 이유만을 찾아내면서 이 세상에 살 이유가 없다고 말합니다. 부정적 버튼을 누른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도 완벽하게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이 세상에 살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즉, 긍정적 버튼을 눌러야 합니다. 나의 인생을 긍정의 삶으로 이동시켜 줍니다.
룻이 오늘 우리에게 남겨준 찬란한 덕행들: 극진한 효심, 한결같은 충절, 한없는 온유, 다정다감함!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신구약 성경 통틀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아름다운 장면이 어제 오늘 룻기를 통해서 소개되고 있습니다. 남편과 두 아들을 먼저 떠나보낸 가련한 시어머니 나오미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이방인 며느리 룻의 모습이 참으로 눈물겹습니다.
“어머님을 두고 돌아가라고 저를 다그치지 마십시오. 어머님 가시는 곳으로 저도 가고, 어머님 머무시는 곳에 저도 머물렵니다. 어머니의 겨레가 저의 겨레요, 어머님의 하느님이 제 하느님이십니다.”(룻기 1장 16절)
또한 시어머니를 따라 물 설고 낯선 땅으로 따라온 룻을 어여쁘고 연민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며, 흔쾌히 아내로 맞이한 보아르의 관대하고 자상한 모습이 감동적입니다.
“네 남편이 죽은 다음 네가 시어머니에게 한 일과 또 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네 고향을 떠나 전에는 알지 못하던 겨레에게 온 것을 내가 다 잘 들었다.”(룻기 2장 11절)
룻기를 통해 우리는 유다 공동체가 그리도 중요시 여겼던 순혈주의, 선민의식, 율법지상주의가 사실은 부차적이고 비본질적인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모압 출신 여인들과 결혼한 나오미의 두 아들들, 그리고 남편과 사별한 이방 여인 룻을 호의적으로 바라보며 결혼한 보아르, 그리고 그 가문에서 탄생한 다윗왕...
결국 이방 여인들도 다윗 가문의 남자들과 결혼하였고, 구세사의 한 축을 당당히 구성한 것을 통해 순혈주의가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가 하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동시에 구원은 보편적이라는 것, 유다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활짝 열려있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동시에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인류 구원 사업에 정통 이스라엘 사람들만 도구로 쓰시지 않고, 이방인들은 물론, 부당해 보이는 죄인들, 나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협조자로 선택하시는, 활짝 열린 개방성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룻이라는 이방 여인이 오늘 우리에게 남겨준 덕행들과 자질들은 얼마나 가치 있고 찬란한지 모릅니다. 극진한 효심, 한결같은 충절, 한없는 온유, 다정다감함...
그녀의 따뜻함과 부드러움으로 인해 남편과 두 아들마저 떠나보낸 불운의 여인 나오미는 팔자를 펴게 되었고, 기울어져가던 이스라엘 가문이 다시금 일어서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대리자에게 기대하는 유일한 것, 그리스도의 품성.
전삼용 요셉 신부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자리에 합당한 모습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모세가 했던 말을 되풀이할 뿐 그 자리에 앉을 자격은 없었습니다.
대리자에게 중요한 것은 가르침만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라고 하십니다. 대리자의 자질 중에서 행실이 가르침보다 더 중요합니다.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자리에 앉아있는 사제에게 기대하는 것은 좋은 강론일까요, 아니면 그리스도의 성품일까요? 성품이 그리스도답지 않다면 가르침은 따르기 힘이 듭니다. 그러나 성품만이라도 그리스도를 닮았다면 가르침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 조사에서 신자들이 사제에게 바라는 사제상에 대해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강론 잘하는 신부, 기도 잘하는 신부, 겸손한 신부 중 어느 것이 1위였을까요? 1위는 겸손한 신부, 2위는 기도하는 신부, 3위는 강론 잘하는 신부였습니다. 가르침이 꼴찌이고 성품이 1위입니다.
신자들은 사제들에게서 그리스도의 가르침보다 우선하여 그리스도의 성품을 보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신학생들에게 같은 질문을 했더니 신학생들은 강론 잘하는 신부를 가장 바랄 것이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성품이 그리스도를 닮지 않으면 말을 아무리 잘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저도 우리나라에서 말을 가장 잘하는 사제와 이태석 신부님이 살아계신다면 이태석 신부님을 만나러 갈 것 같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다 똑같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 위치에 서면 신자들이 강론 잘하는 사제를 더 좋아할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님은 교구 사제의 주보 성인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강론을 엄청나게 못 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공부 자체를 못 한 분입니다. 라틴어 때문에 사제가 못 될 뻔하였습니다.
사람들 앞에 서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항상 일주일 전부터 주일미사 강론을 글로 써서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은 이미 써 놓은 강론 원고를 가져오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미사 시작할 때부터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강론시간이 다가오자 어쩔 수 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한마디만 하고 앉았습니다. 더는 말이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사람들은 이 강론을 최고의 강론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시 거의 냉담하던 시골 마을에 온 비안네 신부는 하루에 17시간 정도를 고해소에 앉아있었습니다. 이것이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미 그리스도의 인품을 보았기 때문에 한마디를 하더라도 그것을 그리스도의 목소리로 듣습니다. 하지만 인품이 바탕이 되지 않은 강론은 어떨까요? 아무리 멋진 강론이라도 신자들은 “신부님 말씀 잘하시네!” 정도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의 ‘교만’을 지적합니다. 그들은 회당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아버지나 스승으로 불리기를 좋아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모세를 ‘대리’하는 것이 아닌 ‘대치’하려 했던 것입니다.
모세의 인품을 먼저 닮으려 하지 않으면 그것은 대리자가 아니라 모세를 대치하려는 사람이 됩니다. 성경에 모세만큼 겸손한 사람은 세상에 없었다고 나옵니다.
미국의 한 개신교 교회에서 예배 시작 30분 전에 아주 냄새를 지독하게 풍기는 한 거지가 나타나 주변을 돌아다니며, 먹을 것을 사기 위해 돈을 달라고 했습니다. 오직 세 명만이 그 사람에게 간단하게 인사했을 뿐 어느 사람도 그 사람에게 돈을 주지 않았습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 그 사람은 맨 앞자리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당신은 앞에 앉을 수 없다면서 맨 뒷좌석으로 안내해 주었습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앉았습니다.
찬양이 끝나자 교회 장로님이 나와 새로 오신 담임 목사님을 소개합니다.
“우리의 새로운 목사님은 예레미야 스피크입니다. 나오셔서 설교해주시겠습니다.”
모든 성도는 일제히 일어나 새로 오신 목사님을 환영하는 손뼉을 쳤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강대상에 없었습니다. 맨 뒤에서 냄새를 풍기고 주변을 돌아다니며 돈을 달라고 했던 그 거지가 강대상으로 올라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장로님으로부터 마이크를 건네받았습니다. 박수 소리는 조금씩 사그라들고 웅성거렸습니다.
예레미야 목사님은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성경을 펴서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내용은 마태오 복음 25장 34~40절 말씀이었습니다. 심판 때에 주님 오른쪽에 서게 될 사람들이 주님께서 주릴 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고, 헐벗었을 때 옷을 입혀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 찾아주었다는 내용입니다. 성도들은 부끄러움으로 고개를 들지 못하고 곳곳에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목사님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오늘 많은 사람이 모여있는 모임을 보았지만, 하느님 자녀가 모인 교회는 보지 못했습니다. 교회에 나오는 성도라는 사람은 많지만, 예수님의 제자는 많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언제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인품이 그리스도를 닮으면 말씀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인품이 그리스도를 닮지 못하면 가르침도 변질합니다. 그리스도처럼 살지 못하면서 그리스도처럼 가르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강론이 자기 삶을 합리화하는 것밖에 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인품 중 닮아야 하는 것은 온유함과 겸손입니다. 이 안에 가난도 포함됩니다. 마음이 인품입니다. 이것이 먼저 드러나지 못하는 강론이란 음식을 더러운 그릇에 주는 것과 같습니다.
현대에도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처럼 거짓 모세의 대리자가 생길 수 있습니다. 사제는 먼저 자신이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그분을 보여주고 그런 다음 말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신자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신자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성품이지 그분의 가르침이 아닙니다.사람은 말을 듣기 전에 먼저 그 사람이 누구인지 봅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온유하고 겸손한 모습을 보이지 못하다면 차라리 그 순간에는 입을 다무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대리자들입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대리자에게 기대하는 유일한 것은 유창한 말이 아닌 그분의 성품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제는 떨림과 울림에 대한 강의를 이야기하였습니다. 오늘은 ‘전기 너는 어느 별에서 왔니?’라는 강의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어린이에게 노트북을 보여주면서 노트북의 전기는 어디에서 오는지 물었다고 합니다. 아이는 아무런 막힘없이 전기는 벽에서 온다고 답하였습니다. 아이의 눈으로는 그것이 맞았습니다. 대부분의 전기는 우리의 벽에 있는 콘센트를 통해서 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또 물었다고 합니다. 벽에 있는 전기는 어디에서 올까? 아이는 그 질문에는 답을 잘 못할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기는 전선을 타고 오는데 변전소를 거쳐서 옵니다. 변전소의 전기는 송전선을 타고 가면 발전소에서 옵니다. 발전소의 전기는 어디에서 올까요? 발전소는 석탄 태운 에너지를 이용해서 전기를 만듭니다. 전기는 전기유도장치를 통해서 만들어지는데 커다란 자석과 코일이 있으면 만들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 주는 전기는 사실 아주 간단한 원리로 만들어지고 있었습니다.
석탄은 3억 년 전 식물이 썩어서 생긴 것입니다. 우리는 당시의 지층을 ‘석탄기’라고 부릅니다. 식물은 에너지를 어디에서 얻었을까요? 식물은 광합성을 통해서 에너지를 얻었습니다. 광합성은 태양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전기라는 에너지는 태양을 통해서 얻은 것입니다. 태양은 어떻게 에너지를 만들까요? 태양에는 수소가 있습니다. 수소는 핵융합을 통해서 에너지를 만듭니다. 이렇게 태양 에너지의 기본이 되는 수소는 어디에서 왔을까요? 과학자들은 그것을 ‘빅뱅’에서 왔다고 합니다. 지금도 팽창하는 우주는 빅뱅이 시작되면서 만들어졌습니다. 인간을 포함해서 우주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원소는 그때 만들어졌습니다. 수소, 산소, 탄소, 질소입니다. 다른 원소는 폭발하는 초신성에서 왔다고 합니다. 결국 우리는 모두 별에서 왔습니다. 지구에 사는 모든 생물은 별에서 온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표현하면 같은 이야기가 됩니다. 빅뱅이 있어서 우주의 질서가 생긴 것처럼 태초에 말씀과 하느님이 있어서 우리가 만들어 진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습니다. 태초에 하느님이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우주와 만물의 근원이 됩니다. 사람들은 나이를 먹으면 고향으로 가고 싶어 합니다. 저도 제가 태어난 시골집을 가보았습니다. 앞에는 개울이 흐르고 있고, 뒤에는 조상들이 묻혀있는 선산이 있습니다. 김제, 정읍, 전주로 가는 길목에 있습니다. 박해시대에 피난을 가기 좋은 장소였다고 합니다. 김제에서 포졸이 오면 정읍으로 도망갔다고 합니다. 정읍에서 포졸이 오면 전주로 도망갔다고 합니다. 포졸들은 자기들의 영역이 아니면 쫓아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주의 끝을 알기 위해서는 시작을 알면 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야하는지 알기 위해서는 태초에 있었던 말씀과 하느님께 돌아가면 됩니다.
최고의 과학자들이 빅뱅으로 우주가 생겼다고 합니다. 저는 신앙인으로서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하느님이 계셨다고 믿습니다. 빅뱅 이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듯이, 하느님께서는 무로부터 우주를 창조하셨다고 믿습니다. 과학자들이 우리는 별에서 왔다고 말합니다. 저는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왔다고 믿습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비오 10세 교황을 기억하며 본기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 복된 비오 교황이 그리스도 안에서 가톨릭 신앙을 지키고 모든 것을 새롭게 하도록 천상 지혜와 사도의 용기를 주셨으니 저희에게도 자비를 베푸시어 저희가 그의 가르침과 모범을 따르고 영원한 생명의 상급을 받게 하소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룻이 아들 오벳을 낳다.
이기우 신부님
모압 여인 룻은 유다인 가정에 며느리로 들어가서 시어머니인 나오미로부터 하느님 신앙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자식 없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당시 관습으로는 동족에게로 돌아갈 수 있었는데도 어쩐 일인지 나오미의 며느리로 남기로 결심하였습니다(룻 1,16). 나오미는 아브라함의 후손답게 신앙의 모범을 룻에게 보여주었고, 모압족으로서 하느님을 알지 못하다가 시집에 와서 나오미로부터 참 신앙을 발견한 룻은 그 신앙의 가치를 알아보고 자신의 삶을 하느님 신앙과 그 신앙을 전해 준 이스라엘 백성을 자신의 겨레로 삼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나오미와 룻 사이에 일어난 이 일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부하신 선교의 사명이 꽃피운 미담입니다. 나오미의 친척이었던 보아즈도 이 미담을 듣고 비록 혼인하기에는 많은 나이였지만, 룻의 선택에 호감을 느껴 관습상 ‘구원의 의무’(룻 4,1-10)를 지키려고 아내로 삼고자 하였고, 마을 사람들도 보아즈가 자신의 며느리 뻘 정도 되는 룻을 아내로 맞아들여 대를 이으려 하자, 일찍이 유다가 자신의 며느리 타마르로부터 아들 페레츠를 얻었던 고사를 인용하며 축복해 주었습니다(룻 4,12). 그리하여 룻이 낳아준 보아즈의 아들 오벳이 자칫 끊어질 뻔 했던 유다 지파의 적자 혈통을 이어줄 수 있었고 그 손자가 다윗입니다. 그리고 이 다윗의 후손 중에 요셉이 나옵니다.
일찍이 야곱이 열두 아들 앞에서 유다에게 내려준 축복의 예언(창세 49,8-12)이 요셉으로 이어지기까지 아슬아슬했던 이런 과정이 있었고, 하느님께서는 나오미와 룻 사이에 이어진 신앙의 끈으로 인간사의 취약한 고리를 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유다와 다윗에게 내려진 축복의 예언이 이스라엘 백성이 받은 소명의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정작 구세주의 어머니로 간택하신 마리아와 요셉이 정혼하는 것까지 보시고서 그 마리아에게 가브리엘 천사를 보내시어 성령으로 잉태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맺으신 약속을 실현시키시려고 얼마나 정성을 들이시는지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위신을 높이려고 위선적인 처신을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뜻을 섬기는데 진정한 명예가 있음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가르침은 사람들과의 약속을 실현시키는 데 온 정성을 다 기울이셨던 하느님을 본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이 말씀을 들을 때마다 사제로서 나는 어떤 모습을 살아가고 있는지 되돌아 보며 많은 반성을 하곤합니다.
예전에 우리 교육 안에서 항상 강조되어 오던 것이 "언행일치'의 덕목입니다. 곧 말과 행동이 다르지 않고 일치된 삶을 강조해 왔던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살펴보자면 정말 말없이 꾸준히 열심히 봉사하는 분이 있는 반면 말은 엄청 많은데 정작 일을 할 때면 사라져 버리는 분도 계십니다. 또한 다른 이들의 문제점은 열심히 지적하지만 정작 자신은 스스로 문제점을 고치지 않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교회에 등록된 사람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실천하는 삶 입니다.
나는 어떻게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 나갈 것인지 생각해보고 각자의 삶 속에서 행동으로 실천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마태23,10).
선생, 생명이 무엇인가를 진정으로 아는 분께서 생명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낮은 자세로 임하여 삶으로 보여주고, 생명되게 이끌어 주시는 분을 말한다.
‘우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자. 두고 주고 깊이 새겨 야할 성구이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탄생 200주년 기념미사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요한 10, 11-16(성 김대건 안드레아 탄생 200주년 기념미사)
오늘 이 미사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탄생 200주년 기념미사입니다. 성 김대건 신부님 탄생 200주년을 맞이하여, 교황청은 ‘희년’으로, 유네스코는 ‘기념의 해’로 선정하였습니다. 곧 교황청은 2020년 11월 29일(대림 제1주일)~2021년 11월 27일(대림 제1주일 전날)까지를 ‘희년’으로 선포하였고, 희년의 주제를 1846년 8월 26일 [옥중서간]에 나오는 옥중취조 질문이었던 “당신이 천주교인이요?” 삼았습니다. 이는 “그렇소. 나는 천주교인이요.”라는 죽음의 두려움을 과감히 떨쳐버린 성인의 놀라운 신앙고백을 통해 하느님만이 우리 삶의 전부이고, 그분에 대한 신앙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행복을 보장한다는 확신을 심어주면서 오늘날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게 해줍니다.
성인 탄생 200주년을 맞이하여, 특히 한국천주교회와 대전교구는 당진시와 더불어 김대건 신부님의 탄생을 경축하고, 진리를 향한 그분의 투신과 선구자적 시대정신을 되새겨 오늘의 지평을 삼고자, 8월 17~19일(2박3일) 동안 내포교회사연구소 주관으로 김대건 신부님의 탄생지인 당진 솔뫼성지에서 국제학술심포지엄이 개최되었습니다. 여기서, 첫 번째 기념강연을 한 유네스코 주재 교황대사인 프란치스코 폴로 몬시뇰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유네스코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올해의 세계의 인물]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의 인품과 그분의 메시지와 귀감은 오늘날에도 평화의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김대건 신부님(1821,8,21~1846,9,16)은 우리나라의 첫 번째 사제로서 민족의 구원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요, 또한 참된 목자로서 존경받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는 25년의 짧은 생이었으나 전근대적인 조선사회에 인권, 박해, 평등과 같은 근대적 가치를 실현하려 했던 선구자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나는 착한 목자이다.”(요한 10,11), “나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다.”(요한 10,15)라고 선포하십니다. 바로 이러한 모습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배웁니다. 그리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야말로,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 ‘착한 목자’로서, 예수님을 참되게 따라 순교하셨습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말합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다는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1요한 3,16)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고귀한 사랑을 성소로 받아 살아가고 있는 이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께서 선사하신 이 아름다운 사랑의 성소를 삶으로 불태워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다름 아닌 순교의 정신으로 살 때만이 가능할 것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5)
주님!
당신의 눈은 항상 저를 향하고 계십니다.
저를 살리기 위해 당신을 내놓으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보십니다.
주인이면서도 군림하지 않으시고 시중들기 위하심입니다.
이 지고한 당신의 사랑 앞에, 황송함으로 무릎 꿇어 경배합니다.
오늘 제 마음이 형제를 향하여 있게 하소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놓기 위해서 그러하게 하소서.
섬김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그러하게 하소서. 아멘.
주님께 찬미 노래를 바치는 교회
성 비오 10세 교황의 ‘성무일도에 관한 교황령’에서 (AAS 3[1911], 633-635)
성서에 수집되어 있는 시편은 하느님의 영감을 받아 쓰여진 것이다. 교회는 초기부터 신자들의 신심을 기르는 데 시편을 사용하여 놀라운 효과를 거두었다. 이 시편을 통하여 “언제나 하느님께 찬미의 제사를 드리고 하느님의 이름을 자기 입으로 찬양했다.” 더욱이 시편은 옛 법의 관습을 따라 거룩한 전례와 성무일도에서 주요한 부분을 담당해 왔다.
성 바실리오는 시편을 “교회의 소리”라 하고 우리 선대 교황 우르바노 8세는 “하느님과 어린양의 옥좌 앞에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거룩한 찬미가의 메아리”라고 지칭한다. 그리고 성 아타나시오의 말에 의하면, 시편은 특히 자신의 주요 직분이 하느님을 예배하는 데에 있는 그런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느님을 찬미하고 무슨 말로 합당하게 찬미해야 하는지” 가르쳐 준다.
따라서 성 아우구스티노는 아름다운 말로 이렇게 표현한다.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사람들이 당신을 합당하게 찬양할 수 있는지 보여 주시고자 먼저 당신 스스로를 찬양하셨고, 이렇게 하심으로 사람은 하느님을 찬양하는 법을 배웠다.”
시편은 또 우리 영혼 안에 모든 덕행을 얻고자 하는 열의를 불붙일 힘을 지니고 있다. “사도 바오로가 말하듯 ‘성경은 신구약 전부가 하느님의 계시로 이루어진 책으로서 진리를 가르치는 데 유익한 책’이지만 시편집은 성경의 다른 모든 책들의 열매를 담고 있는 정원처럼 찬미가를 부르고 그것을 통하여 자신의 열매와 다른 책들의 열매를 모두 보여준다.”고 아타나시오는 말한다.
그는 계속하여 이렇게 덧붙인다. “시편은 그것을 부르는 사람에게 거울과도 같아 그 안에서 사람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정감을 볼 수 있으므로 그 정감의 생생한 표현이 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고백록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주여, 나는 당신 교회가 부르는 감미로운 노랫소리에 가슴 뭉클하여 당신을 노래하는 찬미가와 찬가의 아름다움에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나이다. 이 노랫소리는 내 귀에 흘러 들어가 진리가 내 마음을 축축히 적셔 주게 하고 내 신심의 정이 불타오르게 하여 눈물이 쏟아지게 했나이다. 이때 내 마음은 그 찬미 노래로 얼마나 행복에 넘쳤는지 모르나이다.”
하느님의 무한하신 엄위와 그분의 전능하심과 표현할 수 없는 정의, 그분의 선과 자비 그리고 그분의 다른 무한한 속성을 그렇게도 숭고하게 전하는 시편의 많은 부분들을 들을 때 감동받지 않을 이 누가 있겠는가?
이와 마찬가지로 시편에 나오는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축복에 대한 감사의 노래, 소망하는 은총에 대한 겸손하고 신뢰에 찬 기도, 그리고 죄를 뉘우치는 영혼의 외침에 감동받지 않을 이 어디 있겠는가?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처럼, “모든 시편 속에서 노래하시고 애통하시며 희망에 부풀어 즐거워 하시고 고뇌에 차 탄식하시는” 구속주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고 사랑에 불타오르지 않을 이 누가 있겠는가?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무릇 높은 사람은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제1독서는 이방여인 룻이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 안으로 들어오게 된 일화를 발췌해 들려 줍니다.
"네 남편이 죽은 다음 네가 시어머니에게 한 일과 또 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네 고향을 떠나 전에는 알지도 못하던 겨레에게 온 것을 내가 다 잘 들었다."(룻 ,11)
이삭이라도 주워 시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들에 나간 룻이 "우연히" 보아즈의 밭에 이르게 되고, 보아즈는 룻에게 커다란 호의를 베풉니다. 이방인인 자기를 친절히 대하는 보아즈에게 룻이 겸손히 까닭을 묻자 보아즈는 룻의 사연을 "다 잘 들었"기 때문이라고 답하지요.
보아즈는 나오미와 룻에게는 히브리말로 '고엘', 즉 구원자 의무가 있는 친족입니다. 한 가족의 가장과 가장 가까운 친족으로서 경제적인 지원이나 살해에 대한 복수, 혹은 대를 이어주는 역할을 해야 하는 사람이지요.
나오미와 룻의 경우에는 보아즈가 룻과 혼인하고 아들을 낳아서 이스라엘 가문에서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이름이 지워지지 않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아들이 두 여인의 노후도 책임질 수 있습니다.
"내가 다 잘 들었다."
지역의 유지이고 재산가인 보아즈가 이미 룻의 소문을 들었다고 합니다. 기근으로 고향을 떠났다가, 기구한 운명을 당한 채 베틀레헴으로 되돌아온 두 여인 중 하나는 노인이고 하나는 이방인이니, 친족으로서 안타까운 연민의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그는 자기 겨레와 부모를 두고 시어머니를 따라 이스라엘의 하느님 날개 밑으로 들어온 룻을 기특하고 고맙게 생각한 듯 합니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에서 기려지기를 바랍니다."(룻 4,14)
룻은 보아즈와 혼인해 아들을 낳습니다. 그 아이가 다윗의 할아버지인 오벳이지요. 보아즈가 품었던 가엾이 여기는 따뜻하고 관대한 마음이 구원 역사를 잇는 다리를 놓습니다. 세상 어디건, 어느 시대건 하느님의 마음을 품은 이들을 통해 하느님 구원의 역사는 이어집니다. 그리고 이 구원자 제도를 가장 완전하게 실천하신 분은 다름아닌 예수님이십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민낯을 군중과 제자들에게 드러내십니다.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마태 23,4)
예수님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 즉 백성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자리에 있던 당시 종교 기득권자들이 스스로 가르치는 바를 실천하지는 않으면서 많은 규제와 복잡한 조건으로 오히려 백성들의 어깨를 더 무겁게 한다는 사실을 직관하십니다.
이는 그들이 백성을 가엾이 여기고 돌보시는 하느님의 마음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고, 보아즈처럼 가난하고 기댈 곳 없는 이를 측은히 여기고 배려하는 연민을 지니지 못한 탓이겠지요. 짐짓 좋은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행동하고 높은 자리에 올라 찬사받기만을 바라는 그들은 예수님 눈에 위선자에 불과합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23,11)
섬기는 이는 타인의 짐을 대신 져 줍니다. 고통의 무게를 덜어주고 나누며 함께하지요. 섬기는 이는 그를 가엾이 여기는 하느님을 대신해 그에게 손을 내미는 존재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고엘 제도가 혈연과 친족 관계 안에서 작동했다면, 예수님은 이를 사랑과 연민의 의무로 방향지어 주셨습니다.
"내가 다 잘 들었다."
우리 구원자 주님께서 다 잘 듣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짊어진 상처와 고통의 무게를 헤아리시고 경청하시며 마음 가득 연민과 자비를 품고 계십니다. 그분은 저 위 높은 곳에서 이래라 저래라 손가락질로 평가하고 명령하시지 않고, 가장 아래, 우리보다 더 아래로 내려와 우리를 섬기며 짐을 대신 져 주는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벗님! 사랑을 말씀하시고 그 사랑을 실천하시는 주님께서 다 잘 듣고 계시니 우리 앞에 놓인 삶이 아무리 어렵고 지치고 버거워도 실망하지 말고 힘 내어 나아갑시다. 그리고 그분처럼 사랑을 말하고 사랑을 실천하며 사랑이 되어 갑시다.
섬김의 여정, - 내적 깊이의 본질적 삶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은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이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1821.8.21-1846.9.16.), 탄생 200주년 기념일입니다. 두 성인의 생몰연대를 보니 거의 동시대 분들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확실한 사실은 언젠가 죽는 다는 것입니다. 죽음보다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오래 많이 살아서 성인이 아니라 어떻게 참되게 살았느냐에 따라 성인입니다. 생몰연대를 확인해 보니 성 비오 10세 교황님은 79세를 사셨고, 순교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은 25세를 사셨으니 교황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보다 세배 이상을 사신 셈입니다. ‘어떻게 죽어야 하나?’는 물음은 저절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는 물음으로 직결됩니다.
내 인생 여정을 일일일생, 하루로 압축한다면 어느 시점에, 일년사계로 압축한다면 어느 계절에 위치해 있겠는지요? 참 자주 인용했던 물음입니다. 이렇게 적용해보면 삶이 참 절실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저절로 하루하루 깨어 내적 깊이의 본질적 깊이의 삶을 추구할 것입니다.
어느 분의 기발한 생각에 공감한 일이 생각납니다. 코로나 시대 마스크는 침묵의 삶을, 거리두기는 고독의 삶을, 자주 손씻는 일은 회개의 삶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침묵과 고독, 회개의 삶을 통해 내적 깊이의 본질적 삶에 이르고 보이지 않는 내적 연대도 깊어질 것입니다.
가톨릭 굿뉴스를 여는 순간 책 제목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미소는 나의 소명-아름답게 나이 들기 영성-”이란 제목에 나이 듦을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는 방법을 대략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미소띤 얼굴로 노년을 살아가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답은 분명합니다. 자발적 기쁨으로 섬김의 여정에 항구하며 늘 깨어 내적 깊이의 본질적 삶을 추구할 때 늘 미소띤 얼굴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기념하는 두 성인도 이런 섬김의 삶의 모범입니다. 이미 살아서 성인으로 추앙 받았던 비오 10세 교황님에 관한 감동적 삶을 소개합니다.
-교황은 사목 표어로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에페1,10)로 삼았다. 가난한 출신의 교황은 항상 자신의 출신을 잊지 않으려고 “나는 가난하게 태어났고, 가난하게 살았으며, 가난하게 죽고 싶다.”라고 말할 만큼 가난을 사랑하였다. 교황은 종래의 호화스럽던 교황의 의식주의 상당부분을 생략함으로써 되도록 간단하고 검소하게 치렀다.
교황의 일과는 거의 매일 일정했다. 오전 4시에 일어나서 6시에 미사를 집전하였다. 8시 정각이 되면 바티칸 궁전의 2층에서 개인적인 연구를 하느라 책상에 있었다. 여기서 사사로운 알현을 받았다. 그의 큰 책상은 보통 문서와 서류들로 쌓여 있었고, 중앙에는 성 요한 마리 비안네 신부의 성상과 성녀 잔 다르크의 성상이 놓여 있었다.
정오에는 공식 회견을 했고, 1시에는 자신의 측근들과 점심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친 후에는 잠깐 동안 막중한 의무와 책임으로 돌아오기 전의 휴식을 취했다. 저녁 식사는 9시에 이루어졌고, 그 이후에도 밤이 깊을 때까지 다시 일했다.”-
하루하루의 일과에 참으로 충실했던, 근면, 검소, 섬김의 삶이 몸에 뱄던 참 귀하고 아름다운 성인 교황이셨습니다. 섬김의 사랑과 겸손은 영성의 잣대입니다. 섬김의 권위, 섬김의 직무등 우리에게 영성이 있다면 파스카의 영성, 바로 섬김의 영성뿐이겠습니다. 베네딕도 성인도 당신의 수도공동체를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로 정의합니다. 그러니 수도자의 삶은 평생 섬기는 법을 배우는 여정중의 삶입니다.
아주 오래전 수도원 설립 초창기에 있었던 사건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늦은 전화에 퉁명스럽게 전화를 받았던 저에 대한 격렬한 항의에 즉시 사과했고 곧 이어진 깨달음이었습니다.
“아, 나는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구나! 섬김의 직무, 서비스업 말이다. 서비스업의 3대 요소는 1.사람이 좋고, 2.사람이 실력이 있어 유능하며, 3.환경이 좋아야 하겠구나. 서비스업인 음식점의 경우가 잘 들어 맞겠구나! 주방장의 인성이 좋아 친절히 환대를 잘하고, 음식 솜씨도 탁월하며, 식당내의 환경이 단순하고 넉넉 편안하다면 서비스업에는 최상일 것이다. 과연 주님의 서비스업에 속하는 여기 수도원은 세 조건을 갖췄는가?”
벼락같은 깨달음이었지만 30년이 지난 지금도 참으로 부끄럽게도 여전히 많이 부족한 섬김의 삶입니다. 그리하여 매일 강론을 써서 나누는 것 하나만이라도 섬기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내적 깊이의 본질적 삶은 섬김의 삶, 하나뿐임을 역설하십니다.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참으로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무지의 어둠을 밝혀주는 죽비같은 깨달음을 주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세상 우상들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겸손과 섬김의 참 나를 살도록 일깨우는 구원의 복음입니다. 바로 삶의 중심인 주님만을 바라보며 주님과 형제들을 겸손히 섬기는 섬김의 여정에 항구하라는 말씀입니다. 어제 금요 강론중 어느 영성대가의 인터뷰시 고백에 공감했습니다.
“감정에 휘둘리지 마라. 그것은 영성이 아니다. 나는 이 삶에서 비상한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나는 결코 초자연적인 것들도 찾지 않았다. 옛 수도교부들도 똑같았다. 자기 착각. 자기 기만을 영성이라 착각하지 마라. 평범한 일상에 충실함이 제일이다. ‘우리는 무엇보다 온갖 겸손중에 섬김을 실천해야 한다(We should carry out our service in all humility)’.”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영성이 있다면 섬김의 영성이 있을 뿐이며 섬김의 사랑과 겸손이야말로 성덕의 잣대입니다. 바로 이런 섬김의 모범이 제1독서의 주인공 룻입니다. 하느님 섬김과 이웃들 섬김이 하나로 표현된 룻의 참 겸손한 삶입니다. 다음 룻과 보아즈의 아름다운 만남과 대화에서 환히 드러나는 룻의 겸손한 섬김의 영성입니다.
-‘룻은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말하였다.
“너는 이방인인데, 저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시고 생각해 주시니, 어찌 된 영문입니까?”
보아즈가 대답하였다.
“네 남편이 죽은 다음 네가 시어머니에게 한 일과 또 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네 고향을 떠나 전에는 알지도 못하던 겨레에게 온 것을 내가 다 잘 들었다.”-
우연은 없습니다. 하느님 구원 섭리 안에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하느님의 보시는 바, 종교나 국적이 아니라 섬김의 사랑과 겸손뿐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보아즈의 만남을 통해 룻은 오벳을 낳았고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사이의 아버지가 됩니다. 그러니 이방 여인 룻이 나은 오벳은 다윗의 할아버지가 되는 셈이며, 우리 구원자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 되니 하느님 구원 섭리의 손길이 참 오묘합니다.
참으로 우리 주님은 겸손과 사랑의 섬김의 사람을 당신 구원 섭리의 도구로 삼으심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을 닮아 섬김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 그분의 길을 걷는 모든 사람!”(시편128,1). 아멘.
“자신을 낮추는 이는.”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하느님께서 섭리하시는 구원사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심오한 지혜 앞에 감탄을 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적처럼 앙숙관계였던 모압의 여인, 룻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명예로운 가문이던 유다, 그것도 다윗 가계의 중요한 인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나오미는 사실 희망이라고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베틀레헴 여인들 앞서 한탄하며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고 부르셔요.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너무나 쓰라리게 하신 까닭이랍니다.”(룻 1,20)라고 말합니다.
나오미는 ‘즐거움’, ‘행복’이라는 의미의 ‘나오미’로 부르지 말고 ‘쓰다’라는 의미인 ‘마라’로 자신의 이름을 바꿔서 불러달라고 한탄스럽게 말하지요.
그래서 그녀는 베틀레헴의 여인들에게 “주님께서 나를 빈손으로 돌아오게 하셨답니다. 그런데 어찌 그대들은 나를 나오미라 부르나요? 주님께서 나를 거칠게 다루시고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불행을 안겨 주셨답니다.”(21절)라고 자신의 처지를 또한 한탄합니다.
사실 아들이 죽은 며느리가 나오미에게는 말그대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나오미의 기치로 남편의 친척인 보아즈와 룻을 부부로 맺어주면서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 줍니다.
룻은 오벳이라는 아들을 낳아 유다가문을 이어가게 합니다. 실의에 차 있던 나오미에게 동네 아낙네들의 칭송의 소리가 들려 옵니다. 본문은 이 사실을 이렇게 전합니다.
“이웃 아낙네들은 그 아기의 이름을 부르며, ‘나오미가 아들을 보았네.’ 하고 말하였다. 그의 이름은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가 다윗의 아버지인 이사이의 아버지다.”(4,17)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공공연하게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실천이 없는 위선을 꼬집어 말씀하십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 23,2-3)
그들은 사람들에게 율법의 무거운 짐은 지워놓고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을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완전한 사람으로 행세하는 것입니다. 특히 사람들 앞에서 드러나기를 좋아하며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이고 잔칫집이나 회당에서 윗자리를 좋아하며 사람들로부터 존칭어인 ‘스승’이라 불리는 것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11-12)
진실하지 못하는 모습에서 많은 경우 우리는 위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위선은 악의 뿌리와 연결되어서 진실의 반대인 사실과 다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사탄은 뱀의 형상으로 여인을 유혹할 때 자신이 지혜가 있고 여인에게 무엇인가를 베풀어 주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됩니다. 그 안에는 악의 세력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여인을 파괴로 몰고 가면서도 여인을 하느님처럼 지혜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줄 것처럼 착각하게 만듭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는 속은 그렇지 못한데 겉으로는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기 위해서 위선의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을 주님께서 꼬집어 비판하시는 것입니다.
룻의 이야기에서 신앙인이 배워야 할 것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는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룻의 시어머니에 대한 효성으로 구원의 이야기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신앙인은 어떠한 경우에도 언제나 희망을 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과 다르게 진실한 모습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할 수 있는 용기와 겸손을 갖추어야 합니다.
자리욕심
김정일 안드레아 신부님
‘바리사이’라는 명칭은 ‘가르다, 이탈하다’는 뜻을 가진 고대 그리스어 ‘파리사이오스’에서 유래합니다. 이 단어는 자신들이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이 안다고 주장하면서 스스로를 특별한 계급으로 분류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조장한 이 ‘가름’은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바리사이는 ‘자기우월감’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런데 교부 오리게네스는 “윗자리에 앉고자 하는 욕망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특히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는 사제들에게 고하노니, “이름으로 사제인 자는 많으나 행동으로 사제인 이는 적다.”(『마태오 복음 미완성 작품』 강해43. 참조)며 일침을 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 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 자들은 모두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으려고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자리’에 대한 욕망 또는 집착은 바리사이들의 특징입니다. 실행하려면 우선 내가 앉은 자리에서부터 일어나야 합니다. 행동하는 신앙으로, 윗자리를 고집하는 바리사이라는 자기우월 의식에서 벗어납시다.
<그대 곁에 내가 있으니>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대 곁에
내가 있으니
좋으신가요
그대 곁에
내가 있으니
기쁘신가요
그대 곁에
내가 있으니
평화로우신가요
그대 곁에
내가 있으니
사람이 좋아지시나요
그대 곁에
내가 있으니
살맛이 나시나요
그대 곁에
내가 있으니
삶이 가벼워지시나요
그대 곁에
내가 있으니
그대가 그대이신가요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함승수 신부님
한 심리학자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순발력 테스트’를 하겠다고 하면서, 자신이 ‘손뼉을 치세요’라고 말하면 재빠르게 손뼉을 치면 된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자신이 그밖에 다른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하더라도 그런 것들은 신경쓰지 말고 오직 ‘손뼉을 치세요’라는 말에만 반응해야 한다고 재차 다짐을 받은 후, 몇 초 정도 가만히 있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힘차게 손뼉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분명히 ‘손뼉을 치라’고 말하면 치라고 했으니, 그밖에 다른 말이나 행동에는 반응하면 안된다고 강조해서 알려주기까지 했으니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심리학자가 손뼉을 치는 모습을 보고 그를 따라 손뼉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이 실험을 통해 우리는 ‘신체언어’가 사람들에게 미치는 강력한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말로만 메시지를 전달할 때 보다는 자신이 전하고자하는 메시지를 행동이라는 신체언어로 표현할 때 사람들에게 더 잘 전달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엄마가 자녀들에게는 책을 읽으라고 시키면서 자신은 하루 종일 TV만 보고 있는다면 자녀들은 그런 엄마의 메시지를 ‘잔소리’로 생각해 따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엄마가 시간 날 때마다 늘 책 읽는 모습을 보면, 굳이 억지로 시키지 않아도 자녀들은 자연스레 책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됩니다. 행동과 습관이라는 신체언어가 자녀들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비판하신 이유는 그들이 ‘실천’이라는 신체언어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자리’, 즉 백성들에게 계명과 율법을 올바르게 가르쳐 그들이 그것을 삶에서 잘 지킬 수 있도록 이끌어 주어야 할 중요한 직무를 맡고 있었음에도 그 직무에 충실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기들은 계명과 율법을 하나도 실천하지 않으면서, 사람들에게 ‘이거 해라’, ‘저거는 하지 마라’ 지시하고 간섭하기만 했습니다. 또한 누군가가 율법을 어기는 모습을 보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비난하고 단죄하기에 바빴습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율법과 계명 안에 숨어있는 하느님의 선하신 뜻과 근본정신을 알려고 하지 않고 그것을 귀찮고 싫은 ‘잔소리’, 자기들의 삶을 구속하고 억압하는 족쇄로 여겨 멀리하게 되었지요.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뜻과 가르침을 ‘행동’이라는 신체언어로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온 세상 사람들을 ‘하느님 백성’으로 모아들이는 ‘사제직’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가 주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모습으로 살면서, 하느님을 앞세워 다른 이들을 비난하고 단죄하는 일에만 열중한다면, 사람들을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죄를 저지르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도 이렇게 꾸짖으실 것입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비오 10세 교황님은 1835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셨습니다. 1858년 사제품을 받은 성인은 20년 가까이 본당 사목자로 활동하다가 만투아의 주교와 베네치아의 총대주교를 거쳐, 1903년 교황으로 선출되셨습니다. 비오 10세 교황님은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재정립하고자 노력하셨습니다. 특히 교회법을 현대화하여 새 법전을 편찬하고, 성무일도서도 개정하셨습니다. 또한 그는 참된 그리스도인 생활을 해치며 교회를 위협하는 오류들에 대항하여 싸우셨습니다. 1914년에 선종한 비오 10세 교황님은 1954년에 시성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제자들에게 참된 믿음과 그에 따른 성실한 실천에 관해 이야기하십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마태 23,2-4)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행동이 자신들이 믿고 따르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에 걸맞은 충실한 믿음 생활인지, 아니면 다른 사랑에게 잘 보여서 좋은 평판을 얻기 위한 가면인지 구분하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5-7절)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 모두는 같은 자녀일 뿐이지 누가 높고 낮음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고 이르십니다. 우리의 스승이시며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느님 한 분뿐이라고 역설하십니다.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8-9절)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를 일깨워 주시고 신앙의 참된 길을 알려주시고 펼쳐주시는 분은 그리스도 우리 주님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10절)
예수님께서는 사람들 위에 서려고 하지 말고, 사람들을 섬기고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열성을 다해 노력하며 자신을 희생하라고 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11-12절)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거나, 표를 얻어서 다른 사람보다 높은 자리에 앉기 위해, 우리가 맡은 바를 열정적으로 수행하고 헌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그렇게 사셨기 때문에, 주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역시 주 하느님을 사랑하고, 주 에수님의 사랑을 닮아 형제자매들과 나의 삶을 나누고 열과 성을 다하여 헌신하는 것임을 다시 한번 깊이 되새기며 주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 일러주신 길을 걸어 나갑시다.
하느님 보다 높이 오르려 하지 말자< 마태 23/1-12>8월21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세상에 아무리 밝은 빛을 빛이고 있다 해도 태양보다 더 밝은 빛은 없으며 태양의 빛 아래 빛이 되어 세상을 빛인다. 밤에 빛이는 달빛은 태양이 없으며 빛이 없듯이 아무리 위대한 사람도 하느님 아니시면 들어나지 못합니다. 시편 8편에 “ 온 세상이 당신의 이름, 얼마나 존엄하십니까?..... 인간이 무엇이 옵니까?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존엄하신 주님이 아니시면 인가의 모습은 초라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 “스승 소리 듣고” “ 아버지라 부르지 마라.” 거룩한 사람이라고도 불이우기를 바라지 말라고 하십니다. “참 스승 참 아버지 참 선생은 하느님뿐입니다.”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남 앞에 말로만 앞세워 내가 누군데 나는 이런 사람인데 하며 자만심과과 교만을 들어내며 자기보다 못한 사람으로 다른 이를 대하는 사람을 경고 하십니다.
윗자리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보다 잘란 사람은 귀담아 듣고 자신의 자세를 낮으며 겸손하고 온유하게 살아야 합니다.
공동체 안에 이런 자리 저런 자리 책임을 지고 공동체에 협력해야 하지만 그 자리가 권력이나 자랑거리고 남 앞에 들어내기 위한 자리가 아닙니다. 더 섬기고 더 나누고 더 친절한 삶을 통해 세상을 주님이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저는 사제로써 많은 본당신부, 책임 있는 자리 수녀원 지도신부 피정집 근로자 센터 초대 농민회 지도신부등 수도원내 유기서원자 원장 순심학교 교사 등 하였지만 저는 주님의 신부름 꾼이고 잘된 것은 주님의 은총이지 내가 한 일이 아닙니다.
한때 나에게 돌보라고 맏겨진 일이지 내가 그로인하여 높이 올리가고 이름을 내는 자리가 아니였습니다.
저는 가금 이런 사정을 들으면 답답합니다. 자리가 나기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 됨됨이가 사람을 높이는 것을 다음 주님의 말씀을 못 알아듣고 살기 때문입니다.
어느 본당의 일인데 인사 이등이 되어 다음신부를 한자리에서 만게되는 일이 있었는데 어제까지 본당 신부에게 충성하던 사람이 그날은 나는 버려두고 오시는 신부에게 이런 저런 말과 봉사하는 하는 모습을 보고 본래 내 것이 아니고 나그네 같이 왔다가 가는 곳인데 하며 웃으면서 그 모양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어떤 자리에 있던지 봉사하는 자리지 누리는 자리가 되기를 바라거나 아무게 신부가 최고다 하는 소리를 듣기위해 산다면 주님은 어디에 계셔야 합니까?
세례자 요한처럼 ‘ 저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는 사람입니다.“ 하시며 현실 안에 살아져 가신 것 같이 내 지리는 여가 아니라 저 넘어 있습니다.
나의 주인이며 스승이며 아버지이시며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인 분과 함께 있다는 것 외 다른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에 아무리 큰 공적을 쌓았다 하드라도 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리 살아서 애지중지 하던 사람이나 물건이나 가졌다고 말하든 것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뒷사람들이 이리저리 처리하고 버리고 이 몸마저 땅 속 깊이 묻거나 불속에 태워 버립니다.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어디에서 온전히 주님 안에서입니다. 오늘 아침 미사를 들이며 이 자리에 ” 이례를 행하라.“ 주님이 말씀하시지 않으셨으면 아무리 잘 꾸민 제단이나 멋있는 제의라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오직 주님이 함께 계시어 참 삶이 있고 복음이 있습니다. 오늘도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 행복한 하루되기를 기도합니다.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 12)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때 묻지 않은
가을이
우리에게
오고있다.
실천으로
돌아가야 할
우리의
시간이다.
생명의
참모습은
자신을
낮추는
사랑의
실천에
있다.
실천하는
삶이 섬기는
삶이다.
낮추고
비워야
기쁘게
실천할 수
있다.
삶의
아름다움은
바로 노력과
실천에 있다.
실천이
구원이고
실천이
회개이다.
사랑의
실천으로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시는
우리의
주님이시다.
참된 실천은
우리의
뉘우침에서
시작되며
참된 실천은
낮추고
섬기는
우리의
사랑에 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실천의 뜨거운
가르침이다.
하느님을
높이는
실천의
하루이다.
실천이
참된
은총이다.
저는 형제가 많다보니 조카들이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첫째 조카에 대한 기억은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고 또 오래 간직되는 것 같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세례를 받고 그 자리에서 제가 대부를 섰던 기억, 삼촌이라고 말하면서 졸졸 제 뒤를 쫓아다니던 귀여운 조카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다 커버리고 말았습니다. 결혼을 해서 이제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 또 직장에서는 충실한 직원으로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지금은 아무리 쳐다봐도 귀엽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번쩍 안았을 때 까르르 웃던 그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이제는 키도 저보다 훨씬 커버려서 안고 싶어도 안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렸을 때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해서 사랑하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어렸을 때의 모습만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변해 버린 조카를 여전히 사랑하기 때문에 크게 성장했어도 상관이 없습니다(물론 조금 아쉬움은 있습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모습만 사랑하고 변해버린 모습은 사랑하지 않는다면 과연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이란 변해버린 모습까지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가능한 것입니다. 인간의 변화를 떠올려 보십시오. 전혀 성장하지 않고 그냥 똑같은 모습으로 자기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 있습니까? 변하는 모습까지 사랑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변한 모습을 도저히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하는 분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결혼하고 나서 “사람이 변했어.”라고 말하면서 실망하고 다투는 경우가 얼마나 많던 지요. 변하는 모습까지 사랑하는 것이 진정으로 우리들이 살아가며 행해야 할 것이며, 이를 위해서 계속된 노력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을 꾸짖을 때가 많았습니다. 그들은 과거의 율법에 얽매여 있어서 말만 하고 사랑의 실천은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시대의 흐름, 그리고 사람의 변화에 맞춰서 사랑의 실천에도 변화가 있어야 할 것인데, 실천보다는 과거 율법의 세세한 조항만을 무조건 따르라고 할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사랑은 종교지도자들처럼 과거에 매어 있어서 어렵고 힘든 사람을 꼼짝 못하게 하는 족쇄가 아니라, 오히려 자유롭게 하는 그래서 더욱 더 기쁘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실천을 위해 높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높은 사람은 지시만 할 뿐이지요. 그래서 말만 하게 됩니다. 사랑은 이 세상 안에서 늘 적극적으로 이루어져야하기 때문에, 말과 행동으로 실천하기 위해서는 말만 하는 높은 자리에서는 불가능합니다. 대신 낮아지고 낮아져야지만 주님의 사랑을 우리의 몸으로 실천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사람이 거꾸로 하늘나라에서 가장 높은 이가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오늘의 명언: 세상 사람은 다 걸어다니는 거울이에요.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기란 어려운 일인데, 상대라는 거울을 통해 내 모습을 돌아볼 수 있는 거지요(정복).
알지 못하더라도(‘좋은생각’ 중에서)
뉴질랜드 목장에서 양을 키우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매일 아침 양들을 몰고 나가 풀을 뜯게 하고 저녁에는 다시 목장으로 돌아왔다.
어느 날, 그는 양들의 다리에서 피가 나는 걸 보았다. 알고 보니 산길을 내려오다 가시나무에 찔린 것이었다. 그 가시나무에는 뽑힌 양털이 수북했다. 그는 가시나무를 베기로 했다.
다음 날, 도끼를 들고 가시나무 근처에 다다랐을 때 그는 주위에 모여 있는 새들을 발견했다. 새들은 양털을 입에 물고 날아갔다. 알을 품는 둥지를 따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나무를 베지 않고 돌아왔다. 친구가 이유를 묻자 그는 말했다.
“새들은 양의 털이 뽑히는 아픔을 모를 거야. 양 또한 자신이 새에게 도움을 주는지 모르겠지. 우리도 알지 못하지만 누군가의 희생과 배려로 살아가는 게 아닐까?”
어떤 것도 쓸모없는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것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이 세상을 살고 있는 내 자신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덕 중의 덕 겸손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덕 중의 덕, 모든 덕 중의 기반이자 으뜸의 덕인 겸손의 덕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겸손의 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몸과 마음으로 실천하기란 얼마나 또 어려운 것인지는 실감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그 무엇 하나 빠지는 것이 없었으며, 남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달란트와 가능성을 최대한 개발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 했습니다. 그 결과 보란 듯이 자기 분야의 최고봉에 올랐습니다. 경제적으로도 크게 성공했습니다. 그 알찬 결실들을 후학들과 세상 사람들에게 관대히 나누어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단 한 가지 부족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겸손의 덕이었습니다. 워낙 많은 노력을 하셔서 정상에 서신 입지전적 분이셔서 그런지,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평가가 조금은 과도했습니다. ‘오늘 제가 있기까지 주님의 은총과 도우심이 컸습니다. 알게 모르게 도와주신 분들이 많았습니다.’라고 한 마디만 붙이면 좋을 텐데 절대로 그런 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그 대단한 업적들의 가치가 적어도 50%는 떨어졌습니다. 그 엄청난 성취가 빛을 바랬습니다.
겸손의 덕은 무엇입니까? 많은 경우 우리는 겸손의 덕에 대해서 착각을 좀 하는 것 같습니다. 겸손과 자기 비하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겸손은 자기를 경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겸손은 자신을 존중합니다. 자신의 가치를 인정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 각자 안에 주님께서 현존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진정 겸손한 사람은 자신을 소중히 여깁니다. 우리 인간 각자를 주님께서 머무시는 지성소요 성전으로 생각합니다.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은 자신에 대한 존중과 배려, 깊은 애정을 바탕으로 이웃과 주님을 존중하고 사랑합니다. 물론 우리 자신의 나약함과 한계, 변화무쌍함과 상처를 바라보며 절망스러워할 때 도 있겠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있는 그대로 우리가 처한 현실을 솔직히 인정하고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살아갑니다. 그것이 겸손한 사람의 참된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 기간 내내 틈만 나면 대립각을 세우고 강하게 질책하시던 무리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바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그분께서 그토록 강하게 그들을 몰아세운 이유는 그들의 위선 때문이었습니다. 위선은 겸손의 덕과 정 반대쪽에 서 있는 행동방식입니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위선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말과 행동이 철저하게 다릅니다. 생각과 구체적인 삶이 천지차이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자신들의 내면이 위선과 사악으로 가득 찬 나머지 주님께서 현존하실 자리가 완전히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자신들 안에 살아 숨 쉬시고 활동하시도록 자리를 좀 내어드려야 하는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내면은 율법주의와 거짓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그럴 여지가 조금도 없었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이 땅에 인간으로 오신 온유하고 부드럽고 겸손한 주님이십니다. 한도 끝도 없이 높아진 마음에 주님께서는 결코 찾아오실 수 없습니다. 이천 년 전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 탄생하실 무렵 머무실 방 한 칸조차 없었듯이, 위선과 율법주의와 교만이 가득한 우리들에게 주님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는 자리는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주님께서 일 년 내내 머무시는 거룩한 성전이 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분께서 우리 안에 길이길이 현존하시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지속적인 겸손이요, 지속적인 자기 비움뿐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제자들에게 “모세의 자리에 앉아있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그들은 율법에 대한 해설가로 자처하며 그 지식으로 이익을 바라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알기 때문에 자신들이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바리사이들이 있다. 이 사람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다. 바리사이라는 말은 분리된 자들(perusím)이라는 말에서 왔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행실 때문이 아니라, 가르침을 생각하며 그들의 말을 따르라고 하신다. 즉 그들의 가르침은 따르되 그들의 행실은 따르지 말라고 하신다. 우리들은 사제들의 강론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만, 우리가 듣는 것을 모두 행할 수는 없다. 또한 사제들도 자기들이 가르치는 것을 모두 행하지는 못한다. 다만 가르치는 것을 행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이것이 진정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말만 할 뿐, 사람들에게 율법이라는 짐만 지워놓고 그 짐을 가볍게 해주기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자격도 없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처럼, 교회 안에도 그런 식으로 성직자의 자리에 앉아있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신자들에게 그들이 해야 할 일을 말하지만 자신들은 그것을 행하지 않는다. 신자들에게 부담만 주는 자들이다.
그러나 그 자리에 앉은 많은 사제들은 말하기 전에 행하고 현명하게 이야기 하며 신자들을 도와준다. 이들은 자신들의 말을 듣는 신자들을 격려하려고 스스로 가장 무거운 짐을 진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9)라고 하신다. 신자들에게는 선행을 말하지만, 자신들은 눈가림으로만 하는 사제들은 남들의 눈에는 의인으로 보일지 모르나, 분명히 그의 행동은 의롭지 않은 거짓 교사이다.
주님께서는 이들의 허영심을 폭로하신다. 그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에, 따스함도 가치도 없는 것에 목을 맨다. 성구갑과 옷자락 술이 바로 그들이 변변치 못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하느님의 말씀은 마음에 새기는 것이지 달고 다니는 것이 아니다. 옷자락 술은 율법을 잘 알고 지키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이것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행동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만 보이기 위해 행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유일한 장식은 선행이다. 그들의 유일한 옷자락 술은 예수님의 은총이었다.
그들은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6-7절) 교회 안에도 이런 성직자들과 봉사자들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것들을 들추어내어 그들을 꾸짖으셨다. 주님의 제자들은 이것들을 알 필요가 있었다.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8절) 우리는 물과 영으로 새로이 태어났으며, 아들의 영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에게서 난(요한 1,13 참조) 하느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뜻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11-12절) 자신을 낮춘다는 것은 봉사하고 사랑하기 위하여 자신의 자세를 낮춘다는 것이다. 끝자리라는 것은 바로 봉사하기 위한 자리라는 것이다. 그 사랑과 봉사를 통해 하늘 나라에서는 높은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말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이 아니라, 자신을 낮추어, 끝자리를 택하여 참으로 봉사하고 사랑하는 삶으로 하느님 앞에 나아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권위 있게 해석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줄 수 있을 것이다. 가르침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이 중요하다.
말과 행동이 하나되어 서로를 섬기는 공동체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23,1-2) 율법 학자들은 회당의 ‘모세의 자리’에서 율법을 해석했습니다. 그 자리는 모세 율법의 권위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해석하는 그들의 권위를 인정하셨지만 그들의 언행불일치를 지적하십니다. 그들은 율법에 해박하였고 종교의 순수성을 열성을 다해 지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았습니다(21,3). 그들은 율법에 권위를 두려고 사람들에게 무겁고 힘겨운 짐을 지우면서도 그들 자신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23,4).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좋은 뜻에서 다른 이들에게 모범을 보이려 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심을 과시하려고 겉모양을 꾸몄을 뿐입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23,5) 그들은 하느님이 아닌 자신을 첫 자리에 두었던 것이지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눈이 아니라 인간의 시선을 의식한 그들은 교만에 빠져 사회적 명예에 집착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드러내기 좋아하고, 윗자리 높은 자리를 좋아하며,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스승으로 인정받기를 좋아했습니다(23,6-7).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23,11-12)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인의 직무는 섬김이며(23,11), 서로 섬기기 위해 자신을 낮추는 것이야말로 제자다운 몸짓임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돌아봅니다. 우리는 언행일치의 중요성을 잘 알면서도 입이 발을 앞서갑니다. 자신을 내놓기보다는 지키려 하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말은 적게 하고 사랑으로 경청하며, 말의 무게를 행동으로 옮기도록 힘써야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그분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할 때 우리는 그분의 형제들입니다.”(성 프란치스코, 2신자 편지 52-52)
다음으로 무엇을 하든, 또 어떤 자리에서든 늘 나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해야겠습니다. 드러나야 할 것은 하느님의 영광이며 인정받아야 할 것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나의 삶으로 하느님을 드러내려면 자신을 낮추고 비우고 작아져야만 할 것입니다. 내가 주인공이 될 때 하느님의 자리는 사라져버림을 잊지 말아야겠지요.
우리 모두 위선과 교만에서 벗어나, 사랑을 실천하고 정의를 추구하며 서로를 섬기는 수평적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하루가 되도록 헌신하였으면 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비 신학생들의 담임 부제, 수녀님들과 함께 나가사키로 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여름 프로그램에 함께한 것을 나누고, 격려하는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함께 쉬면서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나가사키는 히로시마와 함께 원자폭탄이 떨어진 곳입니다. 나가사키 사람들은 평화를 기원하는 공원을 조성하였고, 원자폭탄의 참상을 알리는 자료관을 만들었습니다.
나가사키는 일본에서 가톨릭 신자가 가장 많은 곳입니다. 원폭으로 인한 피해자를 돌보았던 나가이 박사는 이렇게 묵상을 하였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흠 없고, 순결한 어린양을 인류구원의 희생 제물로 삼으셨듯이, 나가사키 사람들의 희생으로 전쟁을 멈추게 하였습니다.’ 일본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때까지도 전쟁을 멈추려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후에는 전쟁을 멈추겠다고 선언을 했습니다. 원래 원자폭탄은 나가사키가 아닌 다른 지역에 떨어트릴 계획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날씨가 좋지 않아서 포기했고, 결국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자료관에는 여러 나라말로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나가사키가 원자폭탄이 떨어진 마지막 장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만큼 원자폭탄의 위력은 참담했고, 지금의 원자폭탄의 위력은 더욱 강해졌기 때문입니다. 원망을 원망으로 풀어서는 해결될 수 없습니다. 오직 용서와 사랑만이 원한과 증오와 미움으로 닫힌 마음을 열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어제 읽었던 ‘롯’의 이야기입니다. 보아즈는 롯을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롯이 시어머니를 위해,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충실하게 살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롯은 보아즈의 마음에 들었고, 이스라엘 민족의 큰 별이 되는 ‘다윗’ 가문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보아즈가 롯의 이야기를 알고 있듯이,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하는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정말 고마운 것은 하느님께서 지금 당장 나의 허물 때문에 나를 벌하거나, 판단하지 않으시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내가 다시금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삶을 살 수 있도록 기다려 주신다는 것입니다.
군대에 있을 때입니다. 모두가 쉬는 주말에 가끔씩 ‘사역’이라는 이름으로 일을 할 때가 있습니다. 갑작스레 높은 분이 오신다던가, 부대 주변의 시설이 비바람에 무너졌을 때 청소를 하거나, 복구 작업을 해야 합니다. 사실 다들 쉬고 싶은 주말에 일하러 나가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은 아닙니다. 일직사관이 인원을 모집합니다. ‘참호 복구 작업 20명 나와라.’, ‘장마철 대비 하수도 정리 작업 10명 나와라.’ 그러면 대게는 계급 순으로 밑에서부터 작업 인원이 정해집니다. 그런데 그런 작업에 계급이 높은데도 지원을 하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물론 후배들이 잘 따르는 친구입니다.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작업도 쉽게 하는 그런 친구들입니다. 힘든 일, 고된 일을 해도 언제나 밝고 환한 그런 친구들은 쉽게 볼 수는 없지만 밤하늘을 비추는 별과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 사회에도 그런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달동네에서 공부방을 하는 대학생 친구들도 있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여름에 산으로, 들로 바다로 휴가를 가는데 달동네의 공부방으로 휴가를 가는 친구들입니다. 다들 가고 싶어 하지 않는 작은 성당으로 자청해서 지원하는 신부님도 있습니다. 주변을 보면 하늘의 별처럼 기쁨과 희망을 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마음에 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오늘 복음에서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남을 섬기는 사람, 타인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하느님께 사랑을 받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단순히 눈을 뜨고 있으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어둠 속을 밝히는 ‘횃불’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꺼져가는 불꽃을 다시 키우는 ‘불쏘시개’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뒤로 숨기보다는 언제나 당당하게 앞서서 가셨던 주님처럼 선두에 서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문득 힘든 일, 고된 일이면 늘 앞장서서 나아갔던 군 선배가 생각납니다.
삶의 중심, -자유, 겸손, 섬김-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중심이 없다’, ‘중심을 잃었다’, ‘중심을 잡았다’ 모두 중심의 중요성을 상기시키는 말마디입니다.
아마 제가 강론중 지금까지 가장 많이 다룬 주제는 ‘삶의 중심’일 것입니다.
사실 삶의 중심보다 더 중요한 주제는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모든 것을 갖췄어도 삶의 중심이 없다면 그 인생은 사상누각沙上樓閣, 모래위의 집같아 지극히 위태하고 불안할 것입니다.
삶에 일관성도 없고 예측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제 사제서품 25주년 은경축 상본의 성구가 생각납니다.
늘 제 좌우명처럼 삼고 있는 말씀입니다.
지체없이 택한 바오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필립1,21ㄱ).
내 삶의 중심은 그리스도란 고백입니다.
우리 수도생활을 '하느님을 찾는 삶'이라 정의합니다.
바로 하느님이 우리 삶의 중심이란 고백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너무나 평범하고 자명한 진리입니다.
위의 성구와 관련된 일화가 지금도 생생합니다.
제 동료 교구 사제가 택한 사제 서품 성구였고 제의에도 이 글자를 디자인하여 넣었다는 이야기에 호기심이 발동해 물었습니다.
동료사제의 고백입니다.
“제 성소가 흔들릴 때마다 저의 성소를 지켜준 성구입니다.
신학교 다닐 때 여러번 짐을 쌓았다가 이 성구를 묵상하면서 짐을 풀었습니다.
그리스도 대신 다른 대상을 넣어 봤습니다.
‘나에게는 여자가 생의 전부입니다.’
‘나에게는 재산이 생의 전부입니다.’
‘나에게는 돈이 생의 전부입니다.’
‘나에게는 권력이 생의 전부입니다.’ 등 무엇을 넣어도 마음이 흡족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그리스도를 넣어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고백했을 때 비로소 마음의 안정과 평화였습니다.”
바로 그리스도가 우리 삶의 중심이라는 고백입니다.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대상이 우리 삶의 중심이 될 때 이들은 그대로 우상이 되고 알게 모르게 우리를 노예화함으로 우리는 자유를 잃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언제나 삶의 중심에 모실 때 비로소 자유롭고 진실하며 단순한 삶입니다.
하여 사부 성 베네딕도도 그의 제자들에게 ‘그 무엇도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보다 앞세우지 말라.’ 당부하십니다.
우리 수도공동체가 약한 듯 해도 굳건한 일치를 이루며 사는 것도 공동체의 중심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하느님이 우리 삶의 중심임을 확인確認하고 강화强化하기 위해 끊임없이, 평생, 매일, 규칙적으로 바치는 공동전례 기도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의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예수님의 비판이 대상이 되었던 바리사이들은 삶의 중심이 허약했습니다.
심하게 말하면 삶의 중심이 없었습니다.
삶의 중심이 없을 때, 그리스도가, 하느님이 삶의 중심이 되지 못할 때 말과 행동이 다른 표리부동表裏不同의 삶입니다.
이들의 모든 삶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허영과 교만의 진실치 못한 위선적 삶입니다.
윗자리와 높은 자리를 탐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며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하는 실속이 없는 외부 지향적 껍데기의 삶입니다.
'참 나'가 없는 공허한 환상속의 헛된 삶입니다.
이 모두가 삶의 중심이 부재한 탓입니다.
하느님이, 그리스도가 삶의 중심이 되지 못했을 때 자업자득의 결과입니다.
다음 주님의 복음 말씀은 한 분이신 그리스도를, 아버지를 삶의 중심으로 삼으라는 우리 모두를 향한 강력한 권고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흡사 자유의 대헌장같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우리 삶의 중심이 될 때 모든 우상들로부터 자유로운 삶이요 영적 건강의 삶입니다.
허영과 환상의 위선적 삶으로부터 해방입니다.
복잡하고 혼란한 삶이 아닌 참으로 질서잡힌 진실하고 단순한 삶입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들’이요 서로간은 ‘형제들’이기에 상호존중相互尊重에 만민평등萬民平等의 당당한 삶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체감하는 진리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가,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이 삶의 중심이 됐을 때 참 자유인의 삶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자유는 최종 목적이 아닙니다.
섬김의 삶을 통해 비로소 자유의 완성입니다.
오늘 복음의 결론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참으로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 때 자유로운 삶, 겸손한 삶, 섬기는 삶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여 분도 성인은 수도공동체를 ‘주님을 섬기는 학원’이라 정의합니다.
작년에 작고하신 이 시몬베드로 아빠스님의 모토 역시 ‘서로 섬기자’(성규72,4)였습니다.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사랑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바로 섬김의 삶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일 때 기본에 충실한 본질적 삶입니다.
저절로 자유로운 삶에 섬김의 삶입니다.
바로 제1독서의 룻이 그 모범입니다.
알게 모르게 하느님은 룻의 삶의 중심이 되셔서 그를 인도해주셨고 룻은 최선을 다해 자유롭게 겸손한 섬김의 삶으로 응답했습니다.
이런 룻이 있었기에 다윗의 출현도, 마침내 그리스도의 탄생도 가능했음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깊고 원대遠大하고 섬세한 손길이 룻뿐 아니라 우리 삶 속속들이 미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해주시며, 자유롭고 겸손한 섬김의 삶에 항구하고 충실할 수 있게 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 그분의 길을 걷는 모든 사람!”(시편128,1).
아멘.
바른 행실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어떤 사람이 ‘아마도 죽은 후에 신부님들은 입만 천당 가고, 수도자들은 귀만 가고, 일반 신자들은 발만 갈 것입니다’ 하고 우스갯소리를 하였습니다. 신분에 맞는 삶을 산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로 받아들였습니다. 아는 것이 많거나 좋은 말을 많이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삶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내로라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삶이 표양이 되지 못하고 있음을 아셨기에 군중과 제자들에게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23,3).하고 말씀 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 다가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오히려 장애가 될 때가 많습니다. 스스로 실천하지 않으면서 복음을 전한다고 하기 때문입니다”(마더 데레사).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수도자와의 만남에서 “청빈서원을 하지만 부자로 살아가는 봉헌된 사람들의 위선이 신자들의 영혼에 상처를 입히고 교회를 해칩니다. 또한 순전히 실용적이고 세속적인 사고방식을 받아들이려는 유혹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들은 것과 말한 것, 행하는 것 사이에는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듣는 이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가 아니라, 율법을 실천하는 이라야 의롭게 될 것”(로마2,13)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좋아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진심으로 실행하십시오”(에페6,6).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두고 오이를 심으면 오이를 거두는 것은 자연의 이치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거두는 것도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 율법학자들이 꾸중을 듣는 것은 그들의 지향과 행동이 주님의 마음과 일치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으로 말해야 하고 우리의 삶을 통해 주님이 말씀하시도록 나를 도구로 내놓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 라고 하셨습니다.
길다란 예복을 걸치고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높은 자리를 찾으며 스승이라는 소리를 듣기를 원하고 속으로는 온갖 잡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거룩한 척하는 사람은 어느 시대나 있어왔고 지금도 있습니다. 그게 바로 저입니다. 섬기는 사람이 되고(마태23,11), 자기를 낮추는 사람(마태23,12)이 되어야 한다고 강론을 하면서도 정작 대접 받는 것에 익숙해져 있으니 큰일입니다.
“백성이 떼지어 모여들듯 너에게 와서, 나의 백성으로 네 앞에 앉아 너의 말을 듣는다. 그러나 그 말을 실천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입에는 열정이 차서 그럴듯하게 행동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제 이익만 좇아간다”(에제33,31).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 오시면 “그분께서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 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때에 저마다 하느님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1고린4,5).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둘 것이요, 오이를 심으면 오이를 거둘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심든지 정성껏 심어야 하겠습니다. 실행이 해답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행실이 표양이 되어야 하고 버릇없는 이들과도 함께해서 좋은 것으로 이끌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악에서 선을 이끌어 내시듯 말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을 희망하며' 사랑합니다.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마태오.23,3)
김종오 신부님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생각과 말과 행동이 갈라지지 않고 통합되어 자신의 삶으로 드러납니다. 말한 대로 사는 만큼 우리는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실천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좋은 말도 ‘울리는 괭가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신뢰를 잃게 됩니다. 신뢰를 잃은 개인은 외로워지고, 신뢰를 잃은 지도자는 저항에 부딪힙니다. 배신감과 좌절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분노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정치 지도자가 신뢰를 잃으면 정치를 불신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정치인을 불신하면 정부를 불신하게 됩니다. 정부를 불신하면 사회를 불신하게 됩니다. 사회를 불신하면 불안한 사회가 되고 불안한 사회는 불행한 나라로 됩니다. 신뢰를 잃은 지도자는 개인을 넘어서 국가를 불안하고 불행하게 만듭니다.
국민들이 신뢰하는 지도자가 곧 훌륭하고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신뢰받지 못하는 지도자는 불행한 지도자입니다. 말한 것을 실행하는 만큼 지도자는 신뢰와 생명력을 가지게 됩니다. 내적으로 국민들의 신뢰를 받지 못하면 외적으로도 힘을 잃게 됩니다.
말하고 실천하는 지도자는 ‘참’ 공동체를 만듭니다. 정치 지도자가 말한 만큼 실행하면 ‘참 국가’를 만들게 됩니다. 종교지도자가 말하고 실행하면 ‘참 신앙인’이 됩니다.
개인이나 집단 이기주의에 물든 ‘거짓 지도자’는 사람들을 이용하기에 급급하지만, ‘참된 지도자’는 진리와 정의를 위해 자신과 집단을 이용하도록 내어줍니다.
사랑과 진리의 ‘말씀’대로 행동하며 사람들의 아픔을 위로하는 지도자가 조금씩 보이며, 정의가 조금씩 실현되는 것 같아 행복함을 느끼는 요즈음입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파티마 성모님 한국순회를 위한 9일기도 다섯째 날” 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에 ‘스승’으로 대우받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죄상을 세 가지를 고발하십니다.
<첫째>는 그들의 언행의 불일치와 남에게 짐 지움을 질타하십니다.
“그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 않는다.그들은 무거운 짐을 꾸려 남의 어깨에 메워주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마태 23,3-4)
<둘째>는 그들의 표리부동과 위선을 질타하십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마태 23,5)
<셋째>는 그들의 자만과 허영을 질타하십니다.
“그들은 잔치 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사람들에게 스승이라 불리기를 좋아한다.”(마태 23,6-7)
그렇다면, 대체 어떤 이가 참된 스승인가?
사실, 스승이 없어서 우리 시대가 이 모양으로 혼탁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사방천지에서 만나는 우리 삶의 동반자들을 스승으로 알아 모시지 못함은, 우리가 그들의 제자가 되어 머리를 굽히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만약 지금 나에게 스승이 없다면, 내 형제에게 머리를 굽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공자께서 말씀하길 ‘셋이 함께 길을 걸으면 그 중에 한 명은 스승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여기 모인 우리 중에 어찌 스승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사실은 스승이 없음은 스승이 없어서가 아니라, 스승을 곁에 두고도 눈이 먼 까닭이요, 제자가 되어 머리를 숙이고자 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자신의 무지를 깨우쳐주는 위대한 스승을 찾으면서도, 무지를 깨우쳐주기를 바라기보다 자신의 유식을 인정받기를 바랍니다. 무식이 드러나면 감사하기보다, 오히려 상처받으니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참된 스승을 지척에 두고도 머리 굽혀 공경하기보다 오히려 고개를 쳐들어 먼 데서 스승을 찾고 있으니, 우리는 눈먼 이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누가 참된 스승인가” 하고 묻기에 앞서, “진정, 나는 참된 제자이고자 하는가?” 하고 물어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오늘도 고개 숙여 배우려하기보다, 목을 뻣뻣이 세우고 가르치기를 일삼는 저는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저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진다.”(마태 23,11)
이는 ‘낮춤’과 ‘섬김’이야말로 ‘참된 스승’이 되는 길이요, 동시에 ‘참 제자’가 되는 길임을 말해줍니다. 바로 당신께서 그렇게 낮추시고 섬기셨습니다. 그리하여 “참된 제자”가 되시고, 바로 그로 말미암아 “참된 스승”이 되셨습니다.
사실, 당신께서는 하느님이심을 포기하고 사람이 되어 오시어 종으로 낮추실 대로 낮추어 바닥이 되셨습니다. 아예 종과 짐승의 ‘거처’에서 짐승의 ‘먹이’처럼, 구유에 누우셨습니다. 그러니, “구유”는 아기 밑으로 내려가 그를 누인 성모님의 낮은 자리의 표상이기도 합니다.
또한, 최후만찬에서는 자신을 낮추고 종이 되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사실, 당시 유대인들은 종이라 할지라도 주인의 발은 씻지는 않았습니다. 정결법을 벗어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길의 온갖 더러움을 묻힌 발을 씻기는 일은 당시의 천한 이방인 노예들이 하는 부정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종 가운데서도 ‘이방인 종’으로 자신을 낮추시어, 제자들을 섬기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죄인의 자리에서, 이방인 노예들에게나 집행되는 십자가형을 받으셨습니다.
오늘, 저는 ‘참된 제자’ 한 분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분은 바로 오늘 우리가 공경하고 있는 주님의 종이신 성모님이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참으로 “참된 제자”이시기에, 신앙의 모범이 되셨습니다.
오늘은 “제자이신 성모님”에 대해서 보고자 합니다. 곧 ‘제자로서 성모님이 지닌 신앙의 특성’을 간단히 보고자 합니다.
교종 바오로 6세는 사도적 권고 [마리아 공경](Marialis Cultus)에서,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마리아를 본받아야 하는 것은 마리아께서는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온전히 그리스도를 따르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라, 예수님의 제자 직분을 구별되고 탁월하게 수행하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성모님께서 “그리스도의 첫 제자”요, “참 제자”였음을 말해줍니다.
특별히, 오늘은 “제자로서의 성모님”의 모습을 ‘말씀과의 관계를 맺으시는’ 제자의 모습을 통해 보고자 합니다. 이는 “렉시오 디비나의 모범이신 성모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를 성모님께서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을 받고 응답한 말씀,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는 말씀을 통해서보고자 합니다. 곧 성모님께서 ‘제자로서 지닌 신앙의 특성’을 간단히 네 가지로 보고자 한다.
<첫 번째 특성>은 “보십시오. 여기 있습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라는 말씀에서 드러나는, ‘주님과 함께 있음, 곧 주님 면전에서 향하여 있음’ 입니다.
이는 제자로서 지녀야 하는 우선적인 첫 번째 특성입니다. 곧 제자는 우선적으로 스승과 ‘함께 있는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시어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마르 3,9), 붙잡혀 가셨을 때에도 하인은 베드로가 “그와 함께 있던 사람”(마르 14,67)으로 증언합니다.
함께 있다는 것은 추상적, 관념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주님 면전에서 대면하고 있고, 향하여 있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는 그분이 우리를 향하여 함께 계심으로써 가능해지는 일입니다.
이 “하느님 현존에 대한 의식”은 아주 중요합니다. 이는 모든 기도의 출발점이기도 하고, 마지막 종착점이기도 합니다. 모든 기도는 바로 이 현존에서 시작됩니다. 애시 당초, 이 하느님의 현존이 없이는 그 어떤 기도도, 응답도, 신앙도, 제자 됨도 시작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하느님의 현존’으로 말미암아, ‘그분과의 관계 안’에서 정체성을 지니게 됩니다. 곧 ‘당신은 주님이시오, 나는 주님의 종입니다’라는 신원을 지니게 되고, 제자로서의 신앙을 지니게 됩니다. 그리고 제자로서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게 됩니다.
성모님께서 바로 그러하셨습니다.당신은 항상 주님과 함께 있고, 주님을 향하여 방향 지워져 있었습니다.그리고 그분의 여종의 신원으로 주님과 관계 안에 머무르셨습니다.
<두 번째 특성>은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라는 말씀 안에 들어 있는‘말씀의 경청’ 입니다.
이는 제자는 ‘듣는 이’, 곧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말씀하시는 분은 주님이시요, 듣는 이는 제자입니다.
그러니 제자는 자신의 말이나 생각이나 혹은 다른 누구의 말이 아니라,바로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이입니다. 들려주는 대로 듣는 것입니다.곧 자신의 관점에서 듣는 것이 아니라, 들려주는 대로 사실적으로 듣는 것입니다.
이는 주도권을 말씀에게 넘겨드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자신은 들은 말씀에 대한 응답자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존중이요 영접입니다.
결국, ‘경청한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가 제자입니다.
성모님께서는 경청하는 이의 표상입니다. 항상 말씀과 함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말씀을 경청하셨습니다. 항상 말씀 아래에서 제자가 되고 귀 기울려 들었습니다.
<세 번째 특성>은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이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는‘자신을 말씀이 이루어져야 할 공간이요 자리로 내어주는 일’입니다. 곧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고 ‘묵상’하는 일입니다. 말씀과 자신을 관계 맺는 일입니다.
제자는 이처럼, 말씀과 관계 맺고 살아가는 이들이요, 자신을 말씀이 머무는 장소로 내어주는 이입니다.
그것은 경청한 말씀을 자신 안에 받아들여 비추어보는 일입니다. 곧 말씀의 비추임으로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입니다. 말씀의 비추임으로 깨닫게 되는 일입니다.
자신의 속살이 드러나고, 자신의 생각과 속셈이 들통 나고, 살과 뼈가 갈라지는 일입니다.
그것은 받아들인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이요, 말씀과 사귀고 친교를 맺는 일입니다.
성모님께서는 그렇게 경청한 말씀을 가슴에 품으셨습니다. 그렇게 자신을 말씀이 머무는 자리로 내어드렸습니다. 말씀을 간직하고 곰곰이 생각하셨습니다. 자신을 말씀의 감실로 내어주셨습니다.
그렇게 제자로서 주님에게 자신을 말씀께 내어드리고, 말씀과 친교로 교제하셨습니다.
<네 번째 특성>은 “바랍니다.” 라는 말씀에서 볼 수 있는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요 ‘말씀에 순명하는 일’ 입니다. 곧 제자는 주님께 열망을 품고 간청하고 기도하며,자신이 아니라 ‘주님께 희망을 두는 이’ 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희망이 아니라, 그분의 희망이 이루어지를 바라는 희망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희망을 내려놓는 것이며, 자신의 희망을 당신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겟세마니에서의 예수님의 기도에서처럼,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것을 스스로가 바라는 것입니다.곧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을 자의로 스스로 원하는 것입니다.
제자는 이처럼, 순명하는 이 입니다.곧 자신의 뜻을 포기하고 자신에게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순명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자신에게서 이루어지는 일을 끌어않는 일입니다. 고통을 피해가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통하여 응답하는 것이요, 바로 그 속에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곧 고통 안에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에 순명하는 일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동정으로 잉태하심으로 율법을 어기는 자로 간주되고, 불결한 자로 처벌 될 수 있는 상황에 순명하셨습니다. 주님의 제자로서,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희망하며 자신의 원의로 스스로 순명하셨습니다. 참으로 참된 제자이셨습니다.
이처럼, 성모님께서 제자로서 지니신 믿음의 특성은 말씀에 뿌리박고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말씀을 대면하여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의 신원을 깨닫고 말씀을 경청하였습니다. 그리고 경청한 말씀을 받아들여 자신 안에 잉태하셨습니다(lectio, auditio).영접한 말씀을 간직하여 품으시고,교제와 친교의 사귐을 가지셨습니다(meditatio). 또한, 그 말씀에 자신을 건너드리고 봉헌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셨습니다(oratio).
그리고 그 바람과 희망 안에서 말씀의 성취를 지향하여 열망과 사랑 안에 머무셨고 말씀의 사랑에 지배당하고 빠지셨습니다(contemplatio).
나아가, 말씀의 빛 안에서 사셨습니다. 말씀을 삶으로 탄생시키고 실현하셨습니다. 들은 말씀을 삶으로 써 나가며, 삶 안에 살아계시고 활동하시는 말씀과 동행하셨습니다(actio).
이제, 우리는 주님의 제자로서의 이 아름다운 여행을 성모님과 함께 하는 축복을 입었습니다. 그것은 성모님께서 지니신 그 믿음을 우리도 지니고서. 성모님과 함께 이 거룩하고 아름다운, 이 멋지고 활기찬 신앙의 길을 가는 일입니다. 말씀이신 주님과 함께 말입니다. 우리의 모범이신 성모님 사랑합니다. 아멘.
<나>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보여 지는 내 안에
보여 질 수 없는 내가 있어요.
당신은 보여 지는 나를 보지만
나는 보여 질 수 없는 나를 보지요.
나를 보는 당신만을 의식한다면
나를 보는 나는 있을 수 없답니다.
없는 나를 당신께 애써 보이려 한다면
당신과 나 모두 헛것일 뿐이랍니다.
있는 내가 당신께 자연스레 다가설 때
참 당신과 참 내가 함께하지요.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마태 23, 4)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세상의
모든 변화에는
실행이 있습니다.
하나씩 하나씩
욕심내지 않고
실천하려합니다.
사람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은
가치있는 실천입니다.
가치있는 실천에는
건강한 노동이
언제나 자리잡고
있습니다.
노동을 통해
삶의 의미와
겸손을
배우게됩니다.
하늘과 땅또한
자연의 질서안에서
실행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살면살수록
말이 아니라
실행하는 기쁨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됩니다.
사람이 되어오신
예수님의 육화또한
지극한 사랑의
실행이었습니다.
우리 인격은
실행을 통해
풍요로워집니다.
낮아지는
실행없이는
공동체또한
행복할 수 없습니다.
흉내 내는 것이 아닌
진심어린 실행으로
나아가는 가장
행복한 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