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력은 뛰어나다고 자부했건만 이제는 과거지사인가? 임실. 분명 다녀갔는데 언제 누구랑이었는지 텅!!! 사이버가 보편화 되기전 답사기를 기록해둔 대학노트에도 언급이 없다.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 줄 모르겠다.
가을이 가져오는 이미지로 인해 국도변의 과장된 문화재 이정표 보다 골목안 벽에 작게 취부된 이정표가 더욱 정겨웁다. 담양 개선사지 석등처럼 나홀로 외로히가 아니라 정돈된 넓은 폐사지에 우뚝 자리했으며 석탑과 석등 배치도 익숙하지 않다. 그건 석등이 상위 또는 나란히 배치되는 형식에 물든 고정관념의 시각 때문이다.
용암리는 창건, 폐사 시기가 정확히 전해오지 않은 중기사지라고 한다. 어느 자료에는 신라중엽에 창건되어 수도승이 천여명을 헤아렸다고 한다. 넓은 절터,석조 계단, 소맷돌, 석등의 규모로 보아 틀린 이야기도 아닌듯 하다.
중기사는 임진왜란에 모두 소실되었다고 하며, 한편으로는 절 앞에 흐른는 섬진강이 엄청난 홍수로 범람하는 바람에 사찰은 물론 승려 모두가 홍수에 휩쓸린 후 폐허로 변했다고도 한다.
현재 많은 자료에는 중기사터로 표기되어 있으나 지난 1992년도부터 실시한 5차례 발굴조사에서 “진구”라는 명문기와가 출토되어 이곳이 보덕화상의 제자가 세운 진구사지임이 밝혀져 진구사지로도 병용 표기한다. 향후로는 진구사지로 통일하는것이 바람직하리라 본다.
우리나라에서 두번째 큰 석등으로 상륜을 제외하고는 완전한 모습이다. 국보와 보물. 글쎄 왜 국보가 아닌지 의심스럽다. 화엄사.실상사.개선사지 처럼 백제 고토에 유행했던 고복형 석등의 특징을 다 갖추었다.
8각 지대석, 하기단의 안상, 간주석 기단에는 귀꽃을 갖춘 복련을 표현했다. 고복형 간주석 위에 구름무늬 장식을 한 상대받침과 8엽 앙련을 표현하였고 보상화문도 보인다. 얼핏보아 간주석은 상하 대칭구조 같다.
화사석 8면에 장방형의 화창을 내었다. 옥개석에는 3단 받침과 절수구 홈이 보인다. 고복형 석등의 특징의 하나인 옥개석의 큰 귀꽃을 표현하였으며 섬세하면서도 웅장한 느낌이다.
상륜부에는 노반과 앙화만 남아 있으나 상륜이 완벽하다면 화엄사 석등을 능가하는 국내제일의 석등으로 자리매김했을 것이다.
다른 석조물, 불상 처럼 석등의 조성시기도 자료마다 제각각이다. 통일신라말 또는 고려초 이른바 나말여초에 대하여 명확한 기준이 있을텐데도 통일은 요원한가?
현장에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사잔 정리중 석등 상기단 앙련에 방형 홈이 보였다. 우연하게 생긴 홈이기보다는 다른 용도를 생각해보니 혹 실상사 석등 앞에 위치한 석조계단 처럼 화창에 불을 밝히기 위해 오르내리던 계단 자취는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 여기서 간송의 최완수 소장님의 고복형 석등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택도 없는 나의 소설이라 여겼던 청량사 석등과 견훤 이야기도 전개된다. 때론 그래서 즐겁다!
"석등 양식의 획기적 변화"
봉림사 진경대사 부도( 복원)
석등은 벌써 백제 무왕(武王, 600∼640년) 때부터 8각으로 만들었던 사실을 익산 미륵사지 발굴을 통해 확인할 수 있으니 <미륵사지 출토 석등 8각 옥개석>(도판 6) 및 <미륵사지 출토 석등 연화하대석>(도판 7)과 <미륵사지 출토 석등 간주석>(도판 8) 등이 그 확실한 증거물이다.
그러나 미륵사지 출토 석등 부재물에서 볼 수 있듯이 연화하대석 위에 길고 가는 8각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다시 넓은 연화상대석을 올려놓은 다음 그 위에 8각 화사석(火舍石; 등불을 넣어 놓는 돌집)을 얹고 다시 그 위에 옥개석(屋蓋石; 지붕돌)을 덮어놓는 결구로 짜여 있다.
미륵사지 석등 하대석...출처/문화재청
그러니 8각기둥인 간주석(竿柱石)이 상대석 이상의 석등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쉽게 파괴되어 삼국시대 석등으로 현존하는 것이 거의 없다. 다만 불국사가 지어질 때인 8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불국사 대웅전 앞 석등>(도판 9)과 <불국사 극락전 앞 석등>이 가장 오래된 예로 꼽히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런 석등들은 아직 상하 연화대석이나 옥개석 추녀머리 등 어디에도 귀꽃장식이 없고 연화대석의 연꽃잎 표면을 장식하는 꽃무늬도 없다.
그런데 9세기 전반기에 만들어진 <법주사 사천왕 석등>(도판 10)에 이르면 화사석의 화창(火窓) 좌우에 사천왕상을 돋을새김하거나 상하 연화대석의 연꽃잎 표면에 모란꽃잎 모양의 보상화문(寶相華文)을 덧장식하는 장식성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이와 때를 같이하여 쌍사자석등이 출현한다.
법주사 쌍사자 석등...출처/문화재청
<법주사 쌍사자석등(法住寺 雙獅子石燈)>(도판 11)이 그것이다. 8각 간주석 대신 사자 두 마리가 배를 맞대고 연화하대석에 서서 연화상대석을 두 앞발과 머리로 각각 받쳐들게 한 것이다. 그런데 상하 연화대석의 연꽃잎 표면에는 품(品)자형 구슬무늬와 보상화문이 각각 장식되어 시대양식의 동질성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이후 선종이 들어와 구산선문으로 그 세력을 확장해 가면서 신흥 선종사찰에서는 부도미술의 발전과 발맞추어 서로 양식적 영향을 주고받으며 석등양식을 다양하게 발전시켜 나간다. 그 선구적인 형식을 보이는 것이 <보림사 대적광전앞 석등>(도판 12)이다. 이 석등은 좌우에 서 있는 쌍탑에서 탑지(塔誌)가 발견되어 경문왕 10년(870)에 만들어진 것임을 추정할 수 있으므로 석등에 있어서 기년명을 가진 유일한 기준작이기도 하다. 쌍탑과 동시에 조성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서탑지(西塔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보림사 석등...출처/문화재청
“탑을 만든 때. 함통(咸通) 11년(870) 5월(月) 일(日). 때는 응왕(凝王; 景文王 凝廉) 즉위 10년이다. 만든 이유. 헌안왕 왕생을 경축하기 위해 만든 탑. 서원부(西原部, 지금 청주) 소윤(小尹) 내말(奈末; 제11위 관등) 김수종(金邃宗)이 상주해 들려서 칙명을 받들다. 백토(伯土) 급간(及干; 제9위 관등)이 주선하다.(造塔時. 咸通十一年五月日. 時凝王卽位十年矣. 所由者. 憲王往生 慶造之塔. 西原部小尹 奈末金邃宗聞奏, 奉勅. 伯土及干珍)”
탑지에서 밝힌 대로 이 석탑들은 경문왕 10년(870)에 만들어진 것이 확실하니 동탑지에서도 같은 해 만들었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사이에 있는 <보림사 대적광전앞 석등> 역시 이 동서 양탑과 동시에 만들어졌다고 보아야 하는데 그 양식기법으로 보아도 이의 타당성이 입증된다. 기본적으로는 상하 연화대석 사이에 8각 간주석을 세워 화사석을 받치고 있는 일반형 석등이지만 그 장식성이 판연히 달라져 있다.
우선 연화하대석에서 뒤집어진 연꽃잎마다 그 끝 복판에 귀꽃 장식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어린 고사리 머리처럼 말려올라간 덩굴수염 두 개가 등을 맞대고 있는데 그 위로 모란 꽃잎을 포개놓은 듯한 보상화 장식이 덧붙여져 있는 모습이다. 이런 귀꽃 장식은 옥개석 8각지붕마루의 망와(望瓦) 표현에도 그대로 부여되고 있다.
그리고 연화상대석의 위로 핀 연꽃잎 표면에는 모란꽃잎이 여러 장 포개져 있는 듯한 보상화 장식을 더하여 화려한 장식성을 과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옥개석 상륜부에서는 석탑 상륜부의 여러 특징적 요소들을 받아들여 보륜(寶輪)·보개(寶蓋)·수연(水烟)의 표현을 분명히 하였다.
이것은 석등 양식에 있어서 획기적인 변화였다. 이런 획기적인 상륜부의 양식 변화는 이후 석등 양식에도 그대로 계승되지만 부도 양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당장 884년에 바로 그 보림사에서 이루어지는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부터 보개(이 부분은 현재 파손되어 있음)와 보륜·수연이 갖추어진 상륜부를 가지게 된다. 이 양식이 885년에 이루어지는 하동 지리산 쌍계사의 <진감선사 부도>를 거쳐 울주 가지산 <석남사 부도>로 이어지면서 전국으로 확산되어 나간다.
개선사지 석등...상기님 사진
그런데 이 석등이 만들어지기 직전에 광주 부근 무등산 자락의 담양군 남면(南面) 학선리(鶴仙里)에 있는 개선사(開仙寺)에서는 전례없이 특이한 형태의 석등을 창조해 놓는다. 마치 둥근 연화소반(蓮花小盤) 둘을 주둥이끼리 맞대어 놓은 듯한 표현으로 길고 가는 8각기둥이었던 8각 간주를 대신해 놓은 것이다. 그러니 장대 같던 8각 간주의 위태로움이 일시에 사라지며 석등도 안정감을 되찾게 되었다. 아마 이런 의장은 연화소반을 뒤엎어 함께 나르는 설거지 장면에서 번개처럼 터득해 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이 획기적인 양식변화를 보인 이 석등의 화사석에 그 조성 내력이 새겨져 있다. 그 일부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경문(景文)대왕님과 문의(文懿)황후님, 대랑(大娘; 경문왕의 둘째 왕비이자 문의황후의 여동생인 듯)님이 원등(願燈)으로 심지를 세우다. 당 함통(咸通) 9년(868) 무자 한봄날 저녁에 달빛을 잇다. 전국자감경 사간 김중용(金中庸)이 기름값으로 내놓은 벼 300석을 올려보내다. 승 영판(靈判)이 석등을 건립하다. 용기(龍紀) 3년(891) 신해 10월 승 입운(入雲).(景文大王主 文懿皇后主 大娘主, 願燈 立炷. 唐咸通九年戊子仲春夕, 繼月光. 前國子監卿 沙干金中庸, 送上油粮業租三百碩. 僧靈判建立石燈. 龍紀三年辛亥 十月 日 僧入雲)”
선종을 본격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던 경문왕이 헌안왕의 두 따님인 제1·제2왕후와 함께 무진주 무등산 자락에 원등(願燈)으로 이 석등을 세웠다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현재 개선사(開仙寺)로 쓰고 있는 이 절의 본래 이름은 개선사(開禪寺)였을지도 모르겠다.
어떻든 보물 제111호인 이 <개선사지 석등>(도판 13)은 장구통형 석등의 시원을 이루는 것으로 이곳에서는 연화소반을 주둥이 맞대어 엎어놓은 듯한 모양의 간주석 형태를 보이니 간주석이라기 보다는 중대석이라는 표현이 더욱 타당할 듯하다. 상대·중대·하대의 3중 기단부를 갖춘 8각부도의 결구와 같아진 것이다.
이런 간주석의 변화만 있는 것이 아니라 중대가 편안해지자 화사석을 마음놓고 확장하여 8면에 화창(火窓)을 뚫는 대담성을 보이고 옥개석에는 8모에 높은 귀꽃을 장식하였다. 그리고 크고 넓직한 화사석을 받치기 위해 넉넉하게 커진 연화상대석의 연꽃잎 표면에는 겹꽃 장식이 화려한 모란꽃잎을 겹겹이 새겨 장식해 놓았다.
용암리 석등
이런 석등 양식은 곧바로 보물 제267호인 <임실 용암리 석등(任實 龍岩里 石燈)>(도판 14)으로 이어진다. <개선사지 석등>양식을 그대로 계승하였는데 다만 마주 붙여놓은 연화소반의 간격이 조금 벌어지면서 길이가 길어지니 중대석 전체가 흡사 장구통 같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이를 장구통형 석등이라 부르기로 하겠다.
이밖에 이 석등은 <개선사지 석등> 형식에다 두 가지 요소를 더 보태고 있다. 장구통형 중대석받침으로 구름무늬를 돋을새김한 받침돌 하나를 연화하대석 위에 첨가하였고 상륜부에 노반(露盤)이 더 설치되어 있다. 아마 그 위에 보륜과 보개도 있었을 것이다. 이는 <보림사 대적광전 앞 석등> 양식에서 받은 요소일 것이고, 구름무늬 받침돌은 <실상사 증각대사 응료탑>(제26회 도판 9)에서 받은 영향일 터이다.
높이가 518cm나 되고 조각 기법이 웅혼장쾌한 것으로 보면 견훤이 후백제왕을 자칭하여 후백제 건국을 천하에 공포하는 900년경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임실 용암리 석등>을 뒤잇는 양식의 석등이 보물 35호인 <실상사 석등(實相寺 石燈)>(도판 15)이다. 견훤이 실상산문과 화해하고 나서 <실상사 수철화상 능가보월탑(<實相寺 秀澈和尙 楞伽寶月塔)>과 그 탑비를 세우던 시기인 915년 경에 만들어졌을 듯하다. 이 <실상사 석등>에 이르면 장구통형이 양식으로 굳어지는 현상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다.
실상사 석등
중대석의 연화소반이 맞물린 자리가 더욱 벌어지면서 완전히 장구통 모양이 되는데 그 벌어진 사이 공간에는 네잎 클로버와 같은 꽃송이를 장식하고 꽃과 꽃 사이를 두줄 띠로 연결해 놓았다. 이런 꽃띠 장식은 아래 윗단에도 반복된다. 그리고 연화 하대의 연꽃잎 가운데 끝부분과 옥개석 및 보개의 8각 지붕마루 끝에는 고사리 머리 모양의 귀꽃이 솟았다.
그런데 이들 표현이 천편일률로 형식화된 반복적인 표현이라 틀에 박힌 듯한 느낌을 강하게 풍긴다. 실상사가 가지고 있던 신라적인 잔재가 조각기법에서 이런 형식성을 더욱 부추겼을 수도 있다. 이 <실상사 석등>은 조금도 파손되지 않고 완벽하게 남아 있어서 복발과 보개, 수연 등 상륜부를 원형대로 볼 수 있는데 <보림사 대적광전 앞 석등>의 상륜부 양식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복발에도 꽃띠 장식을 더하였고 수연 아래에 구름무늬띠 하나를 더 첨가한 것이 다를 뿐이다.
청량사 석등
이런 장구통형 석등 양식이 신라지역으로 들어간 사실은 합천 가야산 <청량사 석등(淸寺 石燈)>(도판 16)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실상사 석등>보다 양식화가 더욱 진행되어 장구통 모양의 중대석이 연화소반을 마주대어 놓은 것 같은 모양에서 변화했다는 원뜻을 완전히 망각하고 있다. 그 결과 아래쪽 연꽃잎 장식은 아래로 뒤집어져서 복련판 형태를 취하고 위쪽 연꽃잎 장식은 위로 피어나서 앙련판 장식으로 바뀌었다.
당연히 중앙의 장구통 형태는 두 소반 사이가 벌어진 공간이라는 의미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장구통 모양으로 변형되어 8줄기의 세로 패임과 두 줄기의 가로 패임으로 구획을 나누고 그 가운데 8면 중앙에 마름모꼴의 십(十)자화 꽃무늬를 새기어 두 줄로 연결하는 장식을 가하였다.
그리고 아래 위 복련 앙련의 연꽃잎 장식 아래 위로는 구름무늬대를 한층씩 더 두르고 연화 하대 바로 위에서는 8각대 위에 복련 연화대를 하나 더 올려놓는 중첩 표현을 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무의미한 장식을 반복하고서도 부족해서 연화하대 기단부의 8면 안상 안에는 사자상과 향로 등을 교대로 돋을새김하고 화사석 4면 화창 곁에는 사천왕상을 새겨놓았다.
후백제 지역에서는 <개선사지 석등> 이래 <실상사 석등>에 이르기까지 장구통형 석등은 한결같이 화창이 8면에 뚫려 있어 8면 통창(通敞; 넓고 밝아 시원하고 환함)의 여유를 잃지 않았다. 그런데 신라지역으로 넘어와서는 중대에서 장구통 형식을 계승하면서도 8면 통창의 개방성은 끝내 받아들이지 못하고 신라 전통 방식대로 4면 화창을 두고 말았다. 그러나 어떻든 이런 장구통형 석등 형식이 신라지역으로 전파된 것은 그럴 만한 계기가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생각된다.
이 시점에서 그럴 만한 계기를 찾는다면 920년 10월에 견훤이 대야성(大耶城; 합천)을 함락하고 진례성(進禮城; 창원)까지 진격해 들어간 사실일 것이다. 이와 연관지어 생각하면 이런 후백제 양식의 석등이 당시 대야성 관내인 합천 청량사에 세워진 이유를 풀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렇다면 이 <청량사 석등>은 921년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이때 이 <청량사 석등>의 장구통형 중대석에 새겨지는 꽃띠무늬 장식이 그대로 울주 <석남사 부도>나 창원 <봉림사 진경대사 보월능공탑>의 중대석에 새겨지고 있다. 이들의 상호 연관관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920년 전후한 시기의 시대양식으로 파악할 수도 있다. 결국 <석남사 부도>나 <봉림사 진경대사 보월능공탑>의 꽃띠무늬 장식도 후백제 특유의 석등 양식인 장구통형 석등의 영향을 받은 요소라는 얘기다.
<청량사 석등>에서 보듯이 연화소반을 맞붙여 놓은 듯한 의장으로 출발했던 <개선사지 석등> 양식의 본뜻이 완전 퇴색하여 순수한 장구통 모양의 중대석이 된 이후에, 이에 대한 반성과 후백제 양식과의 재결합 과정을 거치면서 재창조해 낸 것이 <화엄사 각황전앞 석등>이다.
화엄사 석등
<개선사지 석등> 이래 진행된 각종 양식화 현상들을 철저히 파악하여 과감한 생략으로 본질만 남겨 추상적인 아름다움을 한껏 높여 놓은 것이 바로 이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인 것이다. 그래서 장구통 모양의 중대석에서 연화소반의 흔적도 사라지고 구름무늬의 어지러움도 없어져 단순소박한 백통 향로와 같이 고고하고 맑은 아름다움만 남게 되었다.
너무나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듯하기에 마름모꼴의 십자화를 두 가닥 띠로 연결하는 꽃띠 장식만은 중앙에 선명하게 남겨두었고 향로 모양의 중대석 받침대 아래로는 구름무늬 띠를 둘러 연화 하대와 만나게 하였다.
화사석은 화창을 넷만 뚫어 절제미를 강조하고 상륜부도 모든 요소를 하나씩만 표현하여 상징성을 추구하였다. 장구통형 석등 양식이 고도의 추상화 과정을 거쳐 양식적인 완결을 이루어낸 것이다. 미륵보살반가사유상 양식이 <국보 제83호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에서 그 양식을 마무리짓고 불보살상 양식이 <석굴암 불보살상> 양식으로 완결되며 석탑은 <불국사 다보탑>으로 끝이 나듯이 석등 양식도 바로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에서 그 아름다움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화엄사 석등은 그 규모도 다른 석등들과 비교할 수 없이 거대하여 높이만 6.36m에 이른다.
이런 거대한 규모에 최고의 아름다움을 자랑할 만한 석등이라면 아무 때나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국력이 최고조에 이르고 백성들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만큼 드높아 자신감이 넘쳐나는 시기에만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이다. 이 석등 양식이 유행하던 시기 중에 그럴 만한 시기를 꼽는다면, 그것은 견훤이 신라를 무찔러 그 수도를 함락하고 국왕을 폐립하며 천년구도에 쌓인 보물들을 노획하고 자녀(子女)와 백공(百工) 장인들을 포로로 잡아 당당하게 개선하던 927년 11월경일 것이다.
그러니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은 이런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928년경에 신라 정복의 기념으로 견훤왕이 국력을 기울여 건립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이후에 이 석등을 능가하는 석등은 다시 만들어지지 못하지만, 이 석등이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운 요소들은 각 시대 석등 양식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또 이후 고려 통일 초기에 활발하게 만들어지는 각종 부도 양식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준다."
중기사터 복원된 중단영역에 위치한 석탑부재로 옥개석, 탑신, 노반, 면석을 수습해 놓았다. 3층탑 보다는 최소 5층 이상의 탑으로 보이는데 석등과 동시대에 조성되었을 것이다. 본래 위치가 맞을가?
사진 좌측에 보이는 지붕옆 컨테이너 가건물에 아래 사진 비로자나불과 철불이 모셔져 있으니 우리님들 답사시 혼선이 없길 바란다.
용암리 석등에 옆에 자리한 단독가옥에 모아둔 중기사의 석조 부재
석등 답사 후 주위에 위치하는 비로자나불을 찾아 배회하다가 오토바이를 타고 오는 아주머니를 불렀다. 아주머니 급하게 브레이크를 잡아 순간적으로 앞으로 나뒹구르질 뻔하여 미안하기 그지 없었지만 태연하고 친절하게 아르켜 주셨다.
비로자나불을 뵈러 갔는데 철불도 모셔져 있다. 나홀로 답사라는 이유로 자료 검색도 충분히 하지 않은 탓에 비록 오른팔이 멸실되었지만 나발,삼도,우견편단 법의의 철불을 몰랐었다. 인기척을 느끼고 다가온 보살님에게 물었더니 중기사터에서 수습된 불상이라 말씀하셨다.
일반적으로 철불은 통일신라 하대 구산선문 개산과 더불어 비슷한 시기에 조성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같은 맥락으로 보면 철불의 조성시기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고, 중기사도 임실 지역 호족의 도움으로 사찰이 창건되었음도 추측 가능하다.
어떤 연유에선지 컨테이너안에 모셔진 두 기 불상으로 인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전각을 마련하든지 차라리 박물관에 모시면 좋을텐데 옹색하게 조립식 컨테이너 속 불상이 우리 문화재 현주소를 대변하는 듯 했다.
철불과 함께 발굴된 대좌로 비로자나불을 모셨다.하대석에는 복련과 귀꽃이 피었고 중대에는 불상이 희미하게 돋을 새김된 구조다.
우리님들은 가건물이 아닌 전각속에 모셔진 불상을 뵙고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2008.10.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