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요약> 긍휼을 베푼 사마리아 사람/ 누가복음 10:25-37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야기는 널리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그 의미가 분명한 비유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착한 행실을 많이 보이도록 독려하는 성경말씀으로 사용됩니다. 그렇지만, 이 비유의 배경을 무시하면 혹시라도 겉으로 보이는 선행만이 전부인 것처럼 오해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한 유대인 율법교사가 예수를 시험하려고 영생에 관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예수는 곧바로 되물었지요. “율법에는 무엇이라고 쓰여 있으며, 당신은 그것을 어떻게 읽고 있는가?”라고 말입니다. 율법교사는 자신 있게 신명기 6장 5절과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이라고 답변하였습니다. 예수는 “맞다”고 인정해주고 “가서 그대로 행하면 살 것이다.”고 말해줍니다.
신명기와 레위기의 해당 본문을 읽어보면, 우선 이 대목은 “영생”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바로 알게 됩니다. 그런데 율법교사와 예수 모두 그렇게 하는 것이 “사는 길”이라고 일치된 의견을 보였습니다. 여기서 대화가 끝날 법도 한데 끝나지 않습니다.
시험하려는 사람은 상대방을 엮을 때까지 포기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의로움을 증명하려고 다시 질문을 던집니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말입니다. 레위기를 잘 알고 있을 터이니 이것도 역시 예수를 시험하려는 질문입니다. 예수가 레위기에 나오는 이웃들, 즉 “동족에 대하여 억압, 착취, 불공정, 헐뜯기, 앙심품기, 원수갚기 등등을 하지 않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말해주었더라면, 대화는 끝났을지 모릅니다. 율법교사가 보기에 예수 역시 율법을 잘 안다고 인정할 수 있으니까요.
사실 신명기 6장 내용은 그 앞 5장이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5장에 십계명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을 잘 기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이론적인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잘 기키고 동족에게 못할 짓을 하지 않는 “실제적인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영생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잘 지키면서 세상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다 보면 사람들이 바라는 내세에서의 영생도 찾아올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이 질문의 진의를 알아차리고서는 태세전환을 합니다. 느닷없이 사마리아 사람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는 솔로몬 왕이 죽은 후 독립한 북 이스라엘 왕국으로 그 중심지가 바로 세겜입니다. 이 곳은 여로보암이 예루살렘에 대항해서 신전을 세운 곳입니다. 그러다 주전 8세기 앗시리아에게 정복당한 후, 여기에 이방인들이 강제로 이주되어 혼혈이 시도된 지역입니다. 그래서 정통 유대인들이 멸시하는 동네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이 유대 종교인들이 회피한 일을 선뜻 행동에 옮겼다고 비유를 드는 것은 앞에 있는 율법교사를 훈계하려는 의도가 담긴 것입니다.
2005년 가디안(Guardian)지에 실린 뉴스에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에서 12세 소년이 이스라엘 군에 의해 피살된 사건해설이 올라왔습니다. 소년의 이름은 아흐마드 카팁(Ahmad Khatib)입니다. 서안지구는 1967년 3차 중동전쟁 때 이스라엘이 요르단으로부터 빼앗은 땅인데, 팔레스타인들이 주로 사는 지역에 이스라엘 정착민들을 심고 높은 분리장벽을 설치한 곳입니다. 심한 분쟁지역이지요. 그런데 그 아이가 죽을 때, 부모는 평화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아이의 심장, 폐, 신장, 간 등등을 기증하여 6명의 이스라엘 사람에게 생명을 주었습니다. 엄마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 아이는 죽었다. 하지만, 다른 이에게 생명을 주었다.”고 말입니다.
강도를 만나 죽어가는 유대인을 보고, 동족인 종교인들은 피해갔는데, 그들이 멸시하는 사마리아인이 그 유대인을 살려 생명을 되찾게 해준 이야기는 그저 선한 행동, 자비를 베푼 행동으로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의미심장합니다. 아흐마드 소년의 경우가 똑같지 않습니까? 찢어진 부모의 심정에서 나온 엘레오스(eleos)는 단순히 “자비”라는 말로는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긍휼(compassion)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상대방의 고통에 공감하고 또 반대로 공감을 바라는 심정에서 나온 선행입니다.
어쩌면 소년의 목숨(psyche)은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 목숨이 죽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서 생명(zoe)으로 살아남았습니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라는 주님의 말이 커다란 울림을 줍니다.
2024년 7월 21일
홍지훈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