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0미터의 고지를 자랑하는 거대한 산맥은 온통 하얀 눈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하지만 뿌연 안개속에 능선이 가려진 상태라 어디까지가 산이고 어디까지가 하늘인지 도통 구분할 수 없었다. 온 세상이 하얗게 얼어버린 것만 같았다.
산 아래 언덕에는 이름모를 시커먼 잡초들이 아무렇게나 듬성듬성 솟아올라 있었다. 잡초위로 뿌려진 눈송이들은 마치 처음부터 그것의 일부였던 것처럼 묘한 대조를 이루며 보는 이의 시선을 자극시켰다.
잡초밭 너머론 공동묘지였다. 그곳은 가정형편상 제대로 된 묘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하층민들을 위한 공간이었다. 온전한 장례식을 치룰 여건조차 되지 않는 대다수의 마을 사람들은 죽어나가는 시체들을 그곳에다 아무렇게나 묻어버렸다. 그 버려진 벌판이 바로 마을 사람들에게 있어선 죽어서 가야할 최후의 터전인 것이다.
미스테리 월간지 '데드 하우스 파일' 취재 1팀의 취재기자 권수진은 올해로 꼭 서른을 맞이하는 노처녀였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껏 단 한번도 자신을 노처녀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뿐만 아니라 결혼이 꼭 필요하다거나 절실히 한 남자의 여자이고만 싶었던 적도 없었다. 그녀에게는 나름대로 그녀만의 완고한 가치관이 있었다.
예전같았으면 열여덟에 시집가서 스물이면 애엄마라도 되었어야 할테지만 시대가 변한만큼 가치관의 변화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여자나이 서른이면 충분히 노처녀 일수도 있었겠지만 그것이 지금까지 통용될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은 발빠르게 변화하고 있으며 지금은 남녀 구분없이 개인의 능력을 최우선시 하는 시대이다. 그렇게 변화된 시대관은 곧 여자들의 가치관에도 급격한 변화를 미치게 되는 것이다. 멋진 남자 만나 내조하면서 오붓한 가정 꾸려나가는 것만이 여자들의 최대 행복이였던 시절은 이미 구시대적 유물에 불과했다. 이제 여자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젊음을 더 많이 누리고 싶어한다. 젊은 시절 보다 많은 도전을 통해 자기 발전을 이룩하고 싶은 것이다. 이를테면 자신의 일을 통해서 사회적인 인정과 자기 만족을 함께 성취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요즘 여자들이 원하는 진짜 행복인 셈이다.
대충 이러한 이유로 가치관이 변한 만큼 결혼 정년기의 기준도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 수진의 생각이었다. 그녀가 생각하는 결혼 정년기는 서른 다섯이었다. 때문에 적어도 앞으로 오년 이상은 일에만 매달리고 싶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직 일보다 남자가 더 그리워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앞날이란 누구도 예측하지 못하는 것이며 사람의 마음이란 시시각각 새로운 변화를 맞게 되는 것이다. 민승우라는 남자를 알게 되면서부터 수진의 가치관은 급격한 변화를 맞이했다.
민승우는 얼마 전 그녀가 일하는 취재 1팀 사진기자로 갓 입사한 신입사원이었다. 그는 서울 명문대를 우수한 실력으로 졸업한 후 곧바로 군에 입대해서 불과 한 달 전 제대를 한 사회 초년생이었다. 스물 일곱의 나이지만 나이보다 조금 어려 보였다.
수진은 승우에게서 전에 없던 묘한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이성에게서 특별한 매력이나 흥분따위의 감정을 깊이 느껴보지 못했던 그녀로선 승우에게서 느껴지는 야릇한 감정이 처음엔 상당히 어색하고 거북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얼마 못가서 그녀는 바로 그것이 자신에게 운명처럼 찾아온 사랑의 감정이 아닐까 하고 결론짓기에 이르렀다.
"바로 저 곳이야."
가파른 언덕 아래를 조심스레 내려오며 수진이 손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그녀가 가리킨 지점에는 특이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잡초와 돌맹이들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어디? 어디에 뭐가 있다는 거야? 내 눈엔 아무것도 안보이는데?"
뒤따라오던 오기욱이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오기욱은 원래는 취재기자였으나 승우가 들어오는 바람에 취재 보조와 사진기자를 동시에 겸하고 있었다. 수진과는 동갑에다 동기여서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였다.
"대체 뭐가 있다는 거야? 야, 승우야 넌 뭐 보이냐?"
기욱은 무표정한 얼굴의 승우를 바라보며 한마디 하고선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에 짜증스러움이 가득 묻어 있었다.
"야, 권수진. 도데체 이런 곳에서 뭘 취재하겠다는 거야? 잡초랑 돌맹이들 뿐이잖아. 기껏해야 아까본 공동묘지가 다고. 이런 곳에서 뭘 하자는 거지? 특별한 게 없잖아? 너 이번 기사 우습게 보면 안돼. 다음달에 특집 기사로 내보낼 거야~! 너도 알잖아? 편집장이 우리팀에만 특별히 내린 임무라는 거... 그래서 내가 부산으로 가자고 했잖아~! 부산에 죽음의 집이라는 게 있는데, 아주 쇼킹한 곳이래. 그러니까 그게 말야..."
"여기보다 더 쇼킹한 곳은 아마 없을걸."
"뭐....?"
기욱은 너무 단호하게 말하는 수진의 옆모습을 잠자코 바라만 보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바람이 세게 부는 편은 아니었으나 공기 자체가 워낙 차가워서 가만히 서 있으면 절로 몸이 떨려왔다. 수진은 목도리에 얼굴의 반을 파묻은 상태였다. 그녀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했으나 벙거지 모자와 목도리에 파묻힌 자신의 모습이 승우에게 어떻게 보일지도 어느정도 의식하고 있었다. 승우의 얼굴은 추위에 얼어붓기라도 한 듯 유난히 희고 창백했다.
이윽고 수진이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기욱과 승우는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잡초와 돌맹이가 가득한 벌판 한가운데서 세 사람은 걸음을 멈추었다.
수진은 자신이 발을 딛은 땅 위를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두 남자도 무의식중에 그녀의 행동을 그대로 좇아했다. 마치 땅 속에 뭔가 거대한 미스테리라도 숨겨져 있는 듯.
"여기가 바로 붉은 벽돌 무당집이 있었던 곳이야."
수진이 혼자 중얼거리듯 말했다.
"붉은 벽돌 무당집이라니...? 그게 뭐야?"
기욱은 의아해하며 물었으나 수진의 입술은 쉽사리 열리지 않았다. 팔짱을 끼고 있던 수진은 두 팔로 자신의 어깨를 감싸며 몸을 움츠렸다. 바람이 점점 세지는 것도 같았다. 언덕 위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으스스한 기운이 벌판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2>
경수는 자신의 일생일대 최고의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4년 전 경수는 대학 진학을 위해 19년간 살아온 송운리를 떠나 청수동으로 이사를 왔다. 청수동은 송운리와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마을로 송운리에 비한다면 제법 도시와 인접해 있는 개방형 마을이었다. 차로는 30여분 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지만 걸어서는 족히 두시간 반은 걸렸다.
같은 대학을 다니는 고향 친구들이 몇 명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자전거를 이용하거나 하루 두 번 운영되는 마을버스를 이용했다. 경수도 그런 방법들을 충분히 이용할 수 있었지만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물론 차멀미를 심하게 하는 편이긴 했지만 꼭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릴적부터 몸담아온 마을이 이제 지겨웠던 것이다. 마을을 떠나 새로운 생활을 찾고자 했다. 가정 형편이 빠듯한 편이었지만 홀어머니를 설득해서 결국 청수동에 자취방을 하나 얻게 된 것이었다.
혼자만의 공간을 확보하게 된 경수는 대학시절 내내 나름대로 새롭고 진취적인 삶을 살아보고자 노력했다. 덕분에 세련된 도시 여자 친구도 한 명 사귀게 되었고 졸업을 앞 둔 지금, 내노라하는 대기업에 취직자리까지 따놓은 상태였다. 며칠 전 최종 입사 시험에서 합격한 것이다. 게다가 4년동안 아르바이트로 꾸준히 적금한 돈만해도 무려 2천만원이나 되었다. 그 돈으로 조만간 작은 오피스텔을 하나 구할 참이었다. 그리고 여자 친구와 동거를 할 생각이었다. 그것은 이미 여자 쪽과 합의해서 내린 결론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순조로울줄만 알았던 그의 인생에 돌이킬수 없는 끔찍한 사건이 터진 것이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악몽같았다.
그 날은 경수가 신청한 중고차가 나온 날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하늘은 어두웠고 가는 눈발이 내리고 있었다. 흩날리는 눈발때문에 꽤 낭만적인 날씨라고 할 수도 있었다. 적어도 오전까지는.
중고차를 뽑은 그는 아침부터 여자 친구인 혜경을 태우고 멋지게 드라이브를 했다. 서울까지 곧장 직행해서 한강대교를 거닐며, 아이스크림과 핫도그를 먹으며 장미빛 미래를 설계한 것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돌아오는 길이었다. 오후부터 차차 굵어지기 시작한 눈발은 저녁이되자 별안간 천둥을 동반한 소낙비로 변해버린 것이다. 초보운전자에게 빗길운전은 상당한 부담과 위험을 동반시켰다. 마침내 청수동으로 들어서는 길목에서 돌이킬수 없는 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급커브길에서 차는 균형을 잃고 가로수를 정면으로 들이받았다. 순전히 경수의 운전미숙이 가져온 불상사였다. 다행히도 안전벨트를 착용하고 있었던 경수는 가벼운 찰과상에 그쳤다. 하지만 옆좌석의 혜경의 경우는 사정이 완전히 달랐다. 벨트를 매지 않고 있던 그녀는 머리가 으깨어져서 죽어 있었다. 뿐만아니라 목에는 큼직한 유리조각 하나가 박힌 채 진득한 핏물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처참한 모습이었다.
경수는 한동안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착각에 빠져야만 했다. 눈앞에 펼쳐진 참극이 이상하리만치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바로 조금전까지만 해도 목이 마르다며 생수통을 찾던 여자 친구의 예쁜 얼굴이 지금은 두부처럼 흐무러져 있었다. 손을 뻗어 목에서 세어나오는 피를 만져보았다. 끈적한 느낌이 마치 딸기 시럽같았다.
깨어진 유리 창 사이로 폭포수같은 빗줄기가 뿌려졌다. 빗물은 경수의 얼굴과 등줄기를 흠뻑 적셨다. 그바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떤식으로든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수만가지 생각들이 머리속에서 엉망으로 뒤엉켜왔다. 그것들은 대부분이 다 끔찍한 이미지들이었다. 그 중 시퍼런 죄수복을 입고 사형장으로 끌려가고 있는 자신의 초췌한 모습이 가장 무서웠다.
문득 시계를 바라보니 밤 10시를 지나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돌아본 주위엔 칠흑같은 어둠만이 가득할 뿐 지나가는 차들의 불빛은 보이지 않았다. 워낙 외진 도로라 대낮에도 사람이나 차들의 행렬이 거의 뜸한 곳이었다.
다음 순간, 뭔가를 결심한 경수는 당연한 듯이 혜경의 시체를 차에서 끌어내리기 시작했다. 머릿속을 복잡하게 했던 수만가지 이미지들은 검은 잉크를 끼얹기라도 한듯 거대한 어둠의 덩어리로 변해있었다. 그 때문에 경수는 마치 자신이 어둠과 하나가 되어버린 듯했다. 어둠속에서 신속하게 혜경의 시체를 끌어내린 경수는 도로를 벗어나 언덕아래로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겨갔다. 언덕 아래는 강이었다. 강가에서 경수는 큼직한 돌덩이 하나를 구해 혜경의 몸위에 올려놓았다. 혜경의 외투로 돌과 그녀의 몸을 단단히 감싼 후 주저없이 강물속으로 집어던졌다. 경수로선 지금 자신이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인식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일초라도 빨리 그 악몽같은 장소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서둘로 차로 돌아온 경수는 곧바로 시동을 걸었다. 비와 천둥소리 속에서 차는 중저음의 굉음을 내며 털털거렸다. 경수의 귀엔 그 소리가 마치 유령이 낄낄대는 소리로 들렸다.
빗길위로 차는 천천히 속력을 내며 출발했다. 사건현장에서 차가 점점 멀어져가자 그제서야 경수의 심장은 터질듯이 진동을 하기 시작했다. 긴장감이 어느정도 풀려서인지 이루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이 물밀듯이 밀려오고 있었다.
차는 다시한번 커브를 돌며 사건 현장에서 완전히 멀어졌다. 하지만 그 마지막 순간 경수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해야만 했다. 우연히 비친 백미러의 풍경은 그를 암담한 공포에 시달리게 하기엔 충분했다.
커브를 돌기 직전 백미러에 담긴 사건현장에는 누군가가 있었다. 도로 한가운데 우뚝 솟아오른 장승처럼 분명 누군가가 우두커니 서서 멀어지는 차량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와 어둠속에서 그 모습은 마치 암흑을 지배하는 악마의 모습 같았다.
첫댓글 다음편은 안올라오나여.. 대따 궁금한데..ㅡㅡ;; 넘 늦게 올라옴 다 잊어버린단 말이죠..ㅡㅡ;;
착시 10편 이후엔 안나오나요? ㅡ.ㅡ;;
죄송합니다만... 착시는 현재 무기한 연재 중단 상태입니다. 초기에 구상해 둔 설정들이 너무 방대해지는 바람에 손을 놓은 상태입니다. 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 글이 될 것 같아 언제일지 알 수 없는 미래의 작업으로 미루어 둔 것입니다~ 양해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