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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백운동 별서정원(別墅庭園)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불과 1~2년 밖에 되지 않는다.
별서정원은 누정(樓亭)과는 다르다.
현대의 휴양주택인 별장(別莊)에 그 뜻이 비슷하나 본가(本家)로부터 가까운 곳에 원림(園林)을 조성해 놓고 빈객(賓客)과 휴양을 위한 장소로서, 원래는 일시적만으로 자연과 더불어 생활하기 위하여 마련한 공간이다.
백운동별서는 월출산 옥판봉 남쪽자락에 위치한,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안운마을 태평양다원 사이에 자리 잡은 전통정원이다.
호남 원림의 원형이 고스란히 남아있어, 최근에 들어 호남 3대 원림의 하나로 일컬어지고 있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오래전부터 유명세를 타고 있는 보길도 세연정(洗然亭)은 인공적인 느낌을 주는 지나치게 노출된듯한 공간이라는 단점이 있고,
담양의 소쇄원(瀟灑園)은 단정함이 부족하고 아늑한 맛이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는데 비하여,
백운동은 원림의 다섯가지 요소( 화초, 나무, 물, 바위, 누정 )를 다 갖추고 있으면서도 두곳의 단점을 충분히 갖추고 있고, 덤으로 은둔적인 분위기에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노장사상(老莊思想)을 느낄 수 있는 최고의 원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입산조 이담로(李聃老)가 1670년경에
들어온 이래 이곳을 방문한 수많은 명사들의 시문(詩文)이 다른 어느 곳보다 풍부하게 남아
있어 그 가치를 더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눈에 보이는 것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지나 온 이야기거리가 많이 있어 상상의 세계가 그만큼 넓어진다는 뜻이니 느끼는 것 또한 그에 못지 않게 많아서 좋다.
몇 년 전 날씨 좋은 날, 강진 읍내의 한적한 곳에 있는 "모란이 피기까지는"로 유명한
영랑생가(永郞生家)에 간 적이 있었다. 한가롭게 따뜻한 햇살을 맞으며 툇마루에 앉아 있던 아내가 이런 곳에서 살고 싶다며
"우리 강진군청에 이곳을 임대해 달라고 하면 어떨까."라고 농담을 하였는데
이곳에 와서는 아예 "우리 이거 사자 ! "라며 좋아 한다. 아내도 꽤나 마음에 들었나 보다.
백운동 별서로 가는 길은 새로 난 북쪽 길과 남쪽의 안운마을에서 가는 옛길이 있는데 북쪽 길을 택했다. 오랜 시간으로 이루어 진 곳은 새로 길을 내거나 길을 넓히는 일은 정말 신중히 해야 한다. 자칫 그 가치를 훼손하기 쉽다.
진입로 입구에 강진군에서 넓직한 주차장을 마련해 놓았는데 좌우로 태평양다원의 시원한 차밭이 펼쳐져 있다. 아직은 관광객들이 차밭으로만 눈길을 돌리고
별서정원으로 가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주차장 한쪽으로 난 내리막 길로 된 숲속 진입로는 한 사람씩만 다닐 수 있는 오솔길인데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도 않는다.
3~4년 전에 이 앞으로 지나 다닌 적이 있는데
이런 곳이 있을 줄이야 생각도 못했다.
그만큼 외부와 격리되어 지금은 안내판이라도 있으니 찿아가지 그전에는 철저하게 숨어있는
무릉도원이었을 것이다.
길을 내려가니 오래된 동백나무 숲과 빽빽한 대나무 숲이 하늘을 가린다.
그리고 키 작은 산죽 사이로 야생 차나무가 제 멋대로 자라고 있어 이곳의 차가 어제 오늘일이 아님을 알려준다. 바위 투성이 길을 좀 내려가니 왕대나무밭이 나오고 기와담이 빼꼼이 보인다. 동백숲이 끝나고 비자나무와 상록수림에 파묻힌 계류(溪流)를 만나는 지점에 놓인 큰 바위에 " 백운동(白雲洞) "이란
세 글자가 암각되어 있다.
글씨는 백운동의 입산조인 이담로가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전에 백운암이란 사찰이 있었던 자리였으며
풍광이 좋기로 이름이 났던 곳이어서 이담로 이전에 이미 원림이 경영되었던 곳이다.
이담로의 본가(本家)는 6km가량 떨어진 강진 읍내에 가까운 성전면 금당리에 있다.
그는 과거에 몇차레 응시했으나 실패하자 포기하고 큰아들 이태래(李太來 1657~1784)에게 가산(家産)의 운영권을 물려주고 백운동에 들어 와 별서정원을 가꾸기 시작했다. 이담로의 나이 사십대 중반 무렵으로 1670년경이었고, 이후에 7~8세 된 둘째 손자 이언길(李彦吉 1684~1767)을 데리고 들어 와 20여년간 같이 지내다가 별서를 물려주고 세상을 떠났다.
손자 이언길이 만년에 남긴 글이 전해진다.
""이곳 백운동은 바로 내 할아버님께서 세우신 별업이다. 내가 어려서부터 언제나 이곳에서 모셨는데 이제 와 생각해보니 나도 모르게 슬퍼진다. 하물며 이곳을 물려주실 적에 두 번
세 번 말씀하시고 간곡히 당부하셨다. 내 자신이 이곳에 살지 않고 그저 그 땅의 소출만
받아 먹는다면 이것은 할아버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어 이곳에 주인 노릇을 하게 하거나 그 땅을 팔아먹는 것 또한 할아버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ㅡ 중략 ㅡ
맏아들 의권(毅權 1704~1759)은 옛 마을에 있으면서 먹거리를 대게 하였다. 병자년(1756)에 큰 기근이 들자 온 식구를 다 이끌고 처음으로 별서로 들어왔다. 이에 영리에 뜻을 끊고 임천에서의 삶을 즐기니 방 안 가득 도서를 쌓아 놓고 편안한 거처에서 초연하게 지냈다. 오로지 자식을 가르치고 책 읽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매년 따뜻한 봄날과 시원한 가을이면 베옷 입고 짚신을 신고는 높은 산에 오르며 물가에 임해 서성이면서 돌아옴을
잊었다.""
☆ 임천(林泉)의 삶 : 은둔의 삶의 중국고사.☆
이언길이 73세 되던 1756년에 전국에 큰 기근이 들었다. 이때 아들 의권의 온 식구가 백운동 별서로 모두 이주하여 더 이상 별서가 아닌 이언길 직계의 생활 터전으로 자리 잡아 왔다. 그리고 할아버지 이담로의 유지를 오늘날까지 잘 받들어 13대에 걸쳐, 동주(洞主)로는 11대를 물려 지켜왔다.
한국전쟁 때에 지은 본채 외에는 모두 황폐화되었던 것이 대부분 복원되었는데, 본채도 작년에 철거하고 지금은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를 하는 중에 있다.
지난 5월4일 발표된 중간 보고에 따르면 건물지는 유물층이 상층과 하층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하층은 고려시대 사찰에서 차를 마시는 데 사용되는 다완과 청자발우, 청자접시, 정자잔 등 다양한 청자편이 발견되었고, 상층은 조선백자와 기와유물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고려청자는 최근에 조사되고 있는 인근 월남사지에서 출토되고 있는 유물과의 상관관계에 주목하고 있다.
백운동의 가치는 이러한 유형유산(有形遺産)보다 풍부한 기록유산(記錄遺産)과 뛰어난 경관(景觀)을 이용한 원림의 경영을 손꼽고 싶다.
백운동에 전해온 각종 기록과 시문을 모아서 입산조 이담로의 6대손 이시헌(1803~1860)이 역은 "백운세수첩"이 있다. 이 책의 말미에 남아 있는 이시헌의 친필 발문(跋文)을 일부 소개한다.
"" 시내와 바위, 안개와 노을의 경치가 호남에서 유명해 당시에 이름난 분과 어진 이들이 수창하여 주고받은 시문이 많았다.
하지만 세월이 오래되다보니 많이 유실되어 남은 것이 얼마 없다. 이제 대나무 상자를 뒤져
얼마간의 시와 글을 얻고 합쳐서 한 권으로 만들어 오래 전하기를 도모하고 백운도(白雲圖)를 그려 책머리에 얹는다. 후손으로서 백운동을 지켜 이 집을 전하는 자(者)라면 귀한 옥처럼 받들어 오로지 감히 실추시킬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 후손들이 서로 힘써 이를 지켜 잃지 않아 길이 백운동의 귀한 물건이 되게 하기를 바라노라. 경술년(1850) 10월 동주 이시헌 적는다. ""
이렇듯 유형과 기록유산의 보존을 당부하는
선대의 뜻을 오랜 세월 동안 잘 지켜 오늘날의 백운동 별서 정원이 있게 되었다.
백운동에 들려 시문을 남긴 몇사람의 흔적을 살펴 본다.
영의정을 지낸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桓)은 2차 예송(禮訟) 논쟁에서 남인에게 패하여 1675년에서 1678년까지 원주를 거쳐 영암 구림리로 유배되었다. 당시 아들 김창흡과 김창집 형제가 아버지를 모시고 해남과 강진 지역의 승경을 유람하면서 풍성한 기행문과 시문을 남겼다. 1689년 기사환국(己已換局) 때 우암 송시열(宋時烈1607~1689)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국문을 받기 위해 한양으로 오는 길에 정읍에서, 김수항은 진도의 유배소에서 사사(賜死)되었다. 지금도 구림리 인근에는 김수항 부자의 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다.
1677년 가을에 월출산 유람을 나서면서 백운동에 들려 김창흡과 김창집은 나란히 "백운동 8영"이란 시를 남겼다.
백운동의 여덟 영물(詠物), 소나무와 대나무,
매화와 연꽃,거문고와 학,국화와 난초를 주제로 오언절구를 지었다.
백운동의 전체 풍광보다는 주인의 삶에 이들 8가지 주제를 연관시켜 노래한 다분히 관념적인 시다.
1812년 가을에 강진에 유배 중인 다산 정약용은 제자들과 함께 월출산 천황봉 정상을
오를 수 없게 되자 발길을 돌려 백운동에 들렸다. 이덕휘(1759~1828)가 4대 백운동 주인으로 있을 때 였다.
다산의 어머니는 공재 윤두서의 손녀로 이덕휘의 어머니 역시 해남 윤씨로 가까운 인척이 되었으므로 금새 가까워질 수 있었고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하룻밤 유숙하였다.
그리고 백운동의 아름다운 12경(景)을 12편의 친필 시로 적어 제자 초의선사에게 "백운동도"와 "다산도"를 그리게 한 뒤 "백운첩"으로 꾸며 이덕휘에게 선물하였다.
백운동의 12경은 다음과 같다.
1경 : 옥판봉의 상쾌한 기운.
2경 : 산다경의 동백나무 그늘.
3경 : 백매오의 매화향기.
4경 : 단풍나무의 붉은 빛이 어린 옥구슬 폭포.
5경 : 마당을 돌아 나가는 물굽이에 띄운 술잔.
6경 : 창하벽에 붉은 먹으로 쓴 글씨.
7경 : 정유강의 용 비늘 같은 소나무.
8경 : 꽃계단에 심은 모란.
9경 : 사랑채인 취미선비의 세 칸 초가.
10경 : 풍단 단풍나무의 붉은 비단 장막.
11경 : 옥판봉이 한눈에 들어오는 정선대.
12경 : 운당원에 우뚝 솟은 왕대나무.
함께 간 초의는 다산이 노래한 12경의 풍광을 하나의 화폭에 빠뜨림 없이 담아내어 "백운도동"을 그려냈다. "다산도"는 다산초당을 그린 것으로 백운동과 자신의 초당을 비교하고자 하였다.
오늘날도 위의 12경을 계절에 따라 하나 하나 감상하면서 백운동을 살펴보면, 200년이란 시간을 덤으로 다산이 보는 백운동의 정경을 느낄 수 있겠다.
정말로 계절마다 저마다 다른 정취를 느끼고 싶은 곳이어서 남도에 갈때 마다 꼭 들리고 싶은 곳이다.
이렇게 다산의 백운동 방문 이후 이덕휘는 열렬한 다산의 후원자가 되고, 아들 이시헌을 다산의 문하에서 배우게 함으로서 후대에까지 교유가 이루어지게 됐다.
이덕휘가 초당을 방문하기도 하고, 과일과 술을 선물로 보내기도, 다산을 백운동으로 초청하기도 하였다. 이에 다산은 산음(山陰)의
흥취를 거론하며 건강 때문에 가보지 못함을 유감스러워했다.
☆ 산음의 흥취 :
이전의 올린 글 설중방우(雪中訪友)를 말함 ☆
해배(解配)가 되어 상경한 이후 초당생활을 하던 시절의 음다(飮茶)습관에 필요한 차가 부족했던 다산은 백운동의 울창한 대숲 아래에서 자생하는 차나무를 새삼 떠올려 이시헌에게 차를 만들어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덕휘가 사망한 이후인 1830년
3월 15일에 쓴 편지를 보자.
"이제 곡우가 되었으니 다시금 이어서 보내주길
바라네. 다만 지난번 부친 떡차는 가루가 거칠어 썩 좋지가 않더군. 모름지기 세 번 찌고
세 번 말려 아주 곱게 빻아야 할 걸세. 또 반드시
돌샘물로 고루 반죽해서 진흙처럼 짓이겨 작은
떡으로 찍어낸 뒤라야 찰져서 먹을 수가 있다네. 유념해주면 좋겠네."
구증구포(九蒸九曝)가 아니라 삼증삼쇄(三蒸三曬)를 언급한 부분이다.
이처럼 다산은 이시헌에 제다법(製茶法)까지 가르쳐 주며 차를 얻어 사용하였다.
다산의 요청으로 제다에 관심을 가지게된 이시헌은 초의의 "동다송"에 언급된 "동다기(東茶記)를 필사하여 저자가 이덕리(李德履)란 사실이 밝혀졌다.
그뿐만 아니라
다산의 아들 정학연이 1857년 11월 22일 백운동에 보낸 편지에
"네 봉의 좋은 차와 여덟 개의 참빗은 마음의 선물로 받겠소. 깊이 새겨 감사해 마지않소."
라는 글이 남아 있다.
이시헌은 1830년 스승 다산에게 떡차를 만들어 보냈고, 이후 27년이 지난 1857년까지도 여전히 차를 만들어 다산의 아들에게 차를 보내고 있었던 셈이다.
이때는 다산이 세상을 뜬 지 이미 21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이러한 연유로 대숲에서 자라는 야생차를 따서 만든 백운동의 월산작설차는 끊이지 않고 이어져 10대 동주(洞主)인 이효천(李孝天 1933~2012)에 의해 최근까지 만들어졌다.
또한 같은 후손으로서 인근 월남리에 살던 이한영(1868~1956)은 "금릉월산차"나 "백운옥판차"를 만들어 판매하면서 그 맥이 이어졌다.
백운동 별서 정원은 그 가치가 원림에만 있지 않다. 소치(小痴) 허련(許鍊)은 자신의 진도 운림산방에 비유해 노래했으며, 묵재(默齋) 신명규(申明圭 1618~1688), 귤은(橘隱) 김유(金瀏) 등 많은 사람들의 기록문화유산이 남아있을 뿐만 아니라
차문화의 역사적인 현장으로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왕대나무밭과 동백나무 숲
진입로의 동백터널.
산죽밭에 제멋대로 자라고 있는 야생 차나무.
어린 대나무순(?).
취미선방. 산허리에 있는 선방이란 뜻이다.
절집도 아닌데 선(禪)이라 함은?
유상곡수의 물길이 보인다.
포석정처럼 술잔을 띄우는 물길인데 일반 민가에 남아있는 것으로는 유일하다.
정선대. 여기 앉아서 월출산을 보면 옥판봉이 보인다.
월출산 옥판봉.
빨간 화초가 있는 곳이 최근까지 있었던 살림집 본채 자리이다. 지금은 복원을 위해 철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