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金濤)의 자(字)는 장원(長源)이고, 연안부(延安府) 사람이다. 공민왕(恭愍王) 때 과거에 급제하여 전주사록(全州司錄)에 보임(補任)되었고 다섯 번 옮겨 정언(正言)이 되었는데, 어떤 일을 간언하였다가 파직되었다. 홍무(洪武) 4년(1371)의 제과(制科)에 합격하여 동창부(東昌府) 구현승(丘縣丞)에 임명한다는 칙서(勅書)를 내렸는데, 김도가 중국어[華語]를 알지 못하고 또 늙은 부모를 모셔야한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본국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자 조서(詔書)를 내려 이를 허락하였다. 〈그가〉 돌아오자 왕이 측근들에게 말하기를, “우리나라 사람으로 제과에 급제한 자가 참으로 드문데 하물며 이 사람은 이미 과거에 급제하고 또 황제의 칙명으로 관직까지 받는 은혜를 입어 이름을 일시(一時)에 떨쳤으니 우리나라에도 인재가 있다는 것을 천하에 알렸다. 그가 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하여 예(禮)로 영접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구나.”라고 하였다. 마침내 우사간(右司諫)·예문응교(藝文應敎)로 발탁하였고, 여러 번 옮겨 성균사예(成均司藝)가 되었다. 왕이 손수 ‘김도장원나복산인(金濤長源蘿葍山人)’이라는 8글자를 써서 하사하였다.
〈김도는〉 우왕(禑王) 때 우사의(右司議)로 임명되었고 이인임(李仁任)과 지윤(池奫)의 사주를 받아 삼사우사(三司右使) 김속명(金續命)을 탄핵하여 유배시켰다. 〈이어〉 좌부대언(左副代言)으로 전임되었으며 지신사(知申事)로 승진하여 밀직제학(密直提學)에 임명되었다. 김도가 홍중선(洪仲宣) 편에 붙어 인물들을 논의(論議)하였더니 이인임(李仁任)이 그를 미워하게 되었다. 마침 김도의 가노(家奴)가 연경궁(延慶宮) 옛 터의 돌을 훔쳤다가 대리(臺吏)에게 잡히자 이인임이 대관(臺官)을 사주하여 불경죄로 탄핵하여 국문(鞫問)하게 하였다. 환관(宦官) 이득분(李得芬)이 김도와 연고가 있었으므로 우왕에게 아뢰어 면관(免官)시키는 것으로 그치게 하였다. 헌사(憲司)에서 다시 멀리 유배시키기를 요청하자 이득분이 또 그 문서[狀]를 유보시켰다.
양백연(楊伯淵)의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김도도 붙잡혀 옥에 갇히게 되었고 〈고문으로〉 기절하였다가 다시 소생한 적이 3번이었다. 마침내 억지로 자백을 받아 그를 죽여서 머리를 저자에 내다 걸고 그의 집을 적몰(籍沒)하였다. 김도가 처음에 옥관(獄官)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는 것은 아깝지 않지만 한 점 잘못도 없는 이를 죽이면 도리어 재앙을 받을 것이다.[反受其殃]”라고 하였더니, 옥관들이 모두 두려워하면서 그의 원통함을 알았다. 그가 죽자 문생(門生)이었던 진사(進士) 10여 명이 문밖까지 따라와서 시체를 호위하였다. 이종(李悰)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시체를 안고 냇물에 들어가서 피를 씻기고 자신의 옷을 벗어 입히고 대자리로 만든 그물로 그의 머리를 둘러싸서 매단 다음 두 번 절하고 가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의롭게 여겼다. 아들은 김자지(金自知)·김여지(金汝知)·김치지(金致知)·김학지(金學知)이다.