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걸의 가요 이야기 33
<분교>가사에 반해 한달 앞당겨 귀국한 황제 나훈아
기역 니은 잠이 든 교정에/맨드라미 저혼자 피다가/아이들이 그리운 날은/꽃잎을 접는다/
계절이 오는 운동장마다/깃발처럼 나부끼던 동무여/다들 어디서 무얼하고 있는지/
옛날 다시 그리워지면/텅빈 교실 내가 앉던 의자에/나 얼굴 묻는다
늑목 밑엔 버려진 농구공/측백나무 울타리 너머로/선생님의 손풍금 소리/지금도 들리네/
지붕도 없는 추녀끝에는/녹슨 종이 눈을 감고 있는데/다들 어디서 그 소리를 듣느뇨/
추억 찾아 옛날로 가면/몽당연필 같은 지난 세월이/나를 오라 부르네.
-김병걸 작사,임종수 작곡,나훈아 노래 <분교>
나는 고향에 가면 반드시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에 가본다. 오선당을 내려오는 솔향기 짙은
산자락이며 교사 뒷편에서 만고풍상을 견딘 지금은 너무 늙어버린 감나무. 아무리 고쳐봐도
잘 생긴 교장선생님의 사택과, 6학년때 담임이셨던 김복만 선생님의 빨래가 널린목화밭옆
사택의 파란스레트지붕. 아 맨발로 달리던 저편 강냉이 솥을 걸었던 철봉이 있는 운동장. 그
리고 녹슨 종과 제멋대로 자란 나팔꽃에 숨어드는 그날의 함성소리. 운동회날이 아니어도
좋아라, 소풍가는 날이 아니어도 설레라, 교정에 서면 그날인듯 내가슴이 뛴다.
<고향역>의 작곡가이신 임종수 선생께서 응암동 사무실에서 건네준 악보는 나를 흥분시키기
에 충분했다. 피아노 선율에 날아다니는 무수한 풍경들이 나를 손짓했다.
당장 가사붙이는 작업을 시작하고 싶었지만 이 곡을 부를 가수가 천하에 나훈아란 말에 가위
눌려서일까 부담이 왔다. 아니 오래 밑그림을 구상하는 쫓김도 싫지 않았다.
세월은 내 마음보다 먼저 가고 한달이 또 갔다. 초봄에 건네받은 악보가 주머니를 드나들며 시
든 꽃잎이 되어갔다. 나는 엣날의 위용을 잃고 분교로 전락한 초등학교를 찾았다. 그리고 많은
말들을 교정 여기저기에 부치며 추억에 젖었다. 분꽃이며 나팔꽃이 기지개를 켜는 화단 가득
맨드라미가 잠자리를 부르고 있었다. 어디선가 손풍금 소리가 나고 나는 진작부터 교실에 있
었다.
여름이 오고 가요황제 나훈아는 나를 들뜨게 했다. 임선생님의 말에 의하면 미국에 체류중인
황제에게 전화로 <분교>가사를 불러주니까 홀딱 반했다며 도대체 이 글을 쓴 놈이 어떻게 생겨
먹었느냐며 일정을 앞당겨 한달이나 먼저 귀국하겠다고 한다.
황제와 나는 조용히 알듯한 미소로 서로의 마음을 전했고, 당신의 건물이기도 한 타워호텔앞
<아라기획>에서 짜장면을 같이 시켰다.
얼마후 한국음반 녹음실에서는 2절의 전반부를 노래하는 코러스단 초등학생들이 봄병아리들
처럼 재잘거렸고 드디어 <분교>는 그 모습을 드러냈다 *네가 다시 부르라면 다시 부를테니
기탄없이 말해보라*는 황제의 여유에 나는 그럴 필요까진 없다며 미소로 동의해 주었다.
녹음을 마치고 일식집으로 자리를 옮긴 뒤 황제는 가만히 내 어깨를 치시며 좋은 노랫말이 나오
거든 언제라도 연락하라며 나에게만은 특별히 문을 열어주겠다고 배려해 주었다.
다음해 황제께서 만든 <벗>이란 음반에 <발코니에 앉아서>란 나의 작품도 맛깔나게 불러주셨다.
크기만 했던 학교가 분교가 되고 어쩌면 폐교가 되는 슬픔처럼 내인생의 지도에서 지워진 풍경은
없는지 그것들을 잃고 살아도 괜찮은 건지 가끔씩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분교>를 들으며 나는
깊은 성찰에 잠긴다.
첫댓글
시를 쓰고 아름다운 노랫말을 쓰는 사람의 보람을 엿봅니다.
자신의 글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는 경북 어느 시골 고향을 두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노래방 기계를 지우고
무한 반복으로 고쳤습니다.
황제의 노래^^ 분교^^ 당월에도 온산국민학교 에서 분리된 당월분교 당월을 당포 온산공단 조성어로 온산국민학교 까지 없어젔서요 삼평국민학교는 온산국민학교 분교 아직 남아있서요 삼평초등학교로 영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