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제25대 무령왕릉
무령왕릉은 백제 웅진 도읍기에 왕과 왕족의 무덤인
송산리 고분군에 있다
송산리 고분군에는 7기가 있는데 돌방무덤인 5호분과 벽돌무덤인 6호분은 장마철만 되면 산 능선을 타고 흘러내린 물이 무덤
안으로 침수되어 문화재 관리국에서는 두 무덤 뒤쪽을 파서
배수로를 만드는 공사를 시작하였다
공사를 시작한지 1주일후인 1971년 7월 5일한 장비의 삽 끝에 벽돌이 발견되었고 이후 왕릉의 입구가 발견 되었습니다
백제무덤의 특징은 돌로 방을 만들어 안장하는 방식이라
입구만 찿아 들어가면 무덤 전체 도굴이 가능하고,
일제 강점기 도굴왕 가루베에 의해서 다 파해쳐지고 온전히
남아 있는 무덤이 없는데 이 무덤은 백회와 벽돌로 완전히 밀봉된 상태로 발견 되었습니다
발견 당시 장마철이라 호우가 내리기 시작하여 자정까지 배수로 공사를 하였다고 한다
다음날 위령제를 지내고 벽돌을 들어내자 하얀 연기가 나왔다
왕릉이 발견 되었다 하니 수많은 기자와 동네사람들이 몰려와
세밀히 진행되어야 하는 발굴 작업이 단 하루 만에 끝이 나는
우를 범했다
출토품은 108종 2900여점이며 12종목 17건이 국보로 지정 될 만큼 연대가 확실하고 문화재로서 가치가 높은 지석, 석수,
오수전, 금제 관식, 팔찌, 금제 뒤 꽃이, 금제 귀걸이 등등 많은
유물이 발견 되었으며 관은 일본 규슈지방에서 나는 수령300년
된 금송으로 만들어 졌다
지석 ; (국보 제163호)
지석이 발굴되어 백제 무령왕의 무덤임을 알 수 있었다
두장의 석판으로 크기는 41.5*35센티 두께 5센티이며 청회색
섬록암에 해서체로 글을 새겼다
죽은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날, 행적 등을 기록한 돌로
영동 대장군 백제 사마왕 (영동 대장군은 중국 양나라 고조에게서 받은 작호)이라 쓰여 있었다
무령왕의 성은 부여, 이름은 사마, 501년 동성왕의 뒤를 이어
40세에 왕위에 올라 523년 62세에 붕어하고 3년상을 치러기
위하여 2년3개월을 가매장 한 후 왕릉에 안치하였으며 묘지와
간지도, 매지권을 만들었으며 526년 왕비가 죽자 3년상을 치런 후 529년 왕비의 묘지도 새겼다
*** 매지권 ; 무령왕이 토지신에게 돈 1만닙을 주고 땅을 산다는 문서이고 그 위에 중국 양나라에서 통용되는 돈을 올려 놓았다
석수 ; (국보 제162호)
잡귀를 물리치기 위하여 무덤 속 관 앞에 세우는 돌짐승이다
높이는 30센티, 길이는 47센티이며 입에는 붉은색을 칠하였으며
멧돼지 같기도 하고 뭉퉁한 아가리를 벌린 것이 코뿔소 같기도 한 기이한 모습이며 도망가지 못하게 한쪽다리는 뿌질러 놓았다
금제 관식 (왕과 왕비 국보 제 154호, 155호)
왕 ; 금판에 인동, 당초, 타오르는 불꽃에 127개의 영락을 금실로 꿰어 달아 놓았다
왕비 ; 7개의 연꽃잎이 바닥으로 늘어진 모습이며, 그 위에 꽃을 꽃은 꽃병이 조각되었고 영락은 없다
금제 뒤꽃이 ; (국보 제159호)
비녀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날렵한 제비의 모습이다
금제 귀걸이 ; (국보 제156호)
길이 8.3센티 무게 86그람 (23돈)
우아함과 정교한 금 세공기술을 자랑 한다
공산성 (사적 제12호)
처음에는 웅진성, 고려 초에는 공산성, 조선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이라 하였다
성의 둘레는 2.3Km 이며 석축이 1.81Km, 토축이 0.39Km
상단이 70센티이다
475년 백제 문주왕때 부터 시작하여 538년(성왕16년) 사비로 옮기기 전까지 64년 동안 백제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인
공주를 보호하기 위하여 축조된 성이다
서쪽에는 금서루 (백호, 백색깃발), 동쪽에는 영동루 (청룡 청색), 남쪽에는 진남루 (주작 붉은색), 북쪽에는 공복루 (현무 흑색)
깃발이 있으며
송산리 제6호 고분벽화의 사신도를 재현한 깃발이다
성내에는 만하루, 왕궁지와 임진왜란 때 금산 전투에서 활약한
영규대사와 승병의 합숙소인 영은사가 있다
인조 때 1624년 이괄의 반난을 피해 왕이 공주로 피신을 왔다
피난중 공주시 우성면 목천리 근처 임씨댁에서 콩고물에 묻힌
떡을 진상하였는데 왕은 시장하여 몇개나 먹었다
왕이 떡 이름을 물었으나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왕이 떡은 어디서 만들었소 하고 물으니 임씨댁에서 만들었다고 말했다 왕은 참 그 맛이 절미하구나하여 임절미가 되었고 시간이 지나 인절미가 되었다
또 공주로 피난을 와 6일간 공산성에서 두 나무가 서있는 곳에서 반란이 진압되기를 기다리며 머물렸다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두 나무에게 정3품의 벼슬을
주고 한양으로 올라갔고 이때부터 쌍수산성이라 하였다
1734년 (영조10년) 이수향이 관찰사로 내려와 인조를 기리기
위하여 두 나무가 서있던 자리에 쌍수정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