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요원>>
<1>-저수지/장요원-
그녀의 커다란 눈을 멀리서 들여다 본다
고요가 출렁임을 꾹 누르고 있다 가라앉히지도 엎지르지도 못한 마음들이 水皮처럼 일어, 고여 있는 듯 같
은 자리를 부유한다
흐르지 못하고 고여 있는 종족은 품는 습성이 있다지
이미 떠나버린 철새들의 발가락이 꿈틀거린다 지난밤 달이 부려놓은 시름을 토닥거린다
어쩌면 그녀의 온몸은 태胎인지도 모른다
소나기가 발끝을 세우고 빙글빙글 돌자 어지러운 듯 울컥거린다
꼬리 긴 바람이 마법을 걸어 파동을 일으킨다
수만 번 제 숨을 조였다가 푸는
물의 태동,
오랜 시간 자신의 씨앗을 품지 못한 그녀의 태동은
이 계절을 분만하고 나서도 무럭무럭 자랄 것이다
서쪽 하늘에 걸린 생리혈이 그녀의 눈망울로 번지고 있다
<2>-춤/장요원-
바람의 손끝에 춤이 묶여 있다
몸을 벗어버리자
바람들이 옷으로 들어온다
옷이 한번도 해보지 못한 동작을 한다
그림자들이 바닥에서 춤을 춘다
바람이 손끝으로 줄을 밀고당기는 동안
빨래집게가 햇볕을 꽉 물고 있다
날아가지도 못하는 공중에 관절들이 가득 들어있다
셔츠를 입은 바람이 줄에서 빠져나가려고 한다
안간힘을 쓰며 놓지 않는 햇볕의 어금니,놓아달라는 듯 늘어진 팔이 줄을 후린다
미니스커트 속으로 바람이 든다
점점 팽팽해지는 바람의 근육,
수백 마장 바람의 층에 동작들이 접혀 있고
한 호흡 한 호흡, 넘어갈 때마다 물기들이 퇴장한다
눅눅한 관절이 경쾌해진다
바닥에 매달린 춤이 다 마를 때까지
다행히 오후는 햇볕을 끄지 않았고
공중은 매여 있어
몸을 비워낸 춤들이 반듯하게 개켜지는 저녁,
빨래집게들만 캄캄하게 남아 밤새 어둠을 말릴 것이다
<3>-풀리고 있는 오전/장요원-
검은 실뭉치가 마당 한쪽에서 풀리고 있다
조용히 접혀 있는 작은 새의 비행 궤적을
개미 떼가 풀어내고 있다
오전을 다 왕복해도 사라지지 않는 어둠,
새의 몸에서 냄새가 길게 풀어진다
오그라든 발에서 실밥이 풀어진다
움켜쥐었던 허공은 다 어디로 날아가고 없다
새는 허공에서 풀어지는 평생을 가졌을지도 모르는 일
궤적의 길이,그 마지막 끝에 내려앉았는지도 모르는 일
몸을 부풀린 바람이 다녀간다
바람의 혀에
팽팽해지는 검은 실뭉치
허공엔 하현달이 날아간다
여전히 파닥거리는 깃털이나 마지막으로 버렸을 비틀거림은 지상에서 배운 것
몇 개의 깃털은 아직 바람에 매여 있고
몸은 공기라는 관棺에 들어있다
먼저 떨어진 나무 그늘 위로 붉은 이파리 하나가 떨어진다
잎들이 날아간 빈 가지 아래
개미 떼가 다 풀어간 실패 같은
뼈들만 얽혀 있다
새의 몸에서 검은 실이 길게 풀려나오고 있다
아니, 오전의 햇볕 한 줄기가
처마 밑 어둠 속으로 오래 감겨 들어간다
<4>-말뚝/장요원-
초록이 접힌 들판에
겹겹이 바람을 껴입은 느낌표 하나 서 있다
어스름이 내릴 때까지
제 그림자를 묶어두고 있다
몸집 큰 바람이 그림자를 넘어뜨릴 때도 있지만
그림자는 한번도 줄을 놓지 않았다
어린 그늘에
스스로 묶였던 기억을 떠올리곤 했을 것이다
수만 겹의 바람이 묶였다 가는 곳,
말뚝은 처음 묶였던 목덜미를 기억한다
가끔 바람을 타고 온 굽소리를 되뇌이며
느릿한 되새김질을 한다
그때마다 머리에선
구부러진 각질 덩어리가 자라곤 한다
애기덩굴 한 줄기가
더딘 걸음으로 뒤늦게 노을을 감는다
허리 굽은 저녁을 끌고
누군가 말뚝을 쑥 뽑아 풀숲으로 던진다
흩어졌던 풀벌레들이 누운 말뚝 근처로 모여든다
풀숲이 와글와글 소란스럽다
속이 다 타버린 것을 어둠이 뒤꿈치로 비벼 끈다
한 개피의 저녁이 꺼져가는 풀숲,
말뚝이 사라진 들판엔
캄캄한 씨앗들이 뿌려질 것이다
나무들이 일제히 바람의 고삐를 풀어주고 있다
<5>-나무의 귀/장요원-
가지마다 붙어 있던 소리들을
나선의 밑동으로 밀어넣고
새들이 푸른 귀를 찾아 날아갔다
펄럭이던 그늘보자기가
떨어진 나무의 소리를 다 싸서 가고
가끔 햇볕의 뼈대만 흔들리고 있다
어디선가 날아온 비닐이 머플러처럼 나뭇가지를 감고,
아직 남은 몇 장의 귀가
은색의 소란을 듣고 있다
이파리들의 소임은 나무의 귀,
햇볕의 등에 그늘을 붙였다 떼는 일
바람의 행선을 알리는 일
엽록의 달팽이관에 새들의 졸음을 재워주기도 한다
은밀한 파동이 들어있는
몇 칸의 서랍이 만들어지고 있을 오동나무
햇빛 두어 채 개켜두거나 혹은,
새들의 사서함이거나 노숙하는 구름이 묵어 갈 서랍들
따뜻하라고,
은색의 비닐머플러가 감겨져 있다
늙은 오동나무는 늙은 바람의 목덜미이다
무거운 귀를 툭툭 흘리고
맨몸으로 서 있는 몇 칸 서랍이지만
봄이 오면
푸른 귀들이 빼곡, 차오를 것이다
<<장요원 시인 약력>>
*전남 순천 출생.
*중앙대 예술대학원 수료
*2011년 무등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이범근>>
<1>-雪山의 원근법/이범근-
탕,
짐승의 목둘레로 힘줄이 일어선다
온몸을 떠돌던 뜨거운 피가 한쪽으로 바싹 쏠린다
산비탈을 딛고 있던 발톱이
언 땅에 더 깊이 박힌다
물러서려는 것도,
나아가려는 것도 아니다
바람은 노란 동공 속으로 먼저 빨려 들어가고
팽팽한 직선에 닿은 싸락눈들이
화약처럼 타들어간다
탄환은 바람이 지나간 길 위에서
뒤로 흐르는 풍경을 비튼다
한 점을 향해 구부정해지는
눈 덮인 능선과 새들의 행로
짐승은 움켜진 땅을 끝까지 놓지 않는다
소용돌이치는 풍경이
제 단단한 근육을 뚫을 때까지
뜨거운 소실점이 핏물에 떠 있을 때까지
거기서 새들은 찬 날개를 녹일 것이다
<2>-아무도 모르는 유일한/이범근-
오늘은 노는 날이에요, 어머니
리모컨을 쥐고 있으면
죽은 친구의 손을 잡고 있는 것마냥
자꾸 헛웃음이 납니다
도전 1,000곡을 다 보고 나면
천국에 도전할 마음도 사라지고
TV 속 여자들은 입냄새가 심하죠
코를 막으면 귀로 흘러 들어옵니다
벽 속의 거미알들이 두리번거리며 깨어나
어미를 뜯어먹는 소리 들려요
오랫동안 입맛이 없습니다
또 보내주신 반찬들
오징어볶음 장조림 김
손만 댔다 하면 항상 상해버려 나는
나를 잘 안 만져요
LOCK&LOCK에 담겨 오래 상하지 않는 허기로
늦은 밤에 밥상을 차리기도 하지만
하얀 접시들과 수저는 침묵합니다, 어째서
저보다 말이 없어요
추억에 잠겨 천장을 올려다보는 건
누워 있을 때만 온순한 애인들의 버릇
어머닌 애인 있어요?
헛웃음이 나와도 놓을 수 없는 리모컨을 쥐고
너, 이 손, 놓으면 끝이다
죽은 친구와 애인의 목소리 헷갈리는 날
어미를 다 뜯어먹고
발톱에 맑은 땀 맺힌 거미들
벽지가 눅눅해져 가는 오후 내내
아무도 모르는 유일한
당신 생각을 해요
<3>-환절기/이범근-
혜는 나를 사랑한다
매일 밤 구운 꽁치에 독한 술을 마시자 하고
내 옆에 누워 기린처럼 잠든다
젖은 수건이 마르고 있는 아랫목 쪽으로 목을
길게 늘어뜨린 채
밤새도록 입을 쩝쩝거린다
꿈속에서, 멸종된 나뭇가지에 피어난
잎사귀를 씹고 있는지
차갑고 싸한 풀냄새를 베개에 흘린다
성에가 유리창을 꽉 붙드는 아침
내 이빨에 낀 푸르스름한 비린내도
미지근한 하품도 사랑한다
혜가 나의 하품 속으로 천천히 들어와
언 손바닥을 녹일 때
혓바닥 아래엔 맑은 침이 고인다
올해는 꼭 발가락이 넷뿐인 딸을 낳자고
연습장에다 내 코를 그린다.
식은 방바닥에 엎드린 혜가
나만을 사랑하는 동안
11월의 첫눈이 내린다
혜는 유리창에 손가락을 대고
마른버짐만 한 바깥을 만든다
낮은 담장 위의 눈발과
새의 몫이었던 가지 끝에 열매들
흔들리고 있는
풍경은 풍경 속에서 투병중이다
혜는 나를 사랑한다
<4>-그을음과 성에를 위한 미사/이범근-
건반 하나가 내려가자
흐릿한 손끝을 향해 우리는 호흡을 모았지
오래 굶주린 짐승의 폐에서
들을 수 있다는 정적
그의 지문이 파르르 떨고 있었지만 아직
연주가 시작된 건 아니었어
횃불로 타오르던 몸과 얼어붙은 몸
몇몇은 오래 참은 울음을 터뜨렸고
그을음과 성에를 닦아내며 노인들은
언 유리창을 뚫지 못하는 햇살을 안쓰러워했지
더듬더듬 유언을 중얼거리는 그가
손가락을 떼어도 내려간 건반은
다시 올라오지 않았어
미신이 없는 음악을 상상할 수 없었지만
우리가 자주 용서와 헷갈려 하던
하나의 음정을 잊는다는 것은 몸을 잃는다는 거
굳은살처럼 두꺼워진 빙판 위에선
서로 먼저 넘어지기 위해 말을 아꼈지
발자국이 발자국을 따라잡지 못하는
긴 운구 행렬을 따라
짐승만 알던 길은
아무도 모르는 길이 되었어
<5>-와상/이범근-
모로 누운 여자의 엉덩이는 황달처럼 환하네
은행나무 젖은 낙엽들이
한 장 한 장 손바락으로 옮아오는 밤
강물에 오래 씻긴 자갈들 사이로 손 집어넣고
그녀 몸속 느린 물살을 듣네
손끝에 비늘을 벗고 사라지는 물고기들
나는 폭우가 지난 뒤 물구경 가는 노인처럼
느릿느릿 물가로 걸어가
자라지 않는 발목만 두고 오네
한밤중 골목 가로등 아래 피워 놓은
모깃불 백발처럼 흔들리고
팥 쭉정이를 골라내며 사람들 서로의 손금을 보네
굽은 길 끝에서 번지는 밥 타는 냄새를 맡네
바람이 걸어 들어와 나가지 않는
몸속의 뼈, 뼛속의 뿌연 안개로 가득 찬 집
여자는 내 손을 잡고
이파리 몇 남지 않은 썩은 은행나무 그늘에 앉네
부러진 가지들이 떠내려오는
물살에도 흔들리지 않네
한 그루 은행나무를 혼자 흔드네
<<이범근 시인 약력>>
*1985년 경북 봉화 출생
*한양대학교 국어교육과 졸업
*현재 홍대부속고등학교 재직
첫댓글 지금 이 가을 오전에~~~~몸을 부풀리고 탱탱하게하는 두시인의 이야기에 풍덩 빠져 허우적거리다
간신이 빠져나오고있습니다~~어쩜 그 시의 긴행렬 ~~궤적의 여운이 오래갈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