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뜻으로 본 한국역사 - 머리말
함석헌
이 조그마한 글은 본래 20년 전 여나문 되는 믿음의 동지들 앞에서 이야기로 한 것이다. 그 때는 우리가 ‘우리 거문고를 바빌론 시냇가 언덕 위의 버드나무 가지에 걸어 놓던’때다. 밖에서 오는 억누름 안에서 오는 슬픔으로 말이 자유롭지 못한 그때에 쓰디쓴 입에 붙이어 될 수 있는 데까지 간추려서 우리 역사의 뜻을 말해 보자는 것이 이 고난의 역사다.
그 후 그것을 그 동지의 한사람이요 지금은 땅에는 있지 않는 김교신(金敎臣)님이 그 다달이 내는 ‘성서조선’ 지에다 이어 실었다. 광고도 선전도 아니하는 그 잡지 읽는 이가 고작 많을 때도 2백이 차지 못하였다. 그리하다 그나마도 억누르는 자의 뜻에 거슬려 아주 내지 못하게 되는 때에, 이 역사도 그 이유의 하나였고, 책은 모두 뒤져내어 없애 버린 바가 되었으니, 이 고난의 역사는 정말 그 바빌론 거친 들에서 지나가는 바람결에 잠깐 들렸다가 들 끝에 사라져 버리는 외로운 종의 앓는 소리 같이 아주 없어져버린 듯하였다.
그런데 해방이 왔다. 사람들은 어둔 밤중에 “신랑이 오니 나와 맞으라”하는 외침을 듣고 서야 비로소 기름을 찾고 둥을 찾아 어둔 골목을 헤매고 더듬는 어리석은 처녀들처럼, 그 때서야 새삼스레 역사를 찾게 되었다. 누구에게 기름을 나누어줄 만한 우리도 못 되지만 이러한 요구 속에서 잃어진 고난의 역사를 다시 찾는 날이 오게 되었다.
쓴 사람은 아직 38선 북에서 한때 버드나무 가지에서 내렸던 거문고를 줄도 채 골라 보기 전에 다시 그것을 시베리아 자작나무 가지에 도모 매달아 버리게 되지나 않나 가슴을 두근거리며 눈물을 씻고 있는 동안에, 먼저 서울로 달려온 노평구(盧平久)님이 ‘성서연구’지를 내면서 일본 벼슬아치가 짓밟고 찢다 남은 휴지 속에서 이리저리 애써 찾아 이것을 다시 싣게 되었으니, 고난의 역사가 또 한 번 고난의 마디를 더하고 나온 셈이다.
이제 이것이 다달이 내기가 다 마쳐지는 때에 모아서 한 책으로 내자는 의론이 일어나 그렇게 되게 되었다. 골방에서 무릎을 걷고 앉아 친구들에게 이야기로 한 그대로를 다듬지도 못하고 세상 앞에 널리 내놓는 쓴 사람의 마음은 부끄럽고 두려울 뿐만 아니라 차라리 설움을 금할 수 없다 하여야 옳은 말이다. 본래 이것은 나 홀로의 한숨이며 돌아봄이요, 알아주는 친구에게 하는 위로요 권면이다. 우리의 기도요 믿음이지 역사연구가 아니다. 형산(荆山)에서 박옥(撲玉)을 얻은 사람같이 다듬을 겨를도 없이 내놓기는 하면서도 그래도 한편, 될 수 있다면 고난의 역사를 연구해 보자고 뜻만은 남몰래 먹었다.
그러나 게으른데다가 주위의 사정도 좀 있고 하여서, 세월은 흐르고 세상일은 어긋나고, 남북으로 헤매는 동안에 책이라고는 한 페이지도 못 읽기를 10년이 넘도록 하였으니, 그때의 뜻은 물처럼 흘러갔고, 박옥은 박옥대로 굴러다니다가 그 모양대로 나오는 수밖에 없이 되었다. 어찌 아니 슬플까?
그리고 고치지도 깁지도 아니하는 데는 또 까닭이 하나 있기도 하다. 그것은 이 고난의 역사는 이대로 그 잡혀 갇혔던 때의 한 가지 예술품이니, 그 모양대로 두어서 고난을 말하게 하자는 것이다. 버젓이 내놓지 못한 것도 그때의 그 공기니 그대로 두자는 것이요, 연구가 찬찬치 못하고 말하는 법이 거칠은 것도 고난의 곡조를 아뢰는 데 뽑힌 깨어진 악기의 저 제대로의 꼴이니 그냥 두자는 것이다.
‘성서적 입장에서 본’이라는 제목의 구절이 일반 사람에게는 걸림이 될 듯하니 빼면 어떤가 하는 의견이 잠깐 나왔으나 그것은 사슴에게서 뿔을 자르는 것 같아 그대로 두기로 하였다. 이 글이 이 글 된 까닭은 성경에 있다. 쓴 사람의 생각으로는 성경적 입장에서도 역사를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자리에서만 역사를 쓸 수 있다. 똑바른 말로는 역사철학은 성경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서양에도 없고 동양에도 없다. 역사는 시간을 인격으로 보는 이 성경의 자리에서만 될 수 있다.
기독교에 관한 것은 이미 다 아는 것으로 하고 썼던 글이므로 성경을 읽지 않는 이에게는 불편한 점이 많을 줄 안다. 그러나 기독교를 믿고 아니 믿고 간에 성경을 한 번 읽지도 않고 인류 역사를 알자는 것은 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읽는 이에게 성경 읽기를 권하는 의미로 스스로 수고하기를 바라고 주도 아무 것도 아니 달았다.
역사 사실(史實)에 관하여도 그 자세한 것을 말하자는 것이 본래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그보다는 뜻을 풀어 밝혀 보자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들을 말하는 데 있어서는 그 사이에 저울질도 아니 하였고 읽는 이에게 보통의 역사 지식은 있는 것으로 알고 썼으니 그 점도 널리 알아주기 바란다.
재(才), 학(學), 식(識)이 다 없고, 정성은 더구나도 모자라, 다듬지도 않은 채로는 내놓기는 하지만, 박옥(撲玉)을 옥이라고 하였던 죄로 형벌을 당한 화씨(和氏) 모양으로 두 다리를 잘릴 뿐 아니라 오체(五體)가 갈라지는 한이 있다 해도 고난의 역사 속에 옥이 들어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변할 수 없는 확신을 가진다. 읽는 이는 스스로 이것을 다듬어 우리 수난의 여왕 앞에 놓기를 바란다.
1950 년 3월 28일
著 者 씀
넷째 판에 붙이는 말
고난의 역사, 역사는 첫머리에서 나중 끝까지 고난인가, 역사가 고난이요 고난이 역사인가? 속만 아니라 겉까지도, 뜻만 아니라 그 나타내는 말까지도 고난이어야 하는 것인가? 이 씨ᄋᆞᆯ의 역사를 나는 고난이라 하였고, 그 고난의 모습을 그려보자는 것이 이 조그마한 책인데, 이 책을 세상에 내놓는 데도 어찌 그리 어려움이 많은가? 끝에서 끝까지 그 받는 고난을 통한 시련으로 하여금 완전한 것이 되게 하기 위하여서인가? 나는 이번 이 네 번째의 새 판을 내면서 속속들이 그것을 느낀다.
고난의 역사가 애당초 어째서 나타나게 되었는지 나도 모른다. 내가 한 소리라면 내가 한 소리지만 나도 어째서 그 말을 하게 되었는지를 모른다. 그저 생각난 것을 말하였을 뿐이다. 그것은 전인미답이라 하고 내 입이 했지만 해놓고 보면 감히 내 말이라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있는 말이었다.
역사철학이라지만 이것은 철학이 아니요, 과학이다. 생각해 낸 것이 아니라 있는 대로를 그려낸 것뿐이다. 본래 이 세상에는 엄정한 의미에서는 철학은 없다 해야 옳다. 사색이라, 상상이라, 창작이라 하지만 그것도 다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있는 것을 그려낸 것뿐이다. 서술이다. 그러므로 과학이다. 반대로 만일 철학이라고 한다면 아인슈타인의 우주론도 철학이다. 생각해낸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공자는 자기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고 하였다.
고난의 역사를 처음으로 말할 때에 내 심정은 약혼받은 거러지 처녀 같은 상태였다. 그에게 가진 것이라고는 부끄러움과, 사랑과, 곧음밖에 없는 모양으로, 아무것도 배우고 준비한 것이 없이 역사를 가르치자고 교단에 선 나에게는 가진 것이 있다면 믿자는 의지와, 나라에 대한 사랑과 과학적이려는 양심 이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내 나라를 버리고 모른다고 할 수는 없지, 잘났거나 못났거나, 영광이거나 부끄러움이거나 사실을 사실이라 아니할 수는 없지, 꾸부리고 거짓 꿈일 수도 없지, 그러나 하나님이 계신 이상 모든 일에 뜻이 없을 수는 없지, 살 수 있는 날이 오겠지, 이 세 가지 작대기 같은 생각으로 천막을 버티고 그칠 것 같지도 않은 일제시대의 폭풍우를 견디며 그 밑에서 어린 마음들에게 씨를 넣어 주자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천막 속에서 임금의 아들을 배는 거러지 처녀 모양으로 그러는 동안에 어디서인지 까닭을 설명할 수 없이 내 마음 속에 알들어 온 것이 이 고난의 역사라는 생각이었다. 이제 와서 보면 내 생각이라고는 할 수 없는 이 말씀은 전쟁 중에 설어서 낳았던 임경업 모양으로 환난 속에 밴 그 님의 씨 ᄋᆞᆯ이었다.
이것을 처음 말할 때는 겨울날 문을 닫은 골방 안에서 머리를 맞대고 하는 기도로써 하였다. 그것은 살았지만 그대로는 내놓을 수 없는 벌거숭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을 밖에 내놓을 때는 많은 고심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적당한 옷을 입혀야지.
성서조선 동기집회에서 한 주일 동안에 한 말을 두 해에 걸쳐 매 달 나오는 ‘성서조선’잡지에 실을 때는 학교 시간에 교수를 하는 이외에는 이것이 나의 주 되는 일이었다. 지도 교수가 있는 대학도 아니지, 도서관도 참고서도 없는 시골인 오산이지, 자료라고는 중등학교 교과서와 보통 돌아다니는 몇 권의 참고서를 가지고 나는 내 머리와 가슴과 씨름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파리한 염소 모양으로 나는 씹는 것이 일이었다. 지푸라기 같은 다 뜯어먹고 남은 생선 뼈다귀 같은, 일본 사람이 쓴 꼬부려 낸 모욕적인, 또 우리나라 사람이 쓴, 과장된 사실의 나열을 나는 씹고 또 씹어 거기서 새끼를 먹일 수 있는 젖을 내 보자니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재주 없는 것을 한도 많이 하였고, 공부 못한 것을 후회도 많이 하였다. 또 30년 전 일이다. 문장을 다듬어 보자는 어리석은 생각도 아직 있었고, 더구나 일본시대에 말의 자유가 없는 때라 당당히 할 말도 많이 스스로 깎아야 하는 때이므로 더욱 어려웠다.
어쨌거나 그렇게 되어서 나온 것이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였다. 그 때에 우리나라 사학계라 할 것도 없고, 나 자신도 감히 사학계를 생각에 둔 것도 아니지만, 그 글이 발표되어 해방 때까지 10년이 되는 동안에 역사를 쓰는 이들로부터는 물론 묵살이요, 잡지 독자라야 2백을 넘지 못했으므로 읽어 주는 사람은 극히 적었다.
그러나 일제 말년에 감옥살이를 해본 것은 이 글 때문이었다. 그래도 마지막에 심문하던 법관의 입으로 “그렇다면 세계역사도 결국 고난의 역사 아니냐? 일본역사를 한번 그 자리에서 쓴다면 재미있지 않으냐?”고 한 것은 역시 이 고난의 역사의 승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책은 물론 다 압수당하고 말았다.
해방 후 갑자기 우리말, 우리 역사의 소리가 높아지자 이 책도 잿더미 속에서 살아나왔다. 그리하여 마침내 단행본으로 출판하자는 말들이 나와서 간신히 책을 만들어 놓자 6·25 전쟁이 터졌으므로 이 책은 또 불더미 속으로 들어갔다. 그것이 둘째 판인데, 그 때는 일본 시대에 바로 쓰지 못하였던 글귀들을 고쳐서 썼을 뿐, 내용은 별로 다름이 없었다.
웬일인지 나도 모른다. 내 마음은 그 글을 쓸 때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는데, 세상이 그 책에 대한 태도는 매우 다르다. 읽었노라는 사람, 읽고 싶다는 사람이 퍽 많아졌다. 그리고 난즉 또 장사 셈을 치는 사람이 생긴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탄압은 아닌 다른 재난이 오기 시작하였다. 책을 보겠다는 사람은 많은 데 책은 그것 때문에 옥신각신 얼마 동안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이 문제 아니었다. 그보다 중대한 문제가 있었다. 내 믿음이 달라진 것이다. 처음에 역사를 쓸 때에 나는 기독교 신자, 그 중에서도 무교회 신자였다. 기독교만이 참 종교요, 그 기독교는 성서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본래 우리나라에서는 성경이라 하였고 뜻으로도 그것이 좋은데 일본 사람들이 성서라 하였기 때문에 우리도 어느덧 성서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책 이름도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라고 하였고, 참의미의 역사철학은 성서에만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나는 언제까지나 남의 종교를 믿고 있을 수는 없었다. 처음에 오산 있을 때 나는 아직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무교회 신앙’을 믿고 있었지 내 종교를 가지지 못하였다. 그러나 나는 남이 해 준 사상 그 말을 그대로 외우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것이 싫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성품이었다.
나는 차차 나로서 보고 싶은 내 생각, 내 믿음 을 가지고 싶었다. 나는 선생에게서 해방이 되고 싶었다.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어서 보내 주신 대학이 서울 서대문 현저동 1번지였다. 감옥 1년에 생각을 파는 동안에 사상의 테두리는 조금 넓어지고 깊어지고 조금 더 멀리 내다보이는 것이 있게 되었다. 그랬다가 그 후 해방을 맞고 6·25를 겪는 동안 아주 결정적으로 달라지게 되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대선언’이요 ‘흰손’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내 역사에 대한 사회의 요구가 차차 늘어가서 1961년에 그 세째 판을 내려 할 때에 나는 크게 수정을 하기로 하였다. 고난의 역사라는 근본 생각은 변할 리가 없지만 내게는 이제는 기독교가 유일의 참 종교도 아니요, 성경만 완전한 진리도 아니다 모든 종교는 따지고 들어가면 결국 하나요,역사철학은 성경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나타나는 그 형식은 그 민족을 따라 그 시대를 따라 가지가지요, 그 밝히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그 알짬되는 참에 있어서는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 곁들여서 내 태도를 결정하게 한 것이 세계주의와 과학주의다. 세계는 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국가주의를 내쫓아야 한다는 것이요, 독단적인 태도를 내버리고 어디까지 이성을 존중하는 자리에 서서 과학과 종교가 충돌되는 듯한 때는 과학편을 들어 그것을 살려 주고 신앙은 그 과학위에 서서도 성립이 될 수 있는 보다 높은 것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책을 내게 되는 전해 겨울 해인사에 한 달을 가 있으면서, 전체에 걸쳐 크게 수정을 하여 모든 교파주의적인 것, 독단적인 것을 없애 버리고 책 이름도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고 고쳤다. ‘성서적 입장’이라는 대신 ‘뜻으로 본’이라고 붙일 때에 나는 여러 가지로 생각하였다. 많은 기독교인 더구나 무교회 신자들을 섭섭하게 할 것,심하면 거침돌이 될 것까지 생각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제 기독교인만 생각하고 있을 수 없다. 그들이 불신자라는 사람도 꼭 같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게는 이제 믿는 자만이 뽑혀 의롭다 함을 얻어 천국 혹은 극락세계에 가서 한편 캄캄한 지옥 속에서 영원한 고통을 받는, 보다 많은 중생을 굽어보면서 즐거워하는 그런 따위 종교에 흥미를 가지지 못한다. 나는 적어도 예수나 석가의 종교는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종교 토론을 길게 할 것은 아니나 아무튼 내 생각이 그러하였기 때문에 그 사연을 서문 속에 밝혀 놓고, 그때 마침 외국에 구경을 떠나게 되었으므로, 그것을 출판사에 넘겨주고 갔더니 웬일인지 그 서문은 불이 타서 잃어버리고 나는 여행 중에 미처 시간이 없었으므로 유달영(柳達永) 형의 발문을 얻어서 대신하고 내었던 것이다.
미리 헤아렸던 대로 ‘뜻으로 본’이라는 말이 몇 사람의 무교회 친구들을 섭섭하게 하였고 심지어는 나를 믿음에서 타락하였다고 하였다. 내 행동을 보고 타락이라면 티끌만한 변명도 할 여지가 없으나 그 사상을 두고 한다면 나는 자신이 있다. 장차 앞에 오는 역사가 나를 옳다 할 것이다. 또 타락이니 올라가니 하는 것이 상대적이 아닌가? 지옥에서 보면 천당이 타락 아니겠나? 그러나 천당도 지옥도 문제가 되지 않는 높은 자리에서는 남이 타락이라거나 구원이라거나 상관이 없다. 남을 천당에 올리고 지옥에 떨어뜨리는 것이 내 일이 아니라, 나는 내 믿음을 가지고 생의 대행렬에 참여할 뿐이다. 혼자서 안락하기보다는 다 같이 고난을 받는 것이 좋다. 천국이 만일 있다면 다 같이 가는 데 아니겠나?
다 같이 가는 데가 어디일까? 의인, 죄인, 문명인, 야만인을 다 같이 구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유신론자, 무신론자가 다 같이 믿으며 살고 있는 종교는 무엇일까? 그래서 한 소리가 ‘뜻’이다. 하나님은 못 믿겠다면 아니 믿어도 좋지만 ‘뜻’도 아니 믿을 수는 없지 않으냐? 긍정해도 뜻은 살아 있고 부정해도 뜻은 살아 있다. 져서도 뜻만 있으면 되고, 이겨서도 뜻이 없으면 아니 된다. 그래서 뜻이라고 한 것이다.
이야말로 만인의 종교다. 뜻이라면 뜻이고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이고 생명이라 해도 좋고 역사라 해도 좋고 그저 하나라 해도 좋다. 그 자리에서 우리 역사를 보자는 말이다. 썰물 난 바다 장변의 소라 같은 정통 신앙주의자들이 타락이라고 내버리는 동안에 일반 사람들 더구나 그 중에서도 앞날의 주인인 젊은이들은 이 ‘뜻으로 본’ 역사를 밀물처럼 환영하였다. 그리하여 다시 새 판을 낼 필요를 느꼈다.
그러기 전 내가 외국 여행에서 돌아오기 전후하여 역사가 팔리는 것을 보자 쓴 사람은 알지도 못하는 동안에 마구 찍어낸 사람이 있었다. 나는 몰랐다가 “책이 왜 그 꼴이오?”하고 알려 주는 사람이 있어서야 비로소 알았으므로 그것을 바로 잡노라 얼마 동안 분주한 다음 삼중당의 청을 받아 금년 초에 새 판 준비를 하게 되었다. 내용은 대체로 전의 것 그대로나 한문 글자를 좀 더 덜고 5·16 이후 역사에 관한 한 장을 새로 더하고 서문을 붙여서 내기로 하였다. 곧 인쇄소로 보내어 교정을 거의 마치고 이제 새로 써야 하는 원고가 남았을 뿐이었다. 그것은 몇 시간이면 되리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고난의 역사의 가는 길은 그렇지 않았다. 한일회담 문제가 점점 급하여졌고, 나는 그냥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하여 몇 시간이면 쓰겠다던 원고를 제쳐 놓고 나는 싸움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해방 후의 새 나라를 제주도로 상징하면서 이제 우리는 한 때 우리를 아주 삼켜 버리는 듯하던 남해의 사나운 물결 밑에서 기어나와 제주도 해안에 상륙한 셈이라고 하였는데 그 눈앞에 빤한 한라산이 왜 그리 올라가기가 어려운가?
한일교섭의 내용이 차차 밝아지자 나는 역사의 흐름이 거꾸로 지쳐 내려감을 느꼈다. 원치도 않는데 우쭐대며 나서서 길잡이 노릇 하겠다던 것들이 이제 와보니 우리를 물 속에 차 넣고 이 나라를 마음대로 팔아먹으려는 도둑인 것이 분명하고, 이미 다 빠져 나왔던줄 알았던 죽음의 물결은 그 마수를 공중 높이 들어 덜미 뒤에 다가오지 않았는가? ‘이것은 3.1운동 때보다 더한 민족의 위기’라는 말이 서로 기약한 것 없이 동시에 우리 입에서 나왔다. 그리하여 우리는 싸움에 전력하게 되었다.
그러나 싸움은 순탄치 않았다. 고난에다 고난을 더하노라고, 드디어 운명의 6월 22일이 와서 매국적인 조약에 도장이 찍힌다는 소문이 떠돌아 전 국민이 분개하고, 남도 나 자신도 다 같이 내가 굳세게 반대의 한 마디를 부르짖어야 할 것을 느끼는 때에 나는 뜻하지 않았던 일이 터져 강원도 산골짝에 가서 엎디어 있어, 계집의 무릎에 누워 머리를 깎이우고 밧줄로 동임을 받아 꼼짝을 못하는 삼손 모양으로, 나라의 부르짖음을 귀로 뻔히 들으면서 눈물과 한숨으로 사흘을 새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수만 학생이 데모를 하고 단식 투쟁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삼손 모양으로 가만히 머리털이 자라기를 기다리고 있을 수가 없었다. 채 회복되지도 못한 가슴의 상처를 안고 서울로 올라와 다시 싸움의 대열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두 주일의 단식 투쟁으로 되고, 지방 강연으로 되고, 조국수호국민협의회로 비상국민대회로 되었다.
그러는 동안에 판 짜놓은 활자는 인쇄소에서 썩고 있었다. 비준안이 날치기로 통과가 되고 위수령의 발동을 보고, 정의의 부르짖음이 몽둥이와 구둣발과 최루탄의 연기 밑에 깔려 버려 싸움이 차차 장기전으로 들려는 기색이 보였을 때 참다못한 출판사 측은 다시 찾아와 원고를 독촉하게 되었다. 반 해를 일을 쉬고 있었던 그 사정을 생각도 하였고, 이 지쳐버리려는 민중에게 줄 것은 역시 고난의 역사밖에 없다는 생각에 속히 남은 원고를 마칠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웬일인지 도무지 붓이 돌아가지를 않았다. 아니다, 붓이 안돌아간 것이 아니라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붓을 잡고 뻔히 앉아 밝힌 밤은 몇 밤이었는지?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뜰을 왔다갔다하며 새운 날은 몇 날이었는지? 쓰면 불과 몇 페이지면 될 줄을 뻔히 아는 것이지만 쓸 수가 없었다. 나도 까닭을 모른다.
그렇다, 고난의 까닭을 알 사람이 없다. 여러 날 후에야 가슴 속에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고난의 역사는 고난의 말로 써라.” 나는 이제야 비로소 역사적 현재의 쓴 맛을 알았다. 가슴에 들어오는 보름달을 받아들이는 산 속 호수 모양으로 나는 ‘고난의 역사’를 와 비치는 대로 반사하였다. 그러나 물이 달이 되지 못하듯이 나는 고난을 말하면서 오히려 참 고난의 뜻을 몰랐었다. 멀리서 바라는 눈에 제주도면 곧 한라산인 줄 알았고, 그 산은 청옥으로 갈아 세운 것인 줄만 알았다. 그것도 또 고난의 나라인 줄은 생각 못하였다.
고난의 역사라니 고난 전에 또 무엇이 있고 고난 후에 또 무엇이 온다는 말이 아니다. 그저 고난의 역사가 스스로 나타났을 뿐이다. 제가 제 까닭이다. 제[自]가 곧 까닭[由]이다. 그러므로 자유 곧 스스로 함이다. 그러므로 고(苦)는 생명의 근본원리다. 고(苦)를 통해 자유에 이른다. 고(苦)는 낙지모(樂之母)라는 말이 있지만 그것은 상대 세계에서만 통용되는 거짓말이다.
사뭇 참을 본 사람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천하 사람이 선이 선한 줄만 알지만 사실은 불선(不善)뿐이다” 고(苦)를 피하고 낙(樂)을 맞으려는 사람은 영원히 고를 못 면할 것이요, 선을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려는 사람은 영원히 선을 보지 못할 것이다. 천국에 가면 눈물도 한숨도 없는 데서 영원한 복락을 누릴 줄만 믿는 사람이 참 종교가 무엇임을 모르듯. 모든 싸움을 다 싸워 내면 무풍지대의 유토피아가 올 줄로 생각하는 사람은 역사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다. 누가 과연 고난의 역사의 뜻을 알까?
붓을 놓으니 한가위 달이 서편에 기울었구나, 테러 사건이 있었다고 문간을 와서 지켜 주노라 밤새 떠는 순경을 들어오라 하여 떫은 차 한 잔을 권하니 고맙다 하고 물러간다. 아느냐? 네가 나를 지키느냐? 내가 너를 지키느냐? 테러 당한 사람이 인권의 짓밟힘을 당했느냐? 남을 테러한다는 제가 먼저 테러를 당하고 있는 거냐? 끝없는 말에 끝을 맺어, 시작 없는 역사의 시작을 삼자.
1965년 9월 10일
저자 씀
성서조선 1934.2-1935.12
저작집30; 30-
전집20;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