헙.....안티이대랑 별 상관없는 거지만은 ㅡ.ㅡa
정회원이 된 기념으로 글을 하나 올려보고 싶다는 욕망이 불끈~!
저녁마다불끈~! ㅡ.ㅡa
요즘 왠지 소위 main stream이란 것들을 보면 우웩~ 치밀어 오른다는....
조선일보와 이화여대......쿡쿡 공통점을 찾으라면 왠지 주루룩 떨어질거 같기도 하다눈.......효효효
뭐 여기엔 개인적인 비화도 좀 섞여 있는 거니까 쿡쿡.....논외로 하고....
어째뜬.....글하나 올립니다 좀 깁니당.
칭구레뽀뜨 대신써준거라서 문체가 쫌....쿄쿄 알져?
힌트는 딴지일보에서 받았구.....
할일없는 제백수 열분덜~ 그리구 공사다망하신 중에더 찾아주신 열분덜~!
어설프거 지루하더라더 끝까지 읽어주심 감솨.....효효효 갑니다~!
인천광역시에 소재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이 자유공원 정상에는 맥아더장군의 동상이 우뚝서있다. 이처럼 한미관계를 잘보여주는 조형물이 또 있을까? 1945년 38선 이남에 진주,3년간 군정실시,6.25기간중 30만가량의 지상군파병,전후 막대한원조 이렇듯 현대사에서 미국과의 관계는 형제국으로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각별'해왔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최근에 들어서 이러한 미국과 한국의 관계를 재조명해보고자 하는 여러가지 시도가 힘을 얻고 있다. 반미도 이러한 시도 중의 하나고 현재까지의 양국의 대등하지 않았던 관계(이점은 여러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상세하게 논의하자면 상당히 길어지고 복잡해 짐으로 간단하게 SOFA정도를 들수 있겠다)나 현재 미국이 세계유일의 경찰국가로서 부리는 독선이나 오만을 생각해보면 누구나 수긍할 만한 생각이다. 또한 민주주의 특성 중에 하나가 다양성의 허용을 통한 자기교정이라고 볼때 꼭 필요하다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2000년도 기준으로 세계10위 국내1위의 발행부수(237만부)를 자랑하는 조선일보가 바라보는 국내의 반미는 어떠한가? 그들에게는 반미는 있어서는 안되는 불온한 것이고 그들의 대미인식과 한미관계를 바라보는 시각은 53년 휴전협정을 맺는 시점에 멈춰버린 것만 같다. 우리는 지금부터 조선일보의 한미관계에 관한 의식과 반미에 대해 알아보자.
우선 최근에 힘을 얻기시작한 반미에 대해 그들은 히스테리에 가깝다고 해도 될 정도로 민감하게 반응한다. 10월 21일자 신문에 실린 김대중주필의 반미정서와 반미주의라는 칼럼은 반미에 대한 조선일보의 생각을 여실히 들어내주는 견본이 되겠다. 밑줄친 부분에 주의하면서 읽어보자.
<<<[조선일보김대중 칼럼] 反美정서와 反美主義 (2002.10.21)
반미(反美)에는 대체로 두 개의 범주가 있다. 하나는 반미정서 또는 반미감정(anti-American sentiment)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반미주의(反美主義·anti-Americanism)다. 반미정서는 미국의 어떤 부분을 마땅치 않게 여기거나 싫어하는 소극적인 감정이고 반미주의는 미국을 적극적으로 배척하고 공격적으로 반대하는 신념이라고 볼 수 있다.
강대국 패권주의, 배타적 이기주의, 약소국에 대한 편파적 태도, 세계 경찰국임을 자처하는 독단주의, 인종차별, 배금만능의식 등 미국의 어두운 면을 비난은 하면서도 미국 자체를 부인하거나 거부하지 않는 것이 반미정서라면, 북한 또는 일부 아랍권 또는 일부 NGO들이 가진 미국체제와 존재에 대한 거부론은 반미주의의 소산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근자에 와서 한국 또는 한국민의 대미관(對美觀)은 심상치 않은 변화를 겪고 있다. 미국에 대한 비판적 견해라고 해야 반미정서의 차원을 넘지 않았던 대미관이 부분적으로 점차 경계선을 넘어 반미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을 목격할 수 있다. 이것은 한국에서의 미국의 역할을 부인하는 반미주의 세력의 집요한 접근에 기인하는 측면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월드컵 등을 통해 자각된 한국의 민족적 저력과 원동력, 자긍심과 열정 앞에 미국의 존재가 장애물로 존재한다는 인식과 연관이 있다.
한국의 반미만이 문제가 아니다. 미국의 ‘한국기피’도 심상치 않다. 미 국방부와 접촉이 있는 한 한국 예비역장성은 “근자에 와서 한국으로 전근발령을 받은 미군 장교들이 전역을 신청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전하면서 한국은 미군이 가장 싫어하는 근무지가 됐다고 했다. “최근 ‘미군병사와 서경원씨 사건’과 이에 대한 한국언론의 보도로 주한미군이 주재국에 대해 이렇게 분개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한국과 미국의 리더십은 사태의 심각성에 민감하지 않은 것 같다. 부시 행정부는 한국인의 이율적(二律的)인 정서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일반적 한국인은 북한이 우리의 안보를 위협하는 존재인 동시에 같은 민족이라는 사실에 늘 당혹스러워한다. 김정일 정권은 비난하면서도 북한동포는 끌어안으려 한다. “북한을 총체적으로 악(惡)으로 몰아세워서 미국은 무슨 구체적 실리를 얻고 있는가”라는 물음은 민족논리에 경도돼 있는 사람들을 이율배반적 심리상태에 빠지게 한다. 6·25전쟁을 미국의 남북전쟁과 비교하게끔 된 한국의 전후세대들에게 특히 그렇다.
최근 NYT는 칼럼에서 미국은 이라크의 침공을 물리쳐준 쿠웨이트에서 반미테러를 당하고 있고 미국의 우방인 파키스탄 선거에서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득세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지적했다. 이 기사는 심지어 9·11 이후 아프간에서 태어난 남자아이의 이름이 대부분 ‘오사마’임을 지적하면서 미국은 ‘도와주고 욕먹는’실수를 저지르고 있다고 했다.
몇주전 ‘미군병사와 서씨 충돌사건’과 관련해 미국대사관이 조선일보에 기고한 독자편지에는 미국측이 한국시위대의 정서를 헤아려야 한다는 조선일보 사설에 강한 이의를 제기하면서 ‘한국의 자유수호를 위해 이 땅에 온 세 명의 (미군)병사’라는 표현을 썼다. 아마도 젊은 세대를 포함해 많은 한국인들이 그 표현에 실소했을 것이다. 그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그 ‘현실’은 한국에 더 절실하다는 것을 한국인들은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 같다. 한국가정치고 한집 건너 미국과 관련이 없는 집이 없다. 미국에는 150만명의 동포가 살고 있다. 미국이 한국으로부터 투자를 빼가면 한국경제가 큰 파탄을 겪게 돼 있다. 안보문제에 있어 주한미군의 존재는 동북아의 견제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국에 있어 미국에 대한 호불호(好不好)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현실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자신의 ‘햇볕’을 가리려는 부시와 미국의 ‘구름’을 싫어하는 나머지, 한국 내의 ‘반미’에 어쩌면 심정적으로 동조하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반미에 대해 별로 언급하지도 않고 주변의 권고로 마지못한 듯 몇 마디 해도 어쩐지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 미국인들은 세계 도처에서 미국에 대한 저항의 표시로 성조기가 불태워지고 미국 대통령 초상화가 망가지는 광경에 너무 익숙한 나머지, 한국에서의 반미도 강대국의 통과의례정도로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한·미 지도층의 이 같은 무의식과 무관심의 공간 사이에서 한국의 반미는 점차 그 반경을 넓혀가며 중대한 전환점을 넘고 있다.>>>
사실 이 사설은 어디 한부분만을 발췌하여 문제삼을 수 없을 정도로 논리의 비약과 진실의 왜곡이 심하다. 어째서 그런가? 그는 우선 한국의 반미정서가 반미주의로 이행하고 있다면서 반미주의는 마치 존재해서는 안되는 범죄인양 취급하고 있으며 결정적으로 현실상 잘 구분할수 없는 반미정서와 반미주의를 소극적과 적극적이란 개념으로 나누어 독자를 우롱하고 결국은 반미전체를 위험한 대상으로 삼는다. 또한 반미주의가 북한 혹은 아랍권등 국제사회적으로 극히 마이너리티한 곳에서만 행해지고 있는 것처럼 진실을 왜곡하며 반미에 대한 일종의 편견을 심어준다. 그리고 미국정부로서도 이미 세계 곳곳에서 행해지는 반미가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고 한국정부로 보았을때도 현재의 반미정서가 무역이나 양국외교관계 기타 전반에 크나큰 영향을 끼칠만큼 심각하거나 폭력적이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양국 리더십에서 이를 문제 삼지 않는다고 호들갑을 떤다. 그리구 미국신문의 한 칼럼을 인용하면서 도와주고 욕먹는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고 마치 실제 그런 것인양 진실을 왜곡한다. 그것은 미국신문이다. 아프간이나 프랑스 러시아 브라질의 칼럼에서도 그렇게 논평될까? 누가 누구를 도와 주었단 말인가? 아무런 확정적 물증도 없이 테러의 배후로 의심된다는 적국 수뇌부를 갈아치우기 위해 수십만을 기아상태로 몰아 놓은것이 그들을 도와준 것인가? 조선일보의 숭미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강씨의 표현을 빈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서 이땅에 온 세명의 미군병사라는 표현은 뒤에 이어지는 문맥을 통해서 알 수있듯이 어느 정도는 주필 본인의 생각이다. 급료를 받고 근무하는 직업군인이 자유민주수호를 위해서 이땅에 왔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렇다면 대한민국 공무원들이 모두 자유민주주의 최일선에서 일하는 참일꾼이라는 주장도 성립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면서 또한 한집건너 미국과 관계가 없는 집이 없고 그들이 투자를 빼내가면 경제가 몰락한다며 독자들에게 미국의 영향력에 대해서 겁을 주는데 표현도 그렇고 발상도 그렇고 거의 미취학 아동수준이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미국이 한국에 대한 투자를 다 빼내간단 말인가? 무역규묘 세계18위와 여전히 고도성장을 지속하는 나라에 대해 어떠한 경제적 동기 없이 투자액을 다 빼내갈 정도로 미국자본은 허술하지는 않다. 일본이 당장 우리나라에 대해 수출을 중단하면 우리나라 제조업은 몰락한다. 반일감정에 대한 칼럼은 왜 쓰지 않는 것인는 것인지 궁금하다. 안보문제에서의 주한미군은 동북아의 견제력으로 작용하는 동시에 동북아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으로 작용한다. 마지막을 반미세력의 확대를 경고하는 문장으로 막을 내린 이 사설은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침소봉대,지록위마라는 고사성어가 무색케한다. 허나 조선일보의 후안무치함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위에 사설의 밑줄친 부분 중에 주둔국의 정서를 먼저 헤아려야 한다는 부분이 있다. 이 사설의 원문을 보자.
<<<[조선일보사설] '女中生' '美軍兵士' 그리고 韓·美 (2002.09.16)
최근 발생한 주한미군 병사 3명과 서경원씨 사이의 폭행 다툼이 한·미 당국간의 마찰로까지 번지고 있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상황이다. 초기 폭행사건이 누구에 의해 먼저 촉발됐는지에 관해서는 서씨와 주한미군 병사들의 주장이 서로 엇갈리고 있고, 앞으로 수사과정에서 그 시시비비가 가려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공권력이 사건 처리과정에서 보여준 무기력함은 문제다. 미군병사 1명이 3~4시간 가까이 시위대에 끌려다니는 상황을 수수방관했고, 그 병사는 지난 6월 의정부에서 미군 장갑차에 치여 사망한 여중생 추도식에 불려가 사과까지 했다는 게 미군측 주장이다.
이런 일은 사전에 방지했어야 했다. 이 시점에서 문제해결에 이르는 길은 자명하다. 우선 미군측이 이번 사건의 배경적 요인에 대해 더 깊은 배려와 인식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미국측은 미군병사들이 시위대에게 끌려간 것만 생각하기 앞서 여중생 사건에 대한 주둔국의 정서를 먼저 헤아려야 할 것이다.
한편 한국의 당국으로서도 문제의 핵심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미국적 기준에서 볼 때는 시위대에 의한 미군 ‘일시 납치’로 비쳐질 수 있고, 또 본인 의사에 반해 자신이 관계되지 않은 과거사건에 대해 공개 사과를 강요하는 것 역시 위법적이고 난폭한 행동으로 보일 수 있다. 주한 미국대사관과 주한미군측이 한국정부에 대해 강하게 항의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대목이다.
따라서 한국정부는 더 이상 팔장을 낀 채 ‘나 몰라라’ 할 것이 아니라 여중생 사건뿐 아니라 미군병사의 경우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조사할 것은 조사하고, 해명할 것은 해명하고, 조치할 것은 조치해서 한·미 외교마찰을 시급히 해소해야 할 것이다. >>>
우선 이 사설을 보고도 주둔국의 정서의 부문에 주목한 강씨의 명석함과 다시 그것을 문제삼은 김대중주필의 예리함에 존경을 표한다. 제목은 여중생,주한미군,한미라고 되어있지만 핵심은 한미관계이다. 미군 병사 1명이 3~4시간동안 시위대에 끌려다닌 것을 공권력의 무기력함이라고 규정짓고 사전에 방지해야 했다고 한다. 아니 미군병사 1명을 3~4시간 방치한게 공권력의 무기력함이라니 거기에 덧붙여서 그런일을 사전에 방지했어야 하다니 대한민국의 공권력은 미군병사의 보호를 위해 존재하는지 반문하고 싶다.참고로 서경원씨는 전직 국회의원이다. 가벼운 폭행이라고는 하나 상대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회위원이라는 신분을 가졌던 사람이다. 과연 이글에서 얘기하듯이 미군측이 당한 납치만이 문제인지도 한번 생각해볼 필요성이 있다. 여중생 사건뿐만 아니라 미군 병사 사건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해명할 것은 해명하고 조치할 것은 조치해서 외교마찰을 줄여야 한다고 한다. 문맥상 양 사건에 동일한 무게를 실은 것을 알 수 있다. 마치 우리나라 여중생이 죽었을땐 그렇게 호들갑을 떨어놓고 왜 미군병사가 일시납치된 사건에 대해선 수수방화하냐는 식이다. 그럼 조선일보는 여중생 사망사건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했는가? 우선 미군 납치사건 발생일자는 9월 14일 사설이 실린날은 같은달 16일 여중생 사망사건이 일어난 날은 6월 27일 사설을 실린 날은 다음달 11일이다. 이 날자를 언급한 이유가 무엇일지는 아래 사설을 보면 너무도 자명하다.
<<<[조선일보사설] 韓·美 재판권 다툼 원만하게 풀길 (2002.07.11)
내년은 한·미 군사동맹 50주년이 되는 해다. 한·미 동맹관계는 이제 그 연륜에 걸맞은 성숙함을 갖출 때가 됐으며, 건강한 동맹을 유지하는 핵심적 요소 중 하나가 상대방을 배려하고 이해하려는 자세다. 지난달 13일 발생한 미군 장갑차에 의한 한국 여중생 2명 사망 사건을 풀어가는 데도 이 같은 성숙한 태도가 요구된다. 이 가슴아픈 사건은 이제 한·미관계의 성숙도를 가늠해볼 수 있는 사안으로 가고 있다.
현재 한국 법무부와 미군 사법당국은 사고를 낸 미군들에 대한 재판관할권을 놓고 맞서고 있다. 법무부는 10일 미군측에 재판권 포기를 요청했고, 미군 당국은 반대로 재판권 포기의 선례가 없다는 이유로 난색을 표시하고 있다. 이에 관한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의 규정은 모호하기 짝이 없는 만큼, 결국 한·미 정부가 지혜와 이성을 총동원하는 적극성을 보일 필요가 있다.
미군측이 최종입장을 정하기까지 주어진 최대 42일이라는 기한 동안 한·미 양국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해결방안을 찾길 기대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군측은 이번 사건에 대한 한국인들의 마음을 이해해야 한다. 사고발발 직후 보여준 미군측의 일부 신중치 못한 언행은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질 않을뿐더러, 사안(事案)을 불필요하게 다른 쪽으로 번지게 한 측면도 있었다.
한국정부 역시 책임감을 갖고 나서야 한다. 최근 한·미관계의 난제가 빈발하고 있지만, 한국 정부관리들은 팔장만 끼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식으로 한·미관계를 방치할 경우 더 큰 문제를 낳을 수도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그러나 이 사건이 일종의 ‘운동확산’의 모양새로 가게 하는 양상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같은 경향은 피해자 가족들이나 한·미 양국 국민 어느 쪽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마 위에 사설과 밑에 사설을 동시에 읽은 정상적인 고등교육마친 대학생이라면 한숨이 새어나올 것이다. 과연 미군에 의한 여중생 사망과 국내 대학생에 인한 미군의 '임시'납치가 동일한 무게인가?그래 그들의 논리대로 미군납치와 여중생 사망이 똑같은 무게를 지닌 사건이라고 하자. 왜 조선일보는 보름이 지난 뒤에야 사설을 실었는지 왜 미국정부측에서 정확한 진상조사를 촉구하지 않았는지...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그것은 다 한미 관계 때문이다. 미군납치사건에는 공권력의 무기력을 들먹이고 난폭과 위법을 말하며 신속한 진상조사와 해명이 필요하다던 언론이 자국 여중생 사망사건은 한미관계의 성숙도를 가늠해 볼수 있는 사안이라고 성숙한 태도를 요구하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해결방안을 모색해보자고 하며 사안이 불필요하게 다른쪽으로 번지는 것을 막자고 한다. 성숙한 태도라 함은 감정적이지 않고 온화한 태도이고 운동확산이라 함은 반미운동의 확산을 말한다. '어디에도 진상조사나 미군의 해명,그에 따른 조치는 보이 않는다' 오로지 이성적 합리적인 해결,해결,해결만이 있을뿐이다. 그렇다. 그들이 설정해 놓은 괴상망측한 한미관계를 위해서라면 딸같은 자국 여중생의 사망에도 초연할 수있고(그들은 단지 가슴 아플뿐이다, 왜 갑자기 통석의 념이란 단어가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운동확산을 막기 위해서라면 이성과 지혜를 총동원해 조기에 매듭지어야 한다. 타국인의 납치도 모두 한미관계라는 기형적인 틀속에서 용해되버린다. 단순히 용해되 버리는게 아니라 변질된 한미관계과 같이 변질되어 버린다. 여중생 사망에 관한 사설은 10월 6일날 한미 레일에 낀 수정충이라는 제목으로 더 개재된다. 이 사설은 좀 복잡미묘하지만 여러차례 정독해보면 논설자의 말대로 가슴히 서늘해 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물론 논설자와는 '다른' 이유에서.........
<<<[조선일보아침 論壇] 韓美 레일에 낀 수정충 ...... 문정희(시인) (2002.10.06)
다이아몬드는 달리는 기차의 레일 위에다 올려놓아도 깨지지 않지만 의외로 현미경으로도 잘 보이지 않는 수정충이라는 벌레에 의해 부식된다고 한다. 한 국가의 몰락이나 국가 간의 신뢰의 파괴도 전쟁이나 재해에 의한 것보다 작은 불신이 그 계기가 되는 경우가 있다.
최근 미군 장갑차에 치여 죽은 우리 여중생과 정부의 속수무책을 보며 문득 젊은 날 읽었던 한 수필 속의 수정충을 떠올렸다. 그리고 대학생 몇 사람이 이 문제와 관련해 미국 대사관에 난입, 시위를 하다가 연행되는 장면을 보며 가슴을 칠 수밖에 없었다. 대사관 난입은 국제법상 주권지역의 침입으로 우리 국익에도 도움이 안 되는 표현 방식이다.
1980년대 미국의 대학에서 한 시절을 보낸 경험은 미국이라고 하면 합리(reasonable)와 실용(practical)이라는 신선한 두 단어와 함께 떠오르는 선진국이다. 그때 군사 정권을 경험한 직후여서 더 그랬는지 미국은 인간의 존엄을 실천하는 부러운 자유국가였다. 합리적이지 않은 것이 있으면 누구든 “왜?”라고 거침없이 물었다. 그렇다고 야단을 치거나 감옥에 가두는 일이 결코 없는 나라가 미국이었다. 부패하고 낡은 유럽에 염증을 느낀 신교도들이 세운 나라답게 힘을 갖고 있었고 간편한 머그와 평등한 블루진과 허세없는 노동을 존중하는 태도는 활기에 넘쳤다.
그 미국이 전쟁을 치른 작은 나라 한국에 와서 반세기 전에 맺은 조약이 바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이다. 그러니까 1953년에 체결한 이 법이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의 모법(母法)인 것이다. 좀 강도 높게 표현하자면 전쟁 직후 ‘거지’ 나라와 최강대국이 맺은 조약이다. 그런데 그 법이 오늘까지 그 효력을 유지하고 있으니 문제가 야기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현재 안보의 동반자요, 자본주의 주요 고객의 하나인 한국에서 이 법은 우리가 가만히 있는 한 무기한 유효 준수될 수밖에 없다. 미군은 영토·영해·영공을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으며 특히 “공무 수행 중”에 일으킨 사고나 사건에 대해서는 한국 정부가 아무런 견제나 조치도 취할 수 없는 법이다. 작년에 당국의 노력과 극히 일부 국회의원이 관심을 보인 가운데 환경오염, 강간 등 몇 개의 조항에 개선을 가했지만 여전히 미흡하다. 주둔 미군에 대해 특혜와 편의를 제공하고 있는 것은 유럽연합(EU)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이 비슷하고 특히 우리가 분단국임을 감안하더라도 주권국가로서 이처럼 지나치게 불평등하고 현실에 맞지 않는 조항들을 계속 고수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과다한 힘의 사용과 그 유지는 인간의 존엄과 평등을 중시하는 미국의 양심과 국제적 품위에도 합당한 태도가 아니라고 본다. 군사적인 문제인 데다 그 상대가 중요 우방인 미국이라 해서 침묵하고 있는 사이 50년이 흘렀다. 정치인들도 가능한 언급을 회피하는 동안 문제는 계속 일어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약 3만7000명의 미군이 국토 7400만평을 사용하고 있다. 장갑차 사고나 기지촌 여성의 인권 문제, 독극물 유출 사고 등이 언제든 재발할 수 있는 상황이다.
내 땅에서 내 딸들이 죽었는데 아무 대책도 없이 약소국의 처지만 한탄하고 있어야 할까.
언제까지나 힘의 흐름만 살피며 시간을 보내야 할까. 강한 상대를 원망하기 앞서 우리 정부나 정치인은 먼저 냉정한 자기 분석을 해야 할 것이다.
모든 비극에는 희망의 메시지가 숨어있음을 믿는다. 우리 딸들의 죽음에 단순한 보상과 사과보다 좀 더 의미있는 일은 우방과의 사이에 이물질처럼 낀 부당과 불평등을 제거하고 정상적 관계로 나아가는 귀한 계기를 만드는 일이다. 이 가을 가슴에 서늘히 꿈틀대는 것이 제발 수정충이 아니기를 빈다.>>>
얼핏보면 여중생에 사망에 대한 애도와 이러한 일의 재발방지를 위해 정상적인 한미관계를 추구하는 내용으로 채워진 지금까지 조선일보가 보여준 태도와는 다른 것 같다. 허나 밑줄친 부분을 곰곰히 음미해보라. 여중생사망과 정부의 속수무책을 보며 문득 수정충(왜 하필 수정충인가-다시한번 통석의 념을 떠올리게 된다-수정충과 여중생 사망사건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논설자에게 몽니라도 부리고 싶다.)을 떠올렸다는 논자의 기지에 감탄을 금하지 않을 수가 없으며 그 처절한 비극 속에서 이물질처럼 낀 불편과 부당을 제거하고 정상적인 관계로 나가야 한다는 희망의 메세지를 읽을 수 있다는 대목에서는 노신 소설속의 아Q가 된 기분이다. 마지막으로 이 가을 가슴에 서늘히 꿈틀되는 것이 제발 수정충이 아니기를 빈다는 대목에서 논설자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드는 것은 진정 '수정충'인가 아니면 부식되는 '레일'인가?-밑에 동일한 사건에 대한 동일하게 비유적 표현을 사용한 한겨레의 사설을 보면 더더욱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다.
<<<한겨레사설>
저당잡힌 '일상'/ 권은정-자유기고가
플라타나스 나무 아래 한 여중생이 참고서를 보면서 걸어가고 있다.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때때로 빙긋이 웃기도 한다. 방금 학기말 고사를 치고 나왔나 보다. 답을 맞추며 성공적인 시험에 만족스러워하는 중이다. 집으로 달려가 엄마한테 어리광을 피울 게다. 시험 잘 봤으니 약속한 대로 선물을 사달라고 조를 테지. 어린 소녀는 어제와 같은 일상의 바퀴가 내일로 자연스레 굴러가리라는 사실을 한 점 의심 없이 믿고 있는 듯했다.
요즘은 다들 성장이 빨라 사춘기는 중학교 이전에 겪는다고 한다. 인생의 첫번째 열병을 초등학교에서 이미 앓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샐쭉한 표정으로 혼자 길을 가는 여중생, 세상의 비밀을 막 알아챈 듯한 눈빛을 한 소녀들을 만나보면 사춘기는 아직 여중생들의 몫인 듯하다. 아마 남몰래 선생님을 짝사랑하거나 혹은 사랑보다 더 열렬한 우정에 흠뻑 빠져 있을지도 모른다. 토라진 단짝 친구의 마음을 돌리려고 몇날 며칠 가슴앓이를 하는 일도 잦을 것이다. 소녀들은 단조로운, 그러나 너무나 아름다운 일상들을 거치며 여름나무처럼 자라나는 것이다.
미선이와 효순이도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그 날도 여느 날처럼 지나갈 것이라 믿어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친구 생일 파티 생각에 종일 수업은 하는 둥 마는 둥 했으리라. 선물꾸러미를 가슴에 안고 수수장다리 꽃이 핀 여름 길을 멀다 않고 걸었겠지. 종달새 보다 더 고운 목소리로 두 소녀는 재잘거렸을 것이다. 어쩌면 들꽃을 꺾어 책갈피에 넣으며 갔을까 소녀들은 이삭을 피우는 들판을 보며 가을을 미리 보았을 것이다. 그들이 결코 만나지 못할 가을을. 효순이와 미선이는 거대한 궤도차량이 자신들을 덮치러 오는 순간까지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상의 작고 예쁜 바퀴가 어제처럼 내일도 도르르 도르르 굴러가리란 사실을.
미군의 군사차량은 붙잡고 곡을 할 시신마저 앗아가 버렸다. 남은 것이라곤 주인 잃은 신발. 아마 하얀 운동화였을 것이다. 여학생의 하얀 운동화는 내일을 말해주는 것이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주말마다 소녀들은 수돗가에 앉아 자신의 운동화를 헌 칫솔로 문질러 씻는다. 하얀 운동화는 소녀들의 상징이다. 두발이 뛸 때마다 나비처럼 팔랑거리는 운동화. 효순이와 미선이도 팔랑거리며 계속 걸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남의 나라 군인이 모는 남의 나라 궤도차가 이 땅에서 그들을 무참히 짓밟지 않았다면.
일상은 인생이다. 미선이와 효순이의 작은 일상은 바로 그들이 인생이었다. 아름다운 숙녀가 되고 또 자랑스런 엄마가 될 어느 날을 받치는 시간인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상은 저당 잡혀 있었다. 두 `보통소녀’의 인생은 `한반도의 평화와 안위’를 위한 힘에 압살당하고 말았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서민’들의 일상은 우리 군사적 현실에 발목 잡혀 있다. 미군에게 이유없이 죽임을 당하는 경우에조차 `국가 안보’의 논리는 우리에게 숨죽이라고 강요한다. 정치와 외교와 국가안보를 말하는 `윗분’들은 서민들의 일상을 타고 넘는 그 힘을 `역사’라고 부른다. 거대한 역사 앞에서 서민의 일상은 당연히 뒷전으로 밀린다. `일상의 간섭’은 역사 앞에서 그저 하찮은 것이란 말인가
그러나 일상은 바로 우리의 생명이다. 발랄한 생명. 서민의 일상이 모여 역사를 만든다는 사실을 그들은 잊은 것일까 불평등은 언제라도 고쳐져야 한다. 불평등한 한미주둔군지위협정을 지금 바로 평등한 상태로 고쳐야 한다. 우리는 삐뚤어진 역사를 일상의 힘으로 바로 세워본, 그런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다. 나는 나의 일상을 지키기 위해 일어서고 싶다. 어여뻤던 효순아, 미선아, 아직은 가지 마라. 우리의 저당이 풀릴 때까지 떠나지 마라. >>>
이번엔 조선일보가 어떤식으로 반미를 죽이는지 보자. 미디어이론중에 토드기틀린이란 학자가 사회학으로 부터차용한 프레임(frame)이론이 있다. 이것은은 언론은 언론특유의 틀(frame)이 있으며 이 틀에 맞는 내용만이 실리는데 틀자체가 이데올로기적이라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기틀린은 베트남 반전시위운동이 미국 언론에 비춰지는 모습,흥망성쇄를 예로 들면서 미디어들이 운동의 내용이나 취지보다는 폭력성과 내부갈등을 중심으로 다뤘음을 업급했다. 언론이라는 틀 자체가 이데올로기적인 성향을 가졌다는 점에서 비단 조선일보에만 해당되는 사항은 아니겠지만 동일한대상을 가지고 쓴 한겨레의 기사와 비교했을때 조선일보가 반미를 깍아 내리기 위해 이 사설을 썼다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어서 소개하겠다. 7월11일 여중생사망에 관한 사설이 나간 바로 그날 인텨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그 다음날 조선일보는 한 지성인의 치열한 자기성찰이라는 사설이 실었다.
<<<[조선일보사설] 한 知識人의 치열한 자기省察 (2002.07.12)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放火)사건을 일으켰던 문부식(文富軾)씨가 뜻밖의 고백을 하고 나섰다. 문씨는 12일자 조선일보와 한 인터뷰에서 “동의대 사건 민주화 인정은 납득할 수 없다”며 “민주화 운동이라도 면책특권은 없다”고 밝혔다.
80년대 반미(反美)운동의 선구적 사건을 주도해 한때 운동권에서 ‘영웅’으로 간주됐던 문부식씨는 사건 발생 후 자신의 행동이 과연 옳았던 것인지를 묻고 또 물었다고 했다. 그 결과 “우리 안의 폭력부터 성찰해야 국가 폭력도 비판할 수 있다”는 성찰적 비판론에 도달했다. 문부식씨의 참용기가 돋보이는 것은 바로 그 대목이다. 남과의 싸움보다 자신과의 싸움이 더 어렵고 중요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독선적 비판론이 큰 세(勢)를 이루고 있다. 자기만 옳다고 확신하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선민(選民)의식과 메시아 의식이 그것이다. 문씨는 바로 이 독선적 비판론에 조용한, 그러나 분명한 “아니오”를 던진 것이다.
그는 또한 어떤 이념이나 가치도 생명에 우선할 수 없다는, 절절한 체험을 바탕으로 한 세계관을 펼쳐보였다. “우리 행동으로 무고한 생명이 희생된 데 책임을 느껴 부산 미문화원 사건을 민주화운동으로 보상신청을 할 수 없었다” 등의 발언에서는 40대에 이른 그의 성숙이 묻어난다. 젊은날의 상처를 딛고 어렵사리 정신적 홀로서기에 나선 한 지식인의 성숙한 용기에 갈채를 보낸다. >>>
<<<한겨례기사>
문부식 “폭력이 정당한 건 아니다”
김진석씨 '사회비평'서 '당대비평' 비판
출간되기도 전에 논쟁을 불렀던 문부식(43·<당대비평> 편집위원)씨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광기의 시대를 생각함>(삼인 펴냄)이 출간됐다. 모두 9장으로 이뤄져 있는 책에서 5장 동의대 부분을 빼면 모두 97년부터 <당대비평> 등에 발표됐던 글들이다. 지난 18일 문씨를 출판사 삼인 회의실에서 만났다.
이 책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나
=올해는 내가 관여했던 부미방(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 20년이 되는 해다. 광주를 비롯해서 과거를 어떻게 대면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고자 했다. 광주가 정사가 되고 승리한 항쟁이 됐을 때도 여전히 정신병에 갇힌 이들, 그 정사 안에 포함되지 못한 많은 기억들이 있다. 이런 기억이 생략될 때 광주는 화석화한 기억이 된다.
논란이 촉발됐던 것은 89년 동의대사건에 대한 주장이었는데, 동의대 사건이 민주화운동이 아니라고 보는 건가
=민주화운동이다. 그러나 제도적으로 그것을 승인하는 것은 다르다.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는 결과에 대한 판단까지 했어야 한다. 경찰 7명이 죽었다. 민주화운동 인정을 유보하고 국가인권위 같은 상설기관에 진상을 규명할 것을 요구했어야 했다. 동의대 5·3동지회의 신기루 같은 자기평가는 문제다. 권력 대 저항민중의 구도로 자기 투쟁을 얹어버리는 이원적 대립구도 안에, 이미 정당화해 버린다. 동의대사태는 피할 수 있는 비극이었다. 경찰 진압이 통상적인 진압을 넘어선 것인가 하면 그렇지가 않다. 과잉진압은 없었다.
경찰의 진압은 당연한 것인가
=아니다. 사후 조작까지 하며 자신들의 부주의로 죽은 경찰의 죽음을 민중운동 탄압 도구로 사용했다. 그러나, 전적으로 경찰에 책임이 있다는 주장도 ‘그렇지는 않다’는 얘기다. 이런 말이 민주화운동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모욕인가 민주화운동 결정에 대한 경찰 유가족의 항의는 ‘그럼 내 자식의 죽음은 뭐냐’를 얘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80년 광주도 민주화운동이 아닌가. 진압군도 죽었다.
=광주와 동의대는 다르다. 이미 진압군의 시민 학살이 있었다. 동의대는 그 과정에서 학생들의 희생이 없었다.
책에는 폭력에 대한 비타협적인 비판이 들어 있다. 모든 폭력은 악인가
=폭력은 정당화될 수는 있다. 정당화될 수 있는 폭력도 있지만, 폭력이 정당한 것은 아니다.
민주화운동이 국가에 의해 ‘인정’되는 것을, ‘기억의 국민화’를 통해 국가에 포섭되는 과정으로 파악하는데, 이는 민주화운동이 투쟁을 통해 쟁취한 것이다. 이는 향후 역사과정 속에 전거가 되는 것 아닌가
=당연히 투쟁의 성과물이다. 정사화에 대한 비판 아니다. 다만, 보상·명예회복의 과정이 가지는 양의성에 주목하자는 것이다. 나는 국가가 국가폭력 희생자에 대해 보상해줘야 한다고 줄곧 얘기해 온 사람이다.>>>
조선일보 사설을 요약하면 80년대초 미문화원방화사건을 일으키고 반미운동의 선구자였던 문부식씨가 운동과정에서의 자신의 폭력성을 성찰한 점에 갈채를 보낸다는 것이다. 일견 대별해 보기에도 한겨레에서는 똑같은 대상에 대해서 민주화라고 표현하는데 조선일보는 이를 반미로 표현하고 있다. 조선일보 사설속에서 반미는 이제 우리안의 폭력이요 독선적 비판론이다. 어떤 이념이나 가치도 생명에 우선 하는 세계관에 대한 박수갈채는 미문화원방화 때문에 숨진 생명에만 적용되는 모양이다,그런 모양이다. 조선일보가 한미양국의 성숙한 관계의 가치가 장갑차 궤도에 짓눌려 버린 여중생의 생명보다 중요시했던 것을 바로 위에서 보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윌터 리프먼은 1922년 여론(public opinion)이라는 책에서 사람들은 일련의 이미지와 픽션으로 구성된 유사환경(pseudo-enviroment)-유사환경은 말그대로 실제가 아니라 그들에게 제공된 이미지와 픽션으로 창조된,물론 그들은 실제라고 믿지만, 환경이다-속에서 살고 있다고 했고 진실은 뉴스와 동일하지 않다고 했다. 그는 언론은 캄캄한 어둠속에서 여기저기를 비추는 서치라이트와 같은 역할 한다고 했다. 그의 주장을 전적으로 따를 필요는 없겠지만 확실히 언론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언론이 주는 정보가 사람들에게 어떤 중요성을 가지는 지를 잘 꼬집어 냈으며 동시에 언론의 한계를 적절하게 지적했다고 볼 수 있겠다. 유사환경을 만들어내는 서치라이트가 괴상한 색깔을 가지고 그들이 비추고 싶을때 비추고 싶은 곳만을 비춘다면 과연 사람들의 인식은 어떻게 변할 것인가? 이런 점에서 우리는 오늘날 조선일보가 우리에게 준 정보들에 관해서 다시한번 깊게 생각해보고 그들의 기만에 가까운 행위를 주시해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