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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화재는 내친구 원문보기 글쓴이: 장진호
틀리게 쓰는 말 몇 가지
⦁금도(襟度)
정치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말 중에 ‘금도’라는 말이 있다. 상대방 국회의원이 지나친 말을 했을 때 주로 사용한다.
어느 야당 시장이 대통령을 탄핵해야 한다고 하자, 이에 맞서 어느 여당 의원이 “대통령을 돕지는 못할망정 좌파 시민단체 대표인 양 선도하는 건 금도를 넘어선 정치 선동이자 국정 흔들기”라고 반박하였다.
또 어느 남자 국회의원이 여자 국회의원에게 회의 도중 “내가 그렇게 좋아요?”라는 말을 하자, 여자 의원의 같은 당 소속 의원이 나서서 “금도를 상습적으로 넘는 사람을 의원으로 둘 정도로 국민이 허용하지 않는다.”며 해당 의원의 의원직 사퇴를 거듭 요구했다
노무현 정부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던 분이 북한의 뜻을 물어 우리 정부가 유엔(UN)의 북한인권결의안 표결에서 기권하도록 했다는 논란이 있었던 때가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당시 여당 대표는 “이 문제는 매우 중대하고 심각한 사안으로, 사실상 북한의 인권탄압에 동조하며 북과 내통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그분은 여당 대표를 향해 “내통이라… 대단한 모욕이네요. 당 대표란 분이 금도도 없이”라고 반박했다.
그런데 이 금도라는 말이 정치권에서 이렇게 자주 쓰이니, 요즘은 언론에서도 덩달아 곧장 쓰고 있다.
위의 예에서 쓰인 ‘금도’라는 말은 ‘넘지 말아야 할 경계선’이란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말을 쓰는 사람들은 아마도 금도라는 말이 금지한다는 뜻의 ‘禁(금)’ 자와 길을 뜻하는 ‘道(도)’ 자로 된 말이라 생각하여 쓰는 듯싶다. 그러나 그러한 말은 없다.
이런 경우의 금도는 襟度(금도)라는 말이 있을 뿐이다. 襟(금) 자는 옷깃이란 뜻이다. 옷깃이 가슴을 가리는 부분이므로 ‘가슴’이라는 뜻도 가지게 되고, 가슴은 마음이 담겨 있는 곳이라 하여 ‘마음’이란 뜻을 갖게 되었다. 度(도) 자는 정도의 의미를 지닌 글자다. 그래서 금도는 ‘남을 받아들이는 도량(度量)’ 즉 ‘남을 포용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을 뜻하는 말이다. “그는 지도자다운 금도를 지녔다.” “정치권에서는 좀 더 넓은 시야와 관용과 금도를 가지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와 같이 쓰인다.
그러므로 지금 정치권이나 언론에서 쓰고 있는 금도라는 말은 이 말의 뜻을 모르고 아주 잘못 쓰고 있는 것이다.
⦁면장(免墻)
‘알아야 면장을 하지’라는 말이 있다. 이 경우의 면장을 面長(면장)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있다. 이와 관련된 말의 시초는 논어 양화(陽貨)편에 보인다. 공자가 아들 백어(伯魚)에게
“너는 주남(周南), 소남(召南)의 시를 공부했느냐? 사람이 이것을 읽지 않으면 마치 담장을 마주 대하고 서 있는 것[墻面]과 같아 더 나아가지 못한다.
고 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여기서 주남, 소남은 시경(詩經)의 편명으로 그 내용이 수신(修身)과 제가(齊家)로 이를 공부하라고 한 것이다.
이 말은 명심보감(明心寶鑑) 근학편(勤學篇)에도 나오는데 송(宋)나라 휘종의 가르침을 인용한 것이다.
“배운 사람은 곡식과 벼와 같고, 배우지 않은 자는 쑥대와 잡초 같다. 곡식이여, 벼여! 나라의 좋은 양식이요. 온 세상의 보배로다. 쑥대여, 잡초여! 밭 가는 이가 미워하고 싫어하며, 김매는 자는 수고롭고 힘이 드는구나. 후일 면장(面牆)하여 (배우지 않은 것을) 후회한들 그때는 이미 늙어버린 후일뿐이다.”
면장(面墻) 즉 얼굴을 담에 맞댄 사람은 앞이 꽉 막혀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곧 배움이 없음을 일컫는 것이다. 그러니 무식하지 않으려면 담에 얼굴을 맞대는 데서 벗어나야 한다.곰부를 해야 한다. 이것이 담장을 면하는 면장(免墻)이다. 알아야 면장을 하는 것이다.
⦁사돈
고려 예종 때 여진족을 물리친 원수 윤관은 부원수 오연총과 자녀를 혼인시켰다. 두 사람은 시내를 사이에 두고 살았는데, 어느 날 두 사람은 집에 술이 익었기로, 각각 술을 들고 상대편을 대접할 생각이 나서 집을 나왔다.
그러나 마침 큰물이 져서 시내를 건널 수가 없기로, 양쪽 그루터기[査(사)]에 앉아, 한쪽이 술을 권하는 시늉을 하면, 한쪽에서는 돈수(頓首: 머리가 땅에 닿도록 하는 절)를 하면서, 잔을 받는 시늉을 하며 주거니 받거니 하였는데, 그루터기[査]에서 돈수(頓首)했다는 데서 사돈(査頓)이란 말이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이 말은 근거 없는 하나의 민간 어원설(fork etimology)에 지나지 않는다. 사돈은 만주어 사둔(saddun)에서 온 말이며 사돈은 취음 표기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사위쪽 사돈을 수사돈이라 하고, 며느리쪽 사돈을 암사돈이라 한다.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면 안사돈끼리 서로 사부인(査夫人)이라고 부르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부적합한 말이다.
사돈은 결혼한 자녀의 양가 부모들끼리 맺은 관계를 일컫는 말이다. 밭사돈과 밭사돈끼리, 안사돈과 안사돈끼리는 서로 사돈이라 불러야 한다. 사부인은 밭사돈이 상대편 안사돈을 지칭할 때 쓰는 말이다. 안사돈이 상대편 밭사돈을 지칭할 때는 사돈어른이나 밭사돈이라 하면 된다.
상대편 사돈의 웃어른은 사장어른이며, 아랫사람은 사하생(査下生)이다. 사하생끼리는 사형(査兄)이라 불러야 한다.
또 사형들끼리 서로 사돈이라고 호칭하는 것을 가끔 보는데 이것도 예에 매우 어긋난 것이다. 사돈은 자기의 자녀를 장가보내고 시집보낸 당사자들끼리 부르는 호칭인데, 사하생들은 그런 관계를 맺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 사돈이라고 호칭하는 것은 절대 맞지 않다.
지난날에는 밭사돈과 안사돈은 내외가 심하여 얼굴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당시의 관습 속에서, 밭사돈이 상대편 안사돈을 조심스럽게 높여 부르는 호칭이 사부인이다. 사부인은 안사돈이 안사돈을 이르는 호칭이 아니다.
사돈은 결혼한 자녀의 부모 항렬에서 부르는 호칭이다. 아들과 딸을 서로 주고받은 부모들끼리만 사돈이다. 사돈은 나이의 차이와 관계없이 대등한 한 항렬이다. 사돈의 부모나 자식은 사돈이 아니다.
드라마를 보면 사돈과 사하생 간에, 또 양가의 사하생끼리도 전부 사돈이라 부르는데, 이는 참으로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 이 사형이란 말은 바깥사돈 사이에, 상대편을 높이어 일컫는 말로도 사용한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그리고 사돈댁의 사하생을 지칭할 때는 ‘사하생 총각(도령), 사하생 처녀(아가씨)’라 한다. 또 사돈에는 겹사돈과 곁사돈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도 잘 구별해서 써야 한다. 겹사돈과 곁사돈은 음이 비슷하여 혼동하는 수가 많다. 겹은 중복이란 뜻이고 곁은 옆이란 말이니, 겹사돈은 거듭해서 사돈을 맺은 것이고, 곁사돈은 사돈과 자리를 나란히 하는 동급의 사돈을 가리킨다. 그러니 두 말은 전혀 다른 말이다.
즉 겹사돈은 아들을 장가들이어 사돈이 되었는데, 또 같은 집으로 딸을 시집보내어 사돈 관계가 이루어진 경우와 같은 것을 이른다. 그런데 실제로 이와 같은 겹사돈의 관계가 이루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곁사돈은 친사돈과 같은 서열(항렬)에 있는 사람에 대한 지칭이다. 사돈의 형제자매나 형제자매의 사돈이 모두 곁사돈이 된다. 곁사돈이란 말은 어디까지나 지칭이요, 호칭은 아니다. 부를 때는 그냥 사돈이라 하면 된다.
⦁신랑 신부가 청첩인
과거에는 결혼 청첩장에 혼주 외에 청첩인이 별도로 있었다. 그 일부를 요약하여 보이면 이러하였다.
김갑동 씨의 장남 김철수 군
이을서 씨의 차녀 이영희 양
의 결혼식을 알려 드립니다.
청첩인 박병남 올림
이와 같은 청첩장 형식은 언제부터인가 사라지고, 양가의 혼주가 청첩인이 되는 문틀로 바뀌더니, 요즈음은 신랑, 신부가 청첩인이 되는 형식으로 바뀌었다.
믿음의 촛불을 사랑으로 밝히며
저희 두 사람은 그 결실을 이루려 합니다.
부디 걸음 하시어 따뜻한 축복을
보내 주시면 참으로 고맙겠습니다.
○○○의 장남 ○○
○○○의 차녀 ○○
청첩장에는 지난날처럼 별도의 청첩인이 있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 형식도 바뀌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최소한의 격식은 맞아야 한다.
그런데 이 청첩장과 같은 경우에는, 신랑과 신부가 그 부모들을 젖혀 두고, 자기네 부모의 친구들에게 청첩을 하는 셈이 되니, 예의에도 어긋나고 격식에도 맞지 않은 일이다. 청첩장을 받는 사람은 신랑, 신부의 아버지는 알지만, 신랑이나 신부는 알지 못한다. 그러니 이 청첩장은 모르는 사람을 보고 자기 잔치에 오라는 격이다.
또 신랑, 신부가 청첩을 하면서, 자기네들 부모 이름을 함부로 부를 뿐만 아니라, 그 아래에 씨(氏)자도 붙이지 않았으니 이런 결례가 없다.
그러므로 이 청첩장의 형식을 살려 쓰자면, 최소한 ‘저희 두 사람은’을 ‘저희 양가의 자녀가’로 바꾸어, 혼주가 보내는 형식을 취해야 한다.
⦁홍길동 씨 귀하
우편물의 발신자란에 성명 석 자만 달랑 쓴 경우도 있다. 이것은 대단한 실례다. ‘홍길동 드림’이나 ‘성춘향 올림’이라 써야 한다. 제자라면 ‘문하생 성춘향 올림’이라 써야 예의에 맞다.
윗사람에게 편지를 보낼 때는 직함을 뒤에 붙이면 된다. ‘홍길동 사장님’과 같이 쓰면 된다. 직함이 없을 경우에는 ‘귀하’나 ‘좌하’를 붙이면 된다. 한글체로 쓸 때는 ‘님’ 자를 붙이면 된다. ‘이도령 귀하’, ‘성춘향 좌하’, 홍길동 님‘이라 쓴다. 아랫사람에게 보낼 때는 이름 뒤에 ’앞‘ 자를 쓰면 된다.
그런데 한 가지 유의할 것은 중복된 공대법을 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곧 ’홍길동 사장님 귀하’, ‘홍길동 씨 귀하’, ‘홍길동 님 좌하’, ‘홍길동 씨 좌하’ 등과 같이 쓰는 것은 원칙이 아니다. 귀하나 좌하만을 붙이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여 이중으로 공대를 나타내려고 하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 보이는데 그것은 옳지 않다. ‘님’이나 ‘씨’를 붙이지 한고 그냥 ‘귀하’나 ‘좌하’를 붙이면 된다.
⦁효자(孝子)
축문祝文은 유세차(惟歲次)로 시작되어, 기일을 쓴 다음에 제사를 지내는 맏이의 이름을 쓰는데, 그 이름자 앞에 부모의 제사인 경우 효자(孝子)를 붙인다. 비문을 새길 때 아들의 이름 위에 적을 때도 이 말을 쓴다.
그런데 어떤 이가 말하기를, 자기는 부모가 살았을 때 변변히 효도를 하지도 않아서, 제사 때 효자란 말을 붙이기가 민망하다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이때의 효자란 말은, 부모를 잘 섬기는 아들이란 뜻이 아니라, 부모의 제사에서 맏아들의 자칭이나 또는 부모의 상중에 있는 사람이란 뜻으로 쓰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이 말은 제사를 지낼 때, 제주(祭主)가 부모의 혼백에게 자기를 이르는 일인칭 대명사다. 축문(祝文)을 읽는 입장에서 제주를 이르는 말이다. 그러니 이때의 孝 자는 ‘효도 효’로 읽을 것이 아니라, ‘맏자식 효’, ‘상(喪)당할 효’ 또는 ‘복(服)입을 효’로 읽는다.
제사의 축문에 쓰인 것은 이 중 ‘맏자식’이란 뜻으로 쓰인 것이다. 예기에 ‘축왈효자(祝曰孝子)’란 말을 정현이 주(注)를 달면서 ’효(孝)는 종자지칭(宗子之稱)‘이라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아무튼지, 어버이 제사를 지낼 때 축을 읽으면서, 효자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도록 살았을 때 효도를 잘해야겠다.
⦁아버지
부모를 다른 사람 앞에서 낮추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으나, 이는 전통적인 어법에 어긋나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부모를 말할 때는 언제나 높여야 한다. 여러 사람 앞이나 윗사람에게 말할 때에도 자기 부모는 깎듯이 높여야 한다.
아주 지체 높은 분이 텔레비전에 출연하여, “아버지가 그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라고 말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아마도 그는 자기 아버지를 대중 앞에서는 낮추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말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이런 경우에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라고 깎듯이 높이는 것이 맞는 화법이다. 지난날에는 임금 앞에서 자기 아버지를 낮추는 것이 예법이었다. 그것은, 모든 백성은 임금의 신하라는 당시의 계급사회 관념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만민평등 사회다. 자기 부모를 낮추어야 할 대상은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없다.
살아 있는 자기의 아버지, 어머니를 보고 아버님, 어머님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고 한다. 아버님, 어머님은 타인의 부모나 돌아가신 부모님을 부르는 말이라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할 점이 없지 않다. 왜냐하면, 아버님, 어머님이란 말을, 살아 있는 부모를 부르는 말로 전래적으로 써 왔기 때문이다.
고려속요 ‘사모곡’에도 “아바님도 어이어신마 어마님티 괴시리 업세라.”라는 구절이 있고, 시조집 『고금가곡』에도 “아바님 가노이다 어마님 됴히 겨오”라 하였고, 송강도 “아바님 날 나흐시고 어마님 날 기시니”라 읊었다.
이와 같이 살아 있는 부모에게도 아버님, 어머님을 써 왔고, 지금도 널리 쓰고 있으니 굳이 말릴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아버님, 어머님은 아버지, 어머니의 높임말로 인정함이 타당할 것 같다.
⦁아빠
국어원의 『표준 언어 예절』에는 격식을 갖거나 공식적인 자리 외에는 ’아버지, 아빠‘를 써도 된다고 한다. 그러나 아빠 엄마는 어린아이 말이다. 적어도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이 말을 쓰지 말고, 아버지, 어머니라고 불러야 한다.
성년이 다 된 사람이 아빠, 엄마란 호칭을 쓰고 있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는데, 이는 바람직스럽지 못하다. 다 큰 고등학생이 퀴즈를 맞히고는, ‘엄마에게 감사한다’는 인사말을 하는 것이나, 군대에 복무하는 아들이 텔레비전 화면에 나와, ‘국방의 임무를 충실히 하고 있으니 아빠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고 큰 소리를 외치는 것은, 아무래도 격에 맞지 않은 말투다.
⦁새해 인사말
새해 인사로 가장 적당한 인사말은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이다. 이 말은 집안이나 직장 사회 등 어디에서나 무난히 쓸 수 있다.
그런데 유의해야 할 것이 있다. 웃어른께 세배를 드릴 때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라는 말을 먼저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절하는 것 자체가 인사이기 때문이다. 절을 하고 나서 어른의 덕담이 있기를 기다리면 된다.
또 절하겠다는 뜻으로, 어른에게 “절 받으세요. / 앉으십시오.”와 같은 말을 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가만히 서 있다가 어른이 자리에 앉으면, 말없이 그냥 공손히 절을 하면 된다.
다만 나이 차가 많지 않아, 상대방이 절 받기를 사양하면, “절 받으세요.”라는 말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어른에게 대한 인사말, 즉 “만수무강하십시오. / 오래오래 사십시오.”와 같은, 건강과 관련된 말은 피하는 것이 좋다. 늙음을 의식하게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올해에도 저희들 많이 돌봐 주십시오. / 새해에도 좋은 글 많이 쓰십시오.”와 같은 인사말이 좋다.
⦁신랑은 잘 잡수십니다
새파란 젊은 여인이 텔레비전에 나와서 불특정 다수를 향해 “우리 신랑은 아무것이나 잘 잡수십니다.”라고 하는 말을 서두로 하여, 연신 자기 남편을 공대하는 것을 보았다. 이것은 격식에 맞지 않은 말이다. 부부는 동격이므로 남편을 높이는 것은 자신을 높이는 것이 된다. 즉 ‘내가 밥을 잡수십니다.’와 같은 어법이 되는 것이다.
남편을 시부모나 남편의 형 그리고 손윗사람에게 말할 때도 물론 낮추어 말한다. 그러나 시동생이나 손아래 친척에게는 남편을 높이는 것이 원칙이고 경우에 따라서 낮추어 말할 수도 있다. 또 남편을 남편의 친구나 직장 상사와 같이 가족 이외의 사람에게 말할 때는 상대방의 신분이 확인되기 전에는 서술어에 ‘-시-’를 넣어 표현하고, 남편의 친구나 상사라는 것이 확인되면 ‘-시-’를 넣지 않는 것이 무난하다.
그런데 나이가 든 사람은 남편을 가리켜 말할 때 ‘-시-’를 넣어 말해도 된다. 이를테면 연세 많은 할머니가 불특정 다수에게 “영감님은 아직도 이것저것 잘 잡수십니다.”와 같이 표현해도 된다.
⦁저희 나라
텔레비전의 대담 장면을 보면, ‘저희 나라’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선진국에 비하면 저희 나라는……” 하는 식이다. 얼마 전에 외교부 장관이 국회에서 답변하면서 ‘저희 (나라)’라는 말을 연거푸 쓰는 것을 보았다. 겸손의 뜻을 담기 위하여 쓰는 것 같으나 이는 틀린 말이다.
저희는 ‘우리’의 낮춤말이다. 우리가 낮추어야 할 나라는 지상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주권국으로서 어떤 선진국과도 대등한 나라다. 그러니 ‘우리나라’지 ‘저희 나라’가 아니다.
또 한 직장내에서 회의를 하면서 저희 회사, 저희 학교라는 말을 쓰는 경우가 있는데, 이 역시 잘못된 표현이다. 남 앞이 아닌 자기 식구끼리 자기 직장을 낮추어 말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단도리
단도리란 말을 우리말이나 사투리쯤으로 알고 쓰는 이가 더러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일본말이다. 절차나 방도, 준비를 뜻하는 일본어 단도리段取り だんどり를 그대로 옮긴 것이니 쓰지 않은 것이 좋다.
단도리는 채비란 말로 순화해서 써야 한다. ‘채비 사흘에 용천관 다 지나 가겠다’는 속담이 있다. 준비만 하다가 정작 해야 할 일은 못했을 때 쓰는 속담이다. 실천에 앞서 준비를 꼼꼼히 잘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준비에만 너무 힘을 쏟다가 정작 목표하는 일을 하지 못한다면, 그보다 더 어리석은 것도 없을 것이다. 용천관龍川關은 평안북도 용천군에 있는 재 이름이다.
⦁삐까번쩍
드라마에서도 삐까번쩍이라는 말이 더러 나온다. 그러나 이 말은 순수한 우리말이 아니다. 일본말 비까비까(びかびか)와 우리말 번쩍번쩍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말이다. 마땅히 번쩍번쩍이라 해야 한다.
그런데 삐까번쩍이란 말을 쓰는 예를 보면, 주로 겉을 번지르르하게 꾸미고 자기를 과시하는 모양을 나타내는 데 쓰고 있음을 본다. 말을 보면 세태의 변화를 알 수가 있다. 세상이 지금 그렇게 물신주의로 변하고 있음을 삐까번쩍이란 말에서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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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화재는 내친구 원문보기 글쓴이: 장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