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지막 심판의 진행 과정(마 25:31-46)
우리는 여기에서 대 심판날에 있을 마지막 심판의 진행 과정에 대한 묘사를 찾아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상징적인 몇 개의 구절들이 있다. 즉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이나 또는 심판하는 자와 심판받는 자 사이의 대화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일관하여 이어지고 있는 비유의 실마리(즐거리)가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비유라기보다는 마지막 심판의 설계나 윤곽이라고 불리우는 편이 오히려나을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앞의 비유에 대한 설명이다. 또한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찾아 볼 수 있다.
Ⅰ. 심판자가 심판의 자리에 앉음(31절). "인자가 올 때" 여기에서 몇 가지로 살펴보면,
1. 영원한 복음의 규율에 의해 심판 받게 되는 고난과 시련의 이 세상에서 그가 행하였던 것을 따라 보상과 보응의 세상에서 각 사람이 영원한 행복이나 비참의 상태에로 판결을 받게 될 심판이 장차 있게 될 것이다.
2. 그 날의 심판 집행은 인자에게 위임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 의해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며(행 17:31), 또한 모든 심판이그에게 위임되고 있다. 그러므로 그날의 심판은 모든 것들 중의 중심이다. 여기에서도 다른 곳에서와 같이 마지막 심판에 대해 언급이 될 때 그리스도는 "인자"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의 자녀들(인자들)을 심판하기 때문이며(그 자신이 동일한 성품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더욱 완전하게 심판하실 수 있으시다), 또한 우리 자신의 형상을 취하시고 인자가 되신 그의 놀라운 비하(卑下)가 그날의 그의 승귀와 또한 인간의 성품을 입으신 영광에 의해 보상될 것이다.
3.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한 그리스도의 출현은 놀랍고도 영광스러운 것이 될 것이다. 아그립바와 버니게는 "큰 위엄"을 갖추고 심판석에 왔다(행 25:23). 그러나 그것은 (원어대로 하면 "큰 환상"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참된 영광으로 심판 자리에 올 것이다. 의의 태양은 그 때에 절정의 영광 가운데서 비추게 될 것이며 또한 지상의 왕들 중의 왕은 그의 영광스러운 나라의 부요함과 그의 탁월하신 위엄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이며 모든 세상은 성도들이 지금 믿고 있는 바 즉 그는 아버지의 영광의 광채시라는 사실을 직접 보게 될 것이다. 그는 그의 아버지의 영광 가운데서 오실 뿐만 아니라 중보자로서 그 자신의영광 가운데서 오실 것이다. 그의 초림은 불분명한 검은 구름 아래에서 있었지만 그의 재림은 영광의 밝은 구름 가운데서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미래 영광에 대해 제자들에게 주셨던 확신은 십자가의 장해물을 제거하는 데 또한 다가오는 치욕과 고난을 극복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4.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심판하시려고 그의 영광 가운데 오실 때 그는 그의 모든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오실 것이다. 이 영광스러운 인격(그리스도)은 수행원이 될 뿐만 아니라 공의의 집행자들인 영광스러운 종자(從者), 즉 그의 수만의 거룩한 자(역주:유 14 참조)를 거느리고 있다. 그들은 의식과 봉사를 위해 주님과 함께 오실 것이다. 그들은 법정을 소집하며(살전 4:16), 선택한 자를 모으며(마 24:31), 가라지를 묶으며(마 13:4)), 성도의 영광의 증거가 되며(눅 12:8) 또한 죄인의 불행의 증거가 되기 위하여(계 14:10) 반드시 와야만 한다.
5. 주님께서는 그 때에 그의 영광의 보좌에 앉을 것이다. 그는 "지금" 아버지와 함께 그의 보좌 위에 앉아 있다. 또한 그것은 우리가 담대히 나갈 수 있는 은혜의 보좌이다. 또한 그것은 통치의 보좌이며 그의 조상 다윗의 보좌이다. 그는 그 보좌 위에 앉은 제사장이다. 그러나 "그 때에" 그는 영광의 보좌, 즉 심판의 보좌 위에 앉을 것이다. 솔로몬의 보좌는 다른 어떤 왕국에도 그러한 보좌는 없지만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에 비하면 거름더미에 지나지 않는다(단 7:9, 10 참조). 그리스도께서는 육체 가운데 계셨을 때 재판장에서 죄수와 같이 심문을 받으셨다. 그러나 재림하실 때 그는 재판장고 같이 보좌에 앉으실 것이다.
Ⅱ. 사람들의 모든 자녀들이 그 앞에 나타남(32절). "모든 민족들이 그 앞에 모이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 날의 심판은 보편적인 심판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법정에 출두해야만 한다. 태초로부터 세상 끝 날까지 각 시대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 세상에서 가장 먼 구석에 있거나 가장 불분명하고 먼 거리에 있는 각처의 사람들, 지구 표면에 살고 있는 한 혈통으로 된 모든 민족들이 그 앞에 소환될 것이다.
Ⅲ. 그 때에 고귀한 자와 사악한 자 사이에 있게 될 구분. 그는 가라지와 밀이 추수 때에 구별되듯이,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가 해안에서 가려지듯이 알곡과 쭉정이가 타작 마당에서 구분되듯이 "각각 구별하실 것이다." 사악한 자와 경건한 자가 같은 나라, 같은 도시, 같은 교회, 같은 가정에서 함께 모여 살고 있지만, 그들 사이를 분명히 구분할 수는 없다. 이것이 성도들의 연약성이며, 죄인들의 외식이다. 두 가지가 하나 속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날에 그들은 구별될 것이며 영원히 나뉠 것이다.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이며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말 3:18). 그들은 스스로 이 세상에서 각 사람을 구별할 수는 없으며(고전 5:10), 또 어떤 사람도 그들을 구별할 수가 없다(마 13:29).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에게 속한 자를 아시며 또한 그들을 구분하실 수 있다. 이 구분은 매우 정확하기 때문에 가장 하찮은 성도라 할지라도 죄인들의 무리 속으로 잃어버림을 당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가장 그럴 듯한 죄인도 성도들의 무리 속에 숨지 못할 것이다(시 1:5). 각 사람은 그 자신의 위치로 가게 될 것이다. 이것은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별하는 것에 비교되고 있다. 즉 "보라, 내가 양과 양 사이에 심판하노라"(겔 34:27).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1. 예수 그리스도는 우대한 목자이시다. 그는 지금 목자와 같이 그의 양떼를 먹이고 계신다. 그러나 그는 머지 않아 라반이 자기 양떼와 야곱의 양떼를 구별하고 그 사이를 사흘길이 뜨게 하였던 것(창 30:35, 36)처럼 자신에게 속한 것과 속하지 않은 것 사이를 구별하실 것이다.
2. 경건한 자는 양과 같다. 즉 순진하고 유순하고 참을성이 있고 유용하다. 사악한 자는 낮은 부류의 동물인 염소와 같이 맛이 없고 제멋대로 행동한다. 양과 염소는 이 세상에서 하루종일 같은 목장에서 양육되지만 저녁에는 서로 다른 우리로 분리시켜 집어넣는다. 이와 같이 나눈 다음에 그는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그 왼편에" 둘 것이다(33절).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오른편에 앉은 자들에게 존경을 나타내듯이 경건한 자를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그러나 사악한 자는 영원한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다(단 12:2). 그는 부자를 오른편에, 가난한 자를 왼편에 둘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또한 학식 있고 고상한 사람은 오른편에, 무식하고 멸시받는 자는 왼편에 둘 것이라고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경건한 자는 오른편에 사악한 자는 왼편에 둘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다른 구분들과 소구분들은 그 때에 모두 폐지될 것이다. 성도와죄인, 깨끗한 자와 불결한 자의 큰 구분만이 영원히 남게 될 것이며, 또한 사람들의 영원한 상태가 그것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사악한 자는 왼편손으로(left-handed,의심스러운, 애매한)축복과 부귀, 명예를 취하였는데 그들의 운명도 그와 같이 될 것이다.
Ⅳ. 각자의 이러한 심판에 대한 진행 과정.
1. 오른편에 있는 경건한 자에 관하여 그들에 대한 재판 심리가 맨 처음에 신속히 처리된 것은 그들로 하여금 사악한 자가 심판을 받을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보좌역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때에 사악한 자들은 하늘나라로 먼저 들어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보면서 더욱 비참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눅 13:28).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1) 그들에게 주어진 "영광." 즉 그들이 면제를 받을 뿐만 아니라 높임을 받고 보상을 받게 될 판결(34절). "그 임금이 그들에게 말할 것이다." 목자(이것은 그가 온유하고 세심하게 보살피는 것을 나타낸다)이신 그가 여기에서는 임금(이것은 그가 판결을 내리실 때의 권위를 나타낸다)이시다. 이 임금이란 말이 잇는 곳에 권세가 있다. 이 선에는 두 가지 일들이 있다.
① 성도들은 주님의 축복 받은 자로 인정.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오라."
첫째, 그는 그들에게 복 받을 자임을 선고하고 있다. 그가 그들에게 복 받을 자라고 말한 것은 그대로 된다. 율법은 그들의 많은 폐지에 이르러 그들을 저주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율법의 저주에서 구속하고 그들을 위해 축복을 매입하셨으므로 그들에게 축복을 명령하고 계시다.
둘째, "그의 아버지께 복 받을 자." 그들은 세상에서는 비난을 받고 저주를 받았지만 하나님께는축복을 받은 자들이다, 성령께서 아들을 영화롭게 하시는 것처럼(요 16:14), 아들은 성도들의 구원을 제 1원인이신 그에게 일임하심으로써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고 계시다. 하늘에 속한 것들 안에 있는 모든 축복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흘러나온다(엡 1:3).
셋째, 그는 그들을"나아 오라"고 부르고 있다. 실제적으로 이 "오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뜻을 나타낸다. 즉 "내 아버지의 축복에로 어서 오라. 진심으로 환영하여 마지 않는다. 나에게 오라, 영원토록 나와 함께 있기 위하여 오라. 십자가를 참고 나를 따른 너희들아, 나와 함께 면류관을 쓰기 위하여 나아 오라.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는 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던 내 영혼의 사랑을 받는 자이다. 이제 오라. 내 가슴속으로 오라 !" 오, 이 말씀은 그 날에 성도들의 가슴을 얼마나 기쁨으로 채울 것인가 ! 우리는 지금 은혜의 보좌에로 담대히 나오고 있다. 그러나 그 때에는 영광의 보좌로 담대히 나갈 것이다. 이 말씀은 우리가 나라의 절반을 요구할지라도 그 이상으로 줄 것임을 확신으로써 황금으로 된 홀(忽)을 내어 주고 있다. 이제 성령께서는 말씀 가운데서 "오라"고 하신다. 신부는 기도 가운데서 "오소서"라고 말한다. 그 결과로 아름다운 교체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행복의 완성은 "그 임금이 2나아 오라"고 말할 때 있게 될 것이다.
② 성도들이 아버지의 축복과 나라에로 들어오라는 허락을 받음.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하라."
첫째, 그들이 소유하게 될 행복은 매우 크다(부요하다). 우리가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그들을 위하여 이러한 행복을 구입하셨고 또한 그 자신이 그것을 소유하고 있으시기 때문이다.
1. 그것은 "나라"이다. 이것은 지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소유물로 간주되어지며, 가장 큰 부귀와 명예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나라들을 상속받는 자들은 면류관의 모든 영광들을 지니게 되며, 왕궁의 모든 연락을 즐기며, 왕의 특별한 보물 창고들을 관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천국에서 성도들의 더 없는 행복에 대한 희미한 묘사에 지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만물의 찌꺼기로 여김을 받은 거지들이나 죄수인 자들은 그 때에 나라들을 상속받게 될 것이다(시 113:7; 계 2:26, 27).
2. 그것은 "예비 된" 나라이다. 그 행복은 매우 큰 것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적인 섭리의 소산물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영광의 나라에서 성도들의 환영을 위하여 큰 준비가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아버지는 사랑하는 생각에서 그들을 위하여 그것을 계획하셨으며, 또한 크신 지혜와 능력으로써 그들을 위해 그것을 준비하셨다. 아들은 그들을 위해 그것을 구입하셨고, 있는 곳을 예비하시기 위하여 선구자로서 들어가셨다(요 14:2). 나라를 위해 그들을 예비하고 계신 성령은 실제로 그들을 위해 그것을 준비하고 계시다.
3. 그 나라는 "그들을 위해"예비 되고 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나타내고 있다.
(1) 이 행복의 적합성. 그 행복은 모든 점에 있어서 영혼의 본질 성품에 매우 어울리는 적합한 것이며 또한 성화 된 영혼의 새로운 성품에도 매우 적합한 것이다.
(2) 그것들의 고유성과 그것들에 대한 권리. 그 나라는 그들만을 위하여 예비 되고 있다. 당신들과 같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내 이름으로 말미암은 당신들 개인적으로 또는 특별히 당신들만을 성화를 통하여 구원에로 선택된 당신들만을 위하여 예비 되고 있다.
4. 그 나라는 "창세로부터" 예비 되고 있다. 이 행복은 성도들을 위하여 계획되었으며,또한 그들의 시간이 시작하기 전, 즉 영원전부터 그 행복을 위해 예비 되었다(엡 1:4). 마지막에 있게 될 것도 모두 맨 처음에 의도되었다. 무한하신 지혜(하나님)는 처음 창조될 때부터 성도들의 영원한 영화에 목표를 두었다. "모든 것은 너희를 위함이다"(고후 4:15). 또한 그것은 이 행복의 거주지에 대한 준비를 나타내고 있는데, 이 거주지는 창조 사역(창 1:1)의 맨 시초에 있어서 축복 받은 자의 거할 장소였다. 땅의 기초가 확정되었을 때 하늘에서는 새벽별들이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욥 1:4-7).
둘째, 그들이 가지게 될 소유권은 매우 좋은 것이며, 그들은 와서 "그것을 상속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상속을 받게 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어떤 주선에 의해서가 아니라, 법률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순전히 "하나님의 행위에 의거해서이다." 하늘의 상속자로 만드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우리의 양자 됨을 인하여 상속자가 되는 것이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이다." 상속이라는 칭호는 가장 아름답고 확실한 칭호이다. 그것은 가나안 땅을 소유할 것을 암시하고 있는데, 그 땅은 상속에 의해 물려받았으며 50년전(the year of jubilee)보다 더 이상, 더 오랜 후에 양도되지는 않을 수 없다. 이 세상에서 성도들은 아버지(하나님)의 정한 때까지 지도를 받고 지배받는 이 시대에 국한된 상속자에 불과하다(갈 4:1, 2). 그 때에 그들은 지금은 은혜로 말미암아 명칭만을 가지고 있는 것을 완전히 소유하게 될 것이다. "나아 오라." 그리고 그것을 상속받으라.
(2) 이러한 영광의 근거(35, 36절). "이는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적인 가치나 탁월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선행의 공로로 말미암아 천국의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추정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선행은 하나님에게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세상을 지배하시는 동일한 규칙에 의해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며, 따라서 그 율법에 순종하는 자들을 보상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의 순종이 단지 한 명복으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대한 증거로서 언급이 될 것이다. 이러한 행복은 순종하는 신자들에게 선고가 내려질 것인데 이는 행위와 보상 사이의 균형을 예상하는 quantum meruit ─ 즉 공로의 평가에 의거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구입된 하나님의 약속과 또한 확실한 조건과 기한에 의해 보장된 그 약속의 은혜에 의거해서이다. 구입과 약속으로 명칭이 주어졌지만, 그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순종이다. 조건에 의거하여 행위나 유언에 의한 재산권을 그 조건이 수여자의 참 의도대로 수행될 때에 절대적이 된다. 또한 그때에 그 명칭이 순전히 행위나 유언에 의거하여 설정되었다 하더라도 그 조건을 수행한 것이 증거로 제시되어야만 한다. 여기에서도 그와 같이 되고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그를 순종하고 계속적으로 선한 일을 수행하는 자들에게만 영원한 구원의 창시자가 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언급된 선행은 우리가 흔히 일컫는 가난한 자에 대한 자선 행위와 같은 것이다. 즉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히지 않은 사람들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품으로써 그렇게 한 자들이다. 성실한 순종의 한 실례는 다른 나머지 모든 것을 대신할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은 일반적으로 역사 하는 믿음이 기독교에서 모든 것들 중의 모든 것임을 보여 주고 있다. "네 믿음을 네 행위로 내게 보이라." 장차 선한 것으로 간주 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지만 현재 선한 교제에서 맺어지는 의의 열매는 큰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여기에 묘사된 선행들은 세 가지 일들을 내포하고 있는데, 그것은 모든 구원받은 자들 가운데서 발견되어야만 한다.
① 자기 부정과 세상에 대한 별시. 세상에 대해 선행을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훌륭한 일은 이 세상에 없다. 선행을 베풀 수 있는 자금(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는 가난한 것에 자족하고 즐겁게 여김으로써 그와 동일한 의향을 나타내어야만 한다.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다.
② 우리의 형제들에 대한 사랑. 이것은 두 번째 큰 계명이며, 율법의 완성이며, 영원한 사랑의 세계를 위한 특별한 준비물이다. 우리는 선을 행하고 나누어줌으로써 이 사랑을 증거 해야만 한다. 좋은 바램(역주:타인에게 말로만 하는 선행)은 사랑이 없는 조롱거리에 지나지 않는다(약 2:15, 16; 요일 3:17). 줄 만한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는 다른 방법으로동일한 의향을 나타내 보여야만 한다.
③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관심을 가짐. 여기에서는 그리스도를 인하여, 그를 사랑하고 목표를 둠으로써 가난한 자를 도와주는 것에 대하여 보상이 주어지고 있다. "이러한 것"은 특별히 선행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그러한 일을 하게 될 때 우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일을 행하는 자들은 자신의 생계를 위한 일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살아나가도록 돕는 일들도 할 수 있을 것이다(엡 6:5-7). 그러한 선행들은 그 때에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해진 것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골 3:17).
"내가 주렸었다." 즉 내 제자들과 추종자들이 선행을 함으로 원수들의 핍박을 받거나 또는 하나님의 섭리의 일반적인 통치로 말미암아 그렇게 주렸었다. 이러한 일들에는 의인에게나 악인들에게 있어야 할 단 한가지 경우가 있다. 그런데 너희는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첫째, 하나님의 섭리는 이 세상에서 그의 백성들의 형편을 여러 가지고 배치하시고 처리하신다. 예를 들면 한 사람이 위안을 줄 수 있는 상태에 있다면 어떤 사람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하늘나라의 진수성찬으로 먹는 자들에게 있어서 주리고 목마르게 되며 일용할 양식이 모자라게 되는 것은 별로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또한 하나님의 집에 있는 자가 낯선 나라에서 나그네가 되거나 그리스도를 옷 입은 자가 자신의 몸을 따뜻하게 해 줄 옷이 없다는 것이나 또 다 건강한 영혼을 가지고 있는 자가 병든 몸을 가지고 있거나 그리스도께서 자유롭게 하신 자가 감옥에 있는 것도 결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둘째, 우리의 능력에 따라 자비와 자선을 베푸는 것은 구원에 반드시 필요하다. 또한 그 날의 심판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것보다 더 큰 강조가 그것들에게 주어지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우리의 순종의 증거가 되어야만 한다(고후 9:13). 그러나 긍휼을 나타내 보이지 않는 자들은 긍휼없는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는 겸손하게 의로운 자들에 의해 인정되고 있으며, 재판장 자신에 의해 설명되고 있다.
1. 그것은 의로운 자들에 의해 의문시되고 있다(37-39절). 이것은 그들이 나라를 상속받기를 싫어하거나 또는 그들의 선한 행위들에 대하여 부끄러워하거나 또는 그것들에 관한 자신들의 양심의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다.
(1) 이 표현들은 상징적이며,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자비의 선행들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으며, 특히 그를 인하여 자신의 백성들에게 행해진 선행에 대해 기뻐하신다는 이러한 위대한 진리들을 소개하고 강조하기 위하여 언급되었다. 또는,
(2) 그것들은 영화롭게 된 성도들이 가지게 될 겸손한 찬탄을 나타내는 데 그들은 자신들이 보잘 것 없고 무가치한 자임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더욱 높이 칭송을 받으며 또한 풍성하게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나이까?"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은혜스러운 영혼들은 쉽사리 자신의 선한 행위들에 대하여 비천하게 생각하며, 특히 장차 계시될 영광과 비교할 때 무가치한 자로 여길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우리가 금식하되 주께서 보지 아니하심은 어찜이뇨?"(사 58:3)라고 말했던 자들의 성격과는 얼마나 먼 것일까? 천국에 있는 성도들은 무엇이 그들을 이리로 데려 왔는가와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과 그들의 봉사에 대해 그렇게 유의하셨는가를 이상히 여길 것이다. 나 다니엘은 주님에게서 칭찬의 말씀을 듣게 될 때에 얼굴을 붉혔다.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요 1:47, 48)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았나이까? 우리는 여러 번 고통 중에 있는 가난한 자를 본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언제 당신을 보았나이까?"(엡 3:20)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계시리라고 우리가 생각하는 곳에 있지 아니하시고 우리들 가운데 더 많이 계시다는 사실이다. 분명히 주님은 그의 말씀과 규율, 사역자들, 그의 성령 또한 그의 가난한 자들에 의해 이 곳에 계시며,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요 1:48)
2. 그것은 심판자 자신에 의해 설명되고 있다(40절). 이 소자, 그들 중 가장 작은 소자, 즉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성도들의 선행들은 그들이 심판날에 나타날 때,
(1) 모든 기억된 바가 될 것이다. 가장 작은 것, 가장 작은 것 중의 하나라도 간과되지 않을 것이며 심지어 냉수 한 그릇도 간과되지 않을 것이다.
(2) 그러한 선행들은 그들의 장점으로 간주될 것이며 또한 그들에게 주어질 수 있는 최고의 의미로 해석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연약함을 잘 활용하시듯이 그들의 봉사를 최대한으로 활용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주린 자를 먹인 자들과 벗은 자를 입힌 자들에 대하여 어떤 보상을 하셨는가를 여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면 그렇게 행할 자금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경건하면서도 가난한 자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들은 버림을 받아야만 하는가? 아니다.
①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나 그들 중 가장 작은 자들까지도 그의 형제로 인정하실 것이다. 그는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시는 것"(히 2:11)을 수치스럽게 여기거나 망신스러운 것으로 여기지 않으실 것이다. 그는 영광의 절정에 계실 때 그의 보잘 것 없는 친구들을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나사로는 친구로서, 형제로서 그의 가슴에 안기었다. 이와 같이 그는 그들을 시인하실 것이다(마 10:32).
② 그는 그들에게 행해진 긍휼을 그 자신에게 행해진 것으로 여기실 것이다. "그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이것은 그들을 구제한 부자에게와 같이 구제 받은 가난한 자에게 대한 존2경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백성들의 주장을 지지하시며 또한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시며, 또한 그 자신이 그들에게서 사랑을 받으시고 인정을 받으신 것으로 여기신다는 사실이다. 만일 그리스도 자신이 가난하게 우리들 가운데 계셨다면, 얼마나 우리는 쉽사리 그를 구제할 수 있었을 것인가? 개인적으로 우리는 얼마나 종종 그를 방문할 것인가? 우리는 자신들의 소유로 그를 섬긴 자들이 가진 명예를 부러워해야만 한다(눅 8:3). 불쌍한 성도들이 있는 곳은 어디든지 그리스도께서는 그들 가운데서 우리의 자비를 받으실 준비를 하고 계시며, 또한 그들은 그의 여기심을 받게 될 것이다.
2. 여기에는 왼편에 있는 사악한 자들에 관한 진행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1) 그들에게 내려진 선고(41절). 왼편에 두어진 것은 불명예스런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는 그들에게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라." 각 말마다 시내산의 2나팔소리와 같이 그 속에 두려움이 있는데, 그것이 커질수록 그 정도는 더욱 비참하게 되고 또한 위로도 없게 되는 것이다.
① 그리스도에게 보다 가까이 있다면, 비록 그의 분노 아래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어느 정도 안심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허락이 되지 않고 "나를 떠나라"고 하실 것이다. 이 세상에서 그들은 종종 그리스도에게로 생명과 휴식을 위해 오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의 부르심에 대해 귀머거리가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게로 오려고 하지 않은 자들이 그에게서 떠나라는 명령을 받게 될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모든 선의 근원인 나에게서,구세주인 나에게서, 그러므로 모든 소망으로부터 떠나라. 나는 너와 더 할 말이 없으며 또한 상대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이 세상에서 그들은 전능하신 자에게 "우리를 떠나소서"라고 말하였다. 그때 그는 "그들의 허황 된 말을 골라내어" 그들에게 "나를 떠나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를 떠나는 것이 지옥 중의 지옥이라는 사실이다.
②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에게서 떠나야 한다면 그들은 축복의 말이나 적어도 친절하고 동정 어린 말 한 마디를 듣고 해고를 당해야만 하지 않을까? 아니다.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라"는 말을 들었다. 축복을 상속받기 위하여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려고 하지 않은 자들은 율법을 깨뜨린 저주의 멍에를 지고(갈 3:10) 그를 떠나야만 한다. "그들이 저주를 사랑하였으므로 그와 같이 저주도 그들에게 임할 것이다. 그러나 의인들은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축복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와 그의 축복에 기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악한 자는 단지 "저주를 받은 자"라고만 불리워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정죄는 그들 스스로의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배반하셨는가? 아니다. 그들이 스스로 배반하였고 저주를 자청하였다(사 50:1).
③ 만일 그들이 저주를 받고 떠나야만 한다면 안락과 휴식의 장소로 들어갈 수 없는가? 자신들이 버림받은 것을 슬퍼하는 것으로도 그들은 충분히 비참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다. 잃어버림을 당할 뿐만 아니라 감각적인 형벌로 받아야만 한다. 즉 그들은 "불"속으로, 즉 몸이 불에 대이는 것만큼 큰 고통과 그보다 더 큰 고통 속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이 불은 자신을 땔감으로 만든 범죄한 영혼들과 죄인들의 양심에 대해 고정적으로 예비 된 영원한 하나님의 진노이다. 우리의 하나님은 소멸하시는 분이시며 또한 죄인들은 즉각적으로 그의 손에 떨어진다(히 10:31; 롬 2:8, 9).
④ 만일 불 속으로 들어간다면 그것은 어떤 불빛이나 온화한 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아니다. 그것은 "예비된 불"이다. 그것은 "이미 설립된"(사 30:33) 고통이다. 죄인들의 정죄는 종종 신적인 능력의 행동이라고 언급이 된다. "그는 지옥으로 내던지실 수 있다." 진노의 그릇으로써 그는 자신의 능력을 알게 하신다. 그것은 "주님의 임재와 그의 능력의 영광으로부터의 파멸"이다. 분노하신 하나님께서 성을 내는 피조물을 어떻게 비참케 하실 수 있는가를 거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⑤ 만일 예비 된 불 속으로 들어간다면 그 지속 기간을 짧게 하든지 단지 "불"속으로만 통과하도록 했으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진노의 불은 "영원한" 불이 될 것이다. 영혼들을 영원히 붙잡아 두고 삼키는 불은 연료가 부족해서 꺼지지는 않는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진노에 의해 불붙여지고 불태워지기 때문에 바람을 더 불어 넣지 않아도 꺼지지는 않는다. 자비와 은혜의 시냇물은 영원히 그 곳으로부터 제외되기 때문에 그것을 끌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물 한 방울이 혀를 서늘케 하도록 해달하는 요구에 거절되었다고 한다면 물 한 바가지도 이 불을 끄는 데 허락이 되지 않을 것이다.
⑥ 만일 그들이 이러한 영원히 비참한 상태에로 판결이 내려져야만 한다면 거기에서 몇몇 좋은 친구들이 있지 않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그들을 이 불행 가운데로 데려 오는 데 조력한 그들의 불구대천지 원수들, 즉"마귀와 그 사자들"밖에는 아무도 없으며 그 원수들은 거기에서 그들에 대해 승리의 개가를 부를 것이다. 그들은 살아 생전에 마귀를 섬겼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섬긴 자들이 그가 계신 곳으로 데려감을 당한 것처럼, 그들이 마귀가 있는 곳에 있도록 판결을 받은 것도 너무도 당연하다. 마귀(귀신)가 출몰하는 집에 누워있는 것은 소름끼치는 일이다. 그 때에 영원히 그들과 함께 친구로 지낸다는 것은 얼마나 더 무서운 일이 될 것인가?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첫째, 그리스도께서는 마귀들의 임금, 즉 그 도당들의 주모자가 하나 있으며 또한 그 나머지들은 그의 나라를 지원하는 대행자들 즉 그의 사자들이라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스도와 그의 사자들은 그 날에 용과 그의 사자들을 정복하게 될 것이다(계 12:7, 8).
둘째, 그 불은 천국이 의인을 위해 예비 된 것처럼사악한 자를 위해 원래부터 예비 된 것이 아니라. "마귀와 그의 사자들"을 위해 근본적으로 의도된 것이었다. 만일 죄인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정욕에 빠짐으로써 사탄과 교제하게 된다면 그들은 마귀와 그의 부하들을 위해 예비 된 비참 가운데 참예하게 된 것을 감사하게 될는지 모른다. 칼빈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즉 저주받은 자의 고통은 그것에서 피할 모든 소망을 끊어버리기 위하여 "마귀와 그의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것"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마귀와 그의 사자들은 이미 그 불구덩이에 투옥된 죄수들이다. 그런데 지상의 벌레들이 도망갈 수 있을까?
(2) 이 판결의 이유가 명시됨. 하나님의 심판들은 모두가 공정하며 또한 그는 그것들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실 것이다. 그는 재판장 자신이시며, 따라서 "하늘들은 그의 의로움을 선포하실 것이다."
① 그 판결이 근거됨. 그들에게 해당되는 모든 죄과는 소홀함(태만)이다. 앞부분에서 종이 정죄받은 것이 그가 자신의 달란트를 낭비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묻어 두었기 때문이었던 것과 같이 여기에서도 그는, "내가 주리거나 목마른 것은 너희가 나에게서 내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가져가 버렸기 때문이다. 내가 나그네 된 것은 너희가 나를 추방하였기 때문이며, 벌거벗은 것은 너희가 내 입은 것을 빼앗아 버렸기 때문이며, 내가 감옥에 갇히운 것은 너희가 나를 거기에 집어넣었기 때문이다"라고는 말씀하시지 않고, 오히려 내가 이러한 고통 중에 있을 때 너희는 매우 이기적이었고 너희 자신의 안락과 즐거움을 꾀하였으며, 너희 자신을 위해 수고를 많이 하였고 너희 돈을 나누어주기를 싫어하였기 때문에 너희가 마땅히 나에게 구제하고 원조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하였다. 너희는 시온에 편안히 있으면서 요셉의 고통을 인하여 슬퍼하지 않았던 그러한 쾌락주의자들과 다를 바 없다"(암 6:4-6)고 말씀하고 계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소홀함(태만)은 멸망의 원인이 된다는 사실이다.
② 그 죄과는 가난한 자에게 자선을 소홀히 한 것이다. 그들이 판결을 받은 것은 그들이 희생의 제사나 번제를 소홀히 했기 때문이 아니라(그들은 이러한 일들을 매우 잘 하였다. 시 50:8) 율법의 중한 것들, 즉 "심판, 자비, 신앙"을 소홀히 하였기 때문이다. 암몬 족속과 모압 족속은 성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금지를 당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떡과 물로 이스라엘을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신 23:3, 4).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가난한 자에게 선행을 베풀지 않는 것은 정죄받는 죄라는 사실이다. 만일 우리가 보상받을 희망을 가지고 선행을 베풀려고 하지 않는다면 형벌을 두려워해서라도 자극을 받아 선행을 베풀도록 하자. 왜냐하면 "긍휼을 나타내 보이지 않는 자는 긍휼 없는 심판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그는 "내가 병들었으나 너희는 나를 치료하지 않았다. 내가 감옥에 있을 때 너희는 나를 해방시켜 주지 않았다"(아마도 그것은 그들이 할 수 있는 것 이상이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너희는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였다. 이 일은 너희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죄인들이 대 심판날에 정죄를 받게 되는 것은 자신들의 할 수 있는 선행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긍휼을 베풀지 않은 자에 대한 판결이 그렇게도 무서운 것이라고 한다면 하물며 무자비하게 악을 행하는 자, 즉 박해자에 대한 판결은 얼마나 더 비참한 것이 될 것인가 ! 그런데 이 판결의 이유는,
첫째, 죄인들에 의해 거부가 되었다(44절).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을 보지 않았나이까?" 정죄 받은 죄인들은 그를 지지해 주지 못할 변명이나마 공연히 해 볼 것이다. 그런데
1. 그들의 변명의 태도는 자신들의 현재 조급함을 나타내고 있다. 그들은 조급한 사람들처럼 그 이야기를 갑자기 중단시키고 있다.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벗으신 것을 보았나이까?" 그들은 자신들의 범죄를깨달아 알고 또한 심판의 두려움을 참을 수 없었으므로 그 죄과를 반복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또한 그들은 이러한 시시한 변명을 늘어놓을 시간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두(우리가 말하는 대로) "재판에 대한 사소한 불평"에 지나지 않는다.
2. 그들의 변명하고 있는 문제는 그들이 마땅히 알아야만 했었지만 너무 늦은 시기인 지금까지도 그것에 대하여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가난한 기독자들을 업신여기고 박해한 자들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업신여기고 박해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아니 그들은 결코 그에게 모욕을 주려고 하지 않았으며 또한 그렇게 엄청난 결과가 그로 말미암아 초래될 것을 예기치 못하였다. 그들은 그것이 단지 가난하고 연약하며 어리석으며 멸시하는 백성들에게 한 것이었다고 생각하였으며, 그들은 그러한 가난하고 연약한 자들에 대하여 무시를 하면서도 종교적으로는 필요 이상으로 야단법석을 떨었다. 그러나 그렇게 행하는 자는 바울처럼 그들의 회심하게 되는 날이나 여기에서와 같이 정죄를 받는 날에 그 사람이 '그들이 핍박한 예수"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만일 그들이 "보소서, 우리가 그것을 알지 못하였나이다"라고 말한다고 할지라도 "마음을 저울질하시는 이가 어찌 통찰하지 못하시겠느냐?"(잠 24:11, 12).
둘째, 심판자에 의해 입증이 된다. 그는 그에게 속한 모든 자들에게 그들에게 그를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모두 깨닫게 하실 것이다(유 15). 이 규칙을 평준으로 삼고 있다(45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께서의 신실한 제자들과 추종자들, 심지어 그들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을 그 자신에게 하지 아니한 것으로 여기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그는 그들 가운데서 비난을 받고 핍박을 받으셨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를 인하여 비난과 핍박을 받으셨으며 또한 "그들의 모든 고통 중에서 그가 고통을 받으셨기" 때문이다. 그들을 건드린 자는 그의 부드러운 눈동자를 건드린 것이 된다.
마지막으로 그는 두 사람에 대한 이러한 선고를 수행하고 계시다(46절). 수행(실천)은 율법의 생명이며, 그리스도께서는 판결을 따라 이들을 수행하실 것이다.
1. "사악한 자는 영벌에 들어가리라." 그 때에 판결은 급속히 수행될 것이며, 집행유예가 내려지거나 심판을 저지할 시간적 여유를 가지지 못할 것이다. 악한 자를 처벌하는 것이 맨 처음에 언급되어 있는 것은 먼저 가라지들이 모아져서 태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1) 미래에 있어서 악한 자에 대한 형벌은 영원한 형벌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미래의 상태는 돌이킬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죄인들이 그들 자신의 성품을 변화시키거나 또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은혜의 날이 낭비되고 은혜의 성령이 거부되고 은혜의 방편들이 남용되고 방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자신의 은혜를 부여할 것이라는 것은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일이다.
(2) 사악한 자는 그 형벌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들이 자발적으로 들어가지 않고 빛에서부터 어두움 가운데로 끌어내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범죄에 대한 항거할 수 없는 깨달음과 자비에 대한 마지막 체념을 나타내고 있다.
2. "의인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즉, 그들은 "나라를 상속받게 될"것이다.(34절).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1) 천국은 생명이며, 모든 행복이다. 영혼의 생명은 육신의 생명이 생기들(the animal sprits)에 의하여 영혼과 결합을 이루는 데서 비롯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에 의하여 하나님과의 연합에서부터 비롯된다. 천적(天的)인 생명인 하나님의 환상과 실현, 그에 대한 완전한 일치, 그와의 즉각적인 연속된 교제로 이루어진다.
(2) 그것은 "영원한" 생명이다. 죽는다고 해서 생명 그 자체를 끝마칠 수는 없고 늙는다고 해서 그 생명의 위로나 그것을 괴롭히는 슬픔을 종지부 찍을 수는 없다. 이와 같이 생명과 죽음, 선과 악, 축복과 저주는 우리 앞에 놓여 있는데, 이는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우리의 마지막도 그렇게 될 것이다. 이방인들도 저 세상에서의 선과 악의 다른 상태에 대한 어떤 개념을 가지고 있다.
시세로(Cicero)는 그의 『Tusculan Questions, 1권』에서 소크라테스가 한 말을 인용하고 있다.
Duae sunt viae, duplicesque cursus e corpore exeuntium : nam qui se vitiis humanis contaminarunt, et libidinibus se tradiderunt, iis devium quoddam iter est, seclusum a consilio deorum ; qui autem se integros castosue servarunt, quibusque fuerit minima cum corporibus contagio, sunique in corporibus humanis vitam initati deorum, iis ad illos quibus sunt profecti facile patet reditus ─ 즉 육신을 떠난 사람들 앞에는 두 개의 길이 놓여 있다. 인간의 사악에 물들고 자신들의 정욕에 빠진 자들은 신들의 모임과 회합으로부터 멀리 그들을 안내해 주는 길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육신에 의해 거의 물들지 않고, 육신이 살아 있는 동안 신들을 모방하였던 의롭고 고결한 자들은 그들이 왔었던 숭고한 존재에로 돌아오는 것이 쉽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