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연말
연말이다.
부서 송년회도 했다.
하지만, 연말 분위기는 나지 않는다.
나이를 먹으면서 세월의 상대적인 속도가 빨라져서
금방금방 다가오는 연말이 너무 자주온다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아니면, 올 연말 우리나라 너무 많은 사건들이 일어나서 그럴까?
거기에 대선까지 겹쳐 더욱 어수선한 분위기.
5년전 대선, 어떤 언론매체에서
우리나라 대통령선거를 하나의 정치축제라고 이야기했던 생각이 난다.
하지만, 이번대선은 그런 기분이 하나도 들지 않는다.
공포영화를 보는 것 같기도 하기도,
초등학교 반장선거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누굴 찍을까 고민하는 나에게 지난 봄에 읽었던
주제 사라마구가 쓴 <눈뜬 자들의 도시>가 길을 알려주었다.
그 소설 속의 유권자처럼 행동하기로 하였다.
소설 <태백산맥>을 읽으면서, 해방 후 나라꼴보다는 낫겠지하면서 위안을 삼아야겠다.
노무현 대통령의 남은 임기가 점점 줄어들수록,
그 안타까움으로 시간은 급격하게 빠르게 나를 스치고 있는 요즘이다.
1. 용공
4권에서 손승호, 김범우의 부탁으로
대를 잇기 위해 좌익활동하고 있는 남편이 있는 율하면으로
아내를 보내는 일을 심재모가 동의한 일이 있었다.
이 일이 지주들의 귀에 들어갔다.
그들은 당장 심재모를 용공세력으로 몰아놓은 작전을 세웠다.
거기에 염상진의 공격에 패배한 일까지 일어났다.
보성에서 어느 지주의 칠순잔치에 군인과 경찰들이 초대되었는데,
그곳을 염상진 부대가 덮친 것이다.
그곳에서 군인과 경찰이 30명 넘게 죽는 사고가 일어났다.
이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심재모는 보성으로 이동하였다.
심재모가 자리를 비운 벌교를 염상진이 다시 공격하여 피해를 입혔다.
순식간의 염상진의 기습으로 두번의 패배를 하였다.
이런 일들이 지주들로 하여금 심재모에 대한 불만을 더욱 크게 하였다.
그들은 결국 심재모를 용공분자로 신고하여
심재모는 체포되어 서울로 연행되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된 권병제 경찰서장은 서민영 선생에게 도움을 부탁하였다.
서민영 선생은 주민들에게 진정서를 쓰고,
서울에 있는 김범우를 통해 기자일을 하고 있는 자신의 제자를 만나 도움을 청하라고 하였다.
김범우는 서민영이 소개해준 민기홍 기자와
자신이 알고 지내던 선배 이학송 기자를 같이 만났다.
이학송과 민기홍 역시 서로 친구였다.
그들은 심재모를 꺼내기 위한 노력을 해보았지만,
그가 잡혀 있는 위치만 간신히 알았다.
그리고 그를 꺼내기 위해서는 지역구 국회의원의 보증이 있어야 한다는 답변을 받았다.
이에 서민영 선생이 웬수같은 최익승을 만났다.
최익승은 심재모의 보증조건으로 다음 선거시 자신에게 적극적인 지지를 요청했다.
서민영 선생은 자신이 출마안함으로써, 최익승을 후원하기로 하였다.
최익승은 억울함이 있었지만,
서민영이 출마하면 쉽지 않다는 생각으로 서민영의 뜻대로 각서를 써야했다.
서민영 선생은 원래 국회위원 같은 것에 관심없었으므로,
세치 혀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었을 뿐이다.
이로써, 심재모가 무사히 풀려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태백산 근처 단양에서 근무하게 된다.
그는 떠나기 전 그에게 도움을 주었던,
김범우, 손승호, 이학송, 민기홍 등과 술 한잔 기울이면서,
허울뿐인 자유 민주주의에 대해서 논하기도 하였다.
남한의 미군정은 3년동안 민간인을 10만명 이상 학살했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놀라기도 하였다.
이는 남한이 북한과 달리 친일파 처단과 토지개혁이 미루어진 것에
이어지는 비극이었던 것이다.
북한은 해방과 동시에 친일파를 처단하고,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실시함으로써,
민심을 얻은 후 정부가 수립되어서 그런 비극을 피해갔던 것과 대조적이다.
오늘날, 남한과 북한이 모든 방면에 있어 현격한 차이를 보여서,
공산주의는 실패작이고, 자유민주주의는 성공작처럼 보이지만,
해방 직후 당시 친일파에 대한 남북한의 상이한 자세는
백성들에게 커다란 차이로 다가왔던 것이다.
역사에 가정이 없었지만,
남한도 친일파 처단과 토지개혁이 빨리 이루어지고,
그 이후 정부가 수립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적어도 10만이 넘는 민간인 희생은 없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2. 최악질 등장
한편, 심재모의 후임으로 벌교에는 새로운 계엄사령관 백남식이 왔다.
그는 일제시대 관동군 출신으로 전형적인 친일파였다.
그런 백남식은 지주들과 뜻을 같이 하였고,
소작인들을 비롯한 힘없는 백성들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산에 들어간 사람들의 가족 뿐만 아니라,
벌교 내 모든 사람들의 사상을 재검증하도록 지시하는 등 강경대응을 하였다.
한마디로 새로운 계엄사령관은 최악질 중에 악질이었다.
심재모를 구하기 위한 서민영 선생과 손승호, 이지숙 등을 잡아들여 협박을 하기도 하였다.
이에 손승호는 중상을 입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국민보도연맹이 생겼을 때,
벌교 지부위원장을 손승호에게 강제로 시키려고 하였다.
손승호는 더이상 벌교에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서울 김범우를 찾아가 서울에서 정착하게 된다.
3. 1949년 대한민국 사정
해방 후 바로 실시했어야 할 일들이 1949년에 들어서면서
국회에 법이 통과되면서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늦은 처사로써, 더 안좋은 결과만 낳게 되었다.
그 첫번째 것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의 구성이다.
이들이 하는 일은,
민족에 반역적인 일을 했던 사람들을 조사하는 것이다.
즉, 친일파를 처단하는 단체인 것이다.
하지만, 이미 친일파는 남한의 주요 요직을 장악하고 있었고,
경찰의 대부분도 일제시제 순경들이 그대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엇다.
국회에도 친일파로 똘똘뭉친 한민당이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러니, 반민특위의 활동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그런 와중에 경찰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불법 습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반민특위 사람들 뿐만 아니라 취재나온 기자들도 협박 및 구타를 당하고 연행당했다.
이런 불법적인 경찰의 행동을 이승만 정부는 묵인하였다.
이로 인해 반민특위의 활동은 사실상 물거품이 되었다.
그리고 그해 6월 민족의 큰별 백범 김구 선생의 서거소식이 온 나라를 울렸다.
이 사건 또한 알만한 사람들은 모두 이승만의 짓이라고 생각했다.
여운형에 이어 김구 마저 이승만의 손에 의해 운명하게 된 것이다.
이 어찌 분하지 않으리오.
하지만, 이를 뒤집을 수 있는 세력이 없었다.
김구가 피살당한 날이 미군철수와 겹치면서,
김구 죽음의 배후에 미국이 있다는 소문도 있지만,
어차피 이승만이 관계되어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미군이 남한에서 철수를 시작하자,
남한 내 좌익 뿐만 아니라 이북에서도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남쪽으로 많은 당원들을 내려보내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좌익의 활동은 더욱 치열해졌다.
벌교에서도 염상진이 도당지부 정치위원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염상진은 자신의 뒤를 이어 안창민에게 벌교 군당위원장에 임명하고,
벌교책으로 하대치를 임명하였다.
좌익의 움직임이 활발해진 것을 감지한 남한 정부는
그들을 선동 및 회유하기 위해 국민보도연맹을 설치하였다.
국민보도연맹은 전향한 좌익들을 중심으로 만든 단체로써,
숨어 활동하는 좌익들에게 자수하고 전향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준 단체였다.
벌교에도 이 지부가 있는데,
앞서 이야기했듯이 새로운 온 악질 계엄사령관 백남식이
손승호에게 벌교지부장을 맡으라고 강요했던 것이다.
손승호가 벌교를 도망가듯이 떠나고, 그 자리는
암세포로 활동하는 책방주인 문기수가 자수하면서,
그가 보도연맹 벌교지부장이 되었다.
4. 토지개혁
친일파 처단과 함께 해방 후 계속 미루어졌던 또 하나는 바로 토지개혁이다.
1949년 여름에 들어서 드디어 농지개혁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이 소식을 들은 많은 소작들은 기쁨에 겨워 만세를 불렀다.
하지만, 농지개혁법의 진면목을 알게 된 소작들은
그 기쁨이 분노로 바뀌게 되었다.
토지개혁은 소작농들이 원한 무상몰수 무상분배가 아니었다.
유상몰수 유상분배였던 것이다.
빚더미를 앉고 사는 소작농들이 땅 살 돈이 어디있는가?
뿐만 아니라 교묘히 토지개혁 대상을 피할 수 있는 구실들이 있었다.
그리고 토지개혁을 피하기 위해 지주들 대부분은
이미 친척들을 이용하여 땅을 분배하여 명의변경을 하기 시작했다.
이름뿐인 농지개혁법이다.
이렇다보니 소작농들의 분노는 쟁의로 이어졌다.
넓은 벌판이 많이 전라도답게, 소작농들도 그 수가 엄청났다.
벌교를 비롯한 전라도 전 지역에서 소작농들의 시위로 조용할 날이 없었다.
이들의 시위가 커진 이유는 좌익들의 조종도 숨어 있었다.
벌교에서는 계엄사령관 백남식이 이들을 강경진압하자, 그들의 시위는 더욱 커져갔다.
경찰서장 권병제가 중간에서 중재하여
주모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석방하기로 하면서 시위가 잠잠해졌다.
1949년 대한민국의 백성들은
이런 혼란기를 겪으면서 다음해에 있으로 더 큰 시련을 예상치 못하고 있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age.yes24.com%2Fmomo%2FTopCate55%2FMidCate01%2F5402221.jpg)
책제목 : 태백산맥 5
지은이 : 조정래
펴낸곳 : 해냄
펴낸날 : 1995년 1월 15일 (2판본)
정가 : 6,800
독서기간: 2007.12.12 - 2007.12.16
페이지: 342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