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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동규 교수가 한양대 박물관에 전시 중인 1962년의 가족사진을 가리키고 있다. 오른쪽 위, 팔짱을 끼고 있는 사람이 박 교수다. photo 염동우 영상미디어 기자 |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는 시인 박목월(1915~1978). 시인은 1960년부터 한양대 국문과 교수로 18년간 봉직했다. 지금 한양대 박물관에서는 박목월 탄생 100주년 기념 ‘구름에 달 가듯이’ 특별전이 12월까지 열리고 있다. 미발표 시 원고, 강의 노트, 가족사진, 월급봉투 등이 전시되어 시인의 정신과 체취를 느끼게 한다.
시인은 4남1녀를 두었다. 3남매는 미국에 산다. 알려진 대로 장남이 문학평론가 박동규 서울대 국문과 명예교수. 전화통화에서 박 교수가 어디서 만나는 게 좋은지를 물었다. 나는 고민하지 않고 한양대 박물관 전시실로 정했다. 지난 5월 11일 오후, 약속시간 30분 전 지하철 2호선 한양대역에서 내려 개찰구를 빠져나가려는데 반대편에서 박 교수의 얼굴이 보였다. 박 교수에게 인사를 한 뒤 함께 개찰구를 빠져나갔다. 한양대역의 출구 중 하나는 대학 캠퍼스 안과 연결되어 있었다. 출구를 빠져나오니 석조건물인 한양대 본관이 보였다. 박 교수가 입을 열었다.
“한양대에 올 때마다 느낍니다. 아버지가 여기서 월급 받아서 우리 가족이 먹고살 수 있었지요. 참 고마운 학교입니다.”
인터뷰는 2시간 반 동안 학생회관 카페, 박물관 전시실, 그리고 인문대 앞 ‘산도화’ 시비(詩碑) 앞에서 이뤄졌다.
박동규 교수를 만나면 오래전부터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다. 아버지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억이 뭐냐고.
“대여섯 살 때로 경주 황오리에 살고 있을 때였죠. 아버지께서 밤늦게까지 시를 쓰시고 새벽이 되면 시를 쓴 종이를 들고나가 마루 밑의 나뭇단 밑에 감춰놓고는 밖으로 나가시곤 했습니다. 밤에 들어오시면 다시 마루 밑으로 들어가 지난밤에 시를 썼던 종이를 꺼내 가지고 다시 책상 위에서 시를 쓰셨습니다. 일제의 한글말살정책이 극에 달할 때였습니다. ‘한글’로 된 모든 게 말살되던 시대였는데, 지금도 아버지의 그 모습이 생생합니다.”
박동규 소년이 대여섯 살이던 때는 1944~1945년으로 태평양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진 일제가 국가총동원 체제에 돌입하던 시기였다. 일제는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등 민족말살정책을 자행했다. 그때 이미 박목월은 시단의 선두그룹에 있었다. 박 교수는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를 전했다.
“1940년대 초 경북 안동에서 시인 조지훈이 찾아오면 아버지는 반월성, 석굴암, 불국사 등으로 며칠간 돌아다니셨다고 합니다. 두 분이 벌판, 왕릉, 숲속 등을 돌아다니며 밤이슬을 맞으셨다고 합니다. 그때 아버지는 조지훈 선생과 함께 ‘완화삼’과’ ‘나그네’를 주고받던 시기였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일제의 탄압에 대항한 도피가 아니었나 추측됩니다.”
목월은 1915년 1월 6일 경남 고성에서 났지만 경주에서 성장했다. 본명은 박영종. 1930년 대구 계성학교에 입학해 잠깐 경주에서 대구까지 기차통학을 했다. 목월은 열여덟 살에 동시로 등단했다. 동요 ‘송아지 송아지 얼룩송아지 엄마소도 얼룩소 엄마 닮았네…’는 박목월 동시에 손대업이 곡을 붙여 탄생했다. 누구나 고향의 산과 들과 내는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한다. 그런데 경주는 여기에 더해 희귀한 왕릉이 있었다. 박목월 시문학의 배경화면이 된 경주를 그는 산문 ‘달과 고무신’에서 이렇게 묘사한다.
‘경주는 달빛이 하얗게 비치는 골목길이 어린이들의 놀이터요. 풀이 우거진 봉황대나 잔디가 아름다운 왕릉이 어린이들의 생활 무대였다. 그러므로 달이 밝은 보름밤이면, 어린 우리들은 지칠 줄 모르고, 놀음에 미쳐버리게 되었다.’
박목월이 시인의 꿈을 품은 것은 중학교 때였다. ‘나의 감정을 문자로써 표현하여 만인의 가슴에 메아리 치게 하는 시야말로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며, 시를 쓴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사업인가’라고 어린 중학생은 생각했다. 아들은 아버지의 중학 시절에 있었던 결정적인 일화를 소개했다.
“아버지가 경주에서 대구로 기차통학을 했는데, 어린 나이에 너무 힘들어 하셨대요. 그래서 계성중학교 옆에다 자취를 하게 했는데, 방값을 못 내 자취방에서 쫓겨나게 되었답니다. 갈 곳이 없다는 딱한 사정을 듣고는 선생님이 온실에서 지내라고 했답니다. 온실 안이 춥지 않으니까요. 온실은 지붕이 투명하잖아요. 아버지는 밤에 온실에 누워 별을 친구이자 이불 삼아 지냈던 것이지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별을 가슴에 담는 마음을 키운 것이지요. 청노루의 눈에 구름을 담듯 말입니다. ‘얼룩송아지’는 아버지가 중학교 때 경주에 계신 엄마를 그리워하며 만든 거죠.”
박목월은 스무 살 때 경주 금융조합 서기로 취직해 주판알을 튕기면서 시를 습작했다. 1938년 유익순과 결혼했고, 다음해 장남 동규가 태어난다. 1940년 문예지 ‘문장’에 시가 추천되어 시단에 나왔다. 스물다섯 나이에 주목받는 시인이 된 것이다. 1945년 대구 계성학교 교사가 된다. 광복 직후 혼돈 속에서 1946년 그는 조선청년문학가협회 중앙위원이 되었고, 같은 해 박두진·조지훈과 함께 시집 ‘청록집’을 펴낸다. 이때부터 청록파 시인으로 불린다. 시인은 1949년 서울 이화여고 국어교사로 부임했다.
“국민학교 3~4학년 때 아버지를 만나러 정동에 있는 이화여고를 찾아간 일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길 건너편 서울우유 파는 가게에 가서 우유와 빵을 사주셨습니다. 빵을 한입 먹었는데, 너무 맛있는 겁니다. 그래서 먹다 말고 빵을 살짝 탁자 밑으로 숨겼죠. 아버지가 왜 그러냐고 하길래. 엄마 드리려고 그런다고 했죠. 그랬더니 아버지가 빵을 더 사주셨죠. 그 뒤로 아버지 만나러 이화여고 앞을 여러 번 갔습니다.”
큰나무 밑에서는 나무가 자라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크게 성공한 아버지 밑에서 자식이 성공하기 어렵다는 은유다. 목월은 장남 동규가 한 살 때부터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이었다. 유명한 아버지는 자랑이면서 한편으로는 부담이 될 수도 있다.
“대구 피란 시절 제가 계성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첫날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내 이름을 안 부르고 ‘목월이 아들이 왔구나’ 했어요. 선생님들이 모두 나를 보면 ‘목월이 아들’ ‘목월이 아들’ 하는 겁니다. 내 이름이 없었어요. 그래서 하루는 집에 가서 어머니한테 하소연했습니다. ‘엄마, 나 학교 가면 이름이 없어. 창피해 죽겠다’고요. 그랬더니 어머니께서 이런 취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훌륭한 아버지를 가지고 있다는 자긍이 있어야 너도 잘 살 수 있으니 아버지를 네 삶의 중심에 놓고 살아야 한다.’ 그 다음부터는 그런 생각을 안 하게 되었죠.”
아버지의 영향 때문이었을까. 동규는 서울대 국문과에 진학했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박사를 마치고 서른 살 젊은 나이에 국문과 교수가 된다. 아들은 ‘아버지’를 피해 평론을 선택해 1960년 등단했다. 이 대목은 소설가 황순원의 아들 황동규가 아버지를 피해 ‘시’를 택한 것과 흡사하다. 하지만 박 교수는 이후 평론 발표를 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소설가들이 전부 아버지 친구 아니면 후배잖아요. 평론을 발표하면 누구를 부득이 비판해야 하는데, 잘못하면 평생 원수가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아버지와) 덜 부딪치고 살았습니다.(웃음) 그래도 어딜 가나 아버지 아들이었지만….”
교수 시절, 그는 결혼을 했지만 분가하지 않고 아버지와 한집에 살았다. 어느날 아들은 학술지에 등재된 자신의 소설구조론 논문을 “이게 제가 쓴 논문입니다”라며 자랑스럽게 아버지께 증정했다. 시인 아버지로부터 칭찬을 받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다음날 아침 그는 잠에서 깨어 화장실을 가려고 방문을 열었다. 그런데 방문 밑에 그가 어젯밤 아버지께 드린 논문이 놓여 있었다. 아들은 별생각 없이 논문을 넘겨 보았다. 논문은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아버지가 빨간색 볼펜으로 문법에 맞지 않는 부분과 용어 사용이 적절치 않은 부분을 다 고쳐놓은 것이다.
“처음엔 황당했었죠. 그러다 소름이 끼쳐왔죠. 부끄러움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내 평생 그날을 잊지 못할 겁니다. 아버님은 문장론인 ‘문장강화’를 쓰신 분이잖아요. 아버님은 제 글에 남아있는, 저는 의식하지 못하는 번역투의 문장을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고쳐주셨습니다. 용어의 적절성, 어설픈 가설 등도 지적하셨습니다. 사실 저는 그때까지 누구한테도 문장을 제대로 배워본 일이 없었습니다. 내가 문법이 안 맞는 문장을 썼다고 해서 누가 서울대 교수의 논문을 지적할 수 있었겠습니까. 설령 동료 교수가 알아도 말을 안 하잖아요. 누가 한 줄만 뭐라고 비판해도 싸울 태세가 되어 있었는데. 내가 젊었을 때니까. 그런데 아버지가 날 사랑하셨으니까 조용히 고쳐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신 거죠.”
이날 이후 아들은 글을 쓴 뒤 제3자의 입장에 문법에 맞는지, 용어 사용이 적합한지를 꼼꼼히 따지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아버지의 문장 지적을 평생 귀감(龜鑑)으로 삼았다.
‘구름에 달 가듯이’ 특별전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역시 육필 원고다. 시인의 혼과 땀이 원고지 칸 하나하나에 배어 있는 원고. 시인의 필체는 그의 생김새처럼 정결하게 아름답다. 퇴고조차도 허투루 한 게 없다. 1973년에 삼중당에서 시인의 ‘자선집 10권’이 출간됐다. 시인은 산문, 수상록 등 소설을 제외한 모든 장르의 글을 썼다. 58세에 이미 10권짜리 전집이 출간되었다는 사실은 시인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글쓰기에 정진했는가를 방증한다. 아들이 지켜본 아버지의 글쓰는 풍경이 몹시 궁금했다.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아버지 전용 책상이 따로 없었습니다. 저녁밥을 다 먹은 뒤 어머님이 밥상을 닦아 오면 그때부터 그 위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특별전에는 여러 장의 사진이 있는데, 그중 컬러사진 한 장이 관람객의 발길을 붙잡는다. 1962년 시인 부부와 4남1녀가 거실에 모여 찍은 사진이다. 이 집은 서울 용산구 신창동 77번지. 시인이 새집을 지어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아들의 말이 이어진다.
“아버님이 퇴근해 저녁 드신 뒤에 ‘식탁 가지고 와라’고 하십니다. 어머님이 식탁을 닦아 내놓으면 아버님은 아무 말 없이 식탁 위에서 연필을 깎으셨습니다. 그러면 집안에는 연필 깎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지요. 이 소리는 조용히 하라는 어떤 소리보다도 더 지엄했습니다. 집안에 삼엄한 비상이 걸렸지요. 그것은 아버님이 정신을 가다듬는 과정, 언어를 가다듬는 과정, 세상을 순정화시키는 과정이었습니다.”
시인은 한양대 교수를 하면서 생활의 안정을 찾았다고 한다. 국문과 교수로 있으면서 시인은 오세영, 이승훈, 신달자 등 여러 문인들을 길러냈다. 시인은 엄격하면서 자상한 교수였다고 한다. 박 교수의 기억이다.
“우리 집에는 늘 글을 쓰는 식객(食客)들이 3~4명은 머물고 있었어요. 다 아버지 제자들이었죠. 여관 가면 돈 드니까 그냥 우리 집에서 자라고 해서 머물게 된 거죠. 저녁 먹고 제자들과 마당에서 토론하는 걸 좋아하셨죠.(웃음) 집이 커져 집필실을 갖게 되었을 때 우리들은 그 방을 ‘청론산방’이라고 불렀죠. 저녁 드시고 그 방에 들어가면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시인은 1973년 시 전문지 ‘심상(心象)’을 창간했다. 5년간 ‘심상’을 발행하다가 사망하면서 아들이 이어받아 현재까지 발행하고 있다. 작가나 예술가가 박목월 정도의 명성을 얻으면 아내 외에 ‘연인’이 있는 경우가 더러 있다. 아들이 아버지의 내면세계를 다 알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스물다섯에 시인이 되어 시단의 선두그룹에 있었습니다. 늘 시단을 이끌어간다는 책임감과 함께 대학교수라는 직업을 갖고 있었지요.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책임감, 부담, 사명감 속에 평생을 사신 분입니다. 자신의 생애를 한국 시단에 바친 사람이었습니다. 광복 이후 한국시의 궤적을 그려가는 선두적 속성이라고나 할까요. 그러면서 스스로 초기시(자연), 중기시(생활), 후기시(존재)의 변혁을 가져온 거죠.”
문인은 대체로 술을 좋아한다. 그런데 박목월은 여타의 유명 시인들과 달리 술과 관련된 일화가 거의 없다. 술에 취해 어디서 뻗었다거나 밤새 헤매다가 들어왔다는 이야기가 없다. 박동규 교수의 이야기다.
“제가 알기로 아버지는 시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단 1분도 허투루 보내지 않으신 분입니다. 삶에서 성실 그 자체였고 시에서는 엄청난 노력을 하신 분입니다. 취미도 전혀 없었고요. 해외여행을 한 번도 가 본 일이 없었습니다. 바로 이런 성격이 스스로를 괴롭고 힘들게 만드신 거죠. 고혈압을 얻었던 것도 바로 이 점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박목월은 예순셋이던 1978년 3월 24일 아침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아들은 쓰러진 아버지가 가쁜 숨을 몰아쉬는 것을 두 눈으로 보았다.
“원효로에 살 때였습니다. 우리 집은 아버지 집과 가까웠습니다. 아버지가 아침 산책을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셔서 신발을 벗고 응접실에서 올라오셔서 그대로 쓰러지신 겁니다. 어머니가 전화로 ‘야, 아버님이 쓰러지셨다’고 말해 허겁지겁 집으로 달려갔지요. 방금 전 산책을 하시며 우리 집에도 들렀다 가신 아버지였습니다. 내가 아버지를 안으니 아버지가 힘들게 숨을 몰아쉬셨습니다. 동네 의사가 집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는 숨을 거두셨습니다. 내게 한 마디 말도 못하셨습니다. 세상에 그런 청천벽력이 없었죠….”
팔순을 바라보는 아들의 눈자위가 붉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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